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치적 파트너
차가운 밤바람이 막 돋아난 나뭇잎들 사이를 지나치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이제는 봄이라지만 여전히 밤이 되면 쌀쌀해지는 날씨 탓에 갑옷 안에 옷을 덧입고 나왔음에도 괜시리 뼈가 시리는 기분이 들었다.
보름에 가까운 달 덕분에 늦은 시간에도 길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등불 하나 들지 못 하는 처지에도 눈앞의 사람을 쉬이 식별할 수 있었고, 험한 숲을 무리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숲을 오갈 때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은 호재였으나 잠입을 위해서는 좋지 않은 조건에 걱정이 들었다. 발각되면 모두 끝장이 날 터인데.
반드시 이번 작전을 성공시켜야만 했다. 내 정치적 생명을 위해서라도. 억울하게 죽은 나의 언니과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몇 년에 걸쳐 준비한 확실한 작전이라 생각했음에도 혹시 모를 변수가 있으면 어쩌나 싶어 두근거리는 심장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흥분할수록 작전 속행이 어려워질 것을 알아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손에 땀이 차 젖은 손을 옷에 닦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는지 손바닥에는 손톱이 파고든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었다. 전장에서 이렇게 긴장한 적은 없었는데, 내 생각보다도 긴장이 심했나 싶어 실소가 흘렀다. 이보다 불리한 전장에도 겨우 열 다섯 남짓한 나이에 군을 이끌고 나선 나였는데.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이야 수도 없이 겪어보았고, 전쟁의 선봉에 위치한 경험도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심장이 떨리는 것은 분명 이 전투의 의미 때문이겠지. 혹시라도 겪을 패배가 나 한 명, 우리 군 정도의 사망에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이 나라의 미래와 흥망성쇠가 모두 달려있을지도 모를 전투는 언니가 죽었던 이후로 겪어본 적이 없으니.
“폐하, 괜찮으십니까?”
긴장감에 주먹만 쥐락펴락 하고 있다가,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막연한 두려움에 한껏 부풀었던 긴장감은 그 상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눈녹듯 사라졌다. 익숙한 갈색 머리칼과 녹색 눈. 나와 비슷한 높이의 시선과 은빛 갑옷.
“셀레스티아.”
한층 긴장이 풀린 목소리로 답하며 입가에 미소가 올랐다. 이 상황에서 내가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의 얼굴을 거쳐 뒤쪽에 있는 스무 명의 기사들을 향해 시선을 옮기기가 무섭게 쿵쾅대던 심장이 진정되었다. 황실의 상징인 푸른색 망토에 마찬가지로 황실의 상징인 사자가 새겨진 검집을 차고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모습은 수백, 수천 번도 더 보아온 광경이기에 나를 안정시키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이었다. 그래, 내게는 이들이 있었다. 황권이 휘청이는 와중에도 오직 황실에게만 그 충성을 바치던 우직한 이들이. 나, 그리고 셀레스티아 루멜디온의 명령에 따라 누구보다 용맹하게 전장에 뛰어들 이들이.
셀레스티아 루멜디온. 내 사병이나 다름없는 황실 기사단의 기사단장이자 황궁의 경비를 담당하는 근위대장. 어릴 적, 내가 황제가 되리란 생각을 조금도 하지 못 했을 때부터 나와 친분을 쌓아온 충성스러운 기사. 그가 도운 덕에 어머니는 조금이나마 삶을 이어가실 수 있었고, 나는 황제가 되기 위해 준비할 시간을 벌었다. 그와 그가 이끄는 기사단이 내 뒤를 받쳐주는 이상 이 작전은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오늘이야말로 수없이 계획했던 대로 공작의 목을 치고 귀족파에게 반기를 들 신호탄을 쏘아올릴 것이었다.
“이제 괜찮아졌다. 아델하이트와 합류하도록 하지.”
한층 확신에 찬 목소리로 명령을 내뱉었다. 아델하이트의 이름을 내뱉을 때 나도 모르게 멈칫했지만, 애써 다시 피어오르려는 불안을 내리누르고 자신감 있는 미소를 드러내보였다. 내가 흔들려서는 안 될 일이었다. 제국의 태양. 황실의 주인. 그 하나뿐인 지배자인 내가 확신이 없는 모습을 보인다면 군에 좋은 영향이 갈 리가 만무했다. 다행히도 군을 이끌어 본 경험은 차고 넘쳤고, 나의 기사들은 짧게 고개를 끄덕인 것으로 답을 대신한 후 나를 따라 말에 올라 진군했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숲길을 따라 짧게 전진하자, 약속했던 곳에 늘씬한 인영이 나무에 기대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정체는 분명히,
“폐하를 뵙습니다.”
아델하이트 바이에른. 약속된 대로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의 모습은 분명 호재일 텐데도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모습에 숨이 턱 막혀왔다. 하지만 그 감정은 애써 속으로만 삼켰다. 당장은, 당장은 아군이었으니까.
“아델하이트. 기다리고 있었군.”
말에서 내리며 고개만 까딱여 그 인사를 받았다. 분명 전장에 나서는데도 갑옷도 아닌 정복 차림에, 눈을 접어 의뭉스럽게 웃는 표정은 속내를 알 수가 없어 꺼림직하기만 했다. 오늘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는 자각은 있는 건가? 라는 의문을 내뱉고 싶었지만 애써 삼켰다. 이 자리를 공석이라 지칭하기에는 어폐가 있겠지만, 그래도 나라를 위해 모인 자리이니 공석과 다름없이 대해줄 의무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호칭부터 정정하기로 했다.
“이쪽은 바이에른 공녀다. 이번 작전에는 나서지 않겠지만… 우리가 죽일 공작의 자리를 이어받을 사람이니 오늘만큼은 나와 다름없다 생각하고 지켜내도록.”
생글거리며 웃는 얼굴을 더 이상은 무표정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어 괜히 셀레스티아와 그의 뒤에 위치한 기사단을 향해 몸을 돌려 소개했다. 아델하이트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극비 중에서도 극비였으니, 셀레스티아를 제외한다면 이 자리에서 그를 직접 본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다행히도 기사단은 별 반응 없이 복명,이라는 짧은 한 마디와 함께 아델하이트를 향해 몸을 숙였다. 그 모습에 괜히 나와 다름없게 지키라 말했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제 와 그 말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차오르는 답답함에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오늘까지다. 내 기사들에게 그를 지키라 명령할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아델하이트가 두려웠다. 어렸을 때, 언니의 정치적 파트너가 될 존재로서 황궁에 방문했던 그 날부터 아델하이트의 묘한 위압감과 카리스마 앞에 의연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그 때는 내가 황제가 될 일 따위 없다 생각하여 무시할 수가 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타인의 감정을 읽는 데에 기민하면서도 제 감정은 가면을 쓴 듯이 가려버리고, 화술마저 뛰어난 아델하이트의 앞에서는 내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느낌이 들어 경계하게 되었다. 내 편이 되어준다면,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만 있다면 이보다 뛰어난 인재는 없겠지만 아델하이트가 가진 권력에 대한 욕심을 알기 때문에 도무지 신뢰를 보낼 수가 없었다.
“폐하께서 공작가의 일에 친히 참여하시는 것을 넘어 제 안위를 이리도 염려해 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비록 무력이 없는 나약한 몸이지만 폐하의 기사분들께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따르겠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말해버린다면 내가 그를 한없이 아끼고 걱정하는 모양새가 되지 않는가. 앞으로도 나의 기사들은 내가 아델하이트를 친애한다 여기고 지켜주어야 할 존재처럼 대하겠지. 갑옷도 입지 않고 온 것까지도 보호해야 할 존재로 보이려는 전략이었나 하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애초에 말을 실수한 내 잘못도 있지만, 그 틈을 귀신같이 파악하고 파고드는 모습에 진저리가 쳐졌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상황을 잘 이용할 수가 있는지. 일그러진 얼굴을 되돌릴 자신이 없어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차라리 내게 저 재능이 있었다면 이렇게 고생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괜히 하늘이 원망스러워 짧게 한숨을 뱉었다.
“그래도 폐하께서 직접 계획하시고 이끄시는 작전이니 마음이 놓입니다. 경들께서도 분명 그러하시겠죠?”
시각을 가리자 예민해진 청력으로 웃음기가 만연한 아델하이트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비웃는 것이 아닌 다정한 웃음, 그리고 들킬까 염려하여 낮춘 목소리에도 느껴지는 카리스마와 통제력. 처음 보는 이들의 사기 증진까지 고려하는 능력에 질투를 느낄 새도 없이 눈이 번쩍 뜨이며 불쾌감이 파고들었다. 저가 뭐길래 내 기사들을 사병처럼 편히 대하는지. 아직은 공작도 아니고, 고작 공녀 신분에. 셀레스티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 화답하는 것까지 눈에 들어오자 도저히 그 불쾌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셀레스티아는 내 동료인데.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하려 하다니. 어쩌면 괜한 자격지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늘의 작전은 아델하이트의 아이디어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애써 내게로 공적을 돌리는 모습이 나를 무시하는 것만 같아 견디기 어려웠다.
“그만. 공작저와의 거리가 가까우니 목소리를 낮추도록.”
결국 입 밖으로 짧은 명령을 내뱉었다. 본심은 들킬까 걱정되는 것보다는 아델하이트가 내 기사들과 시시덕거리는 것이 불쾌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작전이 실패할까 긴장되는 것도 있었지만, 아델하이트가 주는 위기감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조금 있으면 바이에른 가의 기사들이 교대할 시간이니, 근처로 이동하도록 하지. 루멜디온 경, 기사들을 이끌고 따라오도록. 바이에른 공녀는 내 옆에서 이동하지.”
당장 출발할 필요까지는 없었음에도 괜히 상황의 통제권을 가져오려 기사들을 재촉했다. 전장으로 이동하면 전투 경험이 없는 아델하이트는 힘을 잃을 거라는 유치한 마음에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린애들이나 할 법한 발상이었지만, 도무지 다른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정면에서 아델하이트 바이에른이라는 여자와 심리전을 거는 것은 분명 자충수였다. 내 명대로 즉시 말에 오르는 기사들을 보자 저열한 승리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 수치스러웠지만, 애써 이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라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아델하이트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눈치채지 못 한 것일까 하며 잠시 희망을 품었지만, 곧 다른 이유가 떠올랐다. 눈치가 빠른 아델하이트가 내 속내를 읽어내지 못 했다는 것보다는 더욱 설득력이 있는 이유가. 곧 벌어질 전투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 했을 뿐일 것이었다. 오늘의 작전의 초안을 그린 것은 아델하이트임에도 그가 내게로 공을 돌린 것과 같은 이유였다. 내가 그를 필요로 하는 만큼 그도 나를 필요로 하고 있으니. 오늘의 작전은 약속된 동맹이었다. 아델하이트는 빼앗긴 공작위를 되찾고자 했고, 나는 바이에른 공작가의 힘이 필요했다.
바이에른 공작가. 제국의 가문들 중 가장 드넓은 영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황실 다음가는 규모의 기사단을 소유하고 있는 곳. 공작위를 가진 이는 으레 ‘대공’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다른 공작들과도 그 권세와 지위에서 차별성을 가졌고 황제가 자리를 비울 때면 일부 분야에서 그 권한을 대신할 수 있을 정도의 특혜까지 가졌었다. 바이에른 공작위를 가진 자는 대대로 황제파 세력의 수장 노릇을 해 왔으며 황가와 두터운 친분을 유지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대대로 군사력과 전투력에서 두각을 나타낸 바이에른 가의 공작들은 황제의 정치적 파트너이자 공공연한 제국의 2인자로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에서 황제를 보좌해 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영향력은 아델하이트의 어머니, 노아 바이에른이 살아 있던 시절에나 해당되던 이야기였다. 4년 전, 노아 바이에른의 동생인 아리아나 바이에른이 귀족파와 손을 잡고 공작위를 무력으로 차지했고 겨우 살아남은 아델하이트는 황궁으로 몸을 피신했다. 그리고 그의 생존 사실 등 모든 사실을 은폐하고, 가짜 시신까지 구해 완벽하게 죽은 사람이 되고 나서야 욕심 많은 이모의 끈질긴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델하이트는 생존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소문이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 감옥과도 같은 비밀 공간에서 지내며 이동할 때면 사용인들의 눈을 피해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서도 기어이 황궁 서고와 도서관 등을 오가며 높은 곳으로 발돋움할 준비를 마쳐내었다. 나는 포기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 대단하다 느꼈지만, 동시에 두려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만 백성의 주인이자 제국을 비추는 태양이어야 할 내가 그의 앞에서는 막 정치에 뛰어든 풋내기 내지는 이끌어주어야 할 동생이 되었으니까. 고작 몇 걸음 되지도 않는 방에서 글로만 정세를 배운 사람이면서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는지 가늠도 되지 않을 때면 뒤처지는 기분에 자격지심마저 느껴졌다. 본래 대공은 엄한 규율의 기사단을 기반으로 무력으로써 황제를 보좌하면 황제는 뛰어난 화술과 정치적 능력으로 국정을 이끌어가기 마련이었는데, 왜 이번 대에서는 그 반대였는지.
대관식을 마치고 내가 황위에 오른 이후, 첫 의회를 마치고 온 날이었다. 귀족파 쪽으로 돌아선 아리아나 바이에른과 기세등등한 기존 귀족파 세력의 텃세에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내 방에 도착하자 아델하이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 마냥, 그리고 그 방의 원래 주인인 마냥 여유로운 모습으로 나를 맞았다. 들키면 어쩌려고 이곳까지 나왔냐며 돌려보내기도 전에 그는 내게 제안했다. 의회에서 안건을 처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자신에게 공작위를 달라고. 그렇다면 다시 바이에른 가를 황제파로 돌려 나를 보좌하겠다고.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정치놀음에는 젬병인 내가 홀로 귀족파의 압박을 버티기에는 어려웠으니까. 썩은 동앗줄이라도 잡아야만 했다.
아델하이트는 공작의 성향, 공작저의 구조 등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제공했다. 나는 셀레스티아와 함께 기사들 중에서도 입이 무거운 자들을 추려 별동대를 꾸릴 준비를 했고, 기사들의 훈련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황실의 군사력을 증강하려 노력했다. 두터운 바이에른 가의 호위를 뚫기 위한 비책은 아델하이트가 낸 것이었다. 의회를 최대한 자주 소집하라는 것. 하지만 아리아나 바이에른이 수도에 상주할 정도로 자주가 아닌, 영지와 수도를 쉴새없이 오가야 할 정도로만 자주 소집하라 말했다. 쓸 데 없이 의회에서 시간을 끌고 안건을 늘리며 사소한 일로도 의회를 소집하고, 그렇게 모인 의회에서도 별 진전이 없다면 제 무력에 자신이 넘치지만 정치 싸움은 피곤해하는 아리아나 바이에른의 성향상 피로감이 늘어나며 갈수록 무장과 호위가 가벼워지리라 예측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기사단의 준비가 완성되었을 때부터 몇 달에 걸쳐 온갖 안건을 빌미로 의회를 소집했고, 그렇게 오늘, 아리아나 바이에른은 의회에만 짧게 참석하고 돌아갈 것이라며 수도의 별장에 소수의 인원만을 데리고 도착하였다.
