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과 설원

[라하히카] 고백의 계기

라하네스 / 두 사람의 온천여행

  • FF14 그라하 티아 HL 연인드림 연성입니다.

  • 드림주는 달 여코테. 드림주 이름 나옵니다. 네임리스 아닙니다.

  • 드림에 예민하신 분들은 뒤로가기 눌러주세요.

  • 5.3 이후 그라하가 드림주에게 결국 고백을 하게 되는 계기가 어떻게 되는 지에 대한 이야기

  • 공백 미포함 9,480자

  • 이전 천사님과의 역극을 글로 각색했습니다.

    • 현 천사님과의 역극 상황에 따라 if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고백의 계기

G‘raha Tia × Areunes Eldis

copyright by. Mer

 

때는 1세계에서 함께 원초세계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다음 모험에는 자기도 데리고 가달라고, 그리 약속했던 일도 있었고, 잠깐의 여유를 가질 동안 그라하와 함께 둘만의 추억을 만들고 싶었던 욕심도 있었다. 아르네스와 그라하의 쿠가네 온천 여행의 계기는 너무나도 단순했다. 그저 둘이서 모르도나 인근으로 나갔다가 노숙과 함께 외박을 하고, 시답잖은 내기를 주고받은 결과. 한명은 함께 별빛축제를 즐기고 싶어 했고, 다른 한명은 쿠가네로 온천여행을 함께 떠나고 싶어 했다. 이 여행은 그 내기의 결과로 떠나게 된 것이었지만, 별빛축제도 함께 즐기게 되었으니 사실상 내기를 한 의미가 없는 것이나 매한가지였지만…….

 

“사실상 내기는 그저 핑계였을 뿐인 걸…….”

 

그리고 그런 막무가내와도 같은 제 어리광을 아무런 불만도 거부도 없이 받아들여주는 상대가 있기에 그녀는 이렇게도 오만불손하게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려고 드는 것이 아닐까, 참으로 저에게 과분한 상대가 아닌가, 그렇게 자조하며 웃었다. 화창한 햇살이 내리쬐는 림사 로민사, 비술사 길드 옆에 위치한 여객선 부두 앞에서 쿠가네 행 여객선의 시간을 보고 있던 아르네스는, 문득 링크펄을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도시 내 에테라이트가 있는 방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다리던, 익숙한 붉은색을 발견한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

 

“오래 기다렸어?”

“아니, 마침 잘 왔어. 딱 곧 출발하는 배편이 있더라.”

 

가자. 지금 바로 탑승 수속을 하면 될 것 같아. 뭘 그렇게 서 있어? 가자. 그리 말하고 웃으며 제 손을 잡아 이끄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라하는 발걸음을 옮겼다. 화사한 햇살 아래 빛나는 은백발이 흩날리는 네 모습이 너무나도 눈이 부셔서 그래서 잠깐 눈을 감고 있었어. 분명 그리 말하면 너는 무슨 낯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냐며 까르르 웃어넘기겠지……. 그렇지만 그렇게 웃는 아르네스의 모습도 눈이 부시게 예쁠 터라 그는 그 말을 뱉는 것을 용케 참아 냈다. 타인이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면 곤란한 일이 많다며 후드를 뒤집어 쓴 채 배에 오른 두 사람은 타인의 시선이 크게 닿지 않은 외진 자리에 자리잡고 앉았다. 이대로 며칠은 배에서 머물러야 할 터였다.

 

“내가 에테라이트에 등록되어있었으면 이럴 필요는 없었을 텐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너랑 함께하는 배여행도 나름 좋아한다구?”

 

가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에테라이트를 이용할 수 없는 거고, 너와 함께 덕분에 배 여행을 즐길 수 있으니 나쁘지 않음을 어필하며, 아르네스는 바닥에 걸터앉아 제 옆자리를 탁탁 두드렸다. 그만 미안해하고 옆에 앉으라는 신호였다. 너털웃음을 지으며 털썩 주저앉으니, 기다렸다는 듯 어깨에 기대오는 행동에 그라하의 꼬리털이 쭈뼛 섰다.

 

“뭐, 뭐야?”

“어깨 빌려줘. 한숨 잘래.”

