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암행어사
유비는 일단 따라서 박수를 치며 사람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살폈다.
겁에 질린 듯 표정이 굳은 사람은 의외로 적었다. 저런 뻔하고 흔한 선동에 넘어가 간절하게 호응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외계인들은 우리의 교주님이신 대현량사 장각에게 그들의 뜻을 전하고 잠시 돌아갔으나, 대신 그들의 힘을 내려주고 갔습니다. 대현량사께서 세상을 정화하고 교화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길을 열어드립시다!”
“외계인 무기 얘기야.”
관우가 유비에게 속삭였다. 함성에 묻혀 주위엔 들리지 않았다.
“저 연설가 주위엔 없어. 근거지나 상급자를 찾아야 해.”
유비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동안 연설가는 교주님이 내려준 가르침이라며 생활 수칙 같은 것을 몇 가지 구호로 외쳤다.
“하나! 혼란에 빠져있지 말고 대현량사의 영도를 따른다!”
“하나! 자신의 처지에 감사하고 남의 것을 약탈하지 않는다!”
“하나! 물자와 음식은 계획성있게 보존하고 나눈다!”
다른 사람들처럼 따라 외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유비는 점점 질색하는 기색을 감추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저 연설에서 교주님이니 외계인의 높은 뜻이니 하는 구절을 빼면, 자기가 탁현 사람들에게 호소했던 것과 거의 똑같은 내용이었다.
“언니, 괜찮아?”
장비가 옆에서 콕콕 찔렀다. 유비는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관우는 불안해져서 주의를 의식했다.
큰 키와 엄청난 풍채 덕에 그는 언제나 눈길을 끌었다. 지금도 누런 두건 두른 사람들이 관우를 주목하며 자기들끼리 수군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그 옆에서 파리한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유비도 눈에 띌 게 뻔했다.
누런 띠 두른 사람 몇이 작은 머그컵과 떡 조각을 사람들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관우는 이만 자리를 피하고 싶어졌지만 먹을 것을 나눠주자 사람들은 더욱 모여들었다.
“교주님은 청주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저희를 보내셨습니다.”
자비로운 듯이 말하며 누런 띠의 인물들이 유비 관우 장비 앞까지 왔다. 유비는 겨우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낯빛은 여전히 파리했다.
“실례지만 이 분은 몸이 불편하신가요?”
떡 쟁반을 든 황건군이 유비를 빤히 바라보았다. 유비는 그냥 끄덕거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공황장애가 있어서, 이렇게 갑자기 발작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요새는 약도 없고......”
“그렇군요.”
황건군이 콜록거리는 유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가 담긴 머그잔과 떡을 내밀며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잘 오셨습니다. 저희 교주님께는 외계인들에게 이어받은 신비한 힘이 있으니, 그런 병도 금방 고쳐주실 겁니다.”
“예?”
세 사람이 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교주님이 청주에 계세요?”
“아, 그건 아닙니다만, 그분께 힘을 나눠받은 우리 방주님이 대신 치료해주실 겁니다.”
“예. 꼭 만나뵙고 싶네요.”
유비가 두 손을 모아쥐었다. 창백한 얼굴에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지요.”
황건군의 졸병은 자원봉사자처럼 친절하고 다정한 얼굴이었고 유비는 아픈 몸을 의탁할 자리를 드디어 찾아 안도한 사람 그 자체로 보였다.
관우는 유비를 부축하는 척 표정을 살피다가 장비를 보았다. 장비도 겉으로는 간절한 표정이 되어 황건군에게 매달렸다.
“정말 치료받을 수 있는 거죠? 우리 언니 꼭 좀 살려주세요.”
“물론입니다.”
황건군도 여전히 친절한 표정으로 유비 일행을 안내했다.
세 사람 모두 외모는 전혀 닮지 않았음에도 아무 질문도 받지 않았다. 입양이든 생활동반자 결연이든 본인들 합의 하에 가족이 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었다.
한쪽에 큰 트럭이 세워져 있었다. 누런 깃발이 둘러져 있고 ‘인간들의 치세는 끝났다!’, ‘외계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라!’ 등의 구호가 적혀 있었다.
세 사람은 트럭의 짐칸에 황건군 몇과 함께 타고, 두 명의 황건군은 운전석과 조수석에 탔다. 워낙 자연스럽고 익숙한 광경이라 세 자매는 이상한 점을 얼른 깨닫지 못했다.
차에 시동이 걸리고 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기름 넣은 거예요, 이거?”
