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균열 (1)
1차 HL 자캐 CP 주현여루
사방에 사진들이 가득하다. 상처난 맨발이 바닥에 어질러진 사진을 짓밟으며 일어났다. 매끄럽게 인화된 누군가의 인영 위에 희게 지문이 남았다. 마치 자기 소유물에 낙인이라도 찍듯 그렇게 마구 지문을 묻히며 비틀비틀, 다리를 움직여대는 인영.
방금 막 지문이 찍힌 것들은 모두 한 대의 카메라에서 나온 사진들이었다. 카메라의 피사체는 모두 자기 자신. 그러나 인영의 주인인 소녀는 바닥에 깔린 것들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저 멍하니, 앞에 시선을 고정하며 걸어갔다.
다다른 곳은 창살이 쳐진 창문가였다. 권여루는 창살이 찍어낸 바깥 세계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고층이라 그런지 땅 아래 풍경이 아주 잘 보였다. 누군가의 카메라 안에 갇혀 렌즈 너머로 바라본 세계는, 과거의 자신이 속해 있던 곳이기도 했다.
손을 뻗어 안에서 쳐진 창살을 붙잡았다. 시린 냉기가 손바닥 안으로 전해졌다. 셔터를 누르듯 검지 손가락을 톡톡 두드려 본다. 같은 장면만 찍어대는 카메라가, 마치 저기 바닥에 널린 사진들을 찍은 카메라와 같아 보여서 웃음이 나왔다.
이곳의 사진기는 지겹지도 않나 보다. 동일한 피사체를 여러 번 찍어도 만족하질 않으니.
철컥.
멀리서 희미한 소음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찔했다.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였다. 그것이 카메라 셔터가 내려가는 소리로 들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고,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차올랐다. 여루는 쇠창살에서 손을 떼고 허겁지겁 창문에서 떨어졌다.
자, 이제 액정 너머로 비춰질 시간이다. 자신만을 오롯이 향한 한 쌍의 렌즈를 생각하며 침대에 가 앉았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 조금만...
***
매미 소리가 창공을 찢어놓는 계절이었다. 시기상 봄이 훌쩍 지나가버린지 벌써 두 달째. 여름이다. 선명한 계절은 공기가 소음으로 떨리는 게 느껴질 정도로 시끄러웠다.
여루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하품했다. 이마에서 땀이 주륵 흘러내리는 느낌이 났다. 손수건 어디 있지. ...아, 잃어버렸었나. 대충 손등으로 훔치고 그늘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학교 안에서 그늘을 찾아봤자 건물 안이거나, 아니면...
“끄응. 저 나무는...”
안 좋은 추억이 있는 곳인데. 뭐, 어쩔 수 없지. 여루는 고백했던 상대를 걷어찼던 훌륭한 추억이 있는 거대한 느티나무 쪽으로 느적느적 걸어갔다. 그렇게 초여름에 받았던 채주현의 고백을, 그녀는 기억 저편으로 넘겨버렸다. 나무의 그림자로 들어오자마자 왠지 바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벌써부터 시원하네. 별 생각 없이 나무 근처의 벤치에 털썩 앉았다. 양 손을 대충 벤치에 얹고 몸을 뒤로 살짝 젖혔다. 편한 자세로 대충 앉아 땀을 식힐 작정이었다.
찰칵.
“...뭐야.”
갑자기 가까운 곳에서 카메라 셔터 소리가 났다. 눈살을 찌푸리고 누가 도촬이라도 하나, 고개를 돌리자마자 발견한 것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 한 소년이었다. 최근에 염색이라도 했는지 머리를 갈색으로 물들인 소년.
몰래 찍은 것이 들켰는데도 제 자리에 서서 카메라를 확인하고 있었다. 아니, 이 정도면 몰래 찍은 게 아니라 대놓고 찍은 수준인데. 여루는 미간을 검지로 꾹꾹 눌러 펴며 골치가 아픈 듯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채주현! 너 또 나 찍었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손에 들린 카메라 쪽으로 내려갔던 고개가 다시 정면으로 올라온다. 채주현이라 불린 소년은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분명 객관적으로 봤을 때 웃고 있는 표정이었다. 반달 모양으로 휜 눈가, 올라간 입꼬리.
그런데 이상하게도 웃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여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무시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소년을 향해 손짓했다.
“그거 갖고 와. 당장 지워버리게.
“싫은데.”
“짜증나게 할래 진짜? 아니, 너랑 있다 보면 점점 말이 험악해지는 것 같아. 책임져.”
“예쁜 말만 써. 욕하면 안 돼.”
“말을 말자, 내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주현은 여루에게 터벅터벅 걸어와 옆 자리에 앉았다. 바싹 붙어 앉아서 그런지 옷끼리 스치는 것이 허벅지에 느껴질 정도여서 신경 쓰이지 않는 티를 내려 무진장 노력해야 했다.
여루는 주현이 손에 쥐고 있는 카메라 쪽으로 흘깃 시선을 주었다. 액정에는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현상되어 있었다.
“초상권 침해인 거 몰라? 싫다는 데 왜 자꾸 찍어.”
