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과 사원과 허니밀크
사원이라는 곳은 참으로 묘한 곳이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졌지만 사람을 위해 만들어 진 곳이 아니라니, 초코보를 키우기 위해 만든 축사와 크게 다를 바 없어보인다. 그렇게 기괴한 장소에서 한 세대를 풍미했던 신앙이 껍데기만 남아 멈춘 채 일대를 지배하고 있다면, 더 그렇지 않을까. 내가 의뢰를 받아 가는 곳들의 대부분은 이른바 ‘사연이 있는 물건들’이다. 멀쩡하게 돌아가는 교회라면 굳이 나에게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대부분의 종교단체는 께름칙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웬만한 일로 외부인의 개입을 원하지 않을테니 매 번 평범함에서 극단적으로 벗어난 광경들을 보게되는 내가 범인들에 비해 왜곡된 시선을 갖고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 고대의 사원 근처의 마을에서 며칠을 보냈던 적이 있다. 고대의 사원이라고 해봤자 납작한 돌덩이들 몇 개만 널부러진, 고고학에 조예가 없다면 통행에 방해가 된다며 밀어버릴 정도의 초라한 폐허였지만. 그 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 “이런 곳에서 살면 경외감이라던가 들지 않나요?” 하고 물었더니 “마을 어디를 가도 사원이 쳐다보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빠요” 라는 오싹한 답변을 받은 적도 있었다. 확실히 분명 뭔가 있기는 한 것 같다.
“오늘은 무리...”
빵과 함께 씹히는 모래알 만큼이나 짜증이 가득 섞인 목소리와 함께 로코코가 방으로 들어왔다. 온 몸을 감싼 튜닉을 벗자 우수수 하는 소리와 함께 몸 이곳 저곳에서 모래가 떨어졌다. 그러고나서 바닥에 철퍽 엎어지더니 기괴한 방향으로 팔과 다리를 휘휘 저으며 나에게 기어 온 로코코는 내 다리를 붙잡고 사각사각 하는 소리와 함께 비늘에 볼을 부비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차갑지 않아..."
“나는 파충류가 아니야. 항온동물이라고 합니다.”
“대충 비슷하잖아...”
“그거 굉장히 인종차별적인 발언이야.”
“허... 그럼 잡혀가기 전까지 최대한 이러고 있어야겠네.”
로코코에게는 일종의 의식이 있다. 힘든 일을 마치고 난 다음에는 타인에게 몸을 부벼대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기겁할만한 버릇이 있는데, 자신의 말로는 피곤함을 남한테 옮기는 행동이라고 한다. 도를 넘는 이기적임에 기가 막히지만, ‘피로감 떠넘기기’ 행위는 당하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다들 일종의 쑥쓰러운 애교행위 정도로 봐 주고 있다.
기본적으로 붙임성이 좋아 잡다한 인맥도 많고 친구도 많은 로코코에게 내가 어디가 특별하겠느냐마는, 이 '피로감 떠넘기기' 라는 행위를 하사받는 몇 안되는 사람중 하나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통계를 보면 나라는 인물은 적어도 상위 몇 퍼센트 안에는 드는 정도의 특별함을 가지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든다.
아기 도식이라는 말이 있다. 생물은 ‘머리가 크고’, ‘눈이 크며’, ‘팔, 다리가 미숙한’, ‘작고 연약한 것’, 그러니까 아기에 가까운 것에 본능적으로 약하다는 이야기다. 어린 커얼이 성체와 다르게 미친듯이 귀여운 이유도 아마 생존을 위해서가 아닐까. 라라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본인들에게는 다 나름의 방법이 있는 것 같지만 라라펠은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시도때도 없이 방방 뛰어다니며 과장된 몸짓을 보인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무례하다고 할 수 있지만, 애나 어른이나 귀여울 수 밖에.
