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어스 커미션 샘플

시리어스 3

공포 6655

장르 Fate의 길가메쉬 드림입니다.

길가메쉬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흰 안개가 주변을 감돌았다. 바닥에 그려진 주술 진에는 의식 때 뿌린 빛이 아직 은은히 남아 맴돌고 있었고, 그것이 안개 속에 파고들어 번졌다. 희뿌연 안개가 눈 앞을 가렸지만, 길가메쉬는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안다. 이번이 벌써 네 번째이다. 자신을 감당할 힘도 없으면서 감히 이 자신을 불러낸 어리석고 약해빠진 잡종 녀석. 그 미욱한 인간이 엉덩방아를 찧은 채, 긴장으로 달달 떠는 눈동자로 자신을 보고 있을 것이다. 길가메쉬는 눈을 찡그리며 무기를 꺼냈다. 이번에도 곧장 상대를 처분할 생각이었다. 그때 계집이 바보 같은 어조로 말했다.

“하아, 하아, 서번트……? 진짜 서번트야? 나, 제대로 소환한 거, 맞……지?”

그 말은 이전에 들었던 것과 토씨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이 발음을 방해했고, 목소리의 끝에는 우스운 환희가 맴돌았다. 아주 실력 좋은 광대의 성대모사라도 저렇게 정확하게 같은 말을 반복할 수 있을까?

길가메쉬는 무기를 날리는 대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슬슬 알아차렸다. 무언가가 그를 상대로 싸구려 연극을 선보이고 있었다. 저 잡종은 아닌 다른 누군가이다. 감히, 이 길가메쉬를 상대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그러나 그 무뢰한은 왕의 자비에 감사하라. 이 길가메쉬는 여흥을 나름 즐기는 몸이다. 그러니 잠깐 여흥 삼아 이 연극에 어울려 주리라. 내 마음에 든다면 고통은 없이 보내주겠다. 적어도 똑같은 시작을 몇 번이나 관람하는 짓보다는 덜 지겨운 광경을 선보이거라.

그러며 길가메쉬가 주최자에 대한 살해를 유보했을 때, 잡종이 다음 대사를 내뱉었다. 노골적으로 불안해하는 목소리였다.

“저기요? 당신, 제 말 들리나요? 서번트로 소환되신 것 …… 맞나요? 저기, 클래스는…….”

허나 길가메쉬가 연극의 순번을 지켜야 할 이유는 없었다. 길가메쉬는 잡종에게 사납게 일갈했다.

“일어나라, 잡종. 언제까지 벌레처럼 기어다니고 있을 테지?”

안개 너머의 사람이 허겁지겁 일어났다. 일어나는 도중 발을 헛디뎌 잠깐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결국은 일어났다. 길가메쉬는 혀를 찼다.

“짐이 너무 너그럽게 봐주었군. 걸음마도 할 줄 모르는 애송이에게 일어나게 시켰으니 말이야. 하긴, 그 꼴이 네게는 어울리기는 하다만.”

“애, 애송이 아니거든요!”

상대가 발끈 성질을 내며 외쳤다. 안개는 서서히 가라앉았고 상대의 모습이 드러났다. 흑색의 머리카락을 단발로 흩날리고 있는 조그마하고 보잘것없는 계집이었다. 유일하게 봐줄 만한 부분이 있다면 저 보라색 눈이리라. 그 계집이 눈물겹게도 당차게 보이려 애쓰며 길가메쉬에게 외쳤다.

“나는 당신의 마스터에요! 당신은 내가 소환한 서번트고요! 서번트라면 마스터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내, 내겐 영주가 있다고요! 보세요!”

“호오.”

계집은 제 손등과 팔을 내보였고, 길가메쉬는 미약하게나마 감탄을 표했다. 조롱이 아닌 순수한 감탄이었다.

“네놈이 짐에게 소리를 지를 강단이 있었을 줄이야.”

그간 소환되어 마스터라는 작자를 마주하자마자 죽였으니 알 일이 없기는 했다. 기껏 해 봐야 비명이나 단말마 정도나 들어봤다. 그러나 그것이 인정 따위는 아니었다. 높게 쳐봐야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릴 줄 아는군?’ 정도의 감상에 가까웠다.

