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판타지 속 로맨스 서사와 페미니즘(6)

순결하지만 섹시해야만 하는 현대 여성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할까 고민해봤는데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시작해볼까 한다. 성인이 된지 얼마 안 됐을 때 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즈음에도 나는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굳혔고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모습을 잘 알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내킬 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또 연인 간의 사랑에 대한 호기심은 있었지만 아무하고나 마구 시도하기는 또 귀찮았다. 그렇게 급하게 해야만 할 이유도 없고 말이다. 어떤 의미로 딱 평균적인 연애에 대한 기대치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연애관은 비교적 명확했지만 상대가 이 연애관에 동의하는지는 묻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그래서 고백을 받으면 일단 감정을 가라앉힐 시간을 줄 겸 다음날 카페에서 만나서, 고백해온 사람의 연애관에 대해 묻곤 했다. '사람마다 연인에게 바라는 정도가 다르고 연애하는 스타일이 다르니까 얘기하면서 한번 맞춰보자.'라고. 그런데 그렇게 서문을 떼면 개중 80% 정도는 대뜸 섹스에 있어서 원하는 바를 얘기하더라. 마치 연애 = 섹스인 것처럼 말이다.

개중에 바니 걸 이벤트를 제게 해주면 좋겠다는 놈이 있었다. 속으로는 '이 새끼 이거 안 되겠군...'라고 생각하면서도 이것도 문명사회라고 이놈을 이 자리에서 죽이면 안되니까 그 요구에 대한 답을 했다. 그럼 너도 나한테 바니 보이 이벤트 해줄 거야? 내가 그렇게 말하자 상대는 마구 웃더니 그런 게 어딨냐고 하더라.

나는 친절하게도 쭉쭉빵빵 탱글탱글한 바니 보이를 그 자리에서 검색해 보여주었고 그렇게 한 남성의 빈약한 세계관에 정신적 폭탄을 던져놨다. 한참을 어버버 거리더니 놈은 '아무리 그래도 남자한테 이런 걸 요구하는 건 좀...'이라는 식상한 얘기를 했고 당연히 나는 되물었다. 나한테 그런 걸 요구하는 건 여자니까 괜찮은 거야? 그거 불공평하지 않아? 네가 원한다고 내가 해줘야 한다면 내가 원하면 너도 해줄 수 있는 거여야 하는 거 아니야? 연인 관계는 대등한 관계잖아?

지금 이 에피소드를 보고 어떤 사람은 웃겨 죽고 있을 거고 어떤 사람은 상상도 해보지 못한 신세계를 봤을 거며 어떤 사람은 극도의 불쾌감을 느끼고 있을 줄 알고 있다.

그럼 이제 생각해보자. 내가 응당 못할 요구를 했는가? 연인관계여도 헤테로 커플이면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는 존재인가? 종속된다고 생각해서 대등한 관계에서라면 충분히 성립할 요구에 거부감을 느끼는 건가? 남성의 성적대상화가 기분 나쁜가? 그럼 여성은 여성의 성적대상화가 기분 안 나쁠 이유라도 있나? 남성이 성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게 연인 관계에 있어서의 주된 목적인 거라면 딱히 목적이 안 맞는데도 여성이 구태여 남성을 사랑하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나?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어떻든 그 다음이 어찌 됐는지가 더 궁금할 걸 알고 있다. 이런 대화의 끝에 나오는 남성들의 반응은 대개 '왜 그렇게 연애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지 모르겠다'였다. 그래서 찼다. 앞에 나눈 대화가 너무 압도적이었는지 보통은 차인 걸 실감도 못하는지 얼떨떨해하거나 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상황이 끝난데에 극도로 안심하며 돌아갔다. 그럼 내가 만들었던 이 '어색한 상황'의 본질이 무엇일까?

이게 바로 연인관계 내에서 자주 드러나는 성차별 중 하나다. 돌직구로 말해서 대충 사회에서 원하는 대로 미화를 거친 '일반적인 연애'를 하는 게 남성에게 유리하다는 걸 지들도 잘 알고 있는 거다. 심리학자 사라 맥클리랜드(Sara McClelland)가 정의한 '은밀한 공평성(Intimate Justice)'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영향을 주기 때문에 섹스 또한 어떤 면에선 굉장히 정치적인 구도를 보인다는 얘기다. 

예를 들면 이런 얘기다. 여기 가상의 헤테로 커플이 섹스를 할 예정이다. 일반적으로 어느 성별에게 섹스를 경험하는 게 좋다고 권장되는가? 섹스할 때 어느 쪽이 즐거운게 중요한가? 어느 쪽이 성행위를 통해 최종적으로 이득을 보는가? 그리고 섹스가 좋았다는 말에 내포되어있는 의미는 정확히 무엇인가? 이 질문들의 답은 남성, 남성, 남성, 남성의 오르가즘이다.

