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몽

10. 유비의 손가락

“대현량사님의 말씀을 가져왔는데 방주란 자가......”

“저는 방주가 아닙니다.”

그가 서둘러 변명했다. 유비는 여전히 거만한 말투로 추궁했다.

“방주님은 그럼 어디 계신가?”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자가 90도 각도로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자동권총 들었던 자에게 눈짓하자 그자가 황급히 안쪽으로 달려들어갔다.

“방주님은 곧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세 자매에게 손님용으로 원래 여기 비치되어 있던 소파를 권하고 본인은 옆에 웨이터처럼 섰다. 다른 누군가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매점으로 달려갔다. 오징어 버터구이 기계가 켜졌다.

“오징어가 있나?”

유비의 태도를 흉내 내듯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은 장비가 물었다.

“청주는 바다에 닿아 있지 않습니까.”

황건교도가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예전만은 못해도 해산물이 조금은 나온답니다. 어떻게든 잡기만 하면 가격은 전보다도 훨씬 비싸니까 도리어 열심히들 방법을 찾아서 잡아다 파는 거지요. 말린 오징어 정도는 쉽게 썩지도 않으니까요.”

“그럼 어부들은 뭘 화폐로 쓰는 거지?”

유비가 반사적으로 눈을 빛냈다. 탁현은 내륙이지만 유주도 바닷가에 접해있는 건 마찬가지라 더욱 궁금했다.

“곡식이나 옷으로 받더군요.”

‘아차, 지금 난 사명감에 쫓기는 탁현시 의원이 아니지.’

연기에 빈틈이 보일까봐 유비는 얼른 헛기침을 하고 보다 거만하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청주의 어업과 해산물 유통 실태는 이 황건교도들을 다 내쫓고 청주 지사에게 물어봐도 늦지 않았다.

“아직 해안선까지 우리의 세력이 닿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입니다.”

“그렇겠지.”

처음 받은 인상에 비하면 아부에도 소질이 있어보이는 그들의 말을 적당히 흘려들었다. 어차피 중요한 건 방주였다.

아까 사라졌던 사람이 되돌아왔다. 곁에는 길고 화려한 전통 복장의 중년 남성이 있었다.

황건교도들은 위계가 올라갈수록 평상복보다 고풍스런 전통 복장을 선호하는 것 같았다. 이제 와 누런색으로 염색한 옷을 구하지는 못해도 최대한 고풍스런 옷을 입고, 그러지 못하면 노란 색으로 맞춰 입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 남자가 과장되어 보일 만큼 정중하게 절했다.

“방주님은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저는 시민들의 마음을 모으기 위해 그분을 대신하여 이곳에서 활동중이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이 말은 허풍이 아닌 사실이었다. 유비도 청주 전체에선 한참 변두리인 여기에 몇 천 명을 거느리는 방주가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운이 좋구나. 네가 방주라고 대답하면 누구 앞에서 거짓말을 하려 들었는지 똑똑히 가르쳐주려 했는데. 방주는 지금쯤 최전방에서 대현량사의 뜻을 받들어 싸우고 있겠지?”

“예. 하지만 귀한 손님이 오셨다고 무전 연락을 넣었습니다. 곧 오실 겁니다.”

“그럴 것 없다고 전해라.”

유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관우와 장비도 따라 일어났다.

“이 전쟁은 대현량사와 외계인들의 뜻인데 그분을 따르는 내가 방해할 수는 없지. 직접 그리로 가서 만나뵙겠다.”

“예.”

대답은 이제까지처럼 잘 나왔지만 당황하는 기색들이 분명히 느껴졌다.

이유는 짐작이 갔다. 방주는 이 변두리에 없을 뿐 아니라 최전방에 있지도 않은 것이다.

그새 다 구워진 오징어를 가져온 황건교도가 슬쩍 눈치를 보다가 접시를 내밀었다.

“아무튼, 이렇게 오셨는데 아무 대접도 못해드리면 저희가 방주님께 벌을 받습니다. 좀 드시죠.”

유비는 잠깐 망설였다. 요즘 음식을 사양하는 건 감히 누릴 수 없는 사치이고 음식을 버리는 건 천벌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아사라는 천벌.

하지만 이 황건교도들이 이렇게 쉽게 굽실대는 건 유비가 자신 위에 장각밖에 없다는 듯 거만하게 굴고 있어서였다.

“뭐, 가끔은 이런 것도 좋겠지.”

장비가 먼저 몸을 삐딱하게 내밀어 그 접시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유비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래. 맘대로 해.”

내 동생이지만 가끔은 일진 흉내를 너무 잘 낸다고 생각하며 유비가 손짓했다. 그 모습이 황건교도들에겐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세 자매는 다시 주차장으로 안내되었다. 이번엔 트럭이 아닌 고급 승용차에 태워주었다.

‘이놈들 외계인 전지를 대체 얼마나 갖고 있는 거야?’

