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어스 커미션 샘플

시리어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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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눈을 뜬다. 흰 속눈썹이 눈앞에 드리워지며 시각 정보를 교란한다. 불편한 구조이다. 나는 묻는다. 왜 이 생물은 시각 기관 앞에 가릴 것을 두었을까? 그 의문을 가지자마자 시각 기관이 세밀하게 움직인다. 눈꺼풀의 미세한 근육이 당겨지며 속눈썹은 시야를 가리지 않게 올라갔고, 눈동자는 좀 더 먼 거리에 초점을 맞추도록 설정되었다. 이렇게 태어난 직후에는 미세 조정을 거쳐야 했다. 그러니까, 나는, 이 행성의 면역시스템은, C은.

C은 일어나서 다리를 펴고 서보았다. 다리는 관절 가동 범위 내에서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이어서 앞으로 몇 걸음을 내딛고 한 바퀴 빙글 돌아보았다. 이번 신체의 평행감각과 직립보행 능력에는 특기할 문제가 없었다. 이번에는 말이다.

이번이 몇 번째 탄생인지 C은 세지 않았다. 행성은 공전 및 자전의 횟수를 기록하지 않는다. 그건 행성 위의 생명체들이 할 일이다. 행성은 그저 존재하기만 하면 되었다. 아득한 세월 동안 항성의 둘레를 공전하면서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 그것이 행성의 역할이다. 그런 행성의 역할을 지키기 위해 ‘C’이 태어났다.

C은 ‘다른 C’이 만들어졌던 흔적을 헤치고 나아갔다. 본래 다세포 고등 생명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진화에 이르는 억겁의 세월이 필요하다. 비록 모방일지라도, 행성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럴듯한 결과물을 만들었다. 다른 C도 그러했다. 세포 분열로 형체를 만들었고 표피를 둘렀으며 생명 능력을 지니게 했다. 이 얼마나 훌륭한가? 그러나 움직일 수 없거나, 형체를 유지할 수 없는 등의 한계로 만들어진 목적을 수행할 수 없어서 다른 C들은 그대로 끝났지만.

이번 C은 움직일 수 있었고, 형체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목적을 수행할 수 있었다. 목적이란 바로 J을 제거하는 것. C은 다리를 뻗었고 J을 향해 걸었다. 작은 걸음이 드넓은 행성 표면을 가로지르며 나아갔다. 흙에 파묻힌 아스팔트에 발자국이 남았다.

 

 

벽 위에 앉아있던 J은 칼을 움켜쥐었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뒤쪽으로 훅 뛰어내렸다. 착지 직후 칼을 뽑아 들었고, 칼끝이 C의 앞에 곧게 세워졌다. C은 걸음을 멈췄고 J이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또 너냐?”

C은 가만히 서서 눈을 깜박였다. 상대를 죽이기 위해 나이프를 들고 오다가 들킨 처지에, 그리고 칼이 눈앞에 있는데도 놀란 기색 없이 무던했다. C은 그저 의아해하며 J에게 물었다,

“너는 매번 내가 오는 걸 어떻게 알아차려? 네 시야각이 등 뒤까지 볼 수 있게 디자인된 것 같지도 않던데. 혹시 후각에 의지해? 아니면 공기의 흐름을 감지할 정도로 촉각을 민감하게 발달시킨 거야?”

J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무슨 헛소리야? 발소리를 숨기지도 않았으면서.”

“소리? 아, 청각이구나.”

C은 이해했다는 양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물론 J은 C이 무엇을 이해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다가오는 도중에 얇은 콘크리트 조각을 밟아 깨뜨려서, 대놓고 커다란 소리를 냈으면서 왜 저렇게 구는 걸까? 그러나 깊게 고민해 보지도 않았다. J은 상대의 궁금증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저 베어도 다시 나타나는 적이라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J은 칼끝을 까닥이며 말했다.

“이번에도 싸움을 걸려고? 해봐야 매번 네가 지잖아.”

“맞아. 그러니 왜 지는지 정보를 수집하고 필요한 기관은 발달시키고 싶어. J, 소리라면 네 신체에서 더 많이 나는데, 어떻게 나의 소리를 더 세밀하게 잡아낸 거야?”

동시에 이상한 녀석이어서 상대의 사고방식에 별로 동조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소리는 또 무슨 말이야? 몰라, 시끄러워.”

“네게서는 신진대사가 일어나잖아. 네 몸이 네가 섭취한 음식을 분해하여 에너지로 전환하고, 또 그것을 사용하는 생체활동. 네 몸에서 그것을 하는 소리가 들려.”

“뭔……. 넌 그걸 또 듣는다는 거냐? 이거 기분 나쁜 녀석이네.”