여기서 바꿔 생각해보자. 이 커플이 섹스는 하지 않고 그냥 같이 있을 때 관계의 주도권이 주로 어느 쪽에게 있을까? 누가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한 감정노동을 일방적으로 하고 있을까? 이 두 질문의 답이 어떨지 경험을 통한 데이터로 예상가지 않는가. 남성, 여성이다.

맥클리랜드의 연구에 따르면 젊은 여성들은 자신의 파트너가 만족하면 자신도 만족하는 경향이 크고 젊은 남성들은 자신이 오르가즘을 느꼈으면 만족하는 경향이 컸다고 한다. 그럼 헤테로 여성은 대체 왜 파트너의 성적만족도가 자신의 성적만족도가 되는 것인가? 아직까지도 사회적으로 여성의 성은 억압되어있으니 그렇다. 주체적 섹시가 어쩌고 쿨걸이 저쩌고 해도 여성이 자신의 성욕을 드러내면 그 순간부터 '헤픈 년'이 되어 손가락질 받지 않던가. 그러니 자신의 오르가즘을 우선순위로 두는데 은밀한 거부감을 지니게 된다.

여기서부터 보통 헷갈리기 시작한다. 여성을 성적대상화한 모습에 온 세상이 열광하는 걸 우린 목도하며 자란다. 마른 몸에 붙어있는 커다란 가슴과 비대한 엉덩이를 보며 눈호강을 한다고 하지만 생물학적 종인 이상 내재되어있는 성욕을 여성이 말하는 순간부터 발랑 까졌다며 당장 강간위협이 눈 앞으로 밀려온다. 이 말인 즉 여성은 자신의 주체적인 욕망으로 섹시하되 그 욕망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을 만큼 순결해야만 한단 얘기다. 그리고 미디어는 이 문장에 맞춰 왜곡된 '여성의 이상적인 모습'을 적극적으로 전시한다. 음악이 그렇고 영화가 그러며 뉴스를 포함한 모든 TV 프로그램이 이 순결하지만 섹시한 여성의 모습을 긍정한다. 대중 또한 이런 모습을 좋아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여성들 또한 이런 모습을 좋아한다.

특히 대중음악은 80년대 이후로 성적대상화와 한몸인 것처럼 다뤄졌다. 마돈나가 그러했듯 비욘세도 그러했고 작금도 그러하다. 한국도 여성 아이돌 그룹이 성적 착취를 당한 사건이 있지 않던가. 하지만 2000년대를 휩쓸었던 비욘세 신드롬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비욘세는 페미니스트잖아? 라고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이 있을 테니 말이다.

비욘세는 페미니스트 맞다. 미국 사회의 특성상 흑인 여성이 백인 여성과 똑같은 패션과 위치를 원하거나 누리는 게 옛날엔, 그리고 지금도 약간은 전복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욘세의 피부색이 밝은 편이더라도 아프리칸 아메리칸의 인종적 특징이 있는 얼굴로 무대 위에 서서 백인이나 긍정할 수 있었던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과시하는 공연을 하는 게 유색인종 페미니즘에 있어서는 전복적인 행위가 맞긴 한데... 유색인종이기 때문에 비욘세가 백인들이나 가질 수 있던 섹슈얼리티를 전면으로 드러내는 게 의미가 있다고 해서 인종과 상관 없이 여성에게 성적대상화를 못 하는 건 또 아니다. 특히나 그 시절 한국처럼 다문화 사회가 아니었던 곳에서 볼 때는 그런 맥락보다 성적대상화만이 눈에 띄기 마련이다. 그런 유색인종 페미니즘의 맥락이 없던 사회에서, 그것도 오늘날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특별히 의미를 더 부여할 말이 없단 얘기다. 그냥 미국애들한테는 그랬구나~ 하고 쓱 넘기면 된다. 페미니즘도 계파가 다양하기 때문에 모든 게 우리와 꼭 100% 맞으란 법 없다.

