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범람하는 밤

01화 기억을 잃은 황제

황제가 열흘 만에 깨어났으나 기억을 잃다...

​***

인평 즉위년

태종과 왕후의 장녀로 태어난 영락榮絡 공주가 임금으로 책봉되다.

임금이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건원*하다.

인평 원년

임금이 자기를 호위하라는 명목으로 궁에 사내 열 명을 무객武客으로 들이다.

태학사 강 씨, 임금이 방종하여 나라를 망치려 든다는 망발을 하여 그 자리에서 참수당하다.

인평 이 년

대신들이 임금 춘추 어리시니 학문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문객文客도 들이심이 옳다 아뢰니 임금이 윤허하다.

인평 삼 년

여자인 임금을 위해 정궁과 후궁 명칭을 ‘군君’과 ‘랑郞’으로 바꾸다.

인평 사 년

무객과 문객의 수가 서른 가까이 되다.

인평 오 년

임금이 칭제를 하고 연호를 태화泰和로 바꾸다.

태화 원년

황제가 천제天祭를 마친 후 문객과 무객 스물을 대동하고 매화림에 오르다.

문객 유 섭, 무객 최오규가 황제에게 내민 술을 대신 마시고 중독되다. 황제를 독살하려 한 무객 최오규가 다른 무객의 칼에 목을 베이다.

자객들이 나타나 황제를 위협하니 황제가 랑郞 장 씨에게 문객 유 섭을 황궁까지 안전히 데려가라 이르고 그에게 역당의 무리를 소탕하라 명하다.

자객의 습격에 실종되었던 황제가 절벽 밑에서 발견되다.

랑 장 씨가 무객 최 씨의 가족들과 그와 연관된 이들을 모두 잡아들이다……,

( * : 나라를 세운 임금이 나라의 연호를 정함)

침상에서 연일 신음하며 누워있던 황상께서 깨어나셨다! 습격이 있은 지 꼬박 열흘만이다. 따사로운 봄 햇살이 머리 위로 부서져 내렸지만, 황제는 그 빛이 달갑지 않은 얼굴이라. 손을 들어 햇빛을 가리고 있으니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폐, 폐하! 정신이 드십니까? 소인을 알아보실 수 있겠사옵니까?”

폐하? 황제가 중얼거렸으나 상궁은 듣지 못하였는지 바깥에 있는 궁인을 향해 외쳤다.

“여봐라! 태의! 태의를 부르라!”

상궁의 명에 잠시 후 침전 안으로 태의가 발을 들였다. 그리고는 황제의 침상 앞에 공손히 꿇어앉았다. 황제는 맥을 짚겠다는 태의의 말에 침상 앞에 내린 엷은 장막 바깥으로 손을 내밀었다. 태의는 비단 손수건을 황제의 손목 위에 덮었다. 맥을 짚는 이의 안색을 보아하니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만하길 천만다행이옵니다. 크게 상한 곳은 없으시옵고, 발목의 상처는 거의 다 나아 흉은 지지 않을 것이옵니다. 어깨의 상처 또한 움직이는 일만 자제하면 자연히 나을 것이오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수고했네. 물러가시게.”

“예, 상궁.”

태의가 나가고 상궁은 바깥에 서 있던 궁인에게 말했다.

“가서 청윤당에 아뢰거라. 폐하께서 깨어나셨다고.”

상궁의 명을 받은 궁인은 황제의 침전을 빠져나갔다. 그 사이 황제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모습이 태어나 제 침소를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침상 네 귀퉁이의 기둥에는 사람 그림자가 어스름하게 비칠 정도로 얇은 비단 장막이 매달려있다. 널찍한 보름달 모양의 창밖으로는 푸른 소나무와 화사한 꽃이 만발한 정원이 있고, 창으로는 햇볕이 아주 잘 들었다. 둥그런 모양의 안쪽 창을 옆으로 밀어 열면 바깥의 정원이 보이는 구조였다. 침상 앞에는 찻상과 서탁이 놓여있었다.

