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호

2. 황후

창문으로 아무 빛도 들어오지 않는 밤, 방에는 작은 촛대 하나만이 켜져 있었다.

잠에 들 시간이라 씻고 침의로 갈아입기까지 했지만 낮의 일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왜? 대체 왜? 아델하이트가 나를 적으로 돌리기로 결정했다고? 대체 무슨 뒷배가 있어서? 설마 내가 엘레노어 가와 내통한다 여겼나? 연회에서 리산드라와 대화한 것 때문에? 고작 그 정도로?

아델하이트는, 아델하이트만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언제까지고 내 편일 거라 생각했는데. 처음에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하기만 했지만 이제는 배신감에 손이 떨렸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는가. 그 자리에 올려준 사람이 나인데. 은혜도 모르고…!

하,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그래, 그건 좀 심했다. 어차피 아리아나 바이에른은 내가 죽여야 하는 사람이었고, 나도 필요에 의해 아델하이트를 그 자리에 앉혀둔 거니까. 그래도 오늘은 전적으로 아델하이트의 잘못이었다. 나는 그를 믿었는데… 내게 언질도 없이, 단 한 마디도 없이. 내 일에 그렇게 훼방을 놓다니.

최근, 리산드라가 한 수를 접어주는 틈을 타 아델하이트와 나는 리산드라가 걸어놓은 자잘한 규제들과 각종 제약들을 하나하나 끊어내고 있었다. 최근 있었던 총사령관 건을 들어 리산드라가 과거 반란 당시에 걸었던 총사령관 추천인의 제약을 없던 일로 만들었고, 황제파의 일원이자 엘레노어 공작가와 인접한 영지를 가지고 있는 뮤리에트 후작가가 기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황실 차원에서 곡식을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다. 일은 순조로웠고, 나는 어제 리리엔과의 대화에서 리산드라가 의회에서의 승리를 더 이상 노리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받아 오늘, 기회가 있을 때 최대한의 이익을 내보려 했다.

리산드라가 반란 당시에 걸었던 세 가지 조건들 중 두 가지는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델하이트의 정계 데뷔 이후 많은 중도 귀족들이 황제파 측으로 넘어오고 있었고, 의장 자리는 아델하이트가 과거 리산드라와 아리아나가 약속했던 것을 핑계 삼아 가져왔으니 의회와 관련된 사항들은 이제 더 이상 효력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전, 총사령관을 리산드라만 추천할 수 있게 했던 조건도 리산드라의 군에 대한 무지와 최근에 있던 사건을 내세워 없던 일로 만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가 남아있었다. 추밀원은 아직 건재했기 때문에.

오직 황제의 선택만에 좌지우지되는 일들. 추밀원은 그 일들에 한해 그 누구보다 큰 영향을 행사했다. 귀족파로 가득찬 추밀원은 내가 무엇이라도 할라치면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방해했다. 신설된 독립 기관이다 보니, 아델하이트나 다른 황제파 귀족들의 힘도 미치지 않아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리산드라가 의회에서는 아델하이트의 존재 때문인지 이전보다 소극적으로 나오며 내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 준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 대신인지 추밀원의 귀족들은 나를 훨씬 집요하게 괴롭혔다. 최근 한 달 동안 추밀원의 견제 탓에 나는 일을 평소의 절반 정도밖에 쳐내지 못 할 정도였다. 추밀원에 대한 내 비호감은 끝을 달리고 있었고, 오늘이 추밀원마저 해체시키기엔 적기라 생각했다. 운이 좋으면 리산드라는 리리엔 쪽에 총력을 가하고 나를 방심시키기 위해 추밀원을 내어줄 것이었고, 아니더라도 아델하이트의 도움을 받으면 최대한 밀어붙일 수 있을 거라 계산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추밀원의 존재 가치에 대한 말을 꺼냈다. 추밀원은 사실 정말 이질적인 기관이라는 말로 시작해, 추밀원이 지금까지 세운 특별한 공적이 없다는 식으로 대화를 텄다. 일부 귀족들은 동의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고, 몇은 시큰둥해 보였다. 그리고 리산드라는 아무 표정 변화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저게 정말 아픈 사람의 기색인가 싶을 정도의 형형한 눈빛이었다. 그 시선이 불편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전부 리산드라의 손아귀 안에 있는 것만 같아서.

그때 멜테이아 후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듣기로는 폐하께서 조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신다는데, 그렇다면 당연한 결과 아닙니까? 말을 듣지도 않으시면서 성과가 없다 보채시다니…’

은근한 비꼼이 섞여있는 말에 발끈했지만, 애써 참았다. 내가 화를 내면 내 꼴만 우스워진다. 아델하이트는 눈치가 빠르니 금방 나를 도울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아델하이트는 과연 내가 아무 말을 않을 때 입을 열어주었다.

‘멜테이아 후작의 말이 일리가 있군. 폐하와 소통이 되지 않으니 성과를 낼 수 없다라… 추밀원의 개편이 필요하겠어.’

아델하이트는 그렇게 나지막히 말했다. 하지만 그동안의 성과와 화려한 데뷔, 제국이 세워졌을 때부터 단 한 번도 제국 최고 가문의 자리를 놓지 않은 바이에른 가의 후광 탓에 그 말에 집중하지 않은 자는 없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적을 추켜세워주거나 약간의 아부 비슷한 것을 섞는 것은 아델하이트의 습관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나는 그가 추밀원을 없애기 위한 초석을 깔고 있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아델하이트가 진정으로 하고자 한 말은… 이 다음에 올 말이었다.

‘폐하를 위해 설립한 추밀원이 제 역할을 하지 못 하다니, 신하로서 통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니 인선을 한 번 물갈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국의 절대 황권이 독재로 변모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추밀원을 없앨 수는 없잖습니까. 제국을 위해서라도 잘못된 관습은 바꾸어야 하니까요.’

절대 황권. 그리고 독재. 몰아치는 말들에 그저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델하이트가 저런 말을 하다니. 나를 위해 설립한 추밀원이니 뭐니 한 것은 내 기분을 살펴 반박하지 않도록 밑밥을 까는 동시에 추밀원 설립의 정당성을 세우기 위한 수단이었다. 내가 가장 믿고 가장 듬직하게 여기던 아델하이트의 무기가 나를 향할 때의 기분은 정말이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깨끗이 비워지는 것 같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비현실적인 상황 속, 이게 악몽이라면 제발 꿈에서 깨고 싶다는 생각만을 가진 채 의회를 능숙하게 진행하는 아델하이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해체하고자 했던 추밀원은 결국 존속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갈아치운 절반의 인원 중 대다수는 아델하이트가 앉힌 사람이었다. 이상하게도 리산드라는 아델하이트를 지지했다. 평소에는 방관은 하더라도 지지까지는 하지 않았는데. 모든… 모든 일이 내 상식과는 반대로 흘러가는 상황 속 나는 현세에 속하지 않는 사람처럼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의회가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 한 채, 멍하니 앉아있기만 했다.

아델하이트는 더 이상 의회에서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의견을 묵살하고 제멋대로 일을 진행시키기 시작했다. 게다가… 리산드라는 언제 포섭한 건지. 내 편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아꼈는데. 혹 그의 권한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려 하면 내 권한을 내세워 도와주기도 했는데.

‘사랑에 눈이 먼 사람은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리리엔이 했던 말이 다시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되었다. 애써 부정하려 했지만… 아텔하이트의, 리산드라의 전략은 처음부터 이것이었나. 다시 밀려오는 배신감에 침대의 이불을 손에 꽈악 쥐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반란이 일어났을 당시, 아델하이트는 겨우 살아남은 게 아니었다. 리산드라가 살려준 것이었다. 언젠가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내가 그에게 반하도록, 그를 통해 나를 통제할 수 있도록. 그리고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싶었을 때. 내가… 내가 그에게 반했다 결론내렸을 때. 본색을 드러낸 거겠지.

최근에 깨달은 리산드라의 주특기는, 선택권을 쥐여주는 척 하면서 모든 선택지를 닫아놓는 것이었다. 상대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자신에게 이득이 될 수 있도록. 어머니께 내 목숨으로 거래를 제안했을 때, 리산드라는 이미 언니를 죽인 것부터 제 목적을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대로 나를 죽여도 다음 황제는 방계 황족들 중에서 찾아야 할 테니, 입맛대로 다루기 쉬웠을 테다. 어쩌면 군을 물리지 않고 그대로 황궁을 점거해 황위를 찬탈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리산드라는 어머니와 거래를 함으로써 많은 정치적 이익을 얻고, 동시에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나를 황태자로 만들어 휘두르기 쉽게 했다. 괜히 황위를 차지해 다른 견제 세력이 나올 가능성을 두고 보는 대신 모든 세력의 수장을 입맛대로 다룰 수 있도록.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내가 정말로… 지금처럼 아델하이트를 사랑하게 되든, 아니면 리리엔을 아끼게 되었든 리산드라에게는 상관이 없었겠지. 아무튼 나를 통해 황제파를 조종하기만 하면 되니까.

어쩌면 연회에서 리산드라가 내게 대화를 청할 때, 아델하이트가 자리를 피해준 까닭도 이것이었을 테다. 이미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서. 이미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 이상 내게 다정히 대해줄 이유도 없었겠지. 연막이자… 보험이었던, 리리엔을 접근시켜야 하니 자리를 피해줬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그동안 리산드라가 조용하다가 오늘 나섰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원래는 리리엔과 관련된 작전에 신경을 쓰느라 피곤해서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면 건강 탓에 마음이 급하다는 것과 상충될 터였다. 리리엔이 리산드라의 입장에서 그렇게 조종하기 어려운 사람도 아닐 것이었고. 내게 아델하이트가 그 누구보다 훌륭하고 멋지게 비춰질 수 있도록 중요하지 않은 의제들 따위는 내준 거겠지.

내가, 내가 그렇게까지 만만했을까.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었을까. 후회와 자책이 밀려와 가슴이 답답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바보같이 당해버렸으니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이 와중에도 그게 그저 나쁜 꿈이었기를 바라는 내가 너무 싫었다. 아델하이트의 미소가, 다정함이, 온정이… 전부 계획된 거였다니. 그에게 피해가 갈까, 비즈니스 관계를 더럽힐까 애써 마음을 숨긴 내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아델하이트는 진심인 적도 없었는데, 나 혼자 설레어하고 기대하며 설레발친 모든 시간들이, 그 좋은 추억들이 이제는 어디에도 말하지 못할 나쁜 기억들이 되었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었다. 이렇게까지 믿고 신뢰한 사람한테 배신당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애써 심호흡하며 내가 이제부터 무얼 해야 할 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감정보다는 이성을 따라야 했으니까. 이미 벌어진 일에 미련을 가지면 안 된다. 그렇게 되뇌였다.

