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제

[설제]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협객 5

동양풍 BL. 오리지널 스핀오프. 자유연재.

DILLO by 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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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에 창을 만들어 비스듬히 빛이 비쳐 들어오고 중앙에는 엇갈리듯 만들어둔 지붕 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실내인데 하늘을 볼 수 있다니 신기하긴 했다.

3층 높이에 만들어진 중정에는 작은 폭포와 검은 나무를 깎아 만든 수로까지 있었다. 연못은 없지만 몇 개 수반과 이어진 수로가 있어서 기가 막힌 볼거리였다.

큰 수반엔 하얀 자갈을 깔아두었는데 둥근 자갈 위에서 금빛 물고기가 빨간 지느러미를 살랑거리고 있었다. 척보기에도 진귀한 관상어였다.

소지는 시중을 드는 체하며 손님들을 따라다녔다. 휘둥그런 눈으로 연신 주위를 살피는 게 시중보단 구경에 정신이 나간 게 티가 났지만 소지 본인은 연기를 잘 하고 있다고 철썩같이 믿었다.

근방에선 볼 수도 없는 품종의 대나무와 사철나무 분재 따위로 꾸민 게 도화만 없을 뿐 작은 무릉도원을 엿보는 듯했다.

느긋하게 구경하며 자리에 앉아 가격만은 천하진미인 요리를 잔뜩 늘어놓고 노닥거리고 있자니 신선이 따로 없었다. 두런두런 대화하는 목소리나 웃음 소리, 보기도 좋고 가격도 대단한 음식들이 나올 때면 감탄하는 사람들의 모습마저 신선놀음의 일부가 되었다.

제헌마저 썩 기분이 좋아져서 설이 주는대로 넙죽 받아먹으며 느긋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지에게도 너그러워져서 지나가는 강아지를 대하듯 더 먹고 싶은 게 있냐느니 소지는 한색보단 난색이 어울린다느니 미래 계획은 있냐느니 계속 말을 붙여댔다.

"너 근데 돈만 보면 눈빛이 달리지는데, 키워주신 부모님께 효도하려고 돈 모으는 거야? 아니면 제비 새끼처럼 입 벌린 동생들이 줄줄이 딸려있다든가?"

"그냥 제 밥벌이죠. 혹시 나중에 돈 모으면 여기 떠나서 다른 마을에나 가려고요."

"다른 마을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어릴 때 인연이 좀 있거든요. 그리고 돈 좀 모으면 큰 물로 가야지요."

"지금도 어리면서 어릴 때는 무슨."

그런데 어느 순간 객잔 안 분위기가 좀 이상해졌다. 손님들이 하나둘 자리를 비우고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객잔 직원이 먼저 그들에게 가서 이래저래 말을 하자 그걸 들은 손님들이 일어나 객잔을 나갔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이상하다 할 수 없었다. 그냥 식사도 구경도 다 끝낸 손님들이 자리를 뜨는 걸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웃돈을 주고 얻어야했던 좋은 자리가 아예 텅 비는 건 이상했다.

게다가 중앙 자리에 있던 손님들이 없어지는 걸 보고 직원에게 말을 건 다른 자리 손님들도 얘기를 좀 나누더니 곧 자리를 뜨는 게 아닌가? 음식이 꽤 남은 자리도 여럿이었다. 수상한 것도 이렇게까지 수상할 수가 없었다.

제헌이 이래저래 바쁘게 다니던 직원을 불러 무슨 일인지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양잠네 자제분이 오신대서 자리를 만드는 중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쇼. 손님들 자리는 괜찮습니다. 편히 계셔도 됩니다."

꼭 다른 사람들은 편하게 있어선 안 되기라도 하다는 듯한 말이라 기묘했다. 실제로도 황급히 자리를 뜨는 이들이 많았다.

객잔 분위기가 바뀌자 자신이 웃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린 것처럼 제헌의 표정이 심드렁하게 바뀌었다. 그 영향인지 설도 덩달아 조용해졌다. 제헌에게 더 음식을 권하지도 않았다.

사람이 쭉 빠져나가니 가운데 놓인 수로를 흐르는 물조차 적적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웃돈을 꽤 주고 앉은 제헌 일행이나 몇몇은 나가지는 않았지만 객잔 직원이 워낙 안절부절 못하고 있으니 신경을 끄려고 해도 자꾸 주위를 살피게 됐다. 좋은 자리를 잡았어도 아예 털고 나가버린 사람들이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갔다.

양달에 놓인 바위가 해가 지면 식어버리듯 무릉도원은 사라지고 어수선한 분위기 탓에 김이 빠졌다. 제헌과 설이 기분이 좋지 못하니 소지도 눈치를 살피기 바빠졌다.

그렇게 자리에 있으란 건지 알아서 나가달라는 건지 직원이 몇 번이나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고 양해 바란다 굽신거리는 중에 상황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들이 야화객잔에 들이닥쳤다.

