불청객The Gatecrasher (본편+외전 합본)
<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 제릴 자우어 연인 드림
들어가기에 앞서…
물푸울 로맨스판타지 소설 <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의 2차 창작(드림 소설)입니다. 공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소장본 작업을 위해 종이책에 맞춘 편집본으로, 모바일에서 보시기에는 불편할 수 있습니다.
원작의 외전1. 세계관 최강자까지의 내용을 포함합니다. 스포에 주의해주세요.
본편
나는 갓 내어진 따끈한 음식 앞에서 주린 배를 붙잡고 셀프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오븐 통구이, 분명 맛있겠지. 어떤 새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고기 속까지 간이 잘 배어 부드럽고 짭쪼롬할 것이다. 곁들이는 사과와 버터, 꿀은 또 어떻고? 잘 구워진 사과는 그것만으로도 달콤하겠지만 버터나 꿀에 찍어 고기와 먹으면 그 맛이 더욱 별미일 테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음식을 코앞에 두고도 포크 하나 들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조금만 참자. 음식에 눈이 멀어 독살당한 로판 여주가 될 순 없으니까. 무어 경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가 나에게 음식을 조달해주기로 했으니까. 이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나의 잘생긴 약혼자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이길래 이러느냐면…….
얼마 전 기말 리포트를 완성하느라 이틀 밤을 새우고 기절했던 나는, 낯선 세상의 낯선 몸에 빙의해 깨어났다. 이 몸, ‘로제 오베르’는 병약한 부잣집 아가씨로, 끝내주게 좋은 집에서 끝내주게 좋은 식사를 하며 끝내주게 잘생긴 약혼자와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대로 고생 끝 행복 시작, 하루 아침에 석유 부자가 되어 탄탄대로를 걸을 줄 알았건만. 함께 사는 인물이라고는 양어머니와 양언니…… 아니, 오빠…… 아, 아니. 양언니,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사용인들뿐인 이 저택에서 누군지 모를 상대에게 독살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의심가는 상대는 단연 양어머니 마담 자우어와 양언니 제릴 자우어였다. 내가 죽으면 나의 재산은 법적 보호자인 마담 자우어에게 전부 상속되니까. 사용인 중 몇이 그들을 따르는지, 혹여 그들이 범인이 아니라면 사용인 중 누군가가 범인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약혼자, 무어 경밖에 없었다.
그는 내 말을 의심 없이 믿어주었으며, 내가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했음을 이해하고 나를 위해 외부에서 식사를 조달해주기로 약속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미 아사해버렸을지도 모른다.
…….
…….
그래서, 무어 경은 대체 언제 오는 거지?! 더 기다렸다가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해 맛 좋고 즐거운 저녁 식사를 해버릴 것만 같았다. 차라리 식당을 나가서 기다릴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미 이곳은 요리 냄새로 가득 차 있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 불빛에 더욱 음식이 맛있어 보이는 것도 있다. 말하자면 나는 후각과 시각, 양쪽에서 공격받고 있던 셈이다. 이곳을 벗어나서 찬 바람을 좀 쐬자. 결심하고 식당 문을 열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어린 사용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식사를 마치셨습니까? 아니, 음식에 하나도 손대지 않으셨군요.”
“아, 그게.”
“혹시 음식에 무언가 문제라도……?”
사용인은 당장이라도 주방에 달려갈 기색이었다. 지금 소란을 피워봤자 독살 범인에게 도움만 줄 뿐이다. 나는 미리 준비해둔 변명을 꺼냈다.
“지금 하늘이 예쁘길래 정원에 나가서 먹으려고. 혼자 먹으려니 심심한 거 있지?”
산책하면서 장미 정원을 둘러볼 때, 분명히 정원 한 켠에 예쁜 테라스가 마련되어 있는 것을 봤다. 그곳을 떠올리며 설명하자 사용인이 납득한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럼 음식을 옮겨드리겠습니다. 다른 하녀를 시켜 금방 숄도 가져오겠습니다.”
“고마워!”
나는 곧 하녀가 들고 온 예쁜 숄을 두르고 장미 정원을 바라보며 티타임을 즐길 수 있게끔 조성된 예쁜 테라스에 앉아 무어 경을 기다리는 모습이 되었다. 앞에는 여전히 요리가 놓여 있었지만 확실히 아까보다는 견딜 만했다. 포크로 애먼 사과를 조각내는 데에 집중하다가, 문득 어떤 기척을 느꼈다. 무어 경이 온 것일까? 고개를 들었지만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응?
파사삭. 무성히 자란 잎사귀를 헤치는 소리가 들렸다. 무어 경이라면 저런 곳에서 나타날 리가 없는데. 누구지? 혹시 정원사일까? 두 눈을 크게 뜨고 소리가 난 쪽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곧 장미 풀숲 사이로 무언가가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저게 뭐지? 삽살개?’
덩굴 사이로 드러난 것은 웬 회색 털 뭉치였다. 살아있는 그것은 몇 번 고개를 털더니 정원사가 애써 가꿨을 장미 덩굴을 마구 밀치고 나타나 내 앞에 섰다.
“어, 누구세요?”
“…….”
온전한 모습을 보니 개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얜…… 사람이었다! 치렁치렁,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더럽게 엉겨 붙은 긴 머리카락이 땅에 끌릴 듯 길게 내려왔다. 얼굴은 보이지도 않아서 대체 어디가 앞인지 알 수 없었고, 옷은 아주 지저분했으며, 그 털 뭉치 같은 거대한 머리카락 사이로 뼈다귀처럼 깡마른 팔다리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일단 얘가 이 저택 사람이 아닌 것은 알겠다. 여길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지? 저택 앞에는 경비가 있을 텐데. 개구멍이라도 찾은 건가? 좌우간 조심스럽게 걸었던 내 말은 허공에 허무하게 흩어졌고, 저 털 뭉치는 나를 (아마도)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일단 조심스럽게 한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인사 겸, 여길 보고 있는 게 맞나 싶어 확인 겸.
얼굴이 제대로 보이질 않으니 뭘 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잠깐. 혹시 이걸 보고 있는 건가? 번뜩 머리를 스치고 간 생각을 따라 나는 오븐 통구이가 놓인 접시를 슬쩍 밀었다. 그러자 털 뭉치의 시선이 명백히 그 접시를 따라 이동했다. 아니, 눈은 안 보이지만.
“이게 먹고 싶은 거니?”
“…….”
털 뭉치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서 들린 작은 꼬르륵 소리를 똑똑히 듣고 말았다.
“음……. 어떡하지.”
손도 대지 않은 것이니 먹어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음식에 독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새 음식을 내오라고 하자. 아니면 무어 경이 가져온 음식을 나누어 먹여도 되고. 이건 안 돼, 그런 의도로 테이블 위에 놓인 접시를 들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그것을 허락으로 받아들였는지, 그는 내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자리에 털퍼덕 주저앉아 손으로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으악, 잠깐만!”
“…….”
놀라 큰 소리로 만류했지만 털 뭉치는 이미 뜯어낸 새고기를 와굿, 물어뜯은 뒤였다. 저기가 얼굴이었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내 시선을 고기에 고정하던 털 뭉치는 음식 맛에 놀랐는지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지저분한 머리카락 사이로 어둡고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털 뭉치는 내가 말릴 새도 없이 더 빠른 속도로 고기를 입 안에 욱여넣기 시작했다. 마, 말려야 하는데……! 너무 맛있게 먹어서 도무지 말릴 수가 없었다. 맛있지, 그 심정 이해해……!
코를 접시에 박을 듯이 얼굴을 내리고 고기를 뜯는 데 열중하는 털 뭉치 아이.
‘멀쩡…… 하네? 독이 없었나?’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걸 들켰나? 독살 의심에 관한 내용은 무어 경에게만 말했다. 그럼 그냥 이번엔 독이 없었던 걸까. 매번 독을 넣는 것보다 독이 들어간 음식을 멀쩡한 음식과 섞어 내주는 게 의심을 피하기 좋으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어느새 털 뭉치는 고기를 거의 다 먹고 양념이 묻은 손을 접시 끝에 닦아내고 있었다.
“배부르구나? 손 닦을 만한 게 없는데, 잠시만 기다려봐.”
하필 이럴 때 손수건을 챙겨 나오지 않았다. 내 드레스에 닦게 할 수도 없는 노릇. 저택으로 데리고 가서 씻겨야겠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일어서서 털 뭉치를 불렀다.
“얘, 저 저택이 내 집이거든? 들어가서…….”
“로제 양?”
“엇, 무어 경!”
타이밍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정원을 지나치려던 무어 경이 나를 불렀다. 내 아는 척에 털 뭉치가 고개를 돌려 무어 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이런 곳에? 절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그보다 그건 대체.”
의아한 기색이던 무어 경이 털 뭉치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
“어서 와요, 무어 경!”
하지만 나는 그런 걸 기다려줄 수 없었다. 무어 경을 보자 애써 잊었던 배고픔이 다시 강렬히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 이런. 많이 시장하셨죠.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얼른 들어가죠.”
“네! 아, 잠시만요. 이 아이를 사용인에게 맡기고요.”
나는 급히 근처에서 대기하던 사용인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로제 아가씨.”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일단 이 아이 좀 데리고 들어가서 씻겨줄래?”
“아, 네. 알겠습니다.”
사용인은 가타부타 말을 얹지 않고 얌전히 절하더니 털 뭉치를 데리고 먼저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우리도 얼른 가죠!”
“……네, 로제 양.”
눈을 가늘게 뜨고 털 뭉치를 지켜보던 무어 경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에스코트했다. 배고파, 배고파! 얼른! 방금 코앞에서 고기 먹방을 봤더니 더욱! 그러나 무어 경이 사 온 것은 새 고기 통구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빈약한 샌드위치였고, 나는 무척 억울해졌다.
빈약한 저녁 식사 대신 무어 경의 아름다운 얼굴로 요기를 마친 이후. 똑똑. 잘 채비하던 내게 누군가 찾아왔다.
“로제 아가씨, 아까 말씀하셨던 대로 아이를 씻겼습니다만.”
“아, 들어와!”
그랬었지 참! 나는 박수를 한 번 짝 치고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내 방에 웬 프랑스 인형이 들어왔다.
“어, 누구세요?”
나는 아까 했던 질문을 다시 한 번 얼떨떨하게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사용인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문 옆에 섰고, 나는 주춤주춤 아까의 털 뭉치…… 아니, 인형에게로 다가갔다. 아까 그 털뭉치가 이 아이라고?
엉킬 대로 엉켰던 부분을 다 잘라낸 것인지 머리카락이 좀 짧아져 있었다. 그래도 엉덩이까진 올 듯싶었지만. 이제 보니 머리카락이 희게 바랜 것 같은 잿빛이었다. 먼지가 묻어서인 줄 알았는데, 원래 그랬던 거구나.
하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변화가 아니었다. 핵심은 바로 머리를 정리하며 그 속에 숨어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흰 조약돌처럼 작고 선명한 얼굴. 덤불 속에 숨은 산딸기 같던 눈동자가 이제는 훤하게 드러나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커다란 눈동자, 그에 비해 작고 오뚝한 코, 얌전히 다물린 입. 뺨과 입술에는 혈기가 돌아 은은한 분홍빛이 올라오고 있었다.
동시에 저런 이목구비가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딱딱한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어 정말로 살아 숨 쉬는 인간이 아닌 인형이나 마네킹처럼 보였다. 표정을 제외하면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어딘가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 틀림없이 눈이 번쩍 뜨이는 미인이었다.
이런 얼굴을 머리카락으로 숨기고 있었다니! 사실 씻기라고 말했던 건 양념이 묻은 손 이야기였지만, 아까 전의 나를 칭찬해주고 싶어졌다. 이 세계는 결코 미남 미녀만 득시글거리는 곳이 아니다. 무어 경을 처음 마주했을 때, 그 사실을 진지하게 의심한 적도 있지만 곧 내 원래 세계나 여기나 거기서 거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어 경의 그 외모는 틀림없이 남주인공 보정…… 이 세계의 특별한 인물, 또는 있을지도 모르는 원작 소설의 주연이라는 증거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런 무어 경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미모라니.
아마로 로판 여주인공일 나의 앞에 불쑥 나타난 정체 모를 미소녀. 지저분한 행색 속에 가려져 있었지만 나를 만나 그 미모가 세상에 드러났다. 이건 즉…….
‘중요한 조연 캐릭터구나!’
틀림없었다. 이런 식으로 등장하는 클리셰 캐릭터도 많지. 여주인공의 충실한 시종이라든가, 절친한 친구라든가. 아니면 아예 인간이 아니어서, 여주인공에게 조력하는 요정이나 정령인 경우도 있다. 아직 이 세계에 요정이나 정령 같은 존재가 있는지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저 외모라면 확실히 인간이 아니라는 가설에도 힘이 실렸다. 이런저런 생각에 휩싸인 나를 끔뻑끔뻑 바라보던 아이가 돌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
말을 할 수 있어? 게다가, 목소리가 생각보다 성숙했다. 깜짝 놀라 다시 아이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봤다. 그리고 내 생각보다 더 키가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굴은 아직 앳되었지만, 나보다 어려봐야 겨우 두세 살 어릴 법했다. 아, 아이가 아니었다고?! 당황으로 얼룩진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눈앞의 존재가 마저 말을 이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인가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겉보기에는 평범한 인간, 그것도 어디 귀한 집 아가씨 같은데, 씻기기 전 모습을 생각하면 그건 아닌 것 같고. 저택에 무단침입한 배짱 좋은 거지를 일단 씻기고 보니 우연히도 대단한 미소녀였다, 그런 운 좋은 전개일 리도 없고.
침착하게 생각해보자. 이곳은 로맨스판타지 세계다. 어떤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나는 여주인공 몸에 빙의한 듯싶고, 남주는 틀림없이 세계관 최강자급 미모를 지닌 내 약혼자 무어 경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묘한 눈동자에 홀릴 것만 같다. 나는 나이도 배경도 심지어 종족까지도 그 무엇 하나 섣불리 유추해낼 수 없는 눈 앞의 존재를 보며 생각했다. 설마 진짜 정령인 거 아냐?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소녀, 미뉴에트 자코는 요정이나 정령 같은 게 아니었다. 순도 100% 인간. 뭐, 신비와 전혀 관계없는 평범한 인간이냐면 그것도 아니었지만.
자코 부부의 어린 딸. 그녀의 기억은 숲에서 시작한다. 산짐승도 가까이 오지 않는 깊디깊은 숲속, 그녀는 그곳에서 태어나 수많은 사람과 함께 자랐다. 숲속의 군락은 옛 영주 중 하나를 모시는 종교 집단이었다. 그들은 옛 영주를 ‘천 마리 아이를 거느린 검은 염소’ 내지는 ‘위대한 어머니’라고 부르며 온 마음 다해 떠받들었다.
그러나 옛 영주는 단 한 번도 그들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고, 영주의 관심을 끌고 싶어 안달이 났던 교단의 행동은 점차 더 대담해지고 사악해졌다. 애먼 사람이나 짐승을 납치해 주술의 제물로 써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납치된 사람 중 일부는 완전히 미쳐버려 교단의 새로운 신도가 되었다. 과거 자코 부부가 그랬던 것처럼.
미뉴에트 자코는 그 틈새에서 아무런 이상함도 느끼지 못하고 살다가, 어느 날 자신의 세계에 도래한 멸망을 목격했다. 영주를 부르고자 시행했던 거대한 의식이 실패한 탓이었다. 미뉴에트 자코를 제외하고 그 숲에 있던 모든 이가 찰나에 절명했다. 그녀는 자신이 왜 살아남았는지조차 알지 못하다가…… 자신을 살려준 존재의 말을 따라 숲을 벗어났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녀는 그곳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지만, 이미 지난 일을 돌이킬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 뒤로 미뉴에트 자코는 반쯤 잠든 것처럼 멍한 정신으로 살았다. 원래도 그다지 인식이 명확한 편은 아니었으나…….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 깊은 곳에 내재된 본능을 따라 걷고 걷고 또 걷다가, 어느 날 장미 덩굴이 아름답게 우거진 거대한 저택에 도달했다. 담을 넘을 생각은 없었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그저 무심히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나 미뉴에트는 어째서인지 담을 넘어 정원의 중심에 다가섰다.
음식 냄새에 이끌린 것일까? 그렇다기엔 접시 위에 놓인 고기를 보고 나서야 허기를 인지했다. 허기나 갈증 같은 것에 관심 기울이지 않고 살아온 세월이 몇 년인데,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몸 안에서 울리는 고동 소리를 들었다. 원래는 음식이 아니라 그 옆의 강렬한 존재감을 좇아 왔던 것 같은데…… 미뉴에트는 오랜만에 입 안에 넣는 음식의 맛에 정신이 팔려 그만 그 사실을 순간 홀딱 잊고 말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 자신을 불러들인 것인지 물어보려 했지만 그때엔 이미 늦어, 미뉴에트는 사용인을 주춤주춤 따라가 향기 나는 물에 몸을 푹 적실 수밖에 없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게 얼마 만이지? 추레하기 짝이 없는 꼬락서니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미뉴에트는 숲을 빠져나온 뒤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몸을 문지르는 부드러운 거품이나 머리를 몇 번이나 비벼 빨아도 나오는 구정물, 배 속을 가득 채우는 기분 좋은 포만감이 무척 낯설었다. 텅 빈 속에 너무 기름진 것을 넣으면 탈이 날 텐데. 미뉴에트는 정말, 정말, 정말 오랜만에 제 몸을 걱정해 보았다. 지금이라도 토해낼까…….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곧 고쳐먹었다. 아직도 혀끝에 남은 고소한 기름 맛에 절로 입맛이 다셔졌다. 그런 음식을 토해내기엔 너무 아까웠다.
아무리 해도 엉킨 부분을 어찌할 수 없어 가위로 머리카락을 썩둑썩둑 잘라내고 나서야 미뉴에트는 사람다운 꼴이 되었다. 따끈하게 데워진 수건으로 온몸의 물기를 닦고 머리를 말렸다. 사용인들의 노고에 보답이 있는지, 미뉴에트의 머리카락은 이제 걸리는 것 하나 없이 부드럽게 빗겼다.
이쯤 되어 미뉴에트는 아까 자신이 왜 이 저택에 담을 넘어가며 들어왔는지 기억해냈다. 고개를 들어 저택 내부를 둘러보면, 저 아래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죽음의 기운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미뉴에트가 살던 숲과 비슷한 느낌. 아마도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탁한 핏빛 눈동자에 환한 불빛이 묽게 맺혀 어룽졌다. 미뉴에트의 분홍빛 입술 새로 만족스런 한숨이 새어 나왔다. 미뉴에트 자코는 분명히, 이곳에서 차근히 진행되고 있는 거대한 인신 공양 의식을 느꼈다. 알면서도 찾아왔다. 이번에야말로 안식을 얻기 위해서. 이런 곳에서 죽음을 맞이해봤자 영혼이 끔찍한 고통 속에서 영원히 몸부림치는 결말밖에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이번에야말로…….
그래서 미뉴에트 자코는 로제 오베르를 보는 순간 그런 말을 꺼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어?”
순진한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든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뉴에트는 커다란 두 눈을 깜빡거리며 로제 오베르를 무례할 정도로 빤히 응시했다. 아마도 그녀의 생각이 맞는다면, 눈앞의 이 여자가 이 저택의 수장이었다. 저택의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압도적인 존재감. 모든 것을 지워버릴 듯이 맥동하는 강렬한 생명력. 그것을 온몸으로 느낀 미뉴에트 자코는 눈앞의 여자가 이 저택의 주인이자 이 의식을 거행하는 주체라고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정체가 뭘까. 숲에 살 적 그녀가 따랐던 교주처럼, 옛 영주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맹목적이고 충실한 신도일까? 늘 멍했던 정신이 눈앞의 여자를 만나자마자 어째서인지 꽤 명료해졌다. 상쾌한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추측을 이어가며 미뉴에트는 상대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편 로제 오베르는 난데없는 질문에 무어라 답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저 사람의 정체가 뭐든 간에, 일단 시작은 평범하게 가는 게 좋겠지?’
괜히 설레발치면 열렸던 ‘친구 사귀기’ 루트도 다시 닫히는 법이다. 로제는 태연한 척 연기하며 가볍게 자신을 소개했다.
“로제 오베르…… 음, 로제 오베르예요. 이 저택의 둘째 딸이랍니다.”
아까는 반말이 잘만 나왔던 것 같은데, 제 생각보다 나이가 그리 어리지 않다는 것을 깨닫자 더는 나오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 세계에 와서 자기소개를 하는 것은 처음 아닌가? 새로운 이벤트를 겪고 있다는 생각에 로제가 조금 들떴다.
“당신은?”
“…….”
로제의 대꾸를 듣고 입술을 꼭 다물었던 미뉴에트가 되돌아온 질문에 잠시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미뉴에트. 미뉴에트 자코예요.”
“미뉴에트! 예쁜 이름이네요!”
로제가 손뼉을 짝 치며 활짝 웃었다. 과연 누가 들어도 로판 주조연 같은 이름이었다. 이거 월척이구나! 요정이나 정령이 아니더라도 이건 틀림없이 주조연 등장 이벤트다. 설탕 공예 인형처럼 희게 반짝이는 미뉴에트의 이목구비를 훔쳐보며 로제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 당신은 이곳의 주인이 아닌 건가요?”
“네?”
이곳의 주인이냐고? 로제가 고개를 살포시 기울였다. 오베르 저택은 현재 마담 자우어가 총관리를 맡고 있다. 그러나 저택의 주인 자체는 로제 오베르로, 그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만 전 주인의 유서에 따라 마담 자우어가 맡은 것뿐이었다.
‘그걸 물어보는 걸까? 아, 혹시 오래된 저택에 깃든 정령? 그런 클리셰인가?’
그런 것이라면 저택의 주인을 묻는 이유도 이해가 간다. 로제 오베르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자신을 척 가리켰다.
“네. 제가 주인입니다.”
“역시…….”
마담 자우어, 미안합니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눈앞의 미소녀가 저택의 정령이라는 설에 마음이 기운 로제는 그런 존재가 보통 저택의 주인 한 사람과만 계약을 맺는다는 클리셰를 떠올렸다. 정령의 도움을 받아 목숨의 위협을 물리치는 것도 나름대로 로판다운 전개지. 혼자 납득한 로제가 근심 한 점 없는 얼굴로 밝게 미소 지었다. 아직 정령이라고 밝혀진 것도 아닌데 혼자 너무 신났나?
미뉴에트는 그 미소를 유심히 살폈다. 역시 이 여자가 이 저택의 주인, 즉 이 거대한 의식의 주체였다. 미뉴에트는 입을 몇 번 달싹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저기, 미뉴에트도…… 이곳에서 함께할 수 없을까요?”
의식에 참여하고 싶다. 어렵게 말을 꺼냈지만 미뉴에트는 이 부탁이 받아들여질 확률이 낮음을 잘 알았다. 이런 위험한 의식은 아주 사소한 비틀림만으로도 모든 것이 무너진다. 미뉴에트는 아직도 그날 숲에 비처럼 내렸던 핏물이 눈을 감으면 생생히 그려졌다.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도 모를 낯선 이가 대뜸 은밀히 진행되는 주술에 함께하고 싶어 한다니, 받아들이는 편이 더 이상했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아도 초조했던 미뉴에트는 로제가 미처 대꾸하기도 전, 먼저 필사적으로 자신의 쓸모를 눈 앞에 들이밀었다.
“미뉴에트는 할 줄 아는 게 많아요. 이렇게 보여도 평범한 인간과는 다르니까…… 시키시는 것이라면 뭐든 할게요.”
주먹을 꼭 쥔 미뉴에트는 숨도 쉬지 않고 재빠르게 말했다. 동그란 눈을 깜빡깜빡 뜨며 미뉴에트의 말을 듣던 로제가 문득 손을 뻗었다.
“그러니까 내쫓지 말…….”
“쉿.”
로제의 곧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미뉴에트의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미뉴에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 모습을 본 로제의 분홍빛 입술이 유려하게 휘어졌다.
“물론 그래도 되죠!”
“……!”
정령 계약 이벤트 떴다! 로제는 등 뒤로 숨겨둔 다른 손으로 불끈 주먹을 말아쥐었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고 했지, 분명? 인간과 같은 생김새, 동시에 절대 인간 같지 않은 미모,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고 공언한데다 특별한 힘을 지녔다고 암시하는 듯한 저 말……. 그렇다면 틀림없이 정령이었다. 로제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더했다. 역시 여긴 로판 소설 속이었어!
말이 조금 두루뭉술하지만 이것조차 정령다웠다. 혹여 미뉴에트의 말이 사용인에게 들릴까 후다닥 막긴 했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충분히 알았다. 내쫓지 말아달라니, 나보다 여기서 훨씬 더 오래 살아왔을 정령을 내쫓을 리 없지 않은가. 로제는 미뉴에트를 안심시키기 위해 눈을 활짝 접어가며 친근하게 웃어보였다.
“일단, 어머니가 돌아오실 때까지는 제 손님인 걸로 해둘게요. 하지만 이후에는 제 어머니, 마담 자우어께 허락을 맡아야 해요.”
“…….”
“여기서 계속 모습을 드러내고 생활할 거라면요.”
뒷말은 사용인에게 들리지 않게끔 하기 위해 거의 속삭이는 투였다.
저택 주인이 그런 것 하나 마음대로 못 해? 너 주인이 아니구나! 감히 나에게 거짓말을! ……이라고 하면서 계약을 해지하는 건 아니겠지. 순간 든 불안감에 상대의 손을 꼭 잡은 로제는, 미뉴에트가 아무렇지도 않아 하자 깊게 안심했다.
“마침 어머니가 잠시 외출하셔서…… 돌아오시면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그때까지 편하게 있어요.”
“네.”
“그나저나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건데, 그 옷은 어떻게 된 건가요?”
“옷?”
로제가 미뉴에트의 옷차림을 가리켰다. 미뉴에트는 아무 무늬도 없는 밋밋한 흰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투박한 생김새가 저택의 메이드들 옷차림보다도 못했다. 그제야 문 옆에 얌전히 기립해있던 사용인이 입을 열었다.
