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만남 (3)
1차 GL 자캐 CP 리엔세라 : 연재
한 소녀가 울고 있었다. 사방에서 비난이 날아 들어온다.
괴물! 괴물! 귀가 뾰족해! 눈 좀 봐, 이상해.
울고 있는 소녀, 리엔시에는 귀선유전으로 태어났다. 귀선유전이란 조상 중 이종족이 섞여 있어 후대에 뒤늦게 그 특성이 발현된 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리엔시에는 이종족의 외모를 타고났다. 엘프의 형질을 타고난 그녀는 뾰족한 귀에 날카롭게 찢어진 동공, 밀빛 머리카락과 독특한 분홍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부모는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종족의 외모를 타고났든 아니든 리엔시에는 그들의 자식이었다. 하지만 외부인들이 보기엔 아니었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것을 배척했다. 괴이한 아름다움이라며 리엔시에를 보고 수군댔다.
에구머니나, 저 뾰족한 귀 좀 봐. 눈이 분홍색이야. 동공은 왜 저리 쭉 찢어졌담. 저게 사람의 외모야?...
오늘도 리엔시에는 저택 밖으로 나갔다. 친구를 사귀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녀와 어울려주지 않았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평범하지 않은 외모에서 오는 거리감. 또래 아이들은 리엔시에를 멀리했다. 괴물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어린 소녀는 상처받은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애정이 필요했다. 친구에게서 얻을 수 있는 유대감을 원했다. 나도 사람인데. 나도 같은 사람인데...
그러나 오늘, 또 현실과 마주해버린 것이다. 라히안의 한 마디가 가슴 속에 날아와 깊게 박혔다. 유별남. ──그저 외로웠다. 동생이 있었지만 그는 너무 어렸다. 게다가, 동생은... 제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그렇게나 부러워하던 가문 특유의 흑발과 와인색 눈동자를 타고 난 남자아이. 그 애를 볼 때마다 마음속 부채감이 커져만 갔다. 나만 왜 이렇게 태어난 거야. 왜, 왜 나만. 렌은 다 가지고 태어났는데, 나는.
그리 생각하며 죄 없는 동생을 미워했더랬다. 하지만... 동생이 원해서 그렇게 태어난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따지자면 나도 내가 원해서 이렇게 태어난 것이 아니지만.
리엔시에는 성녀와의 만남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와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바닥에 돌아다니는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 들어 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세라엘도 어느새 밖으로 따라 나와 그런 그녀의 곁에 서서 물끄러미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새 여럿이서 손을 맞잡고 있는 그림이 흙바닥에 그려졌다. 상상 속 친구들 주위에 하트를 쓱쓱 그렸다. 삐뚤어진 하트를 보며 리엔시에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때, 누군가 바닥에 그려 놓은 그림을 짓밟았다. 그림이 망가졌다. 손을 맞잡은 사람들의 얼굴이 지워졌다. 리엔시에의 상상 속 친구들이 일그러졌다.
“...아.”
리엔시에는 제 그림을 밟고 선 이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야. 근데 너 참 이쁘다.”
“...?”
뜬금없는 말이었다. 리엔시에는 대뜸 건네진 말에 답할 문장을 찾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자기가 그린 그림을 밟고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건, 자신을 성녀라 칭했던 그 물이 빠진 듯 희멀건 색채의 소녀였다.
세라엘. 회갈색 장발에 어디서 한 번 구른 건지 낡아 뵈는 평복을 대충 입은, 갈색 샌들을 신은 제 또래의 소녀. 여자아이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역광을 등지고 어둡게 침잠했다. 짙은 헤이즐 색으로 변한 둥근 눈동자가 오후의 그림자를 집어삼킨 듯했다.
“그리고 말이야, 너 되게 이상하다. 귀가 뾰족하고 눈도 뾰족해. 넌 인간이 아니니? 저기 저 어디에 있다는 이종족이 너야?”
“......”
순수한 질문이었다. 상대방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리엔시에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 넣었다. 마음 어딘가에 금이 갔다.
역시나. 다들 똑같구나. 예외는 없었다. 리엔시에는 희미한 웃음을 유지하고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당겨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눈앞의 작은 소녀를 마주했다. 저보다 키가 조금 작았다. 희멀건 소녀가 조금 낮은 시선에서 자신을 올려다봤다.
“나는 인간이야.”
“......”