로코코도 당연히 라라펠로써의 몸짓을 배우고 그렇게 행동하도록 자라왔다. 기분이 좋을때에는 두 팔을 벌리고, 슬플때에는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당황하면 발을 동동 구른다. 확실히 귀여운 행동이다. 수염이 난 이름모를 아저씨가 안겨들면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겠지만, 나에게 달려오는 사람이 활짝 웃고있는 라라펠이라면 누구든지 귀여움에 자신을 내놓게 되는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로코코는 약간 키가 큰 편에 속하는 휴런이다.
로코코를 만난지도 벌써 2년이 되었다. 급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의뢰를 위해 사람을 찾는다길래 보수만 보고 덥썩 낚여버렸을 때의 이야기. 장비도 식사도 모두 알아서 해결하라며 툭하니 숲에 던져놓은 사기성 짙은 의뢰였는데, 그 곳에서 만난 로코코의 눈은 어쩐지 피곤함과 권태에 찌든 다른 모험가들에 비해 또렷하고 반짝하니 이질적이라기 보다는 어딘가 기분나쁘면서 동시에 신기했었다. 애석하게도 나에게 '신기함' 이라는 감정은 직업 특성상 그렇게 오래가지 못할 뿐더러, 몇 분 후 거대 원숭이들에게 쫓기느라 곧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지만, 어찌어찌 의뢰가 끝나고 터벅터벅 숲을 빠져나오는 길에 무심코 옷에서 진흙을 털어내는 모험가들 사이를 총총거리며 뛰어가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며 저 사람이 없으면 내일부터 삶이 상당히 따분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의 나는 계속되는 감정소모에 지쳐 연애는 물론, 가볍게 만나는 행위조차 질려버려서 휴일에는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으니 사소하더라도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일이 생긴것에 조금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홀린듯이 다가간 나의 '시내에 도착하면 함께 저녁을 먹지 않겠냐'는 궁색한 플러팅에도 불구하고 방패를 등에 멘 그녀는 자기도 배가 고팠다며 손쉽게 응해주었다. 내가 흑심을 품은채 나쁜짓이라도 계획하고 있었으면 어쩌려고.
포포토 포타쥬를 깨끗이 비우면서 로코코에 대해 몇 가지 재미있는 것을 알게되었다. 아기였을 때 라라펠 부모님께 길러졌다는 이야기나, 점점 커가는 자신을 위해 큰 집으로 이사를 갔었다던가, 부모님보다 먹는 양이 많아서 기분이 언짢다는 이야기들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였다면 아마 얼굴에는 미소를 띄운 채, '아아, 알겠으니까 빨리 어디에 가서 죽어버리던가 해' 같은 몹쓸 상상만 하고있었겠지만, 로코코의 이야기는 평소와는 다르게 경청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빈 접시가 치워지고 술잔이 하나 둘 비워지더니 이내 주인장이 물을 가져다 주었다. 이만하면 되었으니 슬슬 나가라는 소리인가. 평소의 반도 마시지 않았지만 어딘가 나른했다. 어라, 내가 먼저 플러팅하지 않았던가? 이상하게도 어딘가 들떠있었던 것 같다. 타인과 함께 하는 저녁은 평범한 식사가 아니다. 일종의 전장이라고 해야할까, 다들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전투에 임한다. 어떤 이는 비즈니스를 위해, 어떤 이는 정보를 위해, 어떤 이는 하룻밤을 위해. 그런데 그 날 나는 잠시동안 내가 전장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던 것 같다. 오늘 밤 어디에서 이 사람과 무엇을 할까 하는 생각보다는 그 사람의 몸짓, 보호구에 눌려 생긴 셔츠의 주름으로 어림잡아보는 어깨의 모양이라던가, 웃을때 살짝 감기는 눈의 모양 등의 감상들이 머릿속을 휘휘 지나갔다. 오랫만에, 아니 12살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청량하고 깨끗한 느낌, 조그맣게 쌓아둔 눈덩이를 밟으면 나는 뽀득 소리만큼이나 깨끗하고 간지러운 향기였다.
