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싫] 필링필링

2.3 그의 능력은 유용하다 (上)

행운의 부재

망상요람 by Z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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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냐가 실종됐다.

타냐가 눌렀던 벨의 신호와, 다급한 문자의 내용으로 그 자리에는 10분 만에 비비안을 비롯한 히어로들이 출동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칼에 베인 벽, 참격으로 뒤틀린 콘크리트 바닥, 그리고 몇 개의 총 자욱만이 남아 있었다. 아니, 다른 하나도 남아있긴 했다.

타냐의 핏자국.

이 정도면 과다 출혈로 죽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짙게 남아있는 핏자국 뒤로 점점이 멀어져 가는 자국이 보였다. 분명 누가 옮긴 것이리라. 히어로들은 의도적으로 타냐가 죽었을 때의 가능성을 무시했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들이라면 이미 타냐를 죽이고 파묻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네에?!”

흐아앙, 혜나가 펑펑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는 그 마음을 이해했다. 이제 막 타냐의 실종 소식을 들은 참이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자세히 말을 들어보면 살해당한 것에 가까웠다. 여튼 그 시체라도 찾고자, 몇 명의 히어로들이 차출되었으나 그것이 나가의 팀은 아니었다.

“나가 군의 능력은 여러모로 유용하니까요···.”

뀽. 그 덕에 나가네 팀은 온갖 잡다한 일을 도맡게 되었다. 조경수 옮기기, 범죄자 처단하기, 풍선 되찾아주기(?) 등···. 왜 우리만 이렇게 바쁘냐고 화를 낼 수도 없는 게, 스푼의 모든 직원이 바빴다. 세기의 대배우이자 히어로 여명기를 이끈 전설적인 히어로, 영정이 은퇴한댔나. 나가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오빠, 많이 힘들어?”

“일은 안 힘든 데, 잠을 좀···.”

“가서 좀 자래?”

“아뇨, 어차피 2시간은 뒤척이다 자서 1시간도 못 잘걸요.”

“힝, 이럴 때 타냐 언니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굳이 이런 목적이 아니어도, 타냐를 찾는 사람은 많았다. 타냐가 담당하고 치료 중이던 사람들은 다급하게 다른 상담사로 인계됐고, 의료실의 상담실은 굳게 닫혔다. 누구보다 타냐와 친했던 의료실의 사원들은 축 처져 있었다.

다나가 화났을 때 말려줄 사람이 없다. 오수는 친구를 잃어버렸다. 사사는 유난히 얼굴이 창백했다. 타냐를 공격한 사람이 그의 절친했던 사람이라고 했던가. 축 처진 의료반, 텅 빈 로비, 싸늘한 상담실··· 그만큼 타냐의 빈자리는 컸다.

-하지만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들어와요. 의사를 소개해줄게요.”

“이호 형···?”

나가는 난데없는 송하의 공격을 받다가, 영정에게 막 구해진 참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송하는 죽었고, 나가는 그때 영정이 염동력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 수 있었다.

본인도 충분히, 아니 간단히 할 수 있다. 여태 그런 힘을 가지고도 몰랐던 것이 무색하게도 쉽게 말이다. 마치… 리모컨의 누르지 않던 먼지 쌓인 버튼의 새로운 기능을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럼에도 결코 누르고 싶지 않은 – 아, 그런 생각이 들어 막 괴로워진 참이었다. 타냐라면 어떤 말을 해줬을까? 다시 손을 잡고, 그 잔잔한 느낌을 느껴보고 싶었다. 다시는 그럴 수 없겠지만···.

그 와중에 나가는 치료를 명목으로 영정의 별장을 방문했다가, 백모래를 탈출시킨 혐의로 스푼에 구금된 와중에 도망친 것으로 알려진 이호를 발견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나가는 복잡해지는 머릿속에, 비척거리며 겨우 방으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목격한 것은,

“옆에 자리 있으니까 좀 누워요.”