서탁 앞으로는 주렴과 만월문이, 그 바깥에는 여러 서책과 장식을 놓은 선반이 있다. 밖으로 통하는 문은 선반의 맞은 편에 있었다. 전반적으로 화려하기보다는 단정하였으나 곳곳에 우아한 곡선과 사물의 배치가 조화롭게 이루어졌다. 자기나 화분, 장식은 모두 푸르른 색감이었고, 서탁 앞의 주렴 또한 청록색 수정 구슬로 되어있었다.

상궁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말했다.

“폐하. 무사히 깨어나시어 다행입니다. 지밀상궁은 계속 폐하 곁에 있다가 잠시 쉬러 갔고, 이제 랑께서 올 것입니다.”

“너는 누구냐?”

상궁은 마치 해괴한 말을 듣기라도 한 사람처럼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누구냐니요, 폐하. 저는 이곳 안평전 상궁 이화이지 않사옵니까.”

“…….”

“폐, 폐하? 저를 잊으셨사옵니까?”

황제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화는 불경스럽게도 황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울 듯한 표정을 하였다. 그때 문밖으로 누군가 다가와 선다.

“폐하. 청윤입니다.”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침전 안으로 들어온 사내는 거침없이 주렴을 손으로 걷었다. 청록의 구슬이 서로 부딪치며 차르르, 차르르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황제는 청윤이라 하는 사내의 생김새를 보았다.

눈 부신 햇살이 닿은 얼굴은 백옥처럼 하얗다. 눈매는 그윽하면서도 눈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고, 콧날은 오뚝하며 입술은 붉다. 금빛의 귀고리는 길게 늘어져 그의 날렵한 턱선을 돋보여주며 잘랑거린다. 단단히 벌어진 어깨와 곧은 허리, 여기에 자태의 고아함까지 더해져 그를 꽃에 비유하자면 한 떨기 석산화와 같으니 가히 절세가인이라 불릴 만하였다.

“청윤 마마.”

“어찌 그러느냐?”

“마마. 폐하께서 조금……, 이상하십니다.”

“알겠다. 여기는 내가 있을 터이니 너는 이만 나가거라.”

적당히 무게 있고 안정적이어서 듣기 좋은 목소리였으나 축객령과도 다름없는 말이었다. 이화는 웃으며 물러났다. 그러나, 황제의 눈에는 이화의 기분이 썩 좋지 않아보였다. 상궁이 나가고 청윤은 침상의 장막을 걷고는 황제의 곁에 앉았다. 이 역시, 황제가 그리하라 허락을 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깨어나시어 다행입니다, 폐하. 명하신 대로 좌의찬 가문 일원은 모두 잡아들였고 여죄를 조사 중입니다. 섭이는 환궁하자마자 해독하여 이제 거동을 할 수 있을 만큼 몸이 회복되었습니다.”

“섭이……?”

황제가 중얼거리자 청윤은 옥안을 살폈다. 그는 황제가 아직 열이 있다고 여겼는지 이마에 손을 얹으려 하였다. 놀란 황제가 뒤로 물러나자 청윤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 설마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순간 황제의 귓가에 어떤 목소리가 울렸다.

― 기억해. 내 이름은 송 휘. 휘다.

황제가 앞섶을 꽉 쥐었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숨을 헐떡거렸다. 폐하! 조급한 청윤의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어왔으나 황제는 대꾸하지 못했다.

“태의를 부르라, 어서!”

청윤이 황제를 끌어안았다. 황제는 벗어나려는 듯 그를 밀어내려 하였으나,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몸으로는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흐릿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안평전을 울렸다.

태화 원년

황제가 열흘 만에 깨어났으나 기억을 잃다…….