“손님의 사이즈에 맞는 옷이 없어, 저택에 남아있던 자투리 천을 급히 바느질했습니다.”
“아아…….”
“손님을 모시는데 대처가 미흡해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옷을 공수해올까요?”
아까까지는 손님이 아니었으나 지금부터는 로제 오베르의 손님이다. 그렇다면 그에 마땅한 대우를 해야 했다. 그러나 로제는 미뉴에트에게 ‘옷이 불편한가요?’라고 한 번 물어본 뒤, 미뉴에트가 고개를 젓자 사용인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됐어. 귀한 손님이니 내가 직접 고를게. 이따 의상점의 카탈로그를 가져다 줘.”
“알겠습니다.”
사용인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로제는 그렇게 되었으니 조금만 기다려요, 말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작년 워터멜론 실시간 차트에 올랐던 어떤 후크송의 중독적인 후렴구였다. 내 옷을 고르는 것도 좋지만 인형 옷 입히기도 그에 비견되게 재미있는 법. 보기 드문 미소녀에게 이것저것 예쁜 옷을 잔뜩 입혀줄 생각에 신이 난 로제는 노래를 멈출 줄 몰랐다.
“그러니까…… 로제 오베르 님.”
“로제라고 불러요!”
“로제……. 부디 미뉴에트를 아까처럼 편하게 대해주세요. 로제는 주인이시니까.”
“아, 그래도 되나요? 좋아, 미뉴에트!”
“네. 미뉴에트예요.”
사용인들의 얼굴도 많이 익혔고 약혼자인 무어 경과도 사이좋게 지내고 있지만, 역시 조금은 말동무가 필요했나 보다. 편하게 말하라는 미뉴에트의 제안에 로제는 정령과 금세 친해진 것 같아 유쾌해졌다. 모든 것이 착착 맞물려간다. 로제는 입 안으로 미뉴에트의 이름을 몇 번 되뇌었다. 미뉴에트 자코, 미뉴에트 자코. 가족과 무어 경을 제외하고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타인의 이름이었다.
“배고파.”
퀭한 눈으로 밤을 새우던 로제가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앗, 혹시 깬 건 아니겠지? 옆을 돌아보면 뒤척임 한번 없이 작은 숨소리와 함께 이불이 오르락내리락거렸다. 다행이다, 깊게 잠들었나 보네. 혹시 숨막히진 않을까 싶어, 로제는 미뉴에트가 머리끝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살짝 내려 주었다.그럼 조용히 후다닥 다녀오자…….로제는 랜턴과 함께 창문을 통해 방 밖으로 나갔다.
결과적으로는 정원에서 길을 잃거나 그렇게 찾아도 없던 정원사를 발견한다거나 약혼자인 무어 경을 만난다거나 하는 일로 예상보다 훨씬 늦게 들어왔지만, 다행히 미뉴에트는 도중에 깨는 일 없이 로제가 돌아올 때까지 푹신한 침대에서 꿀잠을 자고 있었다.
아주 늦은 시간에 잠든 것이 무색하게 로제는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지난밤 무어 경과 약속한 저택 탐험을 위해서였다.
‘저택도 소개해 줄 겸, 미뉴에트도 데려갈까?’
미뉴에트는 밤 내내 그랬던 것처럼 몸을 둥글게 말아 자고 있었다. 로제가 미뉴에트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거나 어루만졌지만 미뉴에트는 일어날 기색이 없었다.
“피곤했나? 하긴 정령 계약 이벤트에는 체력이 소모된다는 전개도 많으니까.”
그런 것치고 로제 본인은 무척 쌩쌩했지만, 로제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생각해보면 정령이니까 나보다 저택을 더 잘 알지도?”
로제의 발걸음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이어졌다.
‘에이, 됐어. 관광도 아니고 탐험인데, 가이드 없이 직접 해야 재밌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난 로제는 1층과 2층을 둘러보고, 3층 탐험부터는 훗날의 재미로 두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미뉴에트는 쿨쿨 잠들어 있었는데, 로제가 한참을 깨우고 나서야 겨우겨우 눈을 떴다.
“미뉴에트, 그냥 잠이 많은 거였구나.”
“…….”
“앗, 또 잠들면 안 돼!”
귀엽긴 하지만! 침대에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조는 미뉴에트를 간신히 깨우던 로제는, 미뉴에트의 눈이 말똥해질 때쯤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아침을?”
“예. 제릴 아가씨께서 함께 아침 식사를 들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됐다. 미뉴에트, 이참에 너도 같이 가자. 제릴이라고 내 오빠…… 아니, 의붓언니가 있는데, 그 사람에게 널 소개해야지.”
미뉴에트와 함께 몸단장을 마친 로제는 희희낙락 질문 목록과 미뉴에트를 소개할 말을 속으로 고르며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제릴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곧 음식이 하나둘 서빙되고, 제릴은 사용인들을 전부 내보냈다. 그러자 식당에 남은 것은 제릴과 로제, 미뉴에트뿐이었다.
그런데 제릴은 음식에 손을 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로제는 그의 반응에 당황해 선뜻 음식에 손을 뻗지 못하고 두 눈을 굴렸다. 질문할 거리도 많고 미뉴에트도 소개해야 하는데, 왜 안 먹지. 멀뚱멀뚱 제릴을 바라보던 로제에게 그녀 옆에 앉아있던 미뉴에트가 슬쩍 물었다.
“먹어도 되나요?”
“아! 당연히 되지. 맛있게 먹어!”
로제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분위기 때문에 미뉴에트도 못 먹고 있었구나. 그 대화가 신호탄이 된 듯, 내내 입 열 생각이 없어 보이던 제릴이 말문을 텄다.
“……먼저 물어볼 게 있는데, 쟨 뭐야?”
“아, 이 아이는.”
로제는 미뉴에트와 악수를 나눴을 때부터 생각해두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막 방울토마토를 포크로 쿡 찌른 미뉴에트를 불렀다.
“미뉴에트, 자기소개할까?”
미뉴에트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제릴에게 또박또박 인사했다.
“미뉴에트 자코입니다.”
“……뭐? 잠깐, 그거 네 이름이야?”
이 저택에서 타인의 이름을 처음 들은 제릴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로제가 자랑스럽게 어깨를 펴고 말을 이었다.
“내가 어제 친구 겸 말동무로 고용했어!”
“뭐라고?”
“친구가 없어서 심심했거든. 그러다가 우연히 어제 밖에서 이 아이를 만나서. 아, 아직 어머니께 말씀은 못 드렸지만.”
그 왜, 로판을 보면 항상 나오는 게 있지 않은가? 귀족 영애가 된 여주인공을 알뜰살뜰하게 도와주는 시녀나 개인 메이드 말이다. 그런 작품들과 내가 빙의한 이 작품은 시대배경이 살~짝 다른 것도 같지만. 로제는 속으로 생각을 이어가며 미뉴에트를 흘끔 보았다.
로제의 마음에 걸리는 건 이거였다. 나름 정령인 미뉴에트가 혹시 시녀 취급에 마음 상하진 않을까…… 아니, 밥 먹기 바쁘네. 방금 말한 것, 듣긴 했나? 방울토마토를 오물오물 씹으며 스테이크를 자르기 바쁜 미뉴에트를 본 로제는 마음을 놓았다. 밥 먹기 바쁜 미뉴에트와 그런 그녀를 보며 흐뭇하게 웃는 로제. 그 둘을 보는 제릴의 표정이 점차 썩어들었다.
“……하아. 됐어, 너네 알아서 해.”
“응! 나중에 어머니 오시면 같이 좋게 말해주기다?”
“뭐? 내가 그걸 왜…… 아니다. 알겠으니까 밥이나 먹어.”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짚은 제릴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나 로제는 평소와 달리 여전히 음식에 손댈 생각이 없었다. 그에 제릴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로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툭 내뱉었다.
“사실 독살당할 뻔해서 무서워서 못 먹겠어.”
“뭐?!”
기겁해서 벌떡 몸을 일으키는 제릴. 로제는 그에게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했다. 아는 게 없는 미뉴에트도 스테이크를 꼭꼭 씹으며 로제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로제의 ‘변색된 스푼을 약혼자에게 넘겼다’라는 말에 제릴이 분노하던 것도 잊고 딱딱하게 굳었다.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혼자 불안에 떨던 그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지, 지난번에도 말하려고 했는데. 너 약혼자라는…….”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식당 안에 있던 세 명의 시선이 순식간에 문으로 모였다. 곧 무어 경이 느긋한 발걸음으로 식당에 들어섰다. 미뉴에트는 씹던 고기를 꿀꺽 넘기며 조용히 제릴을 살폈다. 그는 명백히 무어 경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이니 그럴 수밖에. 특히나 저렇게 ‘열린’ 인간이라면 저 기묘한 남자를 둘러싼 사특한 분위기를 견디기 어려울 테다. 포크를 입에 문 미뉴에트가 눈을 깜빡였다.
벌벌 떠는 제릴을 위해 대화를 대신 받아주던 로제는 그가 뛰쳐나가고 나서야 그 옆에 있던 미뉴에트를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무어 경께도 소개해야겠어요.”
“옆의 분을 소개해주시는 건가요? 미처 알아보지 못했는데, 분명 어제 정원에서 만난 분이군요.”
로제는 방긋 웃으며 제릴에게 그랬던 것처럼 미뉴에트를 소개했다. 무기물을 바라보는 듯 서늘한 무어 경의 눈동자와 텅 비어 무저갱처럼 깊고 공허한 미뉴에트의 눈동자가 부딪혔다. 순식간에 서로가 동류임을 알아본 무어 경은 내색하지 않고 다시 부드럽게 시선을 로제에게 옮겼다.
“참, 티스푼 이야기가 다시 나와 여쭤보는 겁니다만…….”
예리한 그의 말에 지레 찔린 로제가 황급히 자신의 기억을 되짚었다. 무어 경이 그런 그녀의 반응을 찬찬히 살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집중하고 있음을 깨달은 미뉴에트는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그녀의 접시는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찰나 무어 경이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미뉴에트를 포착했지만, 별다른 제지는 없었다.
미뉴에트는 사뿐사뿐한 발걸음으로 식당을 벗어났다. 목적지는 제릴이 향한 곳이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을 미뉴에트는 척척 걸었다. 주문을 쓸 필요 없이 제릴의 기척을 느끼면 되니까 쉬웠다. 솜인형이 걷는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서재에 도착한 미뉴에트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 책상 앞에 주저앉아 있던 제릴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기겁하며 고개를 들었다가, 예상치 못한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문을 꼭 닫은 미뉴에트가 성큼성큼 제릴에게 걸어갔다. 미뉴에트가 제릴을 가만히 내려다보자 그가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뭐, 뭐야? 네가 여길 왜 왔지?”
“…….”
“로제가 시켰나? 그건 아닐 테고. 여긴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야. 이 저택에서 내쫓기 전에 당장 나가.”
제릴이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문을 가리켰지만 미뉴에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미뉴에트는, 조금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를 보며 자신의 부모님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런 의식에 끌려와 늘 공포에 질려 있는 평범한 인간이라면 도출되는 답은 하나뿐이다. 인신 공양에 바쳐질 제물이겠지. 체질이 예민해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인지, 사특한 기운에 장시간 노출이 되어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통로가 열렸으니 운이 좋다면 죽지 않고 옛 영주의 신도가 될 수도 있다. 그녀의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 도망치고 싶나요?”
여상하게, 마치 오늘 아침 식사는 어땠냐는 투로. 미뉴에트가 제릴에게 물었다.
“뭐?”
“미뉴에트는 제릴이 여기서 도망치고 싶냐고 물었어요.”
아직 이 저택에 걸려있는 의식의 구조를 전부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뉴에트 자신이 들어왔으니 지금 이 저택에는 제물로 바쳐질 인원이 예정보다 하나 많은 상태. 그렇다면 기존에 있던 한 명 정도는 능히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미뉴에트는 제릴이 원한다면 실제로 이곳에서 빼내 줄 의사가 있었다. 그런 말을 표정 변화 없이 담담히 말하는 미뉴에트를 멍하니 바라보던 제릴이 겨우 대꾸를 쥐어짰다.
“……내가 널 어떻게 믿지?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 그전에, 대체 뭘 알고 날 빼내느니 마느니 하는 거지?”
“…….”
미뉴에트는 아무런 대답 없이 제릴을 바라보기만 했다. 예, 아니요. 둘 중 하나만 내놓으라는 듯한 태도였다. 이를 악문 제릴이 짓씹듯 말했다.
“로제와 친해 보이던데. 그 애는 걱정이 안 되나 보지?”
“……?”
이번엔 미뉴에트가 반응을 보였다. 그런 말이 나올 줄 몰랐다는 듯 고개를 슬 기울인다. 실제로 미뉴에트는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로제를 왜 걱정한단 말인가? 그녀가 이 의식의 주인인데. 제릴은 고개를 저었다. 눈앞의 인형 같은 소녀와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에게서 신경 꺼.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렇다면야.”
미뉴에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빼내 줄 의리는 없었다. 이번엔 반대로 제릴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당장 이 저택에서 나가.”
“어째서? 미뉴에트는 로제에게 허락받았어요.”
“……걘 아무것도 몰라. 넌 아직 어머니에게 들키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면 아무 문제 없이 나갈 수 있다고.”
날카로운 태도였지만 미뉴에트는 그 안에 숨겨진 자신을 향한 걱정을 읽어냈다.
“아아, 젠장……. 대체 왜 이름을 알려준 거야. 이곳의 사용인들은 절대…….”
제릴이 중얼거리며 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제 코도 석 자인데 타인을 걱정하고 자빠진 제 꼴이 한심했다. 그래도 가만둘 수가 없었다. 제릴 자신은 물론이고 로제보다도 어려 보이는 여자애였다. 뭘 알고 알기라도 하는 건지 자신을 빼내 준다는 둥 얼빠진 소리까지 해댄다. 아직 아무것도 모를 때, 물들지 않았을 때, 살아있을 때. 빨리 이 저주받은 저택에서 내보내야 했다.
그때 제릴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만한 것을 보았다. 미뉴에트의 입꼬리가 아주 미약하게 위로 올라간 것 같았다.
“너…….”
그러나 그 미소는 금세 눈 녹듯 사라져 제릴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이겠거니 하고 머릿속에서 지웠다. 슬슬 자신이 미쳐가는 것 같았다.
“미뉴에트는 걱정할 것 없어요. 왜냐하면, 미뉴에트는…….”
“쥐새끼들끼리 오붓하게 대화를 나누던 중이셨나 봅니다.”
식당에서의 일이 되풀이된다. 제릴과 미뉴에트가 대화에 끼어든 목소리를 향해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고전 명화처럼 우아한 이목구비의 남성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세필 붓으로 그린 듯 섬세한 미소를 매달고, 무어 경이 품에서 둘둘 말린 종이 한 장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책상에 매달리듯 해서 일어난 제릴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빛바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애타게 찾던 것의 일부였다. 숨넘어갈 듯 놀라는 그를 제 뒤에 둔 미뉴에트가 제릴과 무어 경 사이에 섰다.
다시 무어 경과 미뉴에트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죽일까? 의식에 방해가 될지도 모르는 불안 요소인데. 순간 미뉴에트의 얼굴이 주먹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강하게 왼쪽으로 돌아갔다. 쿠당탕! 엎어진 그녀가 제 뺨을 부여잡고 벌벌 떨었다. 동시에 무어 경이 제 심장께를 부여잡으며 허리를 푹 숙였다. 그의 입에서 괴로운 기침이 튀어나왔다.
“미뉴에트!”
미뉴에트의 뒤에 서 있던 제릴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할 수 없었다. 다급히 미뉴에트를 바라보자, 그녀가 갓 태어난 새끼사슴처럼 바들거리면서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뺨을 붙잡고 있던 손을 치우니 피부가 검게 괴사해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제릴이 호흡을 멈추었다. 분명히 미뉴에트와 저 남자는 서로 손끝도 스치지 않았는데.
괴사한 볼을 차마 다시 건들지도 못하는 미뉴에트와 일그러진 얼굴로 심장이 쥐어짜이는 듯한 고통을 견디던 무어 경이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서로의 실력이 비슷함을 확인한 둘은 하는 수 없이 주문을 거둬들였다.
괴로운 숨을 뱉어내던 무어 경이 생각했다. 저건 자신과 비슷한 존재다. 아마 자신처럼 우연한 경로로 주문서를 습득하고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인간일 터. 목격자를 신경 쓰는 것은 아니다. 제릴, 저 버러지쯤은 주문으로 흔적도 없이 녹여버릴 수 있었다. 다만 눈앞의 소녀를 잡음 없이 치울 자신이 없었다. 질 것 같지는 않지만 싸운다면 분명 자신도 비슷한 피해를 볼 터였다. 그런 상태로는 로제에게 망각 주문을 걸 수 없다. 즉시 상황을 수습하지 않는다면 로제 오베르는 틀림없이 이곳에서 있던 일을 모조리 파악해버릴 것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로제 오베르에게 들키는 것만은 죽어도 싫었다. 특히 그녀가 저 소녀를 무척 아끼는 것 같았으니, 소녀를 죽인 게 자신임을 들킨다면……. 끔찍한 상상에 무어 경은 방금까지 저를 괴롭히던 심장이 쥐어짜이는 고통도 잊고 숨을 멈췄다.
“……계획을 방해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바닥을 기며 후회하게 해주겠어. 그러니 괜한 짓은 삼가도록 해.”
미뉴에트에게 경고를 남긴 무어 경은 빠른 걸음으로 서재를 벗어났다.
제릴을 찾아 서재로 향한 로제는 제릴이 아닌 다른 이를 만났다.
“미뉴에트! 여기 있었구나. 안에 제릴 있어?”
“로제, 제릴을 찾으러 왔다면 헛걸음했어요. 그는 이미 여기 없는걸요.”
그렇게 말하며 미뉴에트는 제 한쪽 뺨을 감싸 쥐고 있던 손을 뗐다. 살짝 손자국이 난 것만 빼면 뺨은 평소의 흰 살결 그대로였다. 로제가 이쪽으로 올 줄은 몰랐어. 조금만 늦었으면 꼼짝없이 들킬 뻔했잖아. 미뉴에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행히 로제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어? 어디 갔는데?”
“미뉴에트는 제릴이 의상실에 간다고 들었어요.”
“그래?”
의상실이라. 의붓오빠의 은밀한 취미생활을 떠올린 로제의 표정이 잠시 미묘해졌으나,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제릴의 소식을 들으니 로제 자신도 이 동네가 궁금해진다. 생각해보면 이 저택 밖으로 나가본 적 없었지.
“미뉴에트, 우리도 나갈까? 밥 사줄게.”
“미뉴에트도 가는 건가요?”
“응. 아, 무어 경도 부를까?”
그 말에 미뉴에트의 표정이 꾸깃해진다. 아주 미세한 차이라서 본인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변화를 느끼지 못했지만. 로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미뉴에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아쉽지만 미뉴에트는 저택을 좀 둘러볼 계획이었어요.”
“아냐, 미안해할 건 아니지. 아쉽네.”
로제가 눈썹을 살짝 늘어트렸다. 그 모습에 미뉴에트가 손을 꿈지럭거렸다. 무어 경과 그다지 마주치고 싶지 않다. 그동안의 태도를 보면 저택의 주인인 로제에게는 설설 기는 것 같았으니, 로제를 호위할 필요는 없어 보이고. 로제가 고른 음식은 분명 맛있을 테니까, 그건 좀 아쉽지만……. 미뉴에트가 로제를 달래듯 덧붙였다.
“괜한 건 건드리지 않을 생각이지만, 로제가 원한다면 여기 구조를 조금 손볼게요. 저와 로제만 아는 비밀스러운 틈새를 만들면, 만에 하나 일이 틀어졌을 때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예요.”
“응? 그런 것도 할 수 있어?”
“물론이에요. 미뉴에트라면 로제가 외출을 다녀오는 사이에 감쪽같이 고칠 자신이 있어요.”
그 어떤 기이한 주문이라도 허점은 반드시 있다. 그런 틈새를 찾아내 비틀고 벌리는 것은 미뉴에트에게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숲에서 지냈던 나날을 떠올렸다. 원래라면 드러날 일 없던 천부적인 재능이 기이하게 일그러진 주변 상황과 맞물려 활짝 개화해버리고 말았다. 끔찍한 주술을 다루거나 사이한 의식을 주관하는 것, 인간이 써서는 안 될 주문을 사용해 외계의 존재를 불러들이는 것 따위에 있어 미뉴에트는 인간 너머의 경지에 올라서 있었다.
“그래?”
한편 로제는 무어 경과 저택을 탐험하던 중 만난 검은 방과 더불어, 미뉴에트가 저택에 깃든 오래된 정령 비슷한 존재임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즉…… 저 말은 이 저택을 고쳐준다는 의미구나! 비밀스러운 틈새라면 역시 그 검은 방이겠지. 누구나 액자라고 생각하고 지나치지만, 사실은 착시현상을 이용한 비밀스러운 방! 이거 완전 해리 포터에 나오는 비밀의 방 아니야? 로제가 들떴다. 정령은 진짜 별걸 다 할 줄 아는구나. 그러나 잠시 고민하던 로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깝지만 별수 없었다.
“재밌을 것 같지만 괜찮아. 있으면 유용할 것 같지만, 그런 게 필요할 일이 있을까?”
“그런가요?”
개인 공간이라면 방도 있고 서재도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혼자 있고 싶을 땐 사람을 물리면 된다. 아직 서류상의 저택 주인은 마담 자우어였다. 괜히 저택 구조에 손을 댔다가 사용인들에게 들켜도 문제였다. 어깨를 으쓱한 로제가 복실복실한 미뉴에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럼 다녀올게. 저택 구경하다가 재밌는 걸 발견하면 꼭 알려줘?”
“재밌는 것……? 알겠어요.”
미뉴에트는 말이 와닿지 않는지 갸웃거렸지만, 이내 순종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준비된 차를 타고 무어 경과 떠나는 로제의 뒷모습을 창문으로 바라보던 미뉴에트는 차가 정문을 넘자 몸을 돌렸다.
로제는 불과 몇 시간 전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백화점에 입성했던 자신을 떠올렸다. 쇼윈도에 전시된 기성품을 고르는 게 아니라, 앉아서 턱 끝으로 사람을 부리며 맞춤옷을 주문하는 것일 줄이야. 물론 좋다. 쇼핑 카트를 끌거나 온종일 걷지 않고, 편하게 앉아서 돈 걱정 없이 원하는 것을 사는 경험은 분명 짜릿했다.
‘좀, 그게…… 부자보다 서비스직에 이입이 돼서 그런가. 부, 부담스럽다…….’
백화점 직원들의 필사적인 호객 행위를 듣고 있자니 압박감이 장난 아니었다. 딱히 사고 싶은 것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와서 더 그랬다. 사고 싶은 게 있다면 이것저것 재고 따져보기라도 하겠는데…….
“앗!”
“로제? 왜 그러십니까?”
“미뉴에트를 데려올 걸 그랬어요. 옷을 사주기로 했는데.”
본인이 없으니 치수를 잴 수도 없다. 하는 수 없이 기성복을 고르기로 했다.
“그러니까…… 키는 한 이 정도? 제 눈썹까지 오고. 호리호리한 체형이에요.”
미뉴에트에 관해 설명한 로제는 앉은 자리에서 카탈로그를 넘겨받아 여성복을 골랐다. 원래 로제의 인식대로라면 아동복을 골랐겠지만, 미뉴에트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그녀가 그리 작지 않음을 실감한 덕분에 로제는 미뉴에트에게 맞는 옷을 고를 수 있었다.
“휴, 미뉴에트가 마음에 들어 할지 모르겠네요.”
“틀림없이 좋아할 겁니다. 로제 양이 직접 고르셨으니까요.”
조금 탐탁지 않은 기색으로 얌전히 쇼핑이 끝나길 기다리던 무어 경이 잽싸게 말을 받았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아, 장신구도 좀 볼까?”
역시 목표가 생기니까 쇼핑이 수월했다. 직원들의 어필도 아까보다는 훨씬 덜 부담스러웠다. 기성복이어도 백화점 기성복이라 그런지 눈 돌아가게 예쁜 것들이 많아, 로제는 시간이 지나는 줄도 모르고 쇼핑에 열중했다.
“아! 이거 귀엽다. 무어 경, 어때요?”
“머리끈인가요? 로제 양의 안목이 고른 것이라면 무엇인들.”
“에이, 그런 말 말고요. 미뉴에트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예, 뭐.”
대답이 시원찮다. 로제는 불만족스럽게 목을 울리다가 문득 생각했다. 앗, 이거 혹시 내가 무어 경을 시험하는 것 같았나? 내 앞에서 감히 다른 여자의 장신구를 골라주다니! 이런 거. 로맨스에 꼭 등장하는 고구마 요소 말이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애초에 그녀의 인식 속에서 미뉴에트는 이미 로판에 꼭 하나씩 존재하는 마스코트였다. 그런 쪽으로는 생각도 안 해봤다고 해야 할까. 로제가 두 눈을 깜빡이며 제 앞에 대령 된 리본 머리끈을 내려다보았다. 로제의 손끝이 카탈로그를 가리키자마자 직원이 부리나케 달려가 상품을 가져온 것이었다.
“실제로 보니까 더 예쁘네…….”
고급스러운 자수가 들어간 리본에는 레이스로 만들어진 커다란 장미 장식이 붙어 있었다. 자수도 레이스 무늬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섬세하고 정교했다. 음, 고급져.
“이것도 살게요.”
“과연, 심미안이 대단하십니다. 이 리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로제는 열띤 호응을 곁들여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뉴에트 없는 미뉴에트 옷 쇼핑은 그로부터 한참 더 시간이 흐르고야 끝났다.
“후, 보람찼다. 이제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물 한 컵을 시원하게 들이킨 로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이 뻐근해서 스트레칭도 좀 하고 찬물로 얼굴도 좀 식힐 셈이었다.
