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판타지 속 로맨스 서사와 페미니즘(7) 完
로맨스판타지 속 여성 이미지와 로망의 이면들
드디어 본론인 로맨스판타지 속 여성의 이미지와 로맨스 서사의 특징을 분석해보자. 4~6편을 통해 대중문화 속에서 굳어져있는 여성 이미지에 대해 다뤘으니 어쩔 수 없이 미소지니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없는 점을 충분히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이번 시리즈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덜 미소지니한 여성 이미지와 로맨스 서사를 제시할 방법을 생각해보자'는 거지 '미소지니하니까 로판은 글렀다!'로 보겠다면... 페미니즘을 핑계로 우월감을 얻으려고 드는 게 아닌지 자문해봐라. 페미니스트인 척 하는 혐오자들이 어떤 식으로 분탕질 치는지 충분히 봐왔고, 생각마저도 외주 주는 게 버릇들어서인지 어설프게 남의 논지를 가져가 왜곡하는 것도 알기 때문에 미리 말해둔다. 페미니즘을 멋대로 왜곡하는 거야 이전 글들에서 설명했다시피 페미니즘이 등장한 이후로 꾸준하게 지속되어온 수작질 중 하나니 말이다.
로맨스판타지 속 여성주인공들의 속성을 두 가지 키워드로 정리하자면 공주와 완벽이다.
하지만 공주로 대표되는 이미지 뒤의 여성들의 선망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를 따지면 당연히 미국보다 훨씬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로맨스판타지라는 명명 자체는 2010년대 들어서지만 지금의 로맨스판타지로 분화되기 시작한 그 장르 이미지는 2000년대부터 있긴 했다. 하지만 일단 90년대부터 얘기해보자. 이 시기 한국의 대중문화는 일본의 영향이 강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지금은 전혀 아니지만.
90년대 아이들의 대중문화를 얘기할 때 어른들의 주말 꿀잠을 도왔던 디즈니 만화동산만큼이나 중요한 게 일본에서 수입해서 틀어주던 세일러문 같은 마법소녀물이다. 왜 마법소녀물이라고 뭉뚱그리느냐면 세일러문 다음이 아마도 웨딩피치였던 건 기억나는데 그 이후로도 너무 많이, 그리고 꾸준히 나와서 다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2010년대부터는 아이들에게서 인기가 한풀 꺾이기도 했고 말이다.
이 시절의 마법소녀물이 당시엔 외려 디즈니 프린세스보다는 페미니즘적이었다는 좀 흥미롭다. 마법소녀물의 주인공들은 전혀 조신하지도 않고 자신의 감정에 매우 솔직하며 퍽 건전하게 폭력적이다. 그리고 언제나 취향이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하며 우정을 나눈다. 물론 사랑에 그렇게까지 목숨 거는 모습은 좀 의문이고 그 마법소녀들의 나이가 중학생이라면서 왜 성인처럼 그렸는지는 이해하는 동시에 조금 별로지만 어지간한 디즈니 공주들보단 나았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흥하면서 당연히 아동용 완구도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했고 97년에 포켓몬을 방영하기 시작하면서 이 애니메이션 열풍은 빠르게 포켓몬으로 넘어갔다. 삼립이 괜히 20년만에 포켓몬 빵을 다시 내놨겠는가. 아무튼 간에, 한국에선 디즈니 프린세스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열풍이 불고 있었다지만 미국보다 요만큼 나은 수준이지 성차별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이 마법소녀물이 가장 흥하고 있을 때 여자아이들이 마법소녀물을 양껏 누리지도 못했고 말이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콘텐츠 속 진보적 성차별 운운 이전에 여아학살(Gendercide)의 시기인 80~90년대에 태어났다. 80~90년대의 여아학살은 교과서에서도 배우니 더 말할 것도 없을 테다. 이 말인 즉, 미국에선 살기가 팍팍해져서 2001년 이후로 디즈니 프린세스 관련 매출이 폭발하는 등 여자아이들에게 잘 해주려고 하는 경향성 같은 게 한국의 경우엔 순전히 남자아이들 위주로 해당된다는 뜻이다.
아니라고? 그시절 아동 타겟의 광고를 떠올려보라. 보통 아이들이 부모를 열심히 졸라야하니까 아이들이 보는 프로그램 앞뒤로 광고가 붙어나오기 마련인데 여아 완구 광고는 세일러문 때는 아예 없었다. 장난감가게에서야 바비인형 비스무레한 것들 아니면 아기 인형이 있긴 했지만 여자아이를 위한,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완구는 없었다. 남자아이들이 좋아하던 변신로봇 완구가 금방 들어왔던 것에 비하면 마법소녀물 완구는 한참 뒤에 들어왔다. 완구 말고도 세일러문이 엄청 히트치고 나서 나중에야 캐릭터 굿즈가 프린트되어 나오긴 했던 거 같은데 그게 제대로 된 물건인지는... 구체적으로 찾아내기조차 어려우니 생략한다. 뿐만 아니라 흥하던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그려넣은 신발은 순전히 남아 타겟이어서 광고 끄트머리에 여아용도 있어요! 같은 허망한 소리조차 더 나중에야 붙었다.