사람이 빠져 고요해진 탓인지 계단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시끌벅적 요란한 소리가 먼저 계단을 올랐다.

양해를 구하면서도 모쪼록 조용히 있어주길 부탁드린다며 안절부절 난처해 하던 이가 화들짝 놀라 튀어갔다.

곧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척 보기에도 있는집 자제들 같았다. 좋은 옷을 입은 행색부터가 타고난 미추를 떠나 잘 먹고 산 티가 풀풀 풍겼다.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다른 사람들이 있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 태도까지 아주 화룡점정이었다.

"공자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제가 가장 좋은 자리를 딱 준비해뒀습니다."

객잔 직원이 안내하려는 자리는 제헌 일행이 앉은 곳과는 떨어져 서로 잘 보이지도 않을 법한 위치였다. 그냥 귀한 손님이라 독야청청 주위를 물려드리는 느낌이라면 좋겠지만 어쩐지 예감이 썩 불길했다.

불길한 예감은 새로 등장한 손님들이 안내를 깡그리 무시한 채 저들이 앉고 싶은 자리에 자연스럽게 착석한 뒤 빨리 상을 차리라고 성화를 부리는 순간 정점에 달했다. 전형적인 안하무인이었다.

하지만 안하무인이든 유인이든 그들과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상황이 일단락된 듯하니 제헌이 다시 차를 홀짝거리기 시작했다. 설이 슬그머니 다시 제헌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려는 시도를 진행하는 동안 뒤늦게 자리를 차지한 젊은 청년들이 일행을 힐끔거렸다.

처음엔 한명이 좀 대놓고 흘끗 본다 싶더니만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며 계속 제헌과 설, 그리고 소지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한놈이 일어서는 걸 기점으로 몇놈이 쭐래쭐래 제헌 일행이 있는 자리까지 찾아왔다.

양잠의 아들과 그 친구들이라는 자들이 말을 건 건 놀랍게도 소지였다.

"야, 거지. 네가 왜 여기있냐? 꼴에 의자에 앉았네. 아주 손님이 다 되셨어."

"윽, 냄새! 물 빠진 머리털하며 하여간 지저분하긴."

"여기가 너 같은 근본 없는 게 올 곳이 아니야. 물 흐리지 말고 나가라. 어?"

젊은 나이에 요절한 전대 황제 소은제(昭隱帝) 또한 밝은 금발에 새파란 눈동자를 한 색목인이었다. 그러니 그 치세동안은 대놓고 외모로 비하하는 일은 적었는데, 색목인 황제가 죽고 검은 머리 검은 눈의 황제가 보위에 오르고 나니 사람들 사이에 다시 나쁜 버릇이 돌아왔다.

물론 그게 아니었어도 이들이 입조심을 했을지는 의문이긴 했다. 가만히 있던 소지에게 트집 잡아 시비 거는 수준이 황당해서 제헌은 할말을 찾지 못했다.

물론 잠시였다.

"큽, 콜록 콜록! 켁! 콜록, 콜록콜록!"

제헌이 아주 요란한 기침을 시작했다. 그저 갑자기 기침이 터진 자연스럽고도 생리적인 현상이라 속아주기엔 너무 작위적이고 성의 없는 연기였다.

옆에서 설이 "괜찮아요? 한기가 들었나 봐요."라고 다정하게 말하며 제헌에게 손수건을 건네는 바람에 더 분위기가 괴상하게 변했다.

"그쪽은 누구신데 이 버렁뱅이랑 어울리는지?"

말하며 살살 살피는 꼴이 조금이라도 얕보이면 행패 부릴 생각이 만만했다. 양잠과 그 주변인이 부린 패악을 어릴 때부터 무수히 들어온 소지는 바짝 얼어붙었다. 양잠의 아들에게 소지는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로 눌러죽일 수도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소지는 혹여 설의 외양이 들통날까 걱정했지만 설은 죽립에 천까지 둘러 얼굴도 가리고 죽립 아래에 검은 면사를 써서 머리카락까지 가리고 있어 그냥 보기엔 색목인 티가 나지 않았다. 색목인인 게 문제는 아니지만 지금은 괜히 소지와 엮어서 탈이 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소지가 잔뜩 긴장하는데, 제헌이 이번엔 재채기를 시작했다.

"알 필요! 엣취! 없어!"

재채기인척 말하는 건데 재채기 소리로 속아주기엔 너무 무성의해서 더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헌의 반응에 양잠 아들과 친구들은 실실거리는 한량에서 바로 인상파 건달로 직업을 전직했다.

한량보단 건달이 소속감이라도 있어서 더 나을까? 본인들이나 알 일이었다.

