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과 설원

[라하히카] 학원에서 사랑을 추구하면 안 되나요?

라하네스 / 학원물AU

  • FF14 그라하 티아 HL 연인드림 연성입니다.

  • 드림주는 달 여코테. 드림주 이름 나옵니다. 네임리스 아닙니다.

  • 드림에 예민하신 분들은 뒤로가기 눌러주세요.

  • 학원물 AU 연성 중 일부입니다.

  • 초반 부분만 업로드 합니다. 총 분량 51,000자.

  • 업로드 분량 : 공백 미포함 8,844자

  • 워딩의 문제로 최소 17금은 잡아야할 것 같습니다. XX씬은 나오지 않습니다.


학원에서 사랑을 추구하면 안 되나요?

G‘raha Tia × Areunes Eldis

copyright by. Mer

그라하는 아르네스를 알고 있다. 같은 2학년에 빛반으로 같은 반 소속이니 모를 수야 없었다. 하물며 상대가 전학생이라면 더더욱. 매사에 웃는 일 없이 싸늘한 얼굴로 가방 외에도 커다란 가방을 하나 더 들고 다닌다. 주변에서 떠드는 애들 말을 주워듣기로는 바이올린 가방이란다. 바이올린을 너무 잘해서 실제로 어릴 때부터 콩쿠르에 나가 입상을 하던 수재라나 뭐라나……. 사실 새하얀 피부에 새하얀 머리카락, 은빛으로 빛나는 하얀 눈동자까지 눈에 띄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라하에게 있어 전학생은 굉장히 차갑게 생긴 같은 반 친구. 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였다. 말을 걸어본 것은 주말에 우연히 대형 서점에 참고서를 사러 나왔다가 악보집을 사러 나온 그녀와 마주쳤을 때였다.

 

“안녕.”

“……안녕.”

“뭐 사러 왔어? 아, 혹시 내 이름 알아?”

“그라하.”

 

같은 반이잖아. 차갑게 대꾸하는 목소리보다도 말 한마디 섞지 않은 사이임에도 이름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상대는 신경 쓰지 않는 다는 듯 악보들이 가득한 책장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악보집을 고르고 있었다.

 

“아르네스, 너 하나 답을 안 해줬어. 뭐 사러 왔어?”

“……악보.”

 

콩쿠르 준비해야 해서. 새로 나온 악보집이 없는지 찾으러 왔어. 그라하는 그녀가 최근 해외 유명 콩쿠르 준비로 인해 수업이 끝난 이후 줄곧 음악실로 향하는 것을 목격했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러나 요즘은 시험기간이라 공부를 더 해야하는 것 아닌가? 현재 전교 1,2등을 다투는 그의 입장에서는 시험기간을 목전에 두고 공부는커녕 콩쿠르에만 매진하는 그녀가 조금은 이해되지 않았다.

 

“공부는?”

“성적 안 나와도 안 혼나.”

 

나한테는 이쪽이 더 중요하니까. 사람마다 중요도가 다른 것은 당연하잖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싶었다. 그랬다. 사람마다 우선순위는 달랐고, 그것이 그에게는 공부, 그녀에게는 콩쿠르였을 뿐이었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다니 실례되는 생각이었다. 속으로 조용히 사과하고는 그는 그녀가 집어든 악보집을 들여다봤다. 이건 무슨 악보집이야? 파가니니 바이올린 악곡 모음. 파가니니? 음악을 잘 모르면 모를 수 있어. 카프리스 24번이 어렵다는 것 정도까지는 알아. ……기본적으로 파가니니 자체가 쉽지는 않아. 따위의 시답잖은 대화를 하다 문득 그는 참고서를 사러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미안, 난 이만 참고서를 사러 가봐야 할 것 같아. 방해해서 미안해.”

“……별로. 대화가 지루했던 것도 아니었어서…….”

“평일에 학교에서 보자. 주말 잘 보내.”

“……너도.”