그리고 아이돌 문화가 국내에서도 만들어지기 시작하니 아이들의 나이가 조금 차면 그쪽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이 부분은 미국과 비슷하다. 디즈니 프린세스 콘텐츠에 파묻혀 유년을 보내다가 청소년기에 가까워지면 MTV로 넘어가는 문화적 구조가 이후 한국에서도 거의 유사하게 진행된다. 아이들은 어릴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하다보니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어린아이에게 권장되는 모든 종류의 콘텐츠에 흥미를 잃어버리니 나름 자연스러운 일이다.
2000년대 들어서 한국은 대중문화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1998년 고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며 더 문화적으로 다양해지기 시작한 영향도 있고 2001년쯤부턴 IMF 사태의 영향에서 벗어나서 그렇기도 했다. 한국 영화도 자신들의 색을 갖추기 시작하고 아이돌도 하나의 문화 아이콘이 되어가며 수입 애니메이션의 방영도 꾸준했고 국내외의 장르소설도 폭발하는 황금기였다. 2001년엔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개봉하면서 지브리에 치인 꼬꼬마 덕후들도 생겨났고 해리 포터에 룬의 아이들에 귀여니 열풍까지. 그야말로 온갖 콘텐츠로 넘쳐난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2000년대까지가 유년인 여성들은 어떤 의미에서 공주가 될 수 있다는 건 화면을 통해서 봤지만 되어볼 기회조차 없는 여자아이가 많았다는 얘기기도 하다. 여아학살을 피해서 태어난 여성이었다고 해서 마냥 집에서 사랑받고 자란 이들이 몇이나 될까. 그리고 그런 여아학살이 벌어지는 사회에서 자신의 딸을 공주처럼 키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 시기까지는 여성들의 또래 문화 안에서도 '공주'는 좋은 취급 받은 적이 없다.
뛰어나면 뛰어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수시로 폄하당하면서 자라는 여자아이들의 눈에 디즈니 프린세스들이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들어온다. 바로, 비디오다.
문화적으로 풍부해져간다는 말은 소비하는 콘텐츠가 갑자기 늘어난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이들을 위한 전집 장사로 출판계가 재미를 보는 걸 보고 다른 업계에서 어떻게 느꼈을지 뻔하지 않은가? 그렇게 영어교육용이라며 디즈니 비디오 세트가 나타난다. 한국어 자막도 없고 한국어 더빙도 없는 완전 영어로 된 디즈니 비디오 세트가 나타나는데, 동시에 대여점에서도 디즈니 애니메이션 비디오가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미녀와 야수, 인어공주, 신데렐라, 알라딘, 포카혼타스, 백설공주, 잠자는 숲속의 공주, 뮬란 등등이 다 같이 혼재되어있는 이유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경향성이 슬쩍 나오기 시작한다. 디즈니 프린세스로 대표되던 이미지를 2000년대까지가 유년이었던 여성들은 한번도 현실에서 누려보지 못했으니 '공주'에 대한 선망 자체는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는 일인데 디즈니 프린세스는 이 '공주'의 이미지에 계급성을 한결 선명하게 더해줬다.
디즈니 프린세스를 보는 것조차 여자아이들 사이에선 공통적인 경험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학습용 비디오는 여자아이에게 교육을 시킬 정도로 돈이 있는 집에서나 가능했고 대여점에서 비디오를 빌려보는 것 또한 교육용 비디오보다는 덜하지만 어쨌든 그 또한 계급성이 있기는 해서 디즈니 프린세스 자체를 못 보고 자라는 아이들도 엄연히 있었다. 2000년대 중후반 정도였던가, 그즈음이 돼서야 학용품이나 이런저런 물건에 디즈니 프린세스가 인쇄되어 나왔지만 그런 공주 이미지의 물건을 여자아이가 가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만 했다. 아주 어리고, 집에 돈이 좀 있어야 했다. 디즈니 그림이 붙었다는 이유만으로 가격에 비해서 쓰레기 같은 질의 물건을 파는 건 비밀도 아니고 말이다.
장르소설로 돌아가 되짚어보면 2000년대부터 여성 주인공의 판타지소설들이 생기기 시작하지만 처음엔 이 여성주인공의 대표적인 이미지를 절대 공주라고 할 수 없다. 용, 신, 마족, 천족, 왕족, 이것저것 튀어나오지만 공통점이라면 뭐가 어쨌든 1. 강력한 무력 혹은 무력에 상응하는 권력을 갖추고 있고 2. 존재하는 것만으로 남들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로 설정한다. 주인공에게 부여되는 계급성은 이때도 당연히 있었다. 솔직히 장르소설 안에서 계급성이 존재하지 않은 적은 없다. 대리만족을 시켜주는 가장 간단한 방법 아니던가. 이때까지만 해도 계급성이 공주로 대표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럼 2000년대까지만 해도 여성 주인공의 이미지에 공주만 있던 건 아닌데 왜 2010년대에 가까워지면서 갑자기 왜 공주로 굳어지게 될까? 그리고 이제껏 이번 시리즈 포스트들을 꼼꼼히 읽어왔다면 슬슬 그 이유가 짐작갈 거다. 그래, 2010년대에 가까워지면서 살기가 더 팍팍해져서 그렇다.