“폐하. 공작저의 불이 꺼졌습니다.”
공작저 앞에서 생각에 잠겨있던 나를 셀레스티아가 다시 현실로 불러내었다.
“…그래. 기사단을 준비시켜야겠군.”
긴장감에 굳은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답했다. 아무리 생각해 봤자 결국 지금의 답은 하나였으니까. 애초부터 누군가를 말로 이겨먹고, 심리를 읽어 판을 까는 것은 내 장기가 아니었다. 내가 자신이 있는 분야는 따로 있었다. 상대가 무슨 판을 깔아두었든, 어떤 함정을 준비했든 압도적인 무력으로 모든 작전을 무력화시키는 것. 마치 지금처럼.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기에 소수 정예로 움직일 수밖에 없어 상대적으로 불리하기는 하나, 아무리 바이에른 공작가의 사병이라 해도 겁을 집어먹을 내가 아니었다. 오늘 밤만 지나면 아리아나 바이에른은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될 것이었고, 아델하이트 바이에른은… 아마도, 아마도 내 편으로 돌아설 것이었다. 아델하이트가 나를 배신하고 바이에른 가의 권세로 새로운 파벌을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충분했다. 아델하이트의 속내를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어 여전히 불안하기는 했지만, 그렇다 하여 아리아나를 지지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하나뿐인 길로 움직여야만 했다. 그렇게 내 생애 최고의 도박을 시작하게 되었다.
“에블린 경. 기사 다섯을 이끌고 공작의 방이 있는 우측으로 돌아 공작저 내부가 혼란스러워질 때까지 대기하도록. 목표는 공작의 목이다. 내가 도착할 때까지 공작이 도망치지 못 하도록 잡아두기만 하도록. 다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즉결 처분도 허용한다.”
“복명.”
“나머지 인원 중 절반은 나를 따르며 길을 뚫고, 다른 절반은 셀레스티아와 함께 뒤를 치는 이들이 없는지 살피며 엄호한다. 기습조가 자리를 잡으면 진입하지.”
“복명.”
“…그리고.”
수십 번도 더 머릿속에서 되뇌인 말들은 물 흐르듯 쉽게 흘러나왔다. 이제 아델하이트에게 기사 하나를 호위 삼아 붙여주고, 모든 일이 끝나면 상황 정리를 위해 진입하라 명령하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아델하이트에게 명령을 내리려 고개를 돌린 순간, 그 녹색 눈빛을 마주하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두운 밤임에도 보름달 빛을 받아 그의 외안경이 반짝였다. 그나마 다른 장신구들은 빼두고 온 것 같지만, 정말 싸움 한 번 해 보지 않은 아가씨같은 모습에 괜히 다시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것을 차마 지적할 수가 없었다. 군의 사기 문제는 제쳐두고도,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다는 듯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웃는 모습이 섬뜩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라는 불안감에 나는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은 아델하이트에게 있어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폐하. 허락만 해주신다면 기습조에 자원하고 싶습니다.”
“기습…조? 네가??”
순간 놀라 내뱉은 말에 헉, 하고 숨을 내뱉었다. 네가…라니. 적절치 않은 언행이었다. 순간 눈을 더 가늘게 뜬 아델하이트도 그 점을 지적하려 한 듯 입을 열었다.
“허, 허락하도록 하지.”
그 모습에 괜히 대화를 급히 끝내고자 말을 끊어버리듯 그의 참여를 허락했다. 말을 내뱉자마자 그러지 말아야 했는데,라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아델하이트의 미심쩍어보이는 표정은 온화한 미소로 바뀐 이후였다.
“폐하의 안배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된다면, 번복할 수도 없지 않은가. 답답한 마음에 괜한 한숨만 내뱉었다. 대체 기습조에는 왜 껴달라고 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내 시야에서 벗어나 무언가를 꾸민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아리아나는 아델하이트를 보자마자 죽이려 들 텐데, 그 증오스러운 이모와 굳이 마주하려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폐하. 기습조를 출발시키겠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어서…”
셀레스티아의 재촉에 결국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상 시간을 지체하는 것이 더 위험할 것이었으니. 숲속에 숨어있는 지도 시간이 꽤 지났고, 이제는 언제 발각될 지 모른다는 부담을 끌어안고 있을 수 없었다. 기습조에 배정된 이들이 하나씩 말에 올랐다. 그리고 그건 아델하이트도 마찬가지였다. 밖에 나갈 기회조차 없어 어릴 적에나 타 보았다는 말에 오르려 끙끙대는 모습에, 엉성하게 고삐를 쥔 손아귀에 속이 답답하여 머리만 헝클어뜨렸다. 믿는 게 맞을까. 사람의 됨됨이를 보아도, 기마술을 보아도 도저히 믿어야겠다는 확신이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이 기회에 바이에른 가를 완전히 몰락시키고 세력을 와해시킬까 하는 고민이 잠시 들었지만 쓸 데 없는 짓이었다. 그러면 지금까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어차피 귀족파에게 혼자 맞서야 하는 것은 동일한 데다, 의회에서 가장 거슬리는 자는 아리아나가 아니었으니까.
“걱정되십니까?”
아델하이트에게 고정된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셀레스티아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그제야 너무 뚫어지게 바라보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다른 기사들까지 눈치챈 것은 아니겠지.
“잘 할 겁니다. 에블린 경이 몸집은 작아도 저희 기사단에서는 가장 날래잖습니까. 그를 믿어주시지요.”
아. 예상치 못 한 말에 실소가 터졌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던가? 겨우 손을 잡은 믿지 못할 동맹이 아닌, 나의 기사를 위해 걱정하는 것이 당연했을까. 어쩌면 내가 아델하이트를 과하게 의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괜히 내 꼴이 우스워졌다.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 말도록. 나는 내 기사들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는다.”
어쨌든 웃어버려서일까, 한층 긴장이 풀려 가벼워진 마음으로 셀레스티아를 돌아보며 답했다. 내가 정말로 아델하이트를 필요 이상으로 의식하고 있었다면… 그리고 그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내게 도움이 되려 전투에 나서겠다 했다면 이 자리에서 모든 사실이 밝혀질 터였다. 괜히 증거도 없는 일로 의심할 필요는 없으니까.
“기습조가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기사들 중 한 명이 짧게 보고를 올렸다. 그리고 그 보고는 우리의 진입을 알리는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출발하자는 나의 짧은 명령에 모두들 말에 올라 도열했고, 한 몸처럼 빠르게 공작저로 돌진했다.
저택을 지키는 기사들은 과연 만만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기습에도 즉각 대응하며 나의 기사들과 검을 맞댔다. 아무리 소수 인원이더라도 과연 바이에른 공작가,라는 말이 나오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 패배할 내가 아니었다. 말 위에서 싸우는 우리는 공작가 기사들의 공격이 닿지 않는 곳에서 달릴 수 있었고, 수십 번도 넘게 이와 같은 상황을 예상하여 훈련한 나의 기사들은 주저 없이 검을 휘둘렀다.
“사망자 없이 제압하도록!”
수도 없이 겪었던 상황 속에 들어서자 익숙한 고양감과 여유가 돌아왔다. 혹시나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내리지 않으려 했던 명령까지 기분에 휩쓸려 입 밖으로 내뱉을 정도로. 내 움직임에 맞추어 한 몸처럼 달리는 말, 귓가를 스치는 바람, 몸에 익은 검술. 드디어 내가 있어야 할 곳에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바이에른 공작가라 하더라도 사망자 하나 없이 승리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았다. 제국을 샅샅이 뒤져도 나, 알리스테어 트리폴리움을 이길 수 있는 기사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폐하, 진입하시지요! 엄호하겠습니다!”
셀레스티아의 외침에 주변을 둘러보자 상황이 거의 정리된 이후였다. 이젠 내가 병력의 절반을 데려가도 괜찮을 듯 했다. 분위기에 너무 휩쓸려 파악이 늦었구나,라는 생각에 멋쩍게 웃었다. 결국 이 싸움은 아리아나 바이에른을 잡아야 끝이 날 테고, 가주급 작위를 가진 자를 재판 없이 처분하는 것은 황제가 하더라도 눈치가 보일 법한 일이었으니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다. 내가 있어도 눈치가 보일 정도인데, 나의 기사가 멋대로 처분해버린다면 더한 책임을 물어야 할 테니까.
“부탁하겠다.”
셀레스티아에게 짧은 답을 남기고 저택의 문으로 돌진했다. 열리지 않는 문을 억지로 부수듯 열고 그 안으로 진입했다. 시간을 끌면 무슨 변수가 생길 지 몰랐다. 근방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더 몰려올지도 몰랐고, 다른 귀족파 가문들이 눈치채고 지원을 보낼지도 몰랐다. 그러니 서둘러야 했다.
공작저 내부로 진입한 우리를 맞이한 것은 아직도 그 수가 많은 바이에른 가의 기사들이었다.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우리에게 검을 겨누었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해 보라면 해 보라지. 그래도 오늘 죽을 자의 이름이 아리아나 바이에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제압하라!!”
내 외침과 함께 황실의 기사단은 일제히 앞으로 돌진했다. 수장조차 없어 단합력이 떨어지는 기사들 따위는 우리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노아 바이에른이 살아있을 적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하는 마음에 안타까움마저 들 정도였다. 급소가 아닌 부분에 칼을 찔러넣어 공작저 기사들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고, 싸울 의지가 없는 사용인들은 물러나게 하며 빠르게 전진했다. 승리 따위는 코앞이라 여겼다.
그런데 싸우던 중, 갑자기 무언가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옅게 들렸다. 잘못 들었겠지, 라며 넘기려 하기에는 지나치게 불안했다. 하필 그 소리가 들린 곳이 공작의 침실이었으니. 공작저의 내부 구조는 꿰고 있기 때문에 착각일 리도 없었다. 오늘을 위해 사용인들이나 이용하는 통로들까지 모든 길을 외워두었는데.
지금쯤이면 기습조가 침입했을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그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창문이 깨진 소리라면 전투 소리가 들려야 할 텐데 이상하게 조용했다. 무언가에 당한 것일까? 입구에서 시간이 끌리는 동안 처치당했나? 아니면 아델하이트에게 무슨 문제라도? 어쩐지 위기 상황이라는 직감 탓에 이를 악물었다.
“나는 공작의 방으로 가겠다. 정리되면 따라오도록!”
짧은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고민이 스쳐갔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오늘 내가 쓰러뜨려야 하는 킹은 아리아나 바이에른이었다. 킹을 놓친다면 그 어떤 승리도 의미가 없었다. 내가 직접 아리아나 바이에른의 목을 치는 것을 보여야만 했다.
기사들에게 소리쳐 명령을 내리고는 말을 버리고 계단을 뛰어올랐다. 이미 공작저의 기사들은 전부 입구쪽으로 집결한 것인지 나를 막는 자도 없었다. 뚫린 길이나 다름없는 복도를 지나 마침내 공작의 침실이 있는 층에 도착했을 때였다.
“이모님께서는 정말 저를 그리도 모르십니까!!”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큰 외침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내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아델하이트의 목소리였으니. 적어도 아델하이트는 아직 살아있다는 안도감과 함께 불안함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쥐어짜내는 듯한 목소리. 지친 듯 거칠게 섞인 숨소리. 비명과도 같은 소리로 말을 끝맺는 것까지 하나같이 좋지 못 한 신호뿐이었다.
무슨 대화를 하기에 저런 상황이 된 걸까. 아리아나가 아델하이트에게 대화를 청했을 리는 없을 텐데, 아델하이트 홀로 시간이라도 끌어보려 발악하는 것일까? 공작의 방을 향해 다시 뛰어가며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뇌리를 스쳤다. 아델하이트의 물음에 답하는 아리아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거리가 멀고 방문도 닫혀 있는 데다 아델하이트처럼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닌지라 무어라 말하는지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상황은 알고 진입하는 게 낫겠지. 그런 생각에 공작의 방 앞에 당도하고도 잠시 숨을 고르며 문고리만을 잡고 대기했다. 아리아나가 다시 입을 열든, 아델하이트가 무어라 말하든 다음 말을 듣고 진입할 생각이었다. 둘이 대화라도 하고 있다면 나를 신경쓸 여유는 적을 테니까.
그러나 이 다음에 들려오는 아델하이트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문을 벌컥 열 수밖에 없었다.
“제가… 제가, 고작… 그깟 공작위 때문에 이런 짓을 벌인 것 같습니까?”
그깟 공작위. 그런 발언은 태어나서 들어 본 적이 없었고 심지어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그 말이 아델하이트의 입에서 나올 줄이야. 바이에른 공작가의 권력은 황족이라 해도 무시할 수 없었고, 아델하이트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게다가 아델하이트는 지금까지 바로 그 공작위를 얻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 아니던가? 조금 전 그의 외침은 내 귀를 의심해야 할 정도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의 목표가 사실은 공작위가 아니었다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깟 공작위’라는 말을 할 정도라면 그의 목표는 공작위 이상의 무엇이라는 뜻이고, 이 나라에 바이에른 공작위보다 높은 자리는 황좌뿐인데.
문을 열자마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피를 뒤집어쓴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델하이트와 그런 아델하이트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아리아나였다. 머리에서 흐르는 피 하며, 차려입은 정복 곳곳이 베이거나 찔린 자국으로 가득한 것이 죽기 직전이나 다름없는 모습에 다급히 뛰어가 아리아나의 검을 쳐내려 있지만, 나보다 빠른 자들이 있었다. 기습조에 배정했던 기사들이 깨진 창문으로부터 빠르게 뛰어들어 아리아나와 아델하이트의 사이를 가로막고 아리아나를 제압했다. 그제야 상황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에블린 경. 이게 무슨 일이지?”
가장 앞서 뛰어들어 아리아나의 검을 막고 아델하이트의 앞에 선 기사에게 상황 보고를 요구했다. 분명 아델하이트를 지키라 명령했을 텐데 그가 어째서 홀로 공작의 방에서 죽을 위기를 겪고 있었는지 쉬이 납득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죽었더라면…
“죄송합니다. 공작의 방으로 진입하려는 순간 아래에서 습격이 있었습니다. 공녀님을 보호하려 했지만, 이미 홀로 들어가셨던 터라…”
에블린 경이 아델하이트를 향해 살짝 곁눈질을 하는 모습에 괜히 화가 치밀어올랐다. 누구에게 화가 났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멋대로 진입한 아델하이트에게? 따라가 지키지 않은 기사들에게? 아니면 기습조가 들킬 위험을 미리 고려하지 않은 나 자신에게? 자칫하면 아델하이트가 사망하거나 최악의 상황에는 기습조가 전멸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분노를 삭히려 심호흡했다.
“사망자는?”
