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난 성녀는 개종하기로 했습니다

쫓겨난 성녀는 개종하기로 했습니다 15화

돌아온 성녀 01

*본 작품은 어한오 팀의 오리지널 창작 작품입니다. 무단 도용 및 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본 작품은 포스타입, 글리프에서 동시 연재 중에 있습니다.


돌아온 성녀 01


루블, 보쓰, 히즈

***

아우레티카로 가는 잠입 일행이 처음 계획보다 늘어났다. 그래봐야 두세명 차이지만 들키지 않는 게 중요한 잠입이라면 그 약간의 가능성조차 위험할 수 있다. 이성적으로는 원래 초안대로 가는 것이 옳다.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결국 그녀를 데려가기로 한 헬레니온의 결정은 그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 마음을 자각한 그 순간부터 더는 자기 사람들이 그녀 하나보다 소중하다고 말하기가 힘들어진 기분이었다.

무기력한 포로라도 된 착잡한 기분으로 헬레니온은 떠날 준비를 마쳤다.

아녹스의 일은 아트레우스에게 맡기고 자잘한 일 또한 담당자를 지정하는 등 귀찮지만 꼭 필요한 일이 끝났다. 아무리 그가 며칠 밤을 새워도 끄떡없다지만 이 이상 일이 추가되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헬레니온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불온한 계획을 알아챈 여신께서 벌을 내렸는지도 모르겠다.

“보스, 정말 그걸 데려갑니까?”

부하 중에선 그나마 아마데아의 정보를 아는 아트레우스가 따져 물었다. 존댓말만 썼을 뿐이지 사실상 하극상의 기세로 물어왔다.

헬레니온은 그를 이해한다. 그러나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성가신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흐릿해지는 집중력을 끌어모았다. 결국 설득은 해내야 한다. 그녀를 위해서.

“놓아준다는 게 아니다. 감시자도 데려갈 거야. 그레이스가 자진해서 옆에 붙어있겠다고 했어.”

“아무리 신성력을 봉인시켜뒀다고 해도 빛의 여신에게 닿을 수 있는 땅이라면 변수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보스?”

역시나 호락호락하게 논파 당하지 않는다. 오늘의 아트레우스는 아주 작정을 하고 온 듯 평소에 하던 단순한 척도 집어치운 채 논리를 앞세워 그를 몰아붙였다.

“네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헬레니온은 그를 설득하기 위해 결국 중요한 비밀 하나를 쓰기로 했다.

“옷은 많이 챙기지 않을 겁니다. 양식이 다르니 저쪽에서 다시 구해야 합니다. 이런 일은 저에게 맡겨주시고 다른 일을 해주시지요.”

뭐라도 보탬이 될까 싶어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기던 아마데아는 겸연쩍은 얼굴로 손에 든 것을 내려놓았다.

“뭔가 도울 일이라도······.”

“자잘한 일은 사용인에게 맡기시지요. 대신 저번에 말씀하신 가명을 지어주시는 게 어떠신가요?”

가명. 그랬다. 아마데아 아우레티아는 더 이상 그 이름을 쓸 수 없다. 그녀도 인정한 사실이지만 아직 가슴이 쓰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음, 그럼 이곳 양식으로······. 아, 아니지. 이젠 다시 아우레티카의 이름을 지어야겠군요.”

“생각해두신 이름이 있습니까?”

아마데아는 잠시 눈을 감고 사고하다가 번쩍 눈을 뜨며 말했다.

“디아나. 디아나라고 하죠. 잠입이라니까 말투도 다시 바꾸는 편이 좋겠죠?”

이젠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는 모습에 무심코 흐뭇한 미소가 지어질 뻔했다. 그레이스는 그리하는 게 좋겠다며 표정을 관리했다. 약간 맘에 들었다고 해서 눈앞의 상대가 누구인지 잊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이것까지 알려줬으니 이제 다시 일 해. 네 말대로 날 보스로 여긴다면 말이다.”

성녀의 비밀을 들은 아트레우스는 고민에 빠졌다.

“보스. 에버렛 씨가 감시역으로 따라간다고 하셨죠?”

헬레니온은 불안한 예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아트레우스의 입은 열렸고, 그의 입을 막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그럼 저도 데려가 주십쇼. 호위역으로.”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왜 자꾸 일이 느는 걸까.

“······난 호위가 필요 없다.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보스의 호의가 아니라 그것의 호위입니다. 절 못 믿으시겠다면 에버렛 씨를 불러 계약을 해도 좋습니다. 그 사람의 안전을 보장하죠.”

헬레니온은 마른세수를 하며 착잡한 마음을 다스렸다. 아무래도 일복은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겠다.

“무슨 이유로 따라가려고?”

“뭐, 말하자면 감시역이자 호위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어요.”

헬레니온은 암울한 표정으로 허락한다고 말하며 서류를 앞으로 당겼다. 최종안이라고 쓰인 서류 앞에 ‘진짜’를 붙이며 한숨을 쉬었다. 아트레우스는 슬그머니 서재를 빠져나갔기에 남은 건 고독하게 일을 하는 헬레니온 뿐이었다.

그나마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트레우스와 앙숙인 록시를 잠입 길에 같은 조로 묶는 것 뿐이었다.

드디어 헬레니온이 말했던 떠나는 날이 왔다. 아마데아는 저택 밖의 세상으로 나선다는 것만으로 설레어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녹스에 온 초반에야 추격자의 두려움에 떨었지만 적응되고 나서는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잔뜩 설레며 저택 앞 정원에 앉아있던 그에게 헬레니온이 찾아왔다. 그는 정중히 인사를 하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마데아 님은 아무래도 수배령이 내려진 상태이고, 얼굴이 잘 알려져 있으니까요.”

아마데아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아우레티카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두건이나 가면 따위로 가리고 있을 셈이었다. 어련히 그레이스가 준비했을 것이라고 여겼기에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얼굴을 가리더라도 머리색이나 체형 등, 사람을 특정할 수 있는 요인은 많습니다. 아무래도 그거론 부족하겠죠.”

그럼 그에게는 무언가 뾰족한 수라도 있단 말인가. 어리둥절하게 앉아있는 그녀에게 헬레니온이 다가왔다.

“잠시 눈을 감아주십시오.”

그의 손이 얼굴을 감싸기라도 하려는 듯 가까워졌다. 그가 설마 제게 무례한 짓을 할리는 없지만 상황이 상황이라서일까. 괜히 긴장되는 마음을 감추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큰 손이 아마데아의 볼에 닿은 것이 느껴졌다. 눈을 감고 있노라면 괜스레 다른 감각이 극대화되었다. 그의 손의 크기, 체온, 맥박 등이 가감 없이 느껴졌다.

그녀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치마에 축축한 손을 문댔다. 그가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의 손은 볼을 살짝 쓰다듬나 싶더니 코, 눈을 지나 이마를 쓸었다.

“다 됐습니다.”

눈을 뜬 그녀는 흠칫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그의 얼굴이 생각보다 가까이에 위치해 있었다. 분명 전에는 그녀가 먼저 다가간 적도 있었다. 그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얼굴이 가까우니 평소엔 앞머리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그의 눈이 똑바로 보였다. 황금빛 눈동자는 그럴 리가 없지만 빛나는 것만 같았다. 마치 그가 눈으로 그녀를 끌어당긴다고 무심코 생각했다.

그레이스가 아마데아의 곁으로 다가와 손거울을 건넸다. 아마데아는 그의 눈에서 시선을 겨우 뗄 수 있었다. 아마데아는 떨리는 손에 힘을 주어 거울을 받았다.

그리고 거울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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