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내리는 저택

막간. 쇼팽의 시간

1차 HL 자캐 CP 주현여루

“하늘아, 소연이는? 소연이 내일 생일이잖아. 생일선물은 샀어?”

“아... 네. 책 좋아하니까 소설로 골랐어요. 걔가 안 읽어봤을 장르의 소설로.”

“소꿉친구가 이럴 때 좋다니까. 취향을 다 파악하고 있어서 선물해주기는 편하겠어.”

“네, 뭐. 그렇죠.”

식탁 쪽이 아니라 바깥인 거실 쪽을 향해 덩그러니 놓인 부엌 의자. 그 위에 앉은 소녀가 가벼운 동작으로 발을 달랑거린다. 추위를 많이 타는지 어깨에는 화려한 문양의 어두운색 숄을 걸친 채다.

그녀는 숄을 가슴께에서 한 손으로 꼭 여미며 아무 의미 없이 발을 앞뒤로 동당거렸다. 고급스러운 의자는 다른 의자보다 키가 높아서 발장난을 치기에 딱 좋았다. 소파에 앉아 무성의하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소년이 흘끗 시선을 움직이는 발 쪽으로 돌린다.

“...요새도 꽤 추워요, 누나?”

“응, 뭐어... 좀 쌀쌀하긴 하네. 지난번에 비 맞아서 그런가. 감기에 걸린 이후로 날씨를 많이 타는 것 같아.”

“......”

몇 번째의 탈출이었을까. 기회를 잡자마자 망설임 없이 숙소 문을 박차고 나가던 여루의 모습이 떠올랐다. 서하늘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직 19살─생일이 지나지 않았으니 만으로는 17살─인 여루는 이 생활에 익숙해진 듯 보였으나 여전히 달아날 생각이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가장 최근에는 비 오는 날 도망가다가 채주현에게 질질 끌려왔었다. 그때 이후로 감기에 크게 걸렸던 게 안 그래도 좋지 못했던 몸 상태에 악영향을 끼친 듯, 몸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래. 그녀는 유명 아이돌 그룹인 자신들의 숙소에 납치되어 감금되어 있었다. 같은 반 학생이었던 채주현에 의해,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서하늘은 흔들거리는 소녀의 맨다리에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휴대폰 액정으로 눈길을 돌렸다.

“소연이가 요즘도 누나 얘기 많이 해요.”

“....그래?”

애써 웃어 보이고는 여루가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발장난도 멈추었다. 소연이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 애는 자신과 연락이 끊긴 이후로 많이 울고 충격을 크게 받았다고 했다. 여루는 그녀에게 어떠한 연락도, 언질도 줄 수 없었다. 물론 그녀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연락은 할 수 없었지만.

“소연이는 내가 연주하는 걸 정말 좋아했는데. 내가 생일 선물이라면서 특별히 소연이 앞에서만 피아노를 쳤거든. 나 아무한테나 피아노 안 쳐준다?”

여루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발에 퉁퉁 감긴 붕대 때문인지 걸음이 영 어설펐다. 절뚝거리며 거실에 있는 소파로 다가와 소년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서하늘은 그 붕대 안에 있을 상처에 대해 생각했다. 맨발로 비오는 날 밖에 오래 돌아다닌 결과였다. 그 결과 족쇄처럼 여루의 발을 묶고 있다.

...너무 오래 쳐다봤나. 자기도 모르게 드러난 다리 쪽에 시선을 주고 있었는데 눈앞에서 의아한 시선이 느껴져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누가 봐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태도로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팩 돌려버렸다. 곧 얼버무리듯 대충 대답을 주워섬겼다.

“그쵸. 알아요. 누나 학교 음악실에서 피아노 치다가 누가 오면 맨날 도망갔잖아요.”

“와, 그걸 다 기억하네? 소연이 걔는 물질적인 것보다 마음을 중요시해서... 유소연, 너한테도 생일 선물로 노래 불러달라고 하지 않아? 너 노래 잘하니까.”

“……노래도 불러주고, 선물도 주고 그래요.”

“헐, 그럼 선물을 두 개나 주는 거야? 대박인데 서하늘~ 그래, 잘해줘. 남자가 상냥하고 친절해야 쓰지 어디다 쓰겠냐. ...나쁜 남자는 요새 한물갔어.”

소녀가 재잘대며 이번에는 습관처럼 발목을 이리저리 꺾어댔다. 긴장할 때 나오는 오랜 버릇이었다. 애써 밝은 척 대화를 이어가고 있지만 서하늘은 숄을 꼭 붙잡은 여루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걸 목격했다.

양손에는 넓은 형태의 밴드와 손가락만 감싸는 반창고가 몇 개 붙어있었다. 두 발도, 두 손도. 자해의 흔적이었다. 물론 채주현이 이제는 오히려 자신을 인질로 삼아 그녀에게 가스라이팅을 하기 때문에 저 가는 손가락과 하얀 발에 또다시 상처가 생길 일은 없을 것이다.