“없습니다. 두 명이 중상을 입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일부 풀린 탓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아무도 죽지 않았으니 괜찮다며 나 스스로를 다독였다. 너무 성급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오늘은 괜찮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우선은 일이 잘 풀렸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폐하. 저는 이모님께서 저를 죽이시지 못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거든요.”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몸을 일으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아델하이트가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금방 숨이 넘어갈 듯이 헐떡였으면서, 그새 여유를 되찾았는지 기사들이 무릎꿇린 아리아나를 미소 띈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가 죽었다는 말을 진실로 믿고 계셨는데, 제가 갑자기 나타난다면 당황하여 검은 겨누어도 정말 죽이실 리는 없잖습니까? 당연히 저를 숨겨준 이가 누구인지, 그리고 이런 습격을 지시한 이가 누구인지 캐묻기 위해 살려두어야지요.”
그러면서 빙그레 웃는 아델하이트의 모습은 위화감이 가득하기 그지없었다. 거친 숨소리 하나 없이, 그리고 조금의 아픈 기색도 없이 조곤조곤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는 것이 마치 오늘 밤 보아온 모든 것이 하나의 가면이자 잘 꾸며진 연극인 것만 같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거짓이었을까, 하는 마음에 불편한 긴장감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혹시 내가 밖에서 그의 말을 엿들었다는 사실을 눈치챈 걸까? 그저 시간을 끌었을 뿐이며 그때 한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는 듯이 꾸며내려는 걸까?
덜컥 겁이 나 차라리 지금 아델하이트의 목을 쳐야 하나, 하는 고민이 들었다. 아리아나는 황권을 압박했을 뿐이지 황제가 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델하이트가 황좌를 노리고 있다면? 내가 그를 살려두는 것이 정말 옳은 선택일까?
“그렇다면… 저 아델하이트 바이에른. 정식으로 황제 폐하께 청을 올리는 바입니다.”
아, 늦었다.
고민으로 가득해 한 발짝도 떼지 못 하던 동안 아델하이트에게 선공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번에도 또다시… 나는 그가 움직일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무력하게 그가 계획한 판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내 스스로가 한심해 이를 악물었다. 고민할 시간에 먼저 나서든지 했어야지. 이렇게 된다면 아델하이트가 계획한 바를 이루어주어야 하잖나! 예의바르게 내 앞에 무릎을 꿇으며 올려다보는 시선이 불편해 미칠 것만 같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어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녀석의 정치적 재능은,언제 무슨 말과 어떤 제스처를 사용해 군중을 사로잡아야 하는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능력은 필시 악마가 내어준 것이리라.
“제 어머니이자 선대 공작인 노아 바이에른을 무참히 죽이고 공작위를 힘으로 취한 데다, 뻔뻔스레 황권마저 위협하려 한 반역자… 아리아나 바이에른의 처형을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여느 재판 요청에나 쓰일 법한 단어와 문장의 구성이었다. 마치 이 공간이 재판정이며, 그는 재판을 요구한 원고인 것 마냥. 그가 이 말을 하기 전에도 그랬지만, 이제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를 주목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가 말을 마치자 모든 시선은 곧바로 나를 향했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아리아나 바이에른.”
느지막하게 공작의 이름을 호명했다. 목소리가 조금 떨린 듯 해 아차 싶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어 헛기침을 하고 힘을 실어 재차 입을 열었다.
“아리아나 바이에른… 선황 폐하와 노아 바이에른은 네게 수많은 은혜를 베풀었지만, 그걸 배신한 자는 다름 아닌 너다. 그러니 내게 주어진 황제의 권한으로 즉결 심판하겠다.”
정석적인 재판의 판결로 쓰일 법한 문장은 아니었을 터다. 하지만 그런 절차는 배운 적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미 피가 잔뜩 묻은 검을 다시 뽑아들고,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해왔던 대로… 눈앞에 있는 적의 목을 치는 것 뿐이었다.
“…바이에른 공작.”
아리아나 바이에른의 손에서 대공의 권위를 상징하는 반지를 빼내며 이제까지와는 다른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를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했다. 내 의중을 파악하지 못 할 아델하이트가 아니었으니까.
“예, 폐하.”
역시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부드러운 목소리가 화답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는 녹색 눈동자가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감으며 생긋 웃는 모습은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제 와 아델하이트까지 참수하기에는 그새 공작저의 사용인들이 몰려 보는 눈도 많았고 내 행동을 정당화할 명분이 없었다.
“일어나도록.”
내 말 한 마디에 아델하이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혹시 모두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끄나 싶을 정도로 우아하고 기품이 넘쳤다. 방에는 아리아나 바이에른이 급히 켠 듯 보이는 촛대 외에는 조명이 없었지만, 촛불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선 아델하이트의 얼굴은 빛을 받아 환했고 황금빛 머리카락 역시 반짝거렸다. 항상 황제보다는 장군, 기사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 내게는 질투를 억눌러야만 하는 모습이었다.
“…앞으로 공작가를 잘 부탁하겠네.”
반지를 건네며 해야 하는 말을 억지로 끄집어 전달했다. 목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으려 했지만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끝없이 되뇌이며 말을 마쳤다.
바이에른 가에는 내 편이 되어줄 가주가 필요했고, 아리아나 바이에른이 가주가 되며 방계를 전부 숙청한 탓에 당장 가주직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은 아델하이트뿐이었다. 물론, 물론… 황좌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것은 내 착각일지도 몰랐다. 언니가 죽은 일부터 시작해 악재만 겹치니 괜히 좋지 않은 쪽으로 생각이 미치는 것일지고 몰랐다. 나 이상으로 고귀함과 품격이 흘러넘치는 모습도 거슬렸지만… 그래, 그냥 내 자격지심일 뿐이잖나. 어차피 그를 제거할 수 없으니 믿기로 결심하며 수없이 많은 이유를 가져다 대었다.
아델하이트는 내가 건넨 반지를 받아 손가락에 끼웠다. 처음에는 노아 바이에른, 그리고 아리아나 바이에른처럼 왼손의 소지에 끼우더니 영 맞지 않는지 검지로 옮겼다. 그리고,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조용한 공간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직감했다. 아무리 많은 이유를 가져다 대고, 또 아무리 내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더라도 나는 절대 이 여자를 믿지 못 할 것이라고.
4년 전, 제국에는 역대 최대 규모의 반란이 일어났다.
주동자는 두 명. 아리아나 바이에른과 리산드라 엘레노어.
당시 아리아나 바이에른은 대공 지위를 가지고 있던 노아 바이에른의 동생으로, 언니에게 가주 자리를 빼앗긴 것에 대한 불만을 쌓아두고 있었다. 노아 바이에른은 지금까지의 가주들과는 다르게 무력이 약했으며 압도적인 군사력 대신 모략과 언변으로 어머니를 보조하였는데, 아리아나 바이에른은 이를 걸고 넘어지며 노아 바이에른이 강대한 바이에른 가의 가주로서의 자격도, 황제파의 수장으로서의 자격도 없다는 말을 떠벌렸다. 실제로는 그저 권력욕에 눈이 멀었을 뿐이면서. 노아 바이에른도, 그를 빼닮은 아델하이트 바이에른도 모두 없애버리고 진정 바이에른의 이름에 걸맞는 가주를 새로 세우자며 떠들어댔다.
당연하지만 그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자는 없었다. 어머니, 그리고 노아 바이에른은 오만무도한 아리아나 바이에른의 행동을 두고 볼 생각이 없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고립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자가 있었으니, 엘레노어 공작가의 가주였던 리산드라 엘레노어였다.
바이에른 공작가가 대대로 귀족들 중 황제에게 가까운 파벌, 일명 ‘황제파’의 수장을 맡아왔다면 엘레노어 공작가는 반대로 황권보다는 귀족들의 권세를 우선시하는 ‘귀족파’를 이끌어왔다. 제국에 단 둘 뿐인 공작 가문인 만큼 두 가문은 자연스레 대립하게 되었고, 그 감정의 골은 시간이 지날수록 돌이킬 수 없이 깊어져만 갔다.
그러나 리산드라 엘레노어는 기존의 모든 파벌 논리가 통하지 않는 자였다. 사교회에서의 작은 다툼, 영애들의 친분 등 가문 사이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세력이동뿐 아니라 황제파, 귀족파 등 이미 제국에 깊이 뿌리내린, 일반인의 시선에서는 불변의 진리나 다름없는 사실들조차 가볍게 무시하며 기존의 상식을 뒤엎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아리아나 바이에른에게 은밀하게 접근한 그는 바이에른 공작가의 가주 자리를 내어주는 대가로 귀족파의 손을 잡을 것을 제안했다. 이미 밑바닥까지 떨어진 아리아나는 리산드라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고, 그렇게 둘은 비밀리에 동맹을 결성했다.
나의 어머니, 펠리시아 트리폴리움은 여느 황제들과 다름없이 대공을 전적으로 지지하며 비호하였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어쩌면 조금 더 비판적이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엘레노어 가의 기사들, 그리고 모든 귀족파 가문들의 사병을 끌어모은 군은 순식간에 바이에른 가를 점령하고는 노아 바이에른의 목을 쳤다. 바이에른 가의 군사력은 분명 강대했으나, 노아 바이에른에게는 그 군사를 제대로 다룰 능력도, 직접 검을 들고 나서 싸울 능력도 없었다. 그날 아리아나 바이에른을 지지하던 소수를 제외하고는 바이에른 가의 모든 이들이 사망하였다. 살아남은 자는 단 한 명, 간신히 살아남아 황궁으로 도망친 아델하이트 바이에른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때 그 순간이 눈에 선하다. 제대로 차려입지도 못 한 옷은 흙먼지가 잔뜩 묻은 데다 나뭇가지에 걸렸는지 찢어진 자국이 수도 없이 많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탓에 한쪽 다리마저 절뚝였다. 얼굴에는 곳곳에 긁힌 자국이 가득했고, 머리카락도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몸도 약한 아델하이트가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열심히 달려 황궁에 도착했을 때는 리산드라와 아리아나의 반란군이 한창 황궁으로 진격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의 나는 아델하이트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전보 역할을 해준 것에 대한 감사함을 가지고 있었다.
아델하이트에게 소식을 전해들은 어머니는 그를 숨겨주겠다 약속하며 나의 언니이자 황태자였던 이사도라 트리폴리움에게 군의 지휘권을 넘길 테니 당장 기용 가능한 병력을 끌어모아 반군에 대항하라 명하셨다. 나를 포함한 장군들은 각각 하위 부대 하나씩을 맡거나 별동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나는 그 중에서도 적진의 가장 후미에 진입하여 리산드라 엘레노어의 목만을 목표로 삼는 소수 정예 부대를 이끌게 되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감각은 급습을 명했을 때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후미의 방어는 지나치게 두터웠고, 그곳에 있었어야 했을 리산드라는 온데간데없었다. 결정적으로, 아직 어려 미숙하던 나를 잡을 기회는 수없이 많았음에도 나를 일부러 살려주는 느낌마저 들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짙게 차오르는 불안함에 언니에게 소식을 보내려 했다. 결국 이 상황을 계획하고 실행해낼 수 있는 능력은 리산드라의 것일 테니, 차라리 암살부대들을 추가로 편성해 그를 잡아내자 제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를 따르는 황실군에게 그리 명령하기 위해 몸을 돌리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함정에 걸렸다는 것을.
우리를 죽일 생각이 없던 병사들은 포위를 위한 진을 치는 중이었다. 우리가 빠르게 파고들었다 생각했던 것은 그저 적이 공간을 내주었을 뿐이었고, 단단한 방패로 무장한 병사들은 이미 우리의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건 상대를 죽이기 위한 진법이 아니었다.
한참을 저항했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새벽 어스름에 시작한 전투는 해가 완전히 뜨고 나서야 우리 군이 지쳐 쓰러지는 것으로 끝이 났다. 너무 후미에 진입한 탓에 본대와는 완전히 단절되어 전투의 결과조차 알 수 없었다. 리산드라가 패배의 쓰라림을 덮기 위해 나를 사로잡아 인질로서 교환하려는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런 뻔한 결과 따위는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살아남은 몇몇과 함께 밧줄에 묶여 황궁의 앞까지 끌려갔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이미 죽어버린 언니의 몸과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나오신 어머니였다. 전투의 결과는 반란군의 압승이었다. 아리아나 바이에른을 총사령관으로 기용한 그들의 전투력은 급히 끌어모은 병사 따위로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리산드라는 황제의 자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제 와 추측하자면, 가장 높은 자리에서 모두의 견제를 받을 바에는 제대로 권력을 쥘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나를 황좌에 앉혀 입맛대로 조종하는 편이 쉽고 간편하다 여겼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작전은, 분하지만 아주 효과적이었다. 언니의 지위를 위협하지 않기 위해 정치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병사들과 어울리며 기사로서의 수련만 반복해왔던 나는, 졸지에 병이 있으신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모든 업무를 익혀야 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리산드라는 나를 풀어주고 군대를 물리는 조건으로 어머니로부터 세 가지를 받아내었다.
첫째, 의회의 절반을 귀족파로 채우고 의회의 의장 역시 귀족파의 사람을 앉힐 것. 제국의 대소사는 황제에게 전적인 결정권이 있는 것을 제하면 대부분 의회에서 결정되었는데, 황권이 강하고 황제파의 세력이 강한 탓에 2/3은 황제파의 사람들인 데다 의장의 역할도 사실상 황제가 맡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의회의 인원들은 대거 교체되었고 의장의 자리는 귀족파에 새로이 합류한 아리아나 바이에른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리산드라가 직접 맡지 않았다는 점에 나는 의아함을 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어차피 그 자리는 아리아나에게 생색을 내기 위해 내주었을 뿐이며 실질적으로 의장 역할을 하는 자는 리산드라였다는 것을.
둘째, 추밀원을 설립할 것. 제국은 황권이 그 무엇보다도 강한 곳으로, 황제에게 결정권이 있는 건이 수없이 많았다. 그렇기에 리산드라는 의회를 차지한다 한들 극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었을 것이다. 명목상으로는 황제가 자문을 구할 수 있는 조언자들로 이루어진 단체였지만, 사실상 황제의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무엇 하나 쉬이 결정할 수 없게 만드는 감시자들이었다. 어머니께는 그저 제국민을 위한 방향으로 고민하여 선택하라 들은 일들에 대해 멋대로 의견을 내며 내 결정에 훼방을 놓는 자들이 생겨나자 신경이 거슬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심지어 당연하게도 추밀원에 소속된 이들은 리산드라의 측근이나 다름없는 귀족파의 주요 인원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매일같이 감시받고 견제당하는 기분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셋째, 총사령관의 임명은 리산드라 엘레노어의 추천으로만 이루어질 것. 본래 군과 관련된 인사 처리는 황제의 고유한 권한이었는데, 리산드라는 항상 바이에른 가에 비해 엘레노어 가의 군사력이 약하다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에 내어놓은 조건인 듯 했다. 견제의 대상이 황실이 아닌 바이에른 가인 만큼 다른 조건들보다는 당장 거슬리는 것이 덜했지만, 장군으로서 키워져 살아온 내게는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이었다. 제국의 존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을 고작 공작가에게 넘기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이던가. 교묘하게 본인이 직접 지정하겠다는 말 대신 추천만을 하겠다 이야기해 논란을 피하려 한 것마저 같잖았다.
