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F14] 칼리타 루인 / 아포칼리샤

[FF14][빛전에메] 비하인드

히카에메, 드림주 칼리타 루인

파이널판타지14 빛의전사X에메트셀크 드림
드림주 이름, 외형 등 개인설정 언급 있음

#01

비하인드

이딜샤이어의 인형장인은 고뇌에 빠졌다. 최근 받은 '조금 특별한' 의뢰 때문이었다.

우선 의뢰인은 '그' 빛의 전사. 이슈가르드의 천년전쟁, 알라미고와 도마의 독립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여러 야만신을 헤치운 불굴의 영웅. 마법인형의 핵을 위해 종종 거래를 한 적은 있지만 본격적으로 의뢰를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영웅님은 모델이 되는 인물의 초상화와 그걸 기반으로 한 상세한 도안, 핵이 될 보석, 막대한 보수까지 주었다.

의뢰인이 좀 의외긴 하지만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 모델이... 갈레말 제국의 초대 황제, 솔 조스 갈부스의 젊은 시절이라는 점만 빼면. 아니, 대체 왜? 물론 유명한 인물이나 마스코트, 심지어 야만신을 모델로 마법인형을 의뢰하는 사람들도 수두룩하지만 빛의 전사에게 제국 시황제의 인형 제작을 의뢰받는 건 의외라는 말로 끝날 게 아니었다.

게다가 의뢰받은 후로 자꾸 이상한 꿈에 시달리기까지 하니, 인형장인의 자존심─ 의뢰받은 것은 책임지고 만든다─ 만 아니었더라면 당장 재료와 돈을 돌려주고 며칠 휴가를 떠났을 것이다.

인형장인은 테이블 한쪽에 놓인 기이한 보랏빛 보석을 들여다보며 푹, 한숨을 쉬었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지자.

칼리타 루인은 아씨엔 에메트셀크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끌렸다.

이성적으로 끌렸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에메트셀크보다 아씨엔에 치중된 관심이었다. 이전에 만난 아씨엔들은 말이 통하기는 커녕 저를 일찍 죽이지 못해 안달난 조디아크 광신도였으니까. 당장 1세계의 일만으로도 버거운데, 썩 믿음직스럽진 않지만 휴전을 원하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겸사겸사 아씨엔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좋은 일이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 아씨엔, 상상 이상으로 골때리는 존재였다.

배우처럼 과장된 행동과 말투로 본심은 꼭꼭 숨기고, 간혹 숨긴 것을 보여주는데 이마저도 다 계산된 행동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와중에 자신에게 뭔가 기대하고 있다는 건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 정체를 안 건 꽤나 이후가 되었지만.

이렇게 신뢰가지 않는 협력 상대와 냅다 침대에서 구른 것도 어이가 없다. 아무리 자신이 쾌락주의자처럼 군다고 해도 적과의 동침을 즐기는 취향은 없었다. 그리고 정말, 단언컨데, 남을 괴롭히고 목을 조르고 우는 모습에서 쾌감을 느끼는 변태적인 성향은 절대 없었고! 오히려 성욕이 거의 없는 편이었는데. 자기도 모르던 취향을 발견한건지, 그냥 상대를 가리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과적으로 에메트셀크는 죽었고, 1세계는 구원받았다. 칼리타는 그렇게 원하던 자신의 근원에 대한 실마리를 잡았다. 제대로 아는 것 하나 없는 건 마찬가지였으나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 같았다. 에메트셀크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미련이 남았지만 붙잡을 정도의 감정은 아니었다.

애초에 칼리타 루인은 타인은 커녕 자신의 감정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였으니. 마지막에 주운 백성석 파편으로 마법인형을 만들기로 한 건 언제나의 변덕에 불과했다. 인형의 눈으로 어떤 보석이 좋을지 울다하의 온 상점을 이 잡듯 뒤지긴 했지만 어쨌든 전부 잠깐의 흥미에 불과했다. 최종적으로 고른 금침수정은 그의 옅은 레몬색 눈동자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완성된 에메트셀크 인형은 한동안 칼리타와 함께했다. 구질구질하게 인형을 앞에 두고 혼잣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지저분해진 인형과 함께 물 가득 채운 욕조에 몸을 담그며 하루를 마무리할 정도로는 아꼈다.