야윈 얼굴로 잠들어 있는 타냐. 나가는 생각을 포기했다. 그저 영정이 말하는 대로 침대, 타냐의 옆자리에 올라가 앉았다. 이호의 힐링으로 송하의 칼날에 베인 상처는 금방 나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많이 다쳤네···. 무슨 일 있었어?”

“네···.”

영정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인 것과, 똑같은 것이 충분히 가능한 나 자신이 두려워서 현명하게 조언을 해 줄 타냐를 찾고 있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다. 나이프에게 습격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 타냐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처음부터 영정이 습격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분명 문자로 ‘나이프’라고 보냈다고 했으니··· 중간에 구한 건가? 그럼 왜 스푼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이호 형은 왜 여기 있어요? 일호 형도 스푼에 있는데, 혹시 도망친 거예요?”

“아니, 나는 잘··· 근데, 형이?”

이호가 무어라 더 말하는 것 같았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이걸 스푼에 말해야겠다는 생각보다도, 타냐를 구해가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놀랍게도 영정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스푼에 비밀로 하고 이호를 데리고 있는 것 자체도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영정 님? 저··· 이호 형이 왜 여기 있나요? 타냐 선배도 그렇고.”

“필요하니까 불렀어요.”

“···그럼 아무튼 제가 서장님한테 말씀드릴게요. 다들 찾고 있으니까,”

“그건 안되죠.”

“네? 왜요?”

“···”

-말만 하면 당당하게 만날 수 있는 간부가, 왜 이 친구를 몰래 데리고 나왔을까?

-그걸 왜 비밀로 하라고 말하는 걸까?

-비밀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은 안 해보나요?”

그렇게 말하는 영정의 목소리가 섬뜩했다. 나가는 혈색 없이 새하얗게 질려있는 타냐의 얼굴을 차마 자세히 볼 수 없었다. 이 상황은 변명의 여지 없이, 분명한 입막음이었다. 분명 힐링을 받았음에도 머리의 지끈거림이 가시질 않았다. 이호와 타냐는 왜 여기 있는 것이며, 이것을 스푼에 어떻게 알려야 하는지,

···그리고 영정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

손이 떨렸다. 피곤했다. 타냐 선배에게 너무나 미안하게도, 나가에게는 더 이상 머리를 굴릴 정신이 남아있지 않았다. 집이 절실했다. 아니, 집에 가서도 마음을 놓을 수 있을까? 잠꼬대 한 번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도? 이제 나가는 집에서도 안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죄송해요. 치료 끝났으면 가도 되죠?”

“저···푹 쉬어야 돼.”

“그래요, 잘 생각해봐요.”

그렇게 나가는 날아올랐다. 영정은 그런 나가를 붙잡지 않았다. 이호와 타냐의 존재를 들키고도 여유가 있는 것은 나가를 그만큼 우습게 본다는 것일까···. 하지만 사실이었다. 나가는 쪽지를 꺼냈다. 이불 속에 있던 나가의 손에 슬쩍, 놓인 천 조각이었다. 바늘과 실로 한 땀 한 땀 수놓은 듯한 그것은···.

‘I’m alive. I’m okay.’

···너무 그다운 말이어서. 나가는 더 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살아있으니 이를 스푼에 알려달라는 걸까, 아니면 일단 자기는 괜찮으니 너무 자책하지 말라는 걸까. 후자로 받아들이고 싶다면 너무 자기 위안일까?

해결되지 않은 의문만이 쌓여 나갔다.

 


정신을 차렸다는 자각도 없이 빛이 먼저 새어 들어왔다. 어떻게 됐지? 난 죽었나? 그대로 방치되었다면 죽은 게 확실하다. 하지만 이렇게 환하게 들어오는 햇살은 고작 사후세계의 것이라기엔 너무나 따스한걸. 타냐는 잠결에 얼굴을 베개에 비볐다.

“타냐 씨?”