하지만 어머니께도 이 조건들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고, 그렇게 귀족파의 세상이 펼쳐졌다. 2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겨우 황제가 해야 하는 일의 기초만을 배운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가 무섭게 대관식을 치렀고, 그로부터 또다시 2년이 지나서야 겨우 복수의 첫걸음을 뗄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내가 내딛은 첫걸음의 결과를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그렇게 속으로 되뇌이며 의회를 향해 어색한 걸음을 옮겼다. 지난 2년간, 이미 견고한 세력을 갖춘 귀족파를 상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얼마 없었다. 의회에서는 아리아나의 세력에 눌리고 리산드라의 언변에 넘어가 원하지 않는 결정이 내려지는 것을 눈앞에서 보아야만 했고, 내게 남은 권한으로 황권을 회복할 수 있는 일을 조금이라도 해볼라치면 추밀원이 나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잖아도 황제의 자리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편하기만 했는데, 귀족들이 비협조저긍로 나오자 보이지 않는 족쇄에 매인 듯 답답하기만 했다.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푸른색의 문 앞에 잠시 멈추어 심호흡을 했다. 의회에 모이는 시간은 오전 열 시. 황제가 그 때 의회에 당도하고, 귀족들은 그보다 조금 이르게 도착해 자리잡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니 리산드라를 포함한 모든 귀족들은 이미 이 방 안에 모여있을 것이었다.
새벽의 일은 이미 알려졌겠지. 그 생각과 함께 피곤함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으로는 귀족파가 절반이지, 시간이 지나며 귀족파로 돌아선 가문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은 지금은 의회의 팔 할은 귀족파라 보아도 무방했다. 그러니 적어도 말이 좋은 방향으로 흐르지는 않으리란 것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잖아도 새벽 내내 아델하이트가 했던 말의 의미를 곱씹느라 잠을 설쳤는데, 나약하게 겁먹은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황제 폐하 들어오십니다!”
시종들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의회의 문이 활짝 열렸다. 자리에 앉아있던 귀족들은 일제히 일어나 나를 향해 몸을 숙였다. 고개만을 까딱여 인사를 받으며 빠르게 장내를 둘러보았다. 대부분 평소보다도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것을 보니 소문이 퍼질 대로 퍼진 듯 했다. 결정적인 증거는 따로 있었다. 반란 이후 만들어진 황제의 바로 옆자리, 항상 아리아나 바이에른이 앉아있던 자리는 리산드라 엘레노어가 차지하고 있었다. 아리아나가 죽은 것을 알았으니 이제 형식적으로 내주었던 자리마저 가져가려 한 것이겠지.
아델하이트는 오지 않았는지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럴 수는 있다 생각했다. 새벽의 일은 수년간 장군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해온 나조차도 피곤할 정도였는데, 제대로 된 단련 한 번 해 보지 않은 나약한 그가 바로 외출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터였다. 그걸 알았기 때문에 굳이 오늘의 의회에 참석하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니 그의 잘못은 아닐 터였다.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 리산드라에게 의장 자리를 그대로 내어주어야 한다는 단점은 있지만 그 권한이야 사실상 이미 가지고 있던 것이나 다름없지 않던가? 차라리 리산드라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나을 것이었다. 괜히 아델하이트까지 신경을 써야 할 필요 없이. 나는 아직도 그가 아리아나에게 소리친 말에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지 못 했으니. 혹여나… 혹여나 그가 아리아나처럼 귀족파의 손을 잡는다면. 그렇게 이번에는 황좌까지 노린다면. 내게는 그를 막을 힘이 없었다.
“폐하, 지난 밤은 평안하셨는지요.”
그리고 리산드라는 내가 생각을 편히 마무리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안부를 묻는 척 포장하는 저 짧은 인사와 기쁘게 미소 띈 얼굴은 분명 어젯밤의 일을 알고 있다는 경고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아리아나 바이에른을 성공적으로 처리했다 여긴 것이, 사실 리산드라가 내어준 것이라면?
가능성이 충분한 가정에 숨이 턱하니 막혔다. 엘레노어 가는 군사력이 약해 무력만은 훌륭한 아리아나를 포섭해야 했지만, 욕심이 많은 그에게 많은 것을 내주었어야 했으니 이 기회에 그를 내치려 했을지도 모른다. 아델하이트의 생존 사실은 몰랐을 텐데, 바이에른 가를 아예 몰락시키려 한 걸까?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다. 그렇다면 엘레노어 가는 제국의 유일한 공작가가 되어 ‘대공'이라는 호칭을 독점하며 기세등등한 귀족파의 수장으로서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지위를 가질 터였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저 인사를 드리려던 것 뿐인데, 그리 힘들어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또다. 또 실수했다.
“아니, 나는… 아니다.”
당황하여 말이 무작위로 튀어나왔다. 고작 안부인사 따위에 얼어붙어 한참을 침묵했으니,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주름진 눈가를 가늘게 접어 웃는 리산드라의 표정이 순간 역하게 느껴졌다. 내가 이렇게 반응할 것을 알고 던진 질문이었겠지. 본질적인 문제는 내 정치적 능력의 부재임을 알면서도 괜히 원망스러웠다. 경험이 쌓이며 시간을 조금 들이면 상황을 능히 파악할 수는 있게 되었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분위기를 이끌어가거나 다음에 취해야 할 행동을 계산하는 것은 아직도 어려웠다. 나도 어릴 때부터 황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더라면 이렇지 않았을까? 아니, 차라리 언니가 살아있었더라면. 그날 죽은 게 언니가 아니라 나였다면…
아, 무너질 것 같았다. 피로와 스트레스로 급격히 몰려오는 두통에 이마를 짚었다. 상황이 너무나도 답답해 숨이 가빠지며 피가 머리로 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 오랜 시간을 들여 간신히 숨 쉴 구멍 하나를 뚫어냈는데, 그마저도 리산드라의 손바닥 위였다니. 그나마도 내 편이라 생각해 얻어낸 인재는 공작위 이상의 것을 노리고 있는 데다 내가 이렇게 어려울 때에는 곁에 있어주지도 않았다.
이를 악물었다.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돌파구가 하나쯤은 있을 것이었다. 리산드라가 원하는 것이 바이에른 가의 몰락이었다면, 바이에른 가를 존속시키면 된다. 귀족파의 유일한 수장이 되기를 바랐다면 귀족파 자체를 견제하면 된다. 어렵지만 길은 있다. 수십 번도 더 되뇌인 것들을 다시 상기시키며 천천히 호흡을 진정시켰다.
“나, 나는…”
“늦어서 죄송합니다, 폐하.”
간신히 떨리는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낸 순간이었다. 말로는 죄송하다 하면서도 전혀 죄송함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적당히 느릿하여 여유가 넘치는 데다 약간의 웃음기마저 머금은 그 목소리는 내게 잠시 숨을 쉴 시간을 내어주었다.
뚜벅, 뚜벅. 순식간에 조용해진 장내에 아델하이트의 구둣발 소리가 또렷하게 울려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입구로 향했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렬한 조명 아래 빛나는 황금빛 머리카락, 단정히 차려입었음에도 화려함을 숨기지 않는 금빛 정복은 새벽에 보았던 것과는 또 다른 디자인이었다. 기품있는 걸음걸이에 맞추어 휘날리는 진녹색 망토는 젊은 가주에게 무게감을 더해주었다. 분명 새벽의 일이 그에게는 피로했을 것이며 그때 입었던 상처들은 이제야 막 아물기 시작했을텐데도 얼굴은 최상의 컨디션이라는 듯이 느긋한 미소를 띄었고, 상처입었던 부위들은 전부 머리카락이나 옷으로 교묘히 가려 다쳤다는 사실을 완벽히 숨겨내었다.
“말씀하셨던 것을 챙기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부드럽게 미소짓는 그의 의중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무언가를 챙기라 명했다고? 언제? 그런 적이 없어 이해도 되지 않고 혼란스러웠다. 그저 늦은 것에 대한 핑계를 대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바로 추궁할 수가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아델하이트와 나에게 집중되어버린 상황에서는 말 한 마디를 까딱하여 잘못하면 바로 트집을 잡힐 것만 같았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뱀 같은 눈에는 특유의 묘한 카리스마가 있어 그의 말에 힘을 실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
“…괜찮다. 이만 각자의 자리에 착석하도록.”
홀리듯 짧은 말을 뱉었다. 이미 아델하이트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려 나도 압박감에서 벗어났고, 그나마 리산드라가 시비를 걸어볼 수 있는 지각 건도 거짓으로나마 넘겼으니 괜찮겠지. 내가 용서한다는 태도를 비추어준 이상 시비를 걸 명분도 없을 터였다. 그가 내 편인지는 아직도 가늠하기 어려웠으나… 이번에는 나를 도와줬으니까.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에 나타나 모두의 시선을 빼앗고 내게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넴으로서 나의 권위도 세워줬으니, 이 정도는 해줘도 괜찮겠지. 그리 생각하며 불편한 숨을 삼켰다.
몸을 돌려 내 자리에 앉으려 의자를 잡았을 때였다. 문득, 아델하이트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리아나가 죽었으니 빈 자리가 하나 있어야 마땅했지만, 리산드라가 아리아나의 자리를 차지하고 제 자리는 측근에게 내어주는 등 멋대로 자리를 재배치해 남은 자리는 가장 끝의 초라한 의자 하나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바이에른 공작을 저런 자리에 앉힐 수는 없는데. 리산드라가 내 오른편에 앉았으니, 의자를 새로 가져오라 하여 나의 왼쪽에 앉히는 게 나을까?
“그, 아델하이트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가 말을 멈추었다. 리산드라를 견제하기 위해 아델하이트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했었지. 그렇다면 이름으로만 불러 그의 격을 실추시키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할 것이었다. 적어도 ‘바이에른 공작’, 또는 ‘대공’이라 불러야 할 터였다. 그런데… 어느 쪽이 낫지? 그의 가문과 가주로서의 지위를 강조하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제국에서 그만이 가진 특별한 호칭을 불러주는 게 나을까?
짧은 고민이었지만, 아델하이트는 나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되려 입을 닫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 시선을 리산드라에게 돌리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레노어 공작. 폐하의 말을 듣지 못 했나? 각자의 자리에 착석하라 하셨는데.”
멈추어 선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아델하이트는 특유의 큰 키로 리산드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름이 호명된 리산드라는 자리에 앉으려다 멈추고는 다시 허리를 꼿꼿이 펴 가소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아델하이트의 시선을 마주했다. 벌써부터 기싸움이 펼쳐지는 모습에 기가 빨려 두 사람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황제이고 이 자리의 주인일진대 어떻게 아무 말을 않을 수 있을까.
“바이에른 공녀의 자리는… 이곳이 아닐 텐데.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지 모르겠군.”
리산드라의 반응은 예전부터 예상해온 것에 꽤 가까웠다. 아무런 경험도 경력도 없는 아델하이트가 정계에 갑작스레 뛰어들면 리산드라는 분명 그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할 것이라 추측하곤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아델하이트가 주눅들 것이라 생각했다면 애초부터 그를 가주로 앉히려는 생각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녀’라고?”
하. 기가 차다는 듯이 짧은 말을 내뱉으며 아델하이트가 비웃는 소리를 내었다.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제 마음대로 움직일 자격이 있다는 듯한 지배자와 다름없는 면모였다. 자신이 당연히 이 이상의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지 않냐는 듯한 물음같은 말에 괜히 나까지 긴장되었지만, 애써 천천히 시선을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멈추어 선 리산드라를 향해 다가오는 아델하이트의 얼굴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분노한 표정이었다. 크게 치켜뜬 눈에 목에 선 핏줄, 그리고 조금 전 입장할 때보다 훨씬 크고 딱딱해진 발걸음 소리까지. 리산드라가 의자 위에 올린 손에 희고 기다란 제 손을 놓을 때에는 나도 모르게 침까지 꿀꺽 삼키게 되었다.
아델하이트의 의도였을까. 그와 리산드라가 대치하는 상황은 마치 그림으로 그려진 듯 완벽한 대립처럼 보였다. 누구나 어릴 적 읽은 이야기 중 이런 모습을 한 번 쯤은 발견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리산드라는 둥글고 챙이 넓은 모자에는 리본을 묶고 화려한 실크 크라바트를 매는 등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맞춤 정복을 입었지만, 정작 천의 무늬는 단순하며 가주의 반지를 제외하면 장신구도 거의 착용하지 않았다. 엘레노어 가의 상징인 자줏빛 천으로 온몸을 감싼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하여 평생을 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반면 아델하이트는 어떠한가. 주렁주렁 매단 장신구에 제 머리카락만큼이나 빛나는 황금색으로 치장한 모습, 그리고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한 무늬의 천으로 이루어진 의복까지.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사치스러운 모습이 촌스러울 법도 한데 오히려 고급지고 수려한 인상을 준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리산드라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화려함을 지닌 아델하이트는 과연 일반적인 귀족들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반짝거리기만 하는, 부유한 평민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 이상으로 훌륭한 모습이 있을까. 번쩍거리는 황금빛 재킷이, 온갖 방향으로 빛을 반사해내는 에메랄드 귀걸이가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아 그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서 눈을 떼지 못 하도록 만들었다. 데뷔의 장에서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이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없겠지.
“공녀가 아니라 공작이라네. 엘레노어 가는 기본적인 호칭조차 실수하는가?”
어머니 뻘인 리산드라의 앞에 가까이 서서는 말 한 번 더듬지 않고 해야 할 말을 내뱉는 아델하이트의 모습은 기대 이상이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엘레노어 가의 공작으로서 정계에서 군림한 리산드라를 저렇게 몰아붙인 자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당연하게도 나의 비호와 바이에른 가의 후광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내게는 이길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던 리산드라가 잠시라도 말문이 막히는 광경을 보자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는 듯 하여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아… 그래, 그렇지. 바이에른 공작. 아직 공작위를 계승했다는 말을…”
“소식을 듣지 못 했다는 재미없는 변명은 하지 않기를 바라네. 그래도 그 자리의 주인은 바이에른이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으니까. 그대가 했던 계약은 아리아나 바이에른이 아닌, 바이에른 가와 했던 약속이 아니었던가?”
허리를 살짝 숙인 아델하이트가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할 말을 빼앗긴 리산드라는 잠시 움찔하더니, 내뱉을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당연히 이 정도는 해 주리라 기대했음에도 내 눈앞에서 보자 믿을 수가 없었다. 고작 말 몇 마디로 기세등등하던 리산드라의 입을 막다니. 나는 영원히 가질 수 없을 재능에 입안이 썼지만, 리산드라를 견제하는 것을 보아 당장은 내 적이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그를 이용이라도 한다면 앞으로의 생활은 훨씬 편해지겠지.