당연하지만 음악만 성적대상화에 미쳤던 건 아니다. 패션업계도 여성을 노골적으로 이리저리 벗기고 마른 몸을 추구했고 할리우드의 여성 캐릭터 사용은 지켜보면 눈에서 피가 나올 지경이었으며 상업 광고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시각적인 매체들이 다 이 모양이니 당연하지만 소설에도 이런 여성의 이미지가 공존하게 된다. 80년대 슬쩍 시작되었던 대중문화 성상품화의 시대는 2000년대부터 완벽하게 성공적으로 먹혀 진행되었고 2010년대쯤부터 섹시하지 않은 여성은 아예 상품성이 없는 것처럼 취급되었다. 미국에서 섹시하지 않은 컨셉의 여성도 있지 않던가? 싶겠지만 섹시하지 않으면 보통은 헵번으로 대표되는 소녀 같음을 팔고 있지 않는가. 대중문화 안에서 여성은 늙지도 못한다. 안 팔릴 거란 짐작으로 말이다.

뭐 그래서 K-팝 열풍이 더 가능하지 않았나 싶기도 한데... 미국은 아무래도 10대 대중문화를 디즈니가 꽉 잡고 있다보니 디즈니에서 푸쉬해 10대들의 아이돌이 되었던 이들이 16살을 경계로 디즈니로부터 멀어져야할 때가 오면 일단 여성이 벗으면 파격 변신 어쩌고 하니까 벗곤 했다. 제일 반향이 컸던 건 역시 한나 몬태나로 유명해진 마일리 사이러스였는데... 미국에 비해서는 한국의 K-팝 쪽이 미국보단 덜 성적대상화한 여성이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치정싸움도 안 나고 마약도 안 빨고 총기소지도 옹호하지 않으니까 한결 편하게 즐기는 것 같단 인상을 받을 때도 있다. ...농담 같은가? 

이 부분이 2020년대 가까워지며 그나마 조금 나아져서 터미네이터 : 다크 페이트나 매트릭스 : 리저렉션같은 영화가 나오며 한 방 먹이긴 하지만 대다수의 콘텐츠는 여전히 딱 봐도 나이가 많은 여성에게 나이에 걸맞는 권력이나 남성과 비슷한 수준의 폭력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남성이 원하는 순종적 섹시함을 벗어난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 같은 프로그램이 나오는 건 고무적이긴 한데 당연하지만 완벽할 수는 없고, 그런 부분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 자체는 좋은 경향이다. 불만을 핑계로 여성을 공격하지만 않는다면 더 그렇겠고.

총체적으로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성인 여성은 성적대상화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싫든 좋든 그런 성적대상화가 되어있는 여성의 모습에 우리가 익숙해져있다는 걸 받아들여야한다. 

그럼 여성 이미지가 왜 이 꼬라지로 굳었는지 따져보기 위해 90년대로 돌아가보자. 

1991년에 수잔 팔루디의 '백래시'가 나오며 제3물결 페미니즘이 시작된다. 당연하지만 페미니즘 3세대는 2세대의 자녀 세대들이었다. 물론 그들만 있던 건 아니지만, 인권 운동과 다양해지는 이민자들의 인종과 여성성에 대한 교조적 태도 등을 피부로 겪고 자라다보니 그 전의 세대들보다 다문화적이었고 동성애자의 인권에도 열려있었으며 여성의 섹슈얼리티 자체를 부정하는 교조적 태도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80년대가 그렇게 보수적이었으니 90년대 또한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사회인 건 마찬가지여서 90년대의 주요 이슈는 여성에 대한 폭력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가정폭력, 성희롱, 성폭력 외에도 여성에게 가해지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말이다. 이때 아니타 힐(Anita Hill) 사건 터지면서 성희롱 문제를 대중의 관심으로 끌어올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이때부터 성희롱이라는 것이 더 이상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닌 힘의 우위관계에 따라 형성되는 권력의 문제라는 걸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 속에서 제3물결 페미니스트들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했다. 여성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다 묶어서 설명하기엔 각자 다른 계급과 환경과 상황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나자 그만큼 다양한 목소리가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럼 당연히 어떤 계급과 인종, 사회 안에서는 여성이 아직 섹슈얼리티를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도 발견할 거 아닌가. 그러니 3세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추구하는 것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추구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여성의 이미지를 제한하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여성상이 너무 다양했기 때문에 여성의 자주권을 확립하기 위해 신체와 무관한 여성의 능력을 찬양하는 기조가 생기게 됐는데... 이게 어느 순간부터 여성이 '완벽한 육체'를 가지는 게 대단히 중요한 것처럼 미디어에 묘사되기 시작했다.

