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난 성녀는 개종하기로 했습니다

쫓겨난 성녀는 개종하기로 했습니다 5화

추락한 성녀 05

*본 작품은 어한오 팀의 오리지널 창작 작품입니다. 무단 도용 및 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본 작품은 포스타입, 글리프에서 동시 연재 중에 있습니다.


추락한 성녀 05


루블, 보쓰, 히즈

***

사용인들이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그녀는 쉬고 싶다며 침실로 돌아갔다. 응접실에 남아 다 식은 차를 마시던 헬레니온에게 그레이스가 다가왔다.

“이야기는 잘 끝냈습니까.”

그레이스는 사용인 치고는 대담하게도 그의 맞은 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아까 전 아마데아가 있었던 그 자리였다.

“듣고 계셨던 줄로 압니다만.”

“그렇다는 건 역시 신성력은 전부 억눌려 있는게지요?”

그레이스가 물러난 응접실엔 아마데아와 헬레니온 단 둘 뿐이었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어둠의 힘으로 전부 훔쳐 듣고 있었다.

신성력을 가진 자들끼리 서로의 위치나 힘의 크기를 가늠하듯이 어둠의 신도들 또한 그것이 가능했다. 그레이스가 힘을 끌어올린 기척을 헬레니온은 예민하게 파악했다.

“하긴, 그리 도발을 했는데도 신성력을 쓰지 않더군요.”

“그레이스. 이제부터는 그녀를 도발하지 마십시오.”

그레이스는 개인적으로 그의 생각이 몹시 궁금했다. 과연 사사로운 욕망일까, 일전에 말한 대의를 위함 감내일까. 그레이스는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완벽한 무표정으로 호기심을 감췄다.

“그리 말씀하신다면. 주의하지요.”

둘의 표정은 마치 거울처럼 똑 닮았다. 그레이스가 헬레니온을 가르친 스승이므로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보다 아우레티카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그레이스의 정보력이라면 아마 다 꿰고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요.”

“최근엔 누군가에게 ‘교육’을 부탁받아서 바빴습니다.”

저를 위해 그레이스 스스로 그녀의 교육 겸 호위를 담당해주었다는 것을 알기에 헬레니온은 겸연쩍은 속내를 감추며 헛기침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레이스는 말을 이었다.

“최근에 나타난 가짜 성자는 정말 우리가 관여한 것이 아닙니까?”

“저는 관련된 지시를 내린 적도, 아우레티카를 뒤집으려 한 적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 가짜 성자는 빛의 세례 또한 통과했다고 합니다. 그건 저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수장께서는 별 말씀이 없으셨습니까?”

“그분을 뵙지 못한지 벌써 한달은 흘렀습니다. 당연히 어떤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대체 수장께선······.”

그레이스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짚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일국의 수장이라는 자가 갑자기 행방불명되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수장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의 힘을 지녔기에 별다른 위험에 처한 것은 아니겠으나 자기 멋대로 일을 내팽개치고 돌아다니는 것은 문제였다. 더구나 이런 실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수장은 ‘여신의 목소리를 가까이서 듣고 오겠다.’며 의미심장한 말만 남기고 사라진다거나 또는 이번처럼 말 없이 자리를 비우곤 했다. 

‘그렇다 해도 이번엔 기간이 길어. 최소 한 달은 되었으니.’

전에는 아무리 길어도 2주 안으로 들어오고는 했으니 이번 한 달은 가히 기록적이다. 문제는 그 기간이 한 달이 끝이 아니라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말이 다른 곳으로 샜군요. 다시 아우레티카로 돌아가서, 내부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대부분의 귀족과 평민들은 새로운 성자를 지지한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전의 성녀는 성격적으로 결함이 있었으니까요.”

“아마데아에 대한 수색은?”

“제가 조치를 취해뒀으니 당분간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임시방편이니 다른 방법을 찾기 전까진 그레이스가 수고해주셔야겠습니다.”

그레이스는 가볍게 묵례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할 말도 들을 말도 없다는 태도였다. 헬레니온도 그녀를 잡지 않았다.