이후 방을 나선 로제가 공중전화 부스를 발견해 탐정에게 정보를 의뢰하고, 돌아와 카메라를 구매해 무어 경이라는 아름다운 피사체로 역작을 찍어낸데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의 맛이 느껴지는 초호화 호텔에서 마사지를 받고 개운하게 잠든 것까지. 뭐 하나 보람차지 않은 게 없는 하루였다. 그러니까 이 보람찬 하루가 다음 날 아침까지도 완벽하게 이어졌으면 좋았으련만.
“일어나!”
“뭐야……. 이 새벽에.”
“이 정도면 아침이야. 빨리 일어나서 돌아갈 준비해.”
로제는 아침 6시에 자신을 찾으러 온 제릴을 따라 호텔 조식도 거른 채 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오셨어.”
양어머니, 마담 자우어가 외출을 마치고 저택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기억상실증이라는 거짓말까지 해놓고 외박한 것도 마음에 걸렸지만, 무엇보다 걱정되는 건 미뉴에트의 존재였다.
‘일단 멋대로 들이긴 했는데…… 제릴에게 했던 말이 마담 자우어에게도 통할까?’
사용인을 고용하고 관리하는 건 전적으로 마담 자우어의 몫이었기에 로제는 끙끙 앓았다. 동시에 이제 와서 별수 있냐는 생각도 들었다. 설마 안 된다고 하겠어? 수양딸을 그렇게 아껴주시는 분인데, 말동무 정도야.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로제와 제릴은 무슨 임무라도 수행하듯 비장하게 말을 맞췄다. 어머니는 점심쯤 도착하신다니, 우리는 그때까지 각자 방에 있었던 것으로 하자……. 그러나 결과적으로 둘의 첩보영화 뺨치는 말 맞추기는 제대로 해볼 틈도 없이 박살 났다.
“돌아왔군요. 내 따님들.”
마담 자우어가 현관문 앞에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외로 로제의 외박에 대한 마담 자우어의 반응은 온건했다. 한참 나가고 싶은 나이지, 별일 없었다면 되었다, 그래도 건강에 유의해야 한다. 순수한 어머니의 걱정에 로제의 양심이 쿡쿡 찔렸다.
“그건 그렇고, 로제. 이 아이는 누구인가요?”
마담 자우어가 사용인들 뒤에 서 있던 한 사람을 가리켰다. 두말할 것도 없이 미뉴에트였다.
“로제가 들여온 말동무라던데, 맞나요?”
“그, 네. 저택 안에만 머무르려니 심심해서요. 미뉴에트랑은 말도 잘 통하고…….”
로제가 태연한 태도를 유지하려 애쓰며 말을 주워섬겼다. 제릴 앞에서는 술술 나왔던 말이 마담 자우어 앞에서는 목에 턱 걸린 듯 잘 나오지 않았다. 큭, 이것이 불효녀의 말로인가……. 로제가 쓰게 중얼거렸다. 살피는 시선으로 미뉴에트를 바라보던 마담 자우어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로제. 나들이도 그렇고, 정말 무척 심심했나 보군요. 내가 무심해서 그런 것도 몰라줬네요.”
“아니에요. 저도 말하지 않고 친구를 데려와서 죄송해요.”
“죄송할 것까지야. 우리 따님이 원하신다면 못 해줄 게 뭐가 있겠나요?”
따스하게 웃은 마담 자우어가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미뉴에트를 한 번, 줄지어 선 사용인들을 한 번 보며 말했다.
“로제가 데려온 아이라면 믿을 수 있겠죠. 퍼킨스 부인, 이 아이도 로제 전속 사용인으로 고용하고, 앞으로 명단에 넣어 관리해줘요.”
퍼킨스 부인이라 불린 여자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것으로 마담 자우어가 여는 아침 조례는 끝이었다. 어머니와 두 딸이 함께하는 오붓하고 숨 막히는 아침 식사가 끝나고, 로제는 날듯이 제 방으로 향했다. 방에서 얌전히 기다리던 미뉴에트가 그녀를 반겼다.
“미뉴에트! 잘 지냈어?”
“잘 지내고 있었어요. 로제야말로 별일 없었나요?”
고개를 끄덕인 로제가 전날 있었던 일을 주절주절 풀었다. 무뚝뚝하지만 작게나마 호응하던 미뉴에트가 말했다.
“미뉴에트는 로제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아 걱정했어요. 제릴도 그랬고요.”
“제릴이?”
“미뉴에트는 원래 로제를 찾아 나설 생각이었는데, 그가 말렸어요. 자신이 데리고 오겠다고.”
꼭두새벽부터 호텔까지 쳐들어왔던 제릴을 떠올리며 로제가 수긍했다. 제릴에게 고맙다고 해야겠다.
“그보다, 미뉴에트, 들어봐. 네 옷을 잔뜩 사 왔어.”
“옷? 아, 저거 말인가요.”
로제가 방 한쪽에 산더미처럼 쌓인 상자들을 가리켰다. 백화점 로고가 상자마다 선명히 박혀 있었다.
“일하는 분들이 다 가져다 두셨네. 자, 자. 미뉴에트. 이것부터 입어봐.”
“…….”
끝도 없이 나오는 옷들을 살짝 공허한 눈으로 바라보던 미뉴에트가 얌전히 일어섰다. 오베르 저택에 살고 시키는 거 다 해요, 같은 태도로 입고 있던 흰 원피스를 벗은 미뉴에트가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옷을 하나씩 몸 위에 걸쳤다.
어제 함께 산 사진기를 야무지게 들고 아름다운 정원이 비치는 창문을 배경 삼아 찰칵찰칵, 미뉴에트의 사진을 찍은 로제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옷 고마워요, 로제. 미뉴에트를 위해 이런 것까지.”
“뭘. 다음번엔 같이 쇼핑 가자. 그때는 이런 기성복 말고 직접 옷을 맞춰줄게.”
외출복이나 잠옷은 아직 한참 부족하잖아. 생글생글 웃으며 건넨 말에 미뉴에트의 얼굴이 희게 질렸으나, 역시 아주 미묘한 변화라 티가 나지는 않았다.
“아, 리본도 샀다? 머리 묶어줄게.”
“…….”
미뉴에트가 묵묵히 몸을 돌렸다. 썩은 대걸레 같던 머리카락이 사용인들의 손길에 힘입어 어느새 비단처럼 부드러워져 있었다. 좋은 향기가 나는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게 올려 리본이 달린 머리끈으로 꼭 묶었다. 제 모습이 어색한지 목덜미며 묶인 머리카락을 몇 번이고 매만지는 미뉴에트는 희극에나 나올 법한 요정 같았다.
그 모습을 본 로제의 가슴 속 깊은 곳부터 뿌듯함이 넘실거리며 차올랐다. 그렇게 로제가 인형 놀이에 심취해있을 무렵. 똑똑.
“아가씨, 마담께서 산책에 동행을 권유하십니다.”
헛. 로제가 미뉴에트를 돌아보았다. 눈을 마주친 미뉴에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은 자신이 정리해두겠다는 의미였다. 사진기를 숨겨야 한다는 말, 해준 적 있던가? 미뉴에트의 눈치가 여간 비상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며 로제는 방을 나섰다. 그리고 마담 자우어가 체포당했다.
…….
응?
오베르 저택의 현관을 장악한 경관이 단호하게 말했다.
“엠마 자우어. 로제 오베르에 대한 살인미수 혐의. 그리고 5년 전 러셀 오베르에 대한 살인 혐의로, 당신을 체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오베르 저택의 현관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아수라장이 되었다. 마담 자우어가 제 결백을 필사적으로 주장하다가 끌려나갔고, 소란에 내려온 제릴이 결국 어머니를 등지고 로제를 보호했다.
그 사이에서 간신히 상황을 정리한 로제가 뒤늦게나마 방금 일어났던 일을 곱씹었다.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어느샌가 그녀의 곁에는 미뉴에트가 다가와 서 있었다.
“로제, 괜찮나요?”
“미뉴에트? 언제 나왔어.”
“미뉴에트는 아까부터 로제의 곁에 있었어요.”
제릴이 로제의 앞을 가로막았을 때부터요. 현관으로 내려오던 중 제릴과 마주쳤으니까요. 그, 그랬구나……. 흐리멍덩한 눈으로 로제를 올려다보던 미뉴에트가 조용히 일렀다.
“로제. 계획대로 되지 않은 건가요?”
“계획…… 계획대로 안 되긴 했지.”
애초에 무얼 해야겠다, 확실하게 정해둔 것은 없었다. 이런 상황이 될 줄은 몰랐지만, 타개해내지 못할 상황도 아니었다. 로제는 자신이 있었다. 로판 독자 짬이 있지, 이 정도쯤이야. 물론 로판에 대해 잘 모르는 초보 빙의자라면 이 타이밍에 누군가와 척진다는 악수를 둘 법도 했으나, 로제는 그런 시기가 지난 지 오래였다. 회귀도 책 빙의도 아닌 평범한 1회차지만. 그녀가 빙긋 웃었다.
“그래도 괜찮아. 지금 당장 루트를 정할 필요는 없지.”
미뉴에트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로제는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건가요? 미뉴에트에게 맡긴다면 필요한 정보를 얻는 것은 일도 아니에요.”
미뉴에트의 작은 머리통에 수만 가지 모독적인 주문이 스쳐 지나간다. 사람의 입을 여는 것은 고문까지 갈 것도 없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로제는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음, 로판에 정령이 존재한다면 틀림없이 이후 전개에 정령의 힘이 필요한 사건이 등장할 것이다. 그때를 위해 미뉴에트의 힘은 안배해두는 게 맞았다. 지금 사사롭게 쓸 순 없지. 오, 나 좀 잘 헤쳐 나가고 있는 듯? 로제가 완전히 기운을 차렸다.
“날 생각해준 거지? 고마워, 미뉴에트.”
로제가 미뉴에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느새 완전히 포실포실 부드러워진 머리카락.
“……미뉴에트는 끝까지 로제의 편이에요. 잊지 말아주세요.”
미뉴에트가 조금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한다. 그런 그녀를 귀여워하며 로제는 몇 번이나 더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이제 그럼 각자의 일을 하자. 미뉴에트. 부탁이 있어.”
“말씀해주세요. 그게 무엇이든 로제의 뜻대로 될 거예요.”
미뉴에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한다면 드래곤 목이라도 따올 것 같은 기세. 큼, 헛기침한 로제가 진지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라는 경위로 미뉴에트가 온 거예요. 설명이 되었을까요? 제릴.”
“즉, 자긴 할 일이 있으니 자기 대신 네가 가서 나를 진정시키라는 명령을 듣고 찾아왔다?”
“네. 제릴의 이해가 빨라 다행이에요.”
“하아…….”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상황이 마무리된 후 홀로 조용히 서재에 들어와 있던 제릴이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런 그를 앞에 두고 미뉴에트는 새침한 무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제릴이 미뉴에트에게 로제 없이 함부로 쏘다니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로제는 제릴을 걱정했어요. 미뉴에트는 그런 로제의 부탁을 들어주러 온 것뿐이고요.”
“알았다고, 내가 실언했네. 미안. 됐어? 난 괜찮으니 이만 가봐.”
“…….”
미뉴에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서재 한편에 조용히 자리 잡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황당해진 제릴이 입을 벌렸다. 잠시 미뉴에트가 선 방향을 바라보던 그는 몸을 휙 돌렸다. 책상에 놓인 종이에 집중하는, 정확히는 집중하려 노력하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미뉴에트가 그를 불렀다.
“제릴.”
“…….”
“제릴.”
“……왜.”
“제릴, 멀쩡한가요?”
“……멀쩡하겠어?”
제릴이 툭 쏘아붙인다. 미뉴에트의 표정에는 한 점 변화도 없다.
“어머니를 아꼈나요?”
“뭐? 그런 걸 왜 물어?”
기어이 제릴이 다시 몸을 돌려 미뉴에트를 마주 바라보았다. 미뉴에트는 대답을 기다리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눈을 정확히 직시해오기만 했다. 입술을 벙긋거리던 제릴이 짓씹듯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러는 넌 부모님을 안 아낄, 아.”
제릴이 입을 다문다. 이런 어린애가 연고자도 없이 홀로 이런 곳에 와 있다면 그 부모의 상황은 뻔했다. 혀가 뻣뻣해진 제릴이 할 말을 고르는 사이 미뉴에트가 휙, 가볍게 던지듯 제 얼마 안 되는 인간성의 일부를 내려놓았다.
“부모님이 아직, 하루에 아주 잠깐이라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무렵에.”
“뭐?”
“들었어요. 미뉴에트의 이름은 함께 춤추길 좋아하던 미뉴에트의 부모님이 늘 두 사람이 추던 춤곡에서 따왔다고 해요.”
“…….”
“그래서 미뉴에트는 춤춰본 적이 없고, 또 부모님이 춤추는 걸 본 적이 없고. 그 이후로 부모님과 어떤 대화도 나눠본 적 없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소중해요. 두 분이 돌아가셨을 땐 무척 슬펐어요.”
“…….”
문득 제릴은 어떤 불가항력에 이끌려 미뉴에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변함없이 아름답고 차가운 얼굴에서 그는 소녀의 표표한 일생을, 빛바랜 괴로움을 발견한다. 그리고 아주 공교롭게도 그 괴로움은 제릴 자신의 것과 아주 닮아 있었다…….
제릴의 눈동자에 미뉴에트의 무표정이 비치고, 미뉴에트의 눈동자에 제릴의 혼란스러운 낯이 비친다. 잠깐의 침묵. 찰나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제릴은 미뉴에트에게 동질감에 가까운 연민을 느끼고 말았다.
가여운 제릴. 그의 마음은 여리디여려서, 그런 감정을 느껴버린다면 그것은 곧 정으로 변하고 말 텐데. 하지만 본디 사랑이라는 것은, 자식이 부모에게 마음을 여는 순간이 그렇듯, 아주 사소한 계기로 찾아와버리고 만다. 작은 나비가 태풍을 불러오듯이. 찻잔 속 찻물이 마구 휘저어진다……. 물을 들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아주 연약한 뭍. 바다의 밑바닥. 찻잔 아래 남는 잔여물. 소년소녀의 기묘한 유대감. 사소한, 비밀.
긴 고요 끝에 제릴은 미뉴에트에게 묻는다.
“어째서 네 부모님은 제정신…… 을 유지할 수 없게 된 건데?”
저기, 너무 무신경하지 않아? 묻는 제릴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을 수는 없는 노릇일 뿐더러, 미뉴에트를 배려하기 위해 말을 고르기는 버거울 만큼 그는 초조해져 있었다. 다행히도 미뉴에트는 제릴보다 훨씬, 훨씬, 훨씬 더 무신경한 성격.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이 지하에 있는 존재와 같은, 또 다른 존재에게…….”
역시 이쪽이 좀 더, 아니, 확실히 더 무신경하다. 제릴의 안색이 시퍼래진다.
“너……이 아래에 있는 존재가 뭔지 알아?”
제릴의 평생을 쥐고 흔든 공포의 근원이 지금 해소된다. 바로 여기, 천재 화가가 심혈을 기울여 붓질한 것 같은 미소녀의 작고 우아한 입에서. 미뉴에트의 입이 열리고 빨간 혀와 고른 치아가 나타났다. 제릴은 1초가 수십 배로 늘어난 듯한 감각을 느끼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찾았다! 둘 다 여기 있었구나.”
“으아악!”
“뭐, 뭐야! 왜 그래!”
“로제. 어서 와요. 미뉴에트는 로제를 기다렸어요.”
그러나 그것은 기가 막힌 타이밍에 등장한 이 세계의 주인공에 의해 가로막힌다. 기겁하는 제릴과 반대로 미뉴에트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하게 제 주인을 반겼다.
“여,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야? 너.”
“음? 부른다고 해서 왔는데?”
“……누가? 내가?”
끄덕끄덕. 뭐라는 거야, 내가 널 왜? 로제는 들은 대로 온 것뿐인데, 억울하게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다.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 상여자 로제는 제릴의 반응을 서브남의 ‘츤’ 어필로 일축하고 정원사에게 받은 쪽지를 꺼냈다. 보물이 묻힌 장소가 적힌 쪽지였다. 그런 걸 왜 정원사가 가지고 있었는지는 차치하고.
어느새 제릴의 옆으로 스슥 다가온 미뉴에트도 머리를 들이밀었다. 둘은 쪽지를 펼치고 내용을 읽었다.
“이게 아마도 보물을 숨겨둔 수수께끼 같거든? 혹시 이 저택에서 이 내용에 맞을 만한 장소…… 야, 야!!”
제릴이 쪽지를 펼치자마자 도로 뭉쳐 창밖으로 던졌다. 빛의 속도에 버금가는 빠르기였다. 여기가 현대였다면 야구를 시켰을 텐데. 로제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다행히 미뉴에트 또한 빛의 속도에 버금가는 빠르기로 쪽지 내용을 읽었다.
군데군데 지워지긴 했지만 몰라보려야 몰라볼 수 없었다. 그것은 옛 영주를 부르는 주문과 기호였다. 과연, 로제는 슬슬 시작할 작정이구나. 미뉴에트는 제 죽음이 성큼 다가왔다는 사실을 묵묵히, 살짝 감격스럽게 받아들였다. 무척 기쁘다. 기쁜데, 기쁘지만…… 틀림없이 기쁘긴 한데. 뭔가……. 미뉴에트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이 싱숭생숭 미지근한 불쾌감은 뭐지?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고찰하는 사이 제릴은 로제에게 덜덜 떨며 이 저택에 대해 자신이 아는 것들을 털어놓았다. 미쳐버린 동생이 제 말을 아주 일부라도 알아들어서, 제발 부탁이니 위험한 것에 손 뻗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오래 살아남길 바라며.
오빠의 갸륵한 마음을 알아챈 것일까, 로제는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겸사겸사 여주인공 보정도 확인해 보았다. 평생 제릴을 괴롭혔던 수상한 목소리가, 로제가 손으로 그의 귀를 막자마자 들리지 않게 된 것이다. 믿을 수 없는 현상에 제릴은 넋이 나갔다. 그를 배려한 로제는 미뉴에트와 함께 조용히 서재를 나섰다.
어느새 미뉴에트도 자신의 기분을 깔끔히 정리한 뒤였다. 아무래도 내가 이 생활에 조금 재미를 붙였었나보다, 하고. 제릴이 공포에 떨며 전해준 말을 떠올리며 로제는 품속에서 미리 베껴둔 쪽지를 꺼냈다. 그런 로제를 미뉴에트가 멀뚱히 바라보았다.
“미뉴에트. 우린 보물 찾자.”
“로제가 원한다면야.”
미뉴에트가 생각했다. 로제, 제릴 말 하나도 안 들었구나. 물론 이 의식이 주인이 로제고, 또 저택 아래의 존재를 불러낸 것도 로제일 테니 그의 말은 애초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지만……. 미뉴에트는 문득 제릴을 떠올렸다. 침묵 속 마주쳤던 그의 눈동자.
‘로제는 왜 제릴도 의식에 넣고 싶어 하는 걸까.’
슬쩍 든 생각에 미뉴에트가 로제를 불렀다.
“로제.”
“응?”
“로제는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야, 싱겁게!”
그것이 주인인 로제의 선택이라면 객의 입장인 미뉴에트가 얹을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로제가 왜 말하다 마냐며, 더 말해보라고 미뉴에트를 구슬렸지만 조개처럼 꾹 다물린 입은 다시 열릴 줄 몰랐다. 결국 포기한 쪽은 로제였다.
“미뉴에트. 역시 이거 드래곤이겠지?”
“……드래곤이 뭔가요?”
로제와 미뉴에트가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끔뻑인다. 드래곤이라는 단어가 여기엔 없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로제가 드래곤을 설명했다.
“쩌는 거.”
완벽한 설명을 들은 미뉴에트가 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맞아요.”
“역시.”
둘은 그렇게 지하실로 가는 열쇠를 받으러 발을 옮겼다.
“로제.”
“응?”
지하실로 내려가던 중, 미뉴에트가 결연하게 말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로제는 미뉴에트가 지킬게요.”
“나를? 지켜줄 수 있어?”
뭔가 신비한 능력이라도 있는 거야? 하긴 정령이니까. 이것도 로판 클리셰지. 뭘 쓸 줄 아는데? 보여주는 거야?! 로제가 속사포로 질문했다. 문장에 사용된 단어 중 절반 정도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미뉴에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쑥 뻗었다.
입 속으로 비밀스러운 주문을 읊는다. 아무런 전조도 없었건만, 곧 그들을 중심으로 반투명한 구체가 생겨났다. 쭉쭉 확장되던 그것은 미뉴에트로부터 대략 50m는 멀어진 뒤에야 확장을 멈췄다. 오오오! 로제가 감탄했다. 이 세계에 온 뒤 처음으로 목격하는 이능력이었다. 들뜰 수밖에 없다.
“단단한 방벽이에요. 이거라면 안심일까요?”
“물론이지! 미뉴에트, 이런 것도 쓸 줄 알고. 대단해!”
로제가 미뉴에트의 머리를 복복복 쓰다듬었다. 어떤 주문이든 어렵지 않게 다루는 미뉴에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딱히 칭찬받을 것도 아니었지만, 잠자코 쓰다듬받았다.
“좋아, 그럼 미뉴에트만 믿고 전진!”
당찬 발걸음으로 로제가 지하실로 향했다. 그 뒤를 미뉴에트가 소리 없이 따랐다. 그러나 기합을 잔뜩 넣고 모험을 떠난 것이 무색하게도, 지하실에선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지하실에서 드래곤 알이라도 발견했으면 제릴에게 할 말이 있었을 텐데. 왜 지하실을 두려워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이 저택 지하엔 이런 게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런 느낌으로다가.
하지만 로제와 미뉴에트가 함께했던 지하실 탐험은 그새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나 있었다. 모험 직후, 한꺼번에 수많은 일이 닥쳐온 탓이다.
독살이니, 체포니 하는 그간의 일로 자기 보신의 필요성을 느끼고 총포사에서 권총을 구하자마자 들은 소식이 해서 화이트의 도주 소식이었다. 그녀는 저택에서 일하던 메이드로, 마담 자우어의 독살을 증언해 그녀가 체포되는 데 지대한 공헌을 세운 자였다.
해서 화이트가 로제를 적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로제의 양어머니를 체포시킨 사람이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될런지. 본의 아니게 고구마를 먹은 로제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일 처리는 차치하고 일단 마담 자우어의 아들인 제릴에게도 이 소식을 전달하는 것이 사람된 도리였다.
그런 생각으로 이 따끈따끈한 소식을 제릴에게 전달했지만, 돌아온 반응은 미적지근하기 짝이 없었다. 제릴에겐 더 이상 해서 화이트나 마담 자우어의 소식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담백하게 지나칠 만한 게 아닌 일을 담백하게 지나치는 그에게 로제는 총포사에서 구한 선물을 건넸다. 이 차가운 세상, 우리가 믿을 것은 스스로뿐.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우니 호신용 권총을 한 자루씩 반드시 챙기자.
아, 왜 제릴에게만 주는 거냐고 미뉴에트가 삐지는 건 아니겠지? 로제는 제 옆에 묵묵히 자리한 미뉴에트를 흘끗 돌아보았다. 이 소녀가 볼을 부풀리거나 틱틱대는 것은 전혀 상상이 안 갔다. 괜찮을 것이다. 방어벽도 펼칠 줄 아는 데다, 정령을 해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테니까. 정 안 되면 내가 지켜주지 뭐.
문득 든 생각을 갈무리한 로제가 제릴을 바라보았다. 로제의 마음을 이해한 것인지 그는 여동생의 귀여운 선물을 순순히 받았다. 귀를 붉히며 ‘데레’를 보여준 그는 포장을 열어 선물의 정체를 확인하더니,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 되어 이번에는 진짜로 담백하게 지나칠 수 없는 제안을 건넸다.
“로제.”
“응?”
“최대한 멀리,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자.”
그것도 당장 오늘 밤에. 갑자기 그게 무슨 미친 소리냐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것을 간신히 삼킨 로제는 침착하게 제릴을 말렸다. 이 집을 놔두고 어디서 살게? 돈은 또 어떻게 벌고? 날카로운 질문과 논리적인 설득도 곁들여서. ‘이곳’에서는 자세히 말해줄 수 없다. 일단 도망친 후에 계획을 설명하겠다. 그렇게 주장하는 제릴과 아무리 봐도 그의 제안이 현실성 없다고 느낀 로제의 의견은 좁혀질 줄 몰랐고. 결국 무어 경이 올 때쯤 로제는 제릴의 계획을 단념시키는 데 성공했다. 아니, ‘단념한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로제가 저녁 식사를 위해 떠나간 서재. 그곳에는 이제 미뉴에트와 제릴만이 남아있었다.
“……넌 왜 안 따라가?”
제릴이 물었다. 퉁명스러움이 남아있었으나, 이전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누그러진 어조였다. 그래봐야 축객령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리고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그의 말을 씹은 미뉴에트가 질문을 돌려주었다.
“제릴. 떠날 건가요?”
“…….”
로제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옆에서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미뉴에트에게는 제릴의 심리가 훤히 보였다. 그는 설득될 생각이 없었다. 짧은 침묵 후에 제릴이 단호하게 답했다.
“떠날 거야.”
“그렇군요. 미뉴에트는 말리지 않아요.”
처음에 이곳에서 빼내어 주겠다고 말했을 땐 거절하더니. 미뉴에트는 마음을 바꾼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려다가 관두었다. 이번엔 제릴이 물었다.
“……넌. 내가 떠나자고 하면 함께 떠날 거야?”
미뉴에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었다. 제물의 개수 이야기가 아니다. 미뉴에트는 이미 이곳을 제 무덤으로 결정했다. 제릴을 가만히 바라보던 미뉴에트는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제릴. 제릴은 살고 싶은 거죠?”
“그래, 살고 싶어. 이젠 지긋지긋해. 난…….”
제릴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그러나 미처 완성되지 않은 그의 문장에서 절절하게 느껴지는 감정이 있었다. 살고 싶다는 욕구. 그것이 아주 강렬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평소 겁을 집어먹고 숨죽여 살던 제릴이 내보이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으리만치 밝은 빛이었다.