미디어에서 이를 매우 교묘하게 이용해먹은 건 자명하다. 수잔 J. 더글라스(Susan J. Douglas)가 2010년에 낸 책 '배드 걸 굿 걸: 성차별주의의 진화(Enlightened Sexism)'에서 이를 자세히 다뤘는데,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 '페미니즘이 성공했고, 여성들에게 이젠 옛날같은 성차별이 없으니까!'라고 떠들면서 성차별적인 요소를 관습적으로 사용한 콘텐츠를 고대로 아이들에게 노출시켰단 점이다. 더는 성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양 성차별적인 요소를 그저 '재미를 위한 장치'인 것처럼 다루면서, 여전히 성차별적 요소를 매력적으로 그렸다. 그러면서도 페미니스트를 악마화하는 건 멈추지 않았다.

이런 태도를 취하면 완벽한 육체를 가진 여성들로 화면을 꾸미는 걸 그만두지 않고도 대단히 진보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한국에서 -2-들이 '어머니뻘 여성들이 억압됐지 지금은 여성상위사회다'라고 떠드는 것도 아주 전형적인 진화한 성차별이다. 여성이 남성과 같은 지위와 권력과 임금을 여전히 배분받지 못하는데 대체 어디가 나아졌단 건가? 한국의 젠더페이갭이 30%인데, 30년대 미국에서 상황이 나은 여성노동자가 받던 것과 비슷한 갭이다. 장난하나? 이 자식들은 자신의 어머니에게조차 제대로 해주는 게 없으면서 입은 왜 털어대는지... 아무튼. 여기에 10대를 마케팅한 시장이 커지면서 아이들한테도 자연스럽게 나이에 맞지 않는 어른스러움을 팔기 시작한다. 어른에게는 아이 같아 보이기 위한 젊음을 팔면서 말이다.

듀안 하그리브스(Duane Hargreaves)와 마리카 티게만(Marika Tiggemann)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미디어 속에서 전형적으로 이상화된, 그 왜곡된 여성의 신체에 대한 이미지를 잠시 보는 것만으로도 여성들은 자신을 육체적으로도 성과적으로도 저평가한다. 10대 시절 화면 속 아이돌을 보면서 자신과 비교하며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을 것 아닌가. 그 '저렇게 되고 싶다'는 말 뒤에서 자신의 육체를 타인에게 이상적으로 보이는 기준을 채우지는 못한다고 격하시키고 있는 거다. 거울을 보면서 남자는 나 정도면 뭐! 라고 생각하는데 여자는 여기저기 부족한 점을 찾아대는 거 자체가 이런 이미지의 영향이기도 하다. 화면에 이상화된 이미지가 등장하는 비율 자체가 다르잖은가.

여성의 눈에 멋져보이는 롤 모델이 제대로 구축되기도 전에 미디어에선 성적대상화가 잔뜩 되어있는 육체를 아름답게 조명하고 있고, 여성이 주체적으로 섹슈얼리티를 과시하는 걸 '쿨'하다고 칭송하는데다가 그렇게 하면 돈도 버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적이중잣대는 엄연히 존재해서 여성이 자신의 성적만족이 어디서 기인하는지는 물론 안전한 방식으로 성적만족을 추구조차 할 수 없게 됐다. 그 결과 여성 이미지가 인종적으로는 인식되었으나 근본적으로 다양해지지는 못했다.

영화에서 예를 들어보겠다. 90년대 영화 중 '귀여운 여인'이랑 '원초적 본능'과 2001년에 나온 '금발이 너무해'를 잠깐 보자.

귀여운 여인 얘기부터 하자. 하아... 줄리아 로버츠 주연인 이 영화를 왜 이렇게 싫어하는지 솔직히 뻔하지 않은가. 너무나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라 일단 지루하고 주인공이 굳이 창녀여야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다. 애초에 이걸 내 선택으로 본 건 아니긴 하지만, 보고 난 다음에도 대체 이게 왜 그렇게 좋은지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해 멘탈이 반쯤 터졌더라.

몸은 팔지만 마음은 안 파는 게 여자의 긍지다? 돈이면 모든 게 다 해결된다? 신사와 사랑에 빠지면 여성은 구원 받는다? 여자는 마냥 상냥하면 그만이다? 뭘 말하고 싶은 거지 이 영화는? 이 영화의 어디가 좋은 거지? 그렇게 폭풍 같은 혼란을 느끼고 있는 내게 친구는 재밌지! 라며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물어왔고 나는 내 취향은 아니었다고 솔직히 말했지만 동시에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아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의 어디가 맘에 드는 거냐는 질문에 친구는 줄리아 로버츠가 예쁘잖아! 라고 명쾌한 대답을 돌려줬고 나는 다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에 젖었다. 그냥 그 친구는 단순히 줄리아 로버츠를 통해 비춰지는 이미지가 조잡하게 만든 '해피 엔딩'을 사랑하는 거였다. 로맨스라는 이름만으로 모든 구림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구원받는 듯한 여성의 이미지만을 사랑할 수도 있는 거였다.