장비는 자기 손에 들린 버터구이 오징어를 내려다보았다.

극장 체인의 로고가 찍힌 다회용 플라스틱 접시였다. 기계와 마찬가지로 극장에 있던 것을 그대로 접수해서 쓰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접시는 설거지해서 계속 쓸 수 있다. 가볍고 깨지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매점에선 전에도 도자기 접시나 머그잔보다 더 많이 쓰였다.

테이크 아웃 용 종이컵이나 종이봉투는 침략 후 더 이상 생산이 불가능해지면서 지금은 플라스틱보다도 귀해져 버렸다.

장비는 오징어다리 하나를 집어 입에 물고 천천히 씹었다.

그는 원래 이런 군것질거리에 까다로웠다. 어느 가게는 버터 향이 더 진하고, 어느 가게는 더 싱겁고, 나름의 기준을 세워 거기에 미달하는 가게는 절대 가지 않았다.

극장은 문 닫은 지 줄잡아 2년이 넘었을 것이고 본래 저 매점에서 팔던 조미료와 레시피도 사라진 지 오래일 터였다. 이 오징어는 서툴게 소금과 마요네즈만 뿌렸다.

그런데도 오랜만에 먹는 오징어는 너무 맛이 좋았다.

‘전에 집 앞 골목길에서 팔던 풀빵 다시 먹을 수 있을까. 그거 단팥이 정말 본 중에 제일 많이 들었었는데. 타꼬야끼는 시청 앞이 제일 괜찮았고.’

그때는 혼자 다 먹고 싶어 유비 몰래 사먹거나 뺏어먹은 적도 있었다.

지금 그랬다간 의절당해 마땅한 인간쓰레기가 될 것이다. 장비는 유비와 관우에게도 접시를 돌렸다.

‘콩 한 쪽도 나눠먹는 사이 같은 거 전혀 좋지 않아.’

유비 언니가 오랜만에 군것질거리를 입에 넣고 있으니 자신까지 속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영화관 오징어쯤 홀랑 뺏어먹고 내빼던 시절엔 유비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이보다 훨씬 맛있는 간식도 내키는 대로 사먹을 수 있었다.

길은 전혀 막히지 않았다. 신호등도 옛날에 다 사라져 버려서 거칠 것 없이 씽씽 달렸다.

유비는 창 밖을 살피며 오는 길에 본 지도를 떠올렸다. 큰 건물마다 누런 기가 내걸려 있고 황건교의 교리를 외치는 자들이 있어 벌써 황건교가 청주를 다 점령해버린 것 같았다.

‘관공서 옆은 한 번도 지나가지 않았어.’

애써서 스스로 용기를 북돋웠다.

‘관공서 위주로 저항하고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일부러 그런 곳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청주 전체가 다 노랗게 물든 척 할 수 있을 거야.’

점심때가 훌쩍 지나서 차가 어느 호텔 앞에 섰다. 역시 누런 깃발이 나부끼는 것이 보였다.

‘점심은 먹고 가자는 건가?’

“다 오셨습니다.”

황건교도들이 여전히 공손한 태도로 유비 일행을 안내했다. 호텔 1층은 마치 영업중일 때처럼 불이 환했다.

“외계인들이 내려주신 힘을 너무 헤프게 쓰고 있는 것 아닌가?”

관우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 불빛은 호텔 지붕에 원래 설치되어 있던 태양광 발전기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면 암행어사들이 만족할 거라고 한 치도 의심하지 않는 태도로 황건교도가 설명했다.

“이 호텔의 주인은 일찍 우리에게 감화되어 가진 모든 것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니 그의 성의를 받아주고 있는 것이지요.”

관우는 그 호텔 주인이 정말 자발적으로 다 내놓았는지, 혹 목숨까지 내놓지는 않았는지 매우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거기까지 추궁했다가 황건교도답지 않은 소릴 한다고 의심받을까 두려웠다.

‘이런 게 자연스러운 집단이라니 수준을 알 만 하군.’

독도법을 제대로 배웠던 덕으로 관우는 유비보다 지도를 더 잘 외우고 있었다. 이 호텔이 청주 정부청사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자신들이 처음 도착했던 변두리와는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도 금방 가늠이 되었다.

여기는 정부청사에선 비교적 가까웠으나 유주군의 참모진이 짚어주었던 군사시설들에선 꽤 멀었다. 즉 후방이었다.

‘용맹무쌍한 방주로군.’

세 사람은 곧장 식당으로 안내되었다. 호텔 주방이 어느 정도까지 기능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인테리어는 이전 그대로 거의 훼손되지 않아 우아하고 호화로웠다.

“방주님도 곧 나오실 겁니다.”

“아니, 됐어.”

유비가 손을 내저었다.

“그도 우리 얼굴 보면서 밥 먹고 싶진 않겠지. 우리도 여기까지 난민 행세하고 오느라 피곤하거든? 어디 보자.......”