앞으로 의회는 기대할 수 없었다. 리산드라와 아델하이트가 손을 잡았던 거라면… 리산드라의 판단 하에 아델하이트가 가주로 올라설 수 있던 거라면, 사실 아델하이트의 은인은 내가 아니니까. 추밀원도 아델하이트가 손댄 이상 겉으로는 나를 위하는 척 했어도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봐야 했다. 그러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솔직히 말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방법은 하나 있었다. 하지만 사용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라는 게 문제였다. 리리엔을… 리산드라의 계획에 반대하면서, 제국 내에서 상당한 지위가 있는 사람을. 이용해야만 했다. 따지고 보면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대처였다. 엘레노어 가문 내에서는 리산드라의 방법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 하고, 바이에른 공작가까지 건들며 세력을 삽시간에 불렸으니 분명 그 속은 모래성일 터였다. 리리엔이 내게 진실을 말했다면. 혹시라도 카이다 엘레노어가 내 편이 되어준다면.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지 않을까.

머리로는 이 이상 깔끔하고 확실한 전략이 없었다. 그럼 나는 무얼 망설이는가?

사실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이렇게 모든 증거들이 명백하고, 아델하이트가 나를 기만했음이 확실한데도 쉽사리 다음 걸음을 내딛지 못 하는 이유를.

나는 아직도, 아직도 아델하이트에 대한 마음을 접지 못 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가 마음을 바꾸어 다시 내 편으로 돌아설까 싶어서. 정말 혹시라도 그가 내게 다시 보여줄지도 모르는 다정함이 그리워서… 돌이키지 못 할 강을 건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마음을 굳혀야겠지.

“엘레노어 공녀… 리리엔과의 만남을 주선하도록. 날짜는 다음 주.”


리리엔이 황궁으로 오기로 한 날이 되었다.

원래는 이번에도 실내 정원에서 만날 생각이었다. 내가 진정으로 리리엔을 애정하는 것처럼 꾸며 아델하이트에게 조금의 충격이라도, 약간의 상처라도 주고 싶었다. 아니, 그냥 그가 내 행동을 신경썼으면 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차피 아델하이트가 내게 아무 마음이 없었다면, 그저 이용하기 위해 그 모든 다정함을 보여준 거라면 미동조차 하지 않을 테니까. 그저 내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알량한 수단이자, 혹시… 정말 혹시라도 그가 내게 진심이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던 마음속 작은 희망에 기대 그에게 매달리는 것 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이미 가망 없는 일에 희망을 거는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 사실을 깨닫자 차마 보란듯이 리리엔과의 사랑놀음을 전시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혼자 기대하고 상상하여 다시 실망할 텐데. 후회할 일 따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리리엔을 부르는 이유는 내게 새로운 파트너가 필요해서였다. 그랬기 때문에 리리엔과 리산드라가 도착했다는 시종장의 말에도 그들을 정원으로 안내하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곳으로 데려와라. 공작과… 공녀, 둘 모두.”

내게 가장 익숙한 공간을 택하기로 했다. 내가 주인이 될 수 있도록. 내 페이스를 잃지 않을 수 있도록. 그리고 그 공간은 다름 아닌 내 집무실이었다. 혼자 있을 때가 많고, 의회가 없는 날이면 거의 하루의 절반 가량을 보내기 때문에 이제는 눈을 감고도 책장 따위에 부딪히지 않으며 돌아다닐 수 있는 방. 이곳에서라면, 이곳에서라면… 전처럼 리리엔의 분위기에 휩쓸려갈 걱정은 없을 거라 믿었다.

엘레노어 모녀를 만나야 한다는 긴장감과 압박 때문일까, 괜히 자세가 불편해 고쳐앉았다. 괜히 팔걸이를 세게 쥐자 딱딱하고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괜히 사치하는 것이 싫었기도 하고, 엘레노어 가의 견제가 너무 심해 의자가 꽤 오래되었음에도 바꾸지 않았는데, 막상 손님맞이를 할 때가 되자 약간의 후회가 들었다. 금 장식은 손때가 타고 빛이 바란 데다 나무에 새겨져 의자의 화려함을 더해주던 무늬들은 전부 무뎌져 이제는 원래의 느낌과 많이 달라졌는데. 스스로에게 당당하면 치장이 초라하더라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던 과거의 내가 바보같아 헛웃음이 나왔다. 사치가 맞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용인하는 것이 황실의 권위를 세우기에 적합했을 텐데. 이 낡아버린 의자를 보면 리산드라는 무어라 생각할까. 나를 더 만만히 보기만 하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집무실 앞에 당도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딱 적당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몰라 중요한 서류들은 치워두었고, 옷매무새도 다시 정갈하게 정리한 이후였으니까. 그들을 들라 하자, 시종들이 집무실의 문을 천천히 열었다.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 태양빛이 들어오는 방향에, 두 사람이 도착하기 직전까지도 서류를 보느라 조명까지 켜 두었던 집무실은 복도보다도 밝아 집무실에 들어오며 내게 짧은 인사를 올리는 리리엔과 리산드라의 표정을 아주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리산드라는 언제나와 다름없었다. 깊은 연륜에서 나오는 여유와 자신감이 가득한 옅은 미소는 그가 병자라는 것도 망각하게 했다. 내가 리리엔을 불렀다는 특수한 상황 때문일지, 그의 옷은 평소보다 훨씬 화려했다. 웬만한 연회가 아니라면 리산드라가 저렇게까지 꾸미는 것은 보기 쉽지 않았는데. 꽃인지, 무엇인지 모를 화려한 무늬가 잔뜩 들어간 어두운 자주색 천은 고압적이면서도 우아하여 공작이라는 그의 지위를 실감시켰다. 평소 의회 등 공식 석상에서는 모자를 즐겨 쓰더니, 지금은 공석보다는 사석에 가까운 자리라고 생각했는지 모자 없이 머리를 묶어올리기만 하였다. 그 자신감 가득한 모습에 괜히 짜증이 나 표정이 일그러질 뻔 했지만, 그를 속여넘겨야 함을 상기하며 가벼운 무표정을 유지했다.

리리엔과 손을 잡는 것과는 별개로 아델하이트와 리산드라의 사이를 찢어놓거나 하다못해 결속을 약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택해야만 했다. 그리고 결론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내가 아델하이트를 전혀 마음에 담아두고 있지 않다 믿게끔 만들어야 했다. 리산드라부터 리리엔까지, 전부 내가 귀족파에 반감을 갖게 만들어 그에게 의지하도록 만들게 한 작전을 깨부숴야만 했다. 운이 좋다면 리산드라는 더 이상 아델하이트에게 이용 가치가 없다 판단해 바이에른 공작가를 멸문시키거나 세력을 빼오려 할 테고, 당장은 두고 보려 하더라도 그 전략을 폐기시키는 정도의 효과는 있을 터였다. 내가 리리엔에게 더 마음이 기운 것처럼 굴면 리산드라는 리리엔 쪽에 총력을 다하겠지. 스스로를 믿지 못 해 아델하이트와 관련된 유혹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내게는 이 이상의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리리엔에게 집중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사랑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은 채 리리엔을 향해 시선을 돌렸지만 정작 그를 제대로 바라보자마자 내가 느낀 감정은 참담함이었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모습이란 말인가. 그날 내가 처음으로 사람이라 느꼈던 이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내 눈앞의 존재는 아름답고 화려한 리산드라의 인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미 연기임을 알고 있는 밝은 미소, 수줍은 척 조금은 어설프게 인사하는 몸짓. 머리에 리본을 주렁주렁 달고, 목에는 레이스 소재의 초커까지 달아 평소보다도 훨씬 꾸며진 모습이었다. 리리엔은 단 한 번도 저런 삶을 원하지 않았다 했는데. 그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 이 모습은 내가 그의 제안을 거절한 결과이겠지. 황후, 혹은 예비 황후의 자리라도 얻었다면 내 부인 될 사람이라는 명목 하에 리리엔이 황궁에서 지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리리엔의 제안을 거절했었다. 아델하이트 때문에. 결국 나를 배신할 그 기만자 때문에.

짧은 숨을 뱉고 서둘러 미소를 지었다. 리산드라라면 내가 순간적으로 내비친 그 짧은 당혹스러움조차 파악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내 진의를 숨겨야만 했다. 다행히도 이 건에 대해서는 미리 생각해둔 것이 있었다. 리산드라를 속이려고 준비해 둔 것은 아니지만… 리리엔에게는 내가 그의 제안을 한 번 거절한 빚이 있으니, 미리 한 가지 선물을 주어 앞으로의 그의 삶이 지금보다 편안할 수 있도록 해주려 했었다.

“오늘도 얼굴을 보아 좋군, 엘레노어 공녀.”

“저도요, 폐하!”

리리엔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이야기하자, 리리엔은 자아가 없는 인형처럼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을 반응을 터뜨렸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는 듯 얼굴 가득한 미소와 나를 올려다보며 깜빡이는 분홍빛 눈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조화로웠다. 리리엔이 미리 알려준 것이 아니었다면 깜빡 속아넘어갔을 정도로. 그러니 리산드라도 속았겠지. 그런 생각에 괜히 다시 죄책감이 들었지만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은 없었다. 하기로 한 것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몇 번을 봐도 이런 옷은 영 내 취향이 아니란 말이지.”

보란 듯이 리리엔의 한쪽 팔을 잡아올리며 소매 끝의 프릴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진심이기도 했지만, 리산드라를 자극하기 위해 내뱉은 말에 가까웠다. 이 모습은 분명 리산드라의 취향이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리산드라 본인도 레이스나 프릴 따위가 가득한 옷을 입은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데다, 가끔 얼굴을 볼 수 있던 엘레노어 공작부인은 지금 리리엔의 모습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는 방식으로 치장하곤 했으니까. 거추장스럽고 촌스럽게만 느껴지는데, 제 기준에서는 이게 무슨 미의 기준이라도 되는지.