결국 리산드라는 의자를 꽉 쥐었던 손을 놓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에 따라 모든 귀족들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마치 전혀 볼 가치가 없다는 듯이 리산드라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아델하이트는 내 곁에 착석하여 서기가 준비한 회의록을 뒤적거리며 훑었다. 밀려오는 두려움과 존경심에 그를 향해 살짝 곁눈질했지만, 내게도 시선을 주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금세 진지한 무표정으로 돌아온 그의 얼굴에 내가 느낀 감정은 뜻밖에도 든든함이었다. 아델하이트가 적대감을 보인 상대는 리산드라뿐이었다. 물론 그에게 대적하려 나선 이 역시도 리산드라뿐이었기에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정말 혹시나 나를 견제하면 어쩌지 걱정했던 것이 정말 기우라는 사실을 깨닫자 마음이 편해졌다.
“아…”
“아이리스 남작, 회의를 시작해야 하니 저번 모임에서 해결하지 못 한 안건들을 가져오도록.”
…고의다. 분명한 고의다. 모두가 자리에 착석하고 상황을 살피던 리산드라가 항상 하던 대로 시작을 알리려 했지만, 아델하이트는 리산드라가 할 말을 어떻게 알았는지 정확하게 같은 말을 내뱉으며 리산드라의 말을 끊어버렸다. 이전까지 여유가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며 느릿하게 말을 이어간 것과는 다르게 재빠르게 말을 끝내기까지 했다. 리산드라가 입을 다물고 그를 노려보았지만, 무엇이 문제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조소를 띈 표정으로 눈을 맞출 뿐이었다.
“예, 예… 그, 총사령관 관련한 건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벌써 몇 개월 동안이나 공석이었던 자리라 오늘은 기필코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변 나라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폐하께서 어찌나 전투 능력이 탁월하신지, 훌륭한 인재들을 추천드려도 마음에 들지 않아 하시니 어쩔 수 없었죠.”
예전이라면 저 말을 듣고도 칭찬이라 생각하고 넘겼을까. 엘레노어 가의 가장 오래된 파트너이자 최근에는 둘째 딸마저 엘레노어 가의 소가주와 결혼시키며 그 결속을 더욱 단단히 한 멜테이아 후작가 가주의 말에 표정이 절로 찌푸려졌다. 나를 칭찬하는 척 포장하고는 있지만 결국 내 고집으로 주변국들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심어주게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되잖나.
“멜테이아 후작. 지금 그게…”
“후작이 보는 눈이 있군. 엘레노어 공작이야 전술에 조예가 없으니 바넨비트 경을 추천했겠지만… 폐하께서 그렇게까지 반대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지.”
얕보이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를 우습게 알며 리산드라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입을 연 멜테이아 후작을 꾸짖어 황제의 권위를 보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말을 이어가기도 전에, 드물게 나오는 아델하이트의 힘있는 목소리가 나를 멈추어 세웠다. 처음에는 그가 후작의 말에 동의하는 듯 하여 당황함에 멈춘 것이었지만, 곧이어 대놓고 리산드라를 깎아내리는 말을 내뱉는 것에 혼란스럽기만 해 그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를… 두둔하는 것 같기는 한데. 여유롭기만 한 그 속을 읽을 수가 없으니 두려우면서도 그를 믿는 것이 최선의 수일 것만 같아 다시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본래 목소리가 작은 아델하이트가 모두에게 들리게 하기 위해 힘주어 말하며 망토의 안쪽을 뒤적거렸다. 내 시야에서는 무엇을 찾는 것일지 바로 알 수 없었지만, 그 정체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아델하이트가 빼곡히 글이 쓰여진 종이 여러 장을 꺼내 뿌리듯 탁자 위에 내려놓은 것이었다.
“사기, 도박… 연루된 범죄가 한 두 가지가 아니던걸. 그나마 실력이 좋아 보이던 것도 모두 문서를 위조한 것이라지? 폐하깨서 미리 말씀해주시지 않았다면 나도 깜빡 속아넘어갈 뻔 했어.”
아델하이트가 내려놓은 종이 중 한 장을 집어들어 빠르게 훑어내려갔다. 그 종이는 지금까지 바넨비트가 일으킨 온갖 사건사고와 연루되었던 범죄 이력들을 빼곡히 정리한 문서였다. 사건은 날짜 단위로 자세하게, 그리고 금액은 동전 한 닢까지 정확하게. 사람을 붙여두지 않았다면 절대 이룰 수 없었을 수준의 자세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리아나를 죽이기 한참 전부터 조사해온 것이겠지. 게다가 문서 위조와 관련된 건은 또 뭐고. 아델하이트가 한 말이 있어 놀란 모습을 보일 수 없으니 애써 침착하려 노력했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이러려고 처음부터 내가 시킨 것이 있다 말한 것일까? 그때부터 이 장면을 계획해왔다고? 혼자 공을 가져갈 수도 있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를 끼워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도 반박을 않는 것을 보니, 바넨비트 경이 총사령관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모두 납득한 듯 하군. 그래도 공석으로 둘 수는 없으니… 루멜디온 경이 당분간은 그 직무를 병행하는 게 어떤가 싶은데. 아이리스 남작의 말대로 오늘은 마무리해야 하니까 말이야.”
“아니, 하지만…”
“설마 그대가 추천한 사람이어야만 한다던가, 그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공작은 제 위신을 차리려 가져간 그 알량한 권한이 제국의 안보보다도 중요하단 말인가?”
리산드라의 저항조차도 가볍게 내치고 입을 닫게 하는 그의 모습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거라면, 이거라면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귀족파가 하려는 것을 늦추고 제약을 거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지만… 아델하이트의 능력이 합쳐진다면, 그가 나를 돕는다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까지 의심하고 걱정한 것이 미안해져 괜히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잠시 그를 돌아보았을 때 내가 본 것은 마찬가지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아델하이트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환히 웃었다. 마침 구름에 가려졌던 태양이 아델하이트의 뒷편으로 보이는 창문 너머에서 밝게 빛났다.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설마… 아델하이트는 계속 나를 믿고 있었나? 내가 그를 의심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는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 할 사람이 아닌데. 이런… 태양과도 같은 사람아.
얼굴에 열이 올라 먼저 고개를 돌렸다. 태양보다도 더 밝게 타오르는 것만 같은 아델하이트를 계속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분명 제국민의 태양에 비유되는 존재는 황제인데. 내가 그의 태양이 되어야 함에도 그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이 사람만… 이 사람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그 무엇이 두려우랴.
내가 고개를 돌리고도 느껴지던 아델하이트의 시선은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내게서 떨어져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느껴지려 하는 아쉬움에 괜히 혀를 깨물어 그 생각을 멈추려 했다. 아델하이트를 의심하던 게 불과 몇 분 전인데, 이제 와 뻔뻔하게 나를 바라봐 달라고 할 수가 있을까. 지금은, 지금은 의회에 집중해야 했다. 오늘이 끝나면 사과할 기회 같은 건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그동안 그를 제대로 봐주지 못 한 것을 사과하고 진실로 협력하자 말할 것이었다.
총사령관 건이 해결된 이후 의회는 순조롭게 흘러갔다. 내가 황좌에 오른 이후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아이리스 남작이 안건을 가져오며 리산드라에게 바통을 넘기려 하면 아델하이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안건을 채가며 황제파에게 유리한 쪽으로 교묘히 방향을 틀었다. 처음에는 안건마다 기를 쓰고 반박하려던 리산드라는 어느 순간 조용해졌고, 나와 아델하이트를 비꼬며 인신공격으로 아델하이트의 평정심을 무너뜨리려 하던 멜테이아 후작도 결국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관두었다.
내가 분노를 참지 못 하는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리산드라가 나를 아델하이트의 언변에 묻어가는 무능한 황제 취급을 했을 때도 심호흡을 하며 겨우 스스로를 진정시켰고, 멜테이아가 어머니를 언급하였을 때는 검을 뽑고자 하는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래도 내가 본 것이 있으니 아델하이트를 믿고 침묵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옳았다. 아델하이트의 정치적 능력은 내 예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응수했고, 상대의 표정을 예민하게 읽어내어 귀족파 가주들이 절대 원하지 않을 주제를 악착같이 끌어내어 심리적인 우위를 점했다. 몇 년 동안 바깥의 소식은 글로만 접할 수 있었음에도 모든 돌발 질문에 능숙히 대처했다. 그동안 내가 파악하지 못 한 어떠한 경로로 정보를 수집한 것인지, 공작저를 차지하고 있었던 잠깐의 새벽동안 어떻게든 소식을 끌어모은 것인지, 아니면 그저 허세인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두렵지 않았다. 뱀의 혀 같은 그 교활한 무기가 나를 노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의회에서 필요한 재능은 내가 가진 기마술과 검술이 아닌 아델하이트가 가진 두뇌였다. 그리고 그가 내 사람임을 깨달은 순간부터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기분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급히 소집한 의회는 안건이 많지 않고, 총사령관 임명을 제외하면 중요한 사항도 없던지라 금세 끝이 났다. 아델하이트가 있어 평소보다도 이르게 끝난 것도 있었다. 아이리스 남작이 더 이상 안건이 없다 고하고, 리산드라는 이상하게 초연한 표정으로 아델하이트를 한참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페하, 제가 마지막 안건을 제안드려도 괜찮겠습니까? 폐하께서 승인만 해주신다면 되는 간단한 건입니다.”
“…허하겠다.”
갑작스레 들려온 아델하이트의 물음에 잠깐 고민이 들었지만 금세 허락했다. 그가 나를 해할 리 없었다. 그런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리도 쉽게 허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델하이트가 내어놓은 안건은 그런 나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은 동시에, 내가 차마 생각지도 못 한 것이었다.
“폐하의 탄신일이 한 달 정도 앞으로 다가왔는데, 허락만 해주신다면 이번 연회는 제가 직접 준비하고자 합니다.”
모든 것을 알고 한 말일까. 그 생각 탓에 잠시 흔들렸지만 그가 모를 리 없다는 확신이 곧바로 뒤따랐다. 나는 반란 이후로, 그리고 황위에 올라서도 생일을 챙겨본 적이 없었다. 황제의 탄신일이라 함은 그저 가난한 제국민들에게 재물을 베풀고 죄수들을 일부 사면하는 등 민생을 위해 힘써야 하는 날일 뿐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아쉬움이 남아있던 걸까. 아델하이트의 제안이 괜히 고맙고 설레어서, 나는 그저 홀린 듯 허락한다는 말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폐하, 혹 귀걸이를 착용하실 의향이 있으신지요.”
“목걸이 정도로 끝내기로 한 것이 아니었나?”
“대공 각하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하여 폐하께 여쭙고자…”
간만에 제대로 치장을 하는 것도 벅차 시종장의 말을 가볍게 흘려보내고 싶었으나, 그의 입에서 나온 아델하이트에 대한 언급을 듣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문을 정비하는 동시에 연회를 준비하는 것만 해도 바빴을 텐데, 이런 것까지 신경을 써 주다니… 괜시리 내 일이 바빠 도와주지 못 한 것이 미안해졌다.
시종장이 내민 귀걸이를 집어들었다. 화려하게 세공된 푸른빛의 물방울 모양 사파이어가 은으로 둘러진 형태였다. 보석 같은 것은 잘 모르는 내 눈에도 확연히 고급진 디자인이었다. 거추장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내 성향을 아는지 덜렁거리지 않을 짧은 모양에 술 같은 것이 없는 단순한 형태였다. 귀도 뚫지 않았으니 원래라면 누가 보냈대도 무시했을 텐데…라고 생각한 순간, 귀걸이의 끝이 일반적인 것과는 다른 형태임이 보였다. 구멍에 넣어야 하는 뾰족한 끝부분 대신, 귓볼에 끼울 수 있는 클립이 달려 있었다. 하기야, 이걸 모를 아델하이트가 아니지. 귀걸이의 선정에서부터 느껴지는 아델하이트의 섬세함과 다정함이 고마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하기야, 이런 사람이었지. 첫 의회를 마치고 내가 아델하이트를 따로 불러 사과의 말을 전했을 때도 별 것 아니라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하며 그럴 수 있다 말해준 사람이었다. 되려 나를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믿음을 주지 못 해 죄송하다, 솔직하게 말해주어 감사하다 말하며 평소와 같이 기품있는 태도로 웃어보였다. 그 따스한 태도에 괜히 내 과거가 부끄러워져 처음으로 그를 대공이라 불렀었다. 그때까지 알 수 없는 거부감 때문에 그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 내가 너무나도 유치하게 느껴졌고, 반드시 그만큼 보답해야겠다 결심했다.
“와서 채워주겠나. 귀걸이는 익숙치가 않아서.”
목걸이도, 팔찌도. 심지어는 간단한 반지나 왕관조차도 거추장스러워하여 정말 필요한 때가 아닌 이상 되도록 착용하지 않으려던 나였다. 그래서일까. 시종장은 당연히 내가 거절할 것이라 생각한 듯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했지만, 내가 건네는 귀걸이를 순순히 받아들고 내 귓볼에 끼워주었다. 금속의 차가운 온도와 귓볼에 단단하게 고정되는 느낌이 익숙하지 않은 고통을 선사해 잠깐 표정을 찡그렸지만, 생각보다는 가벼운 무게감과 나쁘지는 않은 착용감에 금방 긴장이 풀렸다. 오히려 내가 처음으로 제대로 참여하는 연회에 아델하이트가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이 기뻐 작게 미소지었다. 여태껏 귀족파의 눈치가 보여 연말 무도회에서도 나서지 못 했는데.
“기뻐 보이십니다.”
거울을 보며 귀걸이를 조심스럽게 만지작대던 중 들려온, 장난기가 가득한 셀레스티아의 목소리에 민망하게 웃었다. 항상 입버릇처럼 연회는 괜히 번잡하고 어지러운 것이 영 취향이 아니다…라 말해왔던 점을 지적하려 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기쁜 걸 어쩌겠나. 내 사람이 나를 위해 시간을 들여 연회를 준비하고 그때 착용할 선물까지 보내주었는데, 기쁘지 않을 리가.
“이 자리는 본래 언니의 것이라는 생각은 바뀐 적 없어. 아직도 의회에서는 대공에게 과할 정도로 의지하고 있으니, 애초부터 내게는 과분한 자리였지.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황좌에 오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기분이 좋았다. 시간이 남을 때면 항상 내가 왜 황제가 되어야 했는지, 어떻게 움직였어야 언니가 죽지 않았을지 고민하고 고뇌하여 끝내 후회하기만 했는데, 근래 들어서는 처음으로 그 비탄을 기대와 설렘이 덮었다. 아델하이트가 꾸밀 연회장이, 나를 위해 준비했다는 오케스트라가 궁금해 밤잠을 설쳤고 연회에서의 아델하이트를 본 것이 너무도 오래된지라 한껏 꾸민 그의 모습을 볼 날만을 기다렸다. 처음으로 내가 황제라서, 그에게 이런 특별대우를 받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평생 후회와 고난뿐이던 삶에 따스한 햇빛을 비추어 준 그가 정말, 정말…
“폐하께서 즐거우시다니 다행입니다. 황위에 오르신 뒤로 웃으시는 모습을 통 보지 못 해 걱정했지 뭡니까.”