기억을 더듬어보자. 송하와 싸웠, 다고 말하기도 좀 그렇다. 객기를 부리며 달려들었던 그때, 타냐는 고통으로 정신을 잃었다. 그 뒤부터는 암전. 아무런 기억도 없···나?

‘이걸로 보답은 했어.’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와 다시 파헤쳐지는 감각, 그리고 유난히 차가웠던 손···. 더 이상은 기억나지 않는다. 타냐는 다시 눈을 꾹 감아버리고 말았다.

“정신이 드나요?”

“-영정 님?”

“나흘 만이에요. 뭔가 잘못됐는지 걱정했는데.”

“어, 영정 님이 구해주신 건가요?”

“글쎄요, 타냐 씨가 구해준 사람의 덕이라고 해두죠.”

영정이 빙그레 웃었다. 타냐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죽는 줄 알고 눈을 감았는데 난데없이 히어로 대선배의 앞? 그리고 그사이에는 심상치 않은 기억도 껴있다.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하는 정보의 물결이 머릿속을 관통했다.

“···나흘이요?!”

“발견하고 치료한 후부터 나흘이니, 이제 일주일 가까이 지났죠.”

이렇게까지 오래 쓰러져 있었다고? 타냐는 당황스러운 기분에 괜히 흉진 손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하지만 어쨌든 살았으니 됐나. 우선 스푼에 연락을 해야겠다. 타냐는 소지품을 찾아 이리저리 둘러봤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나이프가 친절하게 소지품을 챙겨줬을 리가 없다. 정황상 모종의 경로로 나이프에게서 떨어진 나를 영정 님이 챙겨주신 걸로 보이니, 당연히 핸드폰 따윈 없겠지. 돌아가자마자 새로 발급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잠깐 머리가 아팠다. 아직 할부 남았는데. 아, 선물 받은 걸로 쓸까? 아직 작동하려나···.

“저, 혹시 전화 한 통 할 수 있을까요?”

“왜요, 스푼에 전화하게요?”

“네? 그래야죠.”

“안 될걸요. 제가 타냐 씨에 대한 자료를 보내둬서.”

그런 폭탄을 떠안고 있는 사람을 히어로로 두기엔 너무 위험부담이 크지 않나요?

오싹, 소름이 돋았다. 영정은 타냐의 과거에 대해 완벽히 알고 있다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타냐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침대를 짚고 영정을 올려다보았다. 아모르, 아모르인가? 아님 뒷조사? 어느 쪽이든 스푼과 영정 측에서 타냐의 죄를 알아버렸다는 것은···.

“법에 해당 사항이 없어 처벌은 받지 않았지만, 그건 엄연한 죄죠. 안 그래요?”

“···제 능력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거라면, 전 스푼 입사 후에 함부로 능력을 쓴 적이 없습니다. 예외를 제외하면요.”

“그럼 입사 전에는?”

“…”

입이 망연히 뻐끔거렸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냥 비상사태가 있을 때만 나서서 사람들을 안정시켜준 것이 끝입니다.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난데없이 폭력 사태를 빚은 여자. 다 죽여 버리고 저도 죽겠다며 울다가 잡힌 후에는 태세를 전환했죠. 그의 말로는- 금발의 예쁜 친구를 만나다가 그랬다고 하던데요.”

“비정상적인 우울감을 토로하며 정신과를 찾은 남자. 아주 참한 여자 친구를 만난 후 몇 달 뒤에 입원했죠. 아, 자살 기도도 했다던데요. 그러다 씻은 듯이 나아지자마자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정상으로 회복. 기이하지 않나요? 타이밍이 아주 공교롭죠.”

“-그리고 평범한 어머니. 자녀가 우울증에 걸린 뒤, 갑자기 우울감을 호소한 뒤에 1년 만에 달리는 차에 뛰어들어 자살.”

다 익숙하지 않나요?

“아모르, 아모르 씨인가요?”

