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설란 (龍舌蘭)

[채햄] 용설란 (龍舌蘭) - 5/10

1부: 순백의 산신

용설란 (龍舌蘭)

1부: 순백의 산신

w. 주인장

기현은 제 손을 더 강하게 쥐어 오는 이를 결국 뿌리치지 못하고 강녕전에 다다른다. 내관의 인사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금상의 침전 앞에 도착한 기현은 기척도 없이 대뜸 문을 열어 젖히는 형원의 뒤에 숨는다. 감히 지존에게 절을 올릴 수도 없이 단단히 잡힌 손을 빼 낼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형원은 제 앞에 잔뜩 당황한 눈을 한 채 안절부절 못 하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대는 이제 인사도 올리지 않는 것이냐?"

"그, 그것이 아니오라,"

"세자의 건강은 어떠하더냐? 기백이 전과 같더냐?"

남자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그제야 형원의 발치에 엎드려 빌다시피 그에게 절을 올린다.

"송구하옵니다, 용설란이시여! 요, 용설란께서 어찌 친히 궁으로 걸음 하셨나이까…?"

"내 필히 하고자 하는 것이 있네."

"무엇이든 하문하여 주시옵소서."

"양현을 데려갈 것이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허… 어찌 아비라는 것이 이리도 매정할까."

"아, 아니, 그것이 아니오라, 용설란의 말씀이라면,"

"되었다. 그릇도 안 되는 이를 세자로 책봉한 걸 보면 그대도 다를 게 없다는 소리겠지."

남자는 입을 닫고 그저 고개 숙인 채 벌벌 떨고 있었고, 기현은 그런 왕을 복잡한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엄색을 띈 여윈 얼굴을 바라본다. 저를 데려갈 것이라니.

"세자의 건강이 그리 걱정된다면, 그의 마음 씀씀이를 바꿔 놓도록 하라. 모를 일 아닌가? 하늘이 그를 갸륵하게 여겨 그의 명을 늘려 줄지."

"말씀 받들겠사옵니다."

"또한 양현은 내가 보내고자 할 때 보낼 것이니 그리 알고 있거라."

남자는 또 제게 불호령이 떨어질까 어떠한 말도 내뱉지 못했고, 그것이 기현에게는 되려 어떠한 미련도 남지 않게 했다. 형원이 '가자' 하며 기현의 손을 이끌기에 기현은 마음 편히 그를 뒤따라갈 뿐이었다. 형원은 강녕전 구석의 방으로 들어가더니 먼저 벽에 걸린 그림 안으로 발을 밀어 넣고는 제 손에 얌전히 잡혀 있는 기현의 손을 바라봤다가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긴다.

"따라 들어오거라. 나와 함께 해야만 길이 통하니."

"…왜 다시 저를 데려가십니까."

"네게 보여 주지 못한 것들이 많아,"

"정녕… 그것뿐입니까?"

"…우선 돌아가서 얘기하자꾸나."

"지금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입니까?"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돌려 보낼 것이다."

"…."

"혹, 나와 함께 하는 것이 달갑지 않은 것이라면 손을 놓아도 좋다."

기현은 여전히 굳게 잡혀 있는 제 손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이제는 연분홍빛이 아주 사라진 순백의 머리칼이 제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드는 것이었다. 기현이 굳은 얼굴로 형원을 바라보자 형원은 마음 놓으라는 듯 기현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고, 그것이 꼭 기현을 달래 주는 듯하여 기현은 굳게 마음 먹고 용기 내어 그의 곁으로 한 걸음 옮긴다.

수풀이 우거진 숲속에 근시한 별채가 지어진 그림 속으로 발을 내딛자 거짓말처럼 발이 쑥 들어가고, 이내 형원의 곁에 섰을 때는 자신이 꿈에서만 그리던 형원의 공간이 펼쳐진다. 그리웠던 눈부신 돌바닥과 구석에 자그맣게 놓인 못, 그리고 그 옆에 하늘 높이 꽃대가 솟은 용설란. 기현은 용설란에 시선을 옮기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아 버린다.