“그렇다면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더 자주 웃어야 하나.”
“아, 됐습니다. 폐하께서 억지로 웃으시길 바라는 건 아니라서요.”
괜히 또 감상에 젖으려는 내게 셀레스티아가 말을 걸자, 괜히 장난스럽게 대꾸하게 되었다. 그러자 셀레스티아도 내 의도를 파악했는지 손까지 내저으며 진절머리가 난다는 척 내 장난을 받았다. 그러다 시선이 마주치자, 괜히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에 큭큭거리며 웃었다. 셀레스티아와 함께 장난을 치며 웃어본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반란이 일어난 이후로는 마음이 급해 좀처럼 장난을 칠 여유도 나오지 않았는데.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셀레스티아와 나는 꽤 친한, 친구와도 다름없는 사이였다. 어릴 때부터 수습 기사들 사이에서 장군이 되기 위한 전철을 밟던 나는 비슷한 나이대였던 셀레스티아와 빠르게 친해졌고, 그 우정은 정식 기사가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셀레스티아와 나는 유독 어린 나이에 기사직을 수여받은 탓에 또래 친구가 없어 더욱 서로에게 의지하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반란이 일어나기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로에게 농담을 던지며 웃고 떠드는 관계였었다. 간만에 그때의 감정과 기억이 떠오르자 긴장이 탁 풀리며 아델하이트를 생각하느라 들어가 있던 기합이 사라져 훨씬 마음이 편해졌다.
“아무리 황제는 연회장에 늦게 들어가는 게 예의라도, 내 탄신일을 기념하는 자리인데 이제 들어가 봐야겠지. 나중에 보자고.”
“그럼 저도 술이나 한 잔 할까 싶습니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셀레스티아가 손을 가볍게 흔들며 방에서 나가자, 나도 연회장으로 향할 준비를 하려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셀레스티아는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1층으로 향할 것이겠지만, 나는 다른 길로 입장해야 했으니.
통상적으로 황족들이 이용하는 길을 따라 연회장으로 향했다. 처음으로 연회에 제대로 참여하는 것이니 실수 없이 하루를 보내고픈 마음도 컸지만, 그 이상으로 아델하이트가 나를 위해 준비해 주었을 것이 기대되어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의 생각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일까. 무엇을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을까.
연회장 2층의 문이 열리고, 시종들이 큰 소리로 내가 입장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어지러울 정도로 강렬한 빛에 눈이 익숙해지자, 화려한 연회장과 그 안에 모인 사람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귀족파가 불참할 것이라 예상한 것과는 달리 꽤 많은 인파에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써 미소지었다. 속내를 숨기려면 우선 미소짓는 것이 제일이다. 아델하이트를 보며 내가 그나마 배울 수 있는 한 가지였다. 내 입장과 동시에 모든 객들은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느라 내가 잠깐이나마 지었던 놀란 표정을 보지 못 했을 것이라는 점은 참 다행이었다. 첫 행사부터 믿음직하지 못 한 모습을 보였다면 좋지 못 한 영향을 미쳤겠지.
“모두 고개를 들게.”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천천히, 예의를 차려 이야기했다. 연말 무도회라던가, 종종 황실에 큰 일이 있던 때마다 열린 연회에서 항상 내뱉은 말이었지만 오늘은 그 느낌이 달랐다. 아델하이트가 이 자리에 있었으니까. 이렇게 많은 귀족들 사이에서도 어떻게 아델하이트는 빛이 나는 것만 같을까. 처음 연회장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눈이 아플 정도로 강렬한 빛 속에서도 아델하이트만은 또렷하게 보였다.
그야,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리 별들이 화려하게 빛나도 태양이 뜨는 순간 모두 빛을 잃는 것을.
곱슬기가 있는 금빛 머리카락은 정갈하게 정리되어 하나로 내려묶었지만, 머리끈에는 커다란 녹색 보석이 달려 자칫 밋밋할 뻔 했던 헤어스타일에 화려함을 더해주었다. 외안경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디자인이었다. 금빛 테에 둥근 형태인 것까지는 동일하나, 이번에 착용한 것은 작은 금빛 나비들이 앉아있는 모양의 장식이 더해져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
그가 착용한 귀걸이에 눈길이 머무르자마자 귀족파 따위에 대한 것은 머릿속에서 깔끔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이래서 나한테 귀걸이를 선물했구나. 아델하이트는 사파이어와 은 대신 에메랄드와 금으로 이루어졌다는 것만 빼면 내 것과 완벽하게 동일한 형태의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도 내가 귀걸이를 착용하고 왔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들자마자 나를 보며 환히 웃었다.
금실이 수놓아진 옷에 목걸이, 팔찌, 반지 등 온 몸을 화려하게 가득 채운 장신구. 어깨의 견장에, 망토에… 반짝이며 광을 내는 구두까지. 그렇게 치장한 자의 첫 느낌은 분명 사치스럽다,여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되려 아름답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 화려함에 사람이 집어삼켜질 법도 한데… 어떻게 그러지도 않는지. 그렇게 치장한 것이 되려 아델하이트 본연의 수려함을 보조해 주는 듯 하였다.
“모두 짐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모여준 것에 감사를 전하네. 다들 편안히 즐기도록.”
말로는 모두라고 했지만, 그 감사는 내심 아델하이트를 향한 것이었다. 황실을 상징하는 푸른색 천에 바이에른 가의 상징인 금빛 장식물들. 긴장이 풀리고 나서야 둘러볼 수 있었던 연회장의 내부는 두 세력의 친분을 과시하기에 더없이 적절하면서도 황실의 권위를 실추시키지 않을 만큼 화려하고 우아했다. 몇 년 간 사교 활동은커녕 사람들과 만나지도 못 한 그가 단순히 연회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힘들고 어려웠을 텐데. 고작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이 정도의 준비가 가능했다고? 그의 행정 능력 역시 우수하다는 점이야 알고 있었지만, 매번 기대 이상의 것을 보여주는 그는 항상 경이롭기만 했다.
짧은 환영 인사를 마치고는 계단을 통해 연회장의 1층으로 내려왔다. 나도 즐겨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연회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쩐지 오늘로 연회가 좋아질 수도 있을 것만 같았기에. 어쩌면 오늘 내가 받을 가장 큰 생일선물은 바로 그 인식의 변화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아델하이트.”
“예, 폐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층을 내려온 나를 기다리고 있던 자는 어떻게 보고 바로 따라왔는지 모를 아델하이트였다. 기쁘다는 듯이 다시 웃는 그의 얼굴에 다시 심장이 뛰었다. 오늘 혹시 귀족파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을 하고 있었음에도, 어쩌면 마냥 즐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분명 하고 왔는데도… 모두 놓아버리고 아델하이트와 함께 이 순간을 즐기고만 싶었다.
그제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감사함이라 생각하고, 동경이라 믿으며 부정해왔던 것을.
내가, 아델하이트를 사랑하는구나. 이 여자를 좋아하는구나…
사치라 생각해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는 감정이었다. 내게 우선순위는 귀족파를 견제하여 황권을 다시 세우는 것이어야만 했는데, 그런 한심한 감정 놀음이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이건 불가항력이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에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가 있을까? 언제나 나를 돕고, 나를 위해 애쓰고, 잘못을 하더라도 덮어주며 내 행복만을 바라는 사람을. 비록… 귀족파가 건재한 이상 약점이 될지도 모르는 이 사실을 드러낼 수는 없겠지만.
그 생각이 든 순간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리산드라가… 아니, 귀족파의 그 누구라도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아델하이트가 나의 약점이 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나? 리산드라는 한 달 동안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아델하이트가 무얼 하든 크게 나서지 않고 하게 두었고, 멜테이아 후작도 그를 따라 평소보다 몸을 사렸다. 귀족파의 동향은 확실히 수상했다. 내가 아델하이트만 바라보았으니 눈치채지 못 했을 뿐.
불안감이 엄습했다. 게다가 아델하이트는… 아델하이트는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을 터였다. 갑작스레 이 마음을 전하면 당황하겠지. 그가 원할 것은 단순한 정치적 파트너일 터였다. 그는 정치인이니까. 나처럼 제 감정조차 통제하지 못 하는 한심한 무인이 아니니까. 공작의 지위로는 조금 부족한 권력과 권위를 채워주고, 무력으로 자신을 보조해줄 수 있는 존재. 나는 그 역할만을 해야 했다. 아델하이트가 나의 이런 마음을 알면 거리를 둘지도 몰랐고, 그런 가정은 정말 죽기보다도 싫었다.
“오랜만에 연회장에서 뵙습니다, 폐하.”
괜히 바보같은 마음을 품어버린 탓에 아델하이트의 말에 어떻게 답해주어야 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을 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평소에는 듣자마자 표정을 찡그리는 목소리였지만, 오늘만큼은 차라리 그가 말을 건 것이 다행이라 여겼다.
“엘레노어… 공작.”
“예, 폐하. 탄신일을 축하드립니다.”
“그래, 고맙네.”
그럼에도 그 얼굴을 보자 속이 뒤틀리는 것은 이제 습관에 가까운 것 같았다. 연회를 망치고 싶지 않아 억지로 웃고는 있었지만 실은 그냥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아델하이트 앞에서 리산드라와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가 가진 나에 대한 감정이 무엇이든간에…
“대공 각하께서는 잠시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으실까요? 오늘은 제 딸아이가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다 하여 온 것인지라.”
“…그러지. 좋은 시간 되시게나.”
붙잡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가지 말라, 내 옆에 있으라며 만류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 감정은 완벽하게 숨겨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델하이트가 먼저 자리를 피했지 않나? 괜히 붙잡았다가 누가 눈치채기라도 하면…
아델하이트가 떠난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하여 리산드라가 말한 딸아이…에 대한 것은 거의 신경을 쓰지 못 하였다. 그래서인가, 공녀가 갑자기 말을 걸자 당황스러움에 제대로 된 답이 나오지가 않았다.
“폐하.”
“어, 어…?”
정말 바보 같은 대답이었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차라리 앞으로 만회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를 부른 들뜬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엘레노어 공작가의 삼녀, 리리엔 엘레노어 인사드립니다. 항상 만나뵙고 싶었습니다, 폐하!”
프릴과 리본이 잔뜩 달린 풍성한 치맛자락을 살짝 잡으며 몸을 숙여 인사하는 모습은 정말 완벽한 커트시였다. 태생부터 귀족이었으며 살아오는 동안 단 한 가지의 고난도 겪지 않은, 그림으로 그린 듯한 사랑스러운 귀족 영애의 모습에 일순간 심장이 저릿했다. 나는 이 사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신경써야 하는 일이 많아 잊고 있었지만,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리리엔 엘레노어. 엘레노어 가의 삼자매 중 막내. 작년 내가 주최한 황실 무도회에서 데뷔탕트를 마친 고작 열아홉 살의 어린 공녀. 엘레노어 가의 공녀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내가 연 무도회에서 데뷔탕트를 치룬 자이며, 그 이후 특유의 천진함과 사랑스러움, 엘레노어 가 소속이라는 후광으로 사교계를 제패한 유명 인사였다. 게다가 최근에는 유명한 이슈가 생겨 더더욱 그를 모르는 이가 없었는데, 그것이…
“폐하의 탄신 연회가 열린다는 것을 듣고 꼭 참가하게 해 달라며 어찌나 떼를 쓰던지. 소식은 들어 아시지요? 우리 리리가 폐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 뒷말은 듣지 않아도 맞출 수 있었다. 수줍은 듯 배시시 웃는 리리엔의 모습을 보자 마음에 돌덩이가 들은 듯 무거워졌다.
그 소문이 돈 지는 반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며 듣지 못 한 척 행동해왔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당연하게도, 내가 그런 일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는 것. 그리고 둘째는 이 아이의 어머니가 리산드라 엘레노어라는 것. 그래서 리리엔과 만날 일이 생기면 항상 내 쪽에서 먼저 피해왔다. 이 사랑스럽고, 밝고, 천진하기만 한 아이를 상처주고 싶지 않아 피했다. 나는 미움받을 용기도, 상처를 줄 용기도 없었다. 반란이 일어났을 때 리리엔은 고작 열다섯이지 않았나. 그랬던 아이에게… 고작, 리산드라 같은 이를 어머니로 두었다는 이유로 상처를 주는 것은 너무 잔인한 것 같았다. 그나마 리산드라도 내 마음을 아는지, 아니면 황실과 적대하는 입장에서 평소와 다른 짓을 하기에는 부담이 되었는지 리리엔을 나와 만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행이라 여겼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그래, 엘레노어 공녀. 소식은 많이 들어 알고 있네. 짐이 바쁜 일이 있어 지난 무도회에서 제대로 챙겨주지 못 하여 마음이 쓰였기야 했지.”
리산드라에 대한 비호감을 억지로 내리누르며 미소띈 얼굴로 화답했다. 여기서 성을 내 봤자 내 꼴만 우스워지겠지. 거절할 명분이 없는 자리니까. 아델하이트라면 이렇게 행동했겠지,싶은 말과 표정을 억지로 끌어내어 반응하였다. 그러자 리리엔은 예상치 못 했다는 듯 토끼같은 눈을 크게 뜨더니 곧 부채로 입을 가리며 쑥쓰럽게 웃는 소리를 냈다. 그 모습에 괜히 마음이 아팠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계속 속여도 되는 걸까? 나는 그에게 조금도 마음이 없는데. 이렇게 구는 건 그저 기만이지 않나.
리리엔은 듣던 대로, 그리고 처음 스쳐가며 본 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인형처럼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잘 관리된 붉은색 머리카락,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분홍빛 화장, 그리고 프릴과 레이스, 리본과 꽃 등으로 장식된 화려한 드레스까지. 리산드라와 똑같은 붉은 붉은 부채까지 들고 있는 그 모습은 어릴 적 언니가 좋아하던 칸나 백합을 떠올리게 했다. 꽃 같은 사람. 그래서… 상처주고 싶지 않은 사람. 나는 어릴 적 너무 이르게 어른의 사정을 깨쳐야 했지만, 다른 이들까지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열아홉이면 충분히 다 큰 나이라 하겠지만, 그래도… 이런 순수함은 사교계에서 쉬이 볼 수 없는 것이라, 지켜주고 싶었다.
“리리…라고, 불러주셔도 되는데.”
그렇게 말을 뱉어 놓고는 부끄러운 듯 온몸을 배배 꼬며 리산드라를 힐끔 쳐다보는 리리엔의 모습에 괜히 죄악감이 심장을 조여왔다. 내가 이 요청을 받아주어도 되는 걸까? 그 순수함을 지켜주고 싶다는 게, 그를 사랑하겠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오히려… 오히려. 정말 그 순수함을 언제까지고 지켜주려 한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잖나.