J은 얼굴을 팍 찡그렸다. 그러자 C은 다소 고조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기분 나빠? 혹시 그 불쾌함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네가 사망에 이를 정도이니?”

J은 욕설을 중얼거리다가 답했다.

“그럴 일 절대 없으니까 포기해.”

J은 딱 잘라 말했다. C은 몸이 쳐졌다.

“그렇구나. 아쉽다. 역시 직접 생명 활동을 정지시킬 수밖에 없겠네.”

그리고 C은 바로 잭나이프를 휘둘렀다.

순식간에 잭나이프로 칼끝을 쳐냈다. J을 상대할 때 빠르게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 적어도 모르는 사이에 당하지 않았다. J은 튕겨 나간 칼을 도로 잡고 뒤로 뛰어 거리를 벌렸다. C의 무기는 아주 근접해야 하고 J의 무기는 그보다는 길다. C이 잭나이프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올 틈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 C은 달려들었고, J은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칼을 아래로 내려 J을 수직으로 찌르려고 했다. C은 황급하게 잭나이프로 방어하려고 했다. 그러나 체중을 싣고 중력까지 빌린 공격은 힘이 강했다. C은 간신히 칼의 궤도를 비틀었지만, 잭나이프를 들고 있던 손의 손목이 순식간에 꺾였다. C이 멈칫하는 사이, J은 두 걸음 정도 떨어진 위치에 착지했다. C은 황급하게 잭나이프를 다른 손으로 바꿔서 쥐려고 했다. 그러나 그사이 J은 칼을 곧게 세우고 C에게 달려들었다. C의 몸통이 꿰뚫렸다. J은 칼을 비틀어 횡으로 빼냈다. C은 그대로 서 있었다. 황야에 남은 마른 고목이 그러하듯 아주 오래 있다가 천천히 삭아갈 것 같았다. 그러나 흰옷이 허무하게 휘날렸고 C이 바닥으로 기울어졌다.

J은 칼을 거뒀다. 매번 시시한 결과가 나왔다. J은 C에게 가까이 다가가 형체에 대고 내뱉었다.

“다시는 오지 마.”

 

 

‘우리’는 떠들어댄다. 행성은 몇십억 년 동안 존재했어. 지질학적으로 천년도 순간에 불과해. 그런 우리가 고작 몇 달 후에 죽는다고? 바로 당장 죽는 것과 다름이 없잖아.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순 없어. 먼 훗날 항성의 수명이 다해서 적색 거성에 집어삼켜질 수는 있겠지. 하지만 지금 당장 그럴 수는 없어. 그래서는 안 돼.

저 검은 것은 고작 작디작은 존재 하나야. 행성을 스쳐 간 수많은 것 중에서 뛰어날 것이 하나도 없는 미욱한 생명체야. 저것이 어떻게 감히 우리를 살해해? 어떻게? 왜?

‘나’는 만들어지면서 그들의 ‘우리’의 의지를 듣는다. 대지가 육신을 떠받치며 빚어내고 기압이 온몸을 누르는 동시에 숨을 불어넣는다. 온 행성이 나를 감싼다. 그것은 나를 빚으며 속삭인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어. 그래서는 안 돼.

C은 답한다. 나도 알아. 그래서는 안 돼.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그를 제거할 거야.

행성에 존재했던 지적 생명체의 가장 강대한 적은 같은 지적 생명체였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 동류를 죽이는데 탁월했다. 전쟁과 인재라는 이름으로 지적 생명체들끼리 죽음에 뛰어드는 모습을 행성은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러니 지적 생명체는 동류의 지적 생명체로 사냥해야 한다. J이라는 적은 그것과 동일한 생명체로 죽일 수 있으리라. 그렇게 행성은 C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C은 눈을 뜬다.

C은 팔목을 돌리며 몸 상태를 점검했다. 저번 죽음 이후 팔목이 보강되었다. 또, 이 육신에서 나는 소리도 줄였다. 화학반응을 제한하였으므로 이 육체는 오래가지 못할 테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행성의 자원이 막대하게 들어간다고 해도 행성이 통으로 사라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이번에는 식물 사이의 폐허에 J이 있을 테다. 육신의 점검을 끝낸 C은 폐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덩굴에 얽매인 녹슨 쇠가 발끝에 툭 걸렸다. 건물 일부였을 테다. 깨진 유리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와 문양을 그리고 잎사귀에 아롱진다. 그리고 C은 그 광경을 아름답다고, 동시에 서글프다고 느꼈다. C은 그리 느끼도록 만들어졌다. 수호자란 수호 대상에 애정과 연민을 절대 버릴 수 없는 법이다.

그리하여 C은 다시 그의 적에게로 향했다. 그를 모방하여 아주 닮은 모습으로, 잭나이프를 들고, 행성이 자전하고 공전하는 한.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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