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봄날의 편지와 쪽빛 모자와 때때로 불어오는 바람은
예전에 파이널 판타지 14 여성 아우라 합작에 냈던 글 입니다.
언니는 파란 배달부 모자를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넌 참 이것저것 하는구나.”
“그러게...”
“그런데 그런 대단한 배달부양이 편지를 잃어버려?”
“그러게...”
“가방에 든 편지까지 잃어버리는데 모자는 어떻게 용케 잘 갖고 다니네.”
“그러게...”
“피곤할 테니 씻고 와. 뭐라도 만들어줄게.”
꾸중을 듣고 침울해진 내 얼굴을 바라보며 기세 좋게 바닥을 기어 내 다리에 달라붙은 체첵이 방긋 웃었다. 뭐가 좋다고 방긋대는 거야, 남자애 주제에 엄마를 닮아 이쁘게 생겨가지고는. 나는 방금 혼이 났단 말야.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참 나.
이 마을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투명한 하늘에 크리스탈 조각들이 흩어질 때나 되어서야 하나둘씩 가로등들이 깜빡깜빡하며 자기 위치를 찾아간다. 항상 작은 등불에 의지해서 폐허나 숲을 쏘다녔기 때문인지 욕실 창문 밖, 저 멀리 언덕 아래의 아직 불을 켜지 않은 집까지 훤히 보였다. 내가 마을 나가기 전에 돌아가신 네르기 할머니가 사셨던 작은 집이다. 몇 년째 주인 없는 빈집을 내버려 두고 있는 이유도 아마 이 마을의 시계는, 도시의 것보다 조금 느리게 째깍거리며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겠지.
목욕을 마치고 침실에 들어가자 꽤 큰 사이즈의 침대가 보였다.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방바닥에 냄새나는 동물 가죽 같은 것을 깔고 함께 뒹굴다 자곤 했는데, 이제는 언니에게 아침에 이 침대 위에서 일어나서 보는 첫 얼굴이 남편이라는 사람이 되어버린 건가. 어디에서 뭘 하다 굴러들어온 사람인지는 몰라도.
“같이 누워도 될까?”
내가 묻자 언니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체첵을 번쩍 들어 올려 내 배에 올려놓았다.
“누운 김에 아기랑도 놀아주면 되겠다.”
망할 아기! 이 침대는 나와 언니만의 공간이란 말야.
“그래서 몇 년 동안 여기로 돌아오지 않은 이유는 있으신가요?”
“뭐... 바쁘기도 했고...”
“세상을 구하느라?”
“그런 느낌이랄까...”
그러자 언니는 눈을 위로 굴리더니 손으로 귀를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뭔가 멋진 말을 생각하기 위한 준비 동작이라고 해야 할까, 보통 시답잖은 말들이 나와버리곤 하지만. 그러더니 이내 손을 멈추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가리키며,
“다른 사람을 구하는 것보다... 너를 먼저 구하는 거야!”
“그게 대체 무슨 헛소리야...”
“으음... 아무튼, 그런 느낌이야. 가끔은 그래도 되지 않을까?”
“왜 다시 질문이 되는거야...”
출장이 잦은 공무원 남편 하나 잡아서 연금 받으면서 살 거라는 말에 웃으며 언니답다고 생각하던 동시에 약간 속이 쓰라렸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매일같이 이런 시시한 마을을 떠나버리고 큰 도시로 가겠다며 큰소리치던 언니는, 밤마다 불량해 보이는 남자와 어디론가 서둘러서 나가버리는 주제에, 내가 다른 아이와 손을 잡거나 함께 목욕하거나 하면 어딘가 언짢은 표정으로 한동안 뾰로통해져 있거나 했다. 하지만 그러다 심심해진 내가 상점가가 보이는 지붕 위에 올라가서 별을 보자고 하거나, 뿔 위에 걸 꽃 화환을 만들어 달라고 하면 이내 표정이 풀리면서 이런저런 응석을 다 받아주곤 했다.
마을을 떠나던 그 날, 한 사람 한 사람 찾아가서 인사를 하니 적지 않은 양의 용돈을 받았었다. 처음에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인사가 수금 목적으로 변해버린 건 시간문제였다. 꽤 많은 집을 돌고 응원을 받은 후 마지막으로 남은 건 언니의 집. 고민 끝에 문을 두드렸고, 어떻게 말 해야 할까 고민하고 며칠 밤을 연습했었던 작별 인사조차 목에 턱 하니 걸려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언니는 그런 꼴 사나운 나를 그냥 말없이 안아주었다.