리리엔이 맺어져야 하는 상대인 내가 대놓고 이렇게까지 말하면 아무리 리산드라라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리산드라의 반응을 확인하려 살짝 곁눈질을 하자, 과연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 약간의 고민이 섞인 표정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내 말로 인해 변경을 고려하고 있다는 이야기니까. 리리엔은 처음에는 연기를 위한 습관인지, 진심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놀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곧 이해했다는 듯이 눈매가 휘어지더니 순식간에 불안해보이는 표정으로 바뀌는 모습에 그것이 잠시 내보였던 리리엔의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주 잠시였지만, 연기가 가미되지 않은 리리엔의 표정을 눈에 담았다는 사실이 숨통을 틔워주는 것 같았다. 리리엔이 그 표정을 내보일 수 있었던 것도 내가 리리엔을 향해 다가가며 잠시 두 모녀의 사이를 가렸기에 가능했겠지. 그런 생각이 들 때쯤 리리엔이 고개를 숙였다.

“어, 어머니께서… 이게, 예쁘다고… 해 주셨는데… 폐하께서는 별로신가요…?”

리리엔의 속내를 몰랐다면 놀랐겠지만, 이미 이것이 연기라는 것을 아는 내게는 능숙히 응답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울먹이는 느낌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도, 불안한 듯 몸을 떠는 것도 완벽하게 자연스럽다는 감정을 줄 뿐 나를 동요시키지 않았다.

“나는 조금 더 심플한 디자인을 선호해서. 공작은 내 취향을 모르는 듯 하니 한 벌 선물해 주도록 하지.”

이 말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대사였다. 언젠가 쓰려고 생각은 해 두었지만, 이렇게 쓰일 줄이야. 다행인 것은 그 덕에 연기는 젬병인 나라도 말을 더듬거나 목소리가 떨리는 일 없이 말을 마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무사히 연기를 마쳤다는 만족감에 입가에 미소가 올랐다. 그리고 리리엔에게 맞춰주어 고맙다는 의미로 잡았던 팔을 더 끌어올리며 미끄러지듯 손을 잡아 새하얀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이 모습이 내가 리리엔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기를. 그렇게 생각하며 긴장하던 나를 진정시킨 것은 의외로 리리엔의 연기였다. 선물을 해주겠다는 말부터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지더니, 내가 손등에 입을 맞춘 것을 기점으로 어린 아이처럼 꺄르르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내게 잘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일까. 어쩐지 그 모습이 마냥 연기같거나 불쾌하지는 않았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즐거운 담소 나누시지요.”

그 모습을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고 있던 리산드라는 그만 됐다고 판단했는지 느릿하게 인사를 올리며 몸을 돌렸다. 나는 짧은 손짓으로 작별인사를 대신했고, 시종 몇과 함께 리산드라가 집무실을 나서고 문이 완전히 닫히자 나와 리리엔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았나?”

“훌륭하셨어요.”

이번에는 가식 없는 옅은 미소로 나를 올려다보는 리리엔의 얼굴에 기쁨이 번졌다. 온전히 내 힘으로 리산드라를 속여넘기다니. 리리엔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그래도 좀처럼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사교계보다는 전장을 선호하고, 정계에서 활동해온 경력도 짧았던 나는 그 무슨 수를 써도 리산드라를 이길 수가 없었는데, 그 첫걸음을 이제 와 뗀 기분이었다. 아델하이트같은 조력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게 아니라 내가 짠 판에서 내 의도대로 일이 흘러가게 해 끝내 원하던 결과를 쟁취해낸 것은 정말 처음이었으니까.

“흠, 흠… 그래. 옷은 진짜로 선물해 줄 테니 그렇게 알고 있도록. 활동할 때 편한 옷으로…”

너무 좋아했나, 리리엔에게 리산드라를 속여넘기는 일은 일상이었을 텐데. 그런 생각 때문에 괜히 헛기침을 하고 화제를 돌리려다 불현듯 생각난 것이 있어 말이 뚝 끊겼다. 활동할 때 편한 옷이라. 누가 봐도 불편하기 그지없는 리리엔의 옷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치렁치렁한 치맛자락에 고개를 돌리기만 해도 거슬릴 장신구들, 그리고 소리로 보아 굽이 높은 구두까지 신고 있는 것으로 보였으니까. 하지만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은 조금 다른 종류였다. 원래는 심플한 원피스와 굽이 없는 단화를 주려 했지만…

“리리엔, 바지가 없지?”

“네? 네… 그렇죠. 전부 어머니께서 마련해 주시는 옷이라.”

“그럼 내가 줘야겠는데. 공작에게도 마음에 든다는 티를 내도록 해. 앞으로는 그런 옷 위주로 마련해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리리엔의 표정에 천천히 놀라움이 번져갔다. 이런 일은 상상조차 하지 못 했다는 듯이.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보고 자란 것이 공작부인의 화려함이었을 테니까. 곧이어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리는 리리엔의 모습에 뿌듯함이 가득 차올랐다. 리리엔이 이렇게 편하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있던가. 아마 한 번도 없었을 터다. 리산드라의 앞에서는 사랑스럽고 순진한 막내딸을 연기하느라, 그리고 사교계에서는 천진한 이미지를 유지하면서도 사교계의 정점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느라 힘들었을 테니까. 얼굴 가득 미소를 띄며 웃어보이는 리리엔의 모습에 그제야 내가 왜 리리엔에게 유독 물렀는지, 그를 처음부터 아꼈는지를 깨달았다. 리리엔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던 사람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사교계의 정점. 차분하고 냉정하지만 가족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고 정이 넘치는 사람. 나만큼이나 주변의 기대에 맞추어 살아야 했던 사람. 내가 지금 차지한 자리의 원래 주인이자 나의 친자매. 언젠가 이 제국을 이끄는 성군이 되어 제국민들을 보살피고 나라를 번영케 했어야 할 사람. 이사도라 트리폴리움. 리리엔은 내 언니를 많이 닮아있었다. 부드러운 말투도, 꽃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도 전부. 리리엔을 처음 본 날 그가 드레스에 달고 왔던 수많은 칸나 백합은 언니가 가장 좋아했던 꽃이었고, 가끔 사교계에서 주제 삼아 이야기하던 것을 들은 적이 있는 책은 언니가 가장 좋아하던 것이었다. 나보다 키가 작아 나를 살짝 올려다봐야 한다는 점, 할 말을 찾지 못 할 때는 눈을 여러 번 깜빡이는 버릇, 질문을 할 때면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것까지. 왜 이제 알아챘을까 싶을 정도로 닮아있었다. 언니의 것과 닮은 편안한 웃음소리가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을지도.

이사도라 트리폴리움. 한때는 내 세계나 다름없던 사람이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업무로 바쁜 어머니보다는 나를 아껴주고 잘 놀아주던 언니를 잘 따랐고, 그렇기 때문에 언니의 앞길에 정말 티끌만큼도 방해가 되지 않고 싶었다. 황태자 책봉식 때 그 누구보다 큰 박수로 언니를 축하한 것도 나였고, 언니와 어머니가 하는 일이 궁금해도 관심이 없다 말하며 수련에 매진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둘째인 나는 언젠가 정략혼을 위한 도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감각은 있었고, 언니에게 필요하다면 그것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라 다짐하면서도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언니의 앞길을 막는 것들을 모조리 베어버리는 검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 어머니께 장군이 되겠다 졸랐다. 열 살 남짓했던 내게는 언니의 성공이 가장 큰 행복이며 내 삶의 의의였으니까. 죽는 게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언니를 위해서라면 기쁘게 죽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언니가 죽었다는 사실은 내게 너무 큰 충격이었다.

“리리엔… 리리엔. 가장 좋아하는 책이 뭐지?”

터져나오는 질문을 막을 수가 없었다. 리리엔은 당황한 듯 보였지만, 잠시의 고민 끝에 쉽게 답을 내주었다.

“미쉘 작가의… ‘사라진 새들의 지저귐’이요.”

이건 알고 있는 정보였다. 하지만 다시 확인해야 했었다. 혹시라도 그건 그저 사교계를 위한 가면이었을 수 있으니. 하지만 아니었다. 리리엔은 그 부분에서만큼은 연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책은 언니가 가장 좋아하던 책이었다. 그 이유는,

“작가의 문체가 담담하면서도 감정선이 깊고, 무엇보다 주인공이 인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좋았어요.”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하며 미소짓는 리리엔의 표정은 아름다웠지만 나는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언니도 그 이유 때문에 미쉘 작가의 책들을, 그리고 특히 그 책을 좋아했기 때문에. 리리엔은 마침 동화와도 비슷한 책이니 아이같은 모습을 보이기에도 좋았다며 덧붙였지만,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특별히 좋아하는 꽃은 있나?”

“음, 글쎄요. 굳이 꼽자면 칸나 백합같네요. 저희 가문의 색과도 잘 어울리고… 형태도 꽤 아름다워서요.”

“좋, 좋아하는 음악은?”

“요즘은 테오도르 작곡가의 피아노 협주곡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질문을 거듭할수록 리리엔의 표정에는 의문이 차올랐지만, 도저히 질문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질문을 하는 이유조차 몰랐다. 언니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싶어서였는지, 아니면 둘을 겹쳐보지 않기 위해 차이를 발견하고 싶었던 것인지. 아마 둘 모두였을 것이다. 리리엔에게 더 정을 주기가 싫어서, 이번에 또 정을 주었다가 배신당하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 할 것 같아서 철저히 비즈니스 관계로만 대하고 싶었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온전히 내 편이라 확신할 수 있었던 사람의 흔적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외로웠구나. 아무도 마음 붙일 사람이 없어서. 셀레스티아는 아무리 오랜 친구라 하여도 신분의 차이가 있어 나를 완전히 편하게 대하지 못 했고, 아델하이트의 경우 처음에는 내 편인지 확신할 수 없어 경계했는데 시간이 지나고서는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긴장해야 했다.

“황후가 되어라, 리리엔.”

이사도라 트리폴리움, 그리고 리리엔 엘레노어. 두 사람의 음악적 취향까지도 겹친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주체할 수 없이 벅차오르는 감정에 그를 향해 쓰러지듯 기대며 내 품안에 여린 몸뚱이를 끌어안았다. 황제의 자리는 가장 높은 곳이었다. 그렇기에 모든 제국민을 발 아래 두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옆에는 한 명의 사람도 없이 고독한 자리였다. 황제와 같은 높이에서 제국민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오직 황후뿐이었기에, 나는 리리엔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랐다.

