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제

[설제]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협객 6

동양풍 BL. 오리지널 스핀오프. 자유연재.

DILLO by 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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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의 뒤에 선 이는 키 뿐만 아니라 골격도 훨씬 커서 뒤에서 저리 팔을 뻗으니 제헌이 그 사람의 품이 파묻힌 꼴이 됐다.

제헌은 누구인지 짐작하면서도 순간 뒤를 돌아볼 뻔했다. 흠칫했으나 제헌은 돌아보지 않고서도 직감적으로 그가 누군지 확신했다. 물론 상황상으로도 설이 아니면 다른 사람이 없기는 했다.

제헌의 뒤에서 넉넉하게 팔을 뻗은 설이 잡은 손을 비틀자 흉기 난동자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단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비명도 안 나오는 듯했다.

난리통에 발에 차인 단도가 탁자 밑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몸을 숨기고 있던 소지가 깜짝 놀라 물러났다.

그동안은 선녀처럼 하늘하늘한 옷을 걸치고 나긋나긋 제헌의 비위를 맞추는 모습만 보았기에 설의 장대한 기골을 보고서도 위압감을 느낀 일조차 없었다. 더군다나 소지는 설의 얼굴을 보았으니까. 하지만 마음 먹고 용력을 발휘하니 체격에 맞게 과연 힘이 장사였다.

태도나 말투 탓에 생각하지 못했을 뿐 설은 체급부터 달랐다. 흉 없이 매끈한 손은 이제 보니 강건한 뼈대에 마디가 벌어져 불거진 손이었다. 키는 육척은 가볍게 넘어 칠척에 가깝고 하늘거리는 옷자락 탓에 잘 느껴지지 않을 뿐 어깨가 떡 벌어진 장정이었다.

소지가 마음 속에서 설에 대한 평가를 바꾸고 있을 때, 설의 사락거리는 옷자락에 안긴 제헌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흉기 잃은 난동범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날아온 일격에 난동범이 “억!”하고 소리 질렀다. 소지는 양잠 아들 놈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는 걸 보고야 말았다.

제헌에게 턱을 맞은 난동범이 비틀거리자 설이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곤 대신 놈의 얼굴을 덥썩 잡아서 확 밀었다. 팔을 들어올리는 바람에 소매가 걷어져 팔뚝에 힘을 주니 근육 결을 따라 그림자가 새겨지는 게 보였다. 애초에 체격차가 있어 손이 얼굴을 다 덮을 지경이었으니 이미 비틀거리던 울보 난동범은 쉽게 나자빠졌다.

놈이 우당탕 자빠지자 설이 탁자를 턱 잡고는 휙 뒤엎었다. 넷이 넉넉히 둘러앉을 식탁이 거의 허공을 날며 제헌의 손아귀를 피해 남아있던 그릇들이 와장창 엎어지며 난리가 났다. 여유롭게 시비를 걸었다가 이래저래 체면을 구긴 놈들을 향해서 잔뜩 주문한 비싼 음식들이 쏟아졌다.

식기에 두드려 맞은데다 탁자에 막혀 놈들이 순간 머뭇거리는 틈에 설이 제헌을 데리고 계단으로 향했다. 좋은 판단이었다.

은신처가 사라진 소지도 버려진 짐을 잽싸게 챙긴 뒤 그릇들이 엎어지는 소리를 뒤로한 채 두 사람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여기 혼자 남겨져 있었다간 정말로 큰일을 치를 터였다.

“비켜! 다 비켜!”

제헌이 입으로 온갖 요란을 다 떨어대며 순식간에 1층까지 내려갔다. 소란에 기웃거리는 사람들을 밀치며 제헌이 꽁지 빠지게 튀는 걸 긴 다리로 성큼성큼 따라붙던 설이 출입문 근처에 있던 객잔 직원에게 은자를 튕겨 던져주는 걸 보며 소지도 열심히 달렸다.

음식 값으로는 과한 은자를 던져준 건 가게에서 난동을 부리고 집기를 망가뜨린 배상이거나 혹은 잠깐이라도 그들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방향을 밀고하지 말아달라는 뇌물이 섞인 것처럼 보였다.