자다 깬 순간 예민한 귀에 익숙한 한숨 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한동안 계속 그럴 뻔 했다.

"아하. 그러니까 괜히 다시 엮이기 싫어서 같이 목욕도 하고 침대도 공유했다 이거지? "

“사실을 왜곡하지 마. 나는 분명 거부했고, 인형을 냅다 욕조에 처박은 건 영웅님이야. ”

심술 가득한 목소리가 머리속에서 웅웅거렸다. 인형에 입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모형일 뿐, 어떻게 말하려나 싶었는데 이건 뭐랄까… 링크펄로 연락하는 느낌? 그래도 링크펄 특유의 울림은 없어 오래 대화해도 머리가 아프진 않겠다 싶었다. 그보다 어울리지 않게 짤막한 팔다리나 못생긴 얼굴에 에메트셀크가 겹쳐 보여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진정시키기에 급급했다.

“그래서… 기억하라고 멋지게 떠나가 놓고 다시 돌아온 이유는? ”

“그런 걸 내가 알까보냐.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내 조각에 불과해. 제대로 된 마법도 쓸 수 없고, 널 졸졸 쫓아다니며 지켜보는 수준밖에 못 된단 말이다. 이마저도 오래 가지 않겠지. 그때가 되면 진짜 안녕이고. 그러니 굳이 아는 채 하며 대화할 필요도 못 느낀 것 뿐이야. 영웅님도 자기가 죽인 악당을 옆에 끼고 다니고 싶진 않을 거 아냐? ”

“정말 그랬으면 이 못생긴 인형을 좋다고 끼고 다니지도 않았을 테고. ”

곧바로 치고 들어오는 반론에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후 알게 된 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자신이 대화하는 것은 죽은 에메트셀크의 작은 한 조각. 전투 후 주운 백성석 파편에 깃든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건 마법인형의 동력원과는 별개의 에너지라, 의식이 없어도 마법인형은 멀쩡히 작동한다. 끝으로 백성석에 깃든 영혼의 힘은 계속해서 소모되는 것이라, 명계에서 에테르를 끌어올 수 없는 꼬마 에메트셀크 씨는 반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라질 거라는 게 그의 예측이었다.

어쨌든 칼리타는 만족했다. 그냥 못난 솔 황제의 마법인형보다는 대화가 가능한 자신만의 작은 에메트셀크가 훨씬 좋았다. 조각이라는 점은 아쉽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온전한 칼리타 루인의 소유가 될 것이다. 반년 안에 수명을 늘릴 방법만 찾으면 완벽하겠지.

칼리타 루인을 모르는 사람은 그를 변덕스럽고 종잡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아는 사람은 그만큼 행동방식이 명확한 사람이 없다고 한다. 칼리타는 언제나 쾌락을 쫓았다.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 새로운 것, 흥미를 돋구는 것. 거기에 소유욕을 더하면 칼리타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다.
그렇기에 에메트셀크는, 자신이 곧 사라질 거라 말하면서도 칼리타가 그걸 두고보지 않을 것임을 예상했다. 본인의 말마따나 얌전히 보내줄 정도의 집착이라면 아씨엔의 인형따윌 만드는 짓거리는 하지 않았겠지. 좋든 싫든 기묘한 동거관계가 예상보다 길게 유지될 것임은 확실했다.