“진짜 황후가 되어라. 황제의 그림자가 아니라… 황제와 함께, 나와 함께 제국을 빛내는 한 쌍의 태양이 되자.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이렇게 제안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하고자 하는 말이 취하지 않으려 한 태도와 함께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분명 황후 자리를 제안하려 했다. 나와 같은 높이에서 제국을 비추어 줄 또 하나의 태양이 절실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태양의 자리를 탐낸 적이 없고, 그 빛을 받아 반짝이는 달과 같은 자리에서 만족하려 했던 내게 왕관은 버거울 정도로 무거웠다. 그래서 나와 함께 그 무게를 짊어질 사람을 필요로 했었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언니와도 같은 사람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태양이었던, 나의 세계였던 사람과 비슷한 이라면 충분히 그 무게를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속이 울렁거렸다. 심장 속에서 요동치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단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건 절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사랑이었다면 리리엔을 보기만 해도 이렇게 고통스러웠을 리 없지. 후회와 미련, 동정과 친애까지 죄 섞여버린 달콤 쌉싸름한 마음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져나가며 온몸을 전율시켰다. 리리엔에게 그 마음을 숨기려 더 꽈악 끌어안았지만, 떨리는 목소리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이건… 이건, 청혼이야…”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흘렀다. 이 눈물은 언니를 향한 그리움의 눈물일까, 아니면 드디어 활로를 찾은 것에 대한 기쁨의 눈물일까. 어떤 것이든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이 모습을 보는 사람은 리리엔 한 명일 테니까. 눈물을 보여도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에 청혼했으니까.

아델하이트를 사랑했었다. 그는 동굴 속에 있는 것만 같은 내게 태양이 되어주었고, 길을 잃은 나의 손을 잡고 리산드라를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황제가 된 이후 가망조차 보이지 않던 상황에서 세력을 보전하기 위한 꾀는 전부 아델하이트의 것을 빌렸고, 그에게 대공의 자리를 쥐여준 이후로는 우리의 미래에 빛만 가득한 듯 했다. 그가 내게 속내를, 약한 부분을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음에도 그를 사랑했다. 동경에서 기인한 마음은 능력에 대한 질투 정도는 무시해버릴 정도로 강대했으니.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그는 나를 믿은 적이 없었다. 권위를 위해 나를 이용했을 뿐이었다. 나는 항상 그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이었고, 그의 앞에서 편히 지낸 적이 없었다. 더 좋아하는 자가 약자가 된다지만, 나는 황제의 자리에서도 그에게 내 마음을 완전히 숨겨야 했을 정도로 둘의 관계에서는 절대적 약자였다.

하지만 리리엔은 달랐다. 리산드라의 투병 소식조차 내게 투명히 밝힐 정도로 내게 솔직했고, 내 앞에서만큼은 연기를 하지 않았다. 제 욕망을 투명히 보여줄 정도로 나를 믿고 의지했으며, 무엇보다… 내가 가장 의지했던 사람과 닮아있었다. 이런 사람이라면. 이런 사람이라면 평생을 함께한다는 게 무리가 아닐 터였다.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믿을 수 있는 동료니까. 부부란 사랑하여 맺어지기도 하지만, 나와 같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 단순히 감정만을 따라 배우자를 고를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평생을 함께할 존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보다 훌륭한 선택지가 어디에 있겠는가?

“뜻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부둥켜안은 자세 때문일까. 리리엔의 목소리는 평소보다도 더 귓가에 깊게 파고들었다.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놀랄 법도 한데 그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아 고마웠고, 다른 사람을 겹쳐보며 대화했다는 사실이 괜시리 미안해졌다. 그래서 고개를 떨궜지만, 리리엔은 내 가슴팍을 조심스레 밀어내며 눈을 맞추었다. 힘을 주어 버티면 충분히 버텨낼 수 있는데도 리리엔의 뜻을 거스르고 싶지 않아 그를 감싸안은 팔을 천천히 풀자, 나를 또렷하게 바라보던 리리엔은 싱긋 웃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나는 감사 인사를 들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과를 해야 하는 사람인데도. 하지만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을 수는 없었다. 그냥 손수건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는 리리엔이 좋아서, 지금 이 순간을 잃고 싶지 않아서…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리리엔은 분명 나보다도 두 살이 어렸는데. 성인이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쩐지 이 순간만큼은 내가 돌봄을 받는 동생같았다.

“알리스테어…라고 불러주겠나.”

내 욕심이라는 것은 잘 알았다. 그 부모나 손윗형제가 아닌 이상 누가 감히 황제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겠는가. 하지만… 내 이름을 불러줄 어머니와 언니가 전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지금, 리리엔에게서라도 이름을 불리고 싶었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로 내게 가족이 생깃 것 같을 테니까. 피가 이어지지 않아도 혼약을 한 이상 가족이지 않은가.

“…알리스테어.”

거절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리리엔은 담담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 모습에 순간이지만 정말로 언니가 겹쳐보였다. 두 사람은 외적으로는 전혀 닮은 것이 없었는데도. 황태자의 지위에 비해 단순하고 수수한 것을 선호하는 언니와 리산드라의 취향에 맞추려 온갖 화려한 리본을 달아 치장한 리리엔은 외형만 놓고 본다면 그 둘을 동일시하는 것이 더 우스울 터였다. 아마 그렇게 보는 사람은 나뿐이겠지. 항상 위엄있는 황태자여야만 했던 언니가 가족을 대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사교계를 주름잡는 영애인 리리엔이 어쩔 수 없이 착용한 가면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것은 나뿐일 테니까.

하하. 리리엔의 모습에 갑작스레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마 우리를 이렇게 편하게 웃게 만드는 사람은 서로뿐이겠지. 우리는 정말 좋은 부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리리엔에게 최선을 다해야겠다, 그렇게 다짐했다. 내 지위가 견고해지고, 리산드라가 가주자리에서 물러날 즈음이면 리리엔이 굳이 연기를 지속할 이유도 없겠지. 아니, 있더라도 내가 없게 만들 것이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 정도니까.


의회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럴 거였으면 애초부터 아델하이트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까지 아델하이트의 도움을 받으며 겨우 난관들을 헤쳐왔는데, 이제는 그를 적으로 돌려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누군가가 심장을 옭아매는 듯 답답해졌다. 아델하이트가 아군인 양 행세하며 추밀원 해체에 반대했을 때조차 그의 말에 단 한 번도 반박하지 못 한 내가… 그가 처음부터 적으로 나오면 감당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특히나 리리엔을 위한 초석을 마련해야 하는 오늘,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시킬 자신이. 어쩌면 아델하이트를 버릴 리산드라가 나를 도울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희망은 있었지만, 그마저도 아델하이트를 상대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한 달이 조금 넘는 그 짧은 시간들 동안 귀족파로 넘어갔던 황제파 귀족들 대다수가 다시 황제파로 넘어오거나 중도에 가까운 성향을 띄게 할 정도로 뛰어난 정치적 퍼포먼스를 보일 줄 아는 아델하이트인데, 최근 들어서는 소극적으로 구는 리산드라가 그에 맞서 나를 돕기는 할까.

삼 개월. 리리엔과 함께 약속한 시간이었다. 그 안에 적어도 약혼식만큼은 끝내기로. 황후가 되려면 준비할 것이 많으니 결혼식까지는 무리더라도 약혼까지는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지금부터 보란 듯이 자주 만나고, 엘레노어 가를 신경쓰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모두가 이견없이 납득하겠지. 리리엔은 내게 약속했다. 그때까지 약혼식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여 엘레노어 가의 지위가 공고해진다면 리산드라를 설득하여 가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겠다고. 그리고 이미 사정을 알고 있는 카이다 엘레노어로 하여금 새로운 황제파, 엘레노어 공작가를 필두로 한 나만의 세력의 수장이 되도록 하겠다고. 나는 그 대가로 리산드라가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내어주고 리리엔에게 자유를 주겠노라 약속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체결한 계약이자 확실한 비즈니스 관계였다. 차라리 이렇게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정리하니 마음이 편해졌었다. 아델하이트 때는 막연한 감에 의존하느라 괜히 쓸데없는 감정이 끼어들게 되었는데, 이제는 그럴 틈도 없을 터였다. 리리엔이 내게 무얼 해주더라도 단순한 비즈니스 관계 이상의 감정은 들지 않을 테니까.

수 차례 심호흡을 하고 의회로 향하는 문을 열라 말했다. 감상에 젖을 시간도 없었다. 이제부터 바쁘게 엘레노어 가의 입지를 다져 주어야 하니까. 리리엔의 말에 따르면 최근 아델하이트 탓에 잃은 것이 많으니 리산드라는 자신이 없더라도 엘레노어 공작가의 입지가 견고하리라 확신을 가지기 전까지는 가주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내 복수를 이루고 싶기도 했지만, 리리엔과 약속한 것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제 그렇게 철없게 굴기보다는 황권과 제국을 위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귀족들이 모여있는 의회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허리를 곧게 펴고, 걸음걸이는 당당하게. 귀족들은 지난 의회에서 있었던 사건 때문에 내 입지가 줄었다 믿을 것이다. 아델하이트가 나를 이용하고 버렸다고. 그러니까 절대 그들이 상상하는 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야 했다. 충격받은 나의 모습은, 약해진 나의 모습은 손쉬운 먹잇감이 될 테니까. 아델하이트에게 우월감을 느낄 기회조차 주기 싫다는 이유 역시 존재했다. 그가 나를 떠났기 때문에 무너진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는 아직도 내가 그를 사랑한다 생각할 테니까. 더 이상 아델하이트에게 연연하지 않기로 했잖나. 절대, 절대 아델하이트를 신경쓰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게 어디 마음 먹은 대로 되던가. 귀족들의 분위기를 살피려 한 차례 의회의 내부를 둘러본 순간, 아델하이트를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얻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나를 바라보며 짓는 묘한 미소, 하필 천장의 샹들리에로부터 빛이 반사되어 눈빛을 가리는 안경, 그리고 언제나와 다름없는 예의바른 제스처. 차라리 대놓고 무언가 심경에 변화가 있었다는 티라도 낸다면 반응하기가 더 쉬웠을 텐데, 왜 이렇게까지 평소와 같은 모습인 걸까. 그게 아델하이트의 특기이자 특징임을 알면서도 괜히 원망스러웠다. 이미 내 편도 아닌 사람을 원망해 봤자 얻을 것도 없겠지만서도.

“…모두 착석하라.”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짜내 명했다. 어차피 오늘 이 자리에 내 편은 단 한 명도 없다는 마음으로 임해야 했다. 귀족파야 당연히 내 행동을 곱게 보지 않을 터였고, 황제파 귀족들의 수장은 내가 아닌 아델하이트였으니까. 어쩌면 오늘 내가 제안할 의제를 보고 리산드라가 나를 지원할지도 몰랐지만, 큰 기대는 않아야 할 터였다. 리리엔을 신경쓴다 여겨주면 좋겠지만, 저런 늙은이들은 본디 의심이 많아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특히 리산드라는 제가 직접 짠 판이 아니면 잘 나서지 않을 정도였고.