그런 욕구를 느껴본 적 없던 미뉴에트는 왠지 미소가 지어졌다.그것을 발견한 제릴의 눈이 커졌다. 왜 이럴까, 마음이. 왜인지 가슴께가 뻐근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만족감에 미뉴에트의 갈비뼈 안쪽이 조금 따뜻해졌다. 온화하게 웃은 미뉴에트가 답지 않게 다정한 어조로 마지막일 인사를 건넸다.
“그래요. 제릴, 미뉴에트는 제릴의 앞길을 축복할게요.”
“…….”
숨이 콱 막힌다. 뛰어난 화가가 정성들여 그린 풍경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아름다운 소녀의 낯선 미소는 도저히 저와 같은 인간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아서, 제릴은 두 눈을 감지도 못하고 한참을 정신 차리려 노력해야 했다. 겨우 돌아온 그는 입을 달싹이다가 간신히 짧은 문장을 뱉어냈다.
“로제를 부탁해. 걜 지켜줘.”
“그럴게요.”
미뉴에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흰 호수에 물결이 잔잔히 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안심한 제릴을 두고 미뉴에트는 서재를 나왔다. 그리고 로제의 방으로 곧장 걸어갔다.
사실 미뉴에트의 방이 생긴 지 오래였지만, 미뉴에트는 여전히 로제의 방에서 그녀와 함께 잠들었다. 침대를 하나 더 놓아줄까, 그런 질문도 들었지만 그것은 로제와 미뉴에트 두 사람 모두 거절했다. 이미 침대는 충분히 넓었고, 필요한 것은 온기였다.
언제 돌아왔는지 로제는 씻지도 않은 채 침대에 엎어져 잠들어 있었다. 미뉴에트는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려 다가가다가 탁자에 놓인 사진을 발견했다. 어지럽게 흩어진 사진 중에는 미뉴에트를 찍은 것도 있었다. 마구 흔들린 배경. 빈말로도 잘 찍었다고 말할 순 없는 사진이었다.
그러나 그것의 가장자리를 쓰다듬는 미뉴에트의 손짓에선 애틋함이 묻어나왔다. 로제가 예쁜 새 옷을 잔뜩 입혀주었었지. 사진을 보니 신기하게도 그때의 감정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닌데도 어느새 그것은 행복한 추억이 되어 있었다. 미뉴에트를 그렇게 대해준 건 로제가 처음이기에.
생각의 꼬리를 물고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 살고 싶다던 제릴의 목소리다. 잠든 로제의 숨소리와 제릴의 목소리가 미뉴에트의 귓가에서 뒤섞인다. 저택을 살펴보았을 때, 미뉴에트는 이 거대한 의식에 로제 오베르도 제물로써 포함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로제는 왜 죽고 싶은 걸까. 이불을 여며주며 미뉴에트는 이제 와서 생각했다. 이유가 뭘까. 이 의식을 일으켜서 로제가 얻고 싶은 게 뭘까.
숲속의 그들은 모시는 영주를 배알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자신들의 행동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받고 싶어 했다. 그런 이유로 의식을 치렀다. 하지만 지하에 잠든 옛 영주가 깨어났을 때, 로제는 이 세상에 없을 텐데.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왜일까……. 로제의 잠든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던 미뉴에트는 꼼질꼼질 이불을 파고들어 그녀의 옆에 누웠다. 타인의 삶과 죽음. 자신의 삶과 죽음.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죽어야 하는 이유는 또 무엇이고. 밤은 무르익어 가는데 미뉴에트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희뿌연 아침. 전날 자신의 손이 사진 한 장 제대로 찍지 못하는 똥손임을 깨달은 충격은 아침까지도 가시질 않아서, 로제는 아침 식사도 거절했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미뉴에트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로제가 제릴을 만나러 서재에 다녀올 때까지도.
“미뉴에트, 일어나 봐. 같이 산책 가지 않을래?”
로제는 그녀를 살살 흔들어 깨워보았지만 이 잠꾸러기는 도통 일어날 생각을 못 했다. 그래도 평소에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늦게 잤나? 고개를 갸웃한 로제는 미뉴에트가 더 잘 수 있도록 더 이상 깨우지 않고 홀로 방을 떠났다.
1층 응접실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로제는 운명처럼 그 전화를 받아들었고, 수화기에선 그녀가 고용한 탐정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장 그 집에서 나와요!
-당신 양어머니가 경찰서에서 사라졌단 말입니다!
로제가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일은 벌어진다. 방문 바로 앞에서 말하는 듯, 또렷한 여성의 목소리.
“로제? 내 딸?”
로제의 양어머니, 마담 자우어. 그녀가 돌아와 있었다.
로제가 그녀의 양어머니와 문 하나를 두고 대치하던 중. 똑똑. 이질적일 만큼 차분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로제의 등 뒤에서였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창문에 흰 조약돌 같은 주먹을 가져다 댄 채 다른 손의 검지를 제 입가에 올린 미뉴에트가 서 있었다.
“미뉴에트! 어떻게?”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보다 로제, 이리로.”
미뉴에트가 침착한 얼굴로 창틀을 잡았다. 얼마 힘들이지도 않은 것 같은데, 뻑! 하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창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로제는 긴장한 채 마담 자우어를 가로막고 있는 벽과 미뉴에트가 선 창문을 한 번씩 돌아봤다.
곧 그녀는 숨죽이고 미뉴에트의 안내를 따라 창문으로 몸을 빼냈다. 1층이었을 뿐더러, 평소 자주 하던 짓이라 어려울 것도 없었다. 독안에 든 쥐 신세를 벗어난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였다. 로제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생각을 말로 꺼내 정리했다.
“고마워, 미뉴에트. 덕분에 살았어. 진짜 납치당하는 줄 알았네! 휴우.”
“로제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이제 어디로 도망치느냐가 문제인데. 일단 정원에 몸을 숨겨야겠어. 길을 잃지 않는다면 저택 밖으로 나갈 수도 있고.”
옳은 판단이라는 듯 미뉴에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가 앞장서고, 어디든 따라가겠다는 것처럼 미뉴에트는 로제의 뒤에 찰싹 붙어 그녀를 따랐다.그러나 몇 발짝 떼자마자 미뉴에트의 기감이 곤두섰다. 무언가를 감지한 듯 고개를 치켜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다급하게 로제를 불렀다.
“잠깐! 그쪽은……!”
이미 로제는 상체를 굽힌 채 덤불 담장의 모서리를 돌고 있었다. 그녀의 맞은편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던 로제는 급히 몸을 멈춰 간신히 불상사를 피했다.
“오베르…… 아가씨.”
“로제!”
손톱으로 쇠 표면을 직직 긋는 듯 기괴한 목소리와, 위험을 감지하고 절로 커진 비명같은 목소리 두 개가 겹쳤다. 로제를 마주보는 건 이 저택의 정원사, 선셋이었다. 바람처럼 달려온 미뉴에트가 로제의 앞에 서서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선셋의 행색을 훑은 미뉴에트가 그를 경계하며 로제에게 물었다.
“로제, 저 자는?”
“아. 여기 정원을 관리해주는 정원사야. 선셋. 늦은 시간에만 나와서 미뉴에트는 못 봤을 텐데.”
설명해주던 로제도 낌새를 눈치챘는지 입을 다물고 섣불리 선셋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대치가 이어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선셋과 미뉴에트가 행동을 개시했다.
미뉴에트는 입 속으로 사이한 주문을 외웠고, 선셋은 그런 그녀를 본 체 만 체하며 오로지 로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선셋이 로제를 노린다는 사실을 눈치챈 미뉴에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곧바로 주문을 멈췄세웠다.
주문을 도중에 멈춘 대가로 정신에 뻗쳐 오는 요사스러운 혼란스러움을 무시하며 미뉴에트가 다른 주문을 외웠다. 상대를 고통스럽게 죽이는 주문 대신 진정 지켜야 할 사람을 지키는 주문이었다. 얼마 전 보여주었던 거대하고 반투명한 구체가 다시 한 번 로제와 미뉴에트를 중심으로 생겨났다.
혹여 제가 늦어 로제가 공격받지 않았나, 미뉴에트는 황급히 뒤돌았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로제는 알아서 척척 호신용 총을 들어 장전까지 마친 채 들고 있었다.
방어막에 튕겨나간 선셋이 울부짖었다. 그가 발악하며 피 묻은 송곳으로 방어막을 마구 내려치기 시작했다. 한 곳만 집중 공략하면 방어막도 버틸 재간이 없다. 쩌적, 쩌적.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잠깐 시간을 벌기 위해 생성한 것이었다. 너덜너덜해진 방어막이 몇 초나 더 벌어줄 수 있을까 가늠하며 미뉴에트가 말했다.
“로제, 이곳은 제게 맡기고…….”
“괜찮아. 잘했어, 미뉴에트.”
“로제?”
햇빛을 받은 로제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물로 깨끗이 씻은 유리를 에메랄드 보석 위에 겹쳐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은 눈동자가 선셋을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해온 일처럼 로제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총을 겨눴다. 즉사할 부위는 피해서, 옆구리 언저리를 노린 로제가 신중히 타이밍을 기다렸다. 로제의 평온함에 동화된 미뉴에트가 숨을 참고 소리를 죽였다.
“로제!”
그때 저 멀리서 무어 경이 달려왔다. 열심히 뛰어오는 것 같긴 한데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가 정확히 뭐라고 하는지는 알아듣기 어려웠다. 다만 그가 반투명한 방어막이 쨍그랑 깨지는 것을 보고 두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탕! 찰나의 딜레이도 없이 로제의 총이 불을 뿜었다. 반동에 흔들리는 상체를 간신히 지탱하며 총알이 제대로 날아갔는지 확인했다. 침착하게 쏜 덕분일까, 총알은 일직선으로 깨끗하게 날아가 선셋의 배를 뚫었다. 잠깐, 배?
‘헉, 죽는 건 아니겠지? 빨간 줄 그이긴 싫은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선셋은 죽지 않았다. 다만, 터졌다. 그는 어찌된 영문인지 검은 물로 화해 칠퍽한 물 웅덩이가 되어버렸다. 상식을 무시하는 현상에 벙찐 로제 앞에 무어 경이 당도했다. 그는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는 대신 그녀를 꽈아악 끌어안길 택했다.
“…….”
로제는 옆에 묵묵히 선 미뉴에트의 눈빛이 무척 따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미뉴에트는 입을 여는 대신 은근히 삐딱한 눈빛으로 무어 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충 ‘로제가 위험에 처하는 동안 약혼자란 놈이 뭘 했냐’ 같은 시선이었다. 로제의 안전을 확인하던 무어 경도 눈빛을 느꼈는지 오만불손한 눈빛으로 미뉴에트를 내려다 보았다. 대략 ‘그러는 넌 고작 허접한 방어막 하나로 뭘 어쩌려 했냐’ 같은 시선이었다.
둘의 소리 없는 딜 교환을 로제도 눈치챘다. 그동안 바빠서 무시해왔는데, 이 둘 사이가 안 좋은가 보지? 알겠으니까 이 긴박한 상황에서 눈싸움보다는 생산적인 활동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 로제가 박수를 짝짝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무어 경,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 사실 저택에 양어머니가…….”
먼저 로제는 무어 경에게 그간의 경위를 짧게 설명했다. 마담 자우어가 탈출했고 자신을 찾아왔다. 아직 저택 안에 있을 것이다. 다행히 그녀의 약혼자는 그녀의 말을 그대로 믿어주었다. 한쪽을 처리한 로제가 다른 쪽에게 말했다.
“미뉴에트, 너는 나랑 같이 제릴에게 가자. 이 소식을 알려야겠어.”
“……제릴? 그가 여기에 있나요?”
“응?”
로제가 두 눈을 끔뻑였다. 미뉴에트는 아주 드물게 당혹스러운 낯이었다. 입을 몇 번 열었다 닫던 그녀가 혼란스러워하며 로제에게 부탁했다.
“이상한 말인 건 알지만, 혹시 미뉴에트가 혼자 제릴에게 가봐도 될까요?”
“응? 혼자?”
“네, 그에게 질문할 게 있어요. 로제는 로제의 약혼자를 신경써야 할 것 같고요.”
흰 도자기 같은 손이 무어 경을 가리킨다. 그는 어느새 아까 로제가 나왔던 창문으로 몸을 집어넣고 있었다.
“……음, 그럴래? 그럼 미뉴에트, 네게 제릴을 맡길게.”
“네, 맡겨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미뉴에트는 자신도 곧장 무어 경을 따라 창문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작은 몸은 창문을 수월하게 통과했고, 순식간에 마담 자우어를 제압한 무어 경을 지나쳐 서재로 올라갔다.
서재는 따뜻한 불빛이 무색하게 어둡고 고풍스런 분위기가 맴돌았다. 제릴은 여느 때와 같이 그곳에서 책이나 펜, 종이 따위를 붙들고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왜 여기에서 저러고 있단 말인가? 미뉴에트는 잠시, 제릴과 자신이 나누었던 대화가 혹시 제 꿈이었는지 돌아보았다. 그녀가 꿈을 꾸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으므로 그건 틀림없이 현실이었다.
“미뉴에트? 뭐야, 갑자기. 바쁘니까 이따가.”
구겨진 종이와 아무렇게나 펼쳐진 책,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펜 사이에서 미뉴에트의 존재를 느낀 제릴이 고개를 들지도 않고 말했다. 황당해서 말문이 막힌 미뉴에트는 껌뻑껌뻑 그를 바라보다가, 자신이 이곳에 왜 왔는지 간신히 상기시키고 발을 재게 놀려 그의 앞에 섰다.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제릴, 떠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어어, 그랬지. 근데 지금 좀 바빠서. 이따 이야기하자고.”
“…….”
제릴은 여전히 책에 코를 박은 채였다. 이럴 때 미뉴에트는 웬만해선 상대를 기다려주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도무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시선은 책에 고정한 채 한 손으로 바쁘게 종이가 무언가를 끄적인다. 그 모습을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미뉴에트는 검지를 들어 제릴의 얼굴을 가리던 책을 아래로 쭉 밀었다. 아주 가벼운 동작이었는데도 제릴은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책을 들던 팔을 내려야 했다.
“지금 바쁘다니까?!”
“왜 도망치지 않은 거예요?”
“……후우.”
뻑뻑하게 충혈된 두 눈을 가볍게 문지른 그가 책을 다시 들어올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심했을 뿐이야.”
“어떤?”
“도망치지 않겠다고.”
“살고 싶은 건 여전한가요?”
“당연하지. 도망치지 않겠다는 것뿐이야.”
그 무어 경이라는, 로제의 약혼자라고 떠드는 그 남자도 수상하고. 그가 있는 곳에 로제를 남겨둘 순 없잖아. 너도 그렇고. 이런 말이 제릴의 입 안을 맴돌았지만 그는 괜한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도망치려던 자신을 비웃던 루카스 무어의 모습을 떠올리자 펜을 쥔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그의 단호한 말에 미뉴에트의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나왔다. 제릴이 도망치지 않고 이곳에 남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미뉴에트의 심장을 보이지 않는 손이 목구멍까지 들어올리고 있는 듯했다. 그 감각은 제릴의 확언에 씻은 듯 사라져, 미뉴에트의 심장은 제자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녀의 손발에도 다시 따뜻한 피가 돌았다. 다행이야.
안심한 미뉴에트는 곧장 제 몸뚱아리보다 큰 바위를 들어 제릴의 마음 속 호수에 내던졌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제릴, 마담 자우어가 서를 빠져나와 저택에 왔어요. 아…… 지금은 무어 경에게 제압당했는데.”
냅다 핵폭탄급 사실을 배려 없이 떨구었다는 소리다.
“뭐?!”
예상대로 제릴이 기겁했다. 다시 특유의 망연함을 되찾은 미뉴에트는 나붓한 목소리로 그에게 방금 있었던 사건을 간단 요약해 들려주었다. 서재에 있던 전화기를 들어 그것이 끊겨있음을 확인한 제릴은 미뉴에트의 말이 온전히 사실임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골 아프단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 제릴은, 가타부타 말을 더 얹지 않고 빠르게 상황 판단을 마쳤다. 그는 방금까지 자신이 휘갈겨 쓰던 종이를 제 안주머니에 쑤셔넣고, 미뉴에트와 함께 서재를 벗어나 마담 자우어가 있는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은 아수라장이었다. 마담 자우어와 로제, 무어 경 셋만 있을 줄 알았던 그곳에는, 마담 자우어를 고발한 증인 해서 화이트와 로제가 고용한 탐정 마이어도 있었다. 언제 온 것인지 모를 그들은 각각 총 한 자루를 들어 무어 경에게 겨누고 있었다.마담 자우어는 여전히 포박되어 있었고, 로제는 다행히 아무 문제 없어 보였다. 설명을 요하는 제릴의 눈빛에 한숨을 푹 쉰 로제가 자신도 총을 꺼내 천장, 정확히는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를 겨눴다.
“모두 움직이지 마세요.”
“……!”
이런 원시적인 방법을 쓰고 싶진 않았는데. 은근슬쩍 미뉴에트가 로제의 앞에 비스듬히 서서 다른 이들을 노려보았다. 그 모습이 꼭 주인을 지키려는 고양이 같아 로제는 상황에 맞지 않게 속으로 조금 웃고 말았다. 무어 경이 악령이라고 주장하는 탐정과 해서 화이트의 말을 로제가 반박하고, 무어 경은 오히려 자신이 로제를 위해 악령을 제거했다고 주장했으며, 마담 자우어는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흘리며 킬킬 웃었다. 총을 빼들었는데도 어째 상황이 정리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갑자기 저택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하는 굉음과 함께 샹들리에가 떨어질 듯 크게 휘청였다. 그리고 벌컥, 지하실이 저절로 열렸다. 사람들의 비명소리, 공사장 소리, 무언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다가…… 검은 손이 하나 불쑥 튀어나왔다.
홀로 튀어나온 팔이 두른 각 잡힌 검은 소매는 먼지투성이였지만 굉장히 익숙했다. 로제는 그제야 오늘 하루, 이 저택에서 사용인을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곧 똑같은 손이 수없이 문을 통해 빠져나왔다.
미뉴에트는 눈만 힐끗 돌려 로제와 무어 경을 확인했다. 무어 경은 로제를 이 저택 밖으로 내보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관이 열리지 않는지, 그 여유롭던 무어 경조차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역시 이 의식은 실패했구나. 미뉴에트는 담담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선셋이라 불리던 정원사를 조우했을 때부터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이 저택에 깔린 거대한 의식의 주인은 틀림없이 로제였다. 그러나 그 정원사를 마주하는 순간, 의식의 주도권이 그에게 넘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원사가 로제를 해치려 한 것을 보아선, 아마 하극상이겠지. 우습지만 같은 옛 영주를 모시는 사이에서도 이런 일은 의외로 빈번했다. 의식을 치루는 주체는 인간이기 때문에.
깨어나고 있다…… 지하의……. 불길한 맥동을 감지한 미뉴에트는 각오를 다졌다. 사실 각오라고 할 것도 없이, 그녀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음 한 구석에서 이 의식이 성공하질 않길 바랐던 탓이다. 본인조차 인지하지 못하던 아주 사소한 바람이었다. 말미잘처럼 우글거리던 손이 다시 지하실로 빨려들어간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단단히 일어나기 전에나 감도는, 불온한 침묵이 저택을 채웠다.
찌지직. 침묵이 악몽 같은 현실 앞에서 무참히 찢겨나간다. 그이이이익, 절대 인간이 낼 수 없는 괴상한 울림과 함께 괴생명체들이 지하실에서 뛰쳐나왔다. 지하실이 울컥울컥 뱉어낸 생명체들은 사용인 옷차림 그대로였는데, 옷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액체가 군데군데 묻어있었다. 얼굴과 발이 있어야 할 자리엔 말미잘 같은 촉수가 흐느적거렸다.
미뉴에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허락되지 않은 기이하고 불결한 존재들 중 저것과 비슷한 몇 개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지금 중요한 건 저것들의 정체를 따지는 게 아니지. 미뉴에트는 추측을 멈추고 곧장 마음을 가다듬었다. 침착하게 주문을 중얼거렸다. 그녀의 입에서 문장이 끝맺어질 때마다 팔이 하나씩 더러운 피를 뿜으며 터져나갔다.
다른 이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괴생명체를 겨냥한 총구에서 끊임없이 불이 뿜어졌다. 보통 인간의 급소라고 생각되는 곳은 심장이 있는 가슴팍과 머리. 그러나 저 괴생명체들은 급소를 맞아도 멈추는 법 없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그나마 발을 쏘아 넘어트리는 것 정도가 유효했다.
그런 상황에서 미뉴에트가 외는 주문은 획기적이라고 해도 좋으리만치 효과가 있었다. 괴생명체들의 말미잘 대가리가 픽픽 손쉽게 터져나갔다. 찐득하니 보기만 해도 속이 역해지는 검은 액체가 저택 이곳저곳에 튄다는 것만이 유일한 단점이었다. 의식이 망쳐졌다고 생각한 미뉴에트의 손속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끊임없이 주문을 읊었다. 시원찮은 고문 대신 호쾌한 살상에 중심을 둔 주문 선정이 돋보였다.
그러나 미뉴에트 혼자로는 무리였다. 수가 너무 많았다. 결국 쉬지 않고 괴생명체를 처리하던 미뉴에트의 작은 코에서 빨간 핏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를 악문 그녀가 고개를 돌려 무어 경을 찾았다. 더 이상은 무리야. 무어 경과 눈이 마주친 미뉴에트가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아주 단호하게 말을 걸었다.
“가지고 있는 게 있죠?”
“…….”
“그걸 써야 해요. 얼른.”
무어 경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다만 천천히 품 안에서 괴상하게 생긴 날붙이를 꺼내들어, 역수로 쥐고 알아듣기 힘든 주문을 중얼거렸다. 그가 주문을 끝마치며 날붙이가 위를 향하도록 똑바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꾸물대던 괴생명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멈춰섰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줄줄 녹아내려 사용인들이 입던 유니폼만 남긴 채 검붉은 웅덩이로 화했다.
무어 경에게서 칼을 건네받은 로제는 이제 밖으로 나갈 수 있나 싶어 현관문을 밀었다. 하지만 괴생명체가 모두 소멸했음에도 문은 꼼짝하지 않았다.
“문을 막고 있는 걸 제거하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무어 경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건 저쪽이 아마 알고 있겠군요.”
무어 경이 지목한 것은 마담 자우어였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미뉴에트는 어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그것은 꼭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당장이라도 화면 구석에서, 등장인물들이 보지 못하고 지나친 사각에서, 당장 저 문에서.무언가,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오간 것 같다. 미뉴에트는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계속 문을 주시했다. 문득 마담 자우어에게 대꾸하는 탐정의 목소리가 귓가에 대고 말한 것처럼, 아주 크고 선명하게 들렸다.
“당신은 계속 정보도 안 될 이상한 말만 하고 있어요. 마치 무슨…… 마치…… 시간이라도 끌려는 것처럼.”
그 말이 스위치였던 것처럼 소리도 없이 저택에서 빛이 사라졌다.
“하하하하하!!!”
마담 자우어의 벽을 긁는 듯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진다. 미뉴에트는 현관 너머에서 새어드는 붉은 햇살을 노려보았다. 눈을 뗄 수 없었다. 제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조차도 긴장에 먹혀 뇌에 닿지 못하고 귓가에서 사그라들었다.
“죄송합니다.”
“네?”
“……죄송합니다. 전부…… 전부 제 오착입니다.”
무어 경의 떨리는 목소리. 미뉴에트는 작게 숨을 들이키며 입을 벌렸다. 뱉으려던 말은, 아마도 ‘로제, 피해요’였을 것이다. 그렇게 말해야겠다, 정확히 떠올린 것이 아니라 본능이 목소리를 타고 튀어나가려던 것이어서 미뉴에트 본인도 정확히 알기 어려웠다.
굳게 닫혀 있던 현관문이 활짝 열렸다. 붉은 석양이 찌를 듯 저택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거대한 석양빛을 역광으로 받으며 서있는 것은…… 저택 안을 물끄러미 들여보고 있는 그 자는…… 분명히 아까 만났던 정원사, 선셋이었다.
허공에 선이 그어진다. 그것을 눈치채자마자 미뉴에트는 로제에게 손을 뻗었다. 손끝이 로제의 옷깃에 닿기 직전, 공간이 조각나 흐트러졌다. 간발의 차이로 로제를 붙들지 못한 미뉴에트의 사위가 어지러워졌다.
“…….”
미뉴에트는 입을 꼭 다물고 주변을 경계했다. 숲을 빠져나온 이래로 이렇게까지 기감을 곤두세워본 적이 없는데, 미뉴에트는 그것을 자각하지도 못하고 눈을 굴리며 익숙한 검은 머리카락과 빨간 머리카락을 찾느라 바빴다.
지하에서 새어 나오는, 감출래야 감출 수 없는 끔찍한 기운이 불쾌했다. 지하의 존재도 그것을 숨길 생각이 딱히 없어 보였다. 그 사이한 기운이 계속 생각을 방해한다. 미뉴에트는 뇌혈관이 타들어 가는 듯한 기분에 짧게 몸서리쳤다. 이만한 힘을 사용하다니, 그 선셋이라는 자가 저택의 모두를 살려둘 생각이 없다는 것쯤은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침착하게 따져보았을 때, 미뉴에트가 선셋을 방해할 이유는 하등 없었다. 어차피 그녀의 목표는 이곳에서 옛 영주에 얽혀 죽는 것이었으므로. 그렇게 죽어서, 부모가 있는 곳에 가려는 생각이었다. 옛 영주의 힘으로 죽는다면 혹시 같은 곳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부러 이런, 절대 곱게 죽지 못할 묏자리에 직접 기어들어 온 것은 다 그런 이유였다. 원치 않게 목숨을 구함 받아, 이곳에 도달할 때까지. 미뉴에트는 내내 그것을 위해 살아왔다. 살아도 살아왔다고 말할 수 없이 비루한 삶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간절하게 로제와 제릴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었다.