 

그라하는 손을 흔들어주자 고개를 까닥하고는 저기 계산대로 사라지는 아르네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참고서 방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참고서를 고르던 와중에도 불현듯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자신도 모르게 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가 있던 얼굴. 분명 무자각이겠지. 좋아하는 이야기를 할 때 풀어진 얼굴은 꽤나 예뻤다고, 그는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생각을 털어내고는 오늘 찾으러 왔던 참고서를 찾아 뽑아들었다.

 

“학교에서도 평소에 그렇게 웃으면 좋을 텐데…….”

 

문득 그렇게 자각 없는 혼잣말을 하며 그는 계산대로 걸음을 옮겼다. 누가 들었다면 딱 봐도 상대에게 감겼다며 놀림감이 되었을 소리였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의 주변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라하는 그렇게 자각 없이 짝사랑의 서막을 열었다.

 

* * *

 

“시험 잘 봤어?”

“공부 안 한 것 치고는…….”

 

시험 전 주말에 대형 서점에서 처음 마주친 이래, 두 사람은 종종 마주치면 대화를 할 정도까지 오게 되었다. 주변에서 어떻게 친해진 것이냐고 묻고는 했지만, 친해졌다? 라고 하기엔 애매해서 그라하는 그저 애매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르네스 주변에는 늘 여학생들로 넘쳐났지만 지금처럼 그라하와 둘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는 그 누구도 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라하 본인도, 아르네스 그녀 자신도 전혀 모르는 눈치지만 반 아이들은 전부가 그라하의 외사랑을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있었던 배려 중 하나였다. 사랑문제는 제 3자가 끼어들기 시작하면 망한다는 것도, 사실 멀리서 짝사랑을 구경하는 것이 얼마나 희극인지도 알고 있는 이들이었기에 가능했던 배려였다. 그라하가 알았더라면 얼굴을 머리카락만큼이나 새빨갛게 붉히며 그딴 배려 집어 치우라고 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너는?”

“어……?”

“너는 잘 나왔냐고.”

 

얘가 어쩐 일로 자신의 일을 먼저 묻지? 라는 생각에 어벙하게 대답한 그라하를 아르네스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네 성적은 어떤데? 하고 눈으로 재차 답을 요구할 뿐이었다. 그는 민망하다는 듯 웃으며 제 성적표를 꺼내보였다. 전교 1등. 전체 수석임을 증명하는 성적표가 그녀의 눈앞에 들이 밀어졌으나 그녀는 부러워하는 것도 없이 그저 축하해, 공부 열심히 했네. 정도의 말만을 해줄 뿐이었다. 그러나 그라하는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저 무덤덤한 반응이 좋았다. 주변으로부터 날아오는 온갖 시기와 질투, 부러움의 시선에 지친 것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난 그만큼 열심히 공부도 하는 건데……. 억울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녀는 그가 열심히 했다는 것을 알아준 것이 아니라 등수를 보고 공부를 열심히 했나보네 라는 칭찬을 해준 것에 불과하겠지만, 그럼에도 그라하는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공부는 좋아서 하는 편이었다고는 하나, 또 다른 목적이 생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네 성적표도 보여줘.”

“……남에게 보여줄 만한 것이 아닌데.”

 

아르네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순순히 자신의 성적표를 꺼내서 보여줬다. 적당한 중상위권의 등수. 평소 그녀가 공부보다는 콩쿠르 등의 악기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오히려 등수가 좋게 나온 편에 속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의 등수였다.

 

“매일 연습하러 가지 않아? 공부할 시간이 없었던 것 같은데 성적 잘 나왔네.”

“……그거 놀리는 거?”

“설마. 칭찬이야.”