귀여운 여인을 관통하고 있는 여성 이미지는 말 그대로 남성들의 이상형 그 자체다. 아무것도 바라는 건 없으니 아무것도 해줄 필요 없지만 남자가 느끼고 있는 모든 감정적 문제를 해결해주고, 예쁘고 어리고 순종적인데다가 타인의 헛짓거리로 상황이 개 같아져도 화내지 않고 마냥 낙천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성적으로는 개방적인 여자를 캐릭터로 만들면 줄리아 로버츠가 연기한 그 캐릭터지 않은가. 그야말로 남성들의 환상을 채워주기 위해 만든 로맨스 영화 그 자체다. 이미지가 너무 강력하고 효과적인 나머지 그런 역겨운 미화를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마는 거였다.

남성이 성에 개방적이지만 순종적이지 않은 여성을 얼마나 무서워하는지는 1992년에 나온 원초적 본능이 잘 얘기해준다. 이 영화를 오늘날 보는 건 추천하지 않는데 샤론 스톤이 이 영화를 찍을 때 제작진의 강압에 의해 속옷을 탈의해야했으며 섹스씬에서는 자신의 음부가 필름에 찍혔단 것을 나중에 확인했지만 방영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고 폭로했기 때문이다. 

내용을 거칠게 줄이면 락스타가 얼음 송곳으로 살인당하는 사건이 터졌는데 샤론 스톤이 연기한 범죄소설가가 그런 내용의 소설을 써서 주요 용의자로 오른다. 용의자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인 형사가 이 소설가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며 엮이고, 그래서 진짜 범인인지 파헤치려다가 지 동료도 잃는데 그래도 소설가가 유혹하는 대로 냅다 섹스는 다 하는 시놉시스다. 샤론 스톤을 90년대 대표 섹스 심벌로 올린 영화 원초적 본능에서 샤론 스톤의 캐릭터는 남성의 성적 환상과 두려움을 섞어다 형상화시킨 거나 다름 없다. 진지한 대화나 감정적 교류를 요구를 하지 않아 퍽 귀찮지는 않지만 섹스에 있어서는 적극적인 편인 예쁜 여자가 마냥 고분고분하게 굴지는 않으니 두려워하는 꼴이란. 여성이 자신의 성욕을 드러내는 것 자체에 일종의 임파워링이 있긴 했다지만 그 이미지를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악마화시킨 게 이 영화가 아닐까 싶다. 참... 작다, 그릇이.

금발이 너무해도 구린 면이 많다. 이 영화가 나올 당시엔 그래도 모순적이어도 약간은 페미니즘적이었지만 오늘날엔 구림 도장을 쾅쾅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더 많다. 영화의 내용은 매우 기본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페미니즘적인데 막상 영화 안에서 페미니스트의 모습은 미디어의 낡은 편견을 고대로 베껴와 재생산하고 있다. 공격적이고, 패션을 무시하고, 동성애자며 사람들 사이에서 괜한 논쟁을 만드는 사람처럼 페미니스트를 묘사한다. 아주 전형적인 악마화다. 너무너무 무서워서 참을 수가 없다. 부-후 라고 적어주고 싶을 정도다.

무엇보다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영화를 시작했으면서 주인공말고는 영화 내에 나오는 모든 캐릭터가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나질 않아서 지켜보고 있으면 약간 어지러울 지경이다. 강조를 위해서 그렇게 묘사했다면야 2001년 영화니까 대충 넘어갈 수 있지만 2022년에 보면서 새로운 맛을 느끼기엔 모자르지 않나 싶다.

대체로 대중문화 속 여성의 모습은 이런 식이다. 남자가 좋아하는 여성, 남자가 좋아하는 겉모습을 했지만 두려움을 느끼는 만만찮은 여성, 남자가 좋아하지만 여자도 좋아할 수는 있는 여성으로 대충 나뉜다. 대중문화 안에서 비춰지는 여성의 패션 이미지가 다양해지기는 했지만 강하고 당당한 여성이 자신의 성적 만족감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는 미지의 공백으로 뒀으니 어쩌겠는가. 여성이 자신의 성장과정에 있어 이를 고찰해야만 하는데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감이 어디 사회에서 뿅 하고 사라졌던가?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 페미니즘이 갑자기 쭈그러들어버린 계기는 역사적으로 입증됐듯이, 불황과 사람들의 죽음이다.

