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햄] 물빛의 연인
물빛의 연인
w. 주인장
* 전래동화 '신데렐라'를 모티브로 작성한 글입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방문에 기현은 눈을 번쩍 뜨고서 몸을 일으킨다. 지난 몇 년 간,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던 일상이었다. 제 한 몸 겨우 누일 만한 방에 깔린 이불을 차곡차곡 개여서 방 한쪽에 놓아 두고 기현은 서둘러 방을 나선다. 서두르지 않으면 또 어떻게 심사가 뒤틀려서 제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제 방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짚신에 대충 발을 끼워 넣고서 소리 낸 이를 찾는다. 아직도 바깥은 새벽의 찬 기운이 가시지 않은, 미처 태양도 아직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푸르스름한 늦은 새벽이었다. 이제 막 인시(寅時: 새벽 3시 ~ 새벽 5시)에서 묘시(卯時: 새벽 5시 ~ 아침 7시)로 넘어가려는 듯한 이른 새벽은 기현의 잠을 깨우기엔 충분하지 못했다. 인기척을 찾으려 분주히 움직이는 기현의 뺨으로 서늘한 새벽 공기가 스친다.
"유기현!!!"
"가고 있어!"
아직 잠에 잠겨 있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듯 대답하며 사내에게로 향한다. 얼큰하게 취해 있는 그는 벗은 갓을 손에 들고, 상투로 잘 묶여 있던 머리는 느슨해져 조금 흘러 내려 있었다. 남자는 기현이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며 제대로 중심도 잡지 못하는 몸으로 휘청거리며 기현에게 휘적휘적 손짓한다.
"왜 이리 굼떠, 동생이 왔는데…. 저, 저기 가서 시원한 물 좀 가져와. 나 목 말라."
"그래, 금방 갖다줄게."
방금 잠에서 깬 몸은 제 의지대로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주지 않는다.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휘적거리며 부엌으로 달려가 식음용으로 따로 준비해 두었던 물을 그릇에 담아 사내에게 가져다준다. 사내는 기현에게서 물그릇을 빼앗아 들고 질질 흘려가며 단숨에 들이키더니, 이내 그릇을 기현에게 던져 버린다.
"나중에 어머니께서 나오셔서 무슨 소란이냐 하시면 알지?"
"알고 있어."
"그래. 나는 지금까지 함께 우정을 쌓은 옛 벗을 만나고 온 거야."
남자는 비릿하게 실실 웃으며 기현의 얼굴에 대고 읊조린다. 그가 입을 벌릴 때마다 역한 탁주의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기현은 조금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웃으며 남자의 말에 알겠다 대답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내의 말에 기현은 웃는 낯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형님이 내 손윗누이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들어가 쉬어. 곧 아침인데."
"뭐야, 그 표정은? 이제 네놈까지 나를 무시하는 것이지?"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기현을 거칠게 뒤로 밀친다. 기현은 힘없이 뒤로 밀려나며 사내를 향해 미안하다 대답한다. 이 양반놈의 사내는 행실만 보자면 언제 목이 날아가도 이상할 것이 없는 놈이었다. 허구한 날 조정을 들먹이며 왕실을 욕보이는 주제에, 겨우 무관 시험을 통과한 파렴치한 놈. 기현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만 속내를 내비치지는 않는다. 남자가 자신의 별채로 들어서고 나서야 기현은 크게 한숨을 쉬며 허리에 손을 짚는다. 인제야 태양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서늘한 공기에 따뜻한 빛이 뒤섞인다.
자신 또한 양반가의 자제였다. 불쌍한 제 친어미는 저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러나 기현의 부친은 그런 기현을 미워하지 않았다. 귀한 제 아들이 모친을 많이 닮아 있었기에, 부친은 늘 기현을 보며 일찍 세상을 떠난 자신의 정실을 그리워했다. 기현이 걸음을 떼고 글을 익힐 나이가 되었을 즈음, 제 아비는 재혼을 했다. 원치 않는 재혼이었으나, 정치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시간이 많이 지난 다음에서야 부친은 기현에게 그리 말했다.
자신의 계모는 권세를 얻지 못한 양반가의 여식이었고, 탐욕과 야망에 들끓어 있는 여자였다. 재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는 당당히도 아들 둘을 한꺼번에 낳았다. 쌍둥이였다. 그들을 출산한 자신의 계모는 세상이 제 것인 양 굴어댔다. 그때부터였을까. 여자는 자신의 배에서 나오지 않은 기현을 마치 종 부리듯 허드렛일을 시키기 시작했다.
기현아, 가서 물 좀 떠 다오.
기현아, 어미가 몸이 힘들어 그러니 이거 좀 빨아다 주련.
기현아, 속이 허하니 주전부리를 내 오거라.
기현아, 마루가 지저분한데 여태 무얼 한 게냐.
갈수록 모질어졌지만, 이제는 일상과도 같은 그 말들에 기현은 치가 떨렸다. 나 또한 양반의 자식이었다. 모두에게 존경을 받는 인자한 관리의 장남이었다. 남들보다 글도 빨리 깨우쳤고, 저 망나니 같은 놈들보다도 영특하다 자부할 수 있건만. 기현은 자신의 허름한 옷을 내려다 보다 이내 피식 웃는다. 모두 다 부질없는 것이지. 계모는 대놓고 기현을 경계했다. 제 아비가 이루어 놓은 명성이 오로지 자신의 친자식에게 향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되려 제게 더 모질게, 과거도 칠 수 없게끔 부려 먹은 것이리라.
제 부친이 노쇠하여 병을 얻고서 세상을 뜬 지 이제 막 반년이 지났다. 그 반년 동안 계모는 저를 지독하게도 부려 먹고 괴롭혔다. 저와 덩치가 비슷해진 3 살 아래의 쌍둥이 동생들은, 자신들의 화풀이 상대로 기현을 골라댔다. 가볍게는 지나가며 툭 치는 정도였고, 심할 때는 곳간에 가둬 두고서 해정시(밤 10 시)가 되어서야 자신을 풀어 주곤 했다. 기현은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부엌으로 향한다. 보나 마나 저놈이 아침부터 속풀이 할 만한 음식을 내 오라고 들들 볶을 것이 분명했다. 기현은 콩나물을 한소끔 넣고서 시원하게 콩나물국을 끓인다. 사내는 주방에 들어오면 안 된다는 것이 제가 익히 배운 법도였으나, 이 빌어먹을 집구석에서 그런 건 계모의 친아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기현이 한참 너른 집의 바닥을 닦고 있을 때였다. 계모는 방에서 곰방대를 뻐끔뻐끔 피워 대며 늘 이 집에 놀러 오는 제 누이동생과 수다를 떨고 있다. 기현은 더러워진 걸레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두 여인이 하는 얘기를 얻어 듣는다.