이 의식의 주인이 바뀌었다면 또 어떻단 말인가? 로제나 선셋이나 목표는 비슷해 보였다. 옛 영주를 이 땅에 강림시키는 것. 그 목적은 다르겠지만, 미뉴에트로선 이 한 목숨이 제물로써 소비되기만 하면 되었다.
“……지하인가?”
미뉴에트가 짧게 중얼거리곤 입술을 감쳐물었다. 희미한 기운이 그녀가 최대한 넓게 펼친 기감에 스치듯 잡혔다. 꿈에서도 잊을 수 없고, 이 조각난 세계에서조차 그녀를 강하게 이끄는…… 오직 로제와 제릴에게서만 느껴지던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생명력이. 그것을 깨달은 순간 미뉴에트는 그들을 따라 지하실로 몸을 날렸다. 어떻게 해야겠다, 같은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다만 그들이 이 상황을 정면 돌파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사실만 깨달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둘이 아주 높은 확률로 죽으리란 사실도.
작은 발이 날듯이 계단 위를 굴렀다. 힘차게 달리는데도 미뉴에트의 몸은 허공을 밟듯 사뿐사뿐했다. 계속 생각했다. 자신을 흔쾌히 받아들여 준 로제에게, 이 의식이 자신을 잡아먹어 줄 때까지 충성을 다하겠다고. 그러나 그 단단한 결심은 그녀와 함께 살아가며 의아함으로 변질되었다. 계속, 계속 궁금했다. 로제는 왜 이런 인신 공양 의식을 준비한 것일까. 왜 죽으려던 것일까. 미뉴에트 자신이 지금까지 보아 온 로제는 절대로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로제!”
“……미뉴에트?”
챙강! 이윽고 미뉴에트가 지하실에 뛰어들었다. 통로에 동상처럼 서 있는 무어 경은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제릴은 쓰러져 있었고, 단검을 단단히 쥐고 붉은빛을 띠는 유물을 강하게 내려치던 로제가 깜짝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로제의 눈이 이 이상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래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로제가 비명에 가깝게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미, 미뉴에트. 너, 울어?!”
그 말에 미뉴에트는 손을 들어 제 뺨을 훔쳤다. 투명한 물로 손과 볼이 흥건했다. 그제야 미뉴에트는 자신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뭐가 그리 서러운지 소리 없이 눈물만 주륵주륵 쏟아내던 미뉴에트는, 제 눈가를 몇 번 훔치다가 닦아내는 것을 포기하고는 로제에게 물었다.
“로제, 궁금한 게 있어요.”
울고 있으면서도 미뉴에트의 목소리는 또렷하기만 했다. 로제가 제 손에 들린 단검과 유물, 그리고 미뉴에트를 번갈아 보며 곤란한 낯을 했다.
“어어, 뭔데? 미뉴에트가 궁금해하는 건 다 말해줘야지. 근데 잠깐만 기다려줄래? 지금 내가 바빠서. 이것만 깨부수고 들어줄게, 잠시만.”
“로제는 죽고 싶은가요?”
“엉?”
미, 미뉴에트가 방금 뭐라고……. 로제가 자신이 들은 것이 맞나, 황망한 얼굴로 미뉴에트를 바라보았다. 두어 번 눈을 껌뻑인 로제는 그제야 미뉴에트가 한 말이 자신을 책망하는, 그런 불손한 의미가 아니며, 이 질문이 단지 문장 그대로의 의미를 품고 있음을 깨닫고 다시 두어 번 더 눈을 껌뻑였다.
“……그렇진 않지? 살고 싶지, 아무래도.”
“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벙한 대답에도 미뉴에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눈물도 그치더니 살짝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로제가 지금 부수려는 것은…… 이곳을 지배하는 자의 유물이죠. 정확히는 불손하게도 그 유물에 더러운 발을 들이민 선셋이라는 자의 영혼.”
“어?”
“미뉴에트는 거듭 생각했어요. 로제가 이 의식에 자기 자신까지 제물로 묶어둔 게 이상하다고. 로제는 죽으려는 게 아닌데.”
어느샌가 로제의 곁에 다가선 미뉴에트가 팔을 쭉 뻗었다. 손바닥을 보이며 로제에게 손을 내민 그녀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로제는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것을 확신하지 못해서 지금까지 쉬운 답을 찾지 못했어요. 선셋, 저자가 이제 막 이 의식에 관여했다고 착각해버린 거예요. 사실은 훨씬 이전부터 의식을 비틀어버리고 있었는데. 미안해요, 로제. 미뉴에트의 실수예요.”
로제는 살고 싶다. 제릴처럼 로제도 살고 싶어 했다. 본인의 확답을 들은 미뉴에트는 그제야 가슴 속에 묵직하게 얹혀 있던 것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로제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했을 때 모든 게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로제는 죽으려던 게 아니야. 그렇다면 답은 명확했다. 선셋이 의식을 장악해 로제마저 제물로써 의식에 묶어버린 것. 그리고 모든 게 갖춰졌다고 생각한 지금,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할 일이 명확해진다.
“저기, 미뉴에트. 미안.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어. 선셋이 뭘 했다고?”
“로제가 미안해할 건 아무것도 없어요. 로제, 그 단검을 미뉴에트에게 빌려주세요.”
“어? 왜?”
미뉴에트가 싱긋 웃었다. 죽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이 중 한 명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죽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살아야 했다. 미뉴에트 자신처럼 살아도 삶을 살 줄 모르는 이보다는, 로제나 제릴처럼 온 힘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이. 그런 이들이 사는 것이 옳았다.
“미뉴에트가 할게요. 로제는 이 저택의 주인이니까 힘내는 것뿐이죠? 그럴 필요 없어요. 미뉴에트가 있으니까요.”
자. 검을 빌려주세요. 교대예요. 얼마나 검을 세게 쥐었으면, 예쁜 손에 흉이 지겠어요. 미뉴에트의 목소리는 꼭 새가 지저귀는 것 같았다. 부드럽고 조곤조곤하게, 신비로운 목소리가 로제의 귓바퀴를 따스한 봄바람처럼 휘감았다. 어린애에게 이런 힘 쓰는 일을 맡겨도 되나? 하지만 미뉴에트는 정령이잖아. 이럴 때를 위해 힘을 아껴두지 않았을까? 저도 모르게 로제의 손이 천천히 올라왔다.
문득 미뉴에트는 강렬한 시선을 느끼고 슬쩍 고개를 돌려 제 뒤에 선 무어 경을 흘겨보았다. 피를 토했는지 그의 앞섶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주문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몸에 부하가 온 거야. 우주 밖의 존재를 섬기는 데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과 빛나는 이지가 미뉴에트의 귓가에 진실을 속삭였다.
그제야 그의 목에 불끈 솟아난 핏줄이나 악다문 턱, 새하얗게 질린 낯빛 등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는 마음이 급해서 몰랐는데, 그가 온 힘을 다해 주문으로 제릴을 묶어두고 있었다. 그는 조금 전까지 목이 부르트도록 소리치며 로제를 만류하더니, 미뉴에트가 나타나자 입을 꾹 다물고 급변한 상황을 파악하기 바빴다. 드물게 미뉴에트와 무어 경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미뉴에트의 시선이 제릴을 향했다. 그는 무어 경의 주문에 단단히 붙들려, 바닥에 엎어져 벌레처럼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미뉴에트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금세 인과를 파악했다. 선셋, 그 자가 기어이 제릴에게까지 마수를 뻗쳤구나. 서재에서 고대어를 번역하고 서적을 들여다보는 일에 집중하면서도, 제릴은 미뉴에트가 다가오면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돌아보곤 했다. 그래, 제릴은 언제나 미뉴에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지금 이 자는 어떤가? 듣기 싫은 비명을 꽥꽥 질러대면서 오로지 붉은 수정 형태를 한 유물과 로제의 손에 들린 단검에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이마에 돋아난 세 번째 눈마저 붉게 충혈되어 있어, 그 모습이 참을 수 없이 기괴했다. 절대, 절대로, 그는 절대로 제릴이 아니었다. 살고 싶어 하던…… 도망치지 않고 당당히 맞서 싸우겠다던 제릴이 아니었다. 묵묵히 제릴을 바라보던 미뉴에트의 눈에서 다시 한번 큼지막한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졌다.
그것을 똑똑히 목격한 로제의 가슴 속에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불길이 크게 솟아났다. 저 예쁜 애가 또 울어. 내 정령이 운다고. 나랑 계약한 소중한 미뉴에트가! 로제가 멍하니 생각했다. 선셋에게 몸을 지배당한 제릴을 보며 울었다고! 제릴뿐만이 아니야, 저택에 깃든 정령인데 지금 선셋이랑 지하실 괴물 때문에 저택이 개박살났잖아! 눈물 날 만하지! 잠깐, 나도 눈물이 나는 것 같은데?! 이 저택이 얼마짜리인데……!
단검을 쥔 손에 바싹 힘이 들어간다. 의기충천한 로제는 들어 올리던 손을 멈추고 다시 단검을 바투 잡아 유물을 겨눴다. 그에 흠칫 놀라 미뉴에트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무어 경도 다시 “안 돼!” 비명을 질렀다.
“걱정하지 마, 미뉴에트. 이 언니가 해결해줄게.”
미뉴에트의 물기 어린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로제, 잠깐……! 만류하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결심을 굳힌 로제가 손을 높게 쳐들었다가 유물을 강하게 내리쳤다. 키잉! 부러진 것은 단검이었다. 이를 아득 문 로제는 반절만 남은 단검을 다시 한번 유물에 들이박았다.
픽. 쩌저적……. 유물의 틈새에서 새어 나오던 붉은 섬광이 지하실을 가득 메웠다. 기어코 로제 오베르가 지하실의 유물을 부순 것이었다.
끔찍한 비명과 함께 제릴의 이마에 달려 있던 세 번째 눈이 녹아내리며 소멸했다. 선셋이 사라졌구나, 그 사실에 로제가 뿌듯하게 웃었다. 눈물범벅인 얼굴로 달려오는 무어 경과, 범벅까진 아니지만 눈물이 글썽거리는 얼굴로 제게 손을 뻗는 미뉴에트. 시야가 완전히 새하얗게 물들기 전, 로제가 한 생각은 ‘와, 저 사람들은 우는데도 참 예쁜 얼굴이네……. 눈물을 닦아주지 못해서 아쉽다’였다.
제 유물을 부순 간 큰 인간이 대체 어떤 이인가, 우주 밖의 거대한 존재가 지상을 굽어살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미뉴에트를 지나쳐, 무어 경은 후들후들 떨며 기어서 로제에게 도달했다. 기어이 유물을 부순 그녀는 잠든 것처럼 유순히 눈을 감고 축 늘어져 있었다.
“……로제?”
불러도 답이 없다. 그에 새삼스럽게 무어 경은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떨며, 자신에게서 떨어진 핏방울을 닦아내기 위해 로제의 볼을 쓰다듬은 그는 로제의 몸이 아직 온기를 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공양을 예정대로 진행하자. 그가 원래 계획하고 있던 것은 이 지역 모든 인간을 깡그리 옛 영주에게 바쳐버리는 아주 거대한 의식으로, 이미 의식을 치르기 위한 모든 조건을 충족시켜둔 상태였다.
이 지역의 모든 사람을 바친다면, 로제 오베르를 되살려낼 수 있겠지. 숨을 헐떡거리며 로제의 몸을 고쳐 안은 그가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의식을 치를 장소로 최대한 빨리 가야 했다. 로제의 몸이, 정말로, 죽어버린 사람처럼, 싸늘해지기 전에.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공포감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러니까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안 돼요.”
지하실을 나서려는 무어 경을 막아선 것은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미뉴에트였다. 이 소녀는 뺨이 녹아내릴 것처럼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도, 그처럼 몸을 가누기 힘들어할 만큼 떨면서도 그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무어 경은 멍한 머리로 미뉴에트를 단숨에 찢어 죽이려다 멈췄다. 아, 로제가 저 인간을 아끼는데. 되살아났을 때 저 인간이 죽어 있다면 틀림없이 슬퍼할 텐데. 우습게도 무어 경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제 혀로 그리던 주문을 멈춰 세웠다. 대신 깜짝 놀랄 만큼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비켜줘…….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어. 살릴 수 있다고.”
“안…… 돼요.”
미뉴에트는 꿋꿋했다. 무어 경만큼이나 로제의 부활을 바랄 그녀였음에도, 꿋꿋하게 그 앞을 막아서고는 슬피 울며 도리질 쳤다.
“어떤 방법을 쓰려는지 알아요. 하지만 로제는…… 그렇게 살아나봤자 기뻐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선 안 돼요. 그런 곳에서 홀로 살아남는 건, 끔찍해요. 로제가 정녕 그런 걸 원할 것 같나요……. 그 어느 날 깊은 숲에서, 주문의 대가로, 동시에 주문을 실패한 대가로 생겨난 피와 살과 죽음의 강을 홀로 뚫고 나온 미뉴에트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럼…… 그럼 어쩌자는 건데?! 이 여자를 이대로 내버려 둘 셈인가? 비켜!”
무어 경이 로제를 붙들지 않은 손을 강하게 휘둘렀다. 성하지 않은 몸으로 쓴 주문은 미뉴에트의 몸에 닿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사라졌다. 쿨럭, 쿨럭! 무리한 무어 경의 입에서 진득한 핏물이 쏟아졌다.
“다른 방법이 있어요.”
기이할 정도로 차분하고 선명한 말투였다. 무어 경이 피와 내장 조각을 쏟아내다 말고 미뉴에트를 바라보았다. 미뉴에트는 자신이 지옥에서 홀로 살아나왔던 날을 반추했다. 그녀는 그 재능이 얼마나 희귀하고 찬란한 것인지 인간의 단어로 표현하기엔 문장이 너무나도 거추장스러워질 만한 천재였고, 특히 주문에 대단한 자질이 있었다.
교단에서 우연히 접해 읽었던 <쟌의 서>. 주문서에 적혀있던 꿈 주문을 멋모르고 사용했던 미뉴에트는 꿈속에서 옛 영주와 조우했다.
교단이 섬기던 존재는 아니었으나 그에 버금가는 존재로, 심연의 제왕이라 불리던 그는 미뉴에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녀를 가상히 여겼다. 선악의 구별조차 안 되던 어린 나이에 꿈을 통해서라지만 잠시나마 우주 너머에 닿은 미뉴에트를 그는 눈여겨보았고, 훗날 벌어진 참상에서 그녀만을 구해주었다. 위대한 존재에게 있어 미물 한 마리를 구하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당장 그 당사자가 그들의 앞에 있지 않던가. 자조한 미뉴에트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뉴에트가 할 수 있어요. 다시 한번 그 분께 부탁드릴게요. 이번에는 대가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미뉴에트의 목숨이라도 바쳐서.”
어둡고 짙은 루비에 빛이 번뜩였다. 혜성을 담은 것처럼 번쩍거리는 눈빛으로 미뉴에트가 단호하게 말을 끝맺었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것이 옳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거예요.
“고작 네 한 목숨 바쳐서 될 일이라고 생각하나? 사람을 되살리는 일인데?”
“미뉴에트가 어떻게든 되게 할 거예요. 목숨을 제물로 바칠 거라면 관계없는 이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목숨부터 거세요.”
“…….”
“당신도 알겠죠. 이 방법 외에 로제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어요.”
“……네가 말한 그 옛 영주. 지금 당장 불러내……. 당장.”
“재촉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거예요.”
미뉴에트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아까 부러진 단검의 날을 주워들었다. 힘을 잃고 평범한 날붙이가 되어버린 그것으로 손끝을 깊숙이 베자 금세 몽글몽글 피가 배어 나왔다. 제 피로 바닥에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오염될 것만 같은 문양을 그려가는 미뉴에트를 바라보던 무어 경은 내키지 않는 손으로 지하실 외진 곳, 제일 안전해 보이고 덜 더러운 곳에 로제를 조심히 눕혔다.
“내가 뭘 하면 되지?”
“……강림 주문 중에 쓸 줄 아는 게 있나요?”
기묘한 동맹이 맺어졌다. 목표는 로제를 되살리는 것. 동맹의 기한은 로제가 되살아날 때까지.피로 문양을 그리고, 돌을 깎아 배열한다. 서로의 배경을 모르고 또 그 능력의 끝이 어디까지인지도 모르면서, 둘은 오로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착착착 준비해나갔다.
강림 주문을 준비하는 데 너무 몰두한 탓에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하실 한쪽에 얌전히 눕혀진 로제의 손이 움찔, 조금 움직이는 것을.
끔뻑끔뻑.
“……큼. 무어 경? 미뉴에트? 둘이 뭐 해요?”
뻑뻑한 목을 가다듬은 로제가 물었다. 꿈지럭꿈지럭 돌을 배치하고 문양을 그리던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멈칫 굳었다. 기이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곧장 로제에게 달려와 줄 줄 알았건만, 무어 경과 미뉴에트는 그 자세 그대로 굳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흠…… 흠! 크흠! 크흐으음! 저…… 저기요? 아, 목 아파. 무어 경, 제 말 안 들리시나요? 미뉴에트, 뭐 해?”
“…….”
“…….”
“어…… 음. 진짜 안 들리나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무어 경……?”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 목소리가 쉬어 자신을 못 알아보는가 싶어진 로제가 더욱 거칠게 헛기침했다. 최대한 큰 목소리로 두 사람을 재차 부르자 그제야 그들이 삐걱삐걱 로제를 돌아보았다. 두 발 달린 생선이 자신에게 유창하게 말 걸어오는 광경이라도 목격했을 때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제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과 저러다 턱 빠지지 싶으리만치 벌어진 입. 무어 경의 손에서 돌멩이가 툭 떨어져 처량하게 바닥을 굴렀다. 로제는 어쩐지 머쓱한 기분이 되었다. 저 두 사람, 왜 저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지. 그나저나 여긴 어디야, 여전히 지하실인가? 나는 또 왜 여기 누워 있고. 로제가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뻐근한 전신에 다 죽어가는 신음성을 냈다.
“로…… 로, 로제!”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었는지 대경실색한 무어 경이 잽싸게 달려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 다급한 무어 경의 발짓에 그가 위치에 맞게 두던 돌이 전부 엉망진창으로 흩어졌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 아이고……. 죽겠다.”
“로제, 말도 안 돼, 어떻게.”
로제를 품에 안은 무어 경이 돌연 뜨거운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에고, 왜 또 울고 그런담. 로제는 천 근 같은 손을 뻗어 그의 창백한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차가운 피부 위에서 흐르던 뜨거운 눈물이 로제의 손끝에 스며들며 사라졌다. 무어 경은 그런 로제의 손등 위에 제 손을 겹치고, 제 얼굴을 그녀의 손에 더욱 깊게 묻느라 여념이 없었다.
로제가 살았다. 스스로 일어나서 자신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가 눈을 뜨기 전 세상과 지금의 세상, 다른 것은 오로지 그녀의 존재뿐인데 피부에 닿아오는 온도 자체가 달랐다. 이쪽이 훨씬…… 따뜻했다. 무어 경은 그제야 자신이 추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로제가 그의 곁에 없다는 사실만으로 세상은 얼어 죽어버릴 것처럼 차가웠다. 긴 척추를 타고 말도 안 되는 쾌감과 만족감이 자르르 흘렀다. 요동치는 제 심장 소리가 로제의 가는 숨소리를 덮어버려, 그것만이 불만이었지만, 또 그 불만 따위는 금세 잊어버릴 만큼 행복했다.
그러나 곧 같은 방향에서 불길한 전율이 느껴졌다. 똑같이 그의 얼굴에서부터 시작된 말소의 감각. 얼굴을 덮고 있던 불유쾌한 껍질이 부서지는 아득한 감각이. 그의 외모를 바꾸었던 주문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럴 리가. 아직 분명 기한이 남아 있었는데……! 행복하게 눈물 흘리던 것이 먼 과거인 것처럼 무어 경의 얼굴이 공포에 싸늘히 질렸다.
그가 비틀거리며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뒤로 물러났다. 당황한 로제가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얼굴이 여전히 아름다우며,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아무런 이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속삭이며 로제는 언제나 그래왔듯 단숨에 무어 경의 부정적인 감정을 지워냈다. 모든 것이 다 괜찮아졌다. 살아 돌아온 연인이 눈앞에 있었다.
죽음에 의해 갈라질 뻔했던 연인이 기적처럼 재회했다면 남은 것은 단 하나. 감은 두 눈 위로 부드러운 키스가 내려앉았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미뉴에트가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로제, 미뉴에트가 자리를 비키는 게 좋을까요?”
“꺄악! 맞다! 미뉴에트!”
로제가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미뉴에트의 두 눈은 촉촉이 젖어 있었는데, 로제의 생존을 알자마자 펑펑 눈물을 흘리다가 이어지는 광경을 보고 뚝 그친 흔적이었다. 미뉴에트의 얼굴은 평소와 별다른 바 없이 무표정했다. 차갑고 냉랭한 표정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로제는 그 냉담한 낯에서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미뉴에트는…… 토라져 있었다!
로제는 급히 손깍지 끼고 있던 무어 경의 손을 빼냈다. 그가 아쉬운 듯 침음을 흘리며 다시 손을 엮으려 했지만, “잠시만요!” 단호한 거부와 함께 그를 밀어낸 로제가 미뉴에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미뉴에트…….”
“로제. 아직 움직이지 마세요…….”
로제가 제 쪽으로 다가올 기미를 보이자 무표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미뉴에트가 한달음에 달려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로제의 몸은 여전히 무어 경에게 안겨 있는 채였다.
“미뉴에트, 음, 너를 잊은 게 아니라……. 이게 아니지, 몸은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
“네…… 네. 미뉴에트는 괜찮아요. 멀쩡해요. 그보다 로제야말로 몸은 괜찮은가요? 그 수정을 부쉈는데…….”
“나도 멀쩡해. 힘을 너무 썼는지 팔이 좀 아픈 것만 빼고.”
으, 이게 틀림없이 내일 근육통 올 것 같아. 로제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자 미뉴에트가 즉시 팔을 뻗어 작은 손으로 그녀의 팔을 조물조물 안마했다.
“로제, 로제는…… 신인가요?”
“뭐?”
뜬금없는 소리에 로제가 고개를 돌려 미뉴에트를 바라보았다. 미뉴에트는 시선을 로제의 팔에 고정하고 있었다. 눈을 내리 까느라 나붓이 내려앉은 그녀의 빛바랜 속눈썹이 물에 젖어 날개가 무거워진 나비처럼 잘게 떨렸다. 그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붙들리지 않은 반대편 팔로 눈물 흐른 자국이 있는 미뉴에트의 뺨을 로제가 살짝 훑었다. 그 손길과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무어 경의 질투를 느끼며 미뉴에트가 말했다.
“속으로 계속 빌었어요. 제발 로제가 살아 돌아오게 해달라고.”
“내가 숨을 안 쉬었어? 나 안 죽었는데…….”
미뉴에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제물을 바치기도 전에, 그 어떤 신보다 로제가 제일 먼저 제 소원을 들어줬어요…….”
“그게 그렇게 되나? 일단 내가 혼자 돌아오긴 했는데.”
“이런 소원을 들어준 건 로제가 처음이에요.”
그리 말하며 미뉴에트가 고개를 들어 로제를 바라보았다. 미뉴에트의 눈에는 어느샌가 따스한 온기와 기쁨, 흘러넘치는 경애가 담겨 있었다. 그 시선에 어쩐지 간질간질해진 로제가 참지 못하고 복실한 미뉴에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가 많이 놀랐나 보네.’
하기야 정령의 계약자가 쓰러져버리면 정령이 얼마나 당황하겠는가. 물론 죽은 건 아니었지만. 잠깐 드래곤을 만나고 왔다는 소리를 이런 데에서 할 수는 없으니, 자신이 죽었다 깨어났다는 오해는 바로잡아줄 수 없었다. 로제는 조금 민망한 기분이 되었다. 미뉴에트는 로제의 녹빛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무어라 입을 달싹이다가 관두었다. 그리고는 응석 부리듯 조금 더 로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로제. 미뉴에트는 로제를 다시 봐서 정말로 기뻐요. 다행이에요.”
“응, 응. 나도 그래. 미뉴에트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리고…….”
미뉴에트가 제 머리 위에 있던 로제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내렸다. 그 손을 제 뺨에 붙이고 미뉴에트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단정한 눈매가 유려한 호선을 그리고 따스한 온기가 돌기 시작한 두 뺨이 부풀어 올랐다. 작고 소담한 꽃봉오리가 드디어 활짝 꽃을 피우는 것 같았다. 그 광경을 정면에서 목격한 로제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제 소원을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내가 눈을 뜬 게 정말 기뻤나봐. 그리고 내가 잠깐 의식을 잃어서 많이 놀랐던 모양이고. 로제는 가타부타 말을 얹지 않고 웃으며 로제의 말랑한 뺨을 톡톡 두드렸다. 소원. 그 단어에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 로제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으나……. 여주인공의 직감 같은 것으로 느꼈다. 미뉴에트가 자신 앞에 나타나 자신과 계약을 맺은 그 이유가 지금 충족되었다고.
“미뉴에트?”
“네.”
“계속 있을 거지?”
“…….”
계약 끝났다고 도망가는 거 아니지? 그런 의미였다. 하지만 미뉴에트에게는…….
“계속 여기 있어도 되나요?”
“물론이지! 오히려 난 미뉴에트가 내 곁에 앞으로도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로제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은 미뉴에트가 평소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로제가 원한다면……. 전부 원하는 대로 될 거예요.”
그리고 미뉴에트는 살짝 어룽진 눈물을 보석처럼 반짝이며 더욱 활짝 웃었다. 처음 저택에 왔을 때의 그 무감정하던 소녀와 같은 인물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만큼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제릴 자우어는 긴 한숨과 함께 눈을 떴다. 머리가 아프기는커녕 아주 명징한 정신이 그를 반겼다.사방이 고요했다. 가느다란 숨소리만 제외하면. 그는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곧 제 호흡과 미묘하게 맞지 않는 박자를 깨닫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릴 본인의 침실이었다. 평범하고 친숙한 장소 가운데 단 하나 이질적인 것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미뉴에트?”