2001년에 있었던 9.11 테러 얘길 빼놓을 수 없다. 이때 미국 사회는 정말 완전히 분노로 눈이 돌아가있었다. 그런 분노를 느낄만도 했다. 진주만 공습 이후로 본토를 향한 공격이었는데 그것도 전쟁도 아니고 테러로 인해 민간인 사망자가 약 3천 명 가까이 나왔으니 전세계를 상대로 '미국과 함께 하던지 아니면 적이 되던지'라며 으름장 놓을 정도였다. 이 사건에서 제대로 회복되기 전에 2008년엔 서브프라임 모기지 붕괴가 터졌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붕괴가 뭐냐, 모기지는 주택담보대출이고 서브프라임은 신용등급이다. 그럼 서브프라임이 은행에서 기꺼이 대출을 내줄만큼 좋은 신용등급이냐? 아니다. 프라임 등급이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대출 받기 편한 우량고객들이고, 서브프라임은 그렇지 못해서 대출을 해줘도 갚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불안정한 수입을 가진 사람들이다. 당연하지만 원금을 갚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하니 더 높은 이자와 많은 양의 담보를 요구한다.

그래도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노숙자가 되기 싫으니 주택담보대출은 상환하려 노력할 것 아닌가? 살고 있는 집이 은행에 넘어가는데. 그 점을 감안해서 불안정적인 직업의 사람들도 집을 살 수 있게도 하고 닷컴 버블로 꺼진 경기도 살릴 겸 정부가 초 저금리 정책을 장려했고, 대출금리가 낮아지니 너도 나도 집을 사면서 부동산 경기가 폭등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잠깐. 대출금리가 낮으니까 무리해서 집 사더라도 집값이 엄청 오르고 있으니까 집을 팔면 이득을 보네? 그럼 빚내서 집을 많이 사고 팔길 반복할수록 이득 아닌가?' 오늘날 한국에서도 갭투자랍시고 이 비슷한 짓거리를 해댔으니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이 늘면 늘수록 어떻게 될까? 부동산 가격이 더더더더 높아지니까 부동산의 실제 가치와 호가 사이에서 어마어마한 버블이 생긴다. 일단은 거래량도 늘고 돈도 돌아다니니 부동산 경기가 좋아진 것처럼 보이게 되고, 이런 집값 상승세가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처럼 보인다.

자, 여기서 잠깐. 은행은 무엇으로 돈을 벌까? 이자와 수수료로 돈을 번다. 대공황 때 은행이 저질렀던 짓 때문에 직접적인 이익을 못 보도록 막아놨던가 그렇다. 이 말인 즉 돈을 빌려줬을 때 채무자가 빚을 못 갚으면 이는 고스란히 은행의 손실이 된다. 그래서 담보니 보증이니 대출심사니 손해보지 않으려고 별의 별 걸 다 챙겨서 대출할 때 피곤하게 하는 거다.

그런 은행의 입장에서는 대출을 해줘도 손실을 감당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면 눈이 돌아갈만 하지 않은가? 그래서 사람들이 비교적 잘 갚는 주택담보대출을 왕창 끌어모아다 증권을 만들어서 팔았다. 단순하던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를 복잡하게 꼬아놓는 거다.

A라는 사람이 B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을 때 A가 낸 이자는 B 은행의 이득이었는데 이게 싫으니까 B 은행이 A의 채권을 포함해 수천 개의 근저당과 융자를 결합시켜 파생금융상품을 만들었다. 이걸 부채담보부증권, CDO라고 부르는데 이걸 은행이 투자은행에게 팔고, 투자은행이 투자자에게 팔면 A가 낸 이자는 이 CDO를 사간 투자자의 주머니로 간다. 투자자의 입장에선 이 CDO가 부실한지 아닌지가 신경쓰일 거 아닌가? 그러니 신용평가기관들이 등급을 산정한다. 그런데 이 CDO에 무디스와 S&P 같은 신용평가기관들은 별 근거도 없이 제일 안전하다는 AAA를 마구 뿌려줬다. AAA등급을 많이 뿌려줄수록 투자은행에게서 많은 돈을 받았으니 그리 했다. 이 평가가 틀렸다고 해도 그들을 제재할 법도 없었고 말이다. 그리고 이런 '안정적인 투자상품'은 연금 공단 같은 곳에서 선호했다.

자, 그럼 이런 구조 안에서 사람들이 주택담보대출을 못 갚는 일이 생기면 어떻게 될까? 집만 날아가는 게 아니다. 채무불이행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연금도 날아가는 거다. 그렇지만 은행과 투자은행은 이 거래에서 떨어진 수수료로 이득만 보지 잃는 게 없다. 신용부도 스와프 등도 있지만 너무 길어지니까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직접 찾아보길 권한다.