타냐는 결국 눈꼬리에 눈물을 달고 영정에게 간절하게 물었다. ‘괜찮다’며 웃어주었던 얼굴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었다. 그때의 그 웃음으로 면죄부를 받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니.

-타냐의 과거는 언제든 그 발목을 잡고 수렁으로 끌어내릴 수 있었다. 그가 외면해왔을 뿐이다.

“제게 원하는 게 있나요?”

“속죄하길 원해요.”

“네?”

“그리고 당신처럼 위험한 특기자는 사회에 내보낼 수 없으니까요.”

‘공감해줬으면 좋겠다’는 기본적인 욕구로 억지로 공감시키는 능력이라니. 평범한 관계를 맺기에는 너무 위험한 능력 아닌가요?

투둑, 툭.

결국 눈물방울이 이불 위를 두드렸다. 타냐는 고개를 숙였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제 욕심 때문에 억지로 사람들 틈에서 살아왔을 뿐이라는 걸, 사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최대한 기대지 않기 위해 노력했는데. 흔적을 두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 나름대로 속죄 역시···.

-다 자기만족이었나?

 


 

괴로워, 왜 나만 비정상이지? 왜 나만 이런 생각을 해야 하는 거지? 왜 나만··· 왜 나만 행복하지 않은 것 같지?

타냐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지독한 두통이 아침부터 타냐를 괴롭혔다. 분명히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아침에 먹었는데도 이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다음에 갈 때는 약을 늘려달라고 해야···.

“타냐, 타냐? 얼른 나와야 태워다주지-”

그것과는 별개로, 지금 시각은 오전 9시. 곧 준비하고 독서실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타냐는 지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가방을 챙겼다. 평범한 녹색의 학교 체육복, 그리고 편안한 노란색의 후드티. 그리고 검은색 가방. 평범한 학생의 차림이었다. 타냐는 곧 거실로 나가 약봉지를 찾았다. 저녁을 먹고 들어올 테니 저녁 약을 가져가야 했다.

“?”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문득 불안해진 타냐는, 제일 먼저 쓰레기통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약봉지가 잘게 잘려 쓰레기통에 박혀 있었다. 타냐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왜 죽고 싶은데, 그런데도 죽기 싫어서, 발버둥 치는 것조차 못하게 해? 내가 죽기를 원해? 역시 그런 거야? 왜 내 마음을 늘 이런 식으로 짓밟아 버리는지-

“···엄마, 엄마가 제 약 버렸어요?”

“얘, 무슨 쓰레기통을 뒤지고 그래! 그래, 양약은 계속 먹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어요. 몸에 독소가 쌓이고, 중독까지 된다고 하더라.”

엄마랑 노력해보자, 응? 기도도 해보고, 좋은 생각 많이 하고.

“엄마, 저 약도 안 먹으면 진짜 힘들어요.”

“노력해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아니? 다음에 병원 갈 때까지만 참아보자, 응?”

분노가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데, 한편으로 눈물이 차올랐다. 타냐는 짧게 심호흡했다. 싸우고 싶지 않았다. 싸워서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까, 내 기분을 잡칠 뿐이니까, 어색해질 뿐이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너무 화가 났다. 벌써 이게 몇 번째지?

엄마가 내 고통을 무시한 게, ‘나도 죽고 싶다며’ 가볍게 여긴 것이, 어디서 듣고 온 비전문적인 헛소리로 나를 막아선 것이···.

내 감정이 어떤지 하나도 모르면서. 내가 죽으면, 그땐 이해해줄까?

“자, 도착했다. 타냐, 오늘도 사랑해. 알았지?”

“···”

타냐는 기계적으로 어머니의 포옹을 받았다. 나서서 함께 끌어안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안녕히 가세요.”

당신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공감한다면,

-그런 말은 할 수 없을 텐데.


“여긴 백모래를 위한 감옥이에요.”

“네?”

