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스파이 세 자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물론 변장이었다.
유비는 지급받은 군복 대신 가져온 평상복을 입고 핸드백을 들었다. 그것만으로 지나가는 민간인 1이 되었다.
관우는 길고 숱 많은 까만 머리 덕에 당장 군인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사롭지 않은 체격과 외모는 굉장히 눈에 띄었다.
“차라리 화장하고 한껏 꾸민 다음에 실직한 모델이라고 할까? 먹고 살 길이 없어 황건교에 투신한다고 하면......”
장비의 시선이 관우의 길고 굵은 팔다리, 커다란 손발에 머물렀다.
“......어디 가서든 막노동이라도 해서 잘 먹고 잘 살 것 같다. 안 되겠어.”
“아니, 설득력 있어.”
유비가 관우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질하듯 쓸었다.
“스포츠용품 쪽 전문 모델이었다고 하면 건장한 게 당연하고, 반듯한 걸음걸이나 곧은 허리선도 군대 규율이 아니라 모델워킹이 몸에 배어서 그렇다고 변명할 수 있어. 그리고 내내 모델로 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막노동 하는 거 말처럼 쉽지 않아.”
유비는 탁현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해야 했던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그들의 지원서를 다시 읽어보았다. 대부분 외계인 침략 이전엔 남부럽지 않은 직장에 다니며 잘 살던 사람들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두드리며 일하고 월급은 은행 계좌에 전산상의 데이터로 받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어 쓰레기 주우러 다니는 게 쉬울 리 없었다.
모델도 체력과 엄격한 수련을 요하는 직업이었다. 선거 포스터에 쓸 사진 찍고 유세차량 위에서 카메라 의식하면서 유비는 그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나 외계인 탓에 사회는 하루아침에 망해버렸고 광고도 멋진 사진도 다 가치를 잃어버렸다. 생계뿐 아니라 이전까지의 자신의 가치를 송두리째 잃은 기분일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침략 후에 더 막중한 사명감을 띠게 된 유비, 자영업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잃지 않은 장비와는 달랐을 것이다.
“그동안 물어보기가 좀 그랬는데, 군대 그만두고 나서는 어떻게 살았어?”
“파트타임 하면서. 자리잡기가 좀 힘들었어.”
관우가 자기 평상복을 걸쳤다.
“유주로 이사 온 것도 마음 좀 다스려볼까 해서였고. 여기 와서는 학원 체육 강사를 했어. 침략 후엔, 다들 하는 플라스틱 수집.”
“플라스틱은 앞으로 점점 더 귀중해질 거야.”
의원 자격으로 플라스틱 수집을 나서서 장려했던 유비가 변명했다.
“썩지 않고 오염되기 어렵지. 환경 파괴의 주범인데도 근절하지 않고 계속 생산할 수밖에 없었던 건, 썩지 않고 가볍고 튼튼한 물건이 실제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해서야. 그런데 앞으로 다시 생산하는 건 불가능하고, 단단하지만 전혀 파손되지 않는 건 아냐. 분명 머지않아 씻어서 재사용하는 플라스틱조차 귀중해질 거라고 믿어.”
“그래.”
거울을 들여다보던 관우가 유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뭘 그렇게까지 변명하는 거야?”
유비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야......다른 더 급한 일들이 있는데 플라스틱에만 집중할 때냐는 생각, 나도 해봤으니까.”
“플라스틱만 신경 쓴 거 아니었잖아.”
장비가 다독였다.
“식량 문제도 그만하면 잘 수습했고. 하루아침에 실업자 된 사람들한테 그런 일이라도 주는 편이 더 나았잖아? 그냥 넝마주이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저축이라고 앞장서서 외치고 다니던 사람이 뒤에선 이렇게 쫄아 있기야?”
“그치만 내가 미래를 보는 초능력자도 아니고.”
여전히 우울한 얼굴로 유비가 우물거렸다.
“혹시라도 내가 틀렸으면?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릴 방도는 다른 쪽에 있었으면? 그 사람들을 농장에 보내고 새 농지 개간에 더 주력하는 쪽이 정답이었으면?”
이제 유비의 얼굴은 공포에 물들어 있었다. 침략 후 일 년 넘게 내면에 쌓아온 공포였다.
“진정해, 언니.”
관우가 어깨를 다독였다.
“지금 어느 쪽이 정답이었는지 알 방도는 없어. 역사 배웠으면 알겠지. 어떻게 했으면 더 결과가 좋았을지도 모른다 같은 거, 다 추측의 영역이라는 걸. 잘 한 건지 아닌지는 결과를 봐야 알 수 있는 거야. 그러려면 살아남아야 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유비에게 관우가 약간 화난 목소리로 덧붙였다.
“언니도 사람이고, 실수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어. 황건군이 외계인 무기로 한 방 쏘면 죽는다고. 왜 그렇게 절대로 안 죽을 것처럼 나서는 거야?”
“그치만 민간인이 나서는 게 더 유리해 보이기도 했고......”
“어디가 더 군사적으로 중요한지 더 잘 판단할 수 있는 건 군인이야. 그 인간들 우리한테 자기들 일을 떠넘긴 거라고.”
관우는 쓴 입맛을 다셨다. ‘그러는 너는 왜 아까 장군 앞에서 그렇게 말하면서 반대하지 않았는데?’라고 유비가 대꾸하면 그도 할 말이 없었다.
군생활 얼마 하지도 못하고 쫓겨났건만, 까마득한 윗 계급의 인물들을 다시 마주하니 다시 그들의 졸병이 된 것 같았다. 거기에 괜히 용기내어 고발했다가 치러야 했던 혹독한 대가도 떠올라 저절로 몸이 굳었다.
