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타브] 궤도의 시차
너는 아직 어린 별
이 문장으로 시작할까: 나는 누구일까?
…당연히! 나도 나한테 이런 고찰이 안 어울린다는 건 알아. 내 동료들이 이런 걸 보면 당장에 날 형상 변환자로 의심하지 않을까? 하지만 게일의 말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나는 굉장히, 명명백백하게, 증명할 필요도 없이, 키샨 맞아. 하프 드로우, 달의 회합 드루이드, 그리고 언제나 질문이 많은! 흠, 위저드 식으로 말하니까 어쩐지 나까지 똑똑해지는 것 같은걸…….
이 생각의 시작은 어디일까? 아마 숲을 처음 나온 순간일거야. 스승님이 나를 도시로 불렀고, 그 때는 왜 그러셨는지 이해를 못했어. 아마 내가 계속해서 숲에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셔서겠지. 만약 내가 도시에 도착한 그 날에 노틸로이드 함선이 나타날 걸 알았다면 날 안 부르셨을까? 흠, 거기까진 모르겠다. 다음에 스승님께 여쭤볼게. 여하튼, 도시에는 제대로 발을 딛어보지도 못했지만… 그 때 느꼈지. 숲 바깥에는 사람이 너무 많고, 내가 섞여 들어가기엔 너무 어려운 곳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사실 도시까지 오는 길에 길을 잃어버렸다고 하고 도망갈까도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 때 하필 납치당했지 뭐야. 어쩌면 그 날이 내 운명이 정말로 시작된 날일지도 몰라. 무리와 개인의 구분 없이 살아오던 내가, 키샨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된 날.
잠깐 내 과거 얘기를 하자면, 내가 살던 숲에는 사람이 없어. 인간형이라고는 내 스승님과 나 혼자, 가끔 찾아오는 드루이드뿐이고, 그 외에는 정말로 동물들과 식물뿐이야. 그러니까 내가 동물들 틈에서 자란 건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었던 셈일까? 숲에서 가장 험상궂은 곰이 내 잠자리 담당이었고, 가장 늙은 늑대가 내 조언자였어. 다람쥐는 내 (엉터리)안내자였고, 모든 것들이 나를 키웠지. 그 때부터 언제나 사람은 내게 낯선 생물이었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태어나고 십몇 년 동안은 내가 사람이라는 걸 인지하지도 못했던 것 같아. 그야 말 대신 울음소리로만 대화했고, 난 언제나 무리의 가장 약하고 털 없는 개체였으니까(근데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아). 스승님이 날 짖는 게 아니라 말하게 하려고 몇 년을 쓰셨는지는, 날 보는 동료들의 충격을 덜어주기 위해 말하지 않겠어.
그러니까 이 여행을 시작하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 지 알겠어? 세상에 사람도 그렇게 많고, 그만큼 생각하는 건 더 많고… 올챙이가 같은 감염자들끼리만 정신을 연결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난 진작에 사람 멀미로 쓰러졌을걸. 내가 맨 처음 놀란 게 뭐였게? 나랑 같이 다녀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였어. 물론 우리에겐 아주 특별한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같이 가자’고 손을 뻗으면 그걸 잡아주는 사람이 그동안은 없었거든. 그렇게 같이 다니는 사람이 여섯 명이나 생겼다는 게 나한테는 너무, 정말, 굉장히, 충격이었지. 그 때 처음… 생각했던 것 같아. 만약에 내가 숲 밖으로 나가서 살아야 한다면, 그럴 날이 온다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리고 너를 만났어.
너를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는, 사실 아직까지도 잘 몰라. 나는 주문을 위한 것이 아닌 모든 말에 서툴고, 너는 차마 내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으니까. 나는 이 여행에서 많은 걸 배웠고, 그 중에 가장 위태로운 부분은 네가 주었지. 약하고, 고통스럽고, 잊고 싶어하는 모든 것들을, 그럼에도 잊지 않고 기억할 수밖에 없다는 것. 때로 어떤 기억은 존재를 영영 바꿔버리기도 하지만, 누군가 그의 눈 안을 들여다 볼 때 옛 과거를 찾아낼 수도 있다는 것. 알아, 너는 내게 그런 걸 알려주고 싶지 않았겠지만, 우리가 서로를 조금도 모르길 바랐다면 같이 다녀서도 안 됐어. 나는 처음에 네게서 피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고, 그 다음에는 베르가못 냄새를 맡았고, 요즘에는 밤의 도시 냄새가 난다고 생각해. 햇빛이 걷히고 차가운 밤이 발밑으로 내리깔릴 때, 밤이슬을 몰고 오는 바람의 냄새. 아직 네게 말해본 적은 없는데, 그런 향이 난다고 하면 너는 싫어할까? 모르겠네. 이 생각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것만 자꾸 늘어나는 기분이야.
