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판타지 속 로맨스 서사와 페미니즘(5)

현대 여성의 섹슈얼리티 유래, 핀업 걸

핀업 걸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보자. 핀업 걸은 현실의 인물이기도 하지만 가상의 인물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사진이 누구나 찍을 수 있는 물건이지만 옛날엔 그렇지 않은 물건이다 보니 핀업 걸은 두 분야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던 셈이다. 예를 들자면 마릴린 먼로 또한 핀업 모델로 먼저 유명세를 탔는데 핀업 모델을 그대로 찍어서 사진을 인쇄해 사용하는 게 아니라(이렇게 하기엔 당시 사진이 비쌌다) 모델이 자세를 취하면 사진을 찍어서 그걸 보며 그림을 그리되 당연하지만 어느 정도 데포르메가 들어갔고, 이렇게 완성된 그림을 달력이나 포스터, 잡지에 인쇄해서 팔았다. 물론 아예 모델이 없이 그리기도 했다. 그러니 핀업 걸은 현실의 인물이기도 하며, 가상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핀업 걸을 두고 누구는 19세기 말 여성 배우들이 자신을 광고하기 위해 극장 한 켠에 꽂아두었던 사진에서 시작되었다 보고 누구는 깁슨 걸이라고 하게 된 거다. 핀업 아트는 30~50년대를 대중문화를 주름잡았다가 60년대 들어 기술 발전으로 인해 사진과 영화 등의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핀업 아트가 사랑받게 해준 남성들의 그 관음적 시선을 충족시켜주는 방식으로 여성의 이미지를 가공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이 핀업 아트 속 여성 이미지는 급속도로 변한다. 깁슨 걸의 신여성에서 1차 세계대전 때 정부가 제시했던 핀업 걸의 이미지는 '지켜주고 싶은 옆집 소녀'였지만 1933년에 남성잡지 에스콰이어(Esquire)가 등장하며 그림 속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노골적으로 성적 대상화 시켜버린다. 이후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핀업 걸의 이미지는 섹스 어필을 넘어 추잡의 영역까지 넘보기 시작한다. 1940년대 핀업 아트의 주요 특징은 옷을 '간신히' 입고 있는 여성의 콜라병 같은 몸매니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어느 순간 대중은 그림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 가상의 무언가를 좋아하는 건 그렇다 쳐도 그 가상의 이미지가 대중화되어 존재하면 현실에서 구현하려고 드는 게 사람이다. 특히 그게 포르노 이미지라면 더 그렇다. 포르노에 자주 노출될수록 포르노 이미지를 현실로 가져오려고 하는 경향성에 대한 연구도 요즘은 진행 중이니 관심 간다면 찾아보는 걸 추천한다.

그럼 어떻게 되겠는가? 현실의 여성을 벗겨서 찍은 사진으로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화가가 그린 그림에서 사진으로 핀업 걸 이미지는 진화해나가던 시절을 대표하는 인물로 베티 페이지가 있다. 베티 페이지는 페티쉬 모델도 한데다가 잡지 플레이보이와도 일하며 대중문화 속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끼친 영향이 큰데... 구체적인 예를 들면 케이티 페리의 핀업 걸스러운 이미지가 베티 페이지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페티쉬에 대한 환상을 대중화시키기도 했다. 여하튼 베티 페이지의 활동기인 1950년대를 기점으로 50년대 후반에는 핀업 걸의 영역이 그림에서 사진으로 완전히 대세가 넘어갔다. 

그런데 할리우드가 이 '여자 벗기기 유행'에 동참하게 된다.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의 두 주연인 제인 러셀과 마릴린 먼로도 대량 생산된 핀업 사진으로 인해 1950년대에 섹스 심벌이 된 유명인이다. 영화 홍보를 위해서 성적인 이미지를 활용하며 이 시기 할리우드 안의 여성 캐릭터에게 부여하는 서사는 그레이스 켈리처럼 혈통 때문에 존중 받을 가치가 있는 완벽한 숙녀거나 누군가에게 살해당할 희생양이거나(히치콕의 여성에 대한 관음적 시선은 나름 유우우명하다) 창녀거나 창녀거나 창녀였다.