“하지만 짐이 언제 너에게 발언을 허락했지? 주제도 모르는 잡종 녀석.”

허공에 그려진 황금색 원에서 순식간에 날붙이가 튀어 나갔다. 마스터를 자칭하는 잡종에게 날아갔고 뺨을 스치며 붉은 선을 그었다. 날붙이는 뒤의 벽에 꽂혔고 함께 잘린 머리카락 몇 가닥이 천천히 바닥에 내려앉았다. 베인 뺨에서는 핏줄기가 생겨났고 계집의 입은 덜컥 멈췄다. 길가메쉬는 계집에게 몇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내려다보며 친히 읊조려 주었다.

“내 특별히 이번에는 너를 살려두겠다, 계집. 그러나 거기까지다. 이 이상 기어오르지 말도록.”

그렇게 말하고 길가메쉬는 계집을 스쳐 지나갔다. 이 계집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이 반복을 끝내기로 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성배 전쟁의 끝이다. 길가메쉬가 성배 전쟁의 끝에 다다르려면 마스터가 있어야 한다. 이 잡종을 살려두는 이유는 단지 그뿐이었다. 아주 미약한 양이지만, 그래도 마력을 공급하므로. 그때 계집이 뒤에서 외쳤다.

“내…… 제 이름은 LY에요. 계집이나 잡종이 아니라.”

길가메쉬는 뒤를 힐끗 보았다. 이쯤 되면 겁에 질려서 덜떨어지게 울기나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외였다. 떨고 있기는 했으나 형형하게 눈을 치떴고, 뺨에서는 피를 흘리면서도 길가메쉬를 직시하고 싶었다. 길가메쉬는 헛웃음을 지었다가, 곧 싸늘해졌다.

“하찮은 잡종 녀석. 짐이 네 이름을 기억해야 할 가치가 어디 있지?”

더 말을 섞을 가치도 없다. 길가메쉬는 그저 금빛으로 화하여 사라졌다.

LY는 소환진 앞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안개가 모두 가라앉을 때까지 가만히 서 있다가 피가 흐르는 제 뺨을 더듬어보았다. 뺨의 상처는 꽤 깊었다. 소매로 핏줄기를 닦아내었는데, 상처와 닿자 지독한 쓰라림이 찾아왔다. LY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악물었다가 허탈하게 팔을 떨궜다.

 

 

LY는 반창고를 붙인 뺨이 다른 곳에 닿지 않게 주의하며, 제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전에는 가문의 사람들에게 서번트를 소환했음을 알렸다. 말을 하며 뺨이 당겨질 때마다 통증이 일었다. 가문의 사람들은 LY가 꽤 당연한 일을 해낸 듯이 굴었다. 그래, 우리 가문이라면 응당 이 정도는 해야지. 그리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은 모두 표정이 같았다. 크게 기뻐하는 자도, 다음 단계를 걱정하며 조마조마한 기색이 된 자도, 인심을 써주는 양 칭찬을 내려주는 자도 없었다. LY의 소환 성공을 빌미로 가문의 자긍심을 꺼낼 만도 한데, 그들은 덤덤하기만 했다. 그러나 LY가 소환한 서번트의 진명을 물었을 때 답을 하지 못하자, 그때는 반응이 확실히 생겼다. 부정적인 방향으로였다.

어떻게 그거 하나 못 하느냐, 마술사의 기본조차 되어있지 않다, 배운 것은 죄다 어디로 갔느냐, 이제껏 기르기는 해 왔는데 애가 도대체 어떻게 되어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등으로 거세게 호통을 쳤다. 어쩌면 그들은 LY가 이런 실수를 저지를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미리 호의적인 반응을 내비치지 않기로 약속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LY는 궁금했다. 당신들 중에서 서번트를 실제로 소환해서 성배 전쟁에 참여한 사람이 있는지, 그 역사 속의 영웅들과 도대체 어떻게 손을 잡고 협력했는지. 하지만 LY는 이런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험에 의해 알았다. 그들은 선선히 LY의 의문을 풀어주고 친절하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준 적이 없다. 오히려 서번트를 통제하지 못하는 부분을 캐내서 집요하게 물어뜯을 것이다. 더군다나, 뺨이 아파서 더 말을 이어 나가고 싶지 않기도 했다.