"내일 경국절인데 형님 같이 장에 가실라우?"
"간만에 좀 나서 볼까. 요새 통 좋은 구경거리를 보지 못하여 지루하던 참이었는데."
"가서 광대들 재롱도 구경하고, 여기저기 눈요기 좀 하고 그럽시다. 이번 경국절에는 궁궐도 열린다 하질 않소."
"가 봐야 무엇 하겠어. 그저 늙은 영감들이 눈치나 줄 것이 뻔한데."
"그래도 형님은 죽은 유 대감 부인이잖소. 가서 그 영감들한테 잘 보여야 쌍둥이들에게도 좋지 않겠소?"
"그것도 참이긴 하다만."
그래 봤자 망나니가 망나니지. 기현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걸레를 빨기 위해 뒤뜰로 걸어간다. 경국절에 성문이 열린다라…. 아주 어렸을 적에, 제 아비를 따라서 딱 한 번 가 본 적이 있었다. 넓디 너른 궁궐에 웅장하게 위엄을 뽐내던 대전. 아직도 제 기억에 지붕의 모양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는 걸 보면, 기현에게 살면서 다신 없을 경이로운 광경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기현은 경국절엔 이 집에서 잠시 나가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국가의 큰 행사에 잠시 나갔다 들어온다 해도 모를 것이다. 제 계모와 형제들이 모두 집을 비울 것이기에, 그 틈을 잘 노리면 그만이다. 기현은 조물조물 걸레를 빨며 작은 머리로 생각한다. 제게 번듯한 의복이 없으니, 쌍둥이 중에 한놈의 옷을 몰래 입고 나가야겠다. 하늘에서 근사한 의복이 뚝 떨어지면 소원이 없겠다만.
"기현아, 오늘 우리가 집을 비울 것이니 그동안 곳간에 쌓인 먼지 좀 털어내고 우물 청소 좀 해 놓거라."
"예, 알겠습니다."
"오늘 경국절을 핑계로 집 밖으로 나갈 생각 같은 건 하지 말고. 집이 엉망이지 않니?"
제 계모는 표독스레 웃으며 기현에게 눈을 흘기고서 자신의 친아들 둘을 이끌고 집을 나선다. 대문이 닫히고 기현은 옅게 띄고 있던 미소를 지운다. 그리 말하면 내가 안 나갈 줄 알고? 집안 식솔들의 눈을 피해 몰래 제 쌍둥이 형제의 별채로 들어선다. 제 방보다 훨씬 넓은 공간에 배알이 꼴린다. 분명 여기에 옷이 있을진대. 내가 빨고 내가 개여서 내가 정리해 놓았으니 분명했다. 기현은 궤짝에서 옅은 노란색의 의복을 꺼낸다. 제 몸보다 조금 크긴 했으나, 그리 볼품없진 않으리라 생각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머리를 단정히 정리하고, 그 위에 갓을 쓰고서 제 방으로 가 소중히 숨겨 뒀던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상자를 꺼낸다. 상자 안에 가지런히 놓인 것은 물색의 새 신이었다. 그 언젠가 자신의 부친이 명에 다녀온 뒤 제게 선물이라며 계모의 눈을 피해 몰래 건네준 것이었다. 받은 이후로는 한 번도 신지 못했지만, 오늘에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제 발에 끼워 넣어 본다. 직접 재서 만든 듯이 제 발에 딱 맞는 신에 흡족한 얼굴을 한다.
간만에 나서는 나들이였다. 몇 발자국 걷지 않아도 거리에는 인파로 북적였다. 행여나 제 계모와 형제들을 마주칠 새라, 기현은 갓을 깊게 눌러 쓰고 시장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어렸을 적 본 적 있던 다과들, 신이 난 목소리로 호객 행위를 하는 광대들, 여기저기에서 나 좀 사 달라 외치는 듯한 화려한 장신구들. 기현은 그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걸음을 재촉한다. 궁궐. 나는 궁에 다시 한번 가 보고 싶어. 여전히 그 위엄을 지니고 있는지, 여전히 왕실의 건재함을 자랑하고 있는지. 그 위압감을 다시금 내 오감으로 느껴 보고 싶다.
소중한 제 신이 타인에게 밟히지 않도록 기현은 걸음을 조심하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그리고 이내, 자신을 반기듯이 활짝 열린 궁 앞에 도달한다. 아, 여전히 크고 아름답구나. 기현은 말간 얼굴에 입을 벌리고서 그 외관을 보며 감탄한다. 제 주변으로 많은 이들이 성을 들락거렸고, 기현도 늦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성 안으로 걸음을 내디딘다. 궁 안으로 들어서자 제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바뀌는 듯하다. 아, 내 아비는 이곳을 일터로 삼아 평생을 바치셨겠구나.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인가. 이 나라를 위해 일을 한다는 것이. 문득 자신의 부친이 그리워지는 기현은 울컥하는 마음을 겨우 가라앉힌다. 한참을 그렇게 감탄하며 구경했을까. 낯선 목소리가 기현의 걸음을 붙들었다.
"턱이 아픈 것이냐?"
기현이 뒤를 돌아 보았을 때는, 생전 본 적 없는 수려한 용모의 사내가 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띄고 있었고, 한눈에 보아도 값비싸 보이는 흑청색의 옷에 챙이 넓은 갓을 쓰고 있었다. 기현은 권세가 드높은 가문의 양반인가 싶어 우선 고개를 조아린다.
"아, 괜찮습니다. 소인이 심기를 건드린 것인지요?"
"그저 네 턱이 빠진 건 아닌가 싶어 물어본 것이다."