유비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쪽 벽에 고풍스러운 괘종시계가 서 있었다.

“한 시간 후에 보겠다고 전해.”

“옛.”

대답에 유난히 힘이 들어갔다. 계속해서 가차없이 몰아칠 줄 알았는데 한 시간이나 더 여유를 주었으니 방주는 좋아할 것이다.

황건교도들이 물러가고 테이블에 잠시 세 사람만 남자 관우가 유비에게 속삭였다.

“괜히 반격할 기회 만들어주는 거 아냐?”

세 사람의 무장은 기실 옷 속에 숨겨올 수 있을 만큼 작은 외계인 방패를 둘, 거기에 평범한 삼단봉을 하나씩 가져왔을 뿐이었다. 쇠파이프는 가져오지 못했다.

“방심하게 만들려는 거야.”

유비도 마주 속삭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 사람을 안내해온 이들은 식당 밖으로 나갔고 여기서 맞이한 황건교도들은 냅킨과 물컵만 갖다준 뒤에 역시 멀찍이 물러나 있어서 엿들을 걱정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도 이제 구체적인 작전이 필요해. 여기까지 왔으니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야지.”

잠시 후 수프와 포도주가 나왔다. 적당히 고기와 채소를 끓여 만드는 수프는 침략 후 유주에서도 흔한 음식이 되었으나 이 접시에선 버터와 파슬리 향이 진하게 났다.

뒤이어 나온 스테이크 역시 좋은 소를 골라 잘 숙성시킨 고급 고기라는 걸 장비는 쉽게 알아보았다.

‘진짜 짜증나는 놈들이네.’

오랜만에 먹어보는 고급 등심이었지만 세 사람 모두 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최상층의 라운지로 안내되었다. 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여기는 햇빛이 실내 안쪽까지 깊숙이 들어오도록 설계되어 낮에는 조명 없이도 환했다. 전부터 수경재배되고 있던 식물들 역시 청량한 녹색 잎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어서들 오십시오.”

방주는 나이 오십쯤 되어보이는 남성이었다. 웃음 띤 얼굴은 대단히 인자하고 후덕해 보여서 황건교를 잘 모른 채 만났다면 깜박 좋은 사람이라고 속을 것 같았다.

‘사기꾼은 원래 절대 사기꾼처럼 보이지 않는다더니.’

“대현량사께서 직접 보내신 특사들인 줄 몰라 뵙고 천한 것들이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사극에서 배운 듯 과장된 말투가 거슬렸으나 유비는 일단 맞춰 주었다. 그가 권하는 대로 푹신한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그래, 청주 공략은 잘 되어가는 중인가?”

“물론입니다.”

방주가 웃음 띤 얼굴로 설명했다.

“정부청사만 손에 넣으면 지사를 사로잡고 항복을 받아낼 수 있습니다.”

“다른 군부대나 부지사, 시장 등은?”

“각지 시장들이라면 이미 달아나거나 투항한 지 오래입니다. 남은 건 주지사와 청사에 남아있는 몇몇 요인들뿐입니다.”

방주는 허풍을 떠는 기색이 아니었다.

“군대도 탈영이 줄을 잇는 중이고요. 그러니 청사 앞 바리케이드와 거기 포진한 방위군만 무너뜨리면 됩니다.”

“역시.”

유비가 고개를 깊이 끄덕이고 관우 장비와 눈빛을 교환했다.

“과연 대현량사의 혜안이 틀리지 않았군.”

“그렇지요?”

치하의 말을 듣는다고 생각한 방주의 얼굴이 풀어졌다.

“청주에 온 지 이제 겨우 하루 좀 지났지만 상황은 다 파악했다.”

유비가 방주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일단 여기까지 오는 동안 받은 대접 말인데. 첫째로, 내 아우의 변장을 꿰뚫어본 그곳. 너무 허술했다. 일반인이 아니란 걸 눈치채면 뭐 하나? 그렇게 쉽게 다들 쓰러지는 것을.”

“그건 세 분의 힘이 워낙 세고, 게다가 대현량사께 받은 무기까지 지니고 계시잖습니까.”

“그리고 둘째로.”

유비가 두 번째 손가락을 꼽았다.

“거기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은 리무진을 탔지. 그리고 이 호텔에서 먹은 점심. 솔직히 근사했어. 전에 언제 이런 걸 먹어봤더라 싶을 정도로.”

“그렇지요?”

“그리고 여기. 이 최상층. 단순히 방주가 묵으면서 지휘하기 위한 거라면 이렇게 초호화판 건물에 투숙할 필요 없잖아? 엘리베이터까지 타면서?”

드디어 칭찬이 아니란 걸 깨달은 방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황건교의 미래를 비추는 데 써도 모자랄 전기를 네 사치에 써?”

유비가 기울이고 있던 몸을 튕겨 일으키며 방주에게 손가락 둘을 내질렀다. 눈을 노리고.

“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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