장비가 깜짝 놀라 곁의 황건군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그런 허망한 것에 기대지 말라는 게 외계인들과 우리 대현량사 장각님의 가르침인걸요.”
누런 띠 두른 남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트럭 아래쪽을 가리켰다.
“조심해서 내려다보세요.”
장비는 남자가 가리키는 대로 아래쪽을 보았다. 희미하게 누런빛이 엔진 부근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처음 사람들의 눈에 모습을 드러낸 UFO도, 외계인들이 휘두른 무기의 광채도 다 저런 누런색이었다.
“외계인들은 우리 교주님을 선택하시고 그들의 뜻을 전파하기 쉽도록 여러 가호를 내려주고 떠났습니다. 그 중 하나가 전지처럼 쓸 수 있는 저 성물이지요. 방주님이 성물을 내려주시면 마치 화석 연료가 넉넉하던 때처럼 활동할 수 있습니다.”
장비가 대답 없이 아래쪽만 계속 내려다보는 걸 그 남자와 다른 황건군들은 감탄하고 압도되어서 그런 거라고들 납득했다.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장비는 유주에서의 승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유주에 수력발전소와 태양광 발전소가 있으므로 세 자매뿐 아니라 모두가 황건군도 유주를 중시하리라고 생각했었다.
외계인 무기도 몇 개 없었고 생각보다 쉽게 무너진 것이 자신과 관우의 활약 덕분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실제로 황건군엔 다른 동력원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자급자족에 성공하고 안정된 유주보다 훨씬 혼란에 빠져있는 청주에 더 많은 군대와 무기, 동력원까지 보낸 것이다.
유주에 침략해온 정원지도 전차 한 대를 움직였지만 그것은 보통의 석유로 움직였었다.
외계인들은 주로 유전이나 정유소 등을 털었기 때문에 소규모 주유소나 비상용 발전기 등에 보관된 적은 양의 기름들은 도리어 보전이 되었다. 신도들에게서 그런 기름을 모아 전차를 돌린 것이었다.
침략 이전만 해도 청주가 유주보다 더 번화하고 인구도 많은 주였다.
이대로 청주를 황건군이 완전히 집어삼키고 외계인의 ‘전지’를 보급한다면, 청주는 황건군의 전초기지로서 위협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트럭은 대형 쇼핑센터에 도착했다.
실내주차장 5층에 트럭을 세우고 사람들이 내렸다. 유비 관우 장비도 얌전히 따라 내렸다.
외계인의 전지도 아낌없이 쓸 수 있는 건 아닌지 쇼핑센터 5층까지는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고 6층과 7층만 환했다. 7층 건물에서 6, 7층만 가동하는 이유는 그곳에 컨벤션 센터가 있어서 사람들을 모으기 좋기 때문이었다.
제법 직책이 높아 보이는 황건교도가 이들을 맞으러 나왔다. 셋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 관우이기 때문에 그가 먼저 나서서 가짜 신분을 댔다.
“저는 장생이라고 하는데 침략 전엔 모델 일을 했었죠.”
“침략이 아니고 계도입니다.”
그 황건교도가 점잖게 관우의 말을 고쳐주었다.
“외계인들은 우리 지구인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해 매를 들고 찾아왔던 것입니다. 아이를 훈육하기 위해 장난감을 높은 곳에 감추거나 간식을 주지 않는 것과 같지요.”
제대로 된 보호자라면 장난감을 뺏기 위해 아이를 죽이지 않을 것이고 간식을 안 주려다 굶기는 일도 없을 것이다. 외계인의 침략으로 군인들이 숱하게 죽었고 화석 연료가 사라지면서 또한 많은 노약자와 환자가 죽었다.
그렇게 대꾸하는 대신 관우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다행히 그들은 위대한 메시지를 귀담아듣는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살 길을 주고 갔습니다. 친구분의 병도 우리의 가르침에 귀의하면 깨끗이 나을 것입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유비가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이건 계속 약을 갖고 다니면서 비상시마다 먹어야 하는 병인데요? 그렇게 깨끗이 나을 수 있어요?”
“무지몽매한 지구인들의 의료수준으로야 그렇지요. 외계인들이 저희 대현량사 장각님께 내려주신 지혜로 그런 어지럼증 같은 건 한 번에 치료가 가능하답니다.”
‘난 공황장애라고 했지 어지럼증이라고는 안 했는데.’
유비도 그 병을 잘 아는 건 아니었다. 그저 대학 때 친구 하나가 공황장애로 고생했었기에 겉모습을 약간 흉내 낼 수 있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어설픈 연기가 금방 들통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여기 유비의 연기를 눈치챌 수 있을 만큼 공황장애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굉장하군요.”