LY는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건 자그마치 성배 전쟁이었다. 성배 전쟁! 이 지역의 마술사라면 성배 전쟁을 모르는 자가 있을 수 없다. 게다가 그 끝에 닿을 수 있는 성배가 대체 어떤 물건이던가? 무슨 소원이든 이루어 준다고? 그건 마법의 영역이 아니던가? 그런 성배를 가져오는 중대한 일을 가문이 자신에게 맡겼다. 바로 자신에게! 가문에서는 옛날부터 자신에게 기대를 걸거나 중요한 일을 맡긴 적이 별로 없었는데도. 이번에 처음으로!

LY는 자신이 그들의 인정을 받았다고 느꼈다. 드디어 제 몫을 해낼 한 사람의 마술사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잘해야 했다. LY에게 주어진 기간은 비교적 짧았으나 그동안 아주 열심히 알아보고 준비했다. 적어도 제 손이 닿는 선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LY는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눈물이 툭 떨어졌다.

아니다. LY는 자신이 이 일을 모조리 망칠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제대로 해왔던 일이 뭐 하나 제대로 있기라도 했는가? 자신은 옛날부터 이 지경이었다. LY가 해냈다고 생각한 일은 전부 하찮았다. 마술사의 자질은 변변치 않았고, 학습도 더뎠다. LY는 나름으로 열심히 했는데, 가문 사람들은 부족하다면서 수없이 질책했다.

애초에 제 실력으로 못 할 것 같았다. 자신 없었다. 죽을 수도 있다고 하니 두려웠다. 그러나 거절해내지 못했다. 그러니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서번트 하나 제어하지 못하는 마스터라니. 이 얼마나 한심하고 무능한가? 하지만 그것이 본래 LY 자신 아닌가?

어둠 속에서 홀로 앉아있다가, LY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소환이 끝이 아니다. 시작일 뿐이다. 다른 마스터가 누구이고, 어떤 서번트가 소환되었는지 파악해야 했다. 또한 이제부터는 언제 공격이 들어올지도 모르니 방어 수단을 갖추어야 했다.

그러니 도무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의 공기가 무게를 두르고 LY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역시 한심해 빠진 잡종이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LY는 깜짝 놀라서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마취에 걸리기라도 한 듯 말을 듣지 않던 몸이 그제야 움직여졌다. 금빛 가루가 허공에 생겨나더니 그 서번트가 나타났다. 서번트는 나타나자마자 방을 둘러보았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황금색 원에서 의자를 꺼내더니 방만하게 앉았다.

“계속 그러고 있을 것인가? 뭐, 그렇게 애벌레처럼 마냥 웅크리고 있는 것도 너 같은 것에는 나름 어울려서 나쁘지는 않군.”

LY는 절박함이 앞서서 모욕을 느낄 새가 없었다. 그가 다시 나타났다. 붙잡아야 했다. 그를 불러야 했다. 하지만 뭐라고 부르지? LY는 필사적으로 그를 살피고 간신히 호칭을 하나 찾아내었다.

“아처……지요?”

“호오.”

아처는 미소를 머금었다. LY가 그의 클래스를 정확히 짚어내었다.

“잡종치고는 눈치가 빠르군. 하긴, 미천한 녀석들에게는 눈치라도 있어야지.”

“당, 당신의 진명은 무엇이지요?”

앞선 어른들의 호통이 떠올라 LY는 급하게 물었다. 다만 묻고 나니 이후 너무 다급하게 굴지 않았나 싶어졌다. 그러나 아처는 불쾌함을 드러내는 일 없이 답했다.