최근에는 항상 그랬듯이 아델하이트가 의회의 시작을 알렸고, 아이리스 남작이 준비된 안건들을 하나씩 불러오면 모든 귀족들이 자유롭게 토의하여 하나씩 해결해나가는 형태가 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아이리스 남작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오늘의 의회를 위해 미리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으니까. 나는 끼어들 타이밍 같은 건 모른다. 아무도 말하고 있지 않은 순간, 내 말이 끊길 염려가 없는 상황에만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마치 지금과 같은.

“준비된 안건들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의논하고자 하는 것들이 있다네.”

오래 생각해봤다. 엘레노어 가의 입지를 어떻게 챙겨주어야 할지. 어떻게 바이에른 가의 대항마로 키워야 할지. 이미 제국에서 가장 높은 귀족 작위인 공작위를 가지고 있으니 작위를 높여줄 수는 없었다. 사람들이 바이에른 가의 가주를 대공이라 부르는 것은 그들이 가장 넓은 영지와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수백년 전부터 그 권세가 흔들린 적이 없다는 점에 기인한 것이니 공식적인 작위보다는 그만큼 그들의 세력이 막강하다는 증표에 가까워 억지로 넘어서게 만들 수도 없었다. 정치적인 권한을 주기에는 의회를 제외한 제국의 주요 보직은 귀족파의 인원이 아직까지는 많은 상황이었다. 의회는 아델하이트가 버티고 있으니 무얼 하더라도 그 압도적인 정치적 재능에 삼켜질 것이 뻔했다.

“지금까지는 관습처럼 용인되어오던 일이었지만, 고칠 필요성이 있는 것들이라 느껴지더군. 지난 의회에서 바이에른 공이 한 말 덕에 깨달았어. 관습이더라도 잘못되었다면 바꾸어야겠지. 제국을 위해서.”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엘레노어 가를 지원할 명분 따위는 없다고. 그러니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엘레노어 공작가가 아델하이트의 대항마가 되기 위한 길이 그들의 권한을 늘려주는 것만은 아니니까. 오히려 지금 나는 귀족들의 힘이 커지는 것을 견제해야 했다. 본디 강한 황권이 상징이나 다름없던 제국은 그 특징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흔들리는 황권을 위해서라도 다른 선택지를 만들어내야 했다. 바이에른 가의 권력을 축소하는 방법을 통해.

“아무리… 바이에른 공작가가 위세를 널리 떨치고 있으며, 제국에서도 드문 공작위를 가지고 있다지만 최근 그 막강한 권한에 의구심을 가지게 되더군. 이건 그야말로 공국이나 다름없는 대우이지 않았나?”

누가 본다면 이미 독립이라도 한 줄 알겠어. 빈정거리는 말을 더했다. 나답지 않은 태도라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다. 목소리는 늘어지듯 여유롭게, 미소를 띈 표정은 최대한 변하지 않도록. 내가 이 자리의 주인이라는, 이 공간의 지배자라는 듯한 태도로. 이건 아델하이트가 사용하던 전략이지 평소 내가 취하던 태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내가 의회를 주도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이 방법 밖에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아델하이트를 상대로 우위를 점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사람이지만, 그래서 그를 닮은 나의 행동이 죽도록 싫었지만 필요한 것은 이용하는 수밖에.

“세금 감면… 정도 이상의 사병 보유 허가, 그리고 황제의 부재시에는 황제를 대리하여 몇 가지 안건들을 결재할 권한도 있었지. 일개 공작가가 가지기에는 과할 정도라고 생각하지 않나?”

아델하이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지만 그에게 던지는 질문은 아니었다. 귀족들을 동요시키기 위한 발언이었을 뿐. 대대로 바이에른 공작가가 그 권한들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황제의 절대적인 비호 덕이었다. 그러니 지금까지의 황제들과 다른, 나의 행보에 모두가 적잖이 놀랐으리라. 그 아델하이트조차 내 말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는 모습을 보아 다른 귀족들의 반응은 볼 필요도 없을 터였다. 당연히 모두 무어라 대꾸할지 모르겠지. 당연히도. 이건 바넨비트 경이 총사령관 자리에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리에서 아델하이트가 취한 전략과 동일했으니까. 내 적을, 아델하이트를 치켜세워주어 내가 그를 공격하리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의 말이 옳다며 그에게 동조하는 듯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내 말에 반박하지 못 하게 만든다. 내가 저격하는 당사자의 단점을 늘어놓되, 그에게 직접 묻지 않고 귀족들에게 묻는 형태를 취해 여론을 이용한다.

나는 숱한 전장을 겪어왔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은 단순히 나 개인의 무력뿐은 아니었다. 단순히 무력이, 전투력이 강하다고 하여 전투를 이기는 건 아니니까.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략이었다. 상대의 전략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정확히 대응할 수 있는 전략을 구사해 맞이하는 것. 그리고 내 장기는 그동안 적이 자주 취했던 작전을 분석하여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었다. 상대에게 혼란을 주는 동시에, 동일한 전략으로 맞붙는다면 무력이 한참 위에 있는 나의 병사들이 패배할 리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으니까. 정치판에서는 단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었지만, 아무 말 못하고 입만 달싹이는 아델하이트의 모습을 보자 내 생각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의회도 내 적들과 아군들이 뒤섞여 싸운다는 점에서는 결국 전장이나 다름없다 여기고 접근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내게 익숙한 공간이라 생각하고 대하는 것. 그렇게만 한다면 그 누구보다 뛰어난 장군인 내가 패배할 리 없을 테니까. 게다가 이곳이 전장이라 상상하자 아델하이트에 대한 내 감정 따위 신경쓸 시간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적에게 가진 감정과는 별개로 그들을 베어내는 것은 내가 수없이 반복했던 행동이니까. 내 마음보다도 몸이, 입이 먼저 움직였다. 이보다 효과적인 방법이 있을까.

“폐하.”

“설마 제국의 규율과 질서보다 제 가문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것은 아니길 바라네, 바이에른 공!”

그리고, 마무리까지! 완벽했다. 아델하이트를 완벽히 따라해냈다. 상대가 말을 하려 할 때, 무어라 할 지 미리 파악하여 선점하는 것. 지금껏 의회에서는 느껴본 적 없는 고양감과 함께 자연스럽게 목소리에 자신감이 붙었다. 사람들은 본디 제가 가진 무기의 장점만 파악하지, 단점은 파악하지 않는다. 그 무기로 수없이 승기를 가져간 자라면 더욱 그렇다. 승자는 성장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니까. 그러니 아델하이트도, 그 방법으로 패배해본 적 없는 아델하이트도 제 전략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모를 것이다.

대화하는 내내 내 시선은 아델하이트를 거의 향하지 않았다. 이 또한 아델하이트가 하던 행동이었다. 오직 여론만으로, 말싸움보다는 분위기로 이겨내는 것.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아델하이트가 이렇게 궁지에 몰린 것은 처음이라, 그리고 내가 의회에서 이렇게까지 나서는 것은 오랜만이라 그런 것이겠지. 평소의 나는 그저 황제의 권한으로 밀어붙이기만 했지만 지금은 전략을 구사하고 있어 그럴지도 몰랐다.

“세금 감면 혜택을 없애고, 가지고 있던 기타 특권 모두를 취소하지. 더불어 사병의 수도 엘레노어 공작가와 같게 제한하겠어. 그리고 의장의 지위도,”

미리 생각해 온 것들을 하나씩 읊어나갔다. 어젯밤 수도 없이 거울을 보고 연습한 보람이 있는지, 하고자 하는 말은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의장의 지위는 원래대로 황제에게 귀속시키고, 처분이 애매하여 바이에른 가가 당장은 통치하고 있던 영지도 빼앗아 황실의 것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아델하이트의 수는 완벽하게 읽고 있으니 분명 내가 승리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수를 읽힌 것은 나였으며, 가진 무기를 날카롭게 갈아두지 않은 것 역시 나였다. 아델하이트의 정치적 능력은 잘 짜여진 전략이 아니라 재능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돌발상황이라 하더라도, 제게 절대 대항하지 못 할 것처럼 굴었던 내가 나서더라도 그에게는 충분히 수가 있었다.

“푸하하핫!”

청명한 웃음소리가 의회를 뒤덮었다. 그 경박한 행동에 모두의 시선이 일순간 아델하이트에게 집중되었다. 저러던 사람이 아니었는데. 공격적으로 나설지언정 기품을 지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예의를 지켰던 사람인데. 황제의 말을 끊고, 게다가 엄중한 의회에서 웃음까지 터뜨린다고? 막힘없이 이야기해나가던 나조차 잠깐 당황하여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이후였다.

“서운합니다, 폐하.”

어째서, 어째서일까. 왜 아델하이트는 말로는 서운하다 하면서도 얼굴에는 미소를 띄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면서 몸을 일으키고 있는지. 항상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도 청중을 압도하던 그였는데. 아니, 애초에 서운하다는 게 무슨 말이지? 감정에 호소하는 건가? 내가, 내가 그에게 마음이 있으니 그 사실을 이용해보려고? 도저히 그의 수를 읽어낼 수가 없었다. 항상 사실만을 이용하고 우위를 점하여 상황을 이끌어가던 아델하이트였는데, 왜… 지금은 그렇지 않지. 이러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모르겠는데…

아델하이트는 몸을 일으키는 듯 하더니, 내 앞에 무릎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 다정한 미소를 띄며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 손길을 뿌리치면 나만 우스워질 터였기에,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신하가 저리 저자세로 나오는데 매몰차게 대응하는 것이 어디 훌륭한 군주가 취할 행동이던가?

“아무리 제게 미안하셨더라도 언질 정도는 해주실 수 있잖습니까. 폐하의 충복인 제가 폐하의 뜻을 따르지 않을 리 없는데.”

나를 흔드는 것이다. 그 사실은 직감하고 있었다. 저 다정한 미소를, 부드러운 말씨를, 청중의 시선을 한데 모으고 상황을 일순간에 뒤집어버리는 능력을. 내가 그에게 반했던 모든 이유를 꺼내어버리면 내가 흔들릴 것은 자명했기에. 그래서 내 손에 부드럽게 입맞추는 그의 모습에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흔들리면 안 된다. 내 머릿속에는 그 생각밖에 없었다. 다시 설레어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지로 진정시키려 심호흡했고, 눈앞의 존재가 나의 적임을 재차 상기시켰다.