이윽고, 결국은 잔인한 자태를 피워 내려 하는구나. 끝내 저를 잊지 못한 이는 결국 마음을 다 피워 버렸구나. 기현이 멍하니 용설란을 바라보고 있자 형원이 그의 감싸 안아 주며 그의 등을 토닥여 주고, 기현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제 귓가에 끊임없이 괜찮다고 읊조리는 그 목소리에도 가슴이 미어져서 한참 동안 그의 옷깃을 잡고 있었던 것 같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을까. 기현은 결심한 듯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형원을 품에 안는다. 하늘의 뜻을 어찌 거역할 수 있을까.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살아 평생 고독의 시간을 보냈을 그의 곁에 머물면서, 그의 마지막까지 함께 있어 주는 것뿐. 떠나는 이가 외롭지 않도록 그의 남은 평생을 함께 해 주는 것뿐인 것을. 기현은 형원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손을 올려 그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어루만진다.

"이제 연분홍빛이 다 가셨습니다."

"고운 모습으로 그대를 맞이하였어야 했는데."

"지금도 충분히 자태가 훌륭하십니다."

형원은 기현에게 생을 불어 넣어 준 그때 하얗게 다 새어 버린 제 머리칼을 머쓱하게 만지다가 기현의 손을 잡아 끌어 그 손등에 입맞추고서는 그의 손을 맞잡고 별채 안으로 안내한다.

기현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침소는 자신이 머물던 그때와 한치의 변함 없이 그대로였다. 이리 오게 될 줄 알았더라면 매화꽃밭이 그려진 그림이라도 가져 올 것을. 무거운 표정의 기현을 살펴 보던 형원은 그를 의자에 앉혀 두고서 주방에 가려다 제 옷깃을 붙드는 기현의 손에 걸음을 멈춘다.

"어디 가십니까?"

"뒤뜰로 갈 준비를 하려 한다."

"저도 따르겠습니다."

"예서 편히 쉬지 않고."

"이제 그대와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기현은 형원을 향해 애써 맑게 웃어 보인다. 제 웃는 얼굴을 보면 못 이긴 척 결국 제 말을 들어 주었으니. 형원은 못말린다는 듯 웃으며 기현의 손을 잡고 함께 주방으로 가서 그가 좋아할 만한 주전부리를 담은 작은 보따리를 한손에 쥐고, 다른 한손으로는 기현의 손을 잡고 뒤뜰로 향한다. 기현은 뒤뜰로 향하는 문 앞에 설 때마다 작게 긴장하곤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기대가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는 마른 침을 삼킨다. 어디로 가든 그와 함께일 테니 그곳이 나락이라 할지라도 행복하겠지.

형원이 힘겹게 문을 열어 젖혔을 때 드러난 것은 오색빛이 찬란하게 물든 단풍이 가득한 숲속이었다. 우기가 이제 막 지났으니 아직 하기가 분명한 것을 기현은 그와 함께 가을을 맞이한 것에 활짝 웃어 보인다. 곧 땅으로 스러질 듯 짙게 물든 나뭇잎들이 산들바람이 이리저리 작게 흔들리고, 그 앞에 흐르는 내천은 노을빛을 받아 황금빛과도 같으니 기현은 그 황홀함에 형원에게도 어서 걸음 하시라 재촉한다.

"마음에 드느냐?"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습니다."

"내 이제는 대단한 도술을 부리지 못해 비록 더 넓은 공간을 누리게 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쓰이는구나."

"저를 생각해 주신 그 마음이면 충분합니다."

맞잡은 손으로 서로의 고동이 더욱 크게 느껴짐에도, 더 자세히 그것을 느끼고 싶어서 서로가 더 굳게 손을 쥐어 온다. 노을이 물든 내천 앞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간다. 기현이 없는 동안의 형원은 어떠했는지, 형원이 없는 시간에 기현은 어떠했는지. 어찌 활터에서 환영처럼 그리 나타났던 것인지. 형원은 이제 그에게 숨길 것이 없었기에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 놓는다. 궁에서 이곳으로 오기 위한 통로가 그 그림이며, 그것은 형원이 직접 그려 선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도술이 들어간 부채를 펼쳐 들면 제 기척을 숨길 수 있으니, 기현이 그리울 때면 밤이고 낮이고 상관없이 부채를 펴들고서 궁을 돌아다니며 그를 찾아 다녔다고. 기현이 환각이라 생각했던 형원의 얼굴 또한 생시였으며, 바람에 접힌 부채 탓에 잠시 저를 보았을 것이라고. 기현의 꿈에 찾아간 것은, 그가 잠들었을 때 그의 곁에 나란히 누워 그의 손에 새끼 손가락을 걸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흔히 인연인 사람들에게는 손가락 끝에 홍실이 걸려 있다고 하는데, 제가 한 것이 곧 그것을 이용한 것이라고. 기현은 그 모든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울망한 눈을 들어 형원을 바라본다.