“어때, 몸은 잘 움직여? ”

“… 그래, 용케도 구해왔군. 전에 다 폐기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

“클론 공장을 부순 게 내 동료인데, 어떻게 하나쯤 빼 오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지. ”

칼리타가 구해 온 건 솔의 클론이었다. 용케 갈레말의 비밀 연구소에서 상처 하나 없이 빼돌린 클론에 백성석을 이식해 육체를 바꾼 것이다. 비효율적이긴 하지만 살아있는 몸이니 에테르를 보충할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꽉 끌어안았을 때의 무게와 체온이 마음에 들었다. 긴 시간 실험용 용액에 잠겨있던 몸을 깨끗이 씻기고, 막 세탁한 옷을 입히니 적당히 부들부들한 냄새가 나 냅다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칼리타의 또 한가지 행운은, 에메트셀크가 상상 이상으로 그에게 유하게 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본인에게도 예상 외의 상황이서인지, 어차피 곧 사라질 조각에 불과해서인지, 정말 마지막 싸움으로 모든 감정을 털어냈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대놓고 밀어내지 않는다는 점 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봐 영웅님… 적당히 하고 떨어지지 그래. 난 침대에 얌전히 누워있는 애착인형이 아니라고. ”

“방금 전까지는 인형이었잖아. 클론 몸도 뭐, 실제 사람 몸이라 하긴 어려우니 어찌보면 인형 아닌가. 어차피 아씨엔 일도 없는데 이 김에 내 애착인형이나 하지 그래? ”

“흥,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런 꼴이 되긴 했지만, 난 너와 네 동료들- 그걸 넘어서 세계의 적이었던 사람이야. 전부터 생각했지만 어떤 영웅이 적국 황제의 인형을 데리고 다니고, 클론까지 데려와 애지중지 하지? 네 생각을 알 수가 없어… ”

“내 생각이 왜? 사랑한다고 했잖아. 당신을 사랑해, 에메트셀크. 그걸로는 부족한가? ”

“그런 점이 알 수 없다고 하는거다, 이 녀석아. ”

반대로 칼리타의 불행한 점은, 에메트셀크가 죽어도 제 감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래… 솔직히 말해, 에메트셀크의 말이 맞다. 칼리타 루인은 사랑을 모른다. 알려고 노력해봤지만 죄다 추상적인 답변 뿐 명쾌한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자기 자신보다 소중한, 함께 있으면 행복해지고 행복하게 해 주고싶은 것이라는데 칼리타에게 가장 소중한 건 자기 자신이었다. 결국 칼리타는 사랑을 이해하길 포기했다. 어차피 처음 이 땅에 떨어졌을 때부터 어딘가 망가진 존재, 느끼지도 못하는 감정따윈 필요없겠지 싶었다.

그럼에도 굳이 사랑을 내세워 에메트셀크를 붙잡는 건 그에게 느끼는 집착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기이할 정도라서. 평소에도 제 것에 대한 집착이 심한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정도로 무언가를 원했던 적이 있었나? 죄다 순간의 관심, 순간의 흥미, 그리고 곧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들 뿐이었는데. 에메트셀크는 마치 화려한 보석함 같았다. 황금과 검고 붉은 벨벳, 하얀 진주, 노란 다이아몬드.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하지만 그 내부는 결코 보여주지 않는 보석함.

결전의 끝에서 보여준 미소가 상자 안을 아주 약간이나마 들여다본 것 같아서, 이번에야말로 그 내부를 샅샅이 파헤치고 싶었다. 알고 싶어. 비밀 하나 없이 전부 뜯어 해부하고 나면, 그들을 기억하는 유일한 영웅인 나는 홀로 남은 외로운 아씨엔을 온전히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단 한가지 희망이 있다면 에메트셀크가 자신을 겹쳐보는 상대. 알 수 없는 기대감. 그 원인을 알게 된다면, 어쩌면 ‘내'가 누구인지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이기적인 바램들이 모여 에메트셀크의 영혼 조각을 붙잡아 살려내고, 삶이라 하기도 애매한 시간을 연장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막 남은 원형 아씨엔, 엘리디부스가 영웅의 손에 끝내 최후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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