“폐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필요 이상의 사병을 황실의 기사단으로 보내고, 의장의 자리를 폐하께 바치겠습니다. 선황 폐하께서 임시로 바이에른 가에 맡긴 영지도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제가 아무리 재주를 부려 보아도 폐하보다 뛰어나겠습니까?”

분위기가 바뀌었다. 내가 바이에른 가의 특권을 압류하는, 내게 집중된 분위기가 아닌… 아델하이트가 자진하여 모든 특권을 내려놓는 쪽으로. 이렇게 되면 손해마저 감수하고 황실과 제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대공이라는 이미지가 씌워지잖나! 바이에른 가는 약간의 손해를 보더라도 황실의 진정한 충신이라는 이름을 가져가게 될 테다. 선대 공작과는 다르다는 이미지의 쇄신까지 따라오겠지. 아직 엘레노어 가는 반란을 일으킨 가문이라는 이름을 벗지 못 했는데. 그래서 리리엔과의 결혼은 우리의 사랑이라는 명분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계획이 틀어졌다. 게다가… 평소와는 다르게 내게, 오직 내게 집중함으로서 다른 이들이 끼어들지 못 하게 했다. 무조건 내가 이 돌발상황에 대처할 수밖에 없도록.

“헌데, 폐하. 저희 가문이 진정으로 사병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고 있습니까?”

고개를 숙이고 내게 부드럽게 이야기하던 아델하이트가 고개를 들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담담한 말씨에, 그리고 다시 여유로워진 표정에 본능적으로 그의 입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너무 늦게 깨달아 선공을 아델하이트에게 넘겨주고 말았지만.

“바이에른 가가 대대로 강한 군사력을 유지한 것은, 영지에 국경과 맞닿아있는 부분이 많고 침략이 잦은 탓에 제국민들을 보호하여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시잖습니까. 영지가 수도에 가까운 엘레노어 가 수준의 군사력으로는 그들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이런 대응은 상상조차 하지 못 했다. 반박을 하더라도 대공의 권위와 어머니께서도 용인해주셨다는 점을 들고나올 줄 알았는데. 감정에 호소하는 척 나를 교란시키고 평소 하던 대로 제게 유리한 방향으로 분위기를 돌렸다. 그리고, 그리고… 여론을 이용하는 법. 정말 아델하이트는 이 분야에 악마같은 재능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단순히 의회에 참석한 귀족들만이 아닌, 제국민을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이렇게 되어버리면 나는 황실의 권위와 규율을 바로세우는 정의로운 황제가 아니라 그들의 안위 따위 고려하지 않고 귀족들을 압박할 기회만 보는 폭군이 되어버리잖나.

“고매하신 폐하의 뜻을 감히 의심하지는 않지만, 한 번만 영지민들의 사정을 고려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들이 고통받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내가 뭘 놓친 걸까. 차분하게 내려앉은 분위기 속 후회만이 몰려왔다. 아델하이트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 그에게 발언권을 내준 것? 아니면 그에게 대항했던 것 자체? 모든 일을 내 기준으로 판단한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하필 아델하이트에게 군사적 재능이 없어서, 그리고 그걸 모두가 알고 있어서, 그의 말에 반박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병사의 수를 줄이면 군사력이 약해진다. 당연한 상식이었다. 하지만 무예와 군을 지휘하는 데에 막강한 재능이 있었던 바이에른 가의 역대 가주들은 항상 총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외침에 능히 대처할 수 있었다. 내가 바이에른 가의 사병에 대해 보고를 받았을 때, 나라면 그 절반 정도의 인원으로도 국경을 충분히 방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게 내게는 너무 당연하고 쉬운 일이라 잊고 말았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전략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모두가 내 판단력 자체를 의심할지도 모른다.

“나머지… 사항들은, 예고했던 대로 행하겠다.”

어떻게든 대응해야 한다는 생각에 우선 으름장을 놓았지만, 그 말을 뱉자마자 후회했다. 그저 대답도 못 하는 머저리처럼 보이기 싫었을 뿐인데, 이렇게 되면… 결국 내 패배를 시인한 것이나 다름없잖나. 대화를 끝내기 전에 어떻게든 역공을 해냈어야 하는데. 하지만 아델하이트는 내가 다른 돌파구를 찾을 시간도 주지 않았다.

“사정을 헤아려주심에 감사할 뿐입니다.”

대화가 끝났다. 아델하이트는 다시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고, 눈치를 보던 아이리스 남작은 준비되어있던 안건을 소개했다. 나는 아델하이트의 말을 반박하지 않음으로서 암묵적으로 그의 군사를 건드리지 않겠다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내게 무엇이 남지? 허울뿐이고, 어차피 제대로 활용조차 하지 않을 의장 자리? 바이에른 가에 유의미한 타격조차 주지 못 할 정도의 세금?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작은 영지?

바이에른 가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막강한 군사력이었기에, 엘레노어 가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그 부분이야말로 내가 가장 노리던 부분이었다. 다른 것들은 그저… 바이에른 가의 세력을 추가로 약화시키면 이득이기도 했고, 군사만으로는 명분이 약한 듯 해 끼워넣었던 것에 불과했다. 그런 내 의중을 어떻게 알아차린 걸까.

두려웠다. 날씨가 꽤 더워졌음에도 오한이 들 정도로. 아델하이트의 속내를 읽을 수가 없다며 두려워하던 예전의 감정과는 그 결이 달라, 그건 진짜 두려움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했다. 그때의 감정은 불쾌감에 가까웠다. 내게 없는 재능을 그가 가지고 있으니 괜히 열등감과 자격지심이 차올라 꼴도 보기 싫었을 뿐이었다. 나는 영원히 차지할 수 없는 언니의 옆자리에 있는 모습이 짜증날 뿐이었다. 그를 정말 두려워했다면 공작위라는 훌륭한 검을 쥐여주지 않았겠지. 리산드라처럼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들려 했으면 모를까.

지금은,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아델하이트를 절대 시야에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보지 않는 순간 무얼 할까 너무 두려워서. 잠시라도 눈을 떼면 그동안 또 무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며칠 동안 준비하고 조사했으며 평소 교류가 거의 없던 아이리스 남작까지 불러 내가 말을 꺼낼 순간을 완벽한 내 무대로 만들었는데도 처절하게 패배했다. 항상 우위에 있던 그가 불리한 상황을 만들었고, 여론을 일찍이 내 편으로 돌리려 했는데도 아델하이트는 기어이 그 모든 상황을 뒤집어버렸다. 그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귀족다운 예절을 잠시 내려놓을 줄도 알았으며, 그 경박한 짓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버릴 정도로 예의바른 퍼포먼스를 이어붙일 줄도 알았다. 도저히 그를 상대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포기를 입에 담겠는가. 다름 아닌 내가 황제인데…

무력한 기분이었다. 내게 주어진 선택지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다. 리리엔과의 결혼도, 그를 통해 짜둔 작전도 아델하이트가 건재한 이상 성공이 가당키나 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한 사람에게만 기댄 나의 최후일까, 나를 도와줄 만한 다른 세력도 없었다. 그나마 나를 도울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던 리산드라는 나와 아델하이트의 가능성을 저울질하는 듯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모든 게 의미없게 느껴졌다. 아무리 발악하고 노력해도 결국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나마 내 힘이 되어줄 사람이라 생각해 아델하이트를 공작 자리에 앉혔으나 훌륭한 무기라 여겼던 그는 내 목을 찌르는 검이 되었고, 리산드라에게 복수하기 위해 칼을 갈았지만 결국 의회에서 그를 이긴 적도 없었고, 이제는 그의 도움을 바라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유일하게 모든 것을 터놓을 수 있었던 셀레스티아는 총사령관 일까지 역임하게 되며 바빠져 얼굴도 보기 힘들었다. 리리엔과의 약속은 너무 미래를 보는 계약인지라 당장 기댈 수가 없었다. 계속 이렇게 지내야 한다는 생각에 숨이 막혀왔다.

그래도… 그래도 굳이 희망적인 부분을 꼽아보자면, 좋은 소식이 있었다. 잠깐은 흔들렸을지 몰라도, 더 이상은 아델하이트에 대한 애정 때문에 고생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가식과 가면에 정말로 질려버렸으니까.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이제 다시는 그의 거짓된 다정함에 속지 않고, 그가 꾸며낸 웃음에 설레지 않겠지. 그동안의 일이… 너무나도, 너무나도 비참했지만 이 순간을 위한 초석이었으리라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펄럭-

열어둔 창문 틈새로 새어든 바람이 커튼을 밀어내었다. 그 소리에 집중력이 흐트러져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지고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였다. 해가 꽤 길어졌는데도 별이 떠 있는 걸 보니 시간이 많이 지났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손에 들고 있었던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어찌나 오랫동안 쥐고 있었는지 만년필이 닿았던 부분이 발갛게 변하며 살짝 패여있는 것이 보였다. 저녁식사 이후 쭉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았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허리가 뻐근해 몸을 쭉 펴며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었다. 리리엔의 권유로 새로 바꾼 의자는 몸에 꼭 맞추어 편안했다. 푸른색 천을 두껍게 덧대어 오래 앉아있어도 불편하지 않았고, 디자인도 깔끔하면서 고급진 것이 내 취향에서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계약으로 묶인 가짜 애인이라지만 살뜰히 챙겨주는 게 꽤 고맙네.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황제가 된 이후로는 실패뿐인 인생이라 자조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리리엔과의 결혼을 결심한 것만큼은 틀리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 같아 다행이었다.

리리엔과 연인 행세를 한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갔다. 그리고 그 연기는 순조로웠다. 처음에는 내가 불쌍한 리리엔을 이용해 리산드라에게 복수하려 한다며 떠들던 귀족들은 내가 꾸준히 리리엔과 만나며 선물을 주고받는 등 평범한 연인들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자 하나둘 의심의 시선을 거두었다. 리산드라는 겉으로 보기에는 행동에 변화가 없었지만, 리리엔의 말에 따르면 엘레노어 소공작은 공작 작위의 승계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고 했다. 리리엔을 차기 황후처럼 취급하는 분위기가 제국 내에 파다하니, 엘레노어 가문의 입지가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으리라 생각했을 터다.