하늘은 의미 없이 핸드폰을 터치하다가 이내 옆으로 내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여루가 다리를 끌어올려 가슴께에 밀착시키고는 턱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침울한 목소리의 중얼거림이 작은 입에서 흘러나왔다.

“소연이 보고 싶다... ...엄마 아빠도 보고 싶긴 하지만.”

“......”

서하늘의 시선이 다시 여루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는 애매한 표정으로 맞은편의 TV를 쏘아보고 있었다. 마치 꺼진 화면에 비친 자신과 의미 없는 눈싸움이라도 하는 양.

서하늘은 가라앉는 기분으로 그런 소녀를 응시했다. 이런 건 옳지 않다고, 범죄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 자신들의 이미지는? 크로엔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범죄자 그룹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연예계에서 퇴출당할 것이다.

설령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채주현의 보복이 돌아올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면서 대외적인 이미지나 생각하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신을 자위했다. 대기업 소프트원의 3세다. 자신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에게도 지켜야 할 것은 있었다...

여루가 느리게 한숨을 쉬며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서하늘은 뭔가 말이라도 꺼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이대로 침묵을 지켜야 할지 고민하며 눈치를 살폈다. 그때, 비밀번호를 누르고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 경쾌한 목소리가 현관에서 울렸다.

“저 왔어요~!”

전형원과 채주현이었다. 둘이 같은 스케줄이 있다더니 귀가도 같이한 모양이다. 저렇게 함께 온 걸 보면 개인 스케줄은 따로 없었나 보지? 그런 생각을 하며 서하늘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형 왔어요? 형원이도.”

“오늘 생각보다 되게 춥더라구요~. 아직 2월이라 그런가? 아님 새벽에 비가 와서 그런가. 암튼 아직은 패딩 집어넣을 때가 아닌 것 같아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여루는 화들짝 놀라 튀어 올랐다가 다시 굳은 상태였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바닥만 노려보았다.

“나 왔어.”

채주현이 소파가 놓인 거실 중앙으로 터덜터덜 걸어와 뒤에서 여루를 끌어안는다. 긴장으로 굳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는 나른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뱉는다. 그녀에게서는 그럴싸한 반응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서하늘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런 그들을 바라보았다. 전형원도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그럼 전... 들어가 볼게요.’라며 자기 방으로 숨어버렸다.

하늘은 어찌해야 할지 망설이며 어정쩡하게 현관과 거실 사이에 서 있었다. 일단 제 핸드폰이 소파 위에 올려져 있는 상태라 둘에게 가까이 다가가긴 해야 했다. 작게 한숨을 쉬며 소년은 소파로 다시 몇 걸음 움직였다. 여전히 여루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로 주현이 웅얼거렸다.

“오늘 일찍 왔냐고도 안 해주네. 나 너 빨리 보려고 화보 촬영도 일찍 끝내 달라고 했는데...”

“......”

입술이 벌어지면서 느껴지는 주현의 숨결에 간지러운지 살짝 움찔하는 것 말고는 여전히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그런 여루의 반응에도 딱히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주현은 자기 할 말만 해댔다.

“일찍 왔으니까 상으로 키스해줘.”

“...나 일어날래.”

여루가 불편한 기색으로 그를 떨쳐내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주현이 그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어 내리누르는 힘이 더 새서.

위기를 감지한 서하늘은 재빨리 소파 위에 올려놨던 핸드폰을 낚아채 자기 방으로 도망치듯 들어가 버렸다.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크게 뛰고 있었다. 하늘은 닫은 방문에 기대어 주륵 주저앉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다음은 버릇처럼 내쉬는 한숨이었다. 밖의 대화가 고스란히 문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손 놔.’

‘싫은데.’

‘놓으라고.’

‘싫어.’

‘너 진짜...!’

여루가 화내며 그가 서 있는 뒤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그녀의 몸이 풀썩 쓰러져 소파에 눕혀졌다. 소파 위로 넘어온 채주현이 자연스럽게 그녀를 제압했다. 그는 몸 위로 올라타면서 그녀의 뺨을 애정이 가득 묻어나는 동작으로 조심히 감싸 쥐었다. 그에 여루가 인상을 찌푸리고 얼굴을 돌렸지만, 주현은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 포식자처럼 느긋이 몸을 겹쳐왔다.

몇 분 후 거실에는 누군가의 울먹임과 간간이 옷깃 스치는 소리만이 남게 되었다. 이 모든 불행은 어느 미래의 일, 쇼팽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벌어진 일이다.

*참고 : Nocturne No. 20 in C-Sharp Minor, B.49, Op. pos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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