“미안. 그래도 이거 추억이래. 이렇게 사진으로 찍어놔야 과거를 남길 수 있다고 그랬어.”
“누가 그랬는데?”
“...누가 그랬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여루야, 이거 꽤 분위기 있게 잘 나오지 않았어?”
주현이 사진기를 여루에게 가까이 가져가며 말했다. 확실히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건 안 드는 거다. 괜히 토라져 고개를 홱 돌려버리고 말았다.
“몰라. 난 그리고 사진 찍는 거 원래 안 좋아해.”
“알고 있어.”
알고 있으면서 굳이 사진을 찍어대는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고백하다가 차였으면서 계속 제게 다가오는 이유도. 알 수가 없었다. 보통은 알아서 멀어지거나 서먹해지거나 할 텐데, 채주현 이 녀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음 날 교실에서 인사를 하며 제 옆자리에 앉더랬다. 제 짝꿍도 아니었는데. 하지만 선생님은 눈썹만 한 번 움찔거릴뿐, 아무런 재지도 하지 않으셨다.
원체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녀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학교에서의 평판은 신경 쓰는 것 같더니. 요새는 그냥 막 나가기로 했나보다. 당황한 여루의 짝꿍이 주변에서 맴돌며 눈치를 보는 것도 무시하고 제게 말을 거는 주현을 질린 눈으로 쳐다봤던 기억이 있었다.
여루는 최근에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떠올렸다. 제게 집착하듯 권지윤과의 관계를 끊으라고 명령하던 모습, 사과하기는 커녕 제게 입을 맞춰오던 감촉. 저도 모르게 어색하게 입술을 만지작 거리려다 멈칫했다.
그 때, 카메라를 만지작 거리던 주현이 손에 든 것을 벤치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무릎 위에 어정쩡하게 놓여 있는 여루의 손가락을 만지기 시작했다. 여루는 물끄러미 그가 하는 양을 내려다 봤다. 그냥 주현이 멋대로 제 손을 가지고 장난치게 두었다.
주현과 함께하면서 스킨쉽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위가 되어서, 이제는 아무 느낌도 없었다. 잠시 여루의 손목 안쪽을 쓸거나 손가락을 두드리면서 장난을 치던 주현이 입을 열었다. 순간, 매미 소리가 귓가에 크게 울렸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이 담긴대.”
“...뭐?”
“카메라로 사람을 찍으면, 사진에 그 사람의 영혼이 담긴대. 알고 있었어?”
“그런 미신을 믿어, 너는?”
그 말을 들은 주현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소년다운 모습이라 순간적으로 시선을 빼앗겼다. 여루는 제 나이대에 어울리게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주현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하하, 당연히 믿지. 믿어야지. 그래서 내가 네 사진을 이렇게 찍고 있는 건데.”
“...그게 무슨 말이야?”
“아무것도. 그냥 해본 말이야. 그리고, 사진을 남겨놔야 나중에 이런 일도 있었구나, 하면서 회상할 수 있잖아? 남겨지지 않고 그저 잊혀지는 과거가 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잖아.”
글쎄... 난 잘 모르겠어. 흘러가면 흘러가는 대로 잊혀지는 거 아닌가. 뒷말은 속으로 삼켜냈다. 여루는 아직도 손을 놓고 있지 않는 주현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입을 열었다.
“─주현아.”
“응?”
“그럼 너도 사진 찍어.”
“...어?”
“나만 찍는 건 불공평하잖아. 그리고 추억이라며. 추억 속에 나만 있으면 쓸쓸하지 않겠어?”
“......”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게 너무 웃겨서 픽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정신을 차린 듯 주현이 크게 벌어진 눈을 떨며 의외라는 듯 말했다.
“그래... 그렇지. 그럼 지금 같이 한 장 찍을래?”
“그러던가. 대신 이번만이야.”
셀카 구도로 카메라를 들어 올리고 주현이 여루의 어깨를 감싸며 더욱 바싹 붙었다. 여름이라는 계절로 달아오른 뜨끈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리고, 특유의 청량한 향도. 오늘도 그 향수를 쓰는 걸까. 아니면, 늘 쓰는 샴푸 냄새일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주현이 렌즈를 바라보라는 듯 어깨에 얹은 손을 움직여 뺨을 살짝 두드렸다. 버튼이 눌리고, 촬영음이 들렸다. 미소는 짓지 않았다. 너무 부자연스러워 보일까 봐.
여름의 추억이 이렇게 또 하나 남겨졌다. 그리고 이때의 사진은, 미래의 숙소에 있는 주현의 방바닥 어딘가에 다른 사진들과 함께 널브러져 있을 것이다. 물론 여루의 발가락 지문이 덕지덕지 묻은 채로.
추억이 먼지가 되어 굴러다녔다. 카메라가 찍은 것은 추억이 아니었다. 과거의 잔흔이었다. 그리고 피사체는 언제나, 늘 같은 사람이었다.
눈을 감아보자. 세상이 어둠에 잠긴다. 다시 눈을 떴을 땐, 같은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한 쌍의 눈동자가 찍어낸 세상이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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