 

체력보충. 당당하게 요구하는 모습에도 귀엽다는 듯 웃으며 그라하는 기꺼이 제 어깨를 내줬다. 너는 자지 않아도 되겠냐는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피곤하지도 않았고, 그저 아르네스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기에……. 머리가 무거워서 힘들거나 너무 피곤하면 억지로라도 깨우라는 신신당부를 웃으며 넘긴 채 그는 상대가 수마에 잠기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나는 너와 어쩌고 싶은 걸까…….”

 

1세계에서부터 줄곧 오롯이 저에게 향하는 애정과 고백을 모를래야 모를 수 없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아르네스의 곁에서 어떤 존재로 남아있고 싶은 것인지, 그 답을 찾는 중이었다. 아르네스와 함께하는 시간은 행복하고 즐거웠다. 물론, 함께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 그러나 그 순수하게 저에게만 향하는 사랑과 애정을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말을 순순히 받아들이기에는 그것이 그토록 동경하는 영웅의 이름에 제 손으로 먹칠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서, 세상을 배반하는 행위를 벌이는 기분이라……. 그는 그래서 줄곧 그렇게 망설이고 있었다. 아르네스와 연인이 되어 행복의 길을 걷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 옛날 탑에 잠들었던 그 때부터 좋아했고,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리워하고 동경하던, 소중하고도 소중한 사람이다. 함께 행복해지는 길을 걷는 것이 싫을 리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그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 같은 기분 탓에, 저 빛나는 이를 저만 독점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래서 외면하고 있던 고백들이었다. 그토록 소중한 사람이 그로인해 상처받고 있음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있고 싶다는, 함께 하고 싶다는 그 욕망이, 그 마음이 점점 커져서 이제는 눌러 담을 수도 없을 정도로 고개를 들고 그 몸집을 키우고 있어서……. 그는 옆에서 곤히 잠든 제 소중한 이를 시선으로만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없이 한참을 있을 뿐이었다.

“……르네스! 아르네스! 일어나.”

 

좀 오래 걸렸지만, 도착한 것 같아.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느낌에, 깊게 잠들어있던 의식이 떠오른 듯 아르네스의 눈이 느릿하게 뜨였다.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느릿하게 깜박이며 들었던 말을 곱씹던 그녀는, 이내 동그랗게 눈을 뜨며 고개를 들어 저를 깨운 이를 바라봤다.

 

“도착……? 에?! 설마, 그라하 너 중간에 한 번도 안 쉬었어?!”

“아냐, 많이 쉬었어.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그건 온천에서 풀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잠을 자지 않았다는 말은 쏙 빼놓은 채, 그라하는 작게 웃었다. 가늘게 눈을 뜬 채 의심의 눈초리를 하고 바라보는 시선은 애써 무시했다. 그렇게 흘기듯 바라보던 아르네스가 이내 포기한 듯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노천탕은 혼욕탕이라 조금 민망할 수는 있으나, 객실마다 그래도 작은 탕이 딸려있으니 편한 쪽으로 알아서 즐기면 된다는 말을 하면서 방은 하나만 일단 잡아두었다고 재잘재잘 떠들던 그녀가, 갑자기 말꼬리를 흐리며 짓궂은 미소와 함께 그라하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혹시 방 하나 더 잡아야 할 것 같으면, 꼭 말해야 해. 알았지?”

“……으음. ……알았어, 내리자.”

 

기대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아서 실망한 듯 토라진 얼굴로 투덜대는 모습이 제법 귀엽다고, 그라하는 상대가 들으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버럭 소리를 지를 생각과 함께 짐을 들고 배에서 내렸다. 사실 아르네스가 무슨 반응을 기대한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그로써는 여태껏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던 문제를 마주하고 그것을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줄곧 아르네스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고민해왔음에도 내려지지 않는 답 때문에 그녀의 생각보다 더 의연하게 대처하게 되었을 뿐이었지만……. 그마저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패기 넘치는 결말에 이르렀다. 당장은 현재에 집중할 시간이었다.

 

“저기 보이는 곳이 ‘시오카제 정’이라고 주점? 같은 곳이야. 꽤 괜찮은 곳이지만, 우리는 그곳을 지나서 당고를 먹으러 갈 거야.”