사내는 부드럽게 웃으며 제 말에 대답한다. 큰 눈에 동그란 코를 가진 이는 웃어도 입술이 도톰할 만큼 탐스러운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 나라에 이런 미모의 사내가 있었단 말인가. 어찌 소문도 나지 않고 이리 불현듯 제 앞에 나타난 것인지, 기현은 내심 경국절을 맞아 집을 나서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는 이 궁이 꼭 제 집인 듯 뒷짐을 지고서 기현의 행색을 살피다가 기현에게 한 발짝 다가온다.
"불편하지 않으면 같이 장에 나가 보지 않겠느냐? 내 초행길이라 청하는 것이다."
"아… 예. 그러시지요, 대감."
기현의 '대감' 소리에 남자는 호탕하게 웃는다. 하기야, 기현이 생각하기에도 사내는 대감이라 불리기엔 나이가 한참은 어려 보였으니 제 말이 웃길 법도 했다. 하지만 무어라 불러야 한단 말인가. 그가 어떤 신분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남자는 겨우 웃음을 진정시키고서 기현의 귀 가까이에 제 입술을 붙이고 속삭인다.
"나를 대감이 아닌 형원이라 부르면 된다. 세자라고 할 시에는 피차 피곤해질 테니."
남자의 말에 기현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세자라니. 왕위를 이어 받을 인물이라는 말 아닌가. 기현은 아까보다 더 크게 입을 벌리고서 남자를 바라본다. 사내의 용모를 잘 살펴보니 거짓인 것 같지도 않아 기현은 입을 합 다문다. 형원은 그런 기현이 귀여운지 그의 뺨을 한번 쓸어 주고는 먼저 걸음을 나선다. 궁의 지리에 대해서 잘 아는 듯 익숙하게 걸음을 옮기는 것에 기현도 서둘러 그의 뒤에 따라붙는다. 어찌 그의 옆에서 걸을 수 있을까. 저 남자는 이 나라의 국본이 될 세자 저하인 것을. 기현이 한참 발소리를 죽이고서 형원의 뒤를 졸졸 따라가는데 형원이 걸음을 멈추고서 의아하다는 얼굴로 기현을 돌아본다.
"왜 그리 뒤에 있는 것이냐. 내 옆에서 길을 알려 주어야 하지 않느냐."
"아, 송구하옵니다! 그…,"
형원이 장난스레 엄한 눈을 하고서 기현을 바라본다. 기현은 아주 작게 '형원…'이라고 소리를 내었고, 남자는 흡족한 듯 기현의 손을 잡고 궁을 나선다. 그 잠시 궁을 구경하는 사이에, 장터에는 인파가 몇 배로 늘어난 기분에 기현은 되려 긴장한다. 내가 세자 저하를 모시고 장에 나왔으니 그 누구도 실수로 그와 부딪힌다거나, 실수로 그의 옷깃을 밟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인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인파에 치여 형원과 자꾸만 몸이 부딪히는 것은 막을 길이 없었다. 기현과 거리를 두고 있던 형원은 이내 기현의 어깨를 당겨 안아 제 쪽으로 붙인다. 제 한쪽 팔에 감길 정도로 기현은 말랐고 덩치가 작았다.
"사내가 되어 몸이 그리 나풀거린다는 말이냐."
"죽을죄를,"
"되었다. 이리 걸으면 내게 부딪힐 일도 없지 않은가."
기현은 처음 제 몸에 부드럽게 닿는 타인의 손길에 마른 침을 삼킨다. 꼭 저를 지켜 주겠다는 듯 느껴져서 괜히 벅차기도 한 것 같다. 형원과는 한참 장을 돌아다녔다. 저보다 더 궁금한 것이 많아 보이는 형원은 허투루 상점을 지나치는 일이 없었다. 장신구를 파는 상인에게는 이것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얼마에 팔리고 있는지를 물었고, 옷감을 파는 이에게는 어디에 쓰이는 옷감인지, 어디서 들여온 것인지를 물었다. 기현은 새삼 그의 신중함과 인자함에 감탄한다. 제 집에 있는 사내 두 놈은 그저 여흥을 즐기고 여색을 밝히기 바빠 매일 술에 절어서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던데. 기현은 어렸을 때와는 또 다른 경외심을 가진다.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갖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람에게 경외심을 가지면 이리 가슴이 두근거리나 보다. 날이 더 어두워지고, 거리에 하나둘 등불이 밝아진다. 아까보다 더 낭만적인 거리 때문인지, 여전히 제 어깨를 감싸고 있는 손에 기현의 가슴이 더 빠르게 뛰는 것 같기도 하다. 이대로 세자 저하와 헤어지면 다시 그 지옥 같은 집으로 가야 할 것인데 그냥 이렇게 집을 나와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헌데, 아직 내가 그대의 이름을 모르는구나. 이름이 무엇이냐."
"소인, 유 가 기현이라고 합니다."
"아… 유 가라 함은 아바마마께 어린 시절에 익히 들은 적이 있다. 아주 인품이 좋은 집안이라지."
"과찬이시옵니다."
"허어, 편히 말하라 하였는데도."
"허나,"
"아, 기현아, 이리 와 보거라."
형원의 기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옥으로 된 장신구를 파는 매대 앞에 멈춰 선다. 상인은 형원의 복장을 살피고서는 돈을 벌겠다 싶었는지 그에게 아주 살갑게 말을 붙여 온다. 형원은 남자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매대에 진열되어 있는 것들을 살피다가 가장 고운 빛을 띄는 선추 하나를 집어 든다. 맑게 빛나는 둥근 옥구슬 아래로 자색 실들이 풍성하게 달린 것이었다. 형원은 그 선추와 기현을 번갈아 보다가 상인에게 값을 지불하고서 기현에게 다가와 그의 손에 선추를 꼭 쥐여 준다.
"오늘 길을 안내해 준 보답이니 받거라."
"아니, 소인은 아무것도 한 게 없사온데…."
"그대는 말을 한 번에 듣는 법이 없구나."
"…감사합니다, 형… 원…."