“타냐 씨의 역할은 이제 이곳에 평생 머무르며 그를 관리하는 거죠. 기분이 좋아졌다가, 우울해졌다가, 죽고 싶어졌다가, 또 미친 듯이 행복해지고··· 1분 동안 수십 번도 더 바뀌는 감정 속에서도 멀쩡할 사람은 드무니까요. 가능하죠?”

아, 평범하게 타냐 씨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도 좋아요.

타냐의 울상인 얼굴과는 반대로, 파랗게 빛나는 웃음이었다. 인간성을 잡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고작이었던 타냐는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영정은 너무나도 유용한 특기를 갖고 있는 백모래를 한계까지 이용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백모래를, 정화기로 쓰려는 건가요?”

“이해할 줄 알았어요.”

미친 계획이야.

“그래서 백모래만을 위한, 영원히 살 수 있는 주치의도 마련했어요. 아, 타냐 씨도 담당하겠군요.”

“아, 안녕하세요···.”

타냐는 비척비척 걸어 나오는 이호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호의 발목에는 묵직한 족쇄가 달려 있었다. 마치 죄인을 대하듯, 그리고,

자신의 발목에 있는 것과 똑같은.

-그렇게 타냐는 정신을 잃었고, 다시 깨어났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꿈이고, 자신은 평범한 병원에서 깨어나길 바랐지만, 결국 현실은 현실이었다. 타냐가 누워있는 곳은 호화로운 침대. 그리고 거실로 보이는 방의 테이블에는 멍하니 앉아있는 이호.

···그러고 보니 나, 뭘 입고 있는 거지?

다행히 이호처럼 가운 한 장만 걸치고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다만 검은색의 원피스 잠옷. 이 나이에, 이 얼굴로 입기에는 굉장히 멋쩍은 복장이었다.

“일어···났어요?”

“···네.”

침묵.

그러고 보니 타냐는 이호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당연히 악감정 같은 건 없다. 오수를 끼고 꽤 가까운 사이기도 했고, 백모래와 어떤 관계였는지 알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했으니 그에 관련해서는 심하게 책망할 마음은 없었다. 그럼 왜 할 말이 없는가?

서로의 입장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둘 다 죄인이라는 명목으로 잡혀 온 것은 맞지만, 이호는 백모래를 양아들로 여길 만큼 사랑한다. 하지만 타냐는 주변인들의 고통받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오히려 그를 싫어하고 두려워한다. 그런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는데 저희 힘내봐요, 하고 희희낙락하고 있을 순 없다는 거다.

그렇게 말 한마디 없는 하루를 보낸 뒤, 결국 타냐는 영정에게 읍소했다.

“취미생활이라도 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그 취미는 자수였다.


특종이 터졌다.

“-스푼의 히어로로 활동했던 타냐 씨가, 민간인을 죽음으로 몰아간 전적이 있음이 밝혀져-”

“내가 이럴 줄 알았어요. 그 소름 끼치는 능력을 가지고 나쁜 짓 하나 안 했겠어? 안 그래도 의심하고 있었다니까.”

“사람을 조종해서 전과를 만들고, 자살까지 몰아가는 게 히어로예요? 범죄자지? 당장 감옥에 집어넣으쇼!”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부정적인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스푼은 전과자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히어로로 활동하게 한 꼴통 기관이 되었고, 타냐는 전과를 가지고도 뻔뻔하게 히어로 활동을 한 놈이 되었다. 실제로 자신이 피해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주로 타냐가 상담을 담당했다가 거부당했던 각종 환자들이었다.

“좀 진정시켜주겠다고, 손을 잡으면 된다고 해서 잡았는데···. 막 머리가 이상하게 되는 기분인 거예요. 얼마나 불쾌했는지.”

“막 내 마음을 조종하는 느낌? 제가 느낀 감정과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너무 기분이 나빴어요. 그런데 무서운 건, 결국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되더란 말이에요.”

“아니, 사람이 마음 가는 대로 둬야지 그걸 조종해달라는 게 말이 되는 거야? 그게 다 정신머리가 약해 빠져서 그래!”