마을에 도착하고 나서 3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마을엔 전부 아는 사람들뿐이었고 모두, 마치 내가 어제 나갔다가 오늘 다시 돌아온 사람인 양, 딱히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날리거나 인사를 건네면서 반겨주었다. 나를 어렴풋이 기억하는 아이들은 나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내며 서로에게 자랑했고, 조금 큰 녀석들은 나에게 어떤 머리가 유행인지, 유명한 극단은 보았는지, 대도시에 대해 질문을 하곤 했다. 걔 중 아이들이 입을 한데 모아 재미없는 범생이라고 말했던 사르나이라는 여자애는 둘째 날 밤 나에게 몰래 찾아와 결의에 찬 표정으로 가출 계획을 설명하고는 부족한 내용을 보충해서 다음에 다시 찾아올 테니 기다려달라고 했다. 왠지 모르게 언니가 생각났다. 저 아이도 결국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랑 결혼해서 이 마을에 쭉 붙어버리는 건 아닐까?
“이거 기억 나?”
어린이 둘은 족히 들어갈 정도의 커다란 대야. 기억하지 않을 리 없다. 어렸을 때 겨울이 되면 통에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언니와 들어가곤 했었다.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밤공기에 물이 식어 차가워질 때까지 언니를 붙잡아 두다가, 둘이 함께 감기에 걸려 침대에 누워있을 때도 많았고.
“또 들어가 볼래?”
한 겹씩 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요하는 눈.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척, 외피와 비늘의 감각을 눈에 새겼다. 어렸을 때 들어갔던 크기의 탕이라 그런지 고맙게도 언니의 어깨는 나의 몸에 찰싹 붙어있었다. 조금씩 몸을 움직일 때마다 두 비늘이 스치면서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탕의 증기가 뿔에 맺혀 똑 하고 수면 위로 떨어질 때 나의 심장도 쿵 하고 울렸다. 얼굴의 화끈거림이 물의 온도 때문인지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부터, 그래, 내가 언니에 대한 마음을 조금씩 인지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언니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차피 언니의 삶 속에 내가 있을 곳은 없었으니까. 요컨대 화분이다. 그냥 창틀에 놓여서 사랑받지만, 아무것도 돌려줄 수 없는 화분이다. 비참하다. 아니, 비참해야 하는데 크게 비참한 기분이 들지 않아서 비참하다. 애초부터 기대조차 안 했으니까. 그런 나에게 희망은 오만이다.
그제야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내가 그 사람보다 더 오랫동안 언니를 봐 왔는데.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켜보는 것뿐이라고? 지금 바로 내 옆에서 몸을 씻는 언니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수 분간의 폭력적인 망상. 그리고 욕정. 순수하게 본능만 남은, 아무런 장식도 달리지 않은 리비도가 올라왔다. 머릿속에서는 후회할 행동은 하면 안 된다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심장은 달랐다. 머리를 만져주는 척하면서 뒷 목의 비늘을 훑자 손톱의 끝에서 도르륵, 도르륵 하며 진동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진동 속에 나는 없다. 쏟아져 내려오는 죄책감과 부끄러움. 언니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재잘재잘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나에겐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 이후로 다시 네 번 정도 달이 떴을까, 슬슬 편지가 있을법한 장소는 전부 찾아본 듯했다. 마을 꼬마들도 내 사정을 듣고서는 함께 찾는 걸 도와주겠다며 언덕으로, 강가로 우르르 몰려다녔고, 언니의 친동생인 에르히는 기왕 이렇게 된 거, 편지 같은 건 잊어버리고 여기에 눌러살아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사람 속도 모르고 웃으면서 놀렸다. 어떻게 보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될까?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마을의 한가한 사람들을 모두 대동하고 나선 수색대는 편지를 찾지 못했지만 꽤 맛있는 비트 군생지를 발견했고, 그날 저녁 언니의 집 마당에 모여 보르시를 먹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면서 가로등의 불빛도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평화로웠다. 사람들이 두고 간 엄청난 양의 설거지를 하고, 체첵과 놀아주다 차를 너무 오래 우려서 그 떫은맛에 서로의 표정을 보며 언니와 웃기도 하고, 앞치마에 빨갛게 튄 비트 물을 빼고 나니 벌써 달은 저만큼 떠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체첵을 요람에 눕히고 등불을 끄자 마치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이 넓은 세상에, 두 사람. 우리는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어둠과 바람을 피해 이불 속에 파고들어 가 서로의 손을 잡았다. 이제 우리는 담벼락을 넘어 마을 밖으로 도망칠 것이다. 초코보도 없으니 두 발로 뛰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체첵도 있으니 조금 양보해보자. 뛰지는 않고 걷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무도 우리를 쫓아오고 있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그냥 누워있는 것만으로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아, 게으른 나.