혹여나 저도 모르게 '저하'라는 말이 나올까, 형원의 이름을 느릿하게 뱉는 기현이다. 형원은 기분 좋게 그를 내려다 보다가 요란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광대들이 북을 치며 신나게 한판 놀음을 하는 것이 보여 기현의 손을 잡고 이끈다. 그의 생애 처음 보는 광경이라는 듯, 기현보다 더 눈을 밝게 빛내며 그들의 몸짓을 감상하는 형원을 기현은 가만히 감상한다. 소년 같이 앳된 얼굴인 것 같으면서도 얼굴선이 저보다 더 굵은 것을 보면 나보다 나이가 많은 또래이겠거니 생각한다. 기현은 형원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오늘 이 모든 것이 꿈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겨우 간만에 집을 나서서 연이 닿게 된 이가 이 나라의 세자라는 것이 꿈이 아니고서야 어찌 가능할 수 있을까. 한참을 형원의 옆에서 광대놀음을 구경하는데 저 멀리서 날카롭게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유기현!"
"저, 저놈, 저것이!"
기현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빠르게 고개를 돌린다. 저 멀리서 계모와 쌍둥이 형제 한 놈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제게 손가락질을 하며 다가온다. 하필이면 이 옷 주인에게 걸린 것에 머리가 아찔해진다. 기현이 안절부절못하자 형원은 그에게 괜찮은 것이냐 물어온다. 아니, 괜찮지 않아. 온몸이 부들거리며 떨린다. 지금 집으로 돌아가면 곳간에 며칠은 갇혀 있어야 할 것이다. 왜 하필 지금 나를 발견한 것인지. 차라리 형원을 만나기 전에 발견되었더라면 이렇게 서럽지도 않았을 텐데. 기현은 형원에게 잡혀 있는 제 손을 빼낸다.
"기현아."
"궁으로 돌아가시는 길은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소인은 사정이 있어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그리고 선추 감사히 받겠습니다."
기현은 빠르게 형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예를 갖춘 뒤 그의 곁을 떠난다. 저들이 나를 잡기 전에 빨리 집으로 가야 해. 형원에게서 받은 이 선추도 빼앗기지 않게 숨겨 놓아야 하고, 두들겨 맞기 전에 이 옷도 다시 가지런히 정리해 놓아야 하고, 그리고 이 신도….
기현은 신발에 생각이 닿자 그제야 오른발이 아파 오는 것을 느낀다. 정신없이 달려 오느라 죽은 자신의 부친이 선물해 준 신발 한 짝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내달렸다. 집 앞에 겨우 다다라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된 기현은 더 서러워진다. 오늘 처음 신었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유일한 혈육이었던 제 아비가 제게 준 마지막 선물이라는 것이 기현을 울게 만들었다. 흙으로 뒤덮인 왼쪽 신을 조심스레 손으로 털고서 다시 상자에 넣어 놓고, 옷은 벗어서 곱게 개켜 놓은 뒤 원래 자리에 둔다. 다시 허름한 복장에 짚신을 신고 있는 기현이 씩씩거리며 들어오는 계모와 제 형제를 맞이한다.
"다녀 오셨,"
인사를 다 하기도 전에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기현의 고개가 돌아간다. 왼쪽 뺨이 얼얼하다. 계모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기현의 소매를 단단히 부여 잡고 곳간으로 끌고 가, 기현을 그 안으로 내던진다. 곳간의 문이 굳게 닫히고, 제게 향한 욕지기들이 곳간 문 너머로 들려 온다. 저 되바라진 놈이 부모 없는 티를 낸다느니, 어른 말을 귓등으로도 안 처듣는다느니, 허락도 없이 남의 물건에 손을 댄다느니 하는 말들이 기현의 귀에 꽂힌다. 끓어 넘치는 분노와 서러움에 눈물이 다 난다. 맞은 뺨보다 제 귀로 흘러 들어온 말들이 더 얼얼해서 기현은 곳간 바닥을 손이 까질 때까지 주먹으로 퍽퍽 내려친다.
그날 이후로 기현은 그 곳간에 5일 정도 갇혀 있었던 것 같다. 음식은 커녕, 물도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경국절 다음 날, 어제 그렇게 도망치듯 자신을 떠난 기현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기현은 신발 한 짝을 두고 사라졌고, 형원은 덩그러니 남은 고운 물색의 신발 한 짝을 들고 궁으로 돌아왔다. 그 신발 한 짝이 꼭 귀한 것이라도 되는 듯, 형원은 자신의 일과가 끝나고 나면 물끄러미 그 신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이 신을 다시 돌려 줘야겠지. 형원에게는 단순히 신발을 돌려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기현을 다시 한번 더 보는 것이 목적이었다. 기현의 하얗고 말간 얼굴이 저도 모르게 그리웠다. 희미하게 웃는 얼굴도 고왔는데, 맑게 웃는 얼굴은 얼마나 더 고울까 하는 생각들이 들었다. 이러한 생각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아 내야만 했다. 그저 우연처럼 지나가는 찰나의 호기심일지, 그보다 깊은 무언가일지. 형원은 출궁 허락을 받기 위해 근정전으로 향한다.
"전하, 세자 저하 납셨습니다."
"들라 하라."
제 앞을 가로 막고 있던 문이 열리고, 형원은 그 안으로 들어가 제 아비에게 절을 올린다. 임금은 자랑스러운 제 아들이 어쩐 일로 먼저 자신에게 찾아온 것인지 궁금해진다. 형원은 간단히 안부 인사를 전하고서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임금을 향해 고개 숙인 채 말한다.
"전하, 소자 청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 세자가 어인 일로 이 시간에 들렀나 싶었다. 말해 보거라."
"익일, 소자의 출궁을 허하여 주시옵소서."
"출궁이라면 안 될 일은 아니나, 무슨 일이기에 이리 경건히 청한단 말인가."
"길에 버려진 신발 한 짝의 주인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사소한 이유라면 궁인을 보내도 될 일 아닌가."
"소인에게는 사소하지 않습니다."
임금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제 아들을 바라본다. 평소에 욕심도 없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해야 할 일을 해 오던 무난한 제 아들이건만 오늘은 어쩐 일로 제 고집을 꺾지 않는다. 임금은 자리에 앉고서 아들에게 입을 연다.
"자세히 말해 보거라."