 

일단 앉아서 당고를 먹으며 이후에 무엇을 할지 고민해보자. 참, 너도 여기 에테라이트 교감해놓는 거 잊지 말고. 그래야 나중에 또 올 일이 생기면 편할 테니까. 앞장서서 걷는 아르네스의 뒤를 따라 걸으며, 그라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잡은 손의 감촉이 괜히 마음에 들어서 슬그머니 웃는 것은 덤이었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시오카제 정을 지나 커다란 에테라이트가 보이는 광장 구석 작은 찻집이었다. 간단하게 두 개정도씩만 먹을 수 있게 시켜서 먹고 망해루로 가게 앉아있으라는 아르네스의 말에, 그라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싱긋 웃으며 찻집 주인에게 향한 그녀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잠시,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인지는 몰라도 어째서인지 뺨이 잔뜩 붉어진 얼굴로 돌아와 시선도 마주치지 못한 채 자리에 앉는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자, 먹자. ……마, 맛은 보증하니까!”

 

당고접시와 두 개의 찻잔이 얹힌 쟁반을 내려놓으며 하는 말에는 어딘가 어색함이 느껴져서, 당고를 손에 들면서도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한 그라하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왔냐고 물었다. 으응?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린 듯이 놀라며 귀를 쫑긋 세운 채 시선을 고정하지 못하던 아르네스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한숨을 쉬며 흘긋 시선을 마주했다.

 

“……그, 오랜만에 오는가 싶었더니 남자친구랑 사이좋게 여행을 온 거냐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야…….”

“……아.”

 

그라하도 뒤늦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둘은 아직 연인관계가 아니었다. 아직 자신이 답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도 오해받은 것이 싫지는 않아서, 그는 굳이 정정하지 말자는 말과 함께 당고를 입에 물었다. 아, 네 말대로 맛있네. 그는 웃었다. 그라하가 굳이 오해를 정정하지 않겠다는 말이 기뻤던 모양인지 아르네스의 귀가 팔락인다. 그녀는 그라하를 따라 당고를 한입 물고는 베시시 웃었다. 이 맛을 잊지 못해 종종 먹으러 온다는 말을 하던 그녀는, 망설이는 얼굴로 물었다.

 

“근데, 저 주인댁이야 오해하게 둔다 치자. 너, 망해루 가서도 그러려고……?”

 

그래도 괜찮은 거냐는 물음은 조용히 삼킨 채, 답을 바라는 얼굴에는 미세하게나마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라하는 당고를 한 입 더 베어 물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가볍게 대꾸했다.

 

“너에게 악영향이 가지 않는다면. 일일이 관계를 부정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고, 너 정도의 사람이면 충분히 연인 정도는 만들어서 만날 수 있고……? 아, 그렇지만 네가 오해받는 것이 싫다면 정정해도 괜찮아.”

 

그 대답을 어떤 심정으로 아르네스가 받아들였는지는 그라하는 알지 못했다. 그는 정말로 그의 생각을 가볍게 말했을 뿐이니까. 그러나 아르네스는 그 말을 곱씹든 조용히 땅으로 시선을 내리며 침묵할 뿐이었다.

 

“……오해가 아니라 차라리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리면 좋을 텐데…….”

 

저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말을 내뱉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뱉었는지 깨달은 듯, 놀라서 고개를 붕붕 저으며 변명하듯 딱히 아무런 악영향도 없으니 괜찮다는 말만 뱉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눈을 깜박이며 보던 그라하가 이내 당고의 마지막 알을 입안에 털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이동할까? 어디로 가면 돼? 기대감에 반짝이는 눈 아래, 붉게 물든 뺨은 모르쇠 했다. 아르네스는 굳이 이 즐거운 시간을 괜히 어색하게 만들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일단, 망해루에 가서 짐을 두고 온천을 즐기거나 시장구경을 하자. 뭘 하든지 이렇게 짐이 많아서야 오히려 방해가 될 테니까.”