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한국 사회는 많은 부분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2006년부터 양극화가 심해지긴 했지만 전세계적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붕괴로 이어질 부동산시장의 버블 과열이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한국만 빗겨나갈 리도 없지 않은가? 규제는 하고 있었지만 부동산 경기는 과열되어가고 있었고, 여기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집은 사면 반드시 오른다는 신화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외에도 지방 분권을 시작하고 한미FTA를 체결하며 세계화시대에 합류하기 시작했으며 권위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등 사회상이 조금씩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페미니즘에 있어 이 시기의 중요한 성과가 호주제 폐지와 성매매 특별법, 그리고 독립운동가 서훈이다. 독립운동가 서훈은 이때 시작 안했으면 오늘날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조명하려는 노력조차 불가능했을 거고, 성매매 특별법 이전엔 성매매가 아니라 '윤락'이라는 표현을 썼다. 윤락이라는 단어로 여성을 물건처럼 사고 파는 행위 자체를 가린 거라서 성매매란 표현이 나오지 않았으면 인식이 지금보다 더 시궁창으로 굴러가 피해자 구제조차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호주제 폐지는 가족관계 내에서 여성이 개인으로써 존재할 수 있게 했다. 옛날 사람들 인식에 여성은 가족의 부속품이지 사람 취급 안 하지 않는가? 호주제가 딱 그런 인식에서 만들어진 체계라서 아빠, 엄마, 아들, 딸 이렇게 4명의 가족이 있을 때 아빠가 죽으면 호주가 아들이 되는 거다. 이게 생각보다 현실에 여러 문제를 가져오게 된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엄마가 가장이라고 생각하지만 옛날엔 아들이 호주가 되니 유산 분할을 멋대로 결정하거나 거주하는 집에서 쫓아낸다거나 재혼을 못 하게 막는다거나 아주 음습하고 귀찮게 구는 인간들도 존재했단 얘기다. 이게 2000년대 초중반의 대한민국이었다. 과거가 지금보다 더 구린 건 사실이지만 구린 현실과 꾸준히 싸워온 사람들 덕에 그나마 이렇게 바뀐 현재가 있다는 걸 똑똑히 인지해두자.
아무튼 간에, 2008년 들어서 한국에 서브프라임 모기지 붕괴는 안 왔어도 리먼 브라더스 쇼크는 피할 수가 없으니 급격한 자본유출로 인해 주가폭락과 환율급등 등의 경제 이슈가 있었는데... 2008년 4분기 중 경제성장률이 전분기 대비 -4.5%까지 떨어진다. 참고로 IMF 직후 1998년 1분기 중 성장률이 -7%였다. 이렇게 수치가 떨어지면 IMF 사태의 수준은 아니지만 취약계층이 안 보이는 곳에서 조용히 죽고 있다는 소리인데 그 해 서브프라임 모기지 붕괴가 전세계적으로 터지기 전에 사람들의 나도 부자 되고 싶다는 욕망을 확 긁으며 당선되었던 대통령이 누구일지 맞춰보자. 그래, 이명박이다.
리먼 브라더스 쇼크의 여파는 수출이 생각보다 빠르게 회복세로 돌아서면서 수습되긴 하는데... 당선된 대통령은 시대정신을 보여준다. 김영삼 정부에서 노동법을 통과시키며 비정규직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고 IMF 사태 이후로 비정규직이 증가한 한국 사회였지만 사람들은 위기에서 벗어나 조금 살만해지니까 위기를 대비할 사회안전망보다 지금보다 나만 잘 사는 부자가 되고 싶어했기 때문에 그런 대통령을 뽑았다고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명박은 부자 되게 해주겠다며, 나라곳간을 아주 작살내놨다.
당장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쇼크 때 환율 지키겠다고 삽질하다 외환보유고를 600만 달러 가량 까먹었고 철도 민영화(SRT), 교도소 민영화(소망 교도소), 의료 민영화(제주 녹지병원), 4대강 사업이니 자원외교니 하면서 수자원공사, 석유자원공사, 광물공사등의 주요 공기업을 파산 직전까지 몰고 갔다. 물가를 안정시키지도 못했고 대출을 조이지도 않았으니 당연히 가계부채율은 증가했고 기업 프렌들리를 입에 달고 다니던만큼 비정규직 문제는 손도 안 댔고, 친재벌 정책을 피면서 정경유착까지 해먹는다고 이건희를 원포인트 사면해주었다. 삼성 다스 소송비 대납사건으로도 알려져있다. 게다가 노동탄압을 심각하게 해댔으며(국정원 노조파괴 공작) 부자 감세, 보편복지 축소, 공직임명을 대가로 뇌물 수수, 국정원 특활비를 청와대로 상납받기도 했고... 많아도 너무 많다. 덤으로 대학교 등록금 반값 공약해놓고 당선되니까 입 싹 씻고 대학교에 해주던 지원을 완전히 조져놔서 정부지원으로 공부하던 학생들이나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던 학생들에게 엿을 던지는 걸로 모자라 학생운동의 맥을 끊은 것도 이명박이고 전교조 소속의 교사들을 해임시켰으며(박근혜 정부도 이를 이어받아서 전교조를 불법으로 몰고 갔다. 교사는 노동자는 아니지만 공무원이니까 정치적 견해를 가져도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다, 정부가. 다시 봐도 끝내주는 헛소리다)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취소 공작도 했고 언론탄압도 까리하게 했다. KBS 정연주 사장 불법 해임이 가장 유명하지만 YTN, MBC도 이때 심하게 당했다. MBC 쪽은 비교적 최근에 관련 기밀문서들을 확보해서 방송도 했으니 관심있다면 볼 수 있을 때 봐두길 추천한다.