― 송松 내전록

1. 기억을 잃은 황제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황제이되 황제가 아니었다. 그의 이름은 송휘가 아닌 동화. 그의 기억은 아직 제 이름 두 자뿐이었다. 아무리 떠올려보아도 성은 없었다. 부모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보다 진짜 황제인 송휘는 어디로 갔을까. 안타깝게도 동화의 기억 속에서 휘는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 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높이에서 떨어졌으면 살아나기는 힘들 것이었다.

동화가 다시 눈을 뜬 건 탕약을 마신 후였다. 침상 앞에는 태의가 엎드려있었다. 청윤이 동화를 자신의 품에 기대게 하여 약을 먹게 하고 있었다. 동화는 살짝 청윤을 밀어내었으나 힘이 부족했는지 오히려 더 꽉 끌어안기기만 했다.

“폐하! 소신이 소임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죽여주시옵소서!”

“그만하고 나가시오. 폐하께서 이런 일로 사람을 죽이시는 분은 아니지 않소. 다만 입단속들 하셔야 할게요.”

청윤은 태의와 내인들을 모두 물렸다. 약 그릇을 내려놓은 그는 열을 재려는 듯 동화의 이마에 손을 댔다.

‘들어보니 후궁인 듯한데 이렇게 멋대로 사람을 안다니. 도대체 누가 후궁인지 모르겠군. 게다가 마치 자기가 황제인 것처럼 굴지 않은가.’

동화는 황급히 청윤의 손을 떼어내고 그의 품에서 벗어나 이불로 몸을 감쌌다. 그 모습이 꼭 경계심 많은 고양이와 같은지라. 정말로 다 잊으신 건가. 청윤이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쉰다.

“태의의 말로는 절벽에서 떨어지신 충격으로 기억을 잃으신 것이라 합니다. 마음을 편히 가지시는 것이 좋다 하니 당분간 조정에는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동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꿈에서 보았던 휘라는 사람은 누구일까? 왜 나와 얼굴이 같았을까? 그와 나는 무슨 관계였을까?

“폐하. 폐하께서 이 나라의 황제란 사실은 기억하십니까?”

“네가 나를 폐하라고 부르는 걸 보면 그런가 보지.”

그는 퉁명스럽게 말을 뱉었다. 청윤은 딱히 동요하지 않는 듯 보였다.

“하면 습격이 있던 날은 기억하십니까?”

습격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동화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는 그러다 어지럼증을 느끼고는 비틀거렸다. 피가 나도록 제 입술을 짓씹는 동화를 보던 청윤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힘들면 억지로 기억하려 하지 마소서.”

동화는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흰 바탕 끄트머리에 녹색 실로 대나무가 수놓아져 있었다. 무심결에 손을 뻗던 동화는 작게 아! 하는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는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던 청윤은 손수건을 거두어가더니 그걸 살짝 물에 적셨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입술을 닦아주었다.

“화살에 맞으셨습니다. 촉이 깊게 박히지는 않았지만 상처가 벌어져 회복이 더디다고 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되도록 오른쪽 팔을 쓰시는 일은 자제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분간은 글을 쓰실 일이 있으시면 저를 부르십시오.”

동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폐하! 섭이입니다. 섭이가 왔습니다!”

문밖에서부터 소란한 목소리에 청윤의 입매가 굳었다.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더니 들어오라 말했다.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것은 버선발로 달려온 '유 섭'이라는 사내였다. 유섭은 자신의 처소부터 이곳까지 뛰어온 듯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는 주렴에서부터 거의 기다시피 하여 침상 앞으로 다가왔다. 커다란 눈망울에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보석 같은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순한 눈매에 진한 호박색 눈동자. 촘촘한 속눈썹. 왠지 울리기 좋은 인상을 한 그는 이미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화 상궁에게서 들었어요. 황상, 정말 전부 기억나지 않으세요? 저도요?”

“입 한번 가볍군.”

청윤은 혀를 쯧 찼다. 동화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청윤을 흘끗 보았다.

“전부는 아니다. 폐하께서 네 이름은 기억하시는 것 같더구나.”