“그냥 이렇게 쭉 언니랑 누워있고 싶다.”
언니도 혹시 같은 마음일까, 슬며시 입 밖으로 꺼내 본 속마음. 하지만 대답 대신 나에게 돌아온 건 잡았던 손을 푼 언니의, 희미한 달빛이 비치는 눈동자였다.
“너도 알잖아, 그럴 순 없는 거.”
“뭐... 편지만 찾으면...”
“편지 같은 거, 없잖아.”
...
“아...”
...
“처음부터 있지도 않은 편지를 찾을 때까지 여기에 있으려고 했던 거야?”
언니가 질문한 지 10초가 지났을까, 1분이 지났을까. 아니, 10분이 지나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압박감으로 가득 찬 구역질을 목 아래로 내려보내며 손을 덜덜 떨고 있는 나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죽어버릴까? 죽어버리면 이렇게 괴롭지 않을 텐데. 아니, 죽기 전에 언니를 한 번 더 만져볼 수 있을까? 언니가 싫어하더라도 나는 어차피 죽을 테니까 만져도 괜찮지 않을까?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며칠 전 거실에서 체첵을 재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부엌에서 챙그랑! 하니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가보니까 모그리가 어쩔 줄 모르고 있더라구. 편지를 배달하러 온 배달부가 음식 냄새를 맡고 한눈팔다가 그릇을 깨뜨린 거지. 그렇게 네 이야기가 나와서 물어보니까 이 마을로 오는 편지는 요 몇 주간 자기가 처음이라고 하더라. 하긴, 너 같은 애가 편지를 잃어버리고 며칠째 못 찾는다니, 그것도 말이 안 되고 말이야.”
“...”
“배달부가 가져다준 건 남편이 보낸 편지더라. 일이 빨리 끝나서 며칠 안으로 돌아올 거래.”
“...”
“만약 배달부가 중간에 편지를 잃어버렸다면 남편이 도착했을 때 깜짝 놀랐을 거라구. 곤란한 사람이 없다니 다행이지만 말이야.”
“언니... 그...”
어떤 표정으로 언니를 바라봐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분명 남편의 손을 잡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언니의 앞에서 분하고 슬퍼 엉엉 울지나 않으면 다행이었겠지. 그런 나 자신이 꼴사나워 모험이라느니 여행이라느니 편리한 핑계를 대며 결혼식에도 가지 않았다. 내 눈으로 확인하면 전부 무너져 버릴 것이 확실했기에.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인정할 수 없었으니까.
마을을 떠나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가졌던 물음들. 내가 언니를 좋아하는 것과 언니가 나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종류인걸까? 언니는 정말 나에게 단 한 톨의 감정도 없었던 걸까? 내가 다른 아이의 손을 잡고 집에 돌아온 날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았던 걸까? 서로의 몸을 씻겨주면서 아무런 느낌이 없었던 걸까? 그 남자를 안으며 나의 대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지는 않았던 걸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괴로워지고 슬퍼졌지만, 도저히 그만둘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그곳에 도착해있었다. 그때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나도 마을도 언니도. 언니의 집 앞에서도, 여전히 불안과 공포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를 경멸하면 어떡하지? 지금까지 언니를 보는 눈빛이 평범하고 순수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나에게서 도망치면 어떡하지? 내가 돌아갈 곳조차 없어지게 된다면 어떡하지? 나는 어떻게 하면 좋지?
그런 생각으로 걷잡을 수 없이 패닉으로 치닫는 나의 머리 뒤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절대 말할 수 없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아무도 알아선 안 된다. 언니는 절대 알아선 안 된다. 내가 끝까지 가져가야 하는 저주이자 낙인. 그리고 뒤를 돌아 언니의 눈과 마주쳤을 때, 나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게... 그... 그거는... 어...”
숨이 가빠지면서 머리가 새하얗게 되어버렸다. 수십 개가 되는 변명과 핑계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니, 차라리 내가 갑자기 죽어버리면 좀 괜찮을 텐데. 언니가 죽어버리면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을 텐데. 한계에 다다른 머리에서 도망치라는 말이 전해져왔다. 도망쳐서 다시는 여기로 돌아오지 않는 거야. 원래부터 네 자리는 여기에 없었어. 너는 사실 마을에 조금의 미련도 없었잖아. 언니에 대한 너의 이기심과 욕망이었잖아. 거짓말이 튀어나왔을 때부터, 아니, 이 마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잖아. 도망쳐. 늘 그래왔던 것처럼 도망가야지? 하지만 도망쳐도 넌 여전히 더럽고 추한 짐승이야. 너는...