획기적이진 않은 직종 변화를 맞이한 집 잘 사는 건달들이 고개를 이리저리 꺾는다든가 쓸데없이 건들거리는 등의 이상행동을 보이며 이상한 얼굴로 보란 듯이 실실 웃었다. 우스운 꼴이었지만 나름대로 위협적으로 보이려고 하는 행동이었다.

"얌전히 넘어갔으면 괜찮았을 걸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게 재수도 없네."

그 말을 들은 제헌이 삐딱하게 웃었다. 이쪽도 만만찮게 퍽 재수 없는 표정이었다.

"칭찬 고맙다."

소지는 울고 싶어졌다.

어떻게 봐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될 사내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 제헌이 앉아있는 자리 주위를 둘러쌌다. 제헌은 자기 뒤를 병풍처럼 둘러싼 이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소지에게는 험악한 병풍들이 굉장히 잘 보였기 때문에 겁을 먹고 벌벌 떨었다. 그렇잖아도 겁에 질린 소지에게 날건달이 협박까지 더해주었다.

"네가 앉아있을 자리가 아니다. 당장 꺼져."

"앉아있어."

긴장해 있던 소지가 움찔 엉덩이를 뗐다가 서릿발 같은 제헌의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앉았다.

"천한 놈이 감히 날 무시해?"

소지는 제헌의 명을 들은 것 뿐인데 불똥은 소지에게만 튀었다. 수준 떨어지는 건달 친구는 퍽이나 그답게도 조그만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소지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는데 제헌이 기다렸다는 듯 반격했다.

방어가 아니라 반격이었다.

제헌은 소지에게 뻗는 손을 막는 게 아니라 소지에게 손을 대려하는 놈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뭘 할 틈도 없이 우악스럽게 확 잡아당기며 반대손으로는 그릇을 잡고 놈의 면상을 후려쳤다.

"악!"

설이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이 앉아있던 의자를 가볍게 들어올렸다. 소지가 잽싸게 탁자 아래로 기어들어간 직후, 친구를 구하려 제헌에게 달려드느라 설에게 등을 보인 놈이 의자로 콱 떠밀리는 신세가 됐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휘청인 남자가 뭘 어떻게 하기도 전에 설이 덩치에 걸맞는 무지막지한 힘으로 그대로 쭉 밀었다. 서넛이 서로 부딪히며 휘청이다 어어 하는 사이에 시원하게 밀려났다.

그러는 사이 제헌은 상대 부모님 안부 확인과 갖은 욕설을 쏟아부으며 탁자 위에 있던 그릇으로 후려치다 거리가 생기면 그대로 음식이 담긴 그릇을 마구잡이로 내던졌다.

훌륭한 활약이었으나 한 손으로 여러 손을 막을 순 없는 법. 제헌이 멋진 궤적으로 국수그릇을 던진 직후 손목이 턱 잡혔다. 제헌을 잡은 건달이 버럭 소리질렀다.

"이 자식이!"

"예, 아버지. 동생은 필요 없어요."

차분하고도 침착하게 건달 친구의 다리 사이를 정강이로 단호하게 걷어찬 제헌의 도발 효과가 퍽 좋았다. 붙잡았던 손목도 놓으며 개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친구를 대신해서, 음식물을 잔뜩 뒤집어 쓴 채 격분한 양잠의 아들놈이 날붙이를 뽑아들었으니까.

과일이나 깎아먹는데 쓰면 딱 좋을 팔뚝 길이보다 짧은 단도였지만 날붙이가 등장한 이상 더이상은 그냥 막싸움이 아니게 되었다.

제헌이 당황해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야? 이건 상황이 다르지.”

“닥쳐!”

머리채를 잡힌 채 얻어맞은 게 퍽이나 억울했던지 남자의 머릿속엔 그리 이성이 남아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친구의 폭주에 시비 건 무리도 순간 놀랐다. 아무리 양잠의 아들이라지만 술 먹고 시비 거는 것 정도는 몰라도 이건 선을 넘은 짓이었다.

소지는 탁자 아래 숨은채로 슬금슬금 그와 반대 방향으로 기어갔고 제헌은 대놓고 후다닥 물러났다.

"일단 진정하고……."

"닥치라고 했잖아! 내 말이 우스워?"

양잠 아들놈이 단도를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제헌에게 다가갔다. 뭐 대단한 칼솜씨가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원래 날붙이는 든 사람이 무슨 실력이 있어서 위험한 물건은 아니었다. 단도가 천장에서 내려오는 빛을 반사해 번쩍거렸다.

제헌이 주춤 뒤로 물러서는데 등에 뭔가 닿았다. 벽이 닿을 위치가 아니라 이게 뭔가 의문을 떠올리기 무섭게 제헌의 뒤통수에 하늘거리는 천자락이 닿았다.

그 순간 제헌의 어깨 위로 긴 팔이 휙 뻗어나가더니 단도를 잡은 손을 콱 움켜쥐었다.


폭력은 나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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