객관적인 지표로도 이 시기의 한국은 미국 바로 다음으로 신자유주의에 미친 나라였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긴 한데 어쨌든, 2011년 OECD에서 내놓은 초고소득층의 특성에 관한 국제비교를 보면 상위 1% 소득 비중이 전체소득의 16.6%를 차지하는데 미국이 17.7%였다. 한국이 만년 1위의 미국 바로 다음이었다. 때문에 아이들 사이에서도 계급이 시각적으로 보이기 시작한 게 2010년 언저리부터라고 보고 있다. 명품 패션 업계의 매출이 그 근거인데,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전년 대비 12∼28%씩 성장하던 명품 업계가 2012년부터 3%대 성장으로 크게 주춤하는데도 아동을 위한 명품 시장은 이때 큰 폭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성형 열풍과 인터넷 상에서 유난히 심각했던 백래시가 더해지니 젊고 어린 여성들에게 유난히 가혹한 시기였다. 특히나 성형 열풍은 아직까지도 깊은 빡침을 느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사람의 몸이 한번 다치면 100% 회복한다는 보장 같은 건 어디에도 없고 그건 인공적인 절제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성형수술 자체도 매우 어려운 수술이다. 절대 광고대로 '돈이 있으면 너도 예뻐질 수 있어!'로 끝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성형수술을 하면 어떤 후유증이나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는지는 제대로 설명도 안 하는 주제에 이리하면 더 싸진다는 둥 저리하면 훨씬 예뻐진다는둥 병원이라면서 의료자격증이 단 하나도 없는 실장이라는 인간이 의사가 봐야할 수술 견적을 뽑아가며 장사하고 있는 꼴을 보면 일단 한 번 빡치고, 어쨌든 여성이 성형수술을 하면 성형했다고 사기라며 외모로만 여성을 판단하는 주제에 급 나누려고 까부는 종자가 꾸준히 있어서 두 번 빡치며 여성은 예뻐야만 한다는 전제에 전적으로 동의하는지 돈만 있다면 누구나 성형을 받을 거라고 성형수술에 계급성을 부여하는 사람도 존재해서 세 번 빡친다. 이 세 번의 빡침을 압도하는 건 수술하라고 비싼 돈 다 냈더니 의사가 수술 과정의 일부에만 슥 들어와서 쪼오끔 참여하다 뒤는 나몰라라 하고 쑥 나가서 사람이 죽어나가거나 영구적 손상을 입는데 그 빌어먹을 의료면허 하나 박탈하지 못하고 있단 현실이다. 염병천병이다, 정말.
케이블 채널이 늘어나면서 접촉할 수 있는 콘텐츠의 종류는 급격히 늘었으나 여성이 접하는 모든 종류의 콘텐츠는 여전히 진화한 성차별의 반복이었다. 2010년대 아동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다.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만 나오는 애니메이션이 아니면 남자 아이를 위한 캐릭터들 사이에 꼴랑 하나 곁들어진 분홍색 캐릭터로만 있었고 아이돌은 비욘세 신드롬 이후로 성적대상화에 듬뿍 절여져있었다.
동시에 여성들은 대중문화에 만연한 성적대상화나 때로는 섹슈얼리티 과시에 따라붙는 응답해줄 필요 없는 관음적 기대 자체가 피곤해진다. 이것도 너무 당연한 얘기다. 기대에 부응 안 하면 안 한다고 무시당하고 부응하면 하는대로 욕 먹는다. 그냥 여성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피곤해져버리니 장르의 이름 아래에서 아예 배타적인 태도를 취해버리는 게 덜 피곤하지 않겠는가. 이건 니들 보라고 있는 게 아니니까 꺼져, 하고 말이다. 그러니 성적대상화와는 거리가 있지만 동시에 명확한 계급성을 지니되 현실에서 강요당하다 보니 익숙해져버린 여성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당연히 받기만 해도 되는 상황을 더 매력적으로 느낄 만도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욕망들이 뒤섞이다보니 공주의 지위를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만들었는데 여기에 여자아이들에게 더 크게 요구되고, 그래서 더 추구하게 되는 '완벽'이 더해진다. 못생겼다거나 뚱뚱하다며 일상적으로 모멸 당하기 때문에 여성주인공은 무조건 아름답고 말라야 하며 '여자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라는 둥의 발언을 하며 나이에 응당하는 자리와 권력을 나눠주길 거부하기 때문에 나이가 차서 결혼하고 아이를 키워도 조금도 늙지 말아야 하며, 지적이어서 하나하나 다 논리적으로 따져서는 안 되지만 너무 멍청한 건 더 안되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똑똑해야 하고 완전 타인과의 관계도 결과가 실패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충동적으로 원나잇을 한다면 반드시 한 번의 시도만으로 연애나 결혼까지 성공해야하며 결혼만이 유일한 해피엔딩 인증 도장으로 사용된다. 결혼만으로는 불안해서 임신과 출산, 육아까지 주렁주렁 달라 붙어 '정상성'을 부여하며 완벽한 이성애 가족임을 인증하려 든다. 동시에 여성들에게 강요되는 이 '완벽'하기도 너무 피곤하기 때문에 여성주인공이 존재 자체만으로 완벽하지만 아무런 감정적 교류를 시도하지 않아도 주변의 인물들이 자발적으로 그 완벽을 알아주고 응당하는 사랑을 주길 바란다.