"경국절 술시(戌時: 저녁 7시 ~ 저녁 9시)에 궁에서 한 사내를 만났습니다. 민생을 알아보자 싶어 그에게 장이 선 곳으로 안내해 달라고 하였는데, 길을 알려 주고 함께 장을 둘러보던 그가 갑자기 도망가는 바람에 신발 한 짝을 제게 두고 갔습니다. 이 신을 다시 전해 주려 합니다"
"세자를 옆에서 도운 이라면 그 신과 함께 큰 상을 내려야 하지 않겠느냐."
"그자가 부담스러워할 것입니다."
"그자의 이름은 아느냐?"
"유 가의 기현이라고 합니다."
"유 가의 기현이라 하면, 유 제학의 아들 아니냐."
"그러합니다, 전하."
"그러면 더할 나위 없이 큰 상을 내려야겠거늘."
"우선, 제가 먼저 신을 전한 다음에 상을 내려 주실 것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전하."
"왜 그러느냐?"
"기현의 이름은 아는 자들이 그를 쫓아갔습니다. 무슨 일인 것인지 눈으로 먼저 확인하고 싶습니다."
임금은 이미 계획이 있어 보이는 제 아들의 말에 그러라고 대답한다. 임금에 대답에 형원은 감사 인사를 올리고서 일찌감치 출궁 준비를 한다. 유 가 기현의 집이 어디인지를 모르기에, 아마 도성 전체를 샅샅이 뒤져야 할 것이다. 형원은 도성에 있는 흔한 양반들처럼 복식을 갖추고서 저를 보좌하는 무관 한 명만 대동한 채 궁을 나섰다. 도성에 있는 이들에게 유 가 기현을 아느냐고 물어보았으나 다들 고개를 내저으며 그런 사람은 모른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속이 답답했다. 유 제학의 아들이라면 다들 모를 리가 없을진대, 어찌 다들 하나같이 고개를 내젓는 것인가. 형원은 한참을 걷다가 화려하게 꾸민 여인에게 다가간다.
"실례지만 말씀 좀 여쭙겠소."
여인은 형원의 얼굴을 보고서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는 척 그를 향해 웃어 보인다.
"예, 말씀하세요, 나으리."
"혹, 유 제학의 집이 어디인지 아시는가?"
"유 제학… 아, 유 씨네 집이라면 제가 잘 알고 있지요."
"어디인가?"
"맨 입으로는 좀 그렇긴 한데,"
"허튼 수작을 부렸다가는 네년 목이 날아갈 것이다."
형원의 옆에 있던 무관이 조용히 칼을 빼내어 여자의 목에 겨눈다. 그제야 놀란 여자는 검지를 뻗어 유 씨네 집을 가리킨다. 여자의 눈은 놀라서 커져 있었으나, 그 시선은 형원의 수려한 외모에 향해 있었다.
"정확히 어디인지 말해 보거라."
"저쪽으로 가시다 보면 큰 길이 끝나고 두 갈래 길이 나올 것입니다. 거기서 오른쪽 길로 가시면 되시어요."
형원이 짧게 고맙다 인사를 하고 서둘러 길을 나선다. 여인은 형원의 뒷모습을 황홀한 눈으로 좇는다. 그의 손에 들린 물색 신에 시선이 닿고, 여인은 이내 실망한 표정을 짓는다. 에이, 이미 임자가 있나 보구만. 저 신을 전해 주러 가는 것인 걸 보니. 여인은 몰랐다. 제 기방에 자주 들락거리는 유 가의 망나니 놈의 집에서 어떤 사달이 날지.
형원은 기현의 집 앞에 멈춰 서서 명패를 확인한다. 버들 유(柳) 자가 적힌 명패를 확인하고서 무관에게 눈짓을 하자 무관이 대문을 두드린다. 안에서 누구냐는 물음이 들려오고, 이내 문이 열린다. 얼굴에 주름이 진 노인이 느리게 문을 열고 문밖에 서 있는 두 명의 장정들을 번갈아 쳐다본다.
"나리들께선 누구십니까?"
"이곳이 유 제학의 집이 맞는가?"
"유 제학이라 하시면, 제가 모시던 돌아가신 대감마님이시지요."
"잠시 실례하겠네."
제 옆의 무관의 물음으로 기현의 집이 맞다는 판단이 든 형원은 노인을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선다. 꽤 넓은 마당 위에 놓인 기와집. 그 마루 위에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형원을 바라보는 중년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여인은 형원의 행색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이내 마루에서 내려와 그의 앞으로 다가간다.
"처음 보는 나리이신데, 무슨 일로 드신 게요?"
"이곳이 유 제학의 집이라 들었소."
"예, 죽은 제 지아비입니다만. 어쩐 일이신지?"
"유기현이라는 자를 찾으러 왔소."
순간 여자의 눈에 독기가 서린다. 형원은 여인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찬찬히 지켜본다. 여인은 아까와는 달리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눈알을 굴리다가 다시 형원을 쳐다본다.
"기현이는 지방에 가 있소."
"지방이라?"
"뭐, 잠깐 여행 좀 다녀온다기에 갔다 오라 일렀소. 그런데 기현이는 무슨 일로 찾으시오?"
"내 그에게 돌려 줄 것이 있어 그러는데, 이 집에 없다라…."
형원은 여인의 대답에도 발걸음을 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찝찝했다. 저 여인이 제 물음에 눈알을 굴리고서 대답을 한 것도, 그리고 뒤에서 제 눈치를 보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도. 그리고 무엇보다 저를 알아보고서 저 멀리서 벌벌 떨고 있는 한 명의 사내가 형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형원은 기현의 집안을 쓱 둘러본다. 이 집 안에 있는 기와는 4 채. 사랑방이 있을 본채, 그리고 별채 두 개, 그리고 귀퉁이에 자리한 낡은 목재 문이 달린 좁은 방.
형원은 곳간으로 짐작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여인은 형원이 걸음을 옮기자마자 놀란 눈을 하고서 그의 옷깃을 붙잡는다. 일순간 형원의 얼굴이 구겨지고, 형원이 그녀의 손을 쳐냄과 동시에 무관이 칼을 빼 들고 여인을 향해 겨눈다.
"감히 어디 안전에 손을 대는 것이냐."