 

아르네스는 저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드는 노점의 주인장에게 어색한 미소와 함께 고갯짓 인사를 한 뒤 그라하의 손을 잡고 앞장섰다. 이쪽이야. 그리 말하며 앞장서는 뒷모습을, 그라하는 조금 복잡한 얼굴로 바라보며 뒤따랐다. 그의 머릿속에는 지금 제 앞에 서있는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대체 자신과 어쩌고 싶은 것인지, 이렇게 찬란하게 빛나는 너와 자신은 어떤 관계가 맺고 싶은 것인지, 그리고 그 관계를 너는 영원하다고 믿는 것인지……. 아르네스가 들었다면 그녀는 분명 그간 자신이 해왔던 고백은 대체 무엇으로 들어먹고 그런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고 앉았느냐고 핀잔을 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복잡한 머릿속을 알아차린 듯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낮게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그라하, 너는 가끔 너무 복잡하게 생각을 하는 편이니까…….”

 

오늘은 그냥 생각을 비우고 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해봐. 우리는 쉬려고 온 거잖아? 마지막에 돌아보며 싱긋 웃는 얼굴이 너무나도 눈부셔서 눈을 뗄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너를 두고 어떻게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냐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라…….”

 

자신의 ‘진짜’ 마음이 어떤 줄 알고 너는 그런 말을 하는 거냐고, 그라하는 그리 묻고 싶은 마음을 삼켜냈다. 그렇게 조용한 침묵이 흐르는 사이에 목적지에 도착한 듯, 아르네스가 다 왔다는 말과 함께 걸음의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가 생각을 잠시 끊어내고 고개를 들어보니 ‘망해루’라고 적힌 현판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망해루에 들어가기 직전,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라하를 돌아봤다.

 

“우선 지금 당장 결정해야할 게 있어. 방 정말로 하나 잡았거든? 하나 더 잡고 따로 잘래? 아니면 그냥 잘래?”

 

온천은 혼욕 노천탕에서 같이 즐길 거야? 아니면 한명은 객실에서 따로 즐길 거야? 물어보는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저건 자꾸만 제대로 된 대답 없이 쑥맥처럼 반응하는 그를 반쯤 놀리는 태도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싫지 않은 이유는 역시 콩깍지가 단단히 꼈기 때문일까? 남녀가 한 객실에서 잔다는 것이 타인에게 어떤 시선으로 받아들여질지 그라하는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만 잡고 자는 건 괜찮지 않을까……?”

 

그는 아르네스와 떨어지는 것이 싫었다. 곁눈질을 하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예상치도 못한 답변인지 눈을 깜박이다가도 이내 푸슬푸슬 웃으며 마주잡은 손을 꼬옥 맞잡아온다. 실은 자신이 말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며 마음이 통했다고 즐겁게 종알대던 그녀는, 이내 온천은 어떻게 즐길지 되물어왔다. 각자 따로 즐길지, 둘 다 객실 내의 개인탕을 즐길지, 아니면 노천탕을 함께 즐길지. 선택지는 셋이었다. 그라하에 있어서 후자의 둘은 전혀 손해 보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차마 곧바로 답을 하기엔 뭔가 좀 아닌 것 같아서 고민하던 그는 이내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맹세컨대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같이 들어가자.”

“어머? 네가 아무 짓을 안 한다고 해도, 내가 안 한다는 보장이 없는데?”

“…………그건……, 부디 참아주면 좋겠는데…….”

 

야속할 정도로 사람 속도 모르고 잘도 저런 말을 내뱉는다고, 그라하는 한숨을 삼켰다. 네가 참지 않으면 자신도 참지 못할 테니 제발 참아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눈을 질끈 감은 채 망해루 안으로 들어가려 하면, 뒤에서 아르네스가 까르르 웃는 웃음소리와 함께 금방 앞질러 나와서 그의 손을 붙들고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간다. 잠시 문 앞에 그를 세워둔 채 여관 주인을 찾아 가볍게 인사 후 돌아온 그녀는, 객실까지 안내해주겠다는 여관 주인의 안내를 한사코 사양하고 익숙한 발걸음으로 몸을 돌렸다. 이쪽으로 오면 된다며 그라하에게 손짓하는 것은 덤이었다.

 

*

 

아르네스가 이끌어 데리고 들어간 방은 평소 아르네스가 쿠가네에 방문할 때마다 머물기 위해 망해루에서 내어준 방으로, 한 명에게 내어줬다고 보기엔 꽤나 넓은, 그런 좋은 방에 속했다. 그라하는 짐을 방에 내려놓자마자 낯선 분위기의 방이 어색한지 연신 신기하다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우와, 하고 감탄하기 시작했다.