은행 입장에서야 이 수수료 장사가 달달하니 모기지론을 더 많이 만들고 싶을 것 아닌가? 그렇게 맛탱이가 가버린 은행이 기본적으로 해야할 대출 심사를 제대로 안 하고 마구 대출을 해주기 시작했다. 닌자 론(NINJA Loan), 혹은 니나 론이라고도 불렀는데 No Income No Job or Asset을 줄여부르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수입도 직업도 자산도 없어도 주택담보대출해드림! 이라는 미친 짓을, 그것도 대형 은행이 했다. JP 모건, 크레딧 스위스, 모건 스탠리, 골드만삭스, 씨티그룹- 월가 대형 은행 중 아무거나 골라봐라. 한놈도 빠지지 않고 다 했으니까. 자신이 이익을 본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미친짓을 해댔다.

경고가 없던 것도 아니다. 이를 우려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미국에게는 언제나 상냥한 IMF에서도 경고했었는데 그만 두질 않았고, 결국 폭삭 망했다. 무엇이 되었든 버블이 발생하면 언젠가는 터지기 마련이고, 결국 주택담보대출을 갚을 수 없게 된 사람들은 전부 집이 담보로 넘어가면서 노숙자가 되어버렸다. 정확한 피해규모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로 인해 미국에서만 실업자가 820만 명이 발생했다. 집을 잃은 사람도 600만 명 정도 되는 걸로 기억하는데 당연하지만 미국에서만 이랬던 건 아니다. 약 5천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전세계적으로 실업하며 전세계가 타격을 입었다. 특히 그리스와 아이슬란드가 이로 인해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서브프라임 모기지와 관련된 금융상품이 휴짓조각이 되면서 뱅크 오브 아메리카 추산치로는 전세계 시가총액이 붕괴가 시작된 4개월 동안 7조 7천억 달러 가량이 증발했다고도 하고 S&P의 추산치는 미국에서만 5조 달러 가량이 증발했다고도 한다. 

저 시기 한국은 다행히도 노무현 정부에서 집값을 조였던 덕에 다른 나라만큼 심각한 피해를 보지 않았는데 그래도 영향이 꽤 있었다. 무엇에 가치가 진짜로 있는지 믿을 수 없게 되었으니 주가에 대한 신용이 무너질 게 아닌가. 이 부분을 리먼 브라더스 쇼크라 부르고... 이 관련 이슈는 언젠가 집을 마련하고 싶다면 반드시 공부해두길 권한다. 한국 금리는 미국 금리 따라간다. 지금 갭투자니 영끌이니 해서 빚 져서 집 산 사람들이 분명 있는데 계속 집값 안 조이고 규제완화했다간 그들이 모두 파산할 정도로 부동산 버블이 생길 수도 있다고 국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가 있다. 조만간 금리 올리겠다고 미국이 온몸으로 시그널을 주는데 뭐... 귀 담아들을지 무시할지 알아서 하길 바란다. 성인은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손으로 망칠 권리가 있지 않은가. 투자한다며 했던 행동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완전히 무너졌을 때 극빈층으로 전락하지 않는 한 사회에서 나서서 도와줘야할 이유는 없다. 이미 문재인 정부는 온몸으로 하지 말라고 말렸는데 안 들어먹던 사람들이 고작 이 글 하나로 변할 것 같진 않기도 하고 말이다...

어쨌든 피해 규모가 이래놓으니 서브프라임 모기지 붕괴는 전세계인들에게 아주 단단하게 트라우마로 박혔다. 전 세계가 다 같이, 동시에 주르륵 경기 침체의 바닥으로 내려왔다. 한국에서는 피해가 덜했다고 부동산으로 투기해서 이득 보겠다고 부득불 구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긴 한데 실거주 목적 외의 부동산 소유가 지금 같은 미친 집값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줬단 건 기억해두자. 그래서 독일 베를린에서도 부동산 회사의 주택 24만 채를 몰수해 공공임대로 돌리는 주민투표의 결과가 찬성으로 나와서 정책으로 어떻게든 도입될 거 같긴 한데 좀 더 지켜봐야할 얘기긴 하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붕괴 이후 제일 어이 없는 점은 부시 정부에서 이렇게 개판이 났지만 수습을 안 했고 이어 들어선 오바마 정부 또한 제대로 규제를 하지 못했다. 큰 은행을 찢어서 독과점을 못하도록 분산 시키지도 못했고 이런 위험이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방관했던 이들을 단 한 명도 감방에 넣지 않았다. 이때 민주당에게 실망해서 엘리트층에 대한 혐오를 가져 공화당을 지지하게 됐고 그래서 트럼프가 당선됐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트럼프나 공화당은 전혀 서민을 위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이 사건들이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은 어떤 의미에선 미국의 탄생과 함께했던 낙관주의의 멸망이며, 이후 두 가지 방향성으로 도드라진 경향을 보인다. 하나는 아이들에게 좀 더 상냥한 세상만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어른들의 심리가 더 강해졌고 다른 하나는 미국 사회와 대중문화의 안 좋은 면에 다른 나라의 대중의 눈이 조금씩 뜨였다.