그들은 타냐의 손에 억지로 머리가 주물러진 무고한 피해자들이 되었다. 어떤 상황에서 만났으며 어떤 의도로 특기를 썼는지와 관계없이, 그렇게 편집되었다는 뜻이다. 그린 듯이 악의적인 편집이었다.

-타냐가 지극히 강박적으로 특기를 써왔다는 것은 고작 변명조차 되지 못했다. 그가 사용하는 특기는 고작 처방하는 약(pill)에 불과했다는 사실 역시도.

사람들은 이젠 타냐가 스푼에서 제명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게 정의라는 듯이. 몇몇은 시위까지 나왔다. 하나같이 한 번도 타냐를 직접 본 적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래서 저렇게 시위를 한다고요? 못됐다···.”

“언니가 뭘 했다고! 잘못은 기레기들이 했-”

“헤나야, 납븐 말.”

하지만 스푼 사원들은 분개함을 감추지 못했다. 일단 나가네 팀이 그랬다. 혜나는 당장에라도 튀어 나가 싸움을 걸 기세였고, 사사는 그런 혜나를 붙잡아 말렸다. 하지만 스푼 사원들의 분노는 그보다 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타냐쌤, 못 본 지 너무 오래됐는데···. 이러다 스푼으로 못 돌아오면 어떡해요?”

“역시 그 기사를 쓴 놈들을 다 처단해야,”

“안돼! 참아!!”

타냐가 실종된 이후 목 빠지게 그를 기다리고 있던 의료실의 사원들은 칼을 갈기 시작했고,

“불합리해.”

“그러니까요, 선배도 상담받았었죠? 그럼 저렇게 말할 수 있나?”

“아마도 타냐의 특기를 거부한 사람들이겠지. 그 사람들이라면 악의적인 인터뷰를 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니까 그게 이해가 하나도 안 된다고요!”

엉엉, 로나가 소파에 엎어져서 울었다. 다른 히어로들 역시 답답해하고 있었다. 스푼의 서장실 역시···.

“서, 서장님, 불날 것 같아요···.”

“뭐.”

하지만 스푼 측에서 따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여론이 저절로 변하길 기대하거나, 타냐를 정말로 제명하거나. 하지만 스푼의 그 누구도 후자는 원하지 않았다. 전자의 가능성은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다나는 결정해야 했다. 모두가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서-

타냐를 제명할지를.

똑똑-

“서장님, 손님 오셨어요.”

“어.”

그때, 낯익은 얼굴이 서장실을 찾았다. 뉴스 프로그램의 인터뷰에 나왔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그 시각, 영정의 사옥에서는···

타냐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내려놨다. 영정은 그 앞에서 그런 타냐를 고압적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핸드폰 화면에는 뉴스 기사 창이 띄워져 있었다. ‘[특종] 스푼의 히어로, 타냐가 사람을 죽인 전적이 있어-’의 댓글에는 [화나요]가 가득했다.

각종 악플들이 요구하는 내용은 하나같이 다 똑같았다. 스푼에서 타냐를 제명할 것.

“이제 타냐 씨가 돌아갈 곳은 없네요.”

이제 스푼은 타냐를 히어로로 받아들였다는 것만으로도 각종 질타를 받고 있었다. 타냐는 자신이 비난받는 것보다도 스푼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 더 괴로웠다. 그 때문에라도 타냐는 스푼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영정의 목적이 타냐에게서 선택지를 없애는 거라면, 영정의 판단은 옳았다.

-타냐에게 돌아갈 곳은 남아있지 않았다.


나가는 다시 영정을 찾았다. 일단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사람이기도 하고, 그가 데리고 있는 이호와 타냐를 다시 데려오려면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뜬금없는 바이고 사막으로 불려오긴 했지만, 용건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가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똑같이 왼쪽 발목에 족쇄를 차고, 그 사슬을 손에 들고 있는 이호와 타냐였다. 마치 죄인, 혹은 노예와 같은 모양새였다.

