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난 성녀는 개종하기로 했습니다

쫓겨난 성녀는 개종하기로 했습니다 14화

추락한 성녀 14

*본 작품은 어한오 팀의 오리지널 창작 작품입니다. 무단 도용 및 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본 작품은 포스타입, 글리프에서 동시 연재 중에 있습니다.


추락한 성녀 14


루블, 보쓰, 히즈

***

아마데아가 잡념을 지우고자 공부에만 매진하던 차에 드디어 헬레니온이 저택을 방문했다.

이제는 제법 아녹스식 예법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아마데아에게 헬레니온이 대뜸 말을 꺼냈다.

“아마데아. 전 당분간 아우레티카에 가 있어야 합니다. 기간은 얼마나 길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바쁘다던 그가 직접 와줬다는 기쁨은 금세 사그라졌다. 결국 또 아마데아를 혼자 방치해두겠다는 말이었다.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바는 없다. 그저 조용히 저택에 들어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게 그가 요구하는 전부였다. 하지만 다 알면서도 예, 알겠습니다 하는 고분고분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헬레니온 님. 연락책은 남겨두고 가시는지요?”

아마데아의 복잡한 마음을 예민하게 감지해낸 그레이스가 시간을 벌기 위해 질문했다. 다행히 성공적으로 그의 주의는 그레이스에게로 돌아갔다.

“아트레우스를 아녹스에 두고 가려 합니다. 혹시나 하지만 돌발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그레이스가 조심해주십시오.”

“헬레니온.”

나지막이 그를 부른 목소리는 그레이스가 아니었다. 아마데아가 곧고 단호한 눈으로 그에게 말했다.

“잠시 둘만 얘기할 수 있을까요?”

헬레니온은 분명 곤란한 일이 생길 거라는 예감이 들었으나 결국 그 눈빛에 저항하지 못했다. 그는 그레이스에게 잠시 자리를 비워달라고 하며 방에 방음막을 쳤다. 저번과 다르게 이번 대화는 새어나가선 안된다고 판단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마데아는 잠시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짧게 눈을 감았다 떴다. 다시 뜨인 눈에 헬레니온은 얼어붙어 버렸다.

“나를 아우레티카에 데려가 줄 수 있겠느냐?”

아녹스의 예법이 아닌, 성녀의 모습이었다. 은은한 미소를 띠며 완전한 하대로 바뀐 말투는 의문문이나 결코 그에게 묻는 것이 아니었다.

어째서일까.

지난 세월 동안 많은 인간상을 접하고 누군가의 위에서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경험이 어째서 그녀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걸까.

헬레니온은 다시 무력한 애송이였던, 열 살 무렵으로 돌아갔다.

「가엽고, 추하구나.」

처음이었다. 약한 동정이나마 받아 본 것은.

「하지만 넌 운이 좋아. 이 내 눈에 띄었으니. 이단 심판관에게 먼저 들켰더라면 추방 내지 사형이었을 것이란다.」

탐스러운 백금발이 빛을 받아 반짝인다. 너무나 빛이 나던 그 사람이 그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올리더니,

「자, 이제 괜찮을 것이다. 다만 또 다시 불경죄를 저지르는 일은 없도록 하거라.」

헬레니온의 모든 것을 삼켜버릴 기세로 온 몸에 번지던 어둠이 사라졌다. 그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헉헉 내쉬는 숨 사이로 향기가 스며들었다. 평생 뇌리에 박혀 잊지 못할 향이라는 예감이 드는 향기였다.

‘그래. 그 향이, 그 눈이·····.’

이제야 알았다. 그녀의 앞에 서면 그가 작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존재가 제 속에서 너무도 크기에 그랬던 거다.

‘아아, 그래서··········.’

그는 아득함에 눈을 감았다. 깨닫는 게 10년이나 늦어졌지만 그 긴 세월 동안 조금도 바래지 않은 감정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를 직접 데려오면서 더 커졌는지도 모른다.

점점 그녀를 실망하게 하는 게 어려워진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녀의 안위와 연관이 있기에 헬레니온도 물러설 수 없었다.

“안 됩니다. 당신은 수배 중이니 위험합니다.”

“그렇다면 난 이대로 기다리고만 있어야 한다는 말이냐. 얌전히 있을 테니 따라만 가게 해다오.”

“위험합니다.”

헬레니온이 물러날 기세가 보이지 않자 아마데아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헬레니온은 그녀가 이해하며 물러나 준 것이라고 해석했으나 그가 모르는 게 있었다. 바로 그녀 역시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이었다.

“그레이스로부터 너희들의 능력에 관해 배웠다.”

헬레니온은 의아한 기색으로 아마데아의 말에 귀 기울였다.

“너희 중에 사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왜곡시키는 능력이 있는 자가 있다고 했다. 여의찮다면 변장이라도 하면 된다.”

“그건·····.”

“반대하는 이유가 정말 나의 안위 뿐이라면 허락해주거라. 나 역시 아우레티카에서 확인할 것이 있다.”

여기서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그녀의 안위가 아닌 다른 이유로 막는 모양으로 비출 수 있다. 결국 헬레니온은 마음이 기우는 게 느껴졌다. 나름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왔는데 왜 그녀 앞에만 서면 이리도 갈대같이 흔들리는 걸까.

말리지 못한 것에 관한 한심함과 성장한 그녀를 보며 느끼는 알 수 없는 설렘이 교차했다.

결국 백기를 드는 쪽은 정해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필요한 짐이나 시중들 사람은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아마데아는 드디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고마워.”

그 짧은 한마디가 너무도 달콤해서 헬레니온은 두려워졌다. 겨우 자각한 것 만으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가시기 전 주의사항이 많습니다. 웬만해선 제가 알려드리고 싶으나 지금도 시간을 쪼개서 나온 참이라.”

통신용 도구가 지금도 울려댔으나 무시하는 중이었다. 돌아가서 인원 차출이나 짐을 수정해야 하니 일이 더 늘어난 셈이었다.

“자세한 건 그레이스에게 들으시면 됩니다. 저는 일이 늘어났기에 이만 가보겠습니다.”

일, 일. 맨날 일 타령이었다. 아마데아는 기쁨도 잠시 자신보다 일이 바쁘다며 빠르게 사라지는 헬레니온을 얄밉게 쏘아보았다.

그래도 드디어 결착을 지을 수 있겠다.

아마데아는 가짜 성자, 에메로스를 탐색할 생각이었다.

“정말이십니까, 헬레니온 님.”

급하게 외투를 걸치며 통신에 응답하는 그의 뒤로 그레이스가 쏘아붙였다.

“그래. 인원을 변경한다.”

헬레니온은 그레이스와 통신 모두에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통신을 끄고 그레이스에게 말했다.

“그러니 그레이스, 아마데아에게 기초적인 주의사항을 가르쳐줘요.”

“헬레니온 님. 이건·····. 이게 정말 대의를 위한 일의 과정입니까? 진짜 성녀의 힘이 돌아오기라도 하면 어찌하시려고요?”

역시 반대에 부딪힐 건 예상했다. 이번에는 아까 대화하면서 생각해둔 변명이 있었다.

“그레이스. 가짜 성자의 정체를 밝히는 일에 그녀가 필요합니다. 이번에 둘이서 많은 대화를 했습니다. 내 계획은 변함없습니다.”

그레이스는 일단은 납득한 듯 했다. 하지만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거짓말로 시간을 때우다니. 그답지 않았다.

‘하지만 나 다운게 뭔데.’

그는 지금 그녀를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스스로 그렇게 조소하면서도 이 짓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레이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저도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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