계산을 마치고 나온 후의 바깥공기는 약간의 젖은 흙 냄새와 차가운 잔디 냄새. 곧 비가 오려는 모양이다. 가려진 달의 어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축축한 바람. 횃불의 냄새. 멀리서 들려오는 밤의 소리. 내 앞을 지나쳐서 걸어가는 실루엣.
"또 만나주세요."
긴장한채로 로코코의 손을 잡았다.
사람을 멈춰세우기보다는 아무래도 그저 어디라도 만지고 싶어서 뻗은 손. 그런 납작하고 파렴치한 생각으로 던진 한 마디는 너무나 부자연스러워서 마치 또각또각 소리를 내면서 움직이는 목각인형같았다. 정말이지 사회부적응자는 어딜 가도 쓸모가 없다. 하지만 만약 이 순간이 평생 세계에서 단 한 사람의 손을 잡고 살아가야하는 게임이었다면, 물론 그런 게임이 세상에 어디있겠느냐마는, 나는 주저하지 않고 로코코의 손을 잡았을 것이다. 찰나의 순간에 머릿속에 그려지는 수 천번의 변호와 수 만번의 자아비판. 그리고
"그래!"
라고 말 하며 나의 손을 끌고 앞으로 뛰어가는 로코코.
다시 사원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그날은 5일만에 찾아 온 휴일이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서 뒹굴며 창 밖으로 보이는 옆집의 아기 커얼을 보고있었다. 유물 발굴이라나 뭐라나 하는 일에 동원되어서 멍청한 학자들이 온 힘을 다해 건드려대는 사원의 함정들을 부수며 보낸 5일은 뜨겁고 건조한 사막의 날씨만큼이나 끔찍했었다. 이따금 들려오는 코코노에의 기합소리가 없었으면 진작 정신을 잃고 사막을 떠도는 분노한 망령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재미있게도 휴일에 사람이 하는 일은 언제나 동일하다. 지난주도, 지지난주도, 저번달에도 나는 휴일이면 침대에 누워서 뒹굴거리거나, 책을 읽거나, 아껴둔 와인을 홀짝이거나 할 뿐이었다. 다른 휴일이라고 해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사이클을 전부 성공적으로 완수하지 않으면, 다음주는 쭉 슬프고 괴로운 것이기에, 꽉 짜여진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시간을 갖기 위해 휴일이 있는거라고들 하지만, 휴일또한 시스템의 일부라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모순인가? 어쨋든 나는 절대로 침대 밖을 나가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손이 닿는 위치에 책, 빵 바구니, 그리고 와인병을 배치해 놓았다. 이제 아무도, 그 어떤 것도 나를 방해할 수 없겠지.
사람을 그렇게 미워하거나 싫어하지는 않지만, 굳이 만나고 싶지는 않다. 가끔 몰려오는 외로움은 있지만 그러자고 타인과 같이 살거나 하고싶지는 않다. 가끔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건강을 생각하라며 과일을 먹으라고 강요하는 코코노에나, 창문으로 머리를 빼꼼 내밀고 놀러가자고 하는 앙투안이나, 통통거리며 시끄럽게 뛰어다니는 로코코를 제외하면 굳이 나를 찾아오는 사람은 없다. 누가 찾아오더라도 이불속에 숨어서 없는 척 하는 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덕분에 나의 방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다. 아무에게도 위협받지 않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요새. 워낙 이곳저곳 쏘다니며 생활하기도 하고, 정해진 거처도 딱히 없으니, 잡다한 물건은 물론, 큰 가구도 당연히 없다. 여행하는데 필요한 몇 가지 물품만 갖고 다닐 뿐이니, 물건 하나 하나가 전부 나의 분신들이다.
해가 점점 이동하자 옛 사원의 그림자가 길어져 창문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초대받지 않은 침입자를 막아내는 방법은 커튼을 닿는 것 밖에 없었지만, 나는 침대에 몸을 바쳐버린 불쌍한 영혼이기에 달이 뜨고 질려버린 그림자가 방을 나가기 전 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것이다. 나와 다르게 휴일에도 멈추지 않는 코코노에의 검술훈련이라던가, 모래언덕에서 썰매를 타보겠다는 로코코를 보면 어째서 저렇게 열심히 살아가는가 의문이 들 정도다.