이런 욕망들과 비난 받을 여지가 없는 안전한 현실도피에 대한 욕구와 분류폭력 때문에 로맨스판타지는 탄생했고, 로맨스판타지의 장르 이미지는 그렇게 굳어졌다.
이만큼 길게 여성 이미지의 흐름에 대해 얘기해왔으니 왜 자신이 특정한 여성 이미지를 좋아하는 건지 조그만 의심의 싹이 피었을 거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좋아하는 마음을 지금 당장 접어야할 필요는 없다. 단지 그 이미지 뒤에 숨어있는 여성에 대한 강압을 현실에서 요구당했을 때 거부한다는 옵션을 떠올리기 위해서라도 고분고분하게 따르지 않는 여성의 이야기가 이미지로 남을 수 있을 때까지 필요하단 건 인정해야한다. 우리는 너무도 시각적인 동물이고 발달심리학자인 데보라 톨먼(Deborah L. Tolman)의 연구나 데비 헤르베닉(Debby Herbenick) 교수의 연구를 살펴보면 이미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태에서 여성들이 자라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자꾸 로판 안에서 다양한 여성 이미지가 존재하길 바라는 거지만 동시에 이 모든 함정들을 피하기 위해 상업성을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예술도 노동인데 밥은 벌어먹고 살아야할 것 아닌가? 다만 상업 논리에 그렇게까지 맹목적으로 따를 필요가 없단 얘기다. 이미 로판은 장르의 탄생 자체가 그렇다. 그동안은 잘 다뤄지지도 않던 젊은 여성들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였고, 이게 보기 싫다며 냅다 디비져서 분류폭력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오히려 로판은 그 어떤 장르보다 더 명확하게 여성이 가지는 모든 종류의 욕망을 전적으로 긍정하고 있다.
특히나 현실에서 대놓고 말하면 안 되는 금기인 여성의 성욕도 그렇다. 여성의 성이 억압되어있지만 젊은 여성들은 자신의 성욕을 긍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독립적인 인격의 성인 여성이 섹스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보려는 시도 자체는 필요하다. 모방을 통해 배우고 발달시키는 게 사람의 본성인데 마냥 모방하기엔 지금의 포르노는 아예 범죄거나 너무 위험한 행동이 많다. 꼭 그래야만 한다고 착각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아주 별 볼 일 없는 이유가 전부다.
그리고 이건 정말 흥미로운 데이터인데, 헤테로 커플 간의 섹스에선 사귄 기간이 길고 그 관계가 깊을수록 오르가즘 갭이 줄어드는 경향이 명확하다. 오르가즘 갭이 줄어드는 이유조차 아주 심플하다. 상대방이 만족할 수 있도록 신경쓰니까 줄어드는 게다. 이 '신경씀'이 파트너의 신체적 반응을 관찰하는 것뿐이겠는가? 아주 어른스러운 대화를 나누는 것도 당연히 포함된다. 여자가 오르가즘을 못 느끼는 게 순전히 남자가 못해서라고는 하지만 대화를 나누지 않고서 상대의 의중을 알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에게도 물어봐야만 한다. 연애의 목적으로 육체적 쾌락과 정서적 교류 중 어느 쪽에 어느 정도의 비중을 두고 있는가? 육체적 쾌락이 비중이 크다면 그 쾌락의 주체는 나인가? 정서적 교류가 더 크다면 연인간의 사랑에 어떤 의미가 있길 바라는가? 연인간의 사랑은 반드시 행복의 대체어여만 하고 영속해야만 하는가? 애초에 그게 가능하긴 한가? 가능하지 않음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불명확한 배신감이 든다고 자기파괴적인 행동을 하게 되진 않을까? 이 질문들의 답변에 정답은 있을까? 정답이 없다고 오답도 없을까? 오답이란 이름 뒤에서 여성을 향한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나? 상대가 육체적 쾌락이나 정서적 교류를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걸 거부하기 곤란해서 '싫다고는 안 하겠지만 좋다고도 안 할 거야'라는 식의 태도를 유지하는 걸로 대충 얼버무리고 있진 않은가? 왜 거절하지 못하는가? 다른 여성이 자신과 같은 입장이었을 때 다른 여성에게는 뭐라고 조언해줄 것인가? 그 조언이 자신의 경우가 되었을 때 답이 달라야하는 이유가 있을까? 이런 질문들 말이다.
사랑과 성욕은 다른 면이 있고 여성은 괜찮은 남성이 거기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사랑에 빠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정말 짜증날 정도로 섹슈얼리티를 과시하며 성애에 집착하기 때문에 여성과 남성이 같이 존재하고 있으면 연인이 되어야한다고 다룬다. 무슨 세뇌도 아니고... 성별이 다르면 성애적 관계만 가능한 것처럼 다루는 건 지나치게 이성애 중심주의다. 인간이 성애적 관계만 충족되면 그만인 존재던가? 아니잖은가.