 

그는 곱게 접은 아르네스의 성적표를 도로 그녀에게 돌려줬다.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인 듯, 그녀는 칭찬을 들어도 별반 반응이 없었다. 더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었지만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과 함께 수업을 진행하러 온 교과목 선생님이 앉으라는 말과 함께 반으로 들어왔다. 그라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자리에 앉아야만 했다. 그의 자리는 아르네스의 대각선으로 약 3칸 정도 뒤편에 떨어진 자리로 사실 살짝만 시선을 돌려도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 보였다. 무자각의 짝사랑을 하는 몸은 자연스럽게 시선이 그곳으로 향하고는 했으나, 아직까지는 이성이 우위를 점하고 있어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수업에 임했다.

 

*

 

방과 후, 오늘은 음악실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목격하고 오늘은 오케스트라 연습인가……? 라는 생각을 하며, 그라하는 도서실으로 향했다. 도서부에서 활동하는 그는 방과 후에도 종종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내고는 했는데, 한가할 적에는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이 동아리를 선택한 것도 없지 않았다. 도서실이 있는 건물에서 오케스트라부가 연습을 하는 음악실이 있는 건물은 그리 멀지 않았다. 두 건물이 창을 열고 있으면 언제든 음악실에서 연습하는 연주소리나 노랫소리가 바람을 타고 도서실로 흘러들어오고는 했다.

 

─♪ ─♬

 

오늘은 날이 좋아서 환기를 위해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그것은 저쪽도 마찬가지였는지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울림이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온다.

 

“오케부 연주는 언제 들어도 웅장하네.”

“강당에서 들을 때만큼은 아니지만요.”

 

아, 1번 바이올린 독주파트 하나보다. 이거 아르네스 선배의 바이올린 소리네요. 도서실에서 함께 일을 하던 후배의 말에 그라하는 책에서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날카로우면서도 감미롭게 감겨드는 바이올린의 음색이 참으로 그녀답다고, 그는 문득 생각했다. 어째서 감미로운 부분까지도 그녀다운지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마저도 그녀답다고 생각했다. 날카롭게 흐르던 선율이 끝나고 다시금 웅장한 합주가 들릴 즈음, 그라하는 다시금 책으로 눈을 돌렸다. 합주 소리가 들리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고, 조금 전에도 그 합주소리를 배경삼아 책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책에 영 집중이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 바이올린의 독주 선율이 지독하게 맴돌고 있었다.

 

“어라? 선배, 가시게요? 오늘은 꽤나 일찍 가시네요.”

“아무래도 영 오늘은 책을 읽을 날이 아닌가봐. 이거 가져갈게. 바코드는 찍어뒀으니 대출처리 마무리 좀 부탁해.”

“거기까지 했으면 마무리까지 선배가 하세요, 제발.”

 

후배의 푸념을 웃어넘기며 그라하는 빌린 책을 들고 도서실을 나섰다. 오늘은 정말 무척이나 날씨가 좋은 날이었다.

 

“책을 읽기 좋은 날씨인건 분명한데…….”

 

왜 집중이 안 되는 것인지……. 자각하지 못한 짝사랑으로 인해 집중이 안 되는 원인을 쉬이 파악하지 못한 그는 심란함을 품고 집으로 향했다. 문득, 음악실이 있는 건물을 지나치며 바이올린 연주에 집중하고 있는 아르네스를 발견했다. 이쪽으로 시선이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손을 흔들어준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 어쩐지 심란했던 기분이 나아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날이 좋은 탓이겠지. 라고 치부하며 말이다.

 

* * *

 

그라하가 짝사랑을 자각한 건 여름 방학이 시작되기 직전, 산책 겸사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동네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테니스 연습장을 지나칠 때였다. 기시감이 든다 해서 문득 테니스장을 바라보니 익숙한 백은발이 휘날리는 것이 보였다. 평소와는 다르게 포니테일로 높게 올려 묶은 머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고 풍성해서 뛰어다닐 때마다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높게 솟은 공을 강하게 내려치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움찔 하고 마는 것이 있다. 강렬한 스매싱이었다. 스매싱으로 쳐낸 공을 놓친 상대가 너털웃음을 치며 항복의 표시로 양손을 들고는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인다. 그에 맞춰 주변에서 구경하던 다른 사람들도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역시 네게는 못 이기겠다, 얘.”