겉으로 기쁜 듯 끄덕이고 유비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사람과 이야기하는 사이 누런 띠 두른 사람들이 세 자매를 에워싸는 구도로 모여들었다. 겉으로는 다정해 보일 만큼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지만 다들 키도 크고 건장했다. 나이도 젊었다.
‘역시 가려 뽑힌 인물들이야. 군인이나 경비업체 출신들을 골라 방주 근처에 배치했어.’
청주로 오기 전 황건교의 조직을 조금 배웠다. 자칭 ‘태평도인’, ‘대현량사’라 하는 장각이 장보, 장량 두 동생과 함께 전국에 36방을 거느리는데 큰 방은 1만여 명이고 작은 방도 6, 7천여 명은 되었다.
그렇게 수가 많으니 방주 가까이에는 인재들이 있을 터였다.
유비가 경계심 많은 동물처럼 그들을 훑어본 것도 이미 감지한 것 같았다. 안 그런 척은 포기하고 대신에 다시 파르르 떨었다.
“저, 저어.......발작했을 때는 이렇게 사람 많은 장소는 무서워요.”
“아, 그러십니까?”
몇 사람은 친절한 태도를 잃지 않고 물러났다. 그러나 덩치 큰 남자 한 명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거기. 장생 씨. 모델이었다고요?”
“예.”
관우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혹시 예전에 쓰던 명함이 있습니까?”
“그런 건 예전에 화로에 넣어야 했습니다. 땔감이 부족해서요.”
이번에도 생각해둔 대로 답했다.
“신분증은 있습니까?”
“고향에서 폭동이 났을 때 지갑을 잃어버렸습니다. 재발급해 줘야 할 관청도 불에 타버렸습니다.”
신분증을 정교하게 위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준비한 변명이었다. 유주 외의 지역에선 흔히 벌어지는 일이기도 했다.
역시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그 남자가 관우의 귀걸이 구멍 없는 귓불을 노려보다가 갑자기 팔을 휘둘렀다.
관우가 더 빨랐다. 남자의 낭심을 걷어차고 휘두른 팔을 잡아 그대로 비틀어 꺾어버렸다.
장비는 벨트 속에서 줄자를 잡아뽑으며 한 바퀴 돌았다. 처음부터 잡아뽑은 상태로 벨트 속에 숨겨왔던 금속제였다.
황건교도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유비는 그들이 태세를 고치기 전에 걷어차고 쓰러뜨렸다.
한 명이 욕을 하며 총을 꺼내들어 관우를 겨누고 쏴버렸다.
“역시 총이 있었군.”
자동권총의 섬뜩한 소음에 모두들 주춤했으나 관우는 멀쩡히 서 있었다. 그의 손엔 외계인의 에너지 방패가 들려 있었다.
유비, 장비도 그의 뒤로 물러났다. 누런빛을 내는 외계인의 무기가 적을 감싸고 있는 광경에 황건교도들은 말문이 막혔다. 그들 중엔 외계인 무기를 지닌 이는 없었다.
유주에서 노획한 무기를 제대로 쓰기 위해 세 자매는 밤잠도 아껴가며 연구하고 연습했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은 세 자매도 몰랐기 때문에 관우도 속으로는 난감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유비가 썩 나섰다.
“듣던 대로 나태하고 안이하기 짝이 없구나! 이런 서툰 연기에 속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방주님의 코앞까지 데려오다니! 청주가 벌써 다 점령된 줄 아느냐?”
권총 든 자와 그 곁에 모인 자들이 모두 흠칫 놀랐다.
유비는 차가운 얼굴로 가장 먼저 관우에게 팔이 꺾여 나뒹군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놀라울 만큼 거만해 보였다.
“내 아우의 위장을 꿰뚫어보기에 그래도 건질 자가 있는가 했더니, 그래봐야 대처를 못하니 무슨 쓸모가 있나?”
“죄송합니다.”
침략이 외계인의 계도라고 말했던 황건교도가 급히 고개를 숙이자 나머지들도 모두 따라했다.
“어르신들이 오신다는 말씀을 미처 듣지 못해 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살펴 주십시오.”
“암행어사가 미리 알리고 오면 그게 암행어사인가?”
유비는 뻔뻔하게 받아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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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關羽)의 자(字)는 운장(雲長)이지만 정사에 따르면 본래 자(字)는 장생(長生)이라고 합니다. 고향을 떠날 때 고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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