“그래, 너 같은 잡종이 이 짐의 존함을 모른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친히 알려주겠다. 짐은 길가메쉬이다. 수메르의 왕이자 모든 보물의 주인 되는 존귀한 존재이지. 그러나 알려줬다고 함부로 하찮은 입에 담는 일은 허락지 않겠다.”

LY는 잠시 압도당해 입을 벌리고 있다가 뒤이어 오는 말에 물었다.

“그러면 아처라고 부르는 건 괜찮나요?”

“흥. 마음대로 해라.”

그쯤 되자, LY에게 용기가 조금 났다. 최소한 그가 누군지 알았고, 부를 수 있게 되었으며, 지금 자신 앞에 존재한다. LY는 그제야 실감이 났다. 자신이 서번트를 소환해 냈구나. 정말 고대의 영웅이 제 앞에 있구나. 길가메쉬의 붉은 눈이 LY를 훑어보았다.

“그새 죽지는 않았나 싶어서 확인하러 왔는데 멀쩡하군. 좋다. 네 녀석은 여기 처박혀서 마력 공급에나 전념하도록.”

그리고 길가메쉬는 등을 돌렸고 LY는 빳빳하게 몸을 세우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자, 잠깐만 쉬고 있었을 뿐이거든요!”

LY는 문고리에 걸어둔 겉옷을 허겁지겁 챙겨 입었고, 고집스럽게 길가메쉬를 직시했다.

“아처, 당신은 성배 전쟁에서 이길 거지요?”

길가메쉬는 느긋하게 답했다.

“승패는 내게 딱히 상관없다.”

“그러면 지실 건가요?”

이번 물음은 길가메쉬의 미간이 좁아지게 만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이지? 이 내가 누군가에게 패배하는 일은 벌어질 수 없다.”

“어떤 서번트든지 이길 수 있단 말인가요?”

“흥, 물론이지.”

LY의 마음속에서 희망이 다시 피어올랐다. 움직일 수 있고, 싸울 수 있다. 성배 전쟁에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승리할 수 있다. LY는 좀 더 선명해지는 희망을 말로 내뱉었다.

“당신이 성배 전쟁에서 승리하겠군요.”

“당연한 말을.”

길가메쉬는 딱히 으스대지 않았다. 그에게는 확실하기 때문이리라. 따라서 앞으로의 미래도 그저 사실을 읊는 듯 담담한 투였다. 그의 태도에서 묘하게 가문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LY가 해낸 것을 당연하게 구는 이들. 하지만 길가메쉬는 방향이 달랐다. 자기 자신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들은 그 당연함을 휘두르며 자신과 상대를 어떻게 대할지 고민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분명하다는 듯 행동에 거리낌이 없다.

LY는 문간에 썼다가, 그를 힐끗 훔쳐보았다. 길가메쉬. 황금색으로 빛나고 강인하며 뛰어난 사람.

LY는 사실 언젠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제 행동에 망설임이 없고 자신이 넘치는 사람. LY는 그들을 행동을 따라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아무리 애써도 흉내에 불과하다. LY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은 실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너무 큰 꿈이다.

하지만 그런 존재에게 인정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그들의 빛을 나눠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길가메쉬가 일어났고, LY는 제 뺨을 몰래 매만졌다. 물론 길가메쉬와의 첫 만남은 실수투성이였다. 하지만 몇 년에 걸쳐 실망을 거듭한 가문 사람들과 달리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어쩌면, 어쩌면 그에게서는 LY 자신의 존재를 긍정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그와 함께 성배를 성공적으로 차지한다면……

문간을 막고 있는 LY 앞에 길가메쉬가 섰다.

“너는 여기 박혀 있으라고 했을 텐데?”

“아니요. 나도 같이 가요.”

“성가시게 구는군.”

길가메쉬는 귀찮게 사람을 밀치는 대신 금빛 가루로 화하여 사라졌다. LY는 잠시 당황하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길가메쉬는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LY는 이번에는 방으로 도로 들어가는 대신 이를 악물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찬 공기가 LY를 확 덮쳤으나 상관없었다. LY는 열심히 달렸다.

 

성배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그리고 길가메쉬를 찾기 위해.

어쩌면 LY 자신을 위해서.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