네가 왜 여기에. 미뉴에트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제릴의 바로 옆자리에서.
“어억?!”
온전히 상황 파악을 마친 제릴이 기겁하며 몸을 펄떡였다. 격한 움직임에도 미뉴에트는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봄바람 같은 숨소리만 낼 뿐이었다. 폭신한 베개를 베고 이불까지 야무지게 덮은 그녀는 제릴 쪽으로 몸을 돌리고 새우잠을 자고 있었는데, 불편하지도 않은 지 제릴이 그녀를 흔들어도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얘, 얘가 대체 왜 여기 있지. 로제는 얘가 여기에 있는 걸 알고 있나?
제릴은 그제야 로제에게 생각이 닿았다. 그 지하 제단. 제릴은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로제를 그곳에 데려갔다. 그리고, 틀림없이, 이마에서 끔찍한 고통을 느끼고…….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제 이마를 매만졌다. 정신을 잃기 직전, 불타는 듯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던 것이 무색하게도 전처럼 멀쩡한 살갗의 촉감이 느껴졌다.
기억을 떠올리니 더욱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눈앞에 잠든 미뉴에트가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제릴은 공포에서 한 발짝 벗어나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둘러볼 만한 이성이 남았다.
“제릴, 일어났네?”
“……로제?”
밖에 나가봐야겠다. 그런 결론을 내린 제릴이 계속 침대에 있고 싶다는 본능을 애써 억누르고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반쯤 열려 있던 문을 박차고 로제가 들어왔다. 손에는 생뚱맞게도 평범한 샌드위치가 들려 있었다. 심지어 빵 사이에 들어 있는 햄에는 아무것도 달려 있지 않았다. 5년 만에 보는 멀쩡하고 정상적인 육류의 형태였다.
“왜 일어났어, 좀 더 누워있지. 자, 자!”
“아, 자, 잠깐…….”
샌드위치를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제릴을 다시 침대로 밀던 로제가 그제야 미뉴에트를 발견하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이건……! 지레 찔려 괜히 변명하려던 제릴의 입을 로제의 탄성이 막았다.
“미뉴에트, 요 잠꾸러기! 왜 안 오나 했더니 여기서 자고 있었구나!”
“어? ……네가 보낸 거야?”
“내가 보낸 건 아니고. 네 상태를 살피고 싶대서 보냈는데 이상하게 돌아오질 않더라고. 하긴, 미뉴에트가 일어나기엔 지금 너무 이른 시각이긴 하지.”
그래도 그렇지. 애정 어린 손길로 미뉴에트의 둥근 이마를 톡 두드린 로제가 곤란하게 웃었다.
“제릴. 이제 보니까 미뉴에트 때문에 일어났구나. 참, 환자를 내쫓다니. 미뉴에트,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내 방으로…….”
“아! 아니. 됐어, 자는 애를 굳이 깨울 필요는…… 없지.”
“응?”
“그냥 내버려 둬. 그 샌드위치, 나 주려고 가져온 거 맞지?”
제릴은 조금 민망한 기분이 되어 로제의 손에서 샌드위치를 채가듯 가져가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별일 아닌데 귓가며 뒷목이 화끈거렸다. 그가 용기내어 샌드위치를 한입 물며 멋쩍게 물었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 다 끝났어!”
“……뭐? 뭐가?”
“내가 그…… 저택 밑에 거대한 존재를 쫓아냈다는 거지!”
로제는 척, 엄지를 치켜들었다. 너무나도 산뜻한 발언에 제릴은 샌드위치를 씹다 말고 입을 틀어막으며 한참을 쿨럭댔다.
“……쿨럭. 큼. 대체 무슨 수로……?”
“나한테 아무것도 안 통한대! 그래서 재미없어졌다고 떴어.”
제릴이 입을 쩍 벌렸다. 지난 오랜 세월 동안 그를 괴롭혔던 그 모든 것이…… 끝났다고? 그의 뇌가 작동을 정지했다. 그리고 직후, 더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
“로제?”
로제의 뒤를 따라 훤칠한 키의 남성이 걸어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로제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약혼자, 정확히는 약혼자 행세를 하던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무어 경이었다. 그를 바로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외모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무어 경과 제릴의 시선이 부딪혔다. 포식자가 피식자를 바라보는 듯한 압도적이고 위협적인 시선. 그 푸른 보랏빛 눈동자에 두려운 악의가 가득했다. 제릴의 몸이 바짝 굳었다.
“……으음.”
그때 미뉴에트가 일어날 듯 몸을 뒤척였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그녀는 눈을 꼭 감은 채 몇 번 더 숨을 내쉬다가 결국 힘겹게 눈을 떴다. 미뉴에트가 일어나자 제릴은 자신을 짓누르는 위압감 속에서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꼈다. 단숨에 깨어나기 어려운 듯 눈을 감고 물기 터는 강아지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미뉴에트는 그제야 느릿하게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음……. 다들 좋은 아침. 무어 경은…… 제릴을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
“미뉴에트, 일어났어? 그런데 무어 경이 제릴을 괴롭혔다고?”
“그럴 리가요, 로제. 미뉴에트가 꿈을 꿨나 보네요.”
“…….”
“풋, 미뉴에트, 꿈꾼 거야? 꿈에 무어 경과 제릴이 나왔어? 무슨 꿈이었는데?”
“로제, 그보다…….”
무어 경이 몸을 기울여 로제의 귓가에 몇 마디 말을 흘렸다. 그에 로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릴, 그럼 난 나가볼게. 이것저것 아직 할 일이 많아서. 푹 쉬어. 아, 미뉴에트, 넌 나랑 같이 나가야지. 어허, 또 잠들려 그러네.”
“자, 잠깐, 로제.”
정말로 자리를 뜨려는 로제를 붙들며 제릴이 필사적으로 말을 골랐다. 무어 경을 똑바로 쳐다볼 만한 용기는 없었지만, 그는 이제 전처럼 비겁하게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보고도 못 본 척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또 이곳에는 로제와 미뉴에트가 있었으므로, 그는 용기를 쥐어짜 단호하게 말했다.
“저건…… 네 약혼자 행세를 하던 사람의 얼굴이 아니야.”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러나 기다리던 로제는 당연하다는 듯 태평스럽게 대꾸했다.
“그치?”
“……어?”
“거, 이상한 주문에 걸려서 지금 엉뚱한 모습으로 보이나 봐.”
“…….”
“물론 난 안 통해서 원래 모습대로 보고 있지.”
어안이 벙벙해진 제릴을 두고 로제가 몸을 돌려 문에 가까이 다가섰다.
“그럼 제릴, 몸조리 잘해. 우린 이만…… 미뉴에트! 쟤 좀 봐. 잠든 척하네.”
“진짜 잠든 것 같은데요, 로제. 깨우지 말고 우리끼리 나가죠.”
“어휴, 참. 제릴, 미안하지만 미뉴에트 좀 부탁할게. 이따 일어나면 나한테 오라고 해줘.”
“…….”
로제와 무어 경은 정답게 손을 맞잡고 방을 나섰다. 허망하게 그들이 나간 문만 바라보는 제릴 옆에서 눈을 반짝 뜬 미뉴에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 남자, 짜증 나요.”
“……너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자꾸 미뉴에트에게 눈치 줘요. 가렵지도 않지만, 로제도 저 사람과 단둘이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자리를 비켜주는 것뿐이에요.”
미뉴에트의 입이 댓발 나왔다. 제릴은 믿을 수 없어서 그런 그녀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갑자기 어린애가 불쑥 자란 것 같았다. 동화 속 이야기처럼, 인형이 사랑의 힘으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제릴의 경탄 어린 시선이 뺨에 닿자 미뉴에트는 어쩐지 볼께가 간질거렸다. 희미하게 미소 지은 그녀가 제릴을 돌아보며 조곤조곤 설명했다.
“하여튼 저 남자는 로제의 약혼자라던 그 남자가 맞아요. 아마…… 그동안 주술로 얼굴을 바꾸고 다니다가 그 주술의 효과가 다 된 거겠죠. 로제가 놀라지 않는 이유는…… 뭐, 로제에게 처음부터 주술이 통하지 않았던 것 아닐까요.”
제릴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씹어 삼킨 샌드위치가 다시 목에 걸리는 것 같았다.
“그에게 우리는 방해물에 불과할 테니, 호시탐탐 우리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겠지만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릴은 미뉴에트가 지켜줄게요.”
“어, 어…….”
“그럼 좀 더 쉬세요, 제릴. 미뉴에트는 이만 나가볼게요.”
“뭐? 어디 가는데?”
사뿐사뿐 소리 없이 문을 향해 걷던 미뉴에트가 가볍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로제가 그랬던 것처럼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야 미뉴에트는 방해물이니까요. 방해물답게 그 남자를 방해하러 가야죠.”
이 정도 시간을 주었으면 많이 주었다고 생각해요. 미뉴에트도 로제 곁에 있고 싶은걸요. 로제 곁에서 무어 경을 사사건건 방해하겠다는 소리다. 제릴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미뉴에트, 너…… 뭔가 많이 변했네.”
“그야 미뉴에트도 이제 살겠다고 결심했으니까요.”
그 말에 번뜩, 제릴의 눈에 빛이 돌아온다. 놀라 자신을 바라보는 제릴에게 미뉴에트는 아까보다 조금 더 짙게 미소 지었다.
“제릴, 무사해서 정말로 다행이에요. 미뉴에트도 이제야 숨이 좀 쉬어지는 것 같아요.”
제릴의 머릿속에, 마음에 그 미소가 각인되듯 박혔다.
마담 자우어는 로제의 ‘함무라비-극한 자본주의 버전’ 보상 청구에 의해 강제 노동형에 처해졌다. 만 60세가 될 때까지 지정 직종에서 노동, 봉급의 절반은 압류되어 제릴의 학비로 사용된다. 로제가 지정한 직종은 바로 탐정 쌍둥이의 조수직이었다.
한편 제릴은 이 후원금을 통해 아주 강도 높은 학업 과정을 밟는 처벌을 받았다. 처벌이라고 말하기도 우습지만, 로제의 말로는 일주일에 하루 반만 쉴 수 있는 강행군이며 그럼에도 반드시 완수해서 취직까지 해내야 했다. 다른 이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자비롭고 현명하며 동시에 따스한 판결이었다. 그리고 미뉴에트는…….
“미뉴에트가 벌을 왜 받아?”
“하지만 미뉴에트는 그…… 선셋이란 자의 개입을 미리 알아차리지도 못했고, 로제를 제대로 지키지도 못했는걸요.”
로제는 제 옆에 누운 미뉴에트를 돌아보았다. 포실포실 구름 같은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 처분 결정하는 게 재밌어 보였나 보네. 자기도 받고 싶은가 봐. 하긴, 그 쌍둥이도 고용했는데 미뉴에트만 쏙 빼면 섭섭하기야 하겠지.’
남들 하는 건 다 자기도 해야 하는 어린애 심보. 미뉴에트는 그럴 나이에서 조오금 벗어났지만, 대충 비슷하겠거니 판단하고 로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미뉴에트에게 말할 게 있었는데 이참에 말해버리면 되겠군.
“좋아, 미뉴에트는 말이지…….”
“네, 말씀하세요.”
“학교에 다녀줘야겠다.”
“……아?”
예상치 못한 말에 미뉴에트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학구열로 둘째가라면 섭섭한 나라,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로제에게 있어 학교와 배움이란 사회인의 반 필수요소였다. 가고자 하는 길이 확고하다면 굳이 가지 않아도 좋지만, 어떻게 먹고살 것인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면 일단 학교에 가서 시간을 벌고 적성을 찾자! 졸업장을 따두면 일단 뭐라도 된다! 그것이 로제의 지론이었다.
“내내 이 저택에만 머물면 지루하잖아. 나가서 뭐, 졸업장을 따고 취업하고 그런 걸 바라는 건 아냐. 하지만 미뉴에트, 네가 재밌어하고 좋아할 만한 걸 찾아봤으면 좋겠어.”
제 머리를 살살 쓰다듬는 상냥한 손길을 느끼며 미뉴에트는 어안이 벙벙해져 로제를 바라보았다. 학교를…… 간다고. 그것은 미뉴에트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미래였다.
“설마 이 저택을 물리적으로 떠나지 못한다는 제약이 걸려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
미뉴에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제야 안심된다는 듯 로제가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으음, 어떻게 해야 하나. 나이에 맞춰서 보내면 되나? 아니지, 현재 진도에 맞추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으음, 어렵네. 생각해보니 미뉴에트…… 출생신고도 하지 않았을 거 아냐?”
“아, 출생신고는 되어있을 거예요.”
“어?”
누운 자리에서 이것저것 고민하던 로제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뉴에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음. 아마도 잘 했을 거예요. 십몇 년 전쯤에.”
그때까지는 자코 부부도 멀쩡했을 테니까.
“그래? 그건 다행이네. 진짜 어떻게 한 거지……. 아니,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로제가 있는 이 나라는 신분증이나 주민 등록 제도 대신 출생신고와 혼인신고, 사망신고로 신분을 판단했다. 출생신고만 되어 있다면 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가 절로 해결되자 로제의 머리가 팽글팽글 바쁘게 돌아갔다. 곧 그녀는 아주 좋은 계책을 떠올렸다.
“제릴에게 맡겨야겠다! 제릴도 학교에 나갈 거니까, 추가 임무로 미뉴에트에게 공부를 가르쳐주게끔 해야겠어. 목표는 대학까지! 그리고 미뉴에트 넌 겸사겸사 제릴을…… 음, 학교 생활이 외롭지 않게 제릴의 곁을 지켜주고. 어때?”
“……좋아요.”
그럴 줄 알았다며 로제가 빙긋 웃었다. 미뉴에트가 종종 제릴과 붙어 있거나 편하게 대화 나누는 모습을 보건대, 이 소녀는 제릴에게 적지 않는 애착을 가진 것 같았다. 또 서재를 좋아하는 듯싶었는데, 그곳에 갈 때마다 어려운 서류도 개의치 않고 푹 빠져 읽는 것을 볼 때 공부도 한 번 가르치면 꽤 재미를 붙이리라 추측했다.
“잘할 수 있지?”
“물론이에요. ……로제, 미뉴에트는 최선을 다할게요.”
“그래, 그래. 기특하다!”
따뜻한 불빛이 로제와 미뉴에트 위로 내려앉았다. 부드러운 로제의 침대 시트에 뺨을 비비며, 미뉴에트는 일어서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드는 로제를 바라보았다.
“로제, 그건?”
“무어 경에게 줄 거야. 미뉴에트랑도 이야기를 마쳤으니, 이제 남은 건 그 사람뿐이거든.”
그렇게 말하는 로제는 어쩐지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다.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미뉴에트는 그게 무엇이든 로제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싶었다.
“로제.”
“응?”
“이건 미뉴에트의 생각인데, 그거, 틀림없이 잘 될 거예요.”
“그래?”
로제가 기쁜 듯 웃었다. 우리 애가 이렇게 응원해주는데 실패할 수는 없지!
“좋아, 다녀올게!”
“네, 다녀오세요.”
“완벽한 해피엔딩을 만들고 올게!”
그렇게 말한 로제는 씩씩하게 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배웅하며 미뉴에트는, 그녀의 단 하나뿐인 신이자 세상에서 가장 상냥하고 다정한 기적의 승리를 기원했다.
(본편 完)
외전
쏟아지듯 내리는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든 어느 겨울날이었다. 두꺼운 코트로 몸을 단단히 싸맨 보람도 없이 짓쳐들어오는 눈과 칼바람에 몸을 부르르 떤 제릴의 입에서 흰 김에 뿜어져 나왔다. 그 옆에서 걷던 미뉴에트가 발개진 코를 훌쩍이며 좀 더 발을 재게 놀렸다.
“제릴, 빨리, 빨리요.”
“왜 이렇게 재촉해?”
“로제가 보고 싶어서죠. 제릴은 로제가 보고 싶지 않은 건가요?”
“……그렇게 몰아가지 마!”
“흥. 그리고 어쩐지 빨리 들어가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왔어요. 제 감은 잘 들어맞는단 거 제릴도 알잖아요.”
제릴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한숨을 푹 쉬었다. 제릴의 품에는 커다란 상자가 몇 개나 들려 있었는데, 그나마 미뉴에트가 작은 상자 몇 개를 대신 들어주고 있어 어느 정도 손을 움직일 수 있었다. 들고 있던 짐을 아슬아슬하게 한쪽 팔만으로 지탱한 그는 자유로운 반대쪽 손만으로 미뉴에트의 목도리를 고쳐 매주었다.
“알았으니까 너무 서두르지 마. 넘어지면 위험하잖아.”
“미뉴에트는 제릴보다 튼튼해서 괜찮아요. 하지만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이윽고 둘은 나란히 서서 오베르 저택의 현관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청명한 울림이 들리고, 저택 안쪽에서 쿠당탕 소리가 나더니 몇 초 지나지 않아 문이 벌컥 열렸다.
“왔구나! 제릴, 미뉴에트!”
로제와 무어 경이었다. 그들은 팔짱을 끼다 못해 손깍지까지 낀 채였는데, 그렇게 애정을 과시하고 있음에도 무어 경의 얼굴에선 감출 생각이 없는 짜증이 엿보였다. 로제와 애정행각을 벌이려던 참에 우리가 왔나 보네. 상황을 파악한 미뉴에트가 그에게만 보이도록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로제, 보고 싶었어요. 우리가 딱 맞게 와서 다행이에요.”
“응? 어어, 나도 보고 싶었어! 내 새끼!”
제릴과 미뉴에트가 걸친 같은 색의 코트를 뿌듯하게 바라보던 로제가 정신 차리고 대답했다.
“그나저나 눈 오는데 왜 안 들어오고 있었어? 춥겠다. 둘 다 얼른 들어와!”
“이거 들고 있느라 문을 못 열었어. ……고마워.”
제릴이 약간 수줍은 기색으로 대답했다.
로제가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미뉴에트가 들고 있던 상자들을 가져갔다. 그에 맞춰 빼앗듯 제릴이 들고 있던 상자를 가져간 무어 경이 로제에게 아주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로제, 그것도 이리 주세요. 제가 들지요.”
“괜찮아요, 무어 경도 들고 있으면서. 이 정도는 들 만해요. 그보다 뭘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 몸만 와도 되는데.”
“아, 그건…… 내가 가져온 게 아니고, 대문 앞에서 배달부를 만나서.”
“그래? 그럼 누구지? 탐정 일행이 보낸 건가?”
로제가 어깨를 으쓱이며 성큼성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세 명도 그녀를 따라 따뜻한 색감으로 꾸며둔 저택 내부로 이동했다.
“로제, 나랑 미뉴에트는 먼저 씻고 올게. 눈 범벅이 돼서 찝찝하네."
“옷이 다 젖어버려서, 미뉴에트는 아예 옷을 갈아입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요.”
“응. 감기 걸리겠다, 천천히 갈아입고 와.”
“그럼 전 칠면조 상태를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제릴과 미뉴에트는 옷을 챙기러 각자의 방으로, 무어 경은 부엌으로 향했다.
“너 그 말투 고치지 않았어? 왜 또 갑자기 미뉴에트라고 해.”
“제릴은 몰라도 돼요. 로제는 미뉴에트가 이렇게 말하는 걸 좋아해요.”
“설마…… 답지도 않게 내숭이야?”
“제릴, 미뉴에트도 감정이 상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아주었으면 해요.”
계단을 오르는 제릴과 미뉴에트의 티격태격하는 대화가 들려왔다. 저 둘도 그새 참 많이 친해졌다. 제릴은 대학 진학을 준비하며, 미뉴에트는 그동안 거치지 못했던 교육 과정을 빠르게 밟으며 번화가의 학생들이 사는 숙소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주말과 휴일에 저택에 돌아왔는데, 돌아올 때마다 둘의 사이가 가까워져 있는 게 맨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역시 미뉴에트를 학교에 보내길 잘했다. 로제는 흐뭇하게 웃으며 상자를 들고 제 방으로 향했다.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해 볼 요량이었다.
각 잡혀 묶인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자 가장 먼저 편지가 보였다. 봉투에 멋들어진 글씨로 적힌 이름은 마이어의 것이었다. 역시 탐정 일행이 보낸 소포였구나. 그들은 로제에게 고용된 탐정답게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이상 현상을 조사하고, 그 과정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를 주기적으로 이렇게 보고해왔다. 보고라기엔 많이 친근한 말투였지만.
편지를 꼼꼼히 읽은 로제는 이제 본격적으로 상자 안을 살폈다. 좋은 향기가 풍기는 상자 안에는 편지 외에도 자잘한 물건이 굉장히 많았다. 푸른 실로 자수가 새겨진 손수건, 하얀 조개껍데기로 비늘을 표현한 인어 조각상, 파도 무늬가 새겨진 향초, 커다란 소라고둥……. 바닷가 마을에서 보낸 소포답게 바다, 특히 인어와 관련된 물건이 많았다. 이 근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라 로제의 눈이 금세 즐거워졌다.
이 소라고둥은 뭐지? 그렇게 생각하며 로제는 고둥 안에 든 쪽지를 꺼내 읽었다. 전단이나 포스터처럼 매끈한 재질의 종이에는 화려한 글씨체로 광고 문구가 적혀 있었다. 가장 커다랗게 적힌 글자를 입 속에서 굴렸다. 심해 전화?
“로제?”
“깜짝이야! 미뉴에트? 언제 왔어?”
“방금요. 칠면조가 다 되었다고 해서 로제를 데리러 왔어요.”
미뉴에트의 붉은 눈동자가 로제의 손에 들린 소라고둥으로 향했다. 깜빡깜빡,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미뉴에트가 설핏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로제. 그건 뭔가요?”
“이거? 마법의 소라고둥…… 아니, 무슨 심해 전화라고 하던데? 마이어 일행이 선물로 보내준 거야.”
“그런가요.”
고개를 살포시 기울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소라고둥을 노려보던 미뉴에트가 떨떠름한 말투로 말했다.
“음…… 불길한데요?”
“응? 뭐가? 이게?”
“네. 선물로 주고받을 만한 건 아닌 것 같아요.”
일반인은 모르겠지만, 저건 주술적인 물건이었다. 잘못 엮였다간 인생이 곧장 파멸로 이끌려갈 만한. 아닌 게 아니라, 이미 꽤 많은 사람을 홀린 물건인 것 같았다. 그 쌍둥이 탐정은 일반인이라 몰랐다 쳐도, 마담 자우어가 몰라봤을 리는 없는데. 미뉴에트가 턱을 쓸었다. 어쩌다 저런 걸 보낸 거지?
한편 로제는 미뉴에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소라고둥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불길하다는 게 무슨 뜻이지? 품질이 별로라는 뜻인가? 아니면 소라고둥 껍데기가 비위생적으로 보이는 걸까? 이 저택에서만 살던 정령에게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로제는 미뉴에트의 말을 웃어넘기며 대꾸했다.
“관광지의 기념품 상술이 다 그렇지 뭐. 그래도 선물로 준 건데 장식품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보다 칠면조가 다 되었다며? 얼른 가자, 배고프다! 로제는 종이를 접어 다시 고둥 안에 넣고, 그것을 상자 안에 넣었다. 그 상자를 옆구리에 낀 채 로제가 손을 내밀자 미뉴에트가 자연스럽게 잡았다. 맞잡은 손을 달랑달랑 흔들자 기분이 좋아진다. 방긋 웃으며 미뉴에트가 생각했다. 뭐, 별일 있겠어. 상대는 로제인걸. 로제가 저런 물건을 몰라볼 리도 없고, 알아서 하겠지.
공교롭게도 오베르 저택과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어느 기차역에서 마담 자우어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어느 날 전조도 없이 기억을 잃고 황당하리만치 낙천적인 성격이 된 로제 오베르. 그녀는 기행이라 불릴 만한 엉뚱한 행각을 수도 없이 벌였지만, 결과적으로 그 모든 행동이 옳았다. 무려 강림 직전의 옛 영주를 물러가게 한 것이다. 그런 그녀가 버젓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어떤 사람이, 수많은 저주를 익힌 미치광이 괴물이나 홀로 핏빛 숲을 탈출한 교단의 아이를 포함하여 대체 어떤 사람이 일을 벌일 수 있겠는가?
긴 생각을 마치고 마담 자우어는 호흡을 정리했다. 격정을 지워내고 다시 원래의 우아한 학자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는 오베르 저택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을 모색하며 정신 사납게 구는 쌍둥이 탐정에게 단조로운 어조로 단언했다.
“그러니 우리가 돌아가는 건 어디까지나 실수를 수습해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이라는 걸 명심하렴.”
그래, 그 소라고둥을 닮은 심해인의 유물을 처분하지 못하고 로제에게 떠넘겨버린 실수에 대한 사죄일 뿐이다. 어차피 우리가 가봤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테다. 직접 실수를 수습할 수나 있으면 모를까, 이미 모든 게 로제 오베르에 의해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좋게 해결되고, 그 사생아 자식은 기쁘게 로제의 발 받침대라도 되어 있을 테니까. 마담 자우어는 보지 않아도 생생하게 그려지는 광경에 체면도 잊고 작게 한숨을 흘렸다.
차칵차칵, 소금 조각들이 돌아가며 갈아지는 소리가 무척 경쾌했다. 탐정 일행이 보내온 선물 중 인어가 달린 소금 통은 안에 쌀알만 한 돌소금이 들어 있어서, 직접 통을 돌려 갈아내는 방식이었다. 로제는 재미가 들렸는지 귀찮은 기색도 없이 연신 그것을 이용해 고기의 간을 맞췄다.
그리고 옆자리에 앉은 무어 경은 그 소금 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느낀 로제는 뿌려달라는 뜻인가 싶어 그의 접시에 통을 가져다 댔다. 무어 경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로제. 그건, 그 쌍둥이 일행이 보낸 겁니까?”
“아, 맞아요.”