 

“경치가…… 뭐랄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느낌이라 역시 신기하긴 하네!”

“그렇지? 나도 처음 동방으로 왔을 때는 그런 느낌이 강했어. 의복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이슈가르드나 림사 로민사 같은 다른 대도시들이랑 비교했을 때 다른 것들이 보이잖아?”

 

짐을 방 한켠에 내려놓고 기지개를 펴던 아르네스가 웃으며 대꾸했다. 시간이 조금 애매하니 오늘은 온천을 즐기다 저녁을 먹고, 도시는 내일 둘러보자는 그녀의 말에 그라하 또한 동의의 뜻을 냈다. 책으로 그간 읽어오던 것과는 다르게 직접 방문하여 체감하는 것은 느낌이 다른지 연신 신선하다는 반응으로 꼬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너를 통해서 정말 많은 것을 알아가는 기분이야. 그리고 난 그게 너무 좋아, 네스.”

 

저를 바라보며 그렇게 낯부끄러운 소리를 잘도 한다고, 아르네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라하 본인은 자각이 없는지 평소 저런 말을 하면서 부끄러워하던 그는, 지금은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빙그레 미소지은 그가 이곳의 온천은 얼마나 다른지 보자며 기지개를 펴고 일어났을 때, 잔뜩 붉어진 뺨을 감추려 헛기침을 작게 뱉었다.

 

“이곳까지 왔는데, 노천탕 경험은 해봐야 하지 않겠어? 탈의실에서 갈아입고 탕에서 볼까? 혹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면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응!”

 

한순간 대답에 정적이 있었으나 붉어진 얼굴을 보아하니, 조금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낯부끄러운 말을 내뱉은 사람 치고 어딘가 부끄러워하는 것 같아보였다. 삐걱거리는 움직임으로 어색하게 탈의실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며 작게 웃은 아르네스는 이내 기지개를 펴며 자신의 짐을 챙겨들고 탈의실로 향했다. 몸을 씻고 긴 머리를 정돈하려면 해야 할 일이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많았다.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입욕용 수영복-일전에 여주인이 선의로 내어주었던 것이다-을 입은 채 골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솜씨 좋게 땋아서 틀어 올렸다. 막상 탕으로 나갈 즈음이 되니 그라하와 혼욕탕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실감나서, 그녀는 가볍게 제 뺨을 두어 번 두드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정신 차려. 아르네스.”

 

* * *

 

탈의를 다 마치고 입욕을 위해 수건을 허리에 두른 그라하는, 아르네스를 얕볼 수 없다는 생각도 하는 한 편,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갈등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지만……. 그는 탕에 푹 잠겼다. 오늘따라 손님이 주변에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 것은 덤이었다. 한창 앞으로 있을 그녀와의 관계에 대하여 고민에 빠져있을 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나와 있었어?”

“……우왁! ……나는 아무래도 준비할 게 없었으니까.”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온 목소리에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어 꼬리를 세우며 돌아보았을 땐, 예쁜 비키니 수영복 차림에 머리를 잔뜩 틀어 올려 몸 라인이 부각되는 차림을 하고 있는 아르네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끔뻑이며 상대를 훑어보다 붉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목욕을 하는데 이렇게 예쁘게 하고 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르네스. 으응? 눈을 깜박이다 뺨을 살짝 붉힌 채, 웃으며 탕에 다리만 담그고 옆자리에 걸터앉은 그녀는 부러 태연한 척을 하며 대꾸한다.

 

“이정도면 평범한 거 아냐? 머리를 탕에 담그는 건 매너가 아니라서 올려 묶는데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리고 지금 입고 있는 수영복은, 전에 망해루에 왔을 때, 여관 여주인이 잘 어울릴 것 같다며 호의로 선물해줬던 입욕용 수영복이야. 어쩐지 변명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그라하는 그것을 무시했다. 아르네스가 아닌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닐 터였다. 그렇지만 어째서 말은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인지……. 그는 그렇구나……. 하고 말꼬리를 흐리던 것도 잠시 마른침을 삼키며 잠시 시선을 피했다. 저 모습을 보고 솔직히 성적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런 매력을 느꼈다고 본인에게 말을 하겠는가! 자신이 무슨 염치로!

