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과 설원

초야를 맞이하기까지

라하네스 / Unverified Demarriage 세션 로그 뛴 후기에 가까운 각색 연성입니다.

  • FF14 그라하 티아 HL 연인드림 연성입니다.

  • 드림주는 달 여코테. 드림주 이름 나옵니다. 네임리스 아닙니다.

  • Unverified Demarriage(약칭, 언베리)의 3엔딩 스포일러가 들어있습니다.

  • 아래 로그는 해당 세션 러닝 로그 백업글로 비밀글입니다.
    비밀번호는 러닝일자로 문의는 지인 한정 트위터 DM문의 주시는 분에 한하여 공개합니다.

  • 세션을 뛰실 예정이 있으신 분들, 스포일러에 예민하신 분들은 열람을 금합니다.

  • 스포일러 신경X, 이미 세션을 뛰신 분들, 세션 뛸 예정 없으신 분들은 읽으셔도 무관합니다.

  • 종전 이후 퇴역군인이 된 전쟁 영웅 그라하 티아 x 황실의 황녀 아르네스

  • 공백 미포함 7,047자

  • 이후의 이야기는 나중에 별도로 올릴 예정입니다.

  • 그라하와 아르네스 둘다 존대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초야를 맞이하기까지

G‘raha Tia × Areunes Eldis

copyright by. Mer

“……때가 되면…, 그러면 말해 주려고 했습니다.”

 

단 한 방울이면 됩니다. 당신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조금만……, 당신의 남편을 믿어줄 수는 없는 겁니까?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며 애원하듯 말을 하는 당신의 눈동자가 너무나도 간절해보였다. 납득할 이유만 말해준다면, 내가 당신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을 텐데……. 한참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이는 저가 보는 앞에서 진열장을 열어 둥근 잔에 금빛 와인을 따라내고는, 가지고 있던 작은 병 안의 액체를 한 방울 떨어뜨렸다. 아, 어쩜 이렇게 감쪽같은지……. 지금껏 당신이 건넨 잔에 무언가 다른 것을 탔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 당연히 여겨질 만큼이나 무척 익숙해보였다.

 

“……부디, 마셔줘요. 나를 믿는다면.”

 

그라하는 그렇게 말하며 액체가 찰랑이는 와인잔을 내 손에 쥐어줬다. 그러고는 음식을 가져오겠다며 식당을 벗어나버렸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스스로에게 문득 들었다. 그이가 자리를 비운 지금이 기회. 지금이라면 그이 몰래 잔 안의 와인을 버릴 수 있었다. 망설이며 잔을 내려다보던 것도 잠시뿐이었다. 이내 잔을 손에서 놓아버렸고, 추락한 와인잔은 챙그랑 소리와 함께 파편과 술이 튀었다. 엎어진 술이 자신의 드레스 자락을 적시는 모습을 무감하게 바라보고 있을 즈음, 그라하가 음식들을 가지고 식당으로 돌아왔다. 깨져버린 와인잔을 보고 당황한 듯 싶던 그는, 저가 마셨으리라 짐작하며 눈을 마주쳤다.

 

“……마셔주셨죠? ……다행입니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이의 표정이 이날만을 꼭 기다려왔다는 듯 너무나도 후련해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어쩌면 이 저택에서의 마지막 만찬이 될지도 모르는 식사가 테이블위에 차려진다. 전부 그의 손끝에서 만들어졌을지도 모르는 것을, 자신은 믿고 먹을 수 있나?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지난 삼 년간의 그이의 다정한 행동이 떠올랐다. 매일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자신에게 술을 권하던 모습 또한……. 이유 없는 다정은 없다더니……. 어차피 이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한들 그는 신경 쓰지 않을 터였다. 와인잔은 비워졌고,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할 테니까. 희미하게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내가 마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그래주셨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손목을 가만히 쓸어내리는 그이의 모습은 자신이 정말로 그 와인을 마셨기를 바라는 모습이라서, 괜히 웃음만 나왔다. 정말로 이상한 걸 못 느꼈냐고 물으니 조금은 슬픈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그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렇다 한들 그가 어떻게 막겠냐고. 그 자신은 자신의 아내를 믿을 수밖에 없다고 답하는 그의 대답을 듣고 결국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하하하하! 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데, 당신이 나를 어떻게 믿을 수가 있어? 자세히 봐. 내가 정말로 마신 것 같아요?”

“……마시지 않았습니까? ……미덥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한 번이면 됐는데…….”