로제가 소금 통을 가볍게 흔들었다. 미뉴에트의 옆에서 제릴이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미뉴에트는 소금 통을 흘끗 쳐다봤다가, 다시 접시에 코를 박고 칠면조 다리를 뜯는 데 열중했다.
“별 이상한 건 다 보내네. 지난번에도 쓸모없는 것만 잔뜩 보내더니.”
제릴의 빈정거림에 로제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왜, 난 마음에 들어. 귀엽네!”
“……네가 그렇다면야.”
제릴은 본전도 찾지 못하고 탈룰라를 시전했다. 이번엔 미뉴에트가 작게 코웃음 쳤다. 용케 그 작은 소리를 들은 제릴이 미뉴에트를 흘겼다. 정작 미뉴에트는 그의 눈빛을 느끼지 못한 척 그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우아하게 접시에 놓인 고기를 잘랐다.
오물오물, 꿀꺽. 입 안으로 밀어넣은 고기를 부지런히 씹어 삼킨 미뉴에트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그에게 언질을 주었다.
“제릴, 저건 로제의 선물이니까 탐내면 안 돼요.”
“……탐낸 적 없거든!”
“네, 건들면 안 돼요. 절대.”
“…….”
제릴은 환장하겠다는 표정을 짓더니 옆에 놓인 잔 안의 와인을 쭉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본 로제가 웃었다. 저 둘, 사이가 정말 좋단 말이야. 저들의 우정에 나름의 지분이 있음을 뿌듯하게 여기며, 그녀는 소금 통을 다시 상자에 집어넣었다.
“그럼요, 미뉴에트가 제릴을 얼마나 살뜰히 챙기는데요. 제릴은 좀 더 미뉴에트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요.”
“네가 대체 언제 나를 챙겼는데? 챙기는 건 외려 나 아니야?”
“음? 그건 또 굉장히 신선한 관점이네요. 대체 어느 부분에서 그렇게 생각한 건지 궁금해요.”
“매일 아침 널 깨워주는 게 대체 누구라고 생각해? 내가 아니었다면 넌 진작에 학습 과정을 다 밟지 못하고 시험에서 떨어졌을 거라고.”
“제릴이야말로, 미뉴에트가 당신에게 시비를 걸던 사람들을 친히 숙소 건물 뒤편의 텃밭에 머리만 두고 묻어주었다는 사실을 잊은 듯해요.”
“뭐?! 대체 언제 그런 짓을 했어?!”
제릴이 기겁했다. 미뉴에트가 말간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닌데, 제릴, 아무래도 공부를 너무 많이 한 게 아닐까요? 기억력이 많이 손상된 듯해요.”
“아, 아아…… 아아아……. 설마 저번에? 어쩐지 그 자식들이 몇 주째 안 보인다 싶더라니! 내가 분명히 하지 말라고 말렸는데!”
제릴이 머리를 감싸 쥐고 외쳤다. 미뉴에트로서는 무척이나 억울한 발언이었다. 그의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는데, 그때 제릴이 미뉴에트에게 하지 말라고 제한한 행동은 그들을 다른 차원으로 보내는 것, 세뇌해 충성스러운 부하로 만드는 것, 그들의 숙소에 제단을 만드는 것뿐이었다. 미뉴에트는 그것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제릴을 배려해주었는지 그 사실을 천명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그럴 리가요. 로제 앞에서 미뉴에트의 명예를 깎아내리다니, 신사답지 못해요. 미뉴에트는 제릴의 말을 존중해서 쉬운 길을 두고 어렵사리 돌아가기까지 했는데.”
“하…….”
“분명 제릴이 미뉴에트에게 하지 말라고 한 건…….”
“자자, 그만 싸우고. 고기 다 식겠다! 얼른 먹어. 먹고 다퉈!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소리 죽여 웃던 로제가 개입했다. 제릴과 미뉴에트가 아웅다웅하는 모습은 코미디 프로그램 같아 몇 시간을 구경해도 질리지 않았지만, 그들의 접시에 놓인 칠면조 고기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게 문제였다. 못 말린다는 듯 미소를 머금고 주먹으로 식탁을 가볍게 두드리는 로제에 제릴과 미뉴에트는 얌전히 포크를 들었다.
식사를 마친 후 제릴과 미뉴에트는 각자 그들의 방으로 올라갔다. 식사 준비에 손 한 번 보태지 않고 대접만 받은 입장으로서 설거지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듯싶었는데, 로제는 한사코 공부하다 온 사람에게 설거지시킬 수는 없다 거절하며 그들을 내쫓았다. 부채감을 느끼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제릴과 달리 미뉴에트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쏠랑 자리를 떴다.
“로제가 빈말하는 사람도 아니고, 하지 말라면 하지 않는 거죠. 정 신경 쓰이면 내일 설거지는 제릴이 하세요.”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내일 설거지는 내가 할 생각이었어.”
그보다 넌 왜 자연스럽게 내 방에 온 건데? 제릴이 힘겹게 물었다.
방에 딸린 세안실에서 양치를 마치고 나오니 먼저 양치를 끝내고 온 미뉴에트가 이불을 뒤집어쓴 채 그의 침대 위에 엎드려 있었다.
“할 게 없어서요. 심심하니 제릴과 수다라도 떨까 하고.”
“공부는 다 했어?”
“제가 언제 공부를 빼먹은 날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구시네요.”
“로제 없으니까 다시 말투가 돌아왔네. 그보다 너야말로 그런 적 없었던 척 하지 마. 당장 저번주에도 은근슬쩍 공부 빼먹었잖아.”
“…….”
이번에는 드물게도 제릴의 승리였다. 빵빵하게 부풀린 뺨을 보드라운 침대 시트에 문지르며 미뉴에트가 투덜거렸다.
“할 거예요, 오늘은. 이래 봬도 나름의 루틴이 있다고요. 그게 제릴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뿐이지. 제가 공부를 안 할 때는, 제 루틴에 의하면 그날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기 때문에 하지 않는 거라고요.”
애초에 휴일까지 공부를 하라는 게 말이 되나요? 우리 이 저택에 왔을 땐 공부 이야기 하지 않기로 합의하지 않았던가요? 암묵적이긴 했지만? 저는 지금껏 그렇게 알고 살아왔는데요.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전 살아가는 데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일에 시간을 허비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요. 제가 왜 고등 수학 따위를 해야 하나요? 숲에서는 이런 거 하지 않아도 잘만 살았어요. 진짜. 재미도 없고, 왜 해야 하는지 물어봐도 납득할 만한 답변이 돌아오지 않는데. 제릴이야 좋은 성적을 받아 대학에 가겠다는 목표가 확고하니 이런 지루한 공부도 버틸 수 있겠지만, 전 그런 것도 아닌데요. 대학 안 갈 거라고요. 문학도 과학도 흥미 없어요. 얼마나 더 이런 공부에 시달려야 하죠? 대체 저는 언제 이 지루한 삶에서 졸업할 수 있나요? 끝이 어딘지도 모른 채 계속 공부하려니 피곤하기만 하고, 그렇다고 아예 공부를 때려치자니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이 저택에 들어와서 로제랑 딱 붙어 지내는 것도 좋을 텐데. 으, 하지만 로제가 받아줄 것 같지 않고. 저 어떻게 먹고 살죠? 젠장, 숲에선 왜 나한테 직업 구할 때 쓸 수 없는 기술만 가르쳐 준 걸까요. 도움이 안 돼.
미뉴에트가 주절주절 불만을 읊었다. 한두 번 읊은 레퍼토리가 아닌 듯 말 한 번 절지 않고 그 긴 대사를 줄줄 막힘없이 토해냈다. 그 모습이 놀랍도록 인간적이었다. 이 저택에 막 당도했던 당시의 미뉴에트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모습을 보고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테다. 제릴은 새삼스럽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차분한 발걸음으로 미뉴에트에게 다가간 그는 그 옆에 걸터앉아 이불을 뒤집어쓰느라 부스스하게 일어난 미뉴에트의 머리카락을 다정한 손길로 정리해주었다. 그리고 아까 식사 자리에서부터 품고 있던 의문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아까 로제가 쓰던 소금 통, 왜 만지지 말라고 한 거야?”
미뉴에트와 어울린 지도 벌써 7개월째다. 특히 이사한 이후론 늘 붙어 다니지 않았던가. 제릴도 이제 알 만큼 미뉴에트를 알았다. 언뜻 들으면 장난스러운 농담에 불과하지만, 그 아래 진지한 경고가 숨겨져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제릴의 손길을 얌전히 받던 미뉴에트가 눈을 번쩍 떴다가, 가늘게 휘며 배부른 고양이처럼 은근하게 미소 지었다.
“별건 아니에요. 그 물건이랑 같이 온 다른 선물들 중 하나가, 평범한 물건이 아니고 옛 영주와 관련된 유물이거든요.”
“뭐?”
전혀 별거 아닌 게 아닌데? 엄청나게 별거인데? 제릴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쩍 굳었다. 미뉴에트는 상체를 반쯤 들고 손수 제릴의 턱을 밀어 그의 입을 닫아주었다.
“그런, 그런 게, 대체 그런 게 왜 여기 있어? 설마 아까 우리가 들고 온 상자에 그게 담겨 있던 거야?”
“진정하세요, 진정. 제릴, 얼굴이 새파래요.”
결국 미뉴에트가 몸을 일으켜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주전자를 들었다. 주전자를 기울이자 아직 온기가 남은 찻물이 찻잔 안에서 부풀어 올랐다. 마시기 딱 좋은 온도였다. 미뉴에트가 건네주는 찻잔을 받은 제릴은 휙 고개를 젖혀 찻물을 단번에 들이켰다. 그래야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아…….”
“좀 진정이 되나요?”
“……그래. 아니, 정확히는 네가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기겁한 내가 바보 같아졌어.”
“정말로 별일 아니니까요.”
제릴의 옆에 걸터앉은 미뉴에트가 조곤조곤한 말투로 설명했다. 손을 뻗어 자연스럽게 제릴의 손을 잡았다. 깍지 껴 잡자 그의 손끝이 차가워진 게 느껴졌다.
“듣기로는 그 탐정 일행이 보낸 거라던데, 아마 그들도 뭘 알고 보낸 건 아닐 거예요. 아니면 그들이 의도한 게 아닌데 멋대로 그게 여기까지 왔거나.”
“그럴 수도 있는 거야? 그게 멋대로 움직이는 거면, 우리 위험한 거 아니야?”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대도요. 로제에게는 그런 게 통하지 않는다는 거 이제 아시잖아요? 또 제가 제릴을 지키는데 두려워할 게 뭐가 있어요.”
그 말에 제릴은 미뉴에트가 그에게 시비 걸던 사람들을 학교 뒤편에 머리만 남기고 묻었다는 것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짧은 웃음도 튀어나왔다. 손끝에 온기가 돌자, 그것을 느낀 미뉴에트가 그제야 안심하고 그의 어깨에 툭 고개를 기댔다.
“뭐, 짜증 나긴 하지만 정 안 되면 무어 경도 있으니 로제와 제릴이 위험에 처할 일은 없을 거예요.”
“아…… 그 남자는 좀 불안한데.”
“로제한테 껌뻑 죽는 그 남자가요? 하하, 차라리 제릴 본인을 걱정하는 게 낫겠어요. 유물에 혹시라도 홀리지 않도록.”
“나, 나야 네가 지켜준다니까.”
“네, 그러니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것보다, 그 유물 때문에 어쩌면 제릴의 어머니를 오랜만에 볼지도 모르겠어요.”
“어머니를?”
미뉴에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유물이 어떤 경위로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탐정 일행이 보낸 소포에 딸려 왔으니 틀림없이 계기 자체는 그쪽에서 마련했겠죠. 그렇다면 지금쯤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여기로 눈썹 휘날리게 달려오고 있지 않겠어요? 제릴의 어머니도 그들과 함께 움직이니 이 저택에서 재회할 가능성이 높지요.”
“그게 그렇게 되나…….”
알듯 말 듯 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제릴이 느리게 수긍했다. 미뉴에트의 다독임과 어머니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말에 효과가 있었는지, 애매하던 그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무어 경이 그 유물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눈 녹듯 사라질 평안이었지만,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제릴은 순순히 미뉴에트가 이끄는 대로 침대에 몸을 벌러덩 눕혔다.
“눈을 맞아가며 여기까지 오느라 오늘 너무 고되었어요. 우리 이만 자요.”
“말하지 않아도 그럴 건데, 넌 왜 자연스럽게 내 침대에 눕는 거야.”
“아, 지금 딱 노곤해서 기분 좋아요……. 어깃장 놓지 마세요.”
가물가물, 현실과 꿈 사이에서 유영하는 이 느낌은 미뉴에트가 가장 사랑하는 것 중 하나였다. 푹신하고 따뜻한 이불로 몸을 빈틈없이 감싸고 있으니 바로 여기가 천국이었다. 제 방으로 돌아가려 몸을 일으켰다간 이 느낌이 바람처럼 날아가 버릴 것이고, 다시 잠들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할 것이다. 미뉴에트는 귀찮게 굴지 말라며 손을 한 번 휘저어 제릴의 참견을 막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아득해지는 의식 너머로 제릴이 한숨을 쉬며 이불을 좀 더 꼼꼼히 덮어주는 게 느껴졌다.
확실히 눈발이 거세긴 했다. 세상을 지워버릴 듯 강하게 내리는 눈을 뚫고 걸어온 게 그렇지 않아도 꽤 고되었던 모양이다. 그럴 계획은 아니었는데, 제릴과 미뉴에트는 그만 아침도 거르고 정오를 넘길 때까지 푹 자고 말았다.
느지막하게 일어난 둘을 맞아준 로제는 그들을 위해 따로 준비해두었던 식사를 내왔다. 그 친절에 제릴은 식탁 앞에 앉아 그의 앞으로 에피타이저가 차려질 때까지 면구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미뉴에트는 1층으로 내려올 때까지 내내 정신차리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았는데, 고기 냄새를 맡자마자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식탁으로 척척 걸어가 제자리에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그 모습을 보고 로제는 한참 웃고 말았다.
식지 않게끔 오븐에 넣어두었던 베이크드 지티가 식탁 위로 올라왔다. 먹음직스러운 색깔과 아낌없이 다져 넣은 쇠고기에 절로 침이 고였다. 직접 파스타와 고기를 제릴과 미뉴에트의 앞접시에 덜어준 로제가 문득 물었다.
“둘, 오늘 무슨 일정 있어?”
“일정? 그런 건 딱히 없는데.”
“미뉴에트도 없어요, 로제. 무언가 시킬 일이라도 있나요?”
로제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창 밖을 한 번 보더니 다시 둘에게 시선을 돌리며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혹시…….
“눈싸움해 본 적 있어?”
두 쌍의 눈동자가 순진하게 껌뻑였다. 후후후, 로제의 입에서 사악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제릴이 윽, 소리를 내며 어깨를 움츠렸다. 둘 다 일정이 없다면 잘 되었네. 그럼 오늘 일정은 바로 이거야.
“바로바로, 눈싸움! 내가 신세계를 가르쳐주지.”
“와아.”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미뉴에트가 맥 없는 환호성을 질렀다. 제릴의 어이없다는 시선이 와닿았지만 본체만체 하며 미뉴에트는 손뼉도 짝짝 쳤다. 로제가 하자고 하는 거면 미뉴에트는 다 좋아요.
“룰은 간단해.”
로제가 장갑 낀 손으로 소복이 쌓인 눈을 한 움큼 들어올렸다. 조물조물, 꾹꾹. 힘을 주어 눈을 뭉쳤다. 그 별 것 아닌 모습을 제릴과 미뉴에트가 집중하며 지켜보았다.
“자, 이렇게 뭉친 눈을…… 에잇!”
“악!”
제릴의 빨간 머리에 혹처럼 눈덩이가 박혔다. 불의의 일격에 막거나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냅다 얻어맞은 제릴은 순간 멍해졌다. 그 모습을 보고 로제가 쿡쿡 웃었다. 야, 로제! 에이, 짜증 내지 마, 안경은 피해줬잖아!
“잘 알겠지? 이렇게 눈을 뭉쳐서 상대에게 맞추면 돼. 음, 팀을 짜서 하면 더 재밌는데……. 셋밖에 없네.”
로제가 허리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무어 경을 불러볼까? 아까 바쁜 일이 있다곤 했는데……. 끝났을 수도 있잖아? 그에 제릴이 정색하며 말했다.
“됐어. 그냥 우리끼리 해.”
“정말 괜찮겠어? 나 눈싸움 고수인데? 그리고 미뉴에트는…….”
그 순간, 제릴과 로제의 옆으로, 후웅!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허공을 찢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빠르게 날아갔다. 난데없는 돌풍에 그들의 긴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휘날렸다. 방금 뭐지? 뭐가 날아간 거지? 화살인가?
파아앙! 저 먼 곳에서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눈이 크게 치솟았다. 그 주변의 나무들이 모조리 파사삭 떨며 잎 위로 쌓인 눈을 떨궜다. 후우우……. 차분한 호흡소리. 두 명의 시선이 저절로 소리를 따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쪼그려 앉은 미뉴에트로 향했다. 미뉴에트는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내려놓고 손을 탁탁 털었다. 발 밑에 해독할 수 없는 기이한 주문과 문양이 끄적끄적 그려져 있었다.
“이 정도인가…….”
“…….”
“…….”
“제릴, 로제. 미뉴에트는 대충 감을 잡은 것 같아요. 슬슬 시작해도 괜찮겠어요.”
“…….”
“……뭐야?”
제릴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대체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정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얼빠진 제릴의 어깨를 짚으며, 로제가 진지하게 물었다. 다시 물어볼게, 제릴. 정말…… 괜찮겠어?
우여곡절 끝에 본격적으로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인원은 그대로 로제와 제릴, 그리고 미뉴에트까지 세 명이었다. 미뉴에트는 두 명에게, 특히 잔뜩 기가 질린 제릴에게 비상식적인 힘을 사용하지 않기로 맹세하고서야 게임을 시작할 수 있었다.
10여분 뒤. 제릴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 그냥 루카스 무어 그 인간을 끼울 걸 그랬나……. 아니, 있어봤자 그 인간도 나를 공격했겠지. 하지만 미뉴에트라면 분명 그 인간을 공격해줄 테고, 아, 그러면 그도 미뉴에트에게 반격하느라 나를 공격할 새가 없지 않았을까. 그럼 난 로제랑 1대1로…… 결국 내가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건 똑같네. 그래도 두 명에게 얻어맞는 것보다야 한 명에게만 얻어맞는 게 나았을 텐데.
“제릴, 이런 상황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니. 미뉴에트는 그 담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뭐? 으악!”
안경을 벗은 제릴의 안면 정중앙에 하얀 눈덩이가 날아들었다. 힘을 빼겠다고 약속한 만큼 아프진 않았지만, 그 갑작스러움과 차가움에 코가 얼얼했다.
“아, 나 코에 눈 들어간 것 같아…….”
“방심의 대가예요. 이번 기회에 뼈저리게 느끼고, 앞으로는 제릴을 지켜주는 미뉴에트에게 좀 더 고마움을 가지면 되겠어요.”
“방금은 네가 공격한 거잖아?!”
“둘 다 거기서 뭐 해? 에잇!”
싸우다 말고 멈춰서서 제릴과 만담 아닌 만담을 나누는 미뉴에트의 뒤통수로, 로제가 던진 눈덩이가 날아들었다. 뒤돌아보지도 않고 미뉴에트가 고개를 휙 기울여 그것을 피했다. 아악! 그 결과, 다시 한 번 눈덩이는 제릴의 안면에 꼭 코미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부딪히고 말았다. 아이고, 이게 이렇게 될 줄은. 로제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제릴이 상대가 안 되네.”
“미뉴에트는 공부한다고 체력 단련을 게을리한 탓이라고 생각해요.”
“이대로는 안 돼, 제릴. 앞으로 많이 먹고 힘을 키우자.”
“……난 충분히, 많이 먹고 있어.”
제릴이 창백한 얼굴로 ‘충분히’를 열심히 강조했다. 아무래도 저택에서 세끼를 다 푸짐히 먹고 중간에 간식까지 챙겨 먹는 것에 부담이라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밥한민국에서 온 건강체 로제에겐 와닿지 않았다.
“공부하려면 역시 체력이 중요하지 않나? 체력에는 뭣보다도 밥이…….”
“지금도 과식 중이야. 그만해.”
제릴이 다급하게 말하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먹는 데 부담을 느끼다니 놀랍다. 이게 바로 체질 차이라는 걸까. 로제가 경이로운 눈으로 제릴을 바라보았다. 문득 미뉴에트가 손을 들고 말했다.
“하여간 이대로는 싸움이 되지 않겠어요. 해서, 미뉴에트는 이렇게 제안해요.”
“응?”
“로제와 제릴이 한 팀이 되는 거예요. 각자의 실력을 고려한 결과, 이렇게 하면 균형을 맞출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어떤가요?”
두 명이 팀을 짜서 미뉴에트와 겨룬다고? 저 작은 소녀에게 그래도 되나 싶었지만, 게임 시작 전 미뉴에트가 보여준 퍼포먼스나 제릴의 저질 체력을 고려하면 그게 맞아 보였다. 다른 뾰족한 수도 없어, 두 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앞선 경험을 토대로 세 명이 한데 뒤섞여 마구잡이로 눈덩이를 던지는 짓은 벌이지 않았다. 미뉴에트는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곧장 가까운 사과나무 뒤로 숨었다. 여기가 그녀의 기지였다. 남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미뉴에트가 선점한 나무와 멀리 떨어진 나무를 잡고 그 뒤에 숨었다. 나무까지 달려오는 그 짧은 시간 만에 제릴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쪼그려 앉아 눈덩이를 하나씩 뭉치며 로제가 말했다.
“제릴, 역시 체력 좀 길러야겠다.”
“안 그래도 미뉴에트에게 늘 잔소리 듣고 있어…….”
“…….”
로제가 입을 꼭 다물었다. 미리 빼둔 안경이 주머니에 잘 들어있나 확인하던 제릴이 돌아오지 않는 대답해 의아해하며 로제를 돌아보았다가, 진득한 시선에 흠칫 놀랐다.
“왜, 왜 그렇게 봐?”
“제릴, 내가 계속 생각했는데.”
얼굴을 바짝 붙인 로제가 속삭였다. 확신이 짙게 묻어나는 말투였다.
“대체 미뉴에트랑 무슨 관계야?”
“뭐, 뭐, 뭐?! 무슨 질문이 그래?!”
“봐, 이렇게 당황하니까 이상하다고! 대체 둘이 무슨 관계야?”
응? 공부하라고 보내놨더니, 맙소사, 눈이 맞은 거야?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과장되게 놀라는 로제에 제릴의 얼굴이 그의 머리카락만큼 새빨개졌다. 근데, 미뉴에트랑 너 나이 차이가…… 읍! 기어이 제릴이 로제의 입을 막았다.
“으읍! 퉤, 퉤! 나 눈 먹었어!”
“미, 미안. 장갑에 눈이 묻었었지.”
반사적인 행동이었는지 제릴의 눈동자가 풍랑 만난 조각배처럼 사정없이 흔들렸다. 더 붉어질 데도 없어 보였던 그의 얼굴이 더욱 새빨개졌다.
“제발 목소리 좀 낮춰!”
“아…… 알았어. 진정해.”
저러다 숨 넘어가겠다 싶어, 로제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심호흡하며 뺨에 오른 열기를 식힌 제릴이 한 자 한 자, 씹어뱉듯 말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런 거 아니야.”
“……정말?”
“그래. 내가 그 애한테 공부를 가르쳐 주고, 또 가까이 사니까 자주 어울리게 된 것뿐이지. 무, 뭐, 무슨 관계냐고…… 물어봤자,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렇단 말이지.”
로제가 입맛을 다셨다. 과연, 입덕부정기인가. 외전에 진입하기도 했겠다, 슬슬 새로운 로맨스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타이밍이라 여겼는데. 팝콘을 씹기엔 아직 멀었나 보군. 로제가 순순히 수긍하자 되레 불안해진 제릴이 그녀를 다그쳤다.
“자, 잘 알아들은 거 맞아? 진짜 아무 사이 아니라니까?”
“알았어, 알았다고. 믿는대도?”
“네가 그런 반응인데 그 말을 어떻게 믿냐고!”
“그러게요. 정말 믿을 수가 없어요.”
이곳에서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에 두 사람이 흠칫했다. 뭐, 뭐지? 대체 어디에…….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지만, 그저 새하얀 눈만 보일 뿐 미뉴에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로제가 번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위다!
“정말……. 게임에 집중하고 있던 건 미뉴에트뿐이었군요.”
“대체 언제 온 거야? 설마 우리 이야기를 다 들었어?”
겨우 식힌 제릴의 얼굴이 다시 뜨거워진다. 무게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과나무의 듬성듬성한 나뭇가지를 밟고 선 미뉴에트는 한심하단 듯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미뉴에트는 아주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느라, 엉금엉금 기거나 엄폐물에 몸에 숨기면서 힘겹게 여기까지 도달했는데……. 제릴과 로제는 미뉴에트에게 관심이 전혀 없었네요. 대놓고 걸어와도 모르던데요.”
단단히 심통 났는지 볼을 부풀린 미뉴에트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 충격에 나무가 가지를 떨며 눈을 우수수 쏟아냈다. 어……. 제릴과 로제는 제 위로 떨어지는 눈 뭉텅이를 아연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신 안 해.”
“로제, 미뉴에트는 무척 재미있었어요. 이런 즐거운 놀이를 가르쳐줘서 고마워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하기로 해요.”
제릴이 벗어뒀던 안경을 도로 쓰며 이를 악물고 말하자, 그 틈을 타고 미뉴에트가 냉큼 로제에게 아첨했다. 춥고 지쳐 새파래진 제릴의 얼굴과 달리, 마지막에 한 방 먹인 것으로 어느 정도 기분이 풀렸는지 미뉴에트의 낯은 묘하게 밝았다. 방긋방긋 웃는 미뉴에트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로제가 말했다.
“그래, 다음번엔 제릴 빼고 우리끼리만 하자. 그땐 무어 경도 부를까?”