“···그거 뭐예요?”

“내가 들고 있으라고 시켰어요. 이곳에선 도망칠 수 없으니 무거운 추를 달 필요가 없거든요. 하지만 죄인이니-”

족쇄는 풀지 않았어요.

나가의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이호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타냐는 납득할 수 없었다. 지금 그의 전과로 여론이 시끌벅적하긴 하지만, 나가는 그의 평소 모습을 지켜봐 온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당연히 언론보다는 타냐를 믿는 것이 당연했다. 따라서, 그를 이렇게 죄인 취급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이호 형과 타냐 선배를 돌려받으러 왔어요. 이대로 실종 기간이 길어지면, 이호 형은 끔찍한 처벌을 받아요. 타냐 선배는··· 무고하잖아요.”

“목과 사지를 작은 통 안에 가둬 놓는 미개한 벌 말이죠? -정말 미개해···.”

벌은 단지 잔인하기만 해서는 안 돼요. 써먹을 수 있는 재능이 있다면 앞으로 계속 사회를 위해 봉사시켜야죠. 쥐어짤 수 있을 때까지 쥐어짜야 합니다.

나가는 그러니 이호를 백모래의 주치의로 쓰겠다는 영정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런 나가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이호에게 대답을 종용했다. 사지를 잘리는 형벌을 감수하며 지금의 가족을 만나러 갈지, 아니면 함께 영원히 살게 될, 자신이 망가뜨렸던 아이인 백모래와 함께 살아갈지···.

요약하자면 오수와 백모래 중 어떤 아이를 선택할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영정 님! 왜 사람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놓고 결정하라고 하는 거예요? 좀 더 신중하게, 여유를 가지고-”

“내가 내몬 게 아니야. 전부 본인이 자초한 거지. 그렇죠, 타냐 씨?”

흠칫, 나가를 볼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던 타냐가 눈에 띄게 반응했다. 나가는 타냐를 물어뜯던 여론을 생각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타냐는 그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가는 그것이 더욱 화가 났다. 이런 사람을, 다른 사람들은···!

“설령 내가 내몰았다 해도, 왜 그런 어리광을 받아줘야 하지?”

“주변 사람들이 다정하고 입속의 혀처럼 굴어주니 세상 모두가 그래야 할 것 같나?”

“세상이 네게 다정한 건 네가 우수한 인간이기 때문이야.”

아닌데, 아닌데, 다 아닌데. 나가는 숨이 막혀서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영정을 논리적으로 설득할 자신이 없어서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 사이에 영정은 일반 시민 50명과 5명의 목숨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네가 50명을 버리고 가족을 구하러 가도 난 비난하지 않을 거야.”

“-너에겐 50명보다 많은 인명을 구할 힘이 있고, 네가 앞으로 몇십 년간 능률 높게 일을 수행하려면 가족을 구하는 쪽이 옳기 때문이지.”

나가는 과대평가라며 고개를 내저었지만, 영정은 올바른 평가라고 단언했다. 모든 가치관이 뭉개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타냐가 퍼뜩 고개를 드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제 이야기는 백모래에게 영원히 젊게 살 수 있는 ‘완벽’이라는 물질을 넘기고, 히어로의 감시 아래 영원히 인간 정화기로 쓰겠다는 계획까지 넘어가고 있었다.

타냐는 점점 나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뭔가를 짐작한 눈치였다. 나가는 그것을 알았지만, 영정이 쏟아내는 말을 들으며 겨우 자신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지쳐 있었다.

“이건 그놈에게 내리는 벌이야. 그 옆에서 똑같이 영원히 살면서, 지키면서, 통제하는 최강의 히어로가 필요해. -바로 네가.”

“그럴 순 없어요!”

그때, 타냐가 나가의 앞을 막아섰다. 영정으로부터 나가를 지키듯, 그렇게 서 있는 타냐의 등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나가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공포의 흔적이었다.