"그리 하실 것이면서, 어찌 저를 그리 내치셨습니까?"

형원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손을 들어 기현의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어 주며 입을 연다.

"그대가 떠나면 나 또한 마음이 사그라 들 것이라 믿었다."

"…."

"그래야 남은 생을 조금이라도 이어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야 너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볼 수 있었을 테니."

"저 또한 그럴 것이라 믿었습니다."

"…."

"그래서 그대에게 속에도 없는 거짓을 뱉었습니다."

"내 그대의 뜻을 모르는 것 아니니 괜찮다"

"그대가 조금이라도 더 생을 이어 나갔으면 하여…."

"내가… 아직 그대의 마음 속에 있느냐?"

"단 한 번도 제 속에서 그대를 내친 적 없습니다."

"…."

"좋아해요."

"나 또한 그대를 연모한다."


형원의 별채에서의 기현의 하루는 동이 트면 눈을 뜨고서 창을 열어 용설란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오늘은 용설란에 꽃이 피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제일 우선이었다. 기다랗게 하늘로 뻗은 꽃대에 자잘한 꽃봉오리들이 금방이라도 개화할 준비를 하는 것이 기현은 못내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이 별채에서 지내는 며칠 동안 형원은 기현이 제 침실에 드나드는 것을 흔쾌히 허했고, 기현은 침상을 나서자마자 곧장 형원의 침소로 가서 그의 침상 위에 몸을 구겨 넣고 그의 품에서 그의 잠을 깨우곤 했다. 형원의 볼을 쿡쿡 찌르면 형원은 간지러움에 눈을 뜨고서 제 품에 기현을 가두고 더 자다 일어나겠다 웅얼거렸고, 기현은 그런 그에게 얼른 일어나라 보채는 것이 그들의 하루의 시작이었다. 매일 함께 수저를 들고, 매일 함께 앞뜰을 거닐고, 기현이 보고파 하는 것들은 뒤뜰에서 여한없이 보여 주곤 했다. 해가 머리 꼭대기에 뜬 시간, 형원의 방에서 그의 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는 기현은 문득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기현아."

"아, 오셨습니까?"

"무얼 하고 있기에 대번에 돌아보지도 않았어."

"부채를 펴면 기척이 없어진다 하기에, 저 또한 기척을 숨길 수 있나 하여."

"도술이라도 부리고 싶은 것이냐?"

"해서 그대의 생을 늘릴 수만 있다면 그리 하고 싶습니다."

형원은 그의 마음이 어떨지 잘 알고 있기에 부러 말을 잇지 않고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치고서는 부채를 탁자에 둔다. 그리고서는 벽장을 열고는 털이 북슬하게 달린 겨울 의복을 꺼내어 기현에게 둘러 준다. 의아하다는 얼굴로 저를 올려다 보는 그의 이마에 짧게 입 맞춰 주며 형원은 입을 연다.

"내가 아직 네게 설경은 보여 준 적이 없더구나."

기현은 제 품보다 훨씬 큰 옷을 만지작거리다가 한쪽을 형원의 어깨에 둘러 주고서 몸을 가까이 붙인다.

"필시 추울 테니 함께 몸을 데우는 것이 좋겠지요."

틈없이 맞닿은 몸이 조금이나마 편하도록 형원은 기현의 어깨를 감싸 안고서 뒤뜰로 향한다.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대도 나도, 굳이 말은 않고 있지만, 꽃이 개화할 날이 머지 않았으니. 형원은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 가, 그의 위엄 있는 걸음도 내딛지 못하였다. 개화 시기가 가까워 올수록 그의 몸은 갈수록 쇄약해져 가는 것이었다. 형원의 손 위로 기현이 자신의 손을 겹쳐 뒤뜰로 가는 문을 열면, 영원히 녹지 않을 것 같은 설경이 펼쳐진다. 기현이 형원을 부축하고서 안으로 발을 들이고, 모닥불이 피어 있는 곳으로 가 형원을 앉히고서 그 옆에 자신 또한 자리한다. 기현은 온통 순백색인 이를 가만히 눈에 담다가, 그의 손을 쥐고 찬찬히 쓰다듬는다. 뼈마디가 불거진 손은 그 손길을 가만히 받아 내다가, 기현의 손을 쥐어 온다.