 

슬프게 가라앉은 눈을 한 그이가 이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생각정리가 필요할 것 같다며 먼저 식당을 벗어났고, 자신도,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그러자고 답했을 뿐이었다.

 

 

* * *

 

홀로 방에 돌아와 생각을 정리하고 있노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나오기 시작한다. 애초에 다른 목적이 있었다면 그는 왜 처음부터 자신에게 그렇게 다정하게 굴었을까? 자신이 지고한 황실의 핏줄을 가져서? 대체 무슨 대단한 비밀을 숨기고 있기에 그는 그렇게 구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화가 나는 부분도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리라. 생각해보면 이 저택을 돌아다니며 단 한 곳, 자신이 가보지 못한 곳이 딱 한 군데 있었다. 번뜩 머릿속에 피가 묻은 셔츠를 입고 서있던 그이와, 그의 등 뒤로 보이던 방문이 떠올랐다. 그의 방으로 가면 그의 비밀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마음을 굳히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제 남편의 방으로 향했다. 달빛이 거의 비치지 않는 유난히 어두운 밤이었다. 선물 받은 촛대에 마지막 남은 재스민 향의 초를 꽂아 불을 켜고는 긴 복도를 걸어 그이의 방으로 향했다. 조용히 걷고 있음에도 발소리가 텅 빈 공간을 울리듯 메아리치는 소리가 낯설었다. 사용인들이 돌아다니는 낮 시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지만, 천천히 벽을 짚으며 기어이 방문 앞에 도착했다.

 

“……문도 안 잠그고…….”

 

끼익 소리가 살짝 나기는 했으나 문을 여는데 성공했다. 한 번도 들어서본 적이 없던 방에 들어오니 살짝 낮은 침대에는 그녀의 남편이 누워 곤히 잠들어있는 모양새가 보였다. 아아, 깨우지 않으려면 조심해야할 듯 싶었다. 방안을 둘러보던 중, 그의 방에 걸려있는, 결혼 전에 황실의 화가가 그린 부부의 초상화에서 이질감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어색하게 만나 몇 시간을 같은 자세로 꼿꼿하게 있어야했던 좋지 못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다가가서 그런지 그림 속 우리 두 사람도 어색해보였다. 앉아있는 자신의 어깨 위로 손을 얹고 있던 그의 장갑 낀 하얀 손은 그 때도 상처를 숨기기 위해 끼고 있었는지 의심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처음 이질감을 느꼈던, 그녀의 드레스 어깨 장식으로 되어있는 화려한 보석으로 시선이 향했다. 마치 진짜 보석을 쓴 것 같은 그곳에 홀린 듯이 손을 뻗어 만지니 덜컹! 소리와 함께 액자가 걸려있는 벽이 뒤로 살짝 물러서며 열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디로 이어져있는 문이지……? 그렇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어두워 함부로 갈 엄두가 나지 않은 탓에 결국 다른 곳을 살피기로 하고 탁자 위에 촛대를 내려놓은 뒤 펼쳐진 종이를 읽기 시작했다.

 

“……?!”

 

언젠가 응접실의 벽난로 속에서 발견했던 그 편지의 주인공과 같은 사람이 보낸 편지로 보이는 편지들……. 그리고 발견한 ‘우리는 부부잖아요.’ 문구. 그렇다면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은 저 자신일 텐데, 아무리 기억해보려고 해도 밤에 깨어나 이런 문구의 편지를 보낸 기억은 남아있지 않았다. 종이의 양은 상당했음에도 전혀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더불어 지난 삼 년, 모든 ‘밤’에 대한 기억이 나지 않고, 잠들었던 순간까지의 기억만이 남아있을 뿐……. 혼란스러운 가운데 어디에선가 끼쳐 들어온 바람에 촛대의 불이 꺼진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지고 그 순간……. 머리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깨질 듯이 아파오고, 삐- 하는 이명이 들림과 동시에 다리가 풀썩 꺾였다.

 

밤 동안 넌 오롯이 내 건데, 어딜 가?

왜 내 뜻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거지?

아직 계획이 끝나지 않았는데, 어째서, 왜?

역시 그 망할 자식 때문이지……?

사사건건 위대한 분의 뜻을 방해하는…….

 

머릿속이 다리가 무척 많은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간지러운 것에 더해 끊임없이 들려오는 속삭임이 드디어 자신이 설마 미쳐가는 것인가 의심하게 만든다. 누구의 목소리도 아닌 것이 머릿속을 기어 다닌다. 아니, 이걸 목소리라고 할 수 있나? 쨍그랑!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촛대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아르네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몸을 일으킨 그이가 보였다. 척 보아도 당황한 기색이 어린 얼굴이 마구잡이로 일그러지는 것 또한……. 그가 자신의 쪽으로 다가와 굳은 표정으로 희게 질린 얼굴을 살핀다. 가쁜 숨, 꺾여 쓰러진 다리, 그리고 바닥에 부딪치며 분리된 향초와 촛대…….