이런 배경을 기억하며 2001년부터 디즈니 프린세스가 미국에서 대성공을 거뒀다는 걸 생각해보자. 육아물을 다룰 때 얘기했던 것도 이 부분과 일맥상통하는데, 아이에게 상냥하게 구는 걸로 어른이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특히 아동을 위해 어른이 해주는 소비에 관해서 역사학자인 게리 크로스가 명명한 '경이로운 천진함(Wondrous Innocence)'이라 부르는 현상을 봐도 그렇고... 어쨌든 미국에서는 디즈니 프린세스가 좀 더 어린 여자아이들의 문화를 먹어치우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편향된 성인 여성의 순결하고도 섹시한 이미지는 90년대부터 시작해 30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남게 되었다.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없던 세상에서 발견해낸 거라 이제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부정하면 안 된다는 점은 나도 동의한다. 우리가 하나의 생물학적 종인 이상 육체에서 끌림을 느끼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마냥 성적대상화하는 걸 그냥 둬서도 안 된다.

이제 다음 글에서는 한국 상황을 다뤄보고, 드디어 본론인 로맨스판타지 속 여성 이미지를 들여다보자. 물론 분량조절 실패하면 또 밀릴 예정이니 미리 양해를 구한다.

사족 1. 글에서 소개한 페미니즘 책 대부분이 국내엔 안 나와있어서 이런 이슈가 궁금하다면 그나마 번역되어 나온 페기 오렌스타인의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질문들' 한권 정도는 읽어보는 걸 권한다. 원제는 Girls & Sex인데 아무래도 미국에서의 관점이 강하기는 하지만 사실 한국과 엄청 크게 다르지도 않아서 으레 빠지기 쉬운 함정들을 알아차리는데에는 도움이 된다. '신데렐라가 내 딸을 잡아먹었다'도 상당히 재밌는 책이다. 디즈니 프린세스를 싫어한다면 한번 보는 걸 추천한다. 오렌스타인의 책은 읽기 쉬운 편이기도 하니 겁먹지 말고 한번 읽어보길 권한다. 그리고 2020년에 낸 Boys & Sex도 내용이 괜찮던데 번역할 출판사가 있으면 좋겠다는 사소한 염원도 있다. 페미니즘 서적 엄청 팔리는 편은 아닌 거 알지만 중요한 책이다. 흑흑. 내달라고.

사족 2. 미국에서 실업률이 1% 증가하면 4만 명이 죽는다. 그때 유럽과 미국 실업률이 10%였으니 미국에서만 약 40만 명 정도가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경제적 살인은 절대, 절대, 절대 언론의 보도를 타지 않는다. 경제적 살해가 보이지 않는다는 건 다른 말로 가난이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기도 하다. 한국에서도 실업으로 인한 조용한 경제적 살인이 성행하고 있는데, 정확한 수치를 본 적이 없다. 아는 분이 있다면 알려준다면 감사하겠다.

사족 3. 특히 경제에 관해서는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우리은행이 파생결합펀드(DLF)를 속여서 고객들에게 팔아먹었던 걸 생각하면 1금융권 은행들이 부당한 방법으로 서민의 돈을 털어먹어도 어느 정도의 징계를 받는지 시험해보는 것 같다는 의심이 생길 지경이다. 관심있다면 EBS 다큐프라임 - 자본주의 정도라도 보면서 기본적인 구조를 이해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투자로 쉽게 돈 번다는 말은 쉽게 돈 날린다는 말과 똑같다. 그런 말에 속아넘어가면 도울 방법이 전혀 없다. 이익 추구의 자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시장경제 논리를 떠들거면 도태되었을 때 시장경제의 논리대로 누구도 구제해줄 이유가 없다.

사족 4. 수잔 더글라스의 진화한 성차별이 국내에서도 발행된 걸 확인해 내용을 약간 수정했다. 글항아리 출판사에 감사의 말을. 제목이 쪼끔 그래서 못 찾았던 거 같은데 여하튼 '배드 걸 굿 걸 - 성차별주의의 진화 : 유능하면서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주술'이란 제목이다. 사서 읽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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