애초에 성애에 있어 성욕은 상황에 따라 들어갈 수도 있고 빠질 수도 있는 옵션이다. 딱히 무성애자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인간의 성욕은 1년 365일 24시간 풀타임으로 발동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시각적 자극 = 성욕 발생이었다면 애초에 인간은 문명을 만들지도 못했을 거다. 사랑은 바로 성욕으로 이어지지 않고 성욕이 사랑의 다른 말인 것도 아니다. 애초에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면 반쯤 조건 반사로 섹스를 연상하는 건 지나치게 시스젠더 남성 위주의 생각이다.
좀 더 명확하게 언어로 요구해도 세상 요만큼도 안 무너진다. 이미 로판 안에서는 약간씩 나오기 시작하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이쯤에서 으레 로판 안에서 대충 낭만으로 다뤄지는 포르노 코드를 구체적인 예로 몇 가지 들어보겠다.
남성 캐릭터의 오르가즘이 여성 캐릭터의 오르가즘과 반드시 연계되어 있어야만 하는 이유는 그냥 그게 로망이라서인 건 알겠는데 좀 더 여성의 오르가즘에 집중해야 한다. 강간 판타지가 그래왔듯 여성이 현실에서 자신의 오르가즘을 요구하지 못하니 요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느끼고 싶다는 심리의 우회적 표현으로 발생한 경향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하다못해 집중의 방향성을 비트는 정도의 시도는 해봐야만 한다.
고통과 쾌락이 종이 한 장 차이로 묘사하는 것도 점점 더 매력이 떨어질 거다. BDSM 취향의 사람에겐 길티 플래져로 계속 팔리긴 하겠지만 사실 그 취향이 아닌 사람에게는 고통은 그냥 고통일 뿐이다. 트라우마를 자극할 수 있는 얘기긴 하지만 여성들이 구린 섹스를 꼽을 때 가장 많이 나오는 얘기가 고통이다. 크리스틴 엘리자베스 캐슬(Christine Elizabeth Kaestle)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사랑한다면 증명해보란 태도로 여성이 원하지 않는 성적행위를 강요당하는데도 응하는 젊은 여성이 12%나 됐다는데 한국에선 그보다 더 높을 가능성이 농후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생각하면 '성경험이 이렇게 내 기분과는 상관도 없고 아프기만 한 거라면 기분 좋기라도 하면 좋겠다'는 심리의 우회적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도 된다.
흔히 나오는 '몸정으로 시작해 마음정'으로 가는 흐름 자체도 비슷하다. 성경험이 적을수록 좋다는 압력이 여성에게 있다보니 운 좋게 처음부터 잘 맞는 사람이랑 만족스러운 성생활을 누리고 싶지만 섹스를 해도 이후로도 존중 받고 싶으니 성욕이 안정적으로 채워지는 전제 하에서 심리적인 교류도 맺게 되는 구조가 퍽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건데... 오히려 이럴수록 여성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과 만날 가능성은 낮아진다. 육체적 쾌락이 우선이면 비슷한 성향의 사람과 만나는 게 나을 텐데, 어떻게 대화도 하지 않고 여성의 쾌감을 우선시할지를 탐색하겠는가. 어떤 의미에서는 강간 판타지의 새로운 변형에 가깝다는 건 알겠는데 사실 이런 로맨스 서사는 약간은 훅업 문화와 맥락이 맞닿아있기 때문에 먹히는 거고 이런 코드가 흥한다는 건 사회가 여성을 성적으로 억압하고 있다는 증거기도 해서 약간은 씁쓸하다.
여성의 이런 희망사항과 달리 남성들은 섹스 그 자체가 여성과 교류하는 목적인 경우가 압도적이라서(연애 = 섹스인 것처럼 구는, 그 흔해빠져서 더 구역질 나는 남성의 태도를 떠올려보자), 여성은 자기합리화를 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선택과 그로 인한 경험을 미화하게 되는데 문득 자각이 드는 순간 제법 큰 심리적인 타격이 온다. 이 때문에 자신이 하거나 당했던 행위가 무엇인지 알아차리는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리기도 하고 더 안 좋은 선택을 하기도 해서 정확히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추구하는지 어느 정도는 자신의 안에서 정립되어있어야 한다.
사회적 압력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나머지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지 않은 채 사는 건 이제 너무 낡은 방식이다. 로맨스 서사 안에서 개인적 구원은 존재해도 사회와 제도의 변화를 주인공이 만들어내지 않는 이유는 여성이 남성과 같은 권리를 휘두른 역사가 극단적으로 짧고 페미니즘에 대한 이유 없는 적대감을 미디어에서 지속적으로 공급하다 보니 아예 생각을 못해보거나 이를 따르지 않았을 때 상업성이 없을까 고민되기 때문 아니던가. 하지만 상업성은 아주 살짝 비틀거나 새로운 걸 약간만 더해도 확보되는 걸 이미 그간의 히트작들이 입증해주지 않던가.
여성의 일상이 너무 위협으로 가득차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방비하게 가만히 있어도 마냥 상냥한 세상을 꿈꾸는 것도 현실이 불안하기 때문에 대중의 욕망이 그런 방식으로 흘러가는 걸 이해는 해둬야 한다. 가끔 짜증날 정도로 주변캐릭터들의 반응이 '주인공 너무 특별해! 남달라! 사랑해 or 존경해요!'로 내용이 가득해서 주인공이 대변하는 자의식 과잉에 토할 것 같은 소설들이 있는데... 그런 소설들이 히트칠 수 있던 이유가 이런 거다. 현실에서는 완벽해야만 받을 수 있던 칭송을 작가의 실력에 따라 편차가 있긴 하지만 별로 그렇게까진 완벽하지 않은 주인공이 받는 모습을 보며 안전한 대리만족이 가능했달까... 특히 결혼에 있어서는 콜레트 다울링이 신데렐라 콤플렉스란 책에서도 지적했듯 여성의 자립이 불가능하다는 믿음이 때론 신앙에 가까워서 더 피곤하다.