"아, 아니, 그것이 아니오라,"
형원은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가까이 가서 보니 문이 아주 굳게 잠겨 있었다. 몇 번이고 돌려 묶어 놓은 밧줄의 매듭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형원은 눈썹을 들썩이며 여인에게 묻는다.
"이곳에 금은보화라도 둔 것이오?"
"아, 아주 귀한 것이, 그곳에 있어… 참이옵니다!"
"무엇이 있는지 확인해 봐도 되겠소?"
"아니 됩니다! 절대 아니 되오!!"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그리 소리를 지르는가."
형원은 피식 웃으면서 여인을 돌아본다. 그의 표정에서 여유가 넘친다. 그리고 여인의 눈이 형원의 손에 닿는다. 물색 신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여인의 것이라기에는 크기가 꽤 커 보이는 신인데, 저 남자는 누구이며, 저 신발은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설마 기현에게 저리 고운 신이 있을 리가 없는데. 기현에게는 지아비가 죽은 이후로 옷도 한 벌 지어 준 적이 없고, 새 신도 한 켤레 사 준 적이 없었다. 행여나 기현으로 인해 제 아들들의 기가 죽을까 봐, 제 아들들보다 총명하고 수려한 기현이 제 핏줄의 앞길을 막을까 봐 철저히 그를 숨겨 두었었다. 헌데, 어찌. 여인은 형원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 표독한 얼굴로 형원을 똑바로 쳐다본다.
"묻지 않는가. 내가 누구인지 알고 그리 두 눈 똑바로 과인을 마주하는가?"
"그쪽이 누구인지는 관심 없으니 썩 물러가시오!"
"허어… 관심이 없다라. 가만 보니 입이 방정인 여인이구나. 여봐라, 이 매듭을 잘라 내어라."
"이놈!!"
"이놈?"
여자의 목소리가 신호탄인 듯, 무관은 단번에 매듭을 칼로 잘라내 버린다. 매듭으로 인한 압력이 풀어지면서 곳간 문이 알아서 서서히 열린다. 형원은 곳간 문이 열리는 줄도 모르고 여자를 서늘한 눈으로 가만히 바라본다. 여인은 여전히 씩씩거리며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형원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네놈이 누구길래 감히 유 제학의 집에 와서 이따위 행패더냐!!"
형원은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체격이 큰 형원이 제게로 다가오자 여인은 다급하게 자기 아들을 부른다. 저 뒤에 숨어 있던 자신의 아들놈은 형원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는 쏜살 같이 그의 앞으로 달려 나와 바들바들 떨리는 몸으로 형원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세… 세자 저하! 목숨만은 살려 주시옵소서!!"
여인은 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을, 제 귀로 들린 말을 의심한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겠지. 세자라니. 이 나라의 세자가 왜 유기현을 찾는다는 말인가. 여인은 제 아들에게 박혀 있던 시선을 돌려 떨리는 눈으로 형원을 바라본다. 형원은 짐짓 화가 난 얼굴로 여인을 노려보고 있다. 여인은 그제야 자신의 안일함을 탓한다. 세자를 욕보인 죄, 이는 세 치 혀가 잘려도 모자랄 것이었다. 형원은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여인에게 말을 건다.
"다시 한번 물을 테니 사실을 답하시게. 매듭으로 잠겨 있던 곳은 무엇 하는 곳인가?"
"…고 …곳간이옵니다, 저하."
"저 안에 금은보화라도 있더냐?"
"없… 사옵니다…."
"헌데, 저곳은 왜 저리 잠가 놓은 것이냐?"
"그… 그것은…."
"저하! 안에 사람이 있사옵니다!"
다급하게 저를 부르는 사내의 목소리에 형원은 조심스럽게 곳간으로 향한다.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무엇을 그리 감춰 두고 있기에 굵은 밧줄을 칭칭 휘감아 매듭을 지어 놓은 것인지. 안에서는 절대로 열리지 않을 그곳에 대체 무엇이 있는 것인지. 그리고 형원의 궁금증은 곳간 앞에 도착해서야 말끔히 사라졌고, 동시에 화가 들끓었다. 그 안에는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서 낡아 빠진 옷차림을 한 기현이 이제야 막 눈을 뜨고서 바짝 마른 입술로 무언가 웅얼거린다. 입술이 맞붙었다가 떨어지는 한 음절의 단어.
"여봐라. 마실 물을 가져오너라."
제게 문을 열어 줬던 노인이 대답하고서 서둘러 부엌으로 가 물그릇을 가져온다. 형원은 그것을 받아 들고 조심스레 기현에게 다가가 기현의 입에 천천히 흘려보낸다. 며칠 동안이나 이곳에 있었던 건지, 안 그래도 말랐다 생각했던 몸이 더욱 앙상해져 있었다. 기현은 그제야 살 것 같다는 듯 크게 숨을 들이 마셨다가 내쉬고서 눈을 몇 번 깜빡이다 저를 부축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본다. 형원은 기현을 바로 앉혀 놓고 그 앞에서 눈을 맞춘다.
"과인을 알아보겠느냐?"
"…형원."
"그렇지. 아직 나를 잊지 않았구나. 이리 기특할 수가."
형원은 제 손에 들려 있던 물색의 신발을 기현의 앞에 내려 놓는다. 기현은 그 신발을 한참 내려보다가 닭똥 같은 눈물을 한 줄기 흘려보낸다. 정말 귀중한 것이라도 찾은 듯이, 기현은 떨리는 손으로 그 신발을 집어 들고서 품에 안았다. 비쩍 마른 어깨가 안으로 굽어들고, 작은 몸뚱아리가 더 작게 움츠러든다. 원래는 저 신을 직접 다시 신겨 주려 하였는데, 다 까져서 피딱지가 앉은 발바닥을 한번 보고서 형원은 무거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곳간을 벗어나 여전히 꿇어 앉아 있는 여인과 사내에게 다가간다.
"저 자를 저리 가둬 둔 연유가 무엇이냐."
"소인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이 모든 것이 제 어머니께서,"
"네 이놈이!! 저 곳간을 밧줄로 묶은 것은 네 놈이 아니더냐!"