세 사람은 야화객잔을 벗어나 길을 따라 줄행랑쳤다. 객잔을 나간 후에도 한동안 허겁지겁 내달렸다.

마침내 조금 떨어진 골목길에서 제헌이 멈춰서자 다른 둘도 정신 없이 달아나는 걸 멈췄다.

“안 따라오지?”

“누군가 따라붙은 것 같지는 않아요.”

“제가 봤는데 안 쫓아왔어요.”

“어후 씨, 힘들어죽겠네.”

제헌은 거의 온 몸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설도 용케도 잘 쓰고 있는 죽립에 늘어트린 천이 살짝 흔들거릴 정도로 숨을 내쉬었고 소지도 숨을 몰아쉬긴 했지만, 역시나 제헌이 제일 헥헥거렸다.

가장 호흡이 달리는 중에도 제헌은 입 놀릴 기운이 돌아오기 무섭게 열심히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자기가 양잠인지 양쪽인지 아들이면 다냐? 누군 부모 없나. 별것도 아닌 것도 권력이라고. 싸가지 밥 말아 먹은 호로자식들이……!”

씨근덕거리며 숨을 겨우 고른 제헌이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놈들 다 조져버릴 거야.”

비장하기 그지없는지라 눈 밑에 점이라도 찍고 복수를 위해 돌아올 것 같은 기세였다. 제헌이 파르르 화내자 설이 고개를 살짝 틀었다. 얼굴을 가린 얇은 천이 한쪽으로 스륵 기울었다.

“그럴 가치가 있을까요?”

말리려는 소리에 제헌이 오히려 벌컥 성질을 냈다.

“열불이 나서 이대론 못 넘어가!”

제헌이 겨우 상체를 세웠다. 진정하고 보니 손도 옷도 음식물에 양념이 묻어 엉망이었다. 그걸 본 설이 어느새 조심스럽게 제헌의 손을 받쳐들고 닦아주었다. 제헌은 귀찮다는 듯 손을 조물락거리는 설을 떨어내고는 씩씩거리며 나름대로 비장하게 말했다.

“권력을 쥔 자의 식솔이라는 이유로 저토록 방자하다니. 나라를 기망하고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는 자를 징죄하는 거야 말로 협객이 할 일이지.”

소지는 대체 여기에 협객이 어디 있냐는 생각을 했지만 충분히 영민했던지라 그걸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냥 시비가 붙은 것 때문에 지극히 개인적으로 그놈들을 물먹이고 싶어할 뿐이면서 변명만은 참 화려했다.

협객의 대의를 말하긴 했으나 물론 그들은 강호인이 아니고 이곳은 무림이 아니므로 자신들의 방식을 사용할 것이다. 물론 협객도 아니었고.

설이 조용히 말했다.

“순무는 무얼하는지 모르겠네요.”

“알게 뭐야. 어디 가서 발가락이라도 빨고 있나 보지. 그놈들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느라 바쁜 거 몰라?”

“알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성가시게 되리리곤 예상하지 못 했어요.”

“으이구.”

남이 들으면 치도곤 맞을 소리에 태연하게 맞장구가 따랐다. 게다가 저걸 예상까지 해야 하나? 소지는 이것도 못 들은 셈 치기로 했다.

다행히 소지의 머릿속에서 삭제해야 하는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설이 자연스럽게 제헌의 옷에 묻은 양념, 물에 불린 해삼이나 청경채 따위를 떼어내고 살살 닦아주며 매무새를 챙기는 사이에 제헌은 그것이 제 본분이라는 듯이 혓바닥만 놀리며 물흐르듯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어우, 힘들어. 내가 저런 쓰레기들 때문에 다리까지 아파야겠어?”

“제가 업어드릴까요?”

제헌은 조금 망설인 뒤에 설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직 거기까지 떨어질 정도는 아닌 듯했다.

바닥을 기어다닌 소지는 먼지투성이에 제헌은 이래저래 옷도 버리고 흐트러졌는데 방금 몸싸움에서 가장 큰 공적을 올린 설은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다소곳했다. 소지는 옷을 털고 제헌이 반쯤은 설의 손으로 옷차림을 바로한 뒤에 그들이 머무는 객잔으로 터덜터덜 돌아갔다.


오늘은 좀 짧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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