"이상한 일이지."

"…."

"일평생 승천할 날만을 기다렸는데,"

"…."

"막상 코앞에 닥쳐오니, 이리도 미련이 남는 것이."

형원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저 또 차오르는 것을 참지 않고 흘려 보내며 가지 말라 떼를 써야 할지, 그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하도록 웃으며 위로를 해 주어야 할지. 기현은 늘 그 두 가지 선지에서 답을 고르지 못할 뿐이었다.

"미안하구나. 괜히 삶에 미련이 남아 너를 난처하게 했어."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끝까지 그대의 곁을 지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입니다."

"기현아."

"네, 형원."

"너는 후회한 적 없니?"

"무엇을요?"

"그대의 마음에 나를 품은 것을 후회한 적 없어?"

"단 한 순간도 그리 생각한 적 없습니다. 되려, 제가 그대를 마음에 품어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 그거면 되었다."

"…."

"나 또한 그대를 내 마음에 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

"그대였기에 감사하기도 하고."

기현은 금방이라도 형원이 스러질 것 같은 기분에 부러 더욱 세게 그의 손을 쥔다. 이런 말을 잘 하지 않던 이인데, 재회한 후로 꺼낸 적이 없던 이인데 어찌 오늘은 이리 구슬픈 말들만 골라 할까. 기현은 그의 손을 잡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애써 웃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 본다.

"추운 곳에 오래 계시면 몸 상하십니다. 얼른 나가요."

형원은 일그러진 얼굴로 웃는 이를 눈에 담다가 옅게 미소 지어 보이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래, 날이 추우니 어서 돌아가자꾸나."

형원의 느린 걸음에 맞춰 기현도 한 걸음씩 옮긴다. 눈밭에 두 쌍의 발자국이 나란히 찍히다가 이내 문 앞에서 멈춘다. 기현은 형원에게 오늘 저녁은 무얼 드실 것인가 물으려다가 기별도 없이 고통스럽게 몸을 웅크리는 형원을 부축한다. 개화통이 이리 극심하니 한시 바삐 돌아가야겠지. 그렇게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며 기현은 맞잡은 손을 들어 별채로 돌아갈 문을 천천히 밀어 연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잘 정돈된 돌바닥에 막 두 사람이 두 발을 모두 디디고,채 세 걸음도 걷지 않았을 때였다.

"형원! 형원, 어찌 이러십니까!"

형원은 가지런한 돌바닥 위로 흐트러지듯 엎어지더니 숨을 가쁘게 몰아쉬기 시작했다. 바닥을 짚은 손은 무엇이라도 필사적으로 쥐려는 듯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여, 석판 위에 작게 생채기를 내기 시작한다. 기현은 불안한 눈으로 형원을 감싸다가,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 찬란한 빛을 내는 난을 바라본다.

영영 피우지 못할 것만 같던 용설란이, 끝끝내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든 채 연노랑 꽃을 피운 것이다. 기현은 무너지는 가슴도 어찌하지 못한 채 형원을 품에 안고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를 부여잡는다.

"안 됩니다. 저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기현은 제 눈에서 흐르는 것도 막을 수가 없었다. 형원의 백의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고, 기현은 한참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고개를 들고 형원을 바라본다. 점점 초점을 잃어 가는 눈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오로지 기현 자신만을 담고 있었다. 기현은 제 얼굴도 추스를 새 없이 울면서 그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제 시야에서 하얀 재가 되어 흩어지는 모든 것들에 울부짖으며 형원을 바라 본다.

"안 돼! 아니 됩니다, 저만 두고 이리 가시면,"

"기현아."

형원은 다 갈라진 목소리를 겨우 쥐어 짜내어 기현의 이름을 불러 본다. 아, 종지에 이리 그리울 줄 알았더라면 더 많이, 더 자주 너의 이름을 불러 볼걸. 형원은 손을 뻗어 기현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기현은 그 온기마저도 연기처럼 날아갈까,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치고서 뺨을 부빈다. 제 주변의 것들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다가, 이내 형원의 몸에서도 피어오르는 것에 기현은 다급하게 그를 추스린다.