“그 남자를요? 네, 뭐……. 로제가 굳이 원한다면야…….”
미뉴에트가 대놓고 떨떠름해했지만, 로제는 허허로이 웃으며 미뉴에트의 머리를 복복복 쓰다듬을 뿐이었다. 제 반응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것을 보며, 미뉴에트는 속으로 혀를 찼다. 물론 그럴 줄 알기야 했다만은.
“그러고 보니, 오늘 무어 경은 왜 나오지 않은 건가요? 원래 로제 곁에서 1미터 이상 떨어지면 죽을 것처럼 굴었잖아요?”
“허허, 날 좀 많이 좋아하긴 하지.”
그래도 그건 너무 과장이지만. 로제가 뿌듯해하며 웃었다. 전혀 과장이나 농담이 아니었던 미뉴어트의 표정이 다시 떨떠름해졌다.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제릴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눈엔 전혀 과장으로 안 보이거든. 다른 생각은 안 들어?”
“뭐 어떤 거?”
“……과하게 구는 것 같다든가…….”
“약간 과한 맛이 바로 연애 초반의 매력 아닐까?”
아직 반년밖에 안 됐는데 벌써 너무 자연스러우면 그것도 그것대로 좀 이상하잖아. 로제 딴에는 진지한 답변에 제릴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뭐여. 아직 입덕 부정기인 제릴 넌 모르겠지만…….”
“그런 거 아니라고. 그 남잔 연애 초반이어서가 아니라…… 됐다.”
‘입덕 부정기’가 뭔지도 모르면서, 대충 뉘앙스만으로도 로제가 하고자 하는 말을 얼추 이해한 제릴이 정색했다. 진지한 낯으로 무언가를 말하려던 그는 곧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저었다. 그 ‘굉장히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말해 무엇하랴’라는 뜻을 간략하게 담은 단어의 등장에 로제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있지.”
“됐다는 것치고 바로 튀어나오네요, 제릴.”
“넌 조용히 해.”
슬쩍 끼어드는 미뉴에트를 단호하게 쳐내며 제릴이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그 인간이 평범한 남자는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그래서 좀, 신경이 쓰였어.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제릴은 말투에 자신감이 부족했으나 머뭇거리진 않았다. 이왕 이야기가 나온 것,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봐야지. 그는 언제 한 번 이 이야기를 나누리라 내내 결심해왔기에, 기회를 잡아챘을 때 주먹을 꽉 쥐고 물러서지 않았다. 혹시 무어 경이 이 대화를 알게 된다고 해도 미뉴에트가 제릴을 지키는 이상, 그가 제릴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으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낼 수 있는 용기였다.
하지만 피가 이어진 가족은 아니라고 해도, 여동생이 좋아하는 남자니까. 제릴은 강경하게 반대하는 대신, 걱정어린 주의를 주는 정도에서 그쳤다. 애초에 로제의 선택에 주제넘게 의견을 강하게 피력할 수도 없었고. 한결 차분해진 어조로 그가 말했다.
“하지만 어쨌든, 널 해치지는 못할 것 같아.”
“…….”
가, 강하게 봐줘서 고맙습니다. 진지한 분위기에 조금 당황해 눈을 깜빡이던 로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꼭 말해. 꼭…… 도와줄게.”
꾹 억누른 목소리. 혼자 중얼거리듯 작은 소리였지만 로제가 그 말을 놓치는 일은 없었다. 가슴이 훈훈해지는 것을 느끼며 로제는 생각했다. 초반에는 눈 흘기면서 어깨 치고 지나가던 녀석과 이렇게 친해지다니. 이게 바로 해피 엔딩 외전의 맛이구나! 그녀가 제릴의 어깨를 툭 치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고마워. 나도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도와줄게. 부담 갖지 말고 상담해!”
“어? 그래…… 잠시만.”
화들짝 놀라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우뚝 행동을 멈췄다. 도와준다는 것이 제릴과 미뉴에트의 관계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거 아니라고! 제릴이 크게 소리쳤다. 로제가 전혀 믿지 않는 태도로 어깨를 으쓱했다. 난 아무 소리도 안 했는데? 그러니까 나중에 말이야, 나중에. 뭔가 내 도움이 필요한 날이 올지도? 이러나저러나 큼큼, 이쪽에선…… 내가 선배니까? 제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가 다시 소리칠 요량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데, 이번엔 미뉴에트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릴. 로제에게 소리치지 마세요. 그리고 추우니까 여기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서 해요.”
“…….”
견디지 못하고 제릴이 몸을 휙 돌려 척척척 걸어 저택으로 먼저 떠났다. 그를 따라잡는 것은 일도 아니었지만, 로제는 그러지 않고 느긋하게 걸었다. 참, 저렇게 수줍음이 많아서야. 인정하는 데 오래 걸리겠군. 로제는 문득 제 옆에서 천천히 따라 걷는 미뉴에트를 돌아보았다.
“미뉴에트는 어때?”
“무엇이 말인가요?”
“제릴 말이야.”
미뉴에트는 묵묵히 로제와 함께 걸었다. 로제도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몇 초가 흘렀을까, 미뉴에트가 슬쩍 옆을 돌아보며 아주 옅은 미소를 띠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웃는지 아닌지 알기 어려운 수준이었으나, 로제는 어렵지 않게 미뉴에트의 표정을 알아보았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미뉴에트가 평이한 어조로 물었다.
“제릴이 부끄럼을 타던가요?”
“응, 완전. 얼굴이 터질 것 같던데.”
“제릴은 생각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게 문제라니까요.”
그 말인즉슨……. 로제가 눈을 껌뻑였다. 미뉴에트의 얼굴은 여전히 겨울 호수처럼 잔잔했다. 뽀득뽀득 눈을 밟으며 미뉴에트는 다시 침묵을 지켰다. 하얀 눈이 모든 소란을 잠재운 탓인지 서로의 숨소리가 잘 들렸다. 느릿하게, 미뉴에트가 입을 열었다.
“지금은 이야기만 나와도 펄쩍 뛰며 부정하지만, 제릴이라면 분명 곧 알아차릴 거예요. 영민한 사람이니까요.”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듯한 말투였다.
“로제에게는 무엇이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네요…… 재미없게 들릴 수 있지만, 사실 미뉴에트도 잘 모르는 건 매한가지예요.”
“잘 모른다고? 네가 제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거야?”
“물론 그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미뉴에트가 그런 관계를 맺어도 될지를 모르겠어요.”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미뉴에트가 정령이라는 것을. 어떻게 된 연유인지, 천운으로 출생이 등록되어 있어 인간으로 위장시키고 공부하게 해줄 수 있었지만, 결국 그녀는 여타 평범한 인간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로제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의 생각은 들여다보듯 훤히 알면서, 로제의 생각만큼은 두꺼운 콩깍지 때문에 전혀 알지 못하는 미뉴에트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도 알다시피, 미뉴에트는 다른 정상적인 인간과는 전혀 다른 성장 과정을 거쳐왔으니까요. 이제 와서 평범한 인간 사회에 녹아들어 사는 게 맞을까 싶기도 하고.”
넋두리 같은 말이 쏟아져나왔다. 미뉴에트가 입을 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는데, 그것이 꼭 한숨처럼 보였다.
“사실 그때 로제가 미뉴에트를 내쫓았다면 그냥 숲이나 산으로 들어갈 생각도 하고 있었는걸요. 허락 없이 저택 지하에 숨어 살 순 없으니까.”
“뭐? 내가 널 내쫓을 리 없잖아!”
“알아요. 로제는 다정한 사람이잖아요. 하지만 미뉴에트의 쓸모가 다했었으니까요.”
계획은 어그러졌고 의식은 전부 와해되었다. 로제가 시작했고 로제가 끝맺었다. 그 사이에서 미뉴에트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고, 로제가 모든 것을 수습할 때 아무것도 돕지 못했다. 처음부터 불청객이었으니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쫓겨나더라도 할 말이 없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로제는 그런 그녀에게도 손길을 내밀어 주었다. 공부라니,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제릴과 어울리고, 휴일마다 이렇게 저택에 찾아와서 로제와 함께 지내며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핏빛 숲에서 탈출한 그녀라도 이런 안전하고 사소한 일상을 보내도 괜찮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로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었고, 오염되지 않도록 지키고픈 행복이었다. 처음 저택에 찾아올 때의, 죽고 싶다는 생각도 더이상 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런 분에 넘치는 삶을 살아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고…… 주제 넘은 생각이 든다.
“즉, 미뉴에트도 아직 확신을 가질 듯 말 듯, 부끄러워서 쭈뼛대는 시기란 말이죠.”
전혀 부끄러워 보이지 않는 얼굴로 말한다. 결국 로제는 푸핫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뻔뻔해!
“과연, 아직 그런 시기란 말이지.”
“네에.”
“흠흠, 아까 제릴에게도 했던 말이지만, 미뉴에트도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줘. 성심성의껏 충고해줄게.”
로판 독자 짬밥으로 본편을 헤쳐나왔을뿐더러, 현재진행형으로 끝내주게 잘생긴 로판 남주와 꿀 떨어지는 연애 중이니 이 정도 자부심은 가져도 되는 게 아닐까. 로제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뉴에트도 따라 구슬 구르듯 맑은 웃음소리를 냈다.
“좋아요. 로제의 조언이라면 든든하죠. 방금도 로제가 상담해준 덕분에 생각이 정리되었고.”
“아, 이것도 상담으로 쳐주는 거야?”
그럼요. 그렇게 대꾸하며 미뉴에트는 눈을 둥글게 접었다. 그러자 봄꽃이 한꺼번에 만개하는 것 같은 화사함이 피어났다. 미뉴에트가 저렇게 웃는 모습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괜히 낯설게 느껴졌다. 키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마냥 어리게 보였던 미뉴에트가 불쑥 커버린 듯한 느낌이 일었다. 로제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미뉴에트의 손을 잡았다. 미뉴에트가 깍지를 꼈다.
“미뉴에트가 고생이 많네.”
“그렇죠? 아, 그래도 미뉴에트의 일 순위는 언제나 로제예요. 그 사실을 잊지 말아주세요.”
“뭐? 그럴 필요까지야?”
“어째서인가요? 로제, 이제는 미뉴에트가 싫어진 건가요? 미뉴에트를 독립시킬 작정인가요?”
“아이고, 이러니까 내가 널 어른으로 볼 수 있나.”
세상의 멸망을 목도한 듯 충격 어린 눈빛을 보이는 미뉴에트에 결국 로제는 킥킥 웃으며 깍지 껴 손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미뉴에트의 머리를 다시금 복복복 쓰다듬어 줄 수밖에 없었다. 이 둘, 생각도 못 했는데 의외로 꽤 어울린다는 생각과 옆구리가 시린 것이 얼른 무어 경을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 따위를 하며.
‘근데 정말 오늘 유독 무어 경이 안 보이긴 했어. 식재료 산다고 타운으로 외출했지. 아까 외출 전에 잠깐 만났을 때도 어쩐지 바빠 보이던데. 정말 청혼 이벤트가 임박한 건가?’
로판 소설의 해피엔딩 외전 클리셰로 서브 커플 스토리가 나왔으니, 응당 청혼도 나올 법했다. 정말 청혼인가? 곰곰이 생각하며 로제가 말했다.
“자, 우리도 얼른 들어가자. 배고프네. 어휴, 제릴은 얼마나 빨리 간 거야? 안 보이는 걸 보면 벌써 저택에 들어갔나 본데?”
“네, 좋아요.”
로제와 무어 경의 동상이몽에 관심 없는 미뉴에트는 마냥 로제의 손을 잡고 걷는 게 즐거울 따름이었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어느새 달이 휘영청 뜬 야심. 제릴은 그의 방에서 서적을 읽으며 공부하는 중이었다. 미뉴에트는 마치 제 방인 것처럼 그의 방 침대에 드러누워 뒹굴뒹굴하며 소설책을 읽었다. 아무리 말해도 로제의 말이 아닌 이상 미뉴에트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우친 제릴은 더 이상 그녀의 행동에 잔소리하지 않았다.
지루하다는 듯 책장을 파라락 넘기던 미뉴에트가 문득 책에서 시선을 떼고 혼잣말로 읊조렸다.
“……이건, 로제가? 아니지. 그 남자구나. 무어 경 그 작자가 쓸데없는 짓을 했나 보네.”
공기 중에 불온하고 괴기한 기운이 흘렀다. 팔다리를 타고 거미가 기어오르는 듯 소름이 돋았다.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 모양이었지만, 미뉴에트의 예리한 기감을 피해 갈 순 없었다.
“뭐야, 미뉴에트. 갑자기. 무슨 문제 있어?”
“별일은 아니고, 이전에 제가 말했던 이야기 기억해요? 옛 영주의 유물이 로제에게 온 소포에 섞여 들어왔다는 것 말이에요. 아무 일 없을 줄 알았는데 무어 경이 그 유물을 사용하려는 모양이에요.”
제릴이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니죠? 공부 방해해서 미안해요, 하던 것 마저 하세요. 그렇게 말하며 미뉴에트는 소설책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제릴의 눈을 마주쳤다. 벌떡 일어나 머리를 감싸 쥔 제릴이 소리쳤다.
“그렇게 태평하게 할 말이 아니잖아! 젠장, 역시 저녁 식사할 때 로제가 말려도 캐물었어야 했어. 그 인간 대체 뭘 하는 건데? 미뉴에트, 아는 게 더 있지?”
제릴은 식사 시간, 무어 경이 깜짝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굳게 믿던 로제가 떠올라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깜짝 행사는 개뿔이! 설마 내가 직접 물어보라고 해서 로제가 위험에 처한다거나……. 방심해선 안 됐던 건데, 그 인간의 손에 유물이 들어갔다니! 패닉에 빠진 제릴을 구경하며 미뉴에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대충 예상이 가긴 하는데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아는 거야? 뭔데, 대체?!”
“진정하세요, 제릴. 왜 이렇게 다급한가요?”
그럼 너 같으면 급하지 않겠냐! 그 인간이 지금 수상한 일을 벌이고 있는 마당에! 그렇게 외치는 제릴의 곁으로 다가간 미뉴에트는 자연스러운 손길로 그의 책상에서 페이퍼 나이프를 집어 올렸다. 날이 서있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망설임 없이 제 검지손가락 끝을 쿡 찔러 상처 냈다. 상처에서 피가 퐁퐁 솟아나는 것을 발견한 제릴이 화들짝 놀라며 미뉴에트의 옷소매를 잡아챘다.
“넌 또 갑자기 뭐 하는 거야?!”
“방비는 해두려고요. 제릴이 불안해했잖아요?”
“…….”
“지금 쓸 만한 조약돌이 없어서 그래요. 지금 정원에 나가서 가져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다지 깊게 베지도 않았어요. 안심하세요.”
제릴이 입을 뻐끔거리며 그녀의 손을 놓지도 제대로 잡지도 못하며 갈팡질팡했다.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린 미뉴에트가 부드러운 손길로 제릴의 손을 떼어냈다. 나이프를 내려놓고 방 안을 돌아다니며 1미터 간격으로 핏방울을 똑똑 떨어트린 그녀는 다시 제릴의 곁으로 돌아왔다.
손짓하자 제릴이 허리를 숙였다. 그의 뺨을 붙들고 잠시 고민하던 미뉴에트는 그의 아랫입술 정중앙에 손가락을 꾹 눌러 피를 묻혔다. 음, 됐다.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한 발짝 물러난 미뉴에트에, 제릴은 입술에 묻은 피를 어쩌지 못하고 허공에 손을 애매하게 두었다. 미뉴에트의 손가락이 꾹 눌렀던 자리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열이 오르고 있었다!
“지우지 마세요.”
“이, 이게 뭔데? 왜 입술에 피를…….”
“경고 주문이에요. 이 방에, 또는 제릴에게 위협이 닥치면 곧장 제게 이상을 알려올 거예요. 그럼 제가 바로 대처할 수 있으니까요. 원래는 흰 조약돌로 경고진을 만드는 주문이지만……. 재료가 없어서 주문을 응용해 다른 주문을 만들었어요.”
아, 그 부분이 뜨거운 건 견뎌주세요. 어쩔 수 없어요. 원래 주문이 그래서. 미뉴에트가 태연하게 말했다. 제릴은 어쩐지 입술에서 피어나는 열기가 온 얼굴로 번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 꼭 입술에 해야 하는 건가?
“제릴, 얼굴이 빨개졌어요. 어디 아픈가요?”
……이것도 그런 느낌이 드는 게 아니고 진짜로 그런 거였다. 제릴의 복잡한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뉴에트는 까치발을 들고 제릴의 이마와 제 이마에 손을 올리기 바빴다.
“뜨거워라.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까요. 제릴은 그 인간이 우리나 로제에게 해를 끼칠까 봐 두려운 거죠?”
“…….”
“방금 제가 한 걸 봤잖아요? 제릴은 제가 지켜준대도요.”
그 남자가 감히 로제를 상처 입힐 리도 없고요. 애초에, 아마 그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예요. 단정 짓는 말에 제릴이 바짝 세웠던 어깨에서 천천히 힘을 뺐다. 저렇게 태평한 미뉴에트를 보면,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사실 불안을 덜고 안정되는 게 더 컸다.
더없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미뉴에트의 손을 잡은 제릴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미뉴에트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두 눈을 조금 크게 뜬 채 지켜보았다. 아직도 피가 조금씩 배어 나오는 상처를 손수건으로 톡톡 두드려 피를 닦아낸 그는 그녀의 손을 붙든 채로 서랍을 뒤져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왜 거즈가 서랍 속에 들어있는 거죠?”
“너 이럴 때 쓰려고 구비해놨어. ……왜, 뭐.”
“아뇨……. 제가 이럴 줄 어떻게 아셨나, 신기해서요.”
“너랑 어울린 지도 벌써 몇 개월인데. 하아, 나도 정말로 쓸 일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저택에 구비해둔 것을 먼저 쓰게 될 줄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제릴은 상처를 거즈로 덮고, 마찬가지로 서랍에서 꺼낸 반창고로 그것을 고정했다. 신기해하며 손가락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미뉴에트에게 제릴이 말했다.
“주문이든 뭐든 다 좋은데. 널…… 이렇게 상처 내는 건, 그만했으면 좋겠어.”
“그건 어째서인가요? 피만큼 강력한 매개는 찾기 어려운걸요. 번거롭게 들고 다닐 필요가 없고, 효율이 뛰어나서 적은 양만 사용해도 되는 좋은 재료예요.”
“그래도…… 상처 내면 아프잖아.”
제릴은 말하면서도 제 생각에 자신이 없어 힘겨워 보였다. 하지만 물러서거나 얼버무리지 않고 꿋꿋하게 제 의견을 피력했다. 제릴이 이렇게 진중하게 요구하는 일은 드물다. 미뉴에트는 하는 수 없이 최대한 자제해보겠다는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릴이 저를 이렇게나 걱정해줄 줄이야.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그래, 걱정하는 거야.”
“……알았다니까요.”
대꾸하는 미뉴에트의 목소리가 아주, 아주 조금 수줍었다.
아주 큰 일을 끝낸 뒤처럼 제릴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하아……. 한숨을 흘리며 그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결 더 진정된 그가 물었다.
“일단 알았어……. 이제 와서 내가 가봤자 할 수 있는 일도 없겠지. 방해된다면 모를까.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데?”
“그 남자가 일을 허술하게 꾸몄을 리 없으니, 방해는커녕 우리는 일이 벌어지는 곳에 발 들이밀기도 어려울 거예요. 괜한 부담감 갖지 말고, 여기서 저랑 있어요. 지금 이 저택에 여기만큼 안전한 곳도 없으니까요.”
미뉴에트는 자연스럽게 제릴의 무릎에 앉았다. 제릴이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봤지만,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그럼 제릴은 앉아 있는데 전 서서 이야기하란 말인가요?’라는 의미가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자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거드름 피우는 고양이처럼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여 제릴에게 상체를 기댄 미뉴에트가 제릴의 오른손을 가지고 손장난하며 말했다.
“아는 걸 말해줄게요. 뭐…… 저도 모든 걸 다 알진 못하지만요.”
곱고 말랐지만 확실히 미뉴에트의 손보다 훨씬 큰 손을 장난감처럼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생각나는 것을 하나둘 주워섬겼다.
“심해인을 아세요?”
“뭐?”
침을 꿀꺽 삼키며 미뉴에트의 입만 뚫어져라 바라보던 제릴의 고개가 삐끗 기울어졌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무어 경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설명해준다더니. 의문이 떠올랐으나 제릴은 잠자코 고개를 저었다. 미뉴에트가 쓸데없는 말을 내키는 대로 내뱉는 성격은 아니니까. 오히려 과묵하던 성격이 최근에 와서 많이 밝아진 편이었다. 아마 이 뜬금없는 서두도 본론과 관련된 내용이겠거니 생각하며 그는 침착하게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인간은 아닌데, 인간처럼 손이 있고 두 발로 걷는 심해 생물체예요. 얼굴은 생선처럼 생겼어요. 상상이 가시나요? 옛 영주…… 음, 불길한 이름은 알 필요 없죠. 옛 영주 중 하나를 섬기는 종족이라고만 알아두시면 돼요.”
“심해 생물체……?”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잖아? 그런 말까지 침착하게 들을 수는 없었다. 제릴은 미뉴에트가 하는 말의 모든 부분이 제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것을 느끼면서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 자리에서 꿋꿋하게 버텼다. 기실 미뉴에트는 심해인에 대해 말로 꺼낸 것보다 훨씬 방대하게 알고 있었지만, 제릴이 과하게 겁을 집어먹은 것 같아 필요 없는 정보는 전부 쳐냈다. 이제부터가 본론이었다.
“바다에서만 서식하는 종족인데, 이번에 탐정 일행이 해안가 마을이라도 갔나 보죠? 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심해인의 유물을 손에 넣은 모양이에요. 그리고 소포에 담겨 여기까지 온 거죠. 언뜻 보기에는 고차원적 존재와 접촉할 수 있는 물건처럼 보였어요. 심해 전화라고 했나?”
“……정말로 위험하지 않은 것 맞아?”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위험해 보였다. 지금 당장 무어 경이 하는 일을 중단시키고, 로제에게 그가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알려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나 미뉴에트는 태평했다. 물론 그녀도 무어 경이 그 유물을 사용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로제가 그런 걸 사용할 리 없고, 만에 하나 사용하려 하더라도 그런 허술한 유물 따윈 그 순간 재로 돌아갈 테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 음침한 남자가…….’
어떤 소원을 빌려는 것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로제와 관련된 게 아닐까, 막연히 추측했다. 그 남자는 로제의 안위만 신경 쓸 뿐 미뉴에트나 제릴을 포함한 그외 사람들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으므로, 사실 그들에게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 맞았다. 그러나 미뉴에트는 최소한의 방비만 마친 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굴었다.
흘끗, 제릴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이제 불안함이 많이 가신 듯 안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다행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의 예민한 기질을 생각했을 때, 무어 경이 아주 조심스럽게 일을 진행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다면 미뉴에트도 별다른 수가 없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한 방비만 할 뿐.
‘중간에 끼어들어 의식을 막는다? 그가 걸어둔 금제를 뚫고 들어가는 동안 의식이 끝나겠지.’
그럴 바에야 이곳에서 상황을 지켜보며 목숨을 보호할 수 있도록 방비하는 게 낫다. 게다가 미뉴에트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저녁 식사 때, 제릴이 로제에게 충고했잖아요? 무어 경과 대화를 나눠보라고요.”
“……그래. 정말 로제가 위험하진 않은 거지?”
“네에. 위험하지 않은 것을 넘어서서, 저는 로제가 무어 경을 막아줄 거라고 생각해요.”
로제가 이런 면에서 얼마나 강한지 아시잖아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납득 당한 제릴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가 해결한다. 그 얼마나 설득력 넘치는 말인가?
그때, 그들과 떨어진 저택의 한쪽에서는 로제가 무어 경의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금제가 걸린 문고리를 잡아 뽑으며 아주 시원하게.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종결되었다. 가장 좋은 형태, 가장 좋은 방향으로.
제릴에게 몸을 기댄 채로 그의 맥박 소리를 들으며 미뉴에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을 몰아내다 못해 단숨에 지워버리는 거대한 기운을 느끼고 두 눈을 번쩍 떴다. 이런 기운을 착각할 순 없다. 로제였다. 싱긋 웃은 미뉴에트가 상체를 떼어내며 말했다.
“그것 보세요. 로제 앞에선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니까요. 참…… 그 남자도 무슨 생각이었는진 모르겠지만, 학습이 덜 된 건지 어둠의 아이보다 멍청하다니까.”
“어둠의 아이? 그건 뭔데? 그보다…… 해결된 거야?”
“네, 이제 방을 나가도 괜찮아요. 역시 로제가 끝장을 낸 모양이에요.”
손을 뻗어 그의 입술에 말라붙은 피를 문질러 지운 미뉴에트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제릴에게 손을 뻗었다.
“나가 보죠, 제릴. 저택에 손님이 도착한 것 같으니 맞으러 가봐요.”
“손님? 설마 어머니가 오셨어?”
“네에.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정말로 문제가 생긴 것을 깨닫자마자 쉬지 않고 달려온 모양이네요.”
“그러게. 네 추측대로야.”
제릴은 내민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잡고 일어난 그는 굳이 손을 놓지 않고 천천히 걸어 방을 나섰다.
“아무튼 잘 됐어요. 이걸 빌미로 그 남자를 한동안 제대로 물어뜯어 주죠. 로제는 마음이 넓으니 봐줬겠지만, 저는 이런 기회를 놓치는 바보가 아니에요.”
“그래, 내 몫까지 부탁할게. 그 남자는 저택 뒤편에 아예 머리까지 묻어버려도 상관 없어.”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맡겨두세요.”
그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현관으로 향했다. 숙소로 돌아가면 뭘 할 것인지, 다음 휴일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 등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의 발걸음은 춤추듯 부드러웠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다정다감했다. 서로를 신뢰하는 친밀한 연인이 지을 법한 눈빛이었다.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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