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제

[설제]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협객 7

동양풍 BL. 오리지널 스핀오프. 자유연재.

DILLO by 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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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비단옷을 차려입고는 무슨 험한 일이라도 휘말렸는지 자세히 보면 말끔하지 못한 꼴을 한 남자와 그의 시중을 드는 듯한 꾀죄죄한 소년, 그리고 천을 드리워 얼굴을 가린 키 큰 남자가 길을 걷고 있었다.

야화객잔에서 양잠 아들 패거리와 싸우고 도망친 제헌과 소지, 그리고 설 일행이었다.

투덜거리기도 지친 듯 웬일로 말 없이 한참 걷더니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제헌이 설을 힐끗대기 시작했다. 계속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처럼 제헌의 기색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설이 먼저 물었다. 

"제 옷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니."

제헌은 재빨리 부정하고는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러다가 또 설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너 왜 잘 싸우냐?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산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시정잡배짓이 자연스럽네."

제헌이 한 말이야 방금 있었던 패싸움 따위에 설이 끼어들어 자연스럽게 싸운 걸 얘기한 거겠지만 소지로서는 지금껏 손가락 까딱 안 하고 시중을 받은 사람이 할 말인가 싶었다. 

물론 소지가 보기에도 설은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그런 시정잡배와 손을 섞는 게 어울리지 않기는 했다. 설의 얼굴을 본 뒤로 혼자 속으로 내적친밀감을 느끼던 소지가 호기심에 은근히 귀기울여 들었다.

설은 제헌의 앞에서 늘 그랬듯 나긋한 말씨로 대답했다.

"담장 밖에서 야인 생활을 하면서 제 몸 하나 지킬 최후의 수단 정도는 익혀두었으니까요. 자연스러웠다니 다행이네요."

조금 많이 뒤늦게 설이 걱정 됐는지 제헌이 설의 손을 앞뒤로 뒤집어가며 대충 살폈다. 그리고 얼굴 상한 곳은 없는지 살피려는 듯 죽립에 늘어뜨린 천을 걷어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그냥 학관 다니고 평범하게 지냈으면서 야인은 무슨. 너랑 나랑 같은 학관에 다녔는데 그럼 나도 야인이냐?"

물론 남의 죽립 아래로 고개를 밀어넣는 짓은 걸어가면서 하기엔 좀 위험한 행동이었다. 설이 제헌의 몸에 팔을 두르며 부드럽게 보폭을 맞춰 걸어서 가까스로 제헌의 이마가 설의 턱에 부딪히지 않을 수 있었다.

키 차이 탓에 제헌은 고개를 위로 쭉 들어야 했는데, 발 아래 돌뿌리가 갑자기 나타나는 것쯤은 설이 알아서 해주리라는 듯 설에게 완전히 기댄 모습이었다.

소지가 보기에 딱 달라붙어 걷는 건 그리 행동에 자유를 보장하는 듯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제헌은 제멋대로였다. 뒤로 종종걸음치며 얼굴을 가린 천 아래 설의 표정을 보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이게 그렇게 고민할 일이야?"

"당신과 어울릴 때는 조금 그랬던 것도 같네요. 그렇지 않나요?"

언제나 그랬듯이 물흐르듯 부드럽게 말하는 설의 목소리를 들은 제헌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도 뻔뻔함에는 한계가 있어 차마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지 못하는 듯이 보였다. 대체 학관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학관의 야인이라는 말에 대꾸도 못하는 걸까? 

소지는 아까 있었던 싸움에서 제헌이 아주 요란을 떤 것을 떠올렸다. 잘 싸운다기 보다는 왠지 익숙해 보였는데, 학관에서도 저러고 지냈나?

"그거 학관에 있을 때 얘기가 아닌 것 같은데?"

제헌은 아예 말을 돌리기로 한 것 같았다. 설은 언제나 그랬듯 제헌의 수작에 그대로 휘말려주었다.

"당신이 생각한 게 맞아요."

그런데 저런 사람들이 같이 학관에 다닐 정도면 역시나 소지는 상상도 못할 정말로 대단한 집안 자제들이었나 본데……. 두 사람이 어쩌다 양민을 사칭하며 시중들 사람 하나 없이 이런 변두리를 다니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런 생각을 하며 힐끗 제헌을 본 소지는 예상과 다른 제헌의 낯빛에 흠칫 놀랐다. 

제헌이 그렇게 하고 있어도 소지가 보는 각도에선 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반면 흐트러진 천자락이 이마를 가리고 있었을 뿐 제헌의 얼굴은 훤히 드러났다. 

설을 올려다보는 제헌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있었다.

"난 너한테 따라오라고 한적 없어. 그냥 거기서 죽지 그랬어."

난데없이 독설을 쏘아낸 제헌이 설을 노려보더니 제 발로 가서 답싹 붙어있던 설의 가슴을 홱 밀쳐내곤 옷이 펄럭이도록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설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소지가 보기엔 담담한 기색이었다. 

소지는 이 둘의 관계가 자신이 봐온 것과는 다른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관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체도 소지의 생각과 상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쭉쭉 나가는 제헌과 뒤쳐지는 설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본 소지가 종종걸음으로 제헌을 따라갔다. 

너그럽지 않은 환경에서 부대끼며 권력이 어디에 있고 어디에 붙어야 유리한지 파악하는 소지의 눈치는 비상한 수준으로 연마되어있었다.

어느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설이 금방 다시 거리를 좁혔다.

