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편

4화 : 왜 정자 제공을 안 하는 게냐? 무정자증이니?

나탈리움 섬의 농노 이테루스는 마을 사람들에게 정자 제공을 할 것을 강요받는다.

이테루스 편 : 

왜 정자 제공을 안 하는 게냐? 

무정자증이니?


"그 새끼가 죽었으면 좋겠어. 개자식. 비명횡사나 해라."

울화가 치민 이테루스는 손을 멈추고 질척한 흙바닥에 앉아 버렸다.

옆에는 며칠 전에 건조한 보리 더미가 있었다. 조금 있으면 짐수레를 담당한 농노들이 실으러 올 것이다.

이 마을은 큰 보리밭을 여러 구역으로 나눈 후, 한 구역 당 네다섯 명이 분담하여 약 두 달에 걸쳐 작업했다.

그러나 이테루스는 이 중노동을 혼자서 하고 있었다. 그가 감독관의 눈 밖에 나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왜 미운털이 박혔는지 짐작은 했다.

시발놈. 땅을 쳐다보며 분을 삭히고 있을 때, 다른 그림자 하나가 바닥에 그려졌다.

"이테루스."

"아! 예, 어르신."

마을 관리를 하는 노인의 목소리였다. 짐수레 농노들과 온 것 같았다. 이테루스는 재빨리 일어나 돌아봤다.

"무슨 일 이십니까."

"왜 정자 제공을 안 하는 게냐?"

"… …"

아! 드디어 올 게 왔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얼굴을 구겼다.

남성 왕국 마리스테라와 여성 왕국 에스페미아는 몇십년 전부터 인공수정으로 생식을 했다. 

두 나라의 경계지역에는 그란첼리아 주라는 중립 지방 행정구역이 있었다.

마리스테라 왕국은 각 마을에 정자 수집소를 설치하여  남성들의 정자를 그곳으로 보냈다.

목적은 에스페미아 왕국의 여성들이 생식을 하는데 사용하기 위해서. 

"… 그거 때문에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상황이 심각해."

"조만간, 하러 갈 겁니다."

"같은 말을 일 년 전에 했었잖느냐. 스무살에 통지서가 날아오니 넌… 오 년 넘게 정자 수집소에 안 간거고."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니. 뭐라 변명할 거리가 없어진 이테루스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노인은 한숨 쉬었다.

"이테루스. 너는 은혜로운 가을을 담아낸 것 같은 건강한 피부와 눈, 활력이 가득 담긴 열매 같은 입술 그리고…"

"…으윽! 갑자기 뭔… 하고 싶은 말씀이 뭔가요?!"

노인이 그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품평하자 이테루스는 진저리쳤다. 정말 싫다.

"넌 잘생겼으니까 네 정자는 인기 만점일 거란다. 에스페미안들은 금발을 선호한다던데 조건에 딱 맞아. 튀어 오를 것 같은 그 풍만한 가슴도 좋…"

"그만 해요!"

이테루스 몸을 뒤로 젖혔다.

아우! 변태 같은 노인네 같으니라고.

게다가 노인이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터무니없는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정자에 초상화가 붙어 있는 것도 아닌데 제 외모를 어떻게 압니까? 정자 제공자의 정보는 열람 불가잖아요."

하지만 노인은 피식 웃으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세상이 법대로 흘러가지는 않아. 그 얼빠들은 검은돈을 얹어서라도 미남들을 조사하고 있을 거다. 그러고도 남을 것들이지. 내가 젊을 적엔 걔들을 직접 만나 섹스해야 했단다. 그래서 분을 피부처럼 바르고 다녀야 했지. 너희는 지금 태어난 것에 감사해야 해."

지겨워!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있었다!

이테루스와 비슷한 나이대의 남성들은 인공수정 생식 기술로 탄생한 세대였다.

그들 중에는 정자 제공을 싫어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구세대 노인들은 기술 도입 전의 일을 귀에 피가 날 정도로 말해주었다.

넌더리가 났다.

"지금은 얼굴 보고 성교를 할 일이 없으니 와닿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 좋은 세상에서 왜 번식을 안 하냐고."

"… …"

"혹시 몸에 문제가 있는게냐? 무정자 증이니?!"

"아닙니다!!!"

노인네가 노망이 났나. 못 하는 말이 없네.

"더 미루면 안돼. 얼른 제공해라. 그래야 너희들도 빨리 아이를 공급 받을 것 아니냐."

"… …"

아이. 

그 단어를 듣자 이테루스는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에스페미안이 낳은 아이의 성별이 여성이면 에스페미아 왕국민이 되고 남성이면 마리스테라 왕국민이 되어 각각의 나라로 보내졌다.

마리스테라의 남성들은 한 가구당 2-4인 이하였다. 적당한 나이에 동거를 시작하면 에스페미아에서 온 아이를 공급받았다. 

아이는 에스페미아에 정자를 제공해줘야 받을 수 있었다. 

왕족과 귀족들은 자신의 친자를 직접 공급받아 토지를 이어받는 후계자로 만들지만 아래 신분은 타인의 아이를 위탁가정처럼 양육해야 했다.

수가 많다 보니 혈연을 찾는데 많은 시간과 인력이 들어 불가능 했다나.

그의 애인은 이미 몇 년 전에 정자 제공을 했다. 이테루스만 하면 남자아이 하나가 소포처럼 이곳에 도달할 상황. 너무 두려웠다.

"어르신. 저희는… 애를 키울만한 형편이 안 됩니다."

"외벌이도 아닌데 왜?"

"부족해요. 저희 소득은 평균 소득에 못 미칩니다."