요즘엔 이 믿음이 약간은 흔들렸는지 필요로 하지도 않지만 비싼 물건을 가득 쌓아놓은 넓은 집에서 언제나 상냥하게 대해주는 가족들의 지지와 인정을 받으며 연애를 즐기고 대충 결혼에 성공해서 언제까지고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고 싶다는 이미지가 자주 나오는데... '여성이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충분한 정서적, 재정적 지원을 받는 경우에만 자립이 가능하다'로 바뀌는 것 같아서 심란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 부유한 가정이라는 게 꼭 상위 1% 부자를 묘사해서 더 그렇다. 이미 몇 번이나 말해왔지만 계급이 높아진다고 해서 여성을 향한 착취와 폭력이 없는 게 아니다. 나타나는 형태가 다를 뿐이지. 하지만 일반적으론 그런 생각 자체를 잘 안 하는데다가 상위 1% 부자가 아니면 아예 부자가 아닌 것처럼 취급하는 것도 배금주의 맹신자 같아서 가장 좋아보이는 걸 선망하고 있음은 이해해도 어쩔 수 없이 약간은 찝찝한 기분이 든다.
이 부분은 로판 안에서 나타나는 우려스러운 이미지 중 하나다. 여성의 자립이 몇 가지 조건 위에서만 성립하는 것처럼 다룬다는 거다. 가족의 지지가 없어도, 주변의 인정이 없어도, 대단한 자본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누군가에게서 반드시 사랑받지 않아도 여성의 자립은 가능하다. 물론 그게 마냥 평온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사회가 여성을 위해 바뀌어야할 것 아닌가? 여성은 이 사회의 일원이 아닌가? 이 사회가 사회의 일원을 위해 바뀌지 않는다면 그걸 제대로 된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가? 여전히 부당한 취급을 받는 사회를 그냥 방치해 두고 연애와 결혼으로 정서적 안정을 공급 받으며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계급까지 올라가 권력과 부를 쥐는 것만이 상처 입었던 유년까지 치유해주며 여성을 완벽하고도 영구히 구원할 유일한 방법이던가?
받아들여라. 어른이 되어도 우리 안엔 언제까지고 보호받지 못하던 시절의 꼬맹이가 남아있을 거다. 그리고 자신이 누리지 못한 걸 누군가가 누리는 모습을 볼 때면 그 꼬맹이가 나한테는 왜 그랬냐며 주변을 때려부수고 울부짖을 거다. 그건 너무 당연하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순간이다.
하지만 사회의 제도가 이만큼 변한 건 옛 세상이 그만큼 부당했단 걸 인정한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관계에 의존해서 얻어내는 개인적인 구원말고도 상처를 지우는 방법은 많다. 충분히 자신과 마주한 뒤에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만 잘 안다면 말이다. 우드아트 작가의 '이혼은 전문 변호사에게 맡기세요'가 이런 면에서 좋았는데, 전작을 생각하면 작가의 실력이 확 올라간 게 느껴져서 패러디 성격의 소설을 좋아한다면 한번 읽어보길 권한다. 언제 한 번 감상을 남기고 싶을 정도로 흡족했다.
80년대 들어서 미국에서 로맨스의 바운더리를 넓히려는 시도가 있었다. 로맨스 장르와 소설을 나눌 수 있냐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사회/문화/역사적 관계에서 로맨스 소설이 일반 소설보다 특별히 더 자유로운지가 주요 쟁점이었다. 그리고 사실 모든 여성들은 답을 알고 있다. 한국의 로맨스 소설 속에 현실에서 여성이 겪는 불합리와 폭력이 작가의 필력과 상관 없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경향이 왜 있겠는가. 로맨스 소설이라고 일반 소설보다 더 자유로울 수 없다. 이건 로맨스판타지 또한 마찬가지다.
아무리 상업예술, 대중예술이라 하더라도 창작물 안에서 대중의 욕망을 쫓을 때 그 방향성을 한 번 정도는 생각해야한다. 괜히 직업윤리가 있겠는가. 특히 창작물은 대중의 인식에 크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대단히 기발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혐오나 약자에 대한 폭력을 확대재생산하거나 미화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그래서 로맨스 서사를 써먹을 거면 어느 정도 고찰을 하란 소리를 입이 닳도록 얘기하고 있는 거다. 로맨스 자체가 여성들에게 폭력이 될 때도 있으니 말이다.
로맨스판타지가 완벽하지도 않고 완벽해질 수도 없듯 그 어떤 사람도 완벽하지도 않고 완벽해질 수 없다. 판타지 소설이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어른들을 품으며 성장해갔듯 로맨스 판타지 소설은 여자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어른들이 품으며 성장한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자아이들에게 더 괴악한 방식으로 험악한 세상이기 때문에 그 아이들이 더 위로 받을 수 있는 이야기가 로맨스 판타지의 장르 정체성일 수도 있다.