그럼 이쯤에서 첫 번째 의문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누구일까? 누군가에게는 이것만큼 쉬운 질문이 없겠고, 나처럼 어려워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 맞아, 실은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어. 스승님께 종족에 대해서 배울 때 하프엘프에 대해서도 배웠거든. 인간도 엘프도 아닌 사람들이라,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느낌에 시달린다고 말씀하시면서 슬퍼하시던 표정을 기억해. 막상 그 땐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여행을 시작하고 나서는 알게 되더라고. 인간도, 드로우도 아니고, 함께 살아온 동물도 아니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도 이해하지 못 하는 나. 숲 속에서만 살았다면 고민하지 않았을 텐데, 사람에 대해 궁금해지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는 거야… 그래서일까, 동족을 만나면 유독 반갑기도 했던 것 같아. 그렇지만 결국 사람은 다 다르니까, 아무리 동족이라고 해도 명확한 답을 얻을 수는 없었지. 언제쯤 답을 내릴 수 있을 진 모르겠고, 사실 언젠가는 이런 고민을 하게 된 것 자체를 싫어하기도 했어. 나는 정말로, 정말로 평화롭게 살아왔다니까? 다시 말하지만 계속 그렇게 살았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거야. 사람이라는 생물이 궁금해지고, 개개인을 알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고, 알게 된 것들을 마음에 품어버려서 그래. 그래서 그랬어, 같이 살아가고 싶어서.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만…….
너랑 같이.
그래, 너랑 같이 살아가고 싶었어. 그냥 막연히, 구체적으로 상상하려고 해도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하물며 네가 어떻게 사는 걸 좋아하는지는 더더욱 모르는걸. 사람이 왜 다른 사람의 곁에 남아있고 싶어하는지, 왜 혼자서는 도저히 외로움을 어쩔 줄 모르고 슬퍼하는지, 사실 지금도 잘 알지는 못하는 것 같아. 그렇잖아, 무언가가 아름답다고 생각해본 것도 네가 물어봐 준 때가 처음이었어. 그 전까지 내 세상에는 빛나고, 약하고, 쫓아가고 싶은 것들 뿐이었는데, 네 질문이 그것들을 아름답다고 정의할 수 있게 해 줬어. 그 다음에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 줄 알아? 아, 그러면 내가 햇빛 아래에서 반짝인다고 생각했던 너는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점점 더 궁금해지고 만 거야. 너는 누구고,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고, 뭘 하고 싶어하는지, 전부 다 안 후에는 뭐가 하고 싶었던 걸까? 그런 건 아직까지도 잘 몰라. 모르는 채로 네게 더 많은 것들을 받았지. 네가 주고자 했던 것들과, 감추고 싶어했던 것들까지 전부. 네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고, 아마 뭐가 아름다운 건지도 끝끝내 몰랐을 거야.
고백하건대, 나는 생각을 많이 하고 사는 편은 아니야. 그야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정도로 살면 뭘 생각할 것도 없잖아.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렇게 내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숲 바깥에서의 삶을 생각하게 된 것도, 혹시 내가 죽은 다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도 전부 널 만나서야. 있잖아, 나한테 죽음은 두려운 게 아니야. 지금도 다를 건 없어. 우리는 죽으면 모두 흙과 바람으로 돌아갈 테고, 누군가가 다시 보고 싶어지면 지상으로 돌아오겠지. 그러니까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 그냥 나는 네가, 혹시 내가 죽은 다음에는 다시 외로워질까 하고… 그런 걸 걱정하게 되고 마는 거야. 죽지 않을 수는 없지만, 하다못해 빛과 바람 같은 것으로 돌아와서, 네 곁에 영원히 내 마음을 두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어버린 거야.
네가 궁금한 걸 넘어서서 너를 생각하게 된다면, 상상하게 된다면. 그게 바로……,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