 

“당신이 왜……, 제 방에 있습니까?”

 

묻는 말에 대답해야하는데 입이 쉬이 열리지 않는다. 어지러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잡념이 속삭인다. 그가 우리에게 비밀을 가진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이렇게 아픈 것도, 미쳐버릴 것처럼 강렬한 감정을 느끼게 된 것도 전부 그라하, 그이의 탓이라고.

 

진작,

진작 그를 가졌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한참 가쁜 숨을 내뱉다가 더듬더듬 입을 열어 말을 내뱉었다. 나는……, 당신과 결혼한 것을 후회해요.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오는 말. 꼭 정해진 극본의 대사를 읊는 것처럼, 자신이 그간 보았던 수상한 편지에 적혀있던 구절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며 전한다. 힘이 완전히 빠져 움직이지 못할 것 같았던 손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르르 움직였다. 표정도, 행동도, 말도……. 전부 그녀 자신의 제어를 벗어난 것처럼 제멋대로였다. 움직인 두 손이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그이의 얼굴 위로 맞닿았다. 조금 높은 듯한 체온이 손바닥을 통해 느껴졌다. 살짝 거친 그의 얼굴은 표정변화 없이, 이런 자신의 행동이 익숙하다는 듯 그저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그 눈동자마저도 그렇게 덤덤했으면 좋았을 것을.

 

“……정말 마시지 않았군요.”

 

그라하가 그리 말하며 협탁을 열어 작은 병을 집어 들었다. 금빛 액체가 들어있던, 저녁에 그가 술에 타서 건넸던 바로 그 작은 병이었다. 이해합니다. 저를 믿지 못한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진한 체념이 담긴 눈과 마주했다. 그가 뺨을 감싼 자신의 손목을 힘주어 꽉 붙들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짧은 사과. 그와 함께 그는 들고 있던 병 안의 액체를 그대로 본인의 입에 털어 넣더니 곧장 자신에게 입을 맞췄다. 아주 잠깐의 입맞춤이었으나, 목 안으로 액체가 타고 넘어가기엔 충분했던 틈. 다시금 눈앞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저를 가만히 응시하는 그이의 시선을 느끼며, 결국 그렇게 암전이었다.

 

* * *

 

혼인 축일의 날. 새벽 일찍부터 그라하는 부지런히 준비를 시작했다. 예복을 차려입고 머리를 정돈하고……. 그를 믿지 못했던 그의 아내에게 먹였던 약의 부작용인지 열감이 오른 몸으로 인해 더위마저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제 침대에 누워 기절하듯 잠들어있는 고귀한 이의 몸을 함부로 더럽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평소의 그라면 그녀와 함께 황궁까지 동행 했겠지만, 그는 오늘만 예외로 일찍 홀로 황궁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녀의 곁에 있으면 오히려 더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기에……. 혼인을 이룬지 벌써 삼 년. 오늘로 드디어 그의 역할은 끝이었다. 삼 년만 참고 버텨준다면 자유롭게 해주겠다는 약속으로 맺어진 혼인. 사실은 그녀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제 곁에 남게 두고 싶었지만, 그녀는 자신을 이제 더 이상 믿지 못한다. 그녀가 이 이혼을 반대하지 않는 한, 자신들은 오늘부로 영원히 남남이 될 운명이었다.

 

“차라리 어제 순순히 마셔주셨다면, 이리 미련도 남기지 않고 떠났을 수 있었을 것을…….”

 

그래. 황궁에 있던 시절부터 그녀는 늘 제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던 아름답고 빛나던 사람이었으니 사실 그 돌발행동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물며 저를 믿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면 더더욱……. 그는 단정하게 옷 매무새를 정리하고 마차를 타기 위해 방을 나섰다. 사용인들에게 그녀가 자신의 방에서 자고 있다는 사실도 알리지 않고, 먼저 가서 축하연을 살피겠다는 말만 남긴 채 그렇게 황궁으로 떠나왔다.

 

“오셨습니까. 황녀님은 어찌하시고 부군께서 혼자 먼저 오셨습니까?”

“그분께선 아무래도 근래에 피곤하신 것 같아 더 주무시도록 하고 혼자 먼저 왔네. 나라도 먼저 와서 축하연의 준비 상황을 살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말이네.”