여성들이 이런 핀업 걸 이미지를 통해 현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확보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확보한 여성의 성, 섹슈얼리티가 여성들의 삶이 나아지게 만들진 않았다. 베티 페이지는 60년대에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려고 했을 땐 이혼했다며 까였고(진짜 이혼 때문일 가능성이 몇 퍼나 될까) 말년에는 우울증, 신경쇠약, 편집성 조현병으로 주립 정신병원에서 몇 년을 보냈다. 먼로는 조 디마지오에게 가정폭력을 당했으며 아서 밀러가 매카시즘에 시달리는 바람에 세번째 결혼도 파경을 맞았으며 결국은 약물 중독, 우울증, 불안 증세에 시달리다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포인트는 아름다운 여성성에 대한 선망이 급속도로 퍼진 점이다. 먼로와 햅번이 사랑을 받으며 스크린에서의 영향만큼 패션에서 영향을 줬단 얘기를 한 이유가 이건데... 여성들이 이미지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 결코 가질 수 없는 두 이미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된다. 먼로는 당연히 성적 대상화 그 자체나 다름 없는 몸이고, 햅번의 소녀 같아 보이는 얼굴이다.

이런 식으로 아름다운 여성의 이미지가 우상화되는 이유는 줄곧 강조해왔던 것처럼 여성의 노동이 폄하되어있기 때문이다. 결혼하지 않으면 남자 반 밖에 안 되는 월급으로 살아야하는데 결혼한다고 해서 인생이 평온하게 이어지지도 않는다. 배우자의 외도나 이혼은 당장 여성의 생계를 위태롭게 만드는데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을 거란 맹목은 여성에게 단 한 번도 내재된 적 없었다. 그러니 끊임 없이 외모를 가꿈으로 이런 불안에서 여성들은 필사적으로 도피했다. 아름다워야 결혼할 때 신분이 상승할 수 있는 시기기도 했고 말이다. 다이어트 제품 시장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커지는데서 알 수 있듯, 일종의 광기나 다름 없다. 

이러한 일들은 여성이 섹슈얼리티를 확립했다 하더라도 사회적 분위기는 여전히 여성에게 억압적이었기에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남성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적극적으로 탐닉하면서도 여성의 욕망 자체는 천한 것으로 취급하는, 아주 전형적인 성적 이중 잣대(Sexual Double Standard)다. 이런 태도는 너무 전형적이라 설명하기 귀찮을 지경인데, 여성을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라 정복해 자신에게 종속되어야하는 대상으로 보니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다. 여성의 성적 욕망과 만족 자체는 알 바 아니지만 남성에게 있어 여성과의 성적 경험이 그 자체만으로 스테이터스가 되는 건 유구한 헛소리 중 하나고 넘쳐나던 포르노는 이러한 편견을 강화하는데 작용한다. 

이쯤에서 다시 핀업 걸을 생각해보자. 핀업 걸은 포르노그래피인가? 그렇다. 처음 시작은 아니었어도 자본을 퍼먹으면서 포르노그래피로 진화해버렸으니 그렇게 됐다. 핀업 걸은 여성상에 영향을 줬는가? 그렇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부각시킴으로 인해 현대 여성에게 끼친 영향은 확고하다. 그럼 남성들이 즐기던 핀업 걸과 여성에게 강요당하던 하우스 와이프는 대체 뭐가 그리 다른가? 