“요게 지 오빠 닮아서 운동신경 하나는 좋아요.”

“하여간 테니스계의 초신성이라고 불릴 만 하다니까?”

“그러고 보니 네 오빠는 언제쯤 온다니?”

“아마 곧 있을 문화제 즈음이나 오지 않을까요?”

“그 동생바보가 그런 행사를 빼먹을 리 없지.”

 

와하하 웃음을 터트리는 광경을 보고 있다가 문득 그라하는 아르네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양해를 구하는 듯 고개를 숙이던 그녀는 이내 그가 있는 철망까지 다가왔다. 뒤에서 흐뭇하게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이 있었지만. 그도 그녀도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걸 의식하면 서로 민망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뭐야.”

“가볍게 동네 산책 중이었어. 너, 테니스 칠 줄 알았어?”

“……오빠 때문에 조금씩 치다보니…….”

“뒤에 사람들은?”

“동호회. 오빠 덕에 알게 됐어.”

 

오빠도 있었구나. 원체 본인이야기를 하지 않는 그녀다보니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어 조금은 신이 난 듯 그라하의 꼬리가 묘하게 살랑였다. 그러나 그 광경을 보지 못한 아르네스는 그저 무표정으로 바라보며 할 말이 더 없는지 무언으로 묻고 있었다.

 

“구경해도 돼?”

“……맘대로.”

 

아르네스의 허락에 그라하는 조금 신이 난 발걸음으로 테니스장에 발을 들였다. 동호외 어르신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는 했지만 그냥 같은 반 친구라는 아르네스의 차가운 말에 에이- 하며 흩어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르네스, 한 판 더 할래? ……좋아요. 쓸데없는 내기만 하지 않는다면야……. 어차피 네가 이길 거면서 무슨 소릴 하는 게야! 와하하, 한차례 큰 웃음이 터졌다. 대화를 듣다보니 그는 제 아르네스가 바이올린 뿐 아니라 테니스도 곧잘 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옆에서 종알종알 떠들어대는 동호회 사람들 덕분에 그녀가 아마추어 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해온 적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실제로 공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 보통 실력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조용히 음악만 하는 모습만 줄곧 봐오다가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느낌이라, 그는 신선함을 느끼는 동시에 무언가 자각한 듯 아, 하고 짧게 감탄사를 뱉었다. 나, 얘를 좋아하는 구나. 그래서 이런 모습을 발견하는 게 기쁘구나……. 자각을 하고 나니 인정까지는 생각보다 빨랐다. 왜 바이올린의 소리가 그렇게 날카롭게 울리는 곡임에도 차가운 것이 아닌 감미롭게만 들렸는지. 왜 평소에도 더 웃어줬으면 했는지, 이유를 알고 나니 뒤늦게 부끄러움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뭐야, 아파?”

“벌써 한 판 끝났어? 이겼어?”

“졌어.”

“네가?”

“가끔은 져줘야 저 사람들도 기분이 좋지.”

 

동호회 사람들에게는 비밀이야.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어쩐지 간지럽게만 들려서, 그녀와 하나의 비밀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좋아서, 얼굴이 더 익어가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느껴졌다. 그만큼 붉어지면 상대도 어디 아픈 것 아닌지 재차 의심을 하게 되기 마련이다. 정말 아픈 것 아니냐고 묻는 그녀에게 그는 그저 더워서 그렇다는 말로 얼버무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방해 않고 슬슬 가볼게.”

“……더 있어도 상관없는데.”

“아무래도 더운 날씨니까. 슬슬 시원하게 집에서 책을 읽고 싶어져서.”

“아, 그렇다면야…….”

 

그럼 학교에서 보자. 그라하가 웃으며 아르네스에게 손을 작게 흔들었다. 조심해서 가. 걱정의 말과 함께 마주 흔들어주는 광경이 그에게는 어찌나 달갑게 느껴지는지 그녀는 모를 거라고 생각하며 그는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발걸음은 더운 날씨 치고는 꽤나 가벼웠다.