소지는 제 짧은 다리 탓에 아주 빠르게 발을 놀려야 했다. 제헌은 기분 상한 티를 내려 억지로 빨리 걷다가 금방 또 지쳐서 느릿해졌다. 설만 여유로웠다.

상황은 일단락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지 신세가 편해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야화객잔을 피해 길을 빙 돌아가는 동안 약이 바짝 오른 제헌이 소지를 들들 볶아댔다.

“이율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아는 걸 말해 봐. 약방 어른이라고 한 그 사람 말이야.”

설이 슬슬 따라오며 제헌을 보았지만 제헌은 설에게 눈길조차 건네지 않았다. 설이 바로 옆에서 반 보정도 뒤에 붙어서 졸졸 따라가는데도 설이 존재조차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

제헌의 질문에 답해 소지가 알려준 얘기는 대부분 사람들 사이에 퍼진 소문이었다. 본래 이 지역 사람은 아니고 산 몇 개 너머에 있는 먼곳에서 부인과 같이 왔다더라. 딸이 하나 있는데 의술을 배우러 큰 의각에 가서 배우는 중이라더라. 

“딸이 있대? 몇 살인데?”

“정확한 나이까진 몰라요. 저보단 많고 공자님보단 어리겠죠.”

“그래. 참 도움이 되는구나.”

제헌이 가자미눈을 하고 보자 소지가 눈알을 굴리다 말했다.

“소하 누나보단 어릴 걸요?”

“그게 누군데?”

“정팔 아저씨 딸이요.”

제헌이 혀를 찼다.

“내가 그 사람 딸 나이를 어떻게 아냐? 게다가 죽었다며?”

“둘이 나이가 비슷했는데……. 소하 누나 그렇게 떠났을 때 제 나이쯤이었을 걸요. 지금 저보단 한두 살 더 많았나?”

떼떼거리던 제헌이 따지는 걸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괴짜라고만 생각했던 인간이 억울하게 처자식이 죽고 정신을 놓은 끝에 그리 됐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될 때마다 영 기분이 이상해질 수밖에 없었다. 안 들었으면 몰라도 들으면 마음이 쓰이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제헌도 괜히 입만 비죽거리고 말았다. 

그후로 제헌은 땀을 흘렸다느니 먼지가 묻었다느니 온갖 걸로 유난을 떨며 예민하게 굴더니만 객잔 건물에 도착하는 즉시 쉬어야겠다며 방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잠시 대기하고 있었더니 설이 문을 열고 끓인 물과 몸을 닦을 천을 가져오라며 소지의 손에 동전을 떨어뜨려 건넸다. 

소지가 시킨 것들을 가지고 방으로 가자 교양과 예의에 있어서는 길바닥의 강아지와 큰 차이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소지의 눈에도 퍽 방만한 폼으로 놀랍도록 대충 앉아있는 제헌을 볼 수 있었다. 일부러 불량해 보이는 자세를 연구라도 한 것 같은 꼬락서니였다.

"아아~ 약재 넣은 뜨끈한 욕탕에 몸 좀 담그면 원이 없겠네. 향유나 복숭아 꽃잎 띄우는 건 지금 신세에 바라지도 않지만 백단향 조금 넣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소지 입장에서는 대체 얼마나 무시무시한 호사를 누리고 싶다는 건지 짐작도 안 갔다. 

끓인 물 한 바가지도 돈을 내야 겨우 구하는 귀한 건데 끓인 물을 한가득 부은 욕탕으로 모자라 약재니 꽃잎이니……. 거의 은자로 목욕하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소지의 은자로 목욕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목욕할만큼은 커녕 은자 자체도 쥐어본 일 없었으니 정말로 남의 일이다.

할일을 끝마쳤으니 이만 물러나려는데 설이 나가는 소지를 손짓으로 부르더니 손을 내밀었다. 소지가 눈치 빠르게 얼른 손을 모아받쳐들자 설이 소지의 손에 동전을 떨어트려 주었다. 

"바로 옆방에서 기다리다가 한 시진 후에 끓인 물과 깨끗한 천을 가져오거라."

웬일로 선심인가 했다. 그냥 끓인 물을 구해오는 값이었다.

"옆방엔 다른 손님이 머무실 테니 제가 거기 있긴 힘들 텐데요?"

"지금은 아무도 없으니 거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의아했지만 일단 그 말대로 옆방으로 갔다. 끝쪽 방이라 옆방은 하나 뿐이었다. 

옆방 문은 잠겨있지도 않았지만 아주 빈방도 아니었다. 풀지 않은 짐이 놓여 있었는데 상인의 물건 같지는 않았다. 다만 설의 말대로 사람은 없었다.

한시진이나 여기서 가만히 있으라니 뭐하자는 건가 했지만 아마 중간에 심부름 시킬 일이라도 있으려나 싶었다. 잠깐 쪽잠이라도 잘까 생각하며 의자에 앉은 소지의 눈에 활짝 열린 창의 모습이 들어왔다.

창틀에 팔꿈치를 올리고 바깥 구경을 하는데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해도 지기 전인데 웬 서로 없인 죽고 못사는 놈들이 벌써부터 불이 붙어서 난리인지 모르겠노라며 소지도 심드렁했다. 객잔에 온 손님 중에 저런 놈들이 한둘만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그러다 문득 소지는 소리가 맨 끝방에서 들려오는 거라는 걸 깨달았다. 



씬은 없습니다. 그렇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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