형원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어리석게 다투고 있는 모자를 바라본다. 어쩌다 기현은 저런 것들과 한 집에서 살게 되었는지, 한 집에 살면서도 기현은 그리 순수할 수 있는지. 한참을 투닥거리던 그들에게 형원이 다시 무거운 목소리로 묻는다.
"과인의 질문에 답하거라. 기현을 가둬 둔 이유가 무엇이냐."
"그것이…,"
"효라는 것은 자식이 부모에게만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에게 행해야 하는 도리이기도 하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거늘, 너희 모자를 보아하니 고사에 틀린 말이 없구나."
그때, 곳간에서 천천히 절뚝거리며 나온 기현이 형원의 뒤에 가서 선다. 형원은 제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봤고, 그곳에는 발간 눈으로 신발 한 짝을 꼭 끌어안고 있는 기현이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이 이는 이런 구정물 속에서 어찌 이리도 맑은 눈을 하고 있을 수 있을까.
"걸을 수 있겠느냐?"
"고발할 것이 있습니다."
여자는 기현을 향해 독기 서린 시선을 보낸다. 저놈이 기어코 나까지 잡아 먹으려 드는구나. 지 친모 잡아 먹은 것으로도 모자라서, 여태 데리고 살아 준 나까지 해하려 들어. 기현은 그런 여자를 원망스레 바라본다.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나에게 그리 못되게 대한 것인지 꼭 듣고 싶었다. 당신이 처음 이 집에 들어온 날부터 나는 그저 내 친모에게서 받지 못한 예쁨을 받고 싶었을 뿐인데 무엇이 그리 아니꼬와 나를 이리 대한 것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겠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당신이라는 여자는 저 멍청한 혈육들까지 내팽개칠 정도로 무자비한 사람이니. 어차피 당신에게 사죄의 말은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저, 내가 여태 겪었던 고생을 알아 주길 바랄 뿐.
"고발할 것이 무엇이냐?"
"저들이 저를 가둔 연유에 관한 것입니다."
"말해 보아라."
"제가 경국절에 저 여인이 시킨 일을 행하지 않고, 호기심에 집을 벗어나 장터에 나갔기 때문입니다."
형원은 기현의 말에 기가 찬다. 나는 경국절을 내 평생에 가장 큰 기념일로 삼으려 했다. 그날 너라는 맑은 사람을 알게 되었으니. 헌데 그것을 이유로 너를 모질게 가둬 두었다. 그렇다는 말은 그날 네가 도망친 이후로 계속 저곳에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형원은 황당하다는 표정에서 눈빛이 굳어지며, 이내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드리운다. 형원은 다시 조용히 고개를 돌려 제 발치에 있는 여인과 사내를 내려다 본다.
"정말 그 이유뿐인 것이냐."
"예. 그저 저 여인의 말을 따르지 않아서입니다. 그리고, 저 자는 이 나라의 하급 무관이오나 어미에게 그릇되었다 말하지도 못하고 그릇된 줄 알면서도 어미의 말을 따랐습니다."
"어허, 오합지졸이 따로 없구나."
어느새 유 제학네 집에서 일어난 소란으로 집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수십 명 가까이나 되었다. 그들은 한데 입을 모아 바닥에 앉은 여인을 향해 한 마디씩 내던진다.
내 저럴 줄 알았지! 그렇게 못되게 굴더니!
죽고 나면 먼저 가신 유 대감 어찌 보려고 그랬소!
에구… 안타까운 것… 유 대감 친자식인데 저 행색 좀 봐….
그래도 이 집에 기현이 만한 인물이 없는데 어쩌다 저리 되었을꼬….
형원은 그 말을 잠자고 듣고 있다가 기현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기현은 원망이 서린 시선을 거두고서 형원을 올려다본다. 형원은 기현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이고서 무관에게 기현의 짐을 챙기는 것을 도우라 명한다. 짐을 챙기라고? 기현은 놀란 눈으로 형원을 바라본다.
"저하, 짐을 챙기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유 가 기현의 딱한 처지를 고려하여, 우선 궁으로 데려갈 것이다. 또한 주상전하께 이 일을 고하여 부모가 자식에게 저지르는 패륜 또한 엄히 다스리도록 청할 것이다."
"세자 저하! 목숨 만은 살려 주십시오! 저하!"
"그대들의 목숨은 주상전하께 달려 있으니 내게 더는 빌 필요가 없다."
이 말을 끝으로 형원은 기현이 행하는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기현은 여전히 벙찐 얼굴로 느릿느릿하게 제 짐을 챙겨 본다. 볼품 없는 오래된 옷 두 벌과, 상자 안에 고이 보관했던 남은 물색 신 한 짝, 그리고 어렸을 적 공부했던 책들. 모두 모아 봐야 한 보따리도 되지 않을 짐을 눈앞에 두고 기현은 몸을 돌려 형원에게 이것들이 전부라 이른다. 그리고 기현은 불현듯 잊고 있었던 물건이 떠오른다. 다급하게 방으로 들어가 이불 사이를 뒤적거리는 기현을 형원이 가만히 바라본다. 이내 기현은 해사하게 웃으며 손에 쥔 것을 형원에게 내어 보인다.
"잃어버린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요. 아직 무사히 잘 있어 다행입니다, 저하."
형원은 자신에게 웃어 보이는 기현이 순간 눈이 부셨다. 아, 이제야 내가 직접 이곳에 온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형원은 무관에게 기현의 짐을 챙길 것을 명하고서 기현에게 다가간다. 여전히 해사하게 웃으며 다시 소중히 선추를 제 소매 안에 고이 챙기는 기현의 뺨을 형원이 큰 손으로 살살 쓸어 준다.
"그런 선추는 다음에 더 좋은 것으로 주면 되는 것을."
"그냥 주신 것도 아니고 보답으로 주신 건데 잘 간직해야지요."
"걸을 수는 있겠느냐? 아까 보아하니 발이 성치 않아 보이던데."
"괜찮습니다. 이 발을 하고서 뜀박질도 했으니까요. 그리고,"
기현은 그렇게 말하고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아직 보따리에 챙겨지지 않은 남은 물색 신 하나를 품에 들고서 바닥에 고이 내려 놓는다. 짚신 옆에 고이 놓인 물색 신이 인제야 제 역할을, 제 주인을 만난 듯 더 영롱하게 반짝인다.