“정말요?”

제 이름 하나 겨우 기억하고 있는 동화였다. 게다가 그는 진짜 황제도 아니지 않은가. 문객이라 하는 이의 이름을 알고 있을 리 없었다. 동화는 잔뜩 기대에 차서 저를 바라보는 유섭의 시선을 차마 마주할 수 없었다. 그는 괜히 이불만 손으로 꽉 움켜쥐곤 말했다.

“괜히 네가 기대하게 했구나. 그저 이름이 귀에 익어 되뇌어보았을 뿐이야. 너를 기억하지 못해 미안하다.”

그가 말을 마쳤음에도 청윤과 유섭은 대답이 없었다. 동화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청윤은 언뜻 표정에 변화가 없어 보였으나 미세하게 미간이 좁아져 있었고, 유섭은 충격을 받은 듯 입이 벌어졌다. 급기야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유섭이다.

“폐하, 정말……, 정말 다 잊어버리신 거예요?”

“내가 뭘 잘못했느냐?”

급기야 유섭은 하늘이 무너진 듯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섭아. 울음을 그치거라.”

“그치만!”

“남은濫誾.”

자를 부르는 음성이 낮게 깔려있었다. 당장 입을 다물라는 뜻이었다.

“폐하께서는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꼭 필요하다면 적절한 보상을 내리는 편이셨지요.”

“나는…….”

“아직 피곤해 보이시니 오늘은 이만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청윤은 유섭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무래도 유섭은 안평전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듯 보였으나 무언의 압박에 하는 수 없이 일어났다. 거의 끌려가다시피 청윤의 손에 이끌려 나가는 유섭의 뒷모습은 짠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

동화는 여전히 침의 차림이었다. 주란이라는 지밀상궁이 밤에 걸쳐준 겉옷은 바닥에 떨어졌고,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 덕분에 화로의 불씨도 꺼진 지 오래였다.

의식을 되찾은 지도 벌써 이레. 황제의 생활에는 익숙해졌다. 그는 이레 동안 경서와 사서 교육을 받기로 하였다. 청윤은 좀 더 쉬시라 권하였지만, 가만히 쉬기만 하는 것은 동화의 성미에 영 맞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책을 몇 줄 읽어보니 전부 아는 내용이라 굳이 태학사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도대체…….”

입 밖으로 생각이 툭 튀어나오려고 했다. 궁 안에는 벽에도 듣는 귀가 있다지. 동화는 고개를 저었다.

잃어버렸던 기억은 느리지만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가장 먼저 돌아온 기억은 습격이 있던 날 절벽에서 있었던 일. 아직 흐릿하지만, 그의 본래 신분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기억이었다. 그 외에도 몇 가지가 떠오르기는 하지만 중요한 기억은 아니었다. 확실한 건 그는 절대로 이 나라의 황제가 아니라는 사실뿐.​

“하…….”

동화는 이마를 짚었다. 생각을 할수록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졌다. 기이한 건 기억을 잃은 와중에 황실에서 생활하는 데에 필요한 것들은 어찌저찌 잊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휘는 송휘가 아니니 알고있다고 하는 게 옳을 터다. 가령 황실의 예법이나, 황제의 취향 따위의 것들. 숨을 쉬는 듯이 모든 말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남의 것을 억지로 흉내내려고 외워낸 게 아니라, 마치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과도 같이.

도대체 휘와 나의 관계는 뭐였을까? 나는 왜 그런 절벽에 있었고 어쩌다 휘의 자리를 떠안았을까? 진짜 황제인 휘는 어찌 되었을까? 그리고 나는 왜 이 황궁이 낯설지 않을까…….

“폐하. 주란입니다.”

주란은 서탁 위에 여러 문서를 올려놓았다.

“말씀하신 것들을 가져왔습니다.”

청명한 목소리가 조용하던 안평전 침소를 은은하게 울렸다. 주란은 화병에 꽂힌 이름 모를 들꽃을 보더니 말했다.