 

“……엄청 잘 어울려. 여주인분이 센스가 좋으시다…….”

“어머, 그래?”

 

아르네스는 기분이 좋은지 꼬리를 살랑이다 슬그머니 탕에 몸을 담그기 시작했다. 더듬거리며 말하는 자신이 걱정된다는 양 고개를 기울여 시선을 맞춘 그녀가 제법 능글맞게 웃으며 벌써 탕의 열기에 취한 것은 아니냐고 묻는다. 조금, 취했을지도……. 괜히 고개를 푹 담그며 웅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분명 얼굴이 엄청 빨개졌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는 괜히 물이 생각보다 뜨겁다는 핑계를 댔다.

 

“어머나? 그럼 그렇게 푹 담구지 말고 위로 걸터앉아야지. 노천탕에서 그렇게 열기에 취하기 쉽지 않은데.”

 

천연덕스럽게 부산을 떠는 목소리를 들으며 그라하는 누구 때문에 그런 줄 아냐는 말을 차마 뱉지 못한 채 꾹 참고 고개를 들었다. 찬바람에 몸을 식히니 달아오른 뺨도 어느 정도 식는 기분이라서, 휴, 한숨을 내쉬며 허공을 보기 위해 그는 고개를 젖혔다. 그러나 그의 속도 모르고 옆에서 아르네스는 기분이 좋다는 말을 연신 발언하며 베시시 웃고 있었다.

 

“있지, 나 지금 정말로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거든? 근데 조금 장난치고 싶어질지도?”

 

정말로 사람 속도 모르고! 한숨을 쉬며 그는 무슨 장난이 치고 싶냐 물었다. 응? 그녀는 눈을 깜박이다가 빙그레 웃으며 가볍게 손장난을 친다거나 아니면 이런 거? 라고 답하며 이미 푹 젖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것이었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위험한 장난은 안친다는 그녀의 말 속에는 치고 싶지만 참고 있다는 뜻이 다분 내포되어 있었다. 꼬리로 쿡쿡 찔릴 때마다 그라하는 움찔 몸을 떨었지만 그뿐,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슬쩍 시선을 돌려 아르네스를 바라봤다.

 

“정말 그 뿐이야? ……나는 너를 믿으니까, 너한테 맡겨도 괜찮아?”

“……아니 맡기지 마.”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한 번 시작하고 자제할 자신 없단 말이야……. 꿍얼거리며 시선을 피하던 그녀가 이내 손을 슬쩍 뻗어 그라하의 손을 잡는다. 이 정도는 괜찮지? 하고 물어보는 시선에, ……자신도 없었으면서 도발은. 하고 불만스럽다는 듯 작게 중얼거리는 그다. 그러면서도 손이 얽어오자 그 손을 단단히 그러쥐듯 잡았다.

 

“……이것뿐이야?”

 

정말로? 하고 묻는 시선으로 보자 불만 가득한 얼굴로 정말로 자제할 자신이 없으니 자극하지 말라는 투덜거린다. 그러던 와중 슬쩍 그녀는 그의 얼굴에 바짝 얼굴을 가져다대고는 웃었다.

 

“더 해주길 바래?”

“……내 의견이 중요해?”

 

너는 뭘 하고 싶은데? 아르네스는 그라하의 물음에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다가 고개를 들고는 싱긋 웃었다. 그냥 느긋한 온천욕. 그녀는 그저 자신이 무작정 좋다고 고백만 하고 있을 뿐인 이 애매한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그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자제할 자신 없어. 그러니까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할 거야.”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것 마냥 얼굴이 가깝다. 서로의 숨이 얽히고 시야 속에 서로만이 가득 차있는 상황에서 붉은 눈동자가 움찔거리다 인상을 쓴다. 아르네스, 나는 너에게 어디까지…… 가까이 다가가도 돼? 그의 물음에 아르네스의 눈이 동그랗게 뜨이고, 그 다음에는 깜박이다 싱긋 호선을 그렸다.

