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난 성녀는 개종하기로 했습니다 6화
추락한 성녀 06
*본 작품은 어한오 팀의 오리지널 창작 작품입니다. 무단 도용 및 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본 작품은 포스타입, 글리프에서 동시 연재 중에 있습니다.
추락한 성녀 06
루블, 보쓰, 히즈
***
아마데아는 눈을 아프도록 찌르는 햇살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침대 옆에는 이제 막 커튼을 걷은 그레이스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벌써 며칠째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이 시간이 가장 적응이 힘들다고 생각하며 들여온 세숫물로 대충 몸단장을 했다.
이전의 생활과는 크게 달라진 바 없어 보이나 극상의 예우를 받던 아마데아는 사용인들과 아랫것들의 차이를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예를 들어 그레이스의 옆에서 조용히 수건을 들고 있는 이 사용인은 그녀를 빤히 관찰하는 눈으로 보다가 시선이 마주치면 슬그머니 눈을 돌리곤 했다. 아우레티카에서 아마데아의 시중을 들던 자들은 모두 노예 계급이거나 사제였다. 노예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했고 사제들은 성녀의 존재에 황송해하며 극진한 대접을 해줬었다.
예전 같으면 건방진 아랫것이라고 사제에게 넌지시 일러 즉시 궁 밖으로 내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긴 그동안 그녀가 군림하던 아우레티카가 아니었다.
아마데아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인내했다. 이곳에선 딱히 건방진 짓이 아니라는 것을 그레이스에게 열 번도 넘게 들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서재에서 교습을 하시지요. 공부할 양에 비해 시간이 빠듯합니다. 너희들, 서두르거라.”
얇은 소재의 퍼프 슬리브 드레스는 아마데아에게 꼭 맞는 사이즈였다. 가슴 바로 밑에 허리선을 두어 볼륨감을 강조하고 옷감은 얇고 비치는 소재여서 부드러운 여체의 곡선이 잘 드러났다.
처음에만 해도 그녀의 사이즈에 맞지 않는 예비 드레스만 있었는데 언제 이리 제게 꼭 맞는 드레스를 구한 걸까. 재단하는 등의 과정이 없었는데도 눈대중으로 대강의 사이즈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레이스의 태도가 처음에는 몹시 거슬렸으나 이런 식의 유능함은 아마데아 역시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레이스의 정체를 모르겠다. 아무리 계급이 없는 아녹시아라고 하더라도 그레이스의 정체는 고작 사용인의 장 따위가 아닐 것 같았다.
딴생각을 하며 아침용 수프를 떠먹다가 수프 그릇에 수저가 부딪히며 작은 소리가 났다. 세 걸음은 뒤로 떨어져 있던 그레이스는 어떻게 알았는지 바로 잔소리했다.
“수저는 그릇에 닿아 소리가 나지 않게끔 움직이셔야 합니다.”
“아, 알겠다.”
적당히 하라는 뜻으로 대강 대답했더니 그레이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다음에 교정할 것은 말투인가, 라며 중얼거리는 소리를 얼핏 들은 것도 같다. 아마데아는 팔에 소름이 돋아났다.
‘누가 봐도 나에 대해 좋은 감정은 없는 것이 맞지 않느냐······.’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닦달할 수 있냐고 내뱉고 싶은 걸 억지로 수프와 함께 삼켜버리는 아마데아였다.
벌써 아녹시아에 체류한 지 며칠째. 아니, 다시 곰곰이 따져보니 벌써 열흘은 넘었다. 이제야 천천히 생각할 만한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레이스가 교육을 담당할 것이라는 헬레니온의 말마따나 매일매일 일정 시간 이상은 서재의 책상에서 마주 보고 앉아 교육을 받았다. 처음에는 아녹시아와 아우레티카의 환경의 차이, 문화 차이 등으로 비교적 쉬웠으나 날마다 어려워지는 중이었다.
아마데아는 오늘도 책상에 쌓인 책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바로 그레이스의 말이 뒤따랐다.
“한 번에 익히시라는 게 아닙니다. 앞으로 익히게 될 내용이 많다는 것이지요.”
“············.”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건가. 이렇게 한눈에 보면 파악하기는 쉬워도 교육받는 이의 의지가 시시각각 깎여나간다는 것을 그레이스는 모르는 모양이다.
