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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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자매

들어가기 전에.

그 글은 내 이모할머니의 집 다락에서 발견 된 수첩에 적혀있었다. 이모할머니라 해봤자 나는 사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모할머니를 뵌 적이 없다. 할머니의 말로는, 아마 이모할머니 또한 내가 태어났다는 것조차 모를 수도 있을거라고 한다. 거기에 대해서 그 어떤 유감도 없지만, 가끔 주인 없는 1층짜리 단독주택에 청소를 하러 가는 엄마의 뒤를 따라 이모할머니의 집으로 향하는 건 내가 단순히 그 집이 마음에 들고, 그 누구도 그 집을 가지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내가 성인이 되자마자 그곳을 차지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걸 모르는 가족은 없을 것이다. 엄마가 아주 오래 전부터 별 말 없이 나를 데리고 그 집, 주인이 떠난지 오래 되었어도 여전히 깨끗하게 잘 다려진 빨랫감처럼 정성스레 관리 된 그 집에 데리고 가는 것도 내가 그곳을 좋아하기 때문이리라. 나는 지금 열다섯살이고, 여자다. 우리 엄마는 둘째다. 그리고 나는 엄마의 첫째이자 외동딸이다. 이보다 좀 더 어렸을 때는 이런 숫자놀음이 뭐가 중요한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내 위치가 너무도 애매하지만 그만큼 자유롭다는 걸 안다. 나는 많은 걸 원할 수 없지만 이 산골 끝자락의 작은 1층짜리 단독주택 정도는 원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모할머니는 첫째인 엄마의 셋째 딸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언제나 이모할머니에게 편지를 쓰셨다. 지금 할머니가 편지를 쓰고 계신 분이 셋째인 딸이라면 둘째이모할머니는 어디에 계셔요? 내가 그렇게 묻자 할머니는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대답 대신 엄마를 불러 나를 데리고 나가도록 지시하셨다.

나는 아직도 우리 가족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아마 평생 알 수 없겠지. 엄마가 할머니의 서재에서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제 딸에게 셋째 이모가 살던 집을 물려주세요. 이모가 이제 그곳으로 돌아올 일은 없잖아요. 그래도 주인 없이 그냥 두는 것보단......." 그때. 복도 끝자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얼른 서재 문에 대고 있던 귀를 떼고는 반대편으로 도망가는 바람에, 할머니가 어떤 답을 주셨는지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할머니를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어려워하고 당신의 앞에서는 자발적으로 비참한 죄인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엄마가 얼마나 큰 용기를 내 할머니에게 요구를 했다는 걸 알 것 같아 목구멍에 큼지막한 돌덩이가 콱 박힌 것 같은 갑갑함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계속 엄마의 뒤를 따라 그 집으로 향한다. 적당히 인적 없는 작은 마을의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1층짜리 단독주택. 하얀 벽에 까만 지붕이 얹혀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졌지만 넓은 뒷마당과 집만큼이나 튼튼하게 지어진 높은 담벼락은 모든 세상의 나쁜 것들로부터 집과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을 지켜줄 것 같았다. 엄마가 집을 청소할 때마다 나는 작고 단순한 집을 둘러보며 이 집에서 살면 얼마나 평화로울지, 또 얼마나 행복할지 상상했다. 그렇게 엄마 몰래 이 집에 숨겨진 다락방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게 바로 저번주 일요일이었다. 나는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어 평소보다 조금 더 들떠 있었고, 엄마는 이상할 정도로 불안정해보였지만 사실 엄마는 이모들보다 유달리 큰 불안덩어리를 가슴 속에 품고 살던 사람이었기에 나만 좀 눈치를 보고 있었다. 엄마도 이모할머니의 주택을 좋아했다. 사실 내가 이 집을 원하는 이유는 엄마도 이곳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엄마가 이 작고 튼튼한 집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다른 이모들을 제치고 이곳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정말 신기해. 네 엄마가 그렇게 뭔가를 열성적으로 원했던 적이 잘 없었거든. 차라리 잘 된 일이다. 하고 모두가 순순히 그 집을 맡긴거지 뭐." 내가 열 살이 되기 한시간 전이 되던 날 연말파티를 위해 온 가족이 집에 모였을 때 셋째 이모가 술을 홀짝이며 나에게 몰래 말해준 걸 기점으로 나 또한 그 집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엄마의 뒤를 따라 처음으로 그 집 앞에 서게 됐을 때. 왜 엄마가 그토록 이 집을 원했는지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때부터 이 집은 나와 엄마의 집이 되었다. 내가 성인이 되서 이 집을 물려받게 된다면, 이 방은 엄마 방으로 하고 저 방은 내 방으로 해야지. 저 뒷마당 한 켠을 밭으로 만들어 여름에는 토마토를 심어야지. 고양이도 한마리 키워야지. 내가 이 집을 가지게 된다면.......