"이 신을 신고 가면 되는걸요."
형원과 기현은 3각(약 45분) 정도를 걸어 궁에 당도했다. 궁을 지키는 병사들은 기현을 의심스레 지켜보았으나, 그를 향한 형원의 다정한 태도에 긴장을 푼다. 형원은 기현을 이끌고 근정전으로 행한다. 자신이 왔음을 알리는 목소리가 울리고, 굳게 닫힌 문 너머로 임금의 대답이 들린다. 이윽고 창호지가 발린 문이 양옆으로 열리고 나면, 제 아들 뒤로 보이는 야윈 사내를 보고 짐짓 놀란 표정이 된 임금이 모습을 드러낸다. 형원은 그에게 절을 올렸고, 기현도 형원의 뒤에서 절을 올린다. 기현은 고개를 숙인 채였고, 형원은 다시 몸을 일으켜 임금에게 청한다.
"소자, 신발의 주인을 찾아 궁으로 데려왔습니다."
"연유가 무엇이냐?"
"그의 딱한 사정에 더 그곳에 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임금은 시선을 돌려 기현을 바라본다. 제 아들은 유 제학의 집에 다녀 온다고 하였다. 유 제학의 집에서 데려온 사내라면, 세자가 말한 유기현이 맞을 것이고, 유기현은 유 제학의 장남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 앞에 있는 사내는 앙상하게 마른, 양반의 자식이라고 보기 힘든 몰골이었다. 임금은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세자는 그만 물러 가도록 하거라. 짐은 유 가 기현과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으니."
기현은 형원이 처소를 나설 때까지, 임금의 명이 있을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저와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임금이 기현에게 고개를 들라는 말이 떨어지고서야 기현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바닥에 둔다.
"유 제학의 장남 유 가 기현은 세자가 말한 딱한 사연이 무엇인지 짐에게 말해 주거라."
임금의 물음에 기현은 힘겹게 입술을 뗀다. 자신의 짧은 일생에 대해 그에게 털어 놓는 동안, 그 모든 순간들이 생생하게 기현의 기억을 스치고 지나간다. 자신의 가련한 처지에 절로 눈에 눈물이 맺힌다. 그간 참고 살아 왔던 것들이 봇물 터지듯 눈물이 되어 쏟아진다. 기현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임금은 기현에게 따스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 그 언젠가 자신의 부친에게 들었던 것처럼 임금의 말씀 하나하나가 기현의 작은 어깨를 토닥여 주는 듯하다. 기현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쓱쓱 훔쳐 낸다.
"가히 세자가 그대를 딱하게 여길 만하구나. 내 그대의 부친과 신의가 깊으며, 그대의 언사로 미루어 보아 그대의 성품과 지성까지 알 수 있을 듯하다. 이 궁에 머무르는 것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
"세자 저하와 전하께서 저를 거두어 주시는 것에 불편함이 없으시다면, 소인이 어찌 감히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이리 심성이 고운 이가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꼬. 우선 세자가 직접 그대를 궁으로 들였으니, 동궁의 빈 초소에서 당분간 생활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기현이 막 동궁에 들어섰을 때, 형원은 기현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향해 걸어갔다. 기현은 제게 다가오는 형원을 피하지 않았다. 기현의 앞에 다가온 형원은 그의 이전의 삶이 불쌍해서, 그것을 잘 견뎌내 준 것에 고마워서, 앞으로 이곳에서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를 안아 주었다. 기현은 가만히 형원의 품에 안긴다. 한참을 마당에서 서로 끌어안고 있다가 형원은 기현을 품에서 놓아주고서 그의 손을 잡아 궁궐 안으로 들어간다. 댓돌 위에 가지런히 벗어 놓인 물색의 신이 저물어가는 노을 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난다.
기현의 동궁 생활은 무탈했다. 더는 자신을 구박하는 이들도 없었고, 형원이 가져다주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형원의 일과가 빨리 끝나는 날이면 둘은 밤 산책을 하며 담소를 나누기도 하였고, 출출할 때면 다과상을 나눠 먹기도 하였다. 그리고 형원의 혼기가 차고 세자빈에 대한 논의가 오갈 때, 형원은 큰마음을 먹고 임금에게 이리 일렀다.
"유 가 기현과의 혼인을 허하여 주십시오, 전하."
생에 한 번뿐일 인륜지대사에 순리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형원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기현과도 서로의 마음을 고백한 후였다. 임금은 그 말에 극히 분노 하였으나,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던 제 아들이 식음을 전폐하고 유 가 기현과의 혼인을 원한다는 궁인들의 아우성에 결국 아비로써 두 손, 두 발을 다 들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는 이 나라의 세자였다. 후손에 대한 걱정이 들어 아들을 불러서 대화를 해 보았으나, 제 아들에게는 다 계획이 있어 보였다.
'하루에도 거리에 수많은 아이들이 버려지고 굶어 죽어 가는데, 그중에 성품이 어질고 영특한 아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대신들의 반발이 거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제 아들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난 지금, 세자 채형원과 유 제학의 장남 유 가 기현의 혼례가 있는 날이다. 두 가문 사이에 혼서지도, 납폐함도 오가지 않았으나 형원과 기현은 수많은 날들을 함께 보내며 둘만의 혼서지와 예물을 나눠 가졌다.
세자의 늦은 혼인인 만큼 모두의 기대를 샀던 혼인은 남자인 세자빈의 등장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예상한 대로 대신들의 반대가 거세었고 혼례식까지 오는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으나, 기현의 성품과 그 수려한 미모에 대신들도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화려하게 치장한 두 사람은 맞절을 하고, 합환주를 나누어 마셨다. 길고 성대한 혼례가 끝이 나고 초야를 맞은 둘은 한 잔의 술을 나눠 마신다.
"제게 과분한 연정을 주심에 항상 감사합니다, 저하."
"그대가 모자람을 느끼지 않도록 이 연정 변치 않으리다."
이내,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함께 있던 방에 촛불이 하나둘씩 천천히 꺼진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 해정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둘은 서로에게 다가간다. 이내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소리에 궁인들은 동궁에서 물러났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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