“치우겠습니다.”

“그냥 두렴. 꽃을 치운 것을 보면 그 아이가 실망할 테니.”

꽃을 보고 있으니 그나마 마음이 조금 편안해져 웃음이 났다. 동화는 꽃송이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황제에게 총애를 받았다더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저렇게 사랑스럽게 행동한다면 그 누구라도 좋아할 수 밖에 없을 터다. 주란은 다가와 서탁 밑에 떨어진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폐하. 아직 이렇게 무리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나도 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내 기억이 돌아오기만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아침 수라는 거르시면 안 됩니다.”

“알았다. 지난달에 처리한 상소는 이게 다였니?”

“우선 폐하께서 직접 보신 상소는 이게 끝입니다.”

“‘직접’이라면……, 그 나머지는?”

동화의 물음에 주란이 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괜찮으니 말해보렴. 나도 조정 돌아가는 꼴은 알아야 대신들 앞에서 장단 맞추는 시늉이라도 하지.”

“평소에 폐하께서 보시는 상소는 랑께서 보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추려 올린 것입니다. 정무의 대부분 랑의 도움을 받으셨고, 가끔 랑께서 조정에 대신 나가기도 하셨습니다. 물론 폐하께서 미리 조정에서 논할 이야기와 의견을 적은 문서를 내려 그대로 업무를 처리하는 편이었습니다.”

주란이 황제의 앞이어서 도움을 받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그와 그의 가문의 의견이 많이 개입되었을 터다. 상소를 추려 올렸다면 당연히 자신에게 불리한 상소들은 배제했겠지.

“한데, 조정에 대신 나갔다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월권이 아니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폐하께서는 경통증 때문에 적어도 사흘은 열이 높고 고통이 너무 심하여 허리를 곧게 세우지도 못하셨으니까요.”

휘에게 경통증이 있다니, 동화는 정반대였다. 그는 달거리 기간이 다가오면 식욕이 왕성해져 음식을 많이 먹을 뿐 별다른 통증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거라도 기억하고 있는 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면, 달거리 주기는?”

“불규칙하셨습니다.”

만약 주기가 일정했더라면 불규칙한 동화와는 맞지 않아 곤란했으리라. 하지만 아직 여러 문제가 남아있었다. 우선은 습격에 관한 것. 듣기로는 무객인 최씨가 임금에게 술에 독을 타서 건넸다고 했다. 모든 증좌도 완벽하게 무객 최오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했다. 최오규는 좌의찬의 장자. 독이 든 잔을 직접 건네 암살 시도를 하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좌의찬이 정말 역심을 품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무객들을 사주하면 그만이지 영의찬의 바로 아래 품계인 그가 제 아들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주란. 법률서가 필요해.”

“매화림의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 일이라면 랑께서 처리하신다고 하셨으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심려치 말라……? 역모가 심려치 않을 수 있는 일인가?”

동화의 음성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주란은 물러나 고개를 조아리며 침착하게 말했다.

“폐하. 랑께서는 폐하께서 그 일을 떠올리시다 옥체가 상하실까 저어되어 그리 결정하신 것이옵니다.”

동화는 깨어나고부터 지금까지 느꼈던 위화감이 무엇인지 드디어 깨달았다. 어째서 궁인들이 황제인 그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청윤을 침전에 들였는지, 왜 궁인들이 저보다 청윤의 말을 우선하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그것은 청윤의 말이 황제의 말보다 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지금껏 황제가 황제로서만 존재한 까닭이다.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조차 입 밖으로 내지 않는 황제였기에, 그들은 휘를 주군으로 모셨을지언정 그의 마음이 어떨지는 살피지 않았다. 이 궁궐에는 황명과 황제의 후궁만 있을 뿐,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중받은 영락은 없었다.

“주란. 내 물으마. 이 궁궐의 주인은 누구냐?”

“폐하이시옵니다.”