 

* * *

 

“아르네스, 오늘도 개인 연습실?”

“아니, 오케부 연습.”

“콩쿠르 연습은?”

“끝나고 따로 하는 중.”

“늦게까지 연습 하네…….”

“그렇게 해야만 하니까.”

 

테니스장에서 마주한 이후, 그라하는 제 짝사랑을 자각한 이래 눈에 띄게 아르네스에게 말을 거는 빈도가 늘었다. 같은 반 아이들은 어라? 이것 봐라? 언제 저렇게 가까워졌지? 쟤네 썸 탐? 하는 눈으로 제법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듯 싶었다. 이쯤 되니 그라하는 반 아이들의 시선을 눈치 챌 수밖에 없었다. 이놈들이 남의 연애사에 끼어들지 않는 것은 잘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희극마냥 지켜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랴? 정작 저가 짝사랑하는 상대는 주변에 무관심해서 그런 시선 따위 알아도 무시하는 사람이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사는 사람이라 지금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것을……. 그렇다면 그도 신경 쓰지 말고 무시해야만 했다. 의식을 돌리려는 듯 그라하는 다시금 대화를 위해 입을 열었다.

 

“연습, 구경가도 돼?”

“오케부는 괜찮아. 구경오는 애들 많기도 하고…….”

“개인 연습은?”

“지루할 걸.”

 

너 도서부는 어쩌고? 내가 도서부 소속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의외의 눈으로 그는 아르네스를 바라봤다. 타인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시선이었으니까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번에 도서실에서 봤어. 일하고 있는 거. 도서실로 자주 가는 거, 보기도 하고……. 그녀의 대답에 그는 자신이 그녀 나름의 관심 범위 내에 들어간 듯 싶어서 기분이 좋아짐을 느꼈다. 몹시 지루할 거라며 말하는 아르네스를 보며 괜찮다고 대답하고 허락을 기다리며 그녀를 바라보니 한숨과 함께 맘대로 하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네 바이올린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책을 읽어도 좋으니까 지루할 틈은 없을 걸?”

“그거 참…….”

 

못 이기겠다는 듯 헛웃음 짓는 아르네스를 반 친구들이 못 볼 것을 봤다는 양 쳐다봤으나 정작 그녀의 표정은 본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온 지 오래였다. 하긴, 아르네스의 표정 중에서 웃는 얼굴은 몹시 귀하니까……. 그 모습을 자신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은 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우쭐해진 그라하는 이내 도서부에 말을 하고 음악실로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총총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르네스도 이내 조용히 제 가방과 바이올린을 챙겨들고 일어났다. 여학생 몇과 남학생 몇이 다가가 말을 걸고 싶어 했지만, 차가운 분위기에 압도당해 결국 말을 걸지 못했고, 반 친구들은 역시 얼음공주라는 말과 함께 혀를 내두르며 각자 할 일을 하러 흩어졌다. 방과 후라 동아리 등으로 왁자지껄한 시간대기는 했다.

 

*

 

“오늘은 구경꾼이 많은데? 못 보던 얼굴도 있네.”

“리더 보러 온 거겠지.”

“……조용.”

 

오늘도 음악실 바깥에서 구경하는 면면들을 보며 쑥덕이는 바이올린 팀원들을 조용히 시킨 채 아르네스는 흘긋 창밖을 바라봤다. 언제 말을 걸고 온 것인지 익숙한 붉은 머리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눈이 마주친 것을 상대도 알았는지 손을 흔들기에 어색한 얼굴로 손을 들어 화답해줬더니 주변에서 놀라는 기색이 느껴졌다. 언니, 누구에요? 리더, 누구야? 그러고 보니 전교 1등 아냐? 왜, 2학년 빛반의……. 어라 같은 반 아니에요? 근데 언니 맨날 친구 없는 사람처럼 굴던데 어떻게 친해졌어요? 아, 차라리 개인 연습할 때만 구경 오라고 할 것을 그랬다고, 아르네스는 속으로 후회하며 한숨을 삼켰다. 호기심 많은 팀원들은 그녀가 답을 해줄 때까지 종알댈 기색이었으나, 지휘하는 음악선생님이 들어오시는 것이 더 빨랐다.