물론, 리산드라가 마음을 놓고 장녀에게 공작 자리를 넘기려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을 터였다. 요즘 아델하이트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으니까. 마치 아델하이트가 의회에 등장한 날 이후의 리산드라를 보는 것만 같았다. 정말 중요한 안건이 아니라면 발언하지 않고 말을 아꼈고, 조금의 손해를 보더라도 지저분하게 토론을 끄는 일 없이 회의를 빠르게 마무리지으려 하는 기색을 보였다. 반대로 리산드라는 아델하이트가 조용한 틈을 타 이전의 기세를 회복하려는 의도인지 의회에서 다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는 내게도 도움이 되었다. 리리엔에게 개인적으로 주는 선물이라면 모를까, 엘레노어 공작가 자체를 지원하기에는 이래저래 눈치가 보였는데 리산드라가 직접 나서자 괜한 트집을 잡힐 걱정을 않고 자연스레 다양한 권리들을 내어줄 수 있었다.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아델하이트와 리산드라의 사이가 틀어졌다 봐도 괜찮을 터였다. 리산드라는 바이에른 가에 타격이 될 만한 요구들도 서슴치 않았고, 아델하이트는 무력하게 모든 것을 내주었으니. 나를 적으로 돌리며 황제파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굴어 명분도 많이 잃었을 터고, 뒷배도 잃었을 테니 당분간은 황제파의 이름으로 모인 귀족들의 내부 단결이 우선이라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게 리산드라를 배신했다면 황제파의 수장으로서 상당한 명예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 텐데,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는지 아직도 멍청하게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다니.

탁, 탁. 불규칙하게 움직이던 발이 나무 책상의 다리 부분에 맞닿아 둔탁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무난히 진행되고 있었다. 리리엔이 내 사람임을 확신한 이후로 카이다 엘레노어와 비밀리에 만나 계약서까지 나누어 적었고, 그는 피를 내어 지장을 찍음으로서 리리엔이 황후가 되는 조건으로 내 사람이 될 것을 맹세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껏 바이에른 공작가는 황실의 비호 덕에 그 강대한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 만년 2인자 신세인 엘레노어 공작가의 입장에서는 그 지원을 주겠다 하면 거절할 리가 없을 터였다. 아델하이트는 최근 조용히 지내고 있었으며 나와 리리엔의 관계에도 별다른 말을 얹지 않았다. 귀족들이 대화 소재로 그 일을 꺼낼때조차 가볍게 흘려넘기며 관심을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가슴이 답답했다. 이유를 알 수도 없었다. 그냥 무언가가 꼬인 것만 같은 기분이 자꾸 들었다. 내가 하는 일이 정말 옳은 길인지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고, 항상 막연한 불안감이 마음 한 구석에 응어리져 있었다. 차라리 이유를 알면 해결이라도 할 텐데, 이유를 알 수가 없어 괜한 짜증만이 들었다. 황후를 들여 진짜 황제로서 모든 조건을 갖추는 게 두려운 걸까? 그때가 되면 준비가 늦었다는 핑계도 없이 정말 제대로 황제 노릇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머리가 아파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내가 놓친 게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를 모를 뿐. 지금 당장의 상황에 집중하느라, 황권이 추락하는 일만은 피하기 위해서 귀족들과 힘싸움을 하는 데에 온 정신을 쏟는 동안 고려하지 못 한 게 뭘까. 아델하이트를 견제하고 리리엔을 황후 삼는 것이, 리산드라의 건강을 보장하는 대가로 견고한 내 세력을 삼는 것이…

아. 내 계획을 복기하며 책상 위에 놓인 화병을 바라보는 순간 이 불쾌감의 정체를 깨닫고 말았다. 생각보다 아주 직관적인 일이었다.

실내 정원에서 만났던 어떤 볕이 좋은 날, 리리엔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네가 그렇게 좋아하던 칸나 백합은, 나의 언니이자 내가 지금 앉아있는 황위의 원래 주인이 가장 좋아하던 꽃이라고. 내게는 언니를 의미하던 칸나 백합은 이제 리리엔을 떠올리게 하는 꽃이 되고 말았으니까. 사실 너를 그 사람과 겹쳐보고 있었노라 고백하며 원망이나 질책 정도는 감수하고 내뱉은 말이었지만, 리리엔은 언제나와 같은 올곧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 꽃을 좋아하느냐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것에 대한 질문에 머뭇거렸지만, 내가 내뱉을 답이야 뻔했다.

‘좋아한다. 무척이나…’

그리움 한 조각에 추억이 섞여 내뱉은 답에 리리엔은 그저 웃었다. 내가 선물한 편한 옷을 입고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미소짓던 리리엔은 즐거워 보였지만, 어딘가 쓰라림이 섞여있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유는 뻔하니까. 제 어머니가 죽게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마냥 행복하기만 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리리엔은 리산드라가 한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기도 했으니 더할 것이었다.

리리엔이 고통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언니와 닮은 리리엔이, 이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 중 내가 가장 친애하는 사람이 힘들어하는 것은 보고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리산드라가 건강을 회복할 시간을 달라는 리리엔의 조건을 수락했다. 대신, 거래 조건은 내가 정했다. 리리엔이 존재감 없는 그림자같은 황후가 되는 것이 아닌, 황제인 나와 함께 제국을 비추는 태양이 되어 나의 옆에 당당히 서는 것. 침착하고 능력있는 리리엔이 제 본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고 싶었으니까. 나풀거리는 긴 드레스와 아름다운 화장, 사랑스러운 성격으로 원래의 자신을 지워버린 리산드라의 인형이 끝내 황제의 노리개처럼 의견이 허락되지 않은 장식품으로 전락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봄보다는 가을을 좋아하고, 소설책을 읽는 것을 즐기며, 잠이 부족할 때면 예민해지기도 하는 리리엔 엘레노어라는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 무엇도 숨길 필요 없이 살아가는 것이었다. 아마도 나, 그리고 언니는 미처 이루지 못 한 것을 리리엔이 이루어주기를 바랐겠지.

그게 모든 일을 꼬이게 만든 원인이었다. 나 한 사람에게는 값싼 동정이었던 행동이, 고작 대리만족이나 하려던 가벼운 생각이… 애써 리리엔과 리산드라를 따로 보려 했던 안일한 마음가짐이 나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게 만들었다.

본디 나는 연좌제에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범죄자의 위로는 자식을 올바르게 키우지 못 한 죄를 물기 위해, 아래로는 범죄자의 범죄 사실로부터 직간접적인 이득을 얻었을 때 그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 벌을 내려야 한다 여겼다. 전쟁의 이치도 그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 나라의 상단이 부도덕한 일을 행해 주변국들에게 피해를 끼치는데도 지도자가 그를 방치하면, 그 상단을 통제하지 못 한 것을 명분 삼아 선전포고를 하기도 했다. 한 나라의 지도층이 부정한 방법으로 주변국들을 착취한다면, 그 국민들은 그러한 방식 덕에 부유히 살 수 있었다 하여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는 나라들도 있었다. 그러니 사실 반란군 수장이었던 리산드라 엘레노어를 어머니로 두어 열 다섯 살 때부터 반란으로 축적된 부와 명예를 누린 리리엔 엘레노어는 평소 나의 판단대로라면 필히 리산드라와 함께 처단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다짐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역시 내가 얼마나 감정적이었는지만을 깨달을 뿐이었다. 처음에 나는 리산드라를 죽일 생각이었다. 반란을 일으켰으니 가주의 목을 참하고 재산을 몰수한 다음 더 이상 공작이라 불릴 수 없도록 지위를 격하시킬 생각이었다. 황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는 그 정도는 해야 했으니. 주모자가 아니었던 아리아나 바이에른조차 즉결처분을 내렸는데, 하물며 리산드라 엘레노어는 어떻겠나. 그런데도 내가 리리엔에게는 그렇게나 관대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수치스러웠다. 나는 지금쯤 반란군 수장의 딸을 황후로 삼으려 하고 있는가. 물론 그 사실을 막연히 알고 있었기에 연인인 척, 사랑놀음인 척 연기했지만… 반역자의 딸. 그 문구 자체를 리리엔과 연관지어 떠올린 것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이건 정말이지 황제로서 실격인 판단이었다.

게다가, 사적으로는 어떠한가!

제 정신이 박힌 자라면 그 누구도 가족의 원수와 사돈지간을 맺고 싶지는 않을 터였다. 짐승도 제 부모의 원수는 알 텐데, 하물며 인간이라면. 내가 처음에 리리엔을 경계했던 것도 그 이유였다. 엘레노어 공작가에서 황후를 배출시키기가 죽기보다 싫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나는 리리엔에게 마음을 열었고, 금수만도 못하다 여겼던 일을 하고 있었다. 이래서는 나중에 어머니와 언니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도 몰랐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첫째, 리리엔은 하지도 않은 일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가문의 대소사에 개입할 권리가 없던 시절의 일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알았고, 제 어머니의 죄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리산드라의 건강을 회복할 시간을 달라는 청이 얼마나 염치없는지 알고 있었으며, 처벌을 내린다면 피하지 않겠다 말했다. 둘째, 내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아델하이트까지 포섭하여 나를 옥죄어오는 리산드라는 내게 유리한 선택지를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유일한 실수는, 막내딸을 만만히 본 나머지 리리엔이 품고 있는 꿍꿍이를 파악하지 못 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나는 리산드라가 아직 막아두지 않은 가능성을 향해 손을 뻗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말 그대로 변명이며 핑계일 뿐이었다. 리리엔이 대신 뉘우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던가? 정작 리산드라는 내게 사과 한 마디 없었는데. 다른 사람이 대신 뉘우친다 하여 감형을 허용하는 말도 안 되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카이다 엘레노어는?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이미 소공작이었는데, 나는 그와도 계약을 맺었잖나. 선택권이 없었다는 것도 비겁한 말이었다. 리리엔을 부른 것부터가 내 행동을 아델하이트가 조금이라도 신경썼으면 하는 마음이지 않았나. 감정이 눈을 가려 보지 못 했을 뿐, 그리고 리산드라는 내가 지독하게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을 뿐 언제나 내게 선택지는 있었다. 나만의 세로운 세력이 필요했다면 적당히 중도를 유지하는 가문에서 인재를 발굴했을 수도 있었다. 나와 같은 자리에서 함께 나라를 이끌어갈 황후가 정말 필요했다면 정식으로 선발 절차를 밟아 결정했어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 했고, 결국 내 정치적 생명을 핑계로 리산드라를 선처하는, 리리엔을 황후로 앉히는 길을 택하고 말았다.