몇 번의 실패 후 언덕의 정상에 올라 선 로코코는 팔다리를 벌리면서 위 아래로 방방 뛰었다. 괴상한 광경이었다. 시스템의 피해자인 주제에 '어른스럽고 점잖은 행위' 에 대해 보수적인 의견이 었었던 나는, 다 큰 성인 여성이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에 한심하기도, 한편으로는 어딘가 부럽기도, 그런 복잡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해졌다.
로코코의 이마에 사막의 바람이 지나가자 앞머리가 나풀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아무리 바라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다. 작은 동물이 꼬물대는 것을 몇 시간이고 바라보는 것이 지겹지 않듯이. 작은 일에도 커다란 리액션을 한다던가 (물론 몸이 크기때문에 더 크다), 무방비하게 엎어져서 잔다던가 (어이없을 정도로 무방비하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흐-흥 하며 콧소리가 난다던가 (자신만 자각하지 못 하는 듯 하다), 아무튼 상당히 재미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로코코가 없는 생활을 상상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아니, 상상하기가 싫은 것에 더 가깝겠지만. 앙투안과 코코노에도 좋은 동료고, 헤어지게 된다면 아쉽겠지만, 로코코와 헤어지는 것은 나의 소심함과 사회부적응이 장기인 정신머리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재앙이다. 그 날 무언가에 홀린 듯 손을 잡았을 때 처럼 어떻게 해서든 떠나는 걸 막으려고 하겠지. 건강하지 못 하다는 건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상처를 치료하는 마법은 차고 넘쳤어도 마음을 고치는 마법은 아직 보지 못 했으니까 아마 기술이나 마법의 비약적인 발전이 없다면 나는 평생 이런 상태겠지 싶다.
해가 언덕 봉우리를 넘어가기 시작하자 또롱 또로롱 하며 종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저녁시간일 터, 하지만 이 곳에 제대로 된 요리사는 없었고(아무래도 가장 직급이 낮은 막내가 다 떠맡은 느낌이다), 스프에는 후추 대신 모래가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식사를 피하고 있었다. 이따금 휴일에 근처 마을에 가서 먹거리를 사오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었지만, 제 아무리 신선하고 값 비싼 재료라도 캠프에 도착할 즈음 해서 추-욱 하고 늘어지는 것이다. 마치 우리들 처럼 추-욱 하고.
그렇게 추-욱 쳐져 모래투성이가 된 로코코가 돌아오고, 숙소의 불빛이 하나 둘씩 사라지자, 곧 사원에는 어둠만이 남게되었다. 해가 떠있을 때 까지만 해도 무척이나 뜨거웠지만 밤이 되자 온도가 급격히 낮아졌다. 차갑게 마른 모래벌판에 물을 뿌리자 푸스스하는 소리와 함께 새끼 전갈들이 위로 올라와 여기 저기로 흩어졌다. 이 전갈들은 원래부터 여기에 살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우리들처럼 모종의 이유로 사원에 이끌려 여기로 와버린걸까.
로코코가 몸에서 모래를 털어달라고 하며 훌렁 옷을 벗었을 때 까지만 해도 머릿속에서는 방정맞은 생각들과 흥분감, 그리고 죄책감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지만 막상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니 간지럽다며 꺄르르 웃는 로코코를 보자 그런 생각은 전부 사라져버렸다. 내가 미쳤지. 무슨 욕심이야, 이러고 있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데.
아이였을 때에는 항상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막상 어른이 되자 장점이라고는 초콜릿을 한개가 아닌 세개씩이나 먹어도 뭐라고 할 어른이 없다는 점 정도였다. 하지만 '설탕을 너무 많이 넣었잖니!' 라던가 '그렇게 차가운것만 먹으면 배탈난다!' 라는 소리를 듣지 않고도 마음껏 일탈할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니까, 어른의 몇 가지 단점은 상쇄할 수 있지 않을까. 상자 맨 구석에 몇 겹의 천으로 꽁꽁 숨겨 둔 항아리에서 꿀을 듬뿍 덜어서, 안 그래도 달콤해 속이 쓰린 선인장 수액 몇 방울과 함께 잔에 담고, 따뜻하게 뎁혀 둔 사막 양젖도 넘칠 듯 붓고서 휘휘 저었다.