 

“자자, 다들 앉지. 바이올린, 너네 오늘따라 어수선해.”

“선생님은 맨날 저희만 뭐라 하더라.”

“너희 리더의 반만 닮아봐라. 뭐라 하나.”

“아니 그건 아르네스 선배가 특별한 케이스라구요!”

 

팀원들의 불만어린 아우성이 계속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차갑게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아르네스는 이내 못 참겠다는 듯 적당히 해라. 라는 한마디만 차갑게 남기고 바이올린을 다시 조율했다. 절대음감 그녀의 조율 타이밍에 맞춰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의 악기를 다시금 조율을 시작했다. 한동안 시작되던 불협화음은 잠시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지휘자의 손길아래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며 웅장하게 음악실을 울리기 시작했다. 바이올린 켤 때 지나치게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땋아 틀어 올려 묶은 긴 머리는 하얀 목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라하는 저도 모르게 그곳으로 향하는 제 시선에 스스로에게 미쳤다고 생각했다. 평소라면 웅장하다며 감탄했을 연주도 잘 들리지 않았다. 시선이 한 곳으로 쏠리기 시작하니 집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러다가 개인 연습을 구경 갔다가도 동일한 결과를 가져올 것 같아서, 그라하는 시선을 돌리고 음악에 집중하기 위해 지나치게 애를 써야만 했다. 짝사랑을 시작하고 상대가 마음을 받아주길 바라며 다가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럴 때 만큼은 너와 특별한 관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스스로를 적당히 진정시키며, 그는 오케스트라의 연습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

 

“너, 집중 못하던데.”

“어?”

 

음악실을 나오자마자 하는 말이 저거다. 그라하는 찔리는 얼굴로 대체 어떻게 알았냐고 되물었다. 딴생각하고 있는 얼굴이었다는 대답에 대체 연주에 집중하면서 언제 그걸 봤는지 궁금해졌다.

 

“……그냥 보였어.”

 

가자. 연습실.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발언을 던졌다는 사실을 너는 알까? 내가 네 특별한 사람의 범주에 들어갔다고 생각해도 되는 거야? 혼란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그는 빠르게 그녀의 뒤를 쫓았다. 자기 일로 이미 너무나도 생각이 많은 나머지 아르네스가 귀 끝까지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라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개인 연습실에 함께 들어섬과 동시에 그는 문득 깨달은 듯 아르네스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콩쿠르 언제야?”

“……학기 말 즈음.”

“아직 많이 남았는데 벌써부터 준비하는 거야?”

“국제 콩쿠르는 규모가 크니까.”

 

시차적응도 해야 해서 출국은 일찍 할 거야. 학교에도 양해는 구해뒀어. 언제? 한 콩쿠르 2주 전 쯤? 약 석 달 정도 시간이 남았다는 것을 그라하는 깨달았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오케스트라부가 최근 맹연습에 매진하는 이유가 문화제 기간 동안 하는 음악제 때문이며, 그 기간이 곧 다가온다는 사실 또한 함께 깨달았다.

 

“다행이 문화제는 보고 가겠네?”

“……안 그래도 오빠가 온다고 해서 귀찮아졌어.”

 

피해 다닐 구실이 필요해. 투덜거리듯 하는 말에 오빠랑 사이가 안 좋나? 하고 그라하는 잠깐이지만 고민했다. 그러나 그 다음 이어지는 아르네스의 말에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사유를 깨달았다. 국가대표면 다야? 졸업하기 전부터 여학생, 남학생 할 것 없이 사람을 몰고 다니는 호인이라 귀찮아. 거기다 너무 과보호도 심하고. 아, 여동생 바보에 인기인. 피하고 싶어질 만 했다.

