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내리는 저택

2화. 음악실의 소년, 소녀 (1)

1차 HL 자캐 CP 주현여루

나의 세계는 흑백이었다. 자신은 어느 흑백 영화 속 주인공이었다. 브라운관에 비치는 채주현은 사람들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래, 그는 언제나 연기를 하는 중이었다. 주현은 그 일에 열심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모두의 주목을 받는 일은 나름 즐거웠다. 하지만 자신이 주연인 영화는 흑백 영화에 불과했다. 모든 색채를 빼앗긴 잿빛 일상의 연속.

삶은 때때로 무성 영화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분명 말을 하고 있는데, 입 모양만 금붕어처럼 뻐끔거렸고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들리지 않고서야 의미가 없었다.

주현은 타인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가 없었다. 의미가 없으니까. 그저 모든 상황 속에서 분위기만 적당히 파악할 뿐, 의미를 모르니 깊게 개입하려 들지 않았다. 그럼으로 누군가와 깊이 친해지기도 힘들었다.

계절로 따지자면 주현의 세계는 겨울이었다. 무채색의 겨울. 모든 색을 빼앗긴 흑백의 한 자락. 그러나 그것이 딱히 싫지는 않은 그런 순간들이 제 삶이었다. 색이 없어도 살아갈 수는 있다. 재미야 없겠지만 그저 살다 보니 살아지는 게 삶 아니겠는가?

그런 흑백 세계 가운데 성장 환경은 부유하다 못해 넘쳐났다. 마치 어떤 옛 영화의 백만장자마냥 넘치는 부로 치장한 인물이 자신이었다.

그는 부유함을 비롯해 주변에서 쏟아지는 애정과 관심을 기꺼이 받아 삼켰다. 누군가 본다면 배부른 삶이라 여겼으리라.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넘치는 사랑과는 달리 그 안은 텅 비다 못해 메말라 있었다.

아무리 주목받아도 채주현은 공허했다. 영화의 주인공에게는 외로움이 존재했다. 해소되지 못한 무언가의 갈증이 목에 남아있었다. 주현은 그 갈증이 무얼 의미하는지 몰랐으나 이것 또한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하지만 사실은 아니었던 것이다. 후에 찾아온 자신만의 빛에 안온함을 느끼고 갈급했던 걸 보니. 그는 심적으로는 전혀 부유하지 못했다. 모노톤의 무성 영화 속 주인공은 타인과 자신을 깊게 연결 짓는 일에 서툴렀다.

사람과 관계를 맺기가 힘드니 공감 능력은 떨어졌고 결국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기 힘들어졌다. 결핍된 상황은 어딘가 불완전한 결과만을 불러왔다.

소리 없는 장면들이 주현을 계속해서 스치고 지나갔다. 목소리조차 가지지 못한 그것들은 그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누군가가 본다면 다 가진 놈의 기만이고 위선일 생각이었지만 그에게는 지금 닥친 현실이었고 그런 삶이었다.

무엇보다 주현은 타인의 시선을 즐겼지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까지는 궁금해한 적이 없었기에, 기만과 위선은 그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사람들이 끊임없이 다가오지만 그저 지나치는 주인공.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 그리고 암흑. 어둠이 가고 하얀빛이 다시 찾아왔을 땐 새로운 막의 시작이었다.

*

최악을 피하려다 희망을 만났다. 빛이었다. 제 삶의 빛. 류세운을 피하려 예고가 아닌 인천의 일반고로 진학을 했는데 그곳에서 만났다. 저만의 행복을.

이름도 모르던 같은 반 학생이 던진 말이 화근이었다. 권여루가 누군데?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창가 자리 쪽으로 돌린 순간이었다. 그냥 그저 사소한, 그런 순간이었다.

반 친구의 말 한마디로 성의 없이 고개를 돌리던 순간. 무채색이었던 삶의 한가운데에 물감이 뚝 떨어지듯, 색 한 방울이 떨어졌다. 순식간에 색이 번져나갔고 그 순간의 장면이 다채롭게 물들었다.

색이 연한 소녀였다. 밝은 갈색 머리칼을 애매하게 기르고 앞머리는 길러 옆으로 넘긴 모습. 머리 색이 옅은 것 말고는 다른 아이들과 다를 것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애의 눈동자를 본 순간, 모든 잡상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경이로움이었다.

갈증이 사라졌다. 따스함이 풀어지고 머릿속이 녹녹해졌다. 햇살을 투영해 빛이 들어온 눈동자는 놀랍게도 주홍색이었다. 짙은 호박색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경이의 색. 성스러운 빛이었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는 생기로 넘쳤고 살짝 웃음기 머금은 눈가는 시원하게 트여있어 보는 이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갈증이 해소되고 감탄과 희망이 뇌 언저리에 감돌았다. 채주현은 드디어 제 삶에서 빛깔을 되찾은 것이다.

계절이 지나갔다. 오랜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찾아왔다. 색을 되찾은 계절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주현은 그것을 좀 더 탐해 보기로 결심했다.

*

삶이란 영화는 여전히 절찬리에 상영 중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현실로 돌아오기에는 꿈이 너무 아름다웠다.

주현은 제 옆자리를 내주었다. 주인공은 이제 두 명이 되었고 더블 주연으로 영화는 다시 크랭크인. 주인공 자리에서 내려오기엔 새로 들어온 주연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주현은 조금 더 연기를 해보기로 했다.

지루했던 무성 영화의 장면들이 어느새 소리를 입고 화려한 볼거리를 자랑하는 축제와도 같이 변해가고 있었다. 매일매일이 그에게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었다. 색과 소리를 가진 장면들은 모든 순간이 축복이자 행복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겨울. 열여덟의 네 번째 계절. 채주현은 빛을 잡아두는데 성공했다. 이것은 그 과정과 그 이후를 담은 한 편의 영화. 주연인 소년 소녀의 선택적 비극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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