한 모금 마셔보니 예상대로 달콤했다. 살아있다는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토닥여주는 맛이다. 항상 떠돌아다니느라 집이라 부를 곳은 없지만, 집의 아늑함이라는 감정이 존재한다면 아마 이런 기분이겠지. 어느새 탁자로 눈을 빛내며 다가온 로코코에게도 허니밀크 한 잔을 내밀었다. 건조하고 차가운 사막의 밤바람이 문 틈으로 모래와 함께 스며들었다. 아무리 천과 종이로 구석 구석 문 틈을 막아봐도 어디로부턴가 바람이 새어들어오는 듯 했다. 하지만 로코코와 허니밀크가 있는데 그런 사소한 불편함은 감수해야지.
따뜻한 우유를 마셨기 때문이었을까, 슬슬 잠이 오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면 아쉬운 주말이 끝나버리겠지만, 원래 행복한 일들은 빨리 끝나기 마련이다. 그래야 얼마나 행복한지 깨달을 수 있을테니까. 고고학자들이 이 사원에 관심을 갖는 이유도 그런 연유가 아니었을까? 한때 아름다웠지만 곧 덧없이 허물만 남은 폐허이기에 어떤이들에게는 더 아름다워보이는걸까?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순간을 소중히 여길 수 밖에 없다. 언제 사라질 지 모르는 행복이니까,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돌아본다면 나에게는 로코코와 허니밀크만으로 버텨왔던 때가 있었구나 하고 웃으며 넘길 수 있겠지.
로코코를 침대에 눕히고 밖으로 나오자 수많은 별무리들이 마치 검은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질 것 처럼 반짝였다. 그 아래에는 수백년간 자리를 지키고있는 사원의 폐허가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참 웃기다. 그저 돌덩이에 불과할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때 웅장하게 서있었던 기둥의 조각을 바라보는데, 푸른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그림자는 나처럼 무너진 사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 세요...?"
여느 괴담이 그렇듯, 형체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깜짝 놀라거나, 겁을 먹거나, 무기를 챙기거나, 신기하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렇게 동요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 곳에 있던 것처럼.
"..."
여전히 묵묵부답. 미련을 이기지 못 하고 남아있는걸까? 거대했던 사원이 무너지고 바스러져서 모래로 돌아가버릴 때 까지? 마치 가까운 미래의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찰나의 행복,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계속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사람들이 나를 떠나고 로코코조차 나를 떠나면 나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 다음은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이 들고보니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아무래도 허니밀크를 마시고 로코코와 비슷한 시간에 잠이 든 모양이다. 기억 속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사원의 그림자도 어디부터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미련을 버리지 못 할 거라는 걱정에 대한 걱정때문에 헛꿈을 꾼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밖을 보니 해가 조금씩 산 정상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로코코는 아직 자는 중이다. 무방비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머리칼을 스윽 훑고나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꿈결에 보았던 푸른 그림자는 당연하게도 보이지 않았다.
또롱- 또로롱-
기상 종소리다. 이것으로 공식적으로 휴일은 끝이 났다. 어제 입가에 묻은 허니밀크가 약간 달콤하다. 아침 식사 종소리가 울리기 전 까지 로코코는 계속 자고있겠지. 내가 깨워주기 전 까지 침을 흘리면서. 항상 그런식이었으니까. 아직 조금 시간이 남아있기때문에 언덕을 빙 둘러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다 몇 걸음 앞으로 걷다가 문득 시선이 느껴져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나 보는 사원의 폐허, 기억의 파편들. 그 뒤로 반쯤 떠오른 해를 보면서 움직이고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종소리에 일어난 로코코가 나를 깨워주기 전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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