극단적인 생각들로 사고가 정지하려고 하던 그때, 언니가 나를 끌어당겨 안았다. 이것도 망상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파도치던 마음이 한순간에 잠잠해져 버렸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언니는 나에게 어떠한 비난도, 경멸도 주지 않은 채 나를 그저 안고만 있었다. 참았던 눈물이 나왔다. 그렇게 우리는 하늘이 파랗게 변하고, 새가 하나둘 날아와 지저귈 때까지 안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 여기 선물.”
언니가 들고 있던 것은 갈색 종이와 노끈으로 지저분하게 포장된 물건.
“나는 손재주 같은 거 애 아빠보다 없으니까... 뭐 그래도 마음을 받는다 생각해둬!”
포장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서너 개 정도의 푸른 옷감이 난잡하게 누더기를 이룬 모자가 있었다.
“이건... 모자야?”
“어... 그 정도로 알아보기 힘든걸까?! 배달부 모자랑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배달부 모자에 초록색이 들어가진 않아, 언니.”
“조용히 해.”
꽤나 언니 같은 작품에 조금은 웃음이 나왔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언니를 붙잡고 울고 있었는데 갑자기 또 웃고 있다니. 다른 사람이 봤다면 꽤나 부끄러웠을 텐데. 하지만 왜 배달부 모자를 만들어 준 걸까? 솔직히 이렇게 아무렇게 생긴 모자... 같은 것은 쓰고 다니고 싶지도 않고... 마음만 받고 싶은데... 내가 너무 차가운걸까?
“그런데 갑자기 웬 배달부 모자야? 모자라면 이미 쓰고 있는걸?”
그러더니 언니는 곧장 눈을 위로 굴리더니 손으로 귀를 만지기 시작했다. 또 뭔가 멋진 대사를 생각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양이겠지.
“배달부는... 모자를 두 개 갖고 다니는 거야!”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헛소리가 아니야! 으음... 쓰던 모자가 바람에 날아 가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그리고... 누가 모자가 필요하다고 하면 빌려줄 수 있고? 또 그리고... 으음...”
그리고 이어지는 멋진 대사를 생각하는 동작.
“푸흐흐... 알았어... 새로운 곳에 갈 때면 꼭 이 모자를 들고 갈게. 그러면 언니랑 같이 보는 게 되겠지?”
“엥? 전혀? 그건 모자가 보는 거지 내가 보는 게... 뭐, 아무튼 그런 걸로 해! 그게 더 멋진 거 같다!”
정말이지 대충이다. 애를 키울 때에는 이렇게 대충대충 얼버무리면서 키우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뭐, 그게 가장 언니 같아서 좋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가정을 꾸리기로 한 결정까지도 가장 언니다운 길이었을지도.
마을의 이정표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무렵 가만히 멈춰서서 언니의 모자를 꺼내 보았다. 꽤나 엉망으로 얼기설기 붙어있는 파란 천 조각들이, 실수로 안과 밖을 헷갈린 탓인지 밖으로 튀어나온 실밥들이, 바늘에 찔렸었는지 갈색으로 조그맣게 눌어붙은 핏자국들이 각각 제멋대로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려고 얼굴을 가져다 대자 언니의 비누 냄새와 함께 보르시 냄새가 났다. 언니와 있었던 일주일이 담긴 모자. 몇 번이나 냄새를 맡으려고 폐를 한계까지 늘려 숨을 들이쉬었는지 모르겠다. 맡을수록 점점 희미해져 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몇 번이나.
림사 로민사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해가 수평선 아래로 넘어가고 있었다. 푸른 빛의 저녁 빛에 선홍색 물감을 푼 듯한 모습이 근사했다. 모자의 천 조각들에 튕겨져나온 수백 가지 하늘빛 때문이었던 걸까, 이제 보니 언니의 모자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에테라이트 주변에서 들려오는 어중이떠중이 음악의 끝에 걸린 작은 술집에서 피쉬 앤 칩스 냄새가 났다. 다 부서진 탁자 뒤에서 아는 얼굴 몇이 손을 흔들었다. 오늘만은 술을 마시면 행여 잊은 물건이 있을까 5분에 마다 주머니부터 가방까지 뒤적거리는 버릇은 잠시 접어둘 수 있을 것 같다.
배달부는 항상 모자를 두 개 갖고 다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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