“축하연의 준비는 잘 되고 있습니다만, 한 번 확인해 보러 가시겠습니까?”

“……안내해주겠나?”

“그런데 몸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혹여 열병에라도 걸리신 겁니까?”

 

시종에게까지 상태를 들킬 정도로 안색이 그리도 나빠 보였나……. 그저 긴장과 더위로 인해 그리 보이는 듯 하니, 신경 쓰지 말라는 말과 함께 시종을 물린 그는 동이 틀 때까지 황궁 축하연의 준비 상황을 살피다 이내 시종들의 만류로 늘 황궁에 올 때마다 머물던 방으로 향했다. 하긴, 윗사람이 감독하는 자리에 오래 있으면 잘 될 준비도 잘 되지 않을 때가 있는 법이었다.

 

*

 

방으로 오자마자 곧바로 소파에 자리 잡고 눕듯이 털썩 주저앉았다. 열감은 빠질 줄을 몰랐고, 진정시켜보려고 해봐도 도리어 제 아내인 황녀만 보고 싶어질 뿐이었다. 크라바트를 풀어 헤치고 예복의 단추를 주욱 풀어 내렸다. 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있음에도 열기는 빠질 줄 모르고 오히려 더해가고만 있었다. 아, 지금 이 자리에 황녀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예복의 겉옷 상의가 길어 시종에게 제 아랫도리 사정까지 들키지 않은 것이 어찌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그는 안도하듯 생각하며 그렇게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뒤로 젖힌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당신 말도 없이 일찍 왔네요.”

 

아, 당신의 목소리는 꿈에서 마저도 달다. 그리 생각했다. 읏……, 결국 참지 못하고 입술 틈새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을 때,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붙들고 흔드는 느낌이 들었다. 일어나라는 목소리도 들린 기분이었지만, 그저 얼마나 당신이 보고 싶으면 꿈이 이렇게 생경한 감각을 주는지 모르겠다는 감상뿐이었다. 그는 덥석, 자신의 어깨에 닿은 손을 붙잡고 그대로 자신의 품으로 당겨 안았다. 평소의 그라면 허락을 구하지 않고는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일. 이성이 마비되어 가고 있는데다 지금 이 상황이 꿈이라 생각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품안에 들어온 여체를 끌어안고 목과 어깨에 얼굴을 문댔다. 청량하고 서늘한, 마치 당신과도 같은 향. 자신의 침대에서 눈을 떴던 아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다가오는 당신의 체향. 아, 평소에도 얼마나 이렇게 깊게 품에 넣고 싶었던가. 그러던 와중…….

 

“……?! 잠ㄲ…! 당신, 읏……! 잠깐, 이것 좀 놔 봐요……. 정신 차리고.”

“…………아르네스?”

 

그는 힘겹게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려 눈을 떴다. 그제야 품안에 안긴 채 당황한 얼굴과 시선을 마주하고 이것이 꿈이 아님을 깨달았다. 눈과 같은 눈동자를 마주하다 이내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꿈인 줄, 알았습니다…….”

 

그 말과 함께 품에 안았던 몸을 놓아준 그는 그녀로부터 멀찍이 자리를 옮겨 앉았다. 이 이상 저 향을 맡았다가는 자신이 그녀에게 피해를 줄 것만 같았다.

 

“……조금 전. 막 들어왔는데,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보여서……. 궁의를 부를까 했는데……. 괜찮은 건가요?”

“……후우, 네. 괜찮습니다. 아픈 것은 아니니 걱정 마세요.”

 

시선을 차마 당신에게로 둘 수 없었다. 제어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상처받은 눈도, 상처받은 목소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내 얼굴 따위는 보기도 싫냐는 물음에야 놀라서 당신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 게 아닌데. 당신이 날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난 당신을 보기 싫어서 보지 않는 것이 아님에도……!

 

“그, ……지금 상태가, 나빠서. 아픈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당신에게 피해를 줄까 싶어서요…….”

 

아, 위험했다. 달려들고 싶어지기 전에 겨우 시선을 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늘 그렇듯 그의 예상을 언제나 뛰어넘는 통통 튀는 사람이었다. 상태가 나쁜데 어째서 아픈 것이 아니라는 말이 성립이 되냐는 물음과 함께 또각또각 다가온 그녀는 이내 왜 시선을 피하는지 차갑게 따져 묻는 것이었다.

