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난 성녀는 개종하기로 했습니다

쫓겨난 성녀는 개종하기로 했습니다 7화

추락한 성녀 07

*본 작품은 어한오 팀의 오리지널 창작 작품입니다. 무단 도용 및 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본 작품은 포스타입, 글리프에서 동시 연재 중에 있습니다.


추락한 성녀 07


루블, 보쓰, 히즈

***

“뭐부터 말해야 할지······. 우선 아녹시아의 분위기부터 말씀드려야겠군요.”

아마데아는 침대에 걸터앉고 그레이스는 침대 옆으로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둘이 마주 보는 모양새였다.

“아녹스는 아우레티카의 소식에 관심이 많습니다. 빛의 세례를 받은 성자나 성녀가 아녹스의 신도 하나보다 월등히 강력하니까요. 더 약한 만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데아가 교육을 받으며 알게 된 것은 아녹시아가 신분제가 없지만 그렇다고 고용주와 사용인을 동등하게 보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우레티카에 있던 시절처럼 노예 계급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사용인들 또한 고용주(또는 그 손님)에게 눈을 마주치지 않는 등 나름대로 습성은 비슷했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지금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을 하고 있다. 나름대로 어투는 예의를 차려주지만 뭔가 표면적인 것에 그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었다. 이를테면 바로 지금처럼.

‘어쩌면 그레이스는 일반적인 사용인들과 다른 걸까.’

헬레니온이 그레이스를 비호했던 점도 그렇고 새로 배우면 배울 수록 그레이스의 위치가 모호했다. 처음엔 이곳의 문화가 달라서 그러려니 했으나 이젠 점점 그레이스의 정체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처음엔 으레 하던 성자의 교체 즉위식이라고 여겼으나 전 성녀에 대한 수배서가 돌아다니며 다들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즉위식은 보통 전 성녀나 전 성자가 죽은 이후, 새로운 자가 치르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번은 달랐겠지. 내가 살아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자작극을 의심했습니다. 모종의 이유로 성녀가 스스로 죽음을 꾸몄다고요. 방심을 이끌어 전부 소탕할 계획을 세운 것일 수도 있다며 소란 피우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레이스가 담담히 내뱉는 말에 아마데아는 공황에 빠진 사람들을 떠올렸다. 성녀가 공포의 대상이라는 헬레니온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지금은 시간이 좀 지났으니 진정된 모양입니다만. 이번엔 새로 즉위한 성자에 대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전 성녀이신 당신에 대한 관심은 약간 식었다고 볼 수 있겠군요.”

아마데아는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불안했다. 그 성녀가 아녹스에서 살아있다는 것을 이곳의 사람들이 알게 된 다면 역시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헬레니온이라는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은, 답답하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새장 속은 안전할 것이다.

하지만 아마데아는 단순한 답답함이 아닌,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렸다. 그녀는 이것이 적국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헬레니온의 목적을 알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인지조차 가늠하지 못했다.

“헬레니온은······. 아니, 아무것도 아냐.”

“헬레니온님께 방문해달라고 전해드릴까요?”

아마데아는 화색 하며 나올 뻔한 대답을 멈추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 부른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그레이스는 노련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누르며 대답했다.

“요즘 저도 얼굴을 뵙지 못했군요. 새로운 소식은 저보단 헬레니온 님이 더 많이 아실 겁니다. 정세 파악 또한 중요한 공부이지요.”

능청스레 말하는 그레이스의 얼굴에서 아마데아는 어떤 이상한 점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기분이 이상했다. 그레이스의 눈빛이 더 푸근해진 것만 같았다.

“헬레니온 님이 오셨습니다.”

점심식사 후 티타임을 가지던 아마데아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얼른 일어나고 싶은지 살짝 몸을 들썩였다가 이내 다시 털썩 앉았다. 뒤늦게 그레이스에게 받은 예절 교육이 떠올랐다.

「손님이 오신다면 어지간한 귀인이 아닌 이상 직접 마중 가는 일은 없습니다. 보통은 부모나 아주 친한 친구, 또는 부부 만이 마중을 갑니다.」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닐 뿐 더러 직접 마중을 나가는 건 마치 그녀가 그를 그리워했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리워하다니! 그렇게 표현하는 건 마치.

‘내가 외로워했다는 거 같잖아.’

너무나도 유치한 생각에 아마데아는 연거푸 차만 마셨다.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는 새에 헬레니온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그는 들어오다 말고 멈추어 섰다.

아마데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은 말보다 많은 뜻을 담고 있었다. 차가운 푸른색과 오묘한 보라색의 조합은 언뜻 보기엔 정반대 같지만 전혀 위화감 없이 조화되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눈동자 색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보석조차 그녀 앞에선 색을 잃을 것만 같다.

헬레니온은 잠시간의 환상에서 깨어나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실제로는 긴 시간은 아니었으나 그에겐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그가 눈을 떼고 다가오는 사이에 아마데아 또한 묘한 기분이었다. 아주 찰나지만, 세상에 둘 만이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처음엔 오래도록 얼굴을 비추지 않은 그를 질책할 생각으로 가득했었다. 자신을 방치해둔 것이 괘씸하기도 하므로 잔뜩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의 눈맞춤 한 번에 모든 생각이 날아가 버렸다.

‘이래선 외로워한 게 아니라고 변명도 못하겠네.’

아마데아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오해한 헬레니온이 슬며시 변명을 내뱉었다.

“최근에 아우레티카 측 정보에 심혈을 기울이느라······. 아니, 죄송합니다. 제가 소홀했습니다.”

헬레니온은 생각해둔 변명거리를 다 풀기도 전에 다급히 사과했다. 아마데아가 급격히 시무룩해지는 기색이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그녀가 화를 냈더라면 이 정도로 당황하진 않았을 것이다. 한껏 기분이 가라앉은 그녀 앞에선 헬레니온은 그저 약자에 불과했다.

물론 아마데아의 기분이 저하된 이유는 단연 헬레니온 때문은 아니었다. 어젯밤에 들었던 아녹스의 상황과 자신을 버렸던 아우레티카의 상황이 어지러웠기에 멀미가 날 것만 같았을 뿐이었다.

불안감에 아득해져서, 아마데아는 눈을 감아버렸다. 이대로 눈을 돌리고 싶었다.

“실은 그레이스로부터 아우레티카의 상황을 듣고 싶어 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은 그녀의 작은 회피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 그랬지.”

아마데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진즉 각오했던 일이 아니었나. 스스로를 다그쳤다.

헬레니온은 그녀가 준비되었다고 느껴지자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자신은 깨닫지 못한 세심한 배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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