이미 로맨스판타지 안에서는 나는 공주도 완벽한 여자도 되지 않겠노라 말하는 주인공이 있다. 그리고 그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반응이 썩 좋았다. 그런 소설들의 수명은 다른 대리만족용의 소설들보다 수명이 더 길다. 우리는 이미 인스턴트식의 즐거움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다른 것들보다 더 뛰어난 점이 있어야만 길게 기억하지 않던가?
페미니즘은 이미 로맨스판타지 안에 자리하고 있다. 어차피 페미니즘에 정답은 없다. 그러나 여성을 사람으로 보고 존중하라고 요구하는 태도는 지금보다 훨씬 더 필요하다. 미디어에서 으레 보여주는 것처럼 사랑의 이름으로 여성이 남성의 감정적 구원자가 되어야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사랑할 수 있는 것만 사랑해도 된다. 딱히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그동안 여성에게 이만치 상냥한 굴종을 요구해왔으니 이젠 세상이 웃어주지 않는, 미성숙한 여성에게 익숙해져야할 때다.
남성을 위해 성적대상화한 여성을 물건처럼 취급하는 문화적 이미지는 그 역사의 길이만큼이나 쉽게 변하지 않을 거다. 상업 이미지라면 더 그렇다. 하지만 그걸 다 들어주고 있어야할 이유도 없다. 우리가 좋아하는 이미지들이 대변하는 게 무엇인지 직시하고 이미지로 대충 미화되어있는 싫은 부분까지도 억지로 사랑하려들지 말아라. 새로운 여성상이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남성 위주의 사회는 관성적으로 다시 여성을 성적대상화할 테고, 자본은 이를 새로운 종류의 선망으로 덮어씌워 교묘하게 팔아제낄 테지만 그렇다고 의의가 없는 건 아니다. 이미지와 경험이 가진 힘은 계속해서 현실에 남아있기 마련이다. 전쟁이 끝나도 리벳공 로지로 대변되던 여성 노동자들이 결국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물어보겠다.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는가? 당신에게 사랑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
사족 1. 저번 글에서 페기 오렌스타인의 책을 추천했는데 사실 번역의 질 자체는 김현정 번역가의 '신데렐라가 내 딸을 잡아먹었다'가 더 뛰어나다. 오렌스타인의 글은 책의 뒷부분은 아예 발췌 정보가 적혀있는데 참고하기 불편하게 주석을 안 붙인 이유도 모르겠고 데보라 톨먼이나 사라 맥클리랜드처럼 자주 인용되는 학자의 이름도 데버러 톨먼, 사라 맥클랜드로 미묘하게 발음 표기를 우선한 것도 이상한데다가 커널링구스를 쿤널링구스라 적은 걸 보니 아예 페미니즘과 성소수자 이슈에 지식이 없는 번역가를 데려다가 번역 시켰을 때 나오는 미묘함이 있어서 썩 만족스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책이다. 만약 Boys & Sex를 번역한다면 김현정 번역가님이 해주면 좋겠다. 책 내달라고.
사족 2. 성형열풍으로 인한 공장식 수술 문제 공론화가 활발해지기 전에 닥터벤데타로 유명한 김선웅 원장의 동영상을 쭉 지켜봐왔는데, 그 중 굉장히 마음에 걸리는 발언이 있었다. 시일이 꽤 지나 표현이 부정확할 수는 있으나 요지는 아직도 기억한다. '처음에는 강남에서 몸 파는 애들에게나 하던 위험한 수술을 평범한 여자애들에게도 하고 있다'는 요지의 발언이 굉장히 자연스럽게 지나갔는데... 김 원장이 하는 일은 존경 받을 만하고 이 문제를 공론화하는데 기여가 큰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평범한 여성과 그렇지 않아서 존중받을 가치 없는 여성이라는 구도를 만드는 걸 우리는 의식적으로라도 피해야한다. 모든 종류의 폭력은 조금도 저항할 수 없는 가장 취약한 계층을 향하다가 점점 위로, 더 위로 에스컬레이트한다. 폭력을 휘둘러도 자신이 제재당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범죄자들을 양산한다. 그런 믿음에 사법부가 일조하고 있는 현실에 우린 살고 있지 않던가. 이번 6월 지방 선거에 투표를 반드시 해야하는 이유 중 하나다.
사족 3. 이건 덤으로 하는 얘긴데... 로맨스판타지를 조용히 읽고 있는 소수의 남성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로판이 돈이 된다는 판단으로 분석을 위해 읽는 이들도 있는 건 물론이고, 좀 더 순수히 즐기는 입장에서는 왜 읽는지도 분명히 알고 있다. 심플하게 말하면 남성성을 매순간 과시하며 타인과 끝없이 견주게 하는 남성 문화에 질려있어서 그렇다. 남성들의 문화 안에서는 중요시되지 않는 타인과의 감정적 교류가 인간인 이상 누구나 고프기 때문이기도 하며, 인간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재되어 있는 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순간 남성 사회 안에서는 모멸 당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지독하게 과시적인 남성 문화에 질려있다는 시그널 자체는 사실 옛날에도 좀 있었는데 요즘 들어 좀 더 뚜렷해서 흥미롭다. 뭐 판타지에서도 또 백래시가 씨게 있기는 한데...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목소리를 내야하는 건 남성도 마찬가지다. 사랑받고 싶다면 사랑할만한 구석이 하나라도 있어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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