 

“더 다가와도 나는 상관이 없지만…….”

 

그녀는 말꼬리를 흐리다가 이내 단호하게 다시금 말을 이었다. 어디까지나 내가 열렬하게 표현하는 이 감정을, 네가 더는 밀어내지 않고 받아낼 수 있을 때의 이야기라고, 그 전에는 절대로 안 된다고. 그도 그럴 것이 아르네스 그녀 본인은 이미 충분히, 1세계에서 ‘수정공’에게 잔뜩 거절당하며 이미 아닌 듯 하면서도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아 아픈 상태였기에……. 그녀의 대답을 듣고 그라하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 또한 1세계에서 본인이 그녀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 목욕이나 하고 나가자.”

“……응.”

 

조용히 탕 안에 몸을 담근 채, 그저 잡고 있던 손은 놓지 않고 꼭 마주잡은 채로, 두 사람은 한동안 탕 안에서 조용히 침묵했다.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은 것은 아르네스였다.

 

“……지금은 그냥, 이 정도 거리감에서 만족하고 있을게.”

 

나는 굉장히 욕심이 많지만, 잘 참고 자제하려는 마음이 들 정도로 네가 너무 좋으니까……. 그런 그녀의 말을 들으며, 그라하는 잡았던 손에 꾹 힘을 주었다가 풀며 부드럽게 그 손을 쓸어내렸다.

 

“……나를 기다려줄 거야?”

 

나직하게, 그는 그렇게만 물었다. 그의 물음에 푸흐, 웃음소리를 내며 웃은 그녀가 어깨를 으쓱한다. 지금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며, 너를 기다리지 않았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고 말하는 그녀는 그저 그라하가 기다려 달라고 하면 언제든 기다릴 예정이라고, 기약 없는 기다림 정도는 이제 질릴 정도로 익숙하다고 답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말에 무언가 생각하는 듯, 그라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윽고 고개를 살짝 아르네스의 어깨에 기대며 그는 나른하게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마워, 아르네스. 너를 너무 지치게 만든 것 같네…….”

“……지치지 않았어. 오히려 요즘은 생각보다 즐거워.”

 

어쩌면 너와 함께 하면서 나도 모르게 여유가 생겼나봐.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마주잡은 손의 손등을 두들김과 동시에 작게 웃다가 그라하 쪽으로 시선을 주는가 싶더니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렇게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라는 말과 함께…….

 

“…………르네스.”

“…응? ……그라하?”

 

방금 르네스라고 부르지 않았어? 몽롱한 목소리로 애칭처럼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놀란 얼굴로 그라하를 바라보던 것도 잠시, 이내 아르네스는 그의 상태를 눈치 채고는 벌떡 일어나 상대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더 있다가는 현기증을 일으킬 거야. 너 지금 열에 제대로 취했어.”

 

일어나, 나는 너 안아서 못 옮긴단 말이야.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그라하가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문득 눈앞에 보이는 작은 체구를 끌어안고 숨을 크게 들이쉬던 그는 이내 고맙다는 말과 함께 안았던 몸을 금방 놓아준다. 별안간 끌어안기며 놀란 듯 꼬리가 직각으로 솟았다가 내려온 아르네스는, 가만히 안색을 살피던 것도 잠시, 괜찮은 듯 보이는 느낌에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천천히 옷 갈아입고 나와. 슬슬 방에 저녁식사 준비를 시작했을 거야.”

“……응, 알았어.”

 

어쩐지 평소보다는 조금 낮아진 텐션에 걱정스러운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지만,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복잡한 얼굴로 탈의실에 들어가느라 눈치를 채지 못한 듯 싶었다.

 

“……괜찮겠지……?”

 

그녀는 걱정된다는 얼굴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이내 탈의실로 향했다. 열기에 취해서 그런 것이라고, 자신의 애칭을 부른 것도, 갑자기 품에 안겼던 것도 전부 다 그래서 그런 것이라고. 그렇게 치부하면서…….

 

두 사람이 저녁식사를 마치고 저녁산책을 하던 도중, 그라하가 아르네스의 그간의 사랑고백에 대한 대답을 드디어 내놓으며 연인이 되지만 그것은 아직 그녀가 모를 나중의 이야기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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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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