“큰애가 얼마 전에 결혼을 했지 뭡니까. 멜테이아 후작이 흔쾌히 둘째를 내주어 일이 일사천리로 해결되었죠. 그걸 보더니, 우리 리리도 다시 불이 붙은 모양입니다.”
딸을 아끼는 척 하면서도 음흉하게 웃는 리산드라의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나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황후를 들이는 것은 황실의 후사 문제와 직결되고, 황실의 존속과 제국의 번영을 위해서는 언젠가 이루어야 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상대가 엘레노어 가라면…
“폐하께서도 이제 황위에 오르신 지 2년이 지났고, 슬슬 황후를 들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황위에 오르시기 전에 하셨으면 더 좋았겠지만…”
국혼. 부담스러운 주제에 뭐라 답해야 할 지도 모르겠어 입을 닫았다. 이래서… 이래서 아델하이트가 가지 않았으면 했는데. 한 달 내내 아델하이트에게 당하기만 한 리산드라가 굳이 딸까지 데리고 이곳에 온 데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임을 알고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몰라 또다시 리산드라에게 원하는 대로 할 기회를 넘겨주고 말았다. 아예 이 자리에서 거절할까? 하지만 이건 어차피 사적인 대화일 뿐인데. 황비를 들이고자 할 때 리리엔이 다시 신청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나는 괜히 리리엔을 상처주는 꼴이 되지 않나?
답을 내어줄 이 없는 고민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헤집었다. 결국 내가 뱉을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 공허한 한마디 뿐이었다.
“생각…해보겠네.”
왜 오늘은 아델하이트가, 내가 그를 필요로 할 때 와주지 않은 걸까. 애꿎은 아델하이트에 대한 원망만을 곱씹었다.
연회는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엘레노어 모녀로부터 도망치듯 빠져나온 나는 곧 셀레스티아에게 붙잡혀 귀족들의 선물 증정식에 참여해야 했다. 분명 기쁜 자리여야 했는데, 머리가 복잡하여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귀족들의 축하를 들으며 그들이 가져오는 선물에 적당히 반응만 해 주었을 뿐이었다.
아델하이트의 선물은 노아 바이에른의 보검이었다. 그동안 아리아나가 사용하고 있었지만, 이제 사용할 사람도 없으며 자신이 무인이 아니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더 좋을 거라 생각해 가져왔다 말했다.
엘레노어 가에서 온 선물은 화려한 예복이었다. 리산드라는 선물을 건네며 옷의 원단부터 장식까지 전부 리리엔이 직접 고른 것이라며 그의 존재를 강조했다. 그때 본 바로는, 엘레노어 가의 소가주조차 데려오지 않은 듯 했다. 연회에 온 목적이 곧 리리엔이었다는 것이겠지.
전혀 내 취향이 아닌 예복에 괜히 머리만 더 아파 의자에 늘어지듯 몸을 뉘였다. 정말, 일에는 집중도 안 되고…
“폐하.”
그때 시종장이 나를 불렀다.
“엘레노어 공녀께서 방문을 요청하시어 우선은 응접실로 안내해 드렸는데…”
“뭐라고?”
“저, 저희도 돌려보내려 했는데… 공작께서 말씀하시길 폐하와 약속이 되어 있다 하셔서…”
아. 빌어먹을. 그제야 기억이 났다. 이래서 어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었어야 했는데.
리리엔을 데려온 리산드라는 내게 평소 하지도 않던 사담을 하며 리리엔과의 혼담을 자꾸만 언급했고, 나는 어서 대화를 끝마치고 싶은 마음에 대충 무슨 말이든 다 알겠다 하며 자리를 피할 순간만을 호시탐탐 노렸다. 그때 리산드라가 리리엔을 황궁에 방문하게 하겠다는 말을 하기야 했다. 단순히 예의상, 아니면 상황상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렇게 다음날이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올 줄이야. 정말 리리엔이 그렇게 적극적이라고? 그럴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리산드라의 계략인 것만 같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실내 정원으로 안내하도록. 더 작은 쪽. 나도 바람이나 좀 쐐야겠어…”
“알겠습니다.”
그래도 얼굴은 봐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끄응, 하는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지금 거절하면 나중에는 이걸 빌미로 무얼 요구할지. 차라리 짧은 만남으로 끝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천천히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리산드라 없이 리리엔만 온 것 같으니까 이야기가 수월할 터였다.
어젯밤, 연회가 끝나고 고민을 마쳤다. 리리엔에게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감정과는 별개로, 나는 그가 내게 계속 구혼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이리 구는 것을 받아주다가… 나중에 거절하면, 그 상실감은 어쩐단 말인가. 게다가 아무리 내가 개인적으로 리리엔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가 엘레노어 가의 사람이며 리산드라의 딸이라는 것은 바뀌지 않았다. 내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귀족파를 쳐내려던 계획에 차질이라도 생긴다면 아마 나는 평생을 후회하겠지.
그런데도 괜히, 정원으로 향하던 발걸음은 쉽사리 떼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잘 돌려보낼 수 있을까… 그것만을 고민하던 나는 끝내 나약한 본성을 버리지 못 하고 리리엔이 선물했던 그 옷으로 갈아입고 정원으로 향했다. 사람을 대하는 일은 정말이지 너무 어려웠다. 눈앞에 보이는 적을 베기만 하면 되는 전장이 아니라, 사람 한 명 한 명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는 순간은 앞으로도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폐하.”
“그래, 엘레노어 공녀.”
황궁의 정원은 여럿이었지만, 실내 정원은 딱 두 곳 뿐이었다. 하나는 대규모 티파티, 혹은 작은 연회를 열 때에 사용되는 커다란 돔 같은 곳이었다. 어릴 적, 언니는 미래의 가주들이 될 영애들을 모아 그곳에서 친분을 다지곤 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위치한 곳은 그곳이 아니었다.
작은 정원. 물론 말이 작다지만 그래도 황실의 정원인 만큼 가로, 세로가 수십 미터에 달하는 크기였다. 이곳은 대대로 황실의 휴게 공간이었지만, 비밀리에는 밀회나 정부와의 놀음을 위해 사용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리리엔을 이곳으로 부른 것도 다분히 고의적이었다. 내가 리리엔을 애정하여 굳이 이곳에서 만난 것처럼 보일 테니까. 리산드라를 위한 퍼포먼스. 그 이상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제 리리엔에게 집중해야 했다. 혹시 모른다. 리산드라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리리엔을 통해 무언가 계획을 세웠을지도 모르지.
“보고 싶었습니다.”
리리엔이 방긋 웃었다. 티끌의 망설임도 없이 기다리던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는 모습에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강하게 나가기로 했으니까. 그 사실만을 되뇌이며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나가 있어라. 내가 부르면 들어오도록.”
정원까지 나를 따라온 시종들을 우선 물렸다. 어떤 방향으로든 오늘의 이야기가 새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최대한 듣는 귀를 줄여야 했다.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리리엔과 개인적으로 볼 일은 없을 테고, 자기방어 수준의 대항이 크게 알려져 좋을 일도 없으니까.
시종들을 향해 살짝 돌렸던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리자, 코앞까지 다가온 리리엔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럴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지만, 정말 그럴 줄이야. 이건 리리엔의 의지인가? 아니면 리산드라가 무언가를 하기 위해 시킨 일일까? 자꾸만 그를 의심하게 되는 내가 싫으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리산드라는… 리산드라는. 정말 왜 이런 일을 벌여서.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이가 원망스러웠다.
“폐하.”
“공녀. 잠시…”
잠깐, 뭔가 이상한데? 리리엔의 시선을 피하려 이마에 손을 집으며 그에게 물러나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리리엔이 자연스레 팔짱을 끼는 것까지야, 그럴 수도 있다며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나지막한 목소리는? 항상 발랄하게 들떠 있던 리리엔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분명 리리엔의 것이기는 했지만…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 이건 지금까지 리리엔에게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밀려드는 당황스러움과 섬뜩함에 재빠르게 손을 내리고 리리엔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리리엔은 웃고 있지 않았다.
끼이익… 시종들이 나가며 문이 닫혔다. 그리고 그 순간 내게 팔짱을 낀 리리엔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팔을 빼려 살짝 힘을 주자, 리리엔의 손은 그저 가볍게 흘러내렸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아델하이트가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대처할 수 있었을 텐데. 그라면… 리리엔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알아내어 내게서 떼어놓든지, 그 의도를 말하도록 하든지 했을 텐데.
물러나라는 말을 끝마치지 못 했다. 하지만 리리엔은 이미 물러서고 있었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었음에도 나보다는 조금 낮은 붉은빛의 시선이 나를 또렷하게 응시했다. 그의 모습은 여전히 사랑스러운 인형 그 자체였다. 일부를 땋아 장식한 머리카락, 어제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짙은 화장기, 온갖 리본과 프릴로 장식된 것이 어제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드레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지금, 리리엔을 처음으로 사람같다 느끼고 있었다.
“…리리엔?”
갑작스레 그를 이름으로 호명하게 되었다. 이유는 나도 알 수가 없었다. 그냥 갑자기… 그가 리산드라와는 별개의 인물로 보였다. 리산드라의 딸인데도. 리산드라가 데려온 사람인데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리산드라의 취향으로 꾸며진 사람인데도…
“죄송합니다, 폐하.”
아무런 감정 없는 그 목소리에 깨달았다. 그랬구나. 너도 나와 같았구나…
“폐하의 통솔력과 무력을 보고 멋진 분이시라 생각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걸… 제가 폐하를 사랑하고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시더군요. 제가 알았을 때는 이미 상황이 겉잡을 수 없이 커져버려서, 어머니를 거짓말쟁이로 만들 수는 없으니…”
“연기했구나.”
리리엔이 처음으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지 못 하자, 내가 직접 그가 내뱉어쓸 말을 대신함으로서 문장을 완성했다. 그리고 리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차피 귀족파는 황실과 사이가 좋지 못 하니 막내딸의 투정이라 생각하고 흘려보내실 줄 알았거든요.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이야기하는 리리엔은… 내가 지금까지 알던 사람같지 않았다. 사교계의 꽃. 엘레노어 가의 사랑스러운 막내. 그 모든 수식어 중 단 한 가지도 지금의 리리엔에게 어울리는 것이 없었다. 애교 섞인 콧소리 대신 침착하고 무덤덤한 말투로 차분히 이야기했고, 항상 유지하던 과장될 정도로 밝은 웃음 대신 사무적이지만 친절한 무표정을 지었다.
“사랑스러운 딸이었던 적이… 없구나, 너.”
“네. 그건 그냥… 필요해서 만들었던 가면이었어요. 언니의 승계권을 방해하지 않아야 했으니까요.”
리리엔이 동의할 줄 알고 던졌던 말이지만, 정말 동의하자 가슴 속에서부터 기묘한 동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도 그랬으니까. 정계에 관심이 없던 것도 사실이지만 내가 정치에 관심을 보이면 장차 황제가 될 언니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일까 걱정해 더더욱 기사들과만 함께했다. 리리엔도 그랬던 것이겠지. 정치에 아무 관심도 없는 천진한 막내. 언젠가 정략혼을 통해 다른 곳으로 떠날 사람… 그런 인물을 연기해야만 했겠지.
“그래도 다행인 건, 제가 이렇게 굴어와서인지 어머니께서 저를 어리게만 보시더군요. 막내라서 그럴 수도 있고요. 계획을 숨길 생각도 없으셨어요. 그래서 폐하께 모든 것을 말씀드리려 결심한 거예요.”
리리엔은 분명 리산드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그 씁쓸한 표정에 괜히 내가 양심에 찔렸다. 나도 리리엔을 가리켜 어린 영애니, 천진한 아이니 하며 그의 가능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리리엔이 알았다면 기분 나빠했겠지. 왜 아직도, 정계에 그리 오래 몸을 담았으면서도 사람들이 연기하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질 못 하는지. 사과해야 하나 싶다가도, 오히려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을 리리엔이 알게 되면 더 기분이 나쁠 것 같아 말을 삼켰다. 리리엔이 원하는 건… 내게 사과하는 것. 리산드라가 ‘순진한 막내딸’인 자신의 ‘황제를 향한 사랑’을 이용해 계획을 세운 것을 방조한 것에 대한 사과였다. 그럼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엘레노어 공작이 너를 이용해 무슨 작전을 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걱정 말아라. 나는 엘레노어 공작의 딸과 결혼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어.”
이게 리리엔이 원하는 게 아닐까. 리리엔과 눈을 맞추며 한 마디 한 마디 진심을 담아 힘주어 말했다. 나도 나지만, 리리엔이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는 것 따위 바란 적 없었으니까. 리산드라는 리리엔을 믿고 있다 하니 그를 속이는 것 정도는 쉬울 터였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절당해 상처받은 막내딸의 눈물. 그 정도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다. 내가 아닌 리리엔이 힘을 써야 하는 부분이지만, 그래도 나는 리리엔을 믿었다. 나도 같은 아픔을, 고통을 겪었으니까.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을 탐내면 자매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에 애써 더더욱 관심이 없는 척 하다가 타인의 기대에 맞추어 살게 되는 어려움을 아니까.
“아… 폐하. 그게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오늘 폐하께 청혼을 하러 왔습니다.”
“어? 아니… 왜?”
이게 아닌데. 상식적으로 이해하지 못 할 말에 잠시 사고가 정지했다. 아니… 나를 사랑한 적 없다면서? 그리고 나도 그와 결혼할 생각이 없다 했는데?
아무 생각을 않고 내뱉는 말은 아닌 듯 했다. 차갑고 어딘가 피곤한 안색이면서도 확신과 자신감이 담긴 어조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리리엔은 자신과 정반대인 성격을 연기하면서도 엘레노어 가를 위해 사교계를 주름잡을 능력이 있는 인재이지 않았나. 처음부터 나보다 계략을 짜는 데에 훨씬 능할 터였다. 그러니… 들어 봐야겠지.
“설명을… 해줄 수 있나.”
내가 들어도 확신이 없는 목소리였지만, 리리엔은 내 말투를 지적하지 않았다. 되려 알겠습니다,라는 짧은 답을 내뱉고는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듯 했다.
“귀족파와 황제파의 대립이 원래 이렇게까지 심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그래. 이렇게 된 지는 이십 년이 조금 넘었… 어라?”
“네, 어머니께서 공작위를 차지하셨을 때부터입니다.”
처음부터 생각지도 못 한 이야기로 시작한 리리엔은 자신이 아는 귀족파의 역사를 읊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리산드라는 공작 자리를 얻자마자 가장 먼저 귀족파의 모든 힘을 자신이 끌어다 쓸 수 있도록 밑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노아 바이에른이 바이에른 가의 가주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는 말을 퍼뜨려 귀족파에게 황제파를 몰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불어넣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수많은 뒷공작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귀족파의 주요 인선들도 다수 물갈이되었다. 지금 엘레노어 공작가의 오른팔인 멜테이아 후작가 역시 그렇게 새로이 귀족파의 중심에 앉은 가문이었다.