“나도 인간이야. 이렇게 생겼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익숙했다. 익숙한 무시였다. ──무시한다고 생각했는데. 옷자락을 팍팍 털던 소녀가 갑자기 씩 웃는 것이 아닌가.
“그래? 그렇구나. 반가워. 넌 이름이 뭐니?”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안 했던가. 아, 세라엘만 먼저 멋대로 성녀라 소개를 해왔었지. 리엔시에는 조금 망설이다 작은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리엔시에.”
이름을 들은 세라엘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입가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쉿, 소리를 냈다.
“알고 있겠지만 내 이름은 세라엘이야. 참, 오늘 여기서 날 본 건 비밀로 해줘. 멍청한 수녀들을 골리고 몰래 빠져나오느라 고생 좀 했거든.”
흙먼지를 털어내던 세라엘이 리엔시에의 손을 가져와 멋대로 악수를 청했다.마구 흔들리는 자신의 오른쪽 손을 보며 리엔시에는 생각했다. 그럼 자기 소개는 왜 한 거지. 정체를 들키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라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리엔시에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에구, 아까 털었는데 또 그냥 앉아버렸네. 세라엘이 깔깔 웃으며 리엔시에의 어깨에 기댔다. 바람같이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리엔시에는 토끼처럼 화들짝 놀라다 이내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세라엘을 흘긋흘긋 쳐다봤다.
참 조각같이 아름다운 아이다. 커다란 눈망울, 새침하게 모인 눈썹, 오똑한 코, 작고 붉은 입술…이런 애가 나한테 말을 먼저 걸어줬다. 내게 스스럼없이 대한다. 내 어깨에 기대며 웃는다. 가슴이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세라엘이라고. 꼭 자기처럼 이름도 예뻤다.
“너 성녀가 뭔지는 아니?”
“...성녀?”
“응. 사람들이 날 성녀라고 부르잖아. 양아버지가 나를 신전으로 보냈거든. 자기 친딸 대신 나를 팔아버린 거지.”
세라엘은 엄청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냈다. 리엔시에 또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마흔 아홉 번째 성녀이자 추락한 성녀로 불리는 후작가의 사생아. 역시 그게 너였구나.
하나 비천한 출신 따위 상관없었다. 리엔시에는 성녀라는 고귀하신 존재가 제게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 기뻤다.
“근데 성녀가 정확히 뭐야?”
“응? 글쎄. 나도 잘은 몰라. 신을 모시는 여성을 성녀라고 부른대. 그거 말고는 잘 몰라.”
“...”
아, 감격스러워라. 세라엘은 신을 모시는 존재임에도 인간이 아닌 것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신을 모시는 존재라서 그런지 너는 좀 다른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세라엘과 친구가 되고 싶었다.
“너는 뭐야?”
어떻게 친구가 되자고 할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 세라엘이 재차 말을 걸어왔다. 내가 뭐냐고?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리엔시에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나는 유레이토 공작 저하의 딸이야.”
“유레이토? 아~ 들어본 거 같아.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공작 가문 아니야? 너 대단한 가문 애였구나?”
세라엘이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열렬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운 한 편 기분이 좋았다. 더 자랑을 늘어놓아서 눈길을 자신에게만 가두고 싶었지만 입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생각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건 아니야... 나는 대단하지 않아. 친구도 없는 걸.”
“너 친구 없어? 외톨이야?”
“......”
자신이 뱉은 말에 당황할 새도 없이 파고든 질문은 강제적인 현실 직시. 리엔시에는 말문이 막혀 제 옆에 앉은 소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세라엘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그리고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리엔시에에게 세라엘이 방긋 웃으며 재잘댔다.
“그럼 내가 친구 해 줄까?”
상대방 쪽에서 먼저 튀어나오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얼떨결에 바로 대답해버렸다.
“친구... 해 줄 거야?”
“못 해 줄 게 있나? 내가 친구 해 주면 내가 네 첫 번째 친구가 되는 거 맞지?”
“응...”
“그거 좋다. 나 리엔시에의 첫 번째 친구 할래.”
그리 말하며 소녀가 환하게 웃었다. 그 순간 리엔시에는 직감했다.
아...첫사랑이었다. 저 순수하고 청명한 웃음에 반해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리라. 이 아이를 절대 놓치면 안 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세라엘은 리엔시에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친구가 될 것이다.
최초의 성녀였던 영혼이 사랑이라는 금기를 범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성녀가 아닌 혼혈 공작 영애. ──그러니 이 사랑은 죄가 되지 아니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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