 

“오빠랑 닮았어?”

“……닮았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던 것 같은데…….”

 

여러 가지로 운동 신경이라던가, 외모라던가……. 그럼 오빠 쪽도 잘생겨서 더 인기가 많을 거라는 사실을 그는 대충 짐작했다. 아르네스, 그럼 나랑 다닐래? 너랑? 다닐 사람 없지 않아? ……그야 그렇지. 우리 반 이번 문화제는 카페를 열긴 하지만, 돌아가면서 돌아볼 자유시간은 있을 테고, 너도 콩쿠르랑 오케스트라 공연 때문에 연습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지만 자유시간은 있을 것 아냐? ……일단은 오케부 공연 때문에 배려 받아서 웨이트리스 역할은 빠지긴 했어. 자유시간도 있지……. 아르네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생각해보니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부활동 탓에 자유시간이 갈렸다. 같이 다닐 친구는 없었고, 오빠랑은 다니고 싶지 않았다. 오빠와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고 오히려 좋은 편이었지만, 태생적으로 인파가 몰리는 곳을 싫어했던 탓에 한 번 나타났다 하면 사람을 몰고 다니는 오빠와는 다니고 싶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녀의 오빠도 알았고, 같이 다니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해 할 사람도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렇다면 굳이 상대의 제안을 거절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고 해도…….

 

“너는 같이 다닐 사람 많지 않아?”

“내가 너랑 다니고 싶다는데 그걸 왜 신경 써?”

 

아? 동그랗게 뜬 눈동자를 하고 바라보는 아르네스를 보며 그라하는 아차, 싶었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마음 한 조각에 들킨 건가 싶어 조마조마했으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상대는 눈치 채지 못한 듯 싶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속으로 눈물 짓던 그는 이내 웃으며 뭐 어떠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까 너도 다른 애들이 같이 다니자고 해도 선약 있다고 해줘.”

“……그건 상관없는데…….”

 

이거로 정말 괜찮은 건가? 아르네스는 의문을 품으면서도 바이올린의 조율을 마치고 바이올린을 들었다. 시험 기간 동안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매달려있던 편곡작업을 마친 악보도 보면대에 올려두었다. 사실 이정도 연습을 했으면 안 보고도 할 줄 알아야만 했지만, 이렇게 단 둘이 있는 공간에서 연주를 하는 것은 사실 처음이어서 긴장해서 실수할 것만 같았다. 어째서 긴장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성의 친구와 단 둘이 한 공간에 있어서 그런가보더라고 흘려 넘긴 그녀는 이내 활을 들고 연주를 시작했다. 날카롭게 줄 위를 미끄러지며 내는 바이올린의 음을 들으며 그라하는 읽을 예정이었던 책을 책가방에서 꺼내들었다. 이전 도서실에서 후배에게 쿠사리를 먹어가면서 빌렸던 바로 그 책이었다. 반납기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아직도 반도 못 읽은 그 책을 꺼내든 그는 책갈피로 표시했던 페이지를 펼쳤다. 귓가에 바이올린의 연주소리가 맴돈다. 때로는 날카롭게,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강렬하게, 때로는 톡톡 튀게……. 아르네스의 연주는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다고 그라하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가 이렇게 독서에 집중하지 못할 리 없었다. 사실 그 뿐 아니라 짝사랑하는 상대의 연주를 단 둘만의 공간에서 듣고 있으려니 심장이 진정되지 않아서인 것도 한 몫을 차지했지만 그건 가볍게 무시했다. 인정하기엔 조금 부끄러운 감이 없지 않았다. 그날 아르네스가 하나의 악곡을 되풀이하며 연주하는 동안 그라하의 무릎 위에 펼쳐진 책의 책장은 다섯 장을 채 넘어가지 못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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