“나가 군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자신이 선택할 권리가 있어요.”

“큰 힘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에요, 타냐 씨.”

“책임이 곧 희생인 것은 아니에요. 자의로 평생을 범죄자를 지키는 데에 쏟아붓는 것을 선택할 사람은 없어요!”

“저는 할 수 있어요.”

“영정 님이 선택하시는 것과, 그것을 나가 군에게 강요하는 것은 달라요! 설령 나가 군이 수락한다 해도 완벽을 지닌 백모래를 영원히 지키고 있을 순 없어요. 계속해서 영정 님 같은 적임자를 찾는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흐음, 영정은 가소롭다는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정보다 작은 체구를 하고서 제대로 소리를 내지도 못하며 화를 내는 타냐의 모습은 앙앙 짖어대는 소형견의 모습이 연상되는 면이 있었다. 나가는 그사이에 긴장이 풀렸다. 타냐의 말로, 적어도 자신이 정상이라는 확신을 할 수 있었다.

“그래요, 그건 방법을 찾아야죠. 늙지 않는 또 다른 특기자를 찾던가, 아니면- 그들이 하고 있는 불로불사에 대한 실험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자유롭게 내버려 둔다던가.”

질 좋은 실험 결과를 내놓으려면 풍부한 경험을 쌓아야 하니까.

“-살인을 경험이라고요?”

하지만 이것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발언이었다. 어떻게 히어로가 되어서 인체 실험을, 살인을 정당화할 수 있지? 나가는 계속 고민해왔던 의문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왜 저한테 비밀로 하라고 하신 건지 계속 생각해봤는데, 이제 알겠어요. -아무도 영정 님한테 동조해주지 않을 테니까···!”

“그래, 다들 시야가 너무 좁거든. 내가 이해해야지. 뭐, 못마땅하니? 네가 약속 하나만 해주면 당장 잡아들일 수도 있어.”

-네가 은퇴하면 네 동생에게 이 일을 물려줘.

-그리고 동생이 죽기 전까지 새로운 후계자를 찾는다는 약속이야.

-그렇게 새로운 최강에게 영원히 백모래를 대물림할 거야.

“그건 싫은데요.”

타냐가 절대로 거절하라는 듯,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그리고 나가는, 굳이 타냐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아도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런 인생을 살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다. 무엇보다 동생은 히어로를 시키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자신이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남을 돕고 싶었다.

‘남을 구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구해야 하는 법이에요, 나가 군.’

그래, 타냐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나가는 떳떳했다.

“우린 절대 보통 사람이 아니야. -사명감을 느끼지 않아?”

“제가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라면···.”

그리고 소리 없이 생긴 충격파가 나가와 타냐를 저 멀리 날려버렸다. 나가의 앞에 서 있는 바람에 그 옆에 엎어지게 된 타냐는 나가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마음고생에 야윈 얼굴. 나가는 도리어 마음이 더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한심해. 고쳐야 할 게 산더미야.”

정신머리를 뜯어 고쳐주지.

-하지만 영정이 그러지 않아도 나가는 누구보다 건강한 정신머리를 갖고 있었다!

쿵, 쿠웅-

곧 사막의 바위들이 큰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타냐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이호가 겨우 염동력의 경로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보고 몸을 움츠렸다. 안 그래도 이 넓은 사막에 움직이는 생물이라곤 넷뿐이었는데, 이젠 전투로 주변이 아수라장이었다.

바위가 베이고, 바닥이 패이고, 건물이 잘리고, 무너지고···. 무서운 것은 그들이 공격할 때 한 점의 소리도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리 없이 잘려 나간 건물이며 바위들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그제야 무거운 비명 소리를 냈다.

그때, 나가가 다가와 타냐와 이호를 한 곳에 데려다주었다.

“어디 있든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타냐도 동감이었다. 그냥 여기서 벗어나게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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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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