하지만, 내 원수의 딸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가지게 된 시점부터 이건 애초에 답이 없는 문제였잖나. 결국 리산드라에게 약한 처벌을 내리는 것과 리리엔이 상처입는 것 중 택해야 했으니까. 선택이란 무얼 가질지가 아닌 무얼 놓을지에 대한 결정이라는 말이 깊게 와닿았다. 복수와 리리엔 둘 중 하나를 놓아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없었다. 끝내 리산드라의 처벌을 선언할 날이 오면 그 자리에서 사형 명령을 내리지 않을 자신도, 그 이후 충격받고 배신감을 느낄 리리엔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도 없었다. 아마 이대로 간다면 나는 또 후회만이 가득한 선택을 할 터였다. 물어볼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았겠지만, 셀레스티아에게 묻기에는 너무 섬세한 주제에 리리엔에게 직접 묻는다는 선택지는 고려할 필요도 없이 탈락이었다.

…아니, 한 사람 있었다. 내가 껄끄러워할 뿐, 사실 이 주제에 대해 묻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사람이. 아델하이트는 나와 정확히 같은 상황을 겪었으니까. 리산드라가 일으킨 반란 때문에 공녀의 지위를 버리고 숨어살아야 했고, 어머니와 수많은 친척들의 죽음을 겪었는데도 리산드라에게 협력했었으니까. 아델하이트가 처음 내게 적의를 드러낸 날, 내가 느낀 배신감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내 편인 척 하며 나를 기만했다는 점에서 기인한 분노와 그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사랑 따위의 감정을 품었다는 스스로를 향한 자책이 가장 컸지만, 그의 선택을 순수하게 이해할 수가 없어서였기도 했다. 반란 탓에 입지가 줄고 가족이 피해를 입었으며 삶에는 고난이 가득 들어찼을 텐데도 리산드라를 위해 움직일 수 있다니. 단순히 그가 나보다 이성적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일까, 하는 생각마저 했지만 솔직히 쉬이 납득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비슷한 상황이 되었으니까.

정말 만나러 가도 괜찮을까. 머리로는 고민했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나는 바이에른 공작저로 향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들키지 않도록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기사들에게는 잠깐 일이 있어 다녀오는 것이니 경호를 위해 따라오겠다는 그들에게 필요없다 손을 내저으며 황궁을 지키라 했다. 어차피 이 제국을 전부 뒤져도 홀몸으로 나를 상대하는 게 가능한 사람 따위가 있을지 알 수도 없는데, 가까운 곳에 잠시 다녀오는 일이 뭐가 위험하다고. 아델하이트는 나를 해칠 수 없다. 골목으로 갈 생각이야 하지만, 병사들이 매복할 만한 길도 없다. 이제 밤에도 날씨가 그리 춥지 않아 두꺼운 옷이 내 움직임을 방해할 리도 없었고, 오늘처럼 달도 없어 어두운 날 단체로 기습을 하더라도 충분히 따돌릴 자신 정도는 있었다.

검 한 자루를 차고 공작저를 향해 걸어갔다. 걷기에는 애매한 거리라 말을 탈까도 고민했지만,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아리아나 바이에른을 죽인 날이야 아예 숲 속으로 이동했으니 괜찮았지만, 오늘은 이미 만들어진 골목길을 따라갈 예정이었으니까. 그저 얼굴을 살짝 가린, 지나치게 눈에 띄지는 않는 행색으로 공작저를 향해 차분히 걸었다. 마침 육체 활동을 해서일까. 천천히 생각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결국 저울질의 문제겠지. 지금의 수치를 받아들여 황권의 기틀로 삼느냐, 아니면 그것을 참지 못 하느냐. 지금의 선택은 전자였다. 아델하이트…를 봐야 한다는 생각에 급히 나왔지만, 결국 그의 답도 비슷하지 않을까.

괜히 나왔나? 어쩐지 아델하이트가 할 말을 알 것만 같아 발걸음이 우두커니 멈추었다. 그는 리산드라에게 당장 살려달라 빌어 공작위를 얻을 기틀로 삼았겠지. 그런 자가 내게는 명예를 지키라 말할까?

그냥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그저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하필 바이에른 공작저에 거의 도착하고 나서야 이런 생각이 나다니. 그런 생각과 함께 얼마 남지 않은 거대한 별장을 향해 눈을 돌렸다. 숲길을 따라 오 분 정도만 걸어도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어쩐지 그냥 돌아가고 싶어졌다. 내가 오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니 상관없겠지. 오히려 연락 없이 방문하는 무례를 저지르지 않는 게 나으려나.

별 별 생각이 오가던 때, 내 눈에 수상쩍은 인영이 포착되었다. 공작저의 창틀에 매달려 있는 저 사람은 대체 누구지? 어쩐지 불길한 마음에 돌아가려던 발걸음을 재촉해 앞으로 나아갔다. 저 위치는, 저 위치는… 공작의 방인데. 물론 공작의 방보다는 층이 낮지만 계속 올라가다 보면 공작의 방이 보이는 창문에 도착할 텐데.

가까이 갈 수록 확신할 수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뒤덮고 복면까지 쓴 그자는 명백히 자객이었으니까.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다리가 저절로 움직이듯 달려나갔다. 누군가가 공작에게 암살자를 보냈다. 누군가가 공작이 죽기를 바란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고 무예에 재능도 없는 아델하이트를 사람까지 고용해가며 없애려 한다.

누가 보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아델하이트가 죽는 것이 내게 호재일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내 몸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발에는 불이 난 듯이 뜨거웠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내가 멈추는 순간 아델하이트가 죽는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렇게 원망하고, 실망하고, 배신감을 느낀 상대라지만 도무지 죽게 둘 수가 없었다. 그야 나는, 나는 공작을…

공작저 외벽을 마치 암벽을 타듯이 박차고 올라갔다. 그리고 암살자가 깨어둔 창문으로 몸을 던졌다. 중간에 벽에 발을 박아 발가락이 얼얼했고 창문에도 부딪혀 얇은 옷만을 입은 팔에는 유리가 박혔지만 신경쓸 시간도 없었다. 아델하이트 바이에른은, 한때 나와 함께 바로 이 저택에서 아리아나 바이에른을 몰아낸 지금의 공작은 이미 자객에게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공작이 소리를 지르지 못 하게, 소리소문없이 처리할 생각이었는지 암살자는 무기 대신 맨손으로 아델하이트를 죽이는 것을 택했다. 한 손으로는 입을 완전히 덮어 큰 소리를 낼 수 없게 했고, 다른 팔로는 몸 뒤에서부터 목을 졸라 숨을 쉬지 못 하게 했다.

그 발갛게 변한 고통스러워보이는 아델하이트의 모습에 가슴속에서 애절함이 끓어올랐다. 공작의 무력은 평범한 성인보다도 약하고, 저항조차 하기 어려워할 정도로 몸이 약했는데.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비열하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본래 암살자를 제압해 배후를 캐내려던 것도 잊었다. 그저 검을 꺼내어 그 자리에서 암살자의 목을 그었다. 그제서야 아델하이트는 콜록대며 숨을 쉬었다. 기침을 연발하며 쓰러지는 아델하이트의 상태가 괜찮을까, 걱정되어 몸을 숙였다. 분명 내 편이 아닌 사람인데, 나의 적인데도 그 순간 그런 것들은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진 듯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이 사람이 살기를 바랐다. 어떻게 죽게 놔두겠는가. 죽을 뻔 한 것만 보아도 가슴이 철렁하며 고통스러운데.

“아델하이트, 아델하이트. 나를 봐라. 괜찮나? 독은 없었나?”

쓰러진 아델하이트의 앞에 몸을 숙여 서둘러 물었다. 죽지 말아라. 내 본심은 결국 그것이었다. 아무리 그가 나를 배신해도, 모욕해도 상관없었다. 암살자를 고용해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수 십 번도 더 참아야 했던 리산드라와는 달랐다. 그건 어차피 카이다 엘레노어가 자리를 이어받으면 그 사실에 대해 걸고넘어질 것인 데다, 제국의 공작을 죽여 없앴다는 소문이 돌면 내게도 좋지 않으니 참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아델하이트는, 아델하이트는 달랐다. 절대 죽게 둘 생각이 없었다. 소문 같은 것보다는 아델하이트의 생존이 더 중요했다.

한참 헉헉대던 아델하이트는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멍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에… 조금 전 놀라서 멈춘 것만 같은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리고 아마도 저항 중에 생겼을 볼과 목의 쓸린 상처. 아델하이트에게는 절대 볼 수 없으리라 믿은 망가진 모습이었는데도 그 사실이 놀랍기보다는 그저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충격에서 벗어나 나를 제대로 인지했는지, 경계로 가득하던 얼굴이 부드럽게 풀리며 미소짓는 모습은 이상할 정도로 야릇하게 느껴졌다.

“폐하께서 구하러 와주시리라 믿었습니다.”

아직 호흡도 완전히 진정되지 않은 데다, 목에는 암살자가 남긴 붉은 자국이 흰 피부와 대조되어 선명했다. 이미 침의로 갈아입은 터라 평소만큼 장신구가 화려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수수하다 평해야 했다. 하지만 그 초라한 몰골과 행색만으로도 아델하이트는 빛나는 것 같았다.

“빚을 졌습니다.”

공작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아델하이트도, 그 암살자도, 나도… 켜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오늘은 달빛조차 없는 밤이었다. 사람이 조금만 멀어져도 분간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부드럽게 웃어보이는 아델하이트에게 그런 것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였다. 태양이 어찌 주변이 어둡다 해 가려지겠나? 그럴수록 홀로 빛나는 것이 태양일진대.

“오늘의 보답은… 언젠가 꼭 드려야겠지요.”

길다란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꾸욱 누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사람이 어떻게. 어떻게…

“폐하께서 필요하실 때, 한 번 소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매력적일 수가 있는가.

절망감과 비례하여 차오르는 애정이, 사랑이 내 목을 죄었다. 정을 떼었다 생각했는데. 정이 떨어졌다 생각했는데. 착각은 내가 하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렇게 쉽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리 충동적으로 그를 보러 왔겠지. 상담이니 하는 핑계는 있었지만… 그래, 그냥 아델하이트의 얼굴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사랑했다. 아직도 사랑했다. 아델하이트를 보면 가슴이 뛰었고 그가 다치지 않기를 바랐다. 그에게 실망했다 느낀 것은 치기 어린 질투였다. 나는 그가 누구보다도 소중한데, 그에게는 다른 소중한 것들이 있으니 괜한 심술이 난 것이 아니겠는가. 애써 잊어보려 하는데도 이렇게까지 하니… 아마 절대 잊지 못 하리라. 잊지 말라는 의미로, 오늘을 기억하라는 의미로 소원을 들어주겠다 말했겠지.

목이 매어 제대로 된 답조차 하지 않고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델하이트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환히 웃었다. 그 모습에 무시할 수 없는 직감이 나를 업습했다.

나는, 아델하이트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언제까지고 그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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