그 일요일은 겨울 치고는 조금 많이 더운 날이었다. 엄마는 그 작은 집을 쓸고 닦은 뒤 더위에 지쳐 작은 거실에 놓인 작고 하얀 소파 위에 드러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곧 고등학생이 되는 나는 앞으로 3년 뒤면 이 집을 가지게 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 평소보다 더 과감하게 집안을 활개치고 다녔다. 덕분에 나는 이모할머니 방의 천장 한 구석에 작은 정사각형 모양의 문이 나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문 위로 벽지가 한 겹 발라져 있었지만 세월에 힘에 의해 한쪽 꼭지가 살짝 떨어져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평소의 엄마라면 발견할 수 있는 흔적이었지만 오늘 엄마는 평소보다 더 불안하고 힘들어 발견하지 못한 걸로 보였다. 나는 이모가 쓰던 책상 의자를 가져와 그 위로 올라가 까치발을 들었다. 손 끝에 뜯어진 벽지의 끝이 잡혔다. 그대로 조심스레 벽지를 뜯었다. 벽지를 뜯고보니 이건 확실하게 문으로 보였다. 나는 문손잡이를 잡고 힘 있게 돌렸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문 안에 내장 된 간이 사다리가 덜렁 내려와 기겁했지만 겨우 입을 틀어막아 비명을 참을 수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의자에서 내려와 다시 이모의 책상 앞에 얌전하게 가져다 둔 다음 내려온 사다리를 잡아 아래로 당겼다. 사다리는 살짝 삐걱이는 것 빼고는 나름 안정적으로 펼쳐졌다. 나는 사다리 앞에 서서 열린 문 너머를 노려본다. 까만 정사각형 너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심호흡을 하고 조심조심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 난생 처음 다락방이라는 공간에 올라가보았다.

일단 그곳은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깜깜했고, 무엇보다 먼지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나는 다락방 안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미친듯이 재채기를 해대기 시작했다. 내가 겨우 휴대폰 플래시를 켰을 때 눈 앞에 보이는 건 희뿌연 먼지들과 상자 두어개 뿐이었다. 다락방은 내 예상보다도 훨씬 작아서, 내가 지금 앉아있는 바닥을 제외하고 전부 상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상자에는 무언가 적혀 있었다. <두고갈 것>, 그리고 <챙겨갈 것>. 나는 당연히 <챙겨갈 것>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챙겨가야 하는 상자인데 이곳에 남아있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가. 상자는 너무 가벼웠는데, 그 안에는 고작 수첩 하나만 덜렁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저 아래에서 나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거의 구르듯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다가 그만 사다리가 뚝 하고 부러지고 말았다. 내 비명소리를 듣고 방으로 달려온 엄마는 거의 기절하듯 놀라며 미친듯이 화를 냈다. 엄마의 잔소리를 들으며 먼지투성이의 몸을 이끌고 욕실로 씻고 들어갈 때도 나는 품에 숨겨둔 수첩을 몰래 만지작거렸다.

엄마는 몇 번이고 그곳에 다락방이 있었고, 거기에 올라간 적 있다는 사실을 할머니에게 말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 했다. 엄마는 내가 이모할머니의 집을 망가뜨렸다고 생각하며 다음 부터는 나를 이 집에 데려가지 않겠다 선언했지만 나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엄마에겐 나밖에 없었고, 아마 주말에 나를 그 썰렁하고 커다란 아파트에 홀로 두는 걸 누구보다 마음 아파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나와 엄마는 할머니의 집에서 얹혀 사는 것과 다름 없는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할머니에게 자신이 집을 함부로 훼손했다 말해버릴까 두려운 마음은 이해했지만, 딱히 할머니는 나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아마 엄마가 두려워 할 일은 평생 벌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욕실 안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수첩을 열었다. 태어날 때부터 이곳에 없던 이모할머니, 엄마와 제일 닮았다던 그 이모할머니, 모두가 어려워하고 흠모하며 존경하는 그 할머니가 정성들여 편지를 쓰는 상대인 이모할머니의 수첩에는 대체 무엇이 적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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