냉정히 얘기해 별 반 다를 게 없다. 하우스 와이프와 핀업 걸을 나란히 걸어두고 보면 더 명확해지는데, 핀업 걸의 포르노그래피 성격을 무시하면 여성에게 강요되던 요소는 거의 일치한다. 공격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언제나 웃는 얼굴은 아름답고, 이것이 진정한 여성의 섹슈얼리티라며 가슴과 엉덩이에만 살의 존재가 허락되며 남성들을 위한 행동만을 허락받은 여성의 이미지다. 리벳공 로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미국 사회의 어디를 둘러봐도 성적 매력이 있는 여성들만이 가시적 존재로 허락된다. 다른 말로는, 본격적인 대중문화 성상품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 안에서 여성들은 약을 먹던지 술을 먹어가며 자신을 내리눌러가며 살던가 죽던가 했다. 일전에 <시한부물이 싫은 몇 가지 이유>에서 얘기한 적 있는 에블린 맥헤일의 사망일이 1947년 5월 1일인데 여성의 죽음마저도 예쁘면 그만이라는 태도에서 짐작가겠지만 그때도 여성의 자살은 별로 새로울 게 없는 뉴스였다.

당시 여성의 임금은 남성에 비해 30~50% 정도 적었고 여성의 일자리 자체도 줄어들었으며 사회적 압력도 계속 가정에의 종속을 장려하니 당연하지만 페미니즘의 싹이 다시 자라나고 있었다. 1953년 플레이보이 매거진이 창간하며 현실의 여성이 가진 섹슈얼리티는 더욱 성적 대상화되어 포르노로 사용되기만 하지 존중받지 못한다. 여기에 할리우드도 빠지지 않았고, 한국은 1950~1953년간 이어진 한국 전쟁 이후로 미국의 문화의 영향을 직격으로 받게 된다. 동시에 요걸 빼먹으면 안 되는데 미군 위안부가 존재했다. 그래, 양공주라는 말을 들어봤을 거다. 이게 한국에선 해방 이후 정립된 여성 이미지 중 하나란 걸 기억해두자.

미군들이 다른 나라의 전쟁에서 성매매를 하는 개짓거리는 그 역사가 유구한데 한국이라고 당연히 예외는 아니었고 이승만 정부는 전쟁 와중에 위안부를 운영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사실상 국내에선 말 그대로 정지되어있는데... 타국이 자국민에게 휘두른 성범죄 문제조차 제대로 못 따져묻는데 어떻게 자국 정부가 자국민에게 한 성범죄 문제를 어찌 따져 책임을 묻게 할 생각인가? 박근혜 시절 당사자에게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이뤄졌던 이른바 '위안부 합의'의 실무 책임자 이상덕 전 주싱가포르 대사가 윤석열 캠프에 영입됐었는데 어떤 자리를 받아가서 무슨 짓을 하나 잘 지켜보자. 장담하건데, 암담할 거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1960년대를 돌아보자. 2차 세계대전 베이비 붐 세대가 경제 호황을 타고 소비력을 갖추며 영 패션 안에서 여러가지 룩이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학생운동이 시작된다. 반전운동에서 시작한 이 학생운동은 반문화운동으로도 번져 미국의 전통적인 가치를 재창조하고자 시도하는 와중, 1963년 '여성성의 신화'가 제2물결 페미니즘에 불을 당긴다.

시대 상황을 돌아보면 래디컬 페미니즘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여성 이미지의 흐름을 보면 알겠지만 여성의 몸과 여성의 몸을 둘러싼 사회적 기대/역할에 대한 강제가 존재하는데, 여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응답하기 시작한 게 래디컬 페미니즘이다.

그렇게 섹슈얼리티는 논쟁에 올랐다. 여성이 무엇으로 정의되어왔는가? 여성의 존재는 언제나 그 육신으로 정의되어왔다. 여성은 사람이 아니라 걸어다니는 자궁이고 성녀 아니면 창녀며 엄마 아니면 아내로만 정의되어왔기 때문에 참정권을 얻었음에도 사람으로 존중받지도 못 하도록 만드는 여성의 육체에 대한 관음적 시선과 억압에 반발감을 가지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래디컬 페미니즘은 여성의 성적해방, 가부장제로부터의 해방을 얘기는 하는데... 그래봤자 이 시기의 페미니즘은 여전히 백인 중산층 여성의 것이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프레이즈나 자매애 같은 개념을 말하고 경구 피임약이 판매되기 시작하면서 혼전 동거가 죄악시 되지 않게 되는 등 많은 이슈와 변화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미디어에서 60년대의 모습을 그릴 때면 브래지어를 태우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1968년 9월 7일 뉴저지의 애틀랜틱 시티에서 개최되었던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에서의 데모(Miss America Protest)의 모습이다. 미디어의 이목을 끄는데 성공한 최초의 데모인데 예뻐지기 위해 불편을 감안해야했던 브래지어, 하이힐, 거들, 코르셋, 헤어 스프레이와 화장품 같은 걸 쓰레기통에 넣고 불싸질러버린 데모다.