“덧붙여서 이 과정은 모두 헬레니온 님도 익히셨던 것입니다.”
아마데아는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대꾸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내었다. 벌써 열흘 넘게 그레이스에게 시달리는 동안 코빼기도 안 비친 그 남자를 거론한다고 자신이 동요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헬레니온은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저택에 들르지 않았다. 구해주겠다고 해놓고 방치하는 건가 싶지만 일이 바쁘다는 그레이스의 설명을 듣고 그러려니 했다. 놀랍게도 헬레니온 대신 변명하는 그레이스는 굉장히 쩔쩔매는 태도였기 때문이다.
‘일중독 관료 같은 걸까. 아우레티카에도 그런 별종은 있었지.’
그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그녀의 지식으로 끼워맞춰 이해했다.
‘그래도 가끔은 들러서 얼굴이라도 비출 수 있는 게 아닌가······. 정말 뭘 노리는 거지, 그놈은.’
그나마 자신에게 친절한 헬레니온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종잡을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이곳 아녹시아에선 그녀에게 원한이 싶은 사람이 수두룩할 터인데 어째서 그는 그녀를 이리 숨겨주고, 심지어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까지 해주고 있다.
그의 목적을 몰라 불안한 마음이 스물스물 커져가던 그때.
“자세가 흐트러졌습니다. 허리는 곧게, 어깨는 피십시오.”
“······.”
아까 전 식당에서 다음은 말투 교정이라고 들은 후라 아마데아는 일부러 대답 없이 자세만 고쳐잡았다. 마음 같아선 책상에 앉은 자세 그대로 엎어지고 싶었다.
“그럼, 오늘의 교습은 말투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결국 넘어가진 못하는군. 아마데아는 다시 정신을 집중해서 최대한 또렷한 눈빛으로 그레이스를 응시했다. 협조해서 빨리 끝내는 게 차라리 낫다고 경험으로 체득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늘도 그럭저럭 하루가 흘러갔다. 잘 먹고 잘 자도록 장소를 제공해 준 것은 고맙지만 이대로 언제까지 갇혀 지내야 하는 것일지 기약이 없어 숨이 막혀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용기를 내 침대에 눕기 전 그레이스에게 물었다.
“헬레니온은 언제 오는 거지?”
그레이스는 램프를 끄려던 차에 손을 멈추고 아마데아를 향해 돌아섰다.
“헬레니온 님에게 전할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바깥소식을 알고 싶구······ 알고 싶어.”
오늘 하루 종일 시달렸던 말투 교정에 따라 조금이라도 부드러운 말투를 시도해 보고 있었다. 아직까진 어색하지만 좀 더 쓰다 보면 입에 익게 될 것이다.
그레이스는 잠시 말없이 서 있더니 이내 의자를 끌어다 침대 앞에 뒀다. 아마데아를 먼저 앉게 하고는 본인도 앉아서 말을 이어갔다.
“바깥 소식은······ 제가 알기로 그 이후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여전히 성자를 추대하는 무리가 당신을 쫓고 있습니다.”
“아우레티카의 소식은 됐어. 난 이곳의 소식이······. 아니, 정확히는 나에 대한 평판이나 그 이후에 인식의 변화가 있는지 알고 싶어.”
그레이스는 잠시 아마데아를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무척 탐탁지 않게 여겼던 그레이스지만 요 며칠 오랜만에 직접 펜을 쥐고 다시 스승의 위치에 오르니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우선 처음엔 단순하고 안하무인일 것이라고 여겼지만 생각 외로 눈치가 빠르고 적응 또한 빠른 편이다. 매우 약한 정신력을 지녀 낯선 이곳에 떨어진 순간부터 울고불고 난리를 칠 것이라는 예상 또한 빗나갔다. 의외로 이 아가씨는 강단이 있고(성질을 부리는 것은 그레이스에겐 그저 우스웠다.) 예민하지 않으며 변화하려는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었다.
그 증거로 아마데아에겐 껄끄러운 일을 물어보는 눈에는 단단한 각오가 담겨있었다.
그레이스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바로잡았다. 조금은 마음에 들었으나 아직은 멀었다.
“제가 아는 한에서는 말씀해 드리지요. 단, 내일부턴 야외 교습까지 한다는 조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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