그레이스가 문을 향해 손을 뻗던 그 순간.

“이건 개인적인 궁금증입니다만······.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성녀가 당신의 계획에 필요하다는 것은 압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그녀의 호감을 사기 위해 연기하는 중인가요?”

헬레니온은 잠시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레이스가 예민하더라도 그의 뒷모습만으로 그가 동요하고 있는지를 알 수는 없었다.

“······그럴 겁니다. 그녀에게 빚이 있으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이겠죠.”

마치 스스로에게 하는 변명 같았다. 그레이스의 눈매가 좁아졌다. 우려하던 상황이 벌어지고 마는 것인가. 마음 같아선 성녀를 치워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겐 소중한 인연일 테니 함부로 손을 대기가 꺼려졌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일단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 여자가 그에게 어울리는 자인지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리라.’

아마데아는 저녁이 준비되었다며 부르러 온 사용인의 안내에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외투까지 차려입은 헬레니온이 아마데아를 뒤돌아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저는 일이 밀려있어 다시 가봐야 합니다. 내일 다시 올 테니 너무 섭섭해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는 의례적인 인사말을 남기며 모자까지 눌러쓰고선 식당을 나섰다. 아니, 적어도 그러려고 했다.

아마데아의 손이 그의 외투 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가 아무 말 없이 뒤돌아보자 아마데아는 앗, 하며 놀라더니 손을 다급히 놓아버렸다.

“······.”

헬레니온은 여전히 말 없이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녀 자신도 모르게 나온 응석이었는지 얼굴이 살짝 발개져 있었다.

“제가 가지 않았으면 하십니까?”

이번엔 그녀가 말을 잃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고개만 푹 숙인 채 의미 없는 손장난을 하며 그의 눈을 피할 뿐이었다.

“아니. 잠깐 손이 헛나갔다.”

잠시 새에 감정을 갈무리 한 그녀의 얼굴은 무감각해 보였으나, 귀가 달아오른 것은 감추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헛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눌러 참았다.

“아무리 바빠도 저녁은 먹고 갈 수 있겠지요. 식사에 초대해 주시렵니까.”

그는 외투와 모자를 사용인에게 맡기며 아마데아에게 말했다. 아마데아는 무안한 얼굴로 먼저 자리를 찾아 앉았다.

둘이서만 하는 식사는 고요했다. 이따금 식기에 포크가 부딪히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서로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런데도 헬레니온은 이런 상황이 어색하지 않은 것이 약간은 놀라웠다. 그녀도 같은 생각일까를 궁금해하며 가끔 아마데아 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그레이스도 지켜보고 있었다.

***

“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십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헬레니온이 떠나간 후 응접실에 앉아 오늘의 대화를 곱씹던 아마데아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식후 차입니다. 오늘의 식사가 무거운 편이었으니 소화에 도움을 주는 종류입니다.”

그레이스였다. 직접 차를 나른 걸까. 아까는 시비를 걸어와 말다툼을 했기에 껄끄러운 상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깍듯한 태도를 보이니 그레이스의 의중을 알기 어렵다고 그녀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어쩌면 아까 그가 말했던 대로 그레이스에게 주의를 주고 간 걸 수도 있다.

“잘 먹겠다. 그보다 아까 뭐라고 했느냐?”

어쨌든 아마데아 또한 그레이스와 척 질 생각은 없었으므로 최대한 자비로운 톤으로 말했다.

“내일 아침부터 본격적인 교육의 시작입니다. 아무래도 아마데아님이 ‘노력’해주신다고 했으니 저 역시 어중간한 태도를 취할 수는 없겠지요.”

그레이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멀리서 보면 자애로운 상으로 보이겠으나 아마데아에겐 마치 악마의 선전포고와 같이 여겨졌다.

“그러니 일찍 잠자리에 드시지요. 아직 배울 것이 많으십니다.”

아마 기분 탓만은 아닐 것 같다.

여유롭게 웃는 그레이스와 대조되게 아마데아의 표정은 점차 생기를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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