이 이미지가 래디컬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된다. 당연하게도 미디어는 브래지어를 태우는 사람들(bra-burners)이라며 이들을 비웃었다. 국내에서도 탈코르셋 선언이라며 화장품을 부수는 모습을 비춘 적이 있으니 낯설진 않을 거다. 겉모습으로 여성을 속박하지 말라는 주장에 외려 외모평가질 하는 멍청한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려라. 당시에도 대충 그런 분위기였다.

60년대를 대표하는 히피들은 기본적으로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있어 자연이란 지금 생각나는 그 낡은 모성신화 그대로라서 래디컬 페미니즘과는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 전 패전 이후로 반전 운동의 불도 사그라들기 시작했고 말이다. 그래도 히피 스타일이 대표적인 여성의 이미지에 영향을 주긴 했다. 좀 덜 꾸민 듯한 자연스러운 모습(솔직히 요즘도 꾸안꾸라는 말이 있으니 당시에는 혁신적이었던 정도만 기억해두면 된다)과 유니섹스 패션, 민속복을 디자이너들이 디자인 요소로 반영한다던가 하는 식이었다. 바비 인형 또한 60년대의 산물이라 당시엔 엄마가 아닌 여성상을 제시해서 혁신적이었는데 오늘날엔 마냥 좋게 보기엔 너무 구린 면이 많은 것처럼 말이다.

1970년대 들어 미디어는 여성운동을 본격적으로 조롱하기 시작한다. 커리어우먼 vs 전업주부의 구도를 잡고 커리어우먼이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중계하며 여성운동을 비웃는 게 일종의 놀이처럼 일어났다. 에스콰이어도 빠지지 않고 여성의 실수(Feminine Mistake)라는 기사를 내며 동참하는데 요지는 '전업주부가 훨씬 행복하거든~'이었다. 여성운동에 대한 조소를 보내며 운동 자체를 비방하고 여성운동의 중요성을 깎아내리거나 초점을 흐리게 만들면서 페미니스트를 사회적 이단아로 취급했다. 그러니까... 남성혐오자나 레즈비언이거나 감정적/성적으로 좌절감을 느끼는 루저로 간주했다는 소리다. 이것도 변한 게 없다. 

70년대 페미니즘의 주요 이슈는 낙태권이었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낙태는 모든 인종과 계층의 여성에게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남북전쟁 이후로 남성들로 구성되어있던 미국의 의사협회가 낙태 시술권 독점을 원해서 가져가며 낙태가 전국적으로 금지되었다가 로 대 웨이드(Roe vs Waid) 사건으로 논쟁에 불이 붙었다. 이 사건으로 낙태를 처벌하는 대부분의 벌들이 사생활의 헌법적 권리에 대한 침해로 위헌이라는 판결이 내려지며 낙태 금지 법률들이 폐지되었다. 이후 공화당이 연방대법원을 장악하고 주지사들이 주 법률을 재개정하며 낙태 합법화를 저지해오긴 했지만 말이다.

여성 이미지로 돌아와서 얘기하면 영 패션은 어덜트 패션으로 진화해가며 유니섹스 룩, 스포츠 웨어 등으로 드디어 패션이 서서히 캐주얼화 되어가지만 80년대로 다가갈수록 이미 굿 올드 데이즈 정서는 퍼지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여성상은 나오기 힘든 상황이었다. 

