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L]개화한 감정
1차 HL 자캐 페어 : ㅁㄷ님 연성 교환 샘플
산명수려한 풍광 속 못 위로 꽃잎이 하느작거리며 내려앉는다. 그 가운데 부드러운 빛의 머리칼을 붉은 끈으로 질끈 동여맨 어느 소저 하나가 중심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못 위에 떠 있는 팔각정자 안 쭈그려 앉은 채 무릎을 끌어안고서. 그리고 그사이에 고개를 묻고 있다. 연분홍 꽃잎 흩날리듯 무게감 없이 나풀거리는 계절과는 맞지 않게, 소산의 기분은 밑바닥을 기고 있었다.
정자의 끄트머리 처마에 매달린 물고기 모양 풍경이 딸랑, 소리를 내며 바람결에 흔들렸다. 구태의연하게 자리해 있던 소산은 그 소리에 조금 정신이 든 듯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아까 그 사람... 누굴까. 스승님하고... 많이 친해 보였는데.’
청운과 함께 담소를 나누며 행복한 듯 웃음 짓던 여성. 분홍 꽃 비단에 금실로 수놓은 옷을 두르고 머리까지 나비 비녀로 꽂아 곱게 틀어 올린, 누가 봐도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자태였다.
갑자기 선머슴 같다며 자신을 놀려대던 인근 마을의 남자애들이 떠올랐다. 스승님과 같이 있던 그 여성은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계열의 사람이었다. 마치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았다.
“굉장히 신경 쓰여… 아, 안 되겠다. 직접 가서... 물어봐야겠어.”
으쌰, 기합 소리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도복 자락을 제대로 갈무리하지도 않은 채, 소산은 정자에서 뻗어 나온 나무다리를 휘적휘적 큰 걸음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아까 본 광경이 눈앞에 스치듯 지나가 중간에 고개를 휘저은 건, 하늘 위 천자만이 아는 비밀이렷다.
*
“──스승님!”
단출한 오두막의 문을 벌컥 열었으나, 그와 동시에 아차 싶어 문을 조심스러운 태도로 다시 닫았다. 먼저 안에 계신지 여쭙고 열었어야… 그러나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안에서 스승님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와.”
“헙... 네!”
쪼르르 달려들어 가 단상 앞에 앉아 책을 들고 있는 스승님 곁에 주저앉는다. 스승님은 미동 없이 같은 자세로 책을 한 손에 든 채 독서에 여념이 없으셨다. 소산은 최대한 화난 표정을 만들려 얼굴을 이리저리 찌푸렸다. 그러나 잘 안되어, 결국 애교 섞인 말투로 이리 내뱉고 마는 것이다.
“─스승님, 아까 가, 같이 있던 여자… 누군지 물어, 봐도… 되겠슴까…?”
“...응?”
그제야 눈동자만을 굴려 제 쪽으로 시선을 주는 스승님이 야속해서. 소산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정 부리듯 본심을 털어놓았다.
“그, 친한 사이... 인 것 같던데. 저보다 더, 오래되고 소... 소중한 인연인가 해서요. 솔직히… 조금, 기분이 좋지 않, 았슴다. 왜, 왜인지 모르겠지만...”
“...아, 그 사람.”
그는 잠깐 눈동자를 위로 굴리더니, 아무렇지 않은 투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별 것 아닌 사람이다.”
“벼, 별 것 아닌... 아.”
“그래. 아랫마을에 사는 소저인데, 얼마 전 작은 도움을 준 적이 있어서. 그에 대한 예를 표하기 위해 내게 찾아왔지.”
“그... 그렇구나아.”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어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눈에 띄게 안도하는 소산을 지긋이 응시하다 결국 청운이 작게 웃음을 터트린다.
“...귀엽긴.”
“어휴, 난 또... 네? 스승님, 방금 뭐,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오늘치 수련은 다 끝내고 이렇게 노닥거리는 건가? 소산, 분명히 일전에 나와 약속을 했을─”
“으아앗!! 악! 깜빡했슴다! 지... 지금 바로 가서 목검 일천 번 휘두르기 시작하겠슴다!”
우당탕, 소리가 날 정도로 분주하게 오두막을 뛰쳐나가는 소녀를 보고 그 누가 귀엽지 아니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냥 문을 열고 나가다 신발 한 짝을 깜빡한 것이 생각났는지 다시 머쓱하게 돌아오는 소산은 청운이 보기에 사랑스러웠다. 이 말 외엔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었다.
***
“핫! 헙! 헉, 헉... 하이고, 힘들다. 아, 아직 육백쉰여섯 번째...”
내일이면 팔에 알이 배길지도 모르겠다. 소산은 근육통에 시달릴 미래의 제 팔을 걱정하며 결국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근육 빵빵한 멋진 소저가 되는 건 좋지만, 스승님보다 더 우락부락해지는 건... 좀... 음.
“나, 나름... 괜찮을지도?”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잠깐의 휴식을 취한다. 수련으로 붉게 상기된 뺨과 턱을 타고 흐르는 땀, 가쁘게 내뱉는 숨. 아직 진정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으나 이런 식이라면 하루 종일 검만 휘두르게 될 것이다.
“괘... 괜히 일천 번이라고... 이 입이 또, 또! 방정맞아서, 으으...”
하지만 여아일언중천금이라고 했지 않은가. 한 번 내뱉은 말은 꼭 지켜야 한다고 스승님께서도 늘 말씀하시곤 하셨다.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곧 있으면 해가 질 모양이다.
소산은 잠시 멍한 기분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아까 그 여성은 은혜를 입어서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왔다고 했으니까 다시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승님 옆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건 싫었다. 왜 싫으냐면, 그건... 그러니까.
“나도... 모르겠다고.”
“뭘 모르겠는데?”
“흐익!”
갑자기 청운이 인기척도 없이 뒤에서 스윽 나타났다. 화들짝 놀란 소산은 제자리에서 튀어오르더니 뒤로 기어가며 청운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드... 들으셨슴까...?”
“뭘?”
“스승님 옆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건 싫다고 했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 그 생각은 입 밖으로 내뱉은 기억이 없는데... 헉.
“...아~. 소산, 내 옆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게 싫었구나.”
“히익! 스, 스승니임...”
소산이 울먹이며 청운을 애처롭게 바라봤다. 청운은 그런 소산을 가만히 지켜보다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번에는 소산도 그에게서 도망가지 않았다.
“그럼 그렇다고 솔직히 말할 것이지.”
“그... 그게.”
“내가 소중히 여기는 이는 소산, 너밖에 없는 것을. 아직도 모르다니...”
여전히 땅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소산의 코앞까지 다가간 청운이, 그녀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더니 훌쩍 들어 올려 일으켜 세운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처럼 가벼운 동세였다.
“스승님... 방금 그 말, 정말로...?”
“...”
대답 대신 청운은 그녀의 앞머리를 말없이 헝클였다. 앞머리를 어지럽히던 손이 곧 다정한 태도로 옆머리를 매만져 정리해주었다. 소산은 쓰다듬을 받는 고양이처럼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았다. 표정은 여전히 의문 반, 호기심 반이었다.
“이제 가자. 곧 저녁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니.”
“아, 헉... 네! 오... 오늘은, 스승님 대신 제가 저녁 식사를 준비해보겠습니다!”
“...네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소산을 흘기던 청운이었으나, 또 다시 소산이 울상을 짓는 바람에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오늘은 네 정성을 어디 한 번 보자.”
해가 천천히 진다. 붉게 물든 하늘이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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