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실패한 사랑꾼 또는 잊혀진 소설가 (4)
1차 HL 자캐 CP 주현여루
본명을 필명으로 쓰는 비주류 소설가. 이제 그의 손이 활자를 연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그의 심상 세계가 현실로 다시 녹아드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고 나서 절필했다. 그렇게 들었다. 적어도 그녀가 살아 숨 쉬는 동안에 아버지의 이상이 재차 실현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기에. 째깍째깍. 시침이 5와 6 사이를 가리키고. 모두가 빠져나가고 이제 도서관에는 어둠이 그윽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소연이 미리 언질해두었는지, 사서 선생님은 퇴근하신 후였다. 워낙 도서관 단골손님인 고전문학부이다 보니, 도서관 문 잠그는 법 정도는 여러 번 해봤을 테니 우리에게 맡긴다는 의미였다. 소연이 유리문 근처에 서성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채주현은 여전히, 가만히 서서 제게 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제 가자, 여루야.”
주현의 시선이 순간 제가 손에 든 책 쪽으로 물끄러미 향했다. 그리고 살짝 눈웃음치듯 움찔하는 눈 밑 애교살.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태도였다. 여루가 주현의 시선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그 자신이 눈치챘는지 한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 책, 내가 빌려 가도 될까.
“...아니. 이건 안 돼. ...다음에 나 없을 때 알아서 빌려 가.”
“응. 알았어.”
모든 고민 없이 내뱉는 순응. 여루는 아버지의 책을 제자리에 꽂아 넣고는 주현, 소연과 함께 도서관을 잠그고 어둠 속에 잠기기 시작한 교내를 빠져나왔다. 오늘의 긴 하루가 저물었다.
*
“여기.”
여루는 제게 내밀어진 프린트로 시선을 내렸다. ‘독서감상문’. 주현이 고전문학부 과제인 감상문을 부장인 자신에게 냈다. 여루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서 들다 책 제목을 보고 흠칫 놀랐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종이를 갈무리한다.
“그래도 시일 내에 내긴 했네.”
“응.”
“…?”
주현이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 같기도 했다. 그러나 여루는 그가 제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아무렇지도 않은 척, 또 무시하고 마는 것이다.
여루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쉬는 시간이라 그런지 교실은 와악와악 아이들의 소리로 시끄러웠다. 그 혼잡함 속에서 홀로 제출된 독서감상문들을 정리했다. 책 제목들이 스쳐 지나간다. … <총균쇠>, <앵무새 죽이기>, <장미의 이름>, …
<최초의 벼락이 서 있는 항구>.
멈칫. 종이들을 넘기다 손이 머뭇거렸다. 아버지의 소설. 주현의 감상문이었다. 결국 빌렸구나. 내용이 궁금했지만 굳이 읽어보지는 않았다. 그저 태연한 척 제일 뒤쪽으로 프린트물을 정리하고는 한데 모았다. 변명하자면 그녀는 부장으로서 감상문을 감독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감사하게도 고전문학부 부장을 자진해서 맡아준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그것을 넘겼다.
그 책에 대한 주현의 감상을 읽는다 해도, 읽지 않는다 해도. 내가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버지의 세계는 이미 자신에게 있어서 지나간 과거의 그림자 중 하나이기 때문에. 실패한 사랑꾼의 이야기는 더 이상 그녀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지금의 여루는 몇 번인지도 모를 자살 끝에 재시작하는 삶을 살아가는 중이었다. 그래, 아버지의 세계가 전부였던 소녀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트라우마와 함께, 기억 속 잔해더미에 묻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파헤쳐 꺼내는 일은 영원히 없으리라.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복도를 걸으며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고 꽃점을 세듯 중얼거려 본다. 내가 양손에 가진 도구의 수는 짝수이니 답은 정해져 있다만, 그런데, 아니, 나는 사실──
궁금했다. 미쳐버릴 정도로.
“──선생님. 죄송한데, 감상문 다시 가져가도 될까요? 제가 확인 못한 게 있어서.”
네게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겹쳐 보는 내가 너무 싫어서. 너 또한 실패한 사랑을 할 거라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확인해야 했다.
“<나의 본성은 선하지 않다. 그러니 내가 저들을 심판의 이름 하에 처단하는 걸 용서해주소서.>”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본 것은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혀있던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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