노인은 같잖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비웃었다.

"철없는 놈. 고작 한두 명을 키우면서 징징거리다니. 우리 때는 그거보다 적은 돈으로 애들을 네다섯 명씩 키웠어."

개꼰대.

"어르신 때랑 비교하면 안되죠. 제가 얼마나 부업을 많이 하는지 아세요?"

"다 변명이야. 그거보다 못 버는 자들도 많아. 마녀나 늑대인간들은 네 수입의 절반도 안 돼."

"걔들은 특수하잖아요!"

"그것 때문이면 더욱 정자 제공을 하는 게 좋을걸. 감독관은 그래서 널 혼자 배치한 거야. 이 일대를 다 할 수 있겠니?"

노인은 금빛 보리밭을 둘러보며 말했다.

"네 수입은 쪼그라들 거야. 곧 세금도 내지 못하겠지. 납세를 못하는 농노가 어찌 되는진 알지?"

"…그래도… 그래도 싫습니다.."

"거봐. 역시 핑계잖느냐."

"… …"

그 말이 맞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정자 수집소에 가서 그 짓을 하고 오는 게 내키지 않았다.

다녀온 애인은 별거 없으니 두려워 말라 했지만 여전히 거부감이 들었다.

'내가… 가축이냐고!'

이테루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섬에 사는 모든 농노들이 그렇듯, 자신도 죽어라 농사를 짓고 다음 농노가 될 남자아이를 양육하다 인생 종 치겠지.

이 지루한 삶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정해졌고 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표정을 보니 아직 육지에 미련이 있군."

노인은 그런 이테루스의 생각을 읽었는지 정곡을 찔렀다. 그리고 "쯧쯧…"하며 혀를 찼다.

"넌 글을 스스로 깨우쳤지. 인정한다. 넌 조금 특출난 남자가 맞아."

"… …"

"하지만 그래봤자 노예. 네 시체마저도 이 땅과 주인의 것임을 잊으면 안 돼."

"…압니다. 안다고요."

농노의 가치는 곧 토지의 가치. 펜리스 늑대가 서식하는 섬의 지대는 끔찍하게 형편없었다.

그러니 이테루스는 자신을 주저앉힌 이 쓰레기 같은 섬을 벗어나고 싶었다.

"마을에는 사람이 더 필요해. 가뜩이나 근래에 아이들이 많이 죽어 몇 년 후엔 힘들어질 게다. 감독관이 괜히 저러는 게 아니야. 그러니 수집소에 가거라. 마지막 경고니 명심하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짐수레 농노들이 일을 마쳤고 노인은 짐칸에 걸터앉았다.

이테루스는 멀어져 가는 짐수레를 바라보며 이를 깨물었다.

"차라리 여자로 태어났어야 해! 그러면 에스페미아에서 살았을 거 아냐!"

아, 이런.  홧김에 내지른 말이 살짝 두려워 고개를 숙였다. 누가 듣는다면 총살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우울했다.

에스페미아의 가정은 8인 이상으로 이루어진 친혈족이다. 늑대까지 키우는 가구가 많아 대집단이라고.

게다가 낳은 여자아이를 각 도시와 마을마다 있는 공공 보육 및 교육 시설에 위탁한다고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쪽이 편하잖아. 차라리 그 나라 여자가 내 주인이었으면 좋겠어."

이테루스는 한숨 쉬었다. 어떻게 이런 지식을 알고 있냐면, 그가 에스페미아 초대 국왕의 숨은 덕후였기 때문이다.

영주관의 서재 청소를 하던 시절, 우연히 에스페미아 역사서를 봤었다. 불꽃같은 안광을 가진 초대 국왕의 삽화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글을 스스로 익혀버릴 만큼 관련 이야기가 등장하는 책을 무수히 찾아 읽었다.

가끔, 에스페미아 초대 국왕이 제 이마에 키스하며 섬을 나가는 배에 태워주는 상상을 했다. 육지의 좋은 집에서 화려하게 살고 싶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아이를 키울 거 아냐.

"하아… 이런 생각하는 거 애인에게 들키면 얻어맞겠지."

현실은 시궁창. 이테루스는 바닥에 놓인 낫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망상 그만해야지. 우울증 치료가 안되잖아."

"안녕하세요. 말씀 좀 묻고 싶습니다."

"…응?"

그때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가늘고 높지만 어린아이의 것이 아닌,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음색이었다.

이테루스는 천천히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말도 안 돼…"

이런 섬에 여자가 있을 리가 없는데. 그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다른 쪽으로도 경이로워 차분히 생각 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이 현실에 있다면 이렇게 생겼을까?'

흉부 한가운데가 망치질하듯 쿵쾅거리다 못해 울렁거렸다. 이상해. 몇 시간 전에 약은 잘 챙겨 먹었는데.

"…저, 말씀 좀요?"

"… …"

손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푹!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뺨과 귀에서 심한 열기가 올랐다. 

"… …"

여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이테루스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의 발등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기요? 발에서 피나는데요."

<다음편에 계속>


* 액자 프레임 참고 출처 : https://nowframes.com

* 복식 참고 출처 : 유럽 복식 문화와 역사 저자 글림자

* 의자 참고 출처 : https://www.marhamchurchantiques.com

* 포즈 참고 출처 : Gregory C. Lowney Family Portrait & https://www.deviantart.com/kirilee

* 장식대 참고 출처 : https://www.sothebys.com/

* 배경 참고 출처 : https://pixy.org/28341/

* 촛대와 램프 디자인 참고 출처 : https://www.pamono.eu & https://www.handofgloryantiques.com/

( 이후 일부 삽화 참고 출처 동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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