 

“……어제 당신에게 마시게 했던 그 물약이, 치료할 사람이 아닌 사람이 먹는다면 최음제와 같은 효과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당신께 먹여드리면서 저도 조금 삼켜버린 모양이라…….”

 

잘게 더운 숨을 흐, 내뱉고 있노라면 이제는 아예 쭈그리고 앉아 저를 올려다보는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아, 드레스……. 구겨질 텐데……. 그녀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저에게만 오롯이 집중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당신을 믿지 못해서 당신에게 피해를 준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는데, 왜 참고 있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다. 피해가 아니에요. ……그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니 저는 괜찮습니다.”

 

저는 당신이 치료되는 것만을 바라고 있었으니까요. 잔뜩 붉어진 얼굴로 흐리게 웃어 보이고 있노라면 미간을 찌푸리는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약의 재료중 하나인 ‘대상에게 강렬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의 피’에 해당하는 피가 내 피라는 것을 아셨구나……. 기어이 그 방에 들어가 보셨구나……. 그녀가 그에게 묻는다. 정말 자신이 치료되는 것 하나만을 바라고 있었느냐고. 아니지 않느냐는 얼굴을 보며 그는 사과의 말과 함께 실토했다.

 

“난 당신이 치료되는 것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르네스.”

 

이혼까지 숨겼어야 했던 이 마음을 기어이 털어놓아 버린 것도, 당신을 속인 것도, 어제의 입맞춤도 전부 미안합니다……. 난 지난 삼 년간 사실 당신을 기만한 기만자나 다름없어.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도 당신의 남편이고 싶다. 당신을 영원히 제 곁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 또한 자신의 욕심에 불과하겠지…….

 

“이혼에 관해서는 아르네스님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겠습니다.”

 

* * *

 

“이혼에 관해서는 아르네스님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겠습니다.”

 

아르네스님. 마치 결혼한 직후 처음 이름으로 불렸던 그날로 돌아간 것처럼 딱딱해진 호칭. 그랬다. 오늘 축하연에서 두 사람은 이혼에 대해 공표하기로 했던 것을 아르네스는 기억해냈다. 그녀를 사랑한다는 그를 두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바보 같은 남자. 그동안 티 하나도 안 내고……. 내가 어제 그것을 순순히 마셨더라면 이 감정조각 하나도 내보이지 않고 사라졌을 거면서……. 미련이 철철 넘치는 주제에 미련이 없다는 양 행동하고…….”

 

말하던 도중에 일그러지는 표정을 참을 수 없었던 아르네스는 이내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이혼하기 싫다고 하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건가요?”

 

분명 이혼하자는 말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그라하가 동그랗게 뜬 눈을 하고 고개를 들어 아르네스를 마주했다. 진심이냐고, 이혼하지 않을 것이냐고 묻는 목소리에 떨림이 느껴졌다. 사실 그의 행동들이 그녀의 불신을 키워낸 것은 맞았지만……. 바보를 보는 시선으로 그녀는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정말로 이혼하고 싶었다면, 당신이 나한테 그렇게 잘해주지 말았어야지……. 이 드레스를 고르러 갔을 때, 그리 좋아 죽겠다는 얼굴을 하지 말았어야지…….”

“……그야 사랑하니까요. 당신을 사랑하니까 그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수상하고 못 미더운 짓을 한다고 해도 말이죠.”

 

옅게 웃는 그를 보며 아르네스가 정말 바보 같은 남자가 다 있다는 얼굴로 작게 웃었다. 그래서, 지금 당신의 그 상태가 나에게 아직도 피해로 작용할 것 같나요? 그녀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젓는다. ……아뇨, 제 생각이 맞다면……. 그는 두 팔을 벌리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당신을 안아도 되겠습니까? ……잠시면 됩니다.”

 

아르네스가 작게 웃으며 그 팔 안으로 안기듯 들어가 무릎에 앉았다. 묘하게 거슬리듯 느껴지는 그의 남성은 애써 무시했다. 장난기를 품은 짓궂은 목소리가 그라하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잠시로 안 끝날지도 모르는데도……? 그가 낮게 웃으며 그런 그녀를 소중하게 품안에 품듯이 안으며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살포시 눈을 감으니 그녀 특유의 청량하고 서늘한 체향과 따뜻한 체온이 더 확실하게 와닿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그보다 조금 더 안고 있어야겠네요, 아르네스.”

 

그렇게 품에 안겨있던 아르네스가 도저히 안 되겠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시종을 불러 축하연의 시간대를 저녁으로 완전히 미룬 뒤, 황궁에서 다급하게 초야를 치르게 된 일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후의 일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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