"안 돼, 가지 마세요. 가면 안 됩니다. 형원…!"

"기현아."

"조금만… 조금만 더 계시다가,"

"너무 슬퍼 말거라."

"안 돼, 이렇게는 못 보냅니다. 아직 그대와 하지 못한 것들이,"

"뒤뜰의 문은, 남겨 달라 청할 것이니,"

"형원… 제발…!"

"언제든, 설령 그럴 일은 없겠지만, 살다가 견딜 수 없이 내가 그리워지면, 저 문을 열고 나가거라."

"제가 어찌 이곳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그곳에 내가 있을 테니…."

기현은 힘겹게 말을 이어 가는 형원의 얼굴에서도 재가 피어 오르는 것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더욱 세게 그를 제 품에 안는다. 흩어져 가는 그 얼굴에는 오로지 형원이 지어 보이는 선명한 미소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현은 제 소지 첫 마디를 감아 오는 가늘고 긴 손가락을 불안하게 바라보다가, 제 귓가에 멍하니 울리는 고운 목소리에 도리질을 친다.

"그러니 꼭… 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저 문을 나서서, 다시 와 주련?"

"아아… 형원, 제발, 제발 아직은…!"

형원의 공간이 재가 되어 흩어지고, 이내 형원은 기현의 품에서 재인 듯, 연기인 듯, 그렇게 피어 올랐다. 기현은 점점 제 품에서 사라져 가는 형원을 어루만지고 부둥켜 안다가, 이내 제 품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를 찾으려 고개를 두리번거리면서 울부짖었다. 그렇게 한참을 정신없이 울기만 했다. 제 얼굴이 눈물에 젖어 들어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이틀을 그리 내도록 울었을까. 제 안에 남은 모든 물기가 매말라 갈 즈음에, 기현은 맥없이 고개를 들어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잘 정돈된 돌바닥도, 호화롭던 별채도, 매일 같이 그가 내려다 보던 작은 연못도, 모두 흔적 없이 사라져 있었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원망스러우면서도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용설란뿐이었다. 하늘 높게 꽃을 피웠던 그것은, 제 주인이 없어져서인지 그 꼿꼿하던 기세는 어디 가고 끝이 바닥으로 향한 채 축 쳐져 있었다.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음에 그저 통탄스러웠다. 기현은 어느새 흙바닥으로 변한 숲속에 주저 앉아, 흔적도 남지 않은 이를 계속해서 찾아 헤맬 뿐이었다. 하늘이 이리도 원망스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기현은 며칠 전까지 형원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달밤에 잠을 청하는 것까지 모든 일들이 꿈만 같아서 허탈함에 피식 웃기도 했다가, 그가 이 세상에 없다는 절망감에 다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울부짖기를 반복했다.

이럴 거면 제 생을 늘려 주지 말지. 어차피 스러질 이였다면 저가 먼저 가서 기다릴 수 있도록 해 주지. 기현은 헛헛한 가슴을 퍽퍽 내려치다가, 제게 힘없이 말하던 목소리를 기억해 낸다.

문을 나서면 그가 서 있을 것이라고 했다.

기현은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뒤뜰로 향하는 문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아, 모든 것들이 사라져도 저것은 남아 있구나. 고약한 신이라는 자가, 그의 마지막 염원은 들어 주셨구나. 결국 이곳에 남은 것은 용설란과 저뿐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드나들었던, 그에게로 통하는 문도 있구나. 기현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리를 끌듯이 그 앞으로 걸어가 선다.

그가 유언처럼 말했다. 이 문을 넘으면 그를 만날 수 있다고. 그 너머에 그가 기다리고 있겠노라고.

그가 그리 말했으니, 필시 그러할 테지.

기현은 조심스럽게 손잡이 위로 제 손을 올린다. 곧장 열지 못한 까닭은, 혹시나 이 문 뒤에도 이와 같이 숲이 펼쳐져 있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발, 하늘이시여, 그의 뜻을 들어 주소서. 꼭 이 문을 지나면 다시 그를 만날 수 있기를. 다시 그의 품에 안길 수 있기를. 기현은 그렇게 하늘에 간곡히 빌면서, 두 눈을 꾹 감고 힘껏 문을 밀어 열고 한 걸음 내딛고, 이내 남은 한 발도 문 너머로 디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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