애초에 이런 환경에서는 새로운 여성상에 대한 제안 자체가 불가능하다. 미디어의 태도가 특정 대상에게 적대적이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태도에도 적대감이 옮겨온다. 미디어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가 우리의 사고와 감정, 행동에 미치는 영향은 조금만 검색해도 학술자료가 쏟아져나오니 구태여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그렇지만 이 점을 사람들은 자주 망각하는데, 미디어 또한 기업이다. 더 큰 이윤을 얻고 싶다는 이유로 미디어 기업이 적극적으로 특정 정치적 입장만 대변하는 보도를 하며 권력을 휘둘렀다고 쳐보자. 이 미디어 기업이 추후 이런 행동을 못 하도록 어떻게 견제할 수 있을까? 벌금을 조금만 세게 물려도 언론에 재갈을 채운다고 디비질 텐데. 한국의 경우 세금으로 미디어 기업들에게 지원도 꽤 해주던데 탐사보도조차 제대로 안 하고 대충 기업 이윤을 추구할 거면 정부지원금이나 끊었으면 싶다.

어쨌든 미디어의 지속적인 페미니즘 폄하와 레이건 정부의 대대적인 백래시로 인해 80년대 들어가면 페미니즘은 다 죽어서 대학가에나 희미하게 남아있는 상태가 된다. 리벳공 로지가 재발견된 것도 80년대 초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80년대 중반서부터는 제2물결 페미니즘은 완전한 소강기에 들어선다.

이렇게 여성에게 유난히 거지 같은 시기인 80년대지만 이 시기 주목해야하는 건 영화를 통해 장르의 이미지가 정립되었다는 점이다. 특히나 SF 장르 쪽에서 그렇다. 60년대에 영화 2001 :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리얼리즘이 들어간 우주 공간을 그리기 시작했고 80년대 들어 스타워즈 시리즈가 히트치며 스페이스 오페라의 이미지를, 블레이드 러너가 사이버펑크 이미지를 확립 시킨다.

사이버펑크는 개중에서도 일본 이미지가 듬뿍 섞여 있는 게 특징인데... 70년대 독일과 일본의 생산성이 치고 올라오면서 일본이 미국 기업을 사기 시작하니까 미국인들은 일본을 대단한 경쟁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80년대 들어서는 '일본이 미국을 기술로도 경제로도 다 잡아먹어서 기본 문화권이 일본이 된다'는 허황된 공포마저 대중에게 있었기 때문에 SF 장르에서 유난히 이런 '기술에 뛰어난 일본' 설정이 이내 툭툭 나오기 시작한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보면 되게 뜬금 없이 기모노를 입은 여성이 피임약을 먹는 광고가 툭 튀어나오지 않는가? 그게 이런 불안 심리의 발현이다. 이런 대중 심리가 금방 사그라들지도 않기 때문에 1999년 나온 매트릭스에서도 나온다. 영화가 시작할 때 위에서 아래로 코드처럼 보이는 녹색 문자가 떨어지는데 잘 살펴보면 좌우반전시킨 가타카나다. 외에도 여러 영화들이 장르적 이미지를 구축한다. 매드맥스도 포스트 아포칼립스 이미지를 선명하게 구축해냈고 터미네이터는 기계에의 공포감을 심었다. 

다음글에선 90년대 들어 나타난 제3물결 페미니즘에서 나타난 여성상에 대해 얘기해볼 생각이다. 물론 영화 얘기가 빠지지 않을 예정이니 기대해달라.

사족 1. 영어를 할 줄 안다면 생각보다 돈 덜 들이더라도 공부할 방법은 많다. Ted는 책장사라고 조롱받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 핫했던 이슈를 다룬 책을 압축 시켜서 단순하게라도 설명해주는 편이고 팟캐스트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채널들이 있다. 예전부터 진보쪽은 유튜브보단 팟캐스트였다. 유튜브가 나온 게 더 뒤라서 그렇게 된 거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번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고급 지식은 언제나 책이 제일이긴 하다. 돈이 궁하다면 도서관을 애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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