“너희가 폐하라 부르는 이는 누구더냐. 정녕 내가 맞느냐?”

“폐하, 소신은 다만 폐하께서……,”

동화의 귓가에 휘의 목소리가 울렸다. 절벽에서 떨어지기 직전, 스스로 제 손을 놓아버리던 휘가 하던 말이……. 기억해. 내 이름은 송 휘. 휘다. 동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휘의 얼굴이 감은 눈꺼풀 위로 떠 올랐다. 자기와 똑같은 얼굴을 한 휘의 얼굴이. 숨이 막혔다. 자기는 이 나라의 황제 휘가 아니라 동화라고 소리를 치고 싶었다. 이 황궁에서 멀리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하나, 동화는 그리하지 못했다.

“걱정된다, 저어된다, 두렵다! 그대들이 두려운 일은 이 나라의 황제가 제 의지를 가지는 것임을 모를 것 같은가?”

문밖에서 웅성대던 궁인들의 말소리가 사라졌다. 주란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동화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려오는 듯했다.

“나가.”

“폐하.”

“가서 법률서를 전부 가져와. 그리고 오늘은 누구도 이 방에 들이지 마. 쓸데없이 너희에게 화풀이하기 싫다.”

명을 받잡겠사옵니다. 주란은 절을 하고는 문밖으로 나갔다. 동화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나도 결국 흉내나 내는 가짜이면서 누구를 나무랄 자격이 있는가. 휘가 나를 보면 화를 내겠지? 감히 그 자리에 앉아 황제 행세를 하고 있구나. 이렇게 뻔뻔할 데가, 하고…….'

*

습격이 있던 그날, 동화는 휘를 안고 절벽 밑 바위에 가까스로 착지했다. 그러나 동화는 무슨 일인지 독한 약 기운에 취한 데다가 어깨엔 화살까지 맞아서 휘를 품에서 놓치고 말았다. 휘의 손을 겨우겨우 붙잡았지만 이대로라면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우리는……, 서로 모르는 것이 참 많은데.”

휘의 입에서 태연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황당했다. 이 상황에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화화.”

“내 이름은 화화가 아니라 동화예요.”

“그렇구나.”

바람이 불어서 휘는 마치 종잇장처럼 흔들렸다.

“네 생일은 언제니?”

“조용히 좀 해요.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궁금한걸.”

“설이에요. 됐어요?”

휘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달싹이다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축축하게 피로 젖어 드는 손바닥을 느낀 모양이었다. 휘가 동화를 올려다보는 순간, 휘의 얼굴에 슬픔이 번졌다.

“넌 참 이해할 수 없는 아이야.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느냐?”

“나랑 얼굴이 똑같은 사람이 당장 내 눈앞에서 죽어버리면 찝찝하잖아요.”

실은 동화도 그 이유를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절박하게 만들었는지 그조차도 알지 못했다. 휘의 얼굴에 묘한 빛이 서렸다. 그러는 동안 동화가 화살을 맞은 곳의 상처가 조금씩 벌어졌다.

“동화.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손을 놔.”

“싫어요.”

“어서.”

“싫어!”

동화는 어깨에 맞은 화살을 분질러버렸다. 그리고는 미련하게도 왼쪽 손을 바위에서 떼고는 휘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지탱하던 손을 잃은 몸이 조금씩 밀렸다. 이대로라면 당연히 둘 다 죽은 목숨이겠지만……, 동화에게는 손을 놓는 게 죽기보다 어려웠다.

“동화.”

“왜 그래? 그런 목소리로 부르지 마.”

“나는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우리 둘 다 살 거야.”

“동화, 기억해. 내 이름은 송 휘. 휘다.”

*

감은 눈 아래로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 장면에 동화는 번쩍 눈을 떴다. 며칠 동안 꿈에 보이지 않더니, 아주 잠깐 휘에 대해 생각하였다고 또……. 식은땀을 닦아냄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내가 분명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송구하옵니다, 폐하.”

청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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