리산드라가 모든 규칙이나 세력에 얽매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리산드라는 기존의 엘레노어 공작가 가주들보다 훨씬 큰 판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시에는 황제파와 제3세력을 가리지 않고 친분을 쌓는 등 이용하여 귀족파 내부의 입지를 다지는 데에 사용하거나 황제파 내부에 불신의 씨앗을 심어 몇몇 가문들을 귀족파로 흡수하였다. 방향이 달랐을 뿐이지 기존의 권력놀음에 철저히 기반한 움직임이었다. 결국 귀족파와 황제파는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칼을 숨긴 관계에서 마주치기만 해도 으르렁거리는 관계까지 왔으니, 리산드라의 움직임은 성공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리산드라를 전혀 잘못 알고 있었구나. 그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내가 이런 수 싸움이나 권력놀음 같은 데에는 젬병이라는 사실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그랬지만, 내 주적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하고 있을 줄이야. 생각해 보면 당장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에만 급급해 단 한 번도 리산드라의 목표를 알려고 한 적은 없었다. 숲을 보지 못 하고 나무만 보았다. 그러니 아델하이트가 고작 몇 번의 의회에서 리산드라를 이겼다고 그리 좋아했겠지. 리산드라는 더 먼 곳을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어머니의 최종 목표는… 제 추측이지만, 황후를 통해 황제를 조종하는 겁니다.”
“너를 이용해서 나를?”
“네. 물론 지나가다 스쳐 들은 것이 절반에 제 추측이 절반이라 확실한 건 아니지만요.”
사랑에 눈이 먼 사람은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리리엔은 처음 보는 냉소까지 지으며 그렇게 덧붙였다. 과연, 일리는 있었다. 평소의 리리엔과 같은 사랑스러운 사람이 곁에서 맴돈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빠질 테니까. 리산드라가 보기에 리리엔이 그저 어머니의 말을 잘 따르는 순진한 아이라면 결국 리산드라가 리리엔을 통해 황제를 통제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러면… 그러면, 리산드라는 황제파와 귀족파 모두의 수장이 되는 것과 다름없다. 그 둘이 싸울수록 사이에서 이득을 챙기는 자 역시 리산드라 한 사람이었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머리를 얻어맞은 듯이 멍해졌다. 리산드라가 그래서 나를 죽이지 않았나? 똑똑한 언니보다는 내가 더 조종하기 쉬울 것 같아서? 얕보였다는 것도 수치스러웠지만, 객관적으로 틀린 것이 없다고 느껴져 아무 말 할 수 없는 처지가 더욱 비참했다. 리산드라가 생각하는 만큼 리리엔이 멍청하지 않았더라면. 아니면 어머니의 생각을 알고도 묵인했다면… 언젠가 리리엔은 황후가 되고 나는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리산드라가, 리리엔이 원한다면 아델하이트의 목에 칼을 겨눌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왜 내게 결혼하자 하는 거지? 이해가 되지 않는데. 네가 하는 일은 되려 리산드라를 제국의 최고 권력자로 세우려는 게 아닌가?”
분노가 치밀어올라 옆에 있는 나무를 강하게 쳤다. 리리엔에게 향하는 분노는 아니었다. 하지만 무엇이라도 해야 이 화가 풀릴 것 같았다. 리리엔의 잘못은 아니지만, 결국 리리엔을 통한 작전이지 않았나. 이 여자는 제 어미에게 얕보인 것에 대한 수치심도 없나? 장기말 따위로 여겨졌는데?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리산드라를 ‘엘레노어 공작’이 아닌 이름으로 호명한 것도 모를 정도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제가 폐하께 부탁드릴 것은 단 하나입니다.”
리리엔의 무표정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평소 사랑스럽게 느껴지던 하이톤의 목소리는 조금의 떨림도 없이 차갑고 소름끼칠 정도의 침착함을 유지했다. 대단한 사람이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워졌다. 대체 무엇을 해야 리산드라의 계략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저와 결혼하되, 저를 사랑하지 말아주세요.”
“…그럼 내게 무슨 이득이 있지?”
솔직히 말해 리리엔의 제안을 더 듣기도 싫었다. 리산드라의 딸이어서는 아니었다. 리리엔이 생각한 수단이 결혼이라는 것이 걸릴 뿐이었다. 리리엔이 리산드라의 염원을 이루어주려 나를 유혹하려 한다거나, 언젠가 그가 내게 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델하이트 때문에. 그가 아주 잠시라도 내가 리리엔을 사랑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어차피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런 오해 따위 사고 싶지 않았다.
“실은 어머니가 이렇게 서두르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거든요. 원래라면 폐하께서도 젊으시니 몇 년은 후에 황후 이야기를 꺼내시려 하셨어요. 어머니께서 지금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괜히 마음이 급하신 것 같아요.”
“아프다고? 그렇게…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연기를 잘 하시는 분이시거든요. 곧 가주 자리를 넘기려고 하시기는… 하는데, 언니는 이 작전에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보니 어머니께서는 제가 황후가 될 때까지는 물러나지 않으실 거예요.”
“그래서, 너를 황후로 만들어서 리산… 엘레노어 공작이 가주 자리를 놓게 만들어라?”
“네. 어머니의 방법은 가문 내에서도 찬반이 명확하게 갈리고 있어서 어머니만 물러나시면 언니는 어머니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저희 자매끼리는 이미 이야기를 마쳤거든요.”
머리가 아팠다. 너무 많은 정보가 한번에 쏟아져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몰랐다. 리산드라가 아프다고? 어제만 해도 멀쩡했는데. 그리고 이런 약점을 내게 알려주는 이유가 뭐지? 이 정보를 들은 이상… 나는 그냥 리리엔을 황후로 삼지 않으면 되는데. 리산드라가 다른 전략을 세워올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몸이 좋지 않다 하니 그가 죽을…때까지만 버티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입에서 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리산드라가 살기를 바라나?”
“…염치없지만, 네. 그래도 모녀간의 정이 있지 않겠어요.”
리리엔이 처음으로 내 눈을 피했다. 그 모습에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리리엔이 원하는 것은 리산드라의 생존일까. 가주 자리에 있으면 신경써야 할 것도 많고 건재한 모습을 보여야 할 테니까. 차라리 요양이라도 가는 게… 리산드라에게는 더 좋을까.
처음으로 마음이 흔들렸다. 나도… 아픈 어머니를 둔 감정은 잘 알기 때문에. 리리엔은 왜 이런 것까지 나와 닮았을까. 아픈 어머니와 곧 그 자리를 이을 언니를 두고, 차라리 언니가 그 자리를 일찍 이어받기를 소망하는 것. 나도 정확히 같은 상황을 겪어보어 그 참담한 감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나는, 결국 내 소망을 이루지 못 했다. 언니는 어머니의 자리를 이어받기로 예정되어있던 날을 채 한 달도 남겨두지 않고 죽었다. 그리고 이만 일선에서 물러나 건강을 챙기시려던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교육시키기 위해 더 오래 그 자리에 계셔야만 했고, 결국 돌아가실 때까지 하루도 쉬지 못 하셨다. 아직도 그 순간만 떠올리면 죄스럽기 그지없다. 내가 괜히 적의 본진을 기습하겠다며 나서서. 언니의 곁을 지키지 않아서… 언니는 죽고 어머니가 더 고생하신 것 같아서.
리산드라는 내 숙적이며 가장 큰 원수다. 아리아나 바이에른과 함께 반드시 복수해야 할 인물로 꼽았었다. 그렇기에 리산드라의 병과 별개로 그를 처치하고자 하는 마음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리리엔은? 반란이 일어났을 때 리리엔은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어린애였는데. 무언가를 알았을 리도, 저지할 수 있었을 리도 없었다. 그런 리리엔에게 정말 내가 겪은 아픔을 똑같이 겪게 하는 게 나의 복수일까?
“제 어머니께서 저지른 짓에 대해서는 깊이 통감하고 있습니다. 벌을 내리신다면 막으려 하지도 않을게요. 그냥… 그냥, 건강만 회복하게 해주실 수 있을까요.”
들어줘야 할까. 알겠다는 말이 목구멍에서 나올까 두려워 입을 꾹 닫았다. 리리엔의 청을 들어줘야 할 이유는 리리엔에 대한 측은지심 하나. 그리고 거절해야 할 이유는 아델하이트에 대한 마음…과, 귀족파보다는 황제파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정치적인 목적. 귀족파 가문의 영애를 황후로 앉혔다가는 무슨 뒷말이 나올지 몰랐다. 역대 황후들은 거의 황제파 가문 출신에, 굳이 귀족파 가문에서 황후를 세우는 경우는 두 세력의 화친을 위해 노력하는 상황이 아니면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존재감 없는 황후가 되겠습니다. 이건 약속드릴 수 있어요. 폐하와 거의 마주치지도 않고… 그저 없는 사람처럼. 조용하게 살게요. 그렇다 하여 황후의 직무도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아냐. 거절한다.”
애절한 표정까지 지으며 다급하게 애원하는 리리엔의 모습에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그런 삶이… 가능한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나. 리리엔은 리산드라만을 위해 제 인생 전부를 내던지려는 제안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모녀 사이가 각별하대도, 이건 내가 용납할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한다. 솔직히 리리엔보다는 아델하이트 쪽이 더 신경쓰였다. 황후가 된 리리엔과, 그 결혼을 바라보며 내가 얼마나 리리엔을 아끼고 사랑했으면 리산드라의 딸이라는 사실까지 무시하고 황후로 앉혔을까,라고 생각할 아델하이트를 생각하면 속이 쓰렸다. 절대… 절대, 그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나마 리리엔을 위한다는 핑계가 좋은 명분이 되어주어 다행일지도.
“네 사정은 안타깝지만, 황후라는 자리는 그런 이유만으로 선정할 수 없어. 황후는 황제와 함께 이 나라를 이끌어가야 하는 사람이다.”
거짓말을 했다. 어차피 그런 것 따위 중요하게 생각한 적도 없으면서, 어머니께 들은 이론적인 소리만 늘어놓아 변명을 붙였다. 진짜 이유도, 내가 붙인 핑곗거리도 도저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아델하이트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퍼진다면? 리리엔이 그런 삶도 괜찮다고 우기면? 그런 상황은 도저히 대처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제가…!”
“아니. 더 듣지 않겠다. 이만 돌아가게, 엘레노어 공녀.”
마음을 굳게 먹고 리리엔의 말을 끊었다. 단호한 태도에 리리엔은 내가 설득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충격받은 표정으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심장이 아려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넘어가면 안 된다. 냉정해져야 한다. 머릿속에서 그 말만을 되뇌였다. 리리엔이 다시 입을 열면… 도저히 설득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이 감정적이기만 한 성격이 정말 죽도록 싫었지만, 바꿀 방법을 찾지 못 했으니 미리 대비해야겠지.
리리엔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달싹이더니, 결국 내 사무적인 말투에 포기한 듯 해탈한 미소를 지었다. 실례했습니다,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그렇게 겨우 들릴 정도의 작은 소리로 쥐어짜듯 말하더니, 예의바르게 인사를 올리고선 내가 들어왔던 문으로 느릿하게 걸어갔다. 문을 나서기 직전 다시 옷을 정리하고 얼굴에 억지 미소를 띄우는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다. 어쨌거나 그에게 상처를 주었으니까. 그 거짓뿐인 삶이 얼마나 어려울지 가늠도 가지 않는데, 어쩌면 리산드라의 은퇴와 함께 그만둘 수도 있었을 연기를 내가 억지로 계속하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모든 것을 취할 수는 없다. 그걸 깨달은 이상 나는 리리엔과 아델하이트 중 한 명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리고 내 선택은 아델하이트였다.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려도 될까요?”
“…고하라.”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 리리엔이 문을 나서기 직전, 나를 돌아보며 슬픈 미소와 함께 내뱉는 청까지는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허락 직후 괜히 허락했나,라는 생각에 잠시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바이에른 공작 각하… 분명 능력있으신 분이지만, 너무 믿지는 마세요. 생각보다 무서운 분이시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지?”
“제니티아 백작 영애의 암살건… 알고 계시겠죠. 그거, 공작 각하께서 소가주셨을 시절에 일으킨 일이시거든요.”
제니티아 백작가. 당연히 알고 있었다. 변경에 위치해 백작가 치고는 넓은 영지에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해 지위는 낮더라도 황제파에서의 중요도는 웬만한 후작가를 능가했는데… 십여 년 가량 전, 소가주가 티파티 중 잔에 묻은 독극물로 인해 암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때 범인으로 지목당했던 것은 카이다 엘레노어, 엘레노어 공작가의 삼자매 중 첫째이자… 리리엔의 큰언니였는데. 리산드라가 힘을 써 결국 증거 불충분, 무협의로 종결된 사건이었다. 그래서 리리엔이 알고 있었던 건가?
잠깐 흔들렸다. 정말 찰나였지만 아델하이트를 의심했다. 하지만 곧 리리엔의 말에는 아무 증거가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고작 말 몇 마디로 아델하이트를 의심할 필요가 있나? 괜한 분풀이로 나와 아델하이트의 사이를 이간질할 생각이라면, 한참 잘못 생각했을 테다. 지금까지 다른 이들은 리산드라의 눈치를 보느라, 아니면 엘레노어 공작가의 눈치를 보느라 나를 도와주지도 않던 중 유일하게 나를 수렁에서 빠져나오게 도와준 자가 아델하이트인데. 그를 의심하거나 경계하게 만드려는 것부터가 리리엔의 계략일 것이었다.
“아무리 제 편이라도 필요에 의해 언제든 내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도…”
“그만. 내가 언제 내 사람을 음해하라 하였지? 그따위 이간질로 나를 흔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내가…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을까. 진심으로 해를 입을 거라 걱정해 내뱉은 말이든, 가벼운 혀놀림으로 내 판단을 흔들려 하였든 결국 변하지 않는 결론에 괜히 화가 치밀었다. 괜한 자격지심이라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내 가장 아픈 곳을 건드는 리리엔에게 도저히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 내 이번은 네 사정을 보아 벌하지 않고 넘어가겠다. 그러니 다시는. 다시는… 그런 말을 지껄이지 말아라.”
“…죄송합니다.”
리리엔은 이상하게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사죄의 말을 내뱉고는 문을 열어 멀어져가는 구두 소리와 함께 사라질 뿐이었다. 구두 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자,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쓰러졌다. 열린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급히 내게 다가와 일으켜 세우려 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짧은 시간동안 너무, 너무 많은 이야기가 오갔고 너무 많은 정보를 얻었다. 하지만 그 시간 속에서도 나의 결심은 굳건했다. 리리엔에게 상처를 주는 한이 있어도, 나는… 나는, 아델하이트를 믿기로 했다. 아델하이트가 나를 배신할 리 없었다. 바이에른 가의 세력과 입지도 결국 황실의 절대적인 비호에서 오는 것인데, 그 지원을 끊어낼 이유가 없지 않나. 내가 의심한 것도 그저 웃으며 넘겨준 사람이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의심하겠나…
그렇게, 그렇게 믿었다.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델하이트는 보란 듯이 내 믿음을 배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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