정신차려보니 유비는 앞장서서 위험한 임무를 자원한 뒤였다.
‘동생 실격이야.’
“미안해.”
유비는 어깨를 움츠리고 관우의 눈치를 보았다.
“너랑 장비 생각도 했어야 했는데. 난......어떻게든 황건군을 빨리 무찌르고 싶어서.”
“거참, 나도 여기서 다 듣고 있거든?”
장비가 양 손으로 유비와 관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차피 누군가는 잡아야 될 놈들 아냐. 나설 의무가 있는 놈들이 안 나서고 뒤에 숨는 거 나도 같잖기는 한데, 우리까지 안 나서면 누가 하겠냐고. 안 그래?”
관우가 피식 웃고 말았다. 유비도 관우와 장비의 눈치를 보다가 배시시 웃었다. 장비도 웃었다.
청주에서 적당히 떨어진 곳에 군부대가 정지했다.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은 거기서 자전거로 청주 톨게이트까지 접근했다.
옷차림뿐 아니라 자전거도 군용이 아닌 보통의 스포츠용 자전거를 탔으므로 겉모습만으로 의심받을 걱정은 없었다. 그러나 이런 시기에 황건군이 들끓는 청주에 일부러 찾아올 민간인이 있을 리 없으니, 세 사람은 일단 주 경계 안까지 몰래 잠입한 다음 원래 주민인 척 하기로 했다.
치안이 불안해졌어도 주 경계를 빈틈없이 차단할 재주는 없었는지 세 사람이 몰래 숨어들 여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어둠을 틈타 전조등을 끄고 도로가 아닌 샛길로 숨어들었다.
민가로 보이는 외딴 건물을 발견하고 일단 그리로 접근했다.
불빛은 전혀 비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집이 비었거나 사람이 다 잠들었다는 증거가 되지 못했다.
집을 둘러싸고 텃밭이 있었다. 처음엔 이랑을 밟지 않으려고 주의하던 세 사람도 이내 그럴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텃밭은 이미 엉망진창으로 파헤쳐져 있어 뭘 심었던 밭인지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담장도 반쯤 무너져 있어 어렵지 않게 현관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마당용 빗자루나 고무 호스 등 이런 데 있을 만한 세간살이도 보이지 않았다.
장비가 혀를 차며 창문을 살펴보았다. 전부 창틀 째로 떼어가서 뻥뻥 뚫려 있었다.
“약탈된 거야.”
관우가 베란다로 걸어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황건군 짓인가?”
“아닐 수도 있지.”
무심코 전등 스위치를 찾으려다가 장비가 손을 내렸다. 이 버릇은 앞으로도 쉬이 고쳐지지 않을 것 같았다.
“청주는 유주보다 치안 유지가 안 되고 있댔지. 강도가 들었을 수도 있어.”
그냥 집주인이 다른 살길을 찾아 떠나면서 전부 챙겨갔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유비는 굳이 말을 얹지 않았다.
치안이 나빠 약탈당했든 야반도주했든 집주인에게는 마찬가지로 끔찍한 일이었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안도할 수도 없는데 헛된 입씨름이나 하고 싶지 않았다.
“잘 됐네. 여기다 자전거 숨기고 가자.”
장비의 목소리도 밝지는 않았다.
“우린 날이 밝기 전에 시가지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냥 타고 가는 게 낫잖아?”
유비가 제안했다.
“여기 사람들도 자전거는 많이 타고 다닐 거야.”
“여기가 유주만큼 평화롭다면 그렇겠지요, 의원님.”
관우가 유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황건군이 점거한 주에서 느긋하게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자전거같이 유용한 물자는 대번에 징발당할걸.”
“악으로 깡으로 걸어가야지.”
장비가 씩씩하게 세 사람 분의 자전거를 집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텅 빈 방 가운데 하나를 열고 자전거들을 넣은 뒤 조심해서 문짝을 도로 닫았다. 문고리와 경첩이 없었다.
“누군지 요령도 없이 쇠토막이라고 무작정 떼어갔네.”
부서진 문을 손으로 더듬어보고 유비가 한숨을 토했다.
“아예 녹여서 재생할 수도 없는데 손상을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모르나?”
“모르나보지. 누구나 언니처럼 ‘어떻게’ 재활용할 것인가 머리 싸매고 공들여 연구하진 못했을 테니까.”
장비도 유비의 머리를 쓰다듬고 다시 집 밖으로 향했다. 여기서 더 얻어낼 게 없으니 빠르게 떠나는 편이 나았다.
유비는 외계인 침략 전에도 환경단체에 몸담았었고 재활용에서 주의할 점도 한계도 숙지하고 있었다. 자문을 구할 전문가들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외계인 침략의 결과가 드러났을 때 패닉에 빠지거나 혼자 살 길만 찾는 대신 최선을 다해 한 명이라도 더 살릴 길, 한 줌의 자원이라도 더 보존할 길을 찾아 잠도 못 자고 연구했다. 지금도 그 고민이 머릿속에 들어차 있으니까 이 캄캄한 빈집에서 저런 소리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역시 유비 언니는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야.’
가로등이 사라진 밤하늘엔 별들만 반짝였다. 장비는 그 별빛에 의지해 시가지 쪽으로 난 도로를 찾았다.
‘그러니까 이런 곳에서 허망하고 호구스럽게 죽지 않도록 내가 챙겨 줘야 해.’
“아, 왜 다들 내 머릴 쓰다듬는 거야? 내가 애야?”
뒤따라 나오며 유비가 투덜거리는 소리에 장비가 피식 웃었다.
옆에서도 같이 피식 소리가 들려왔다. 관우가 장비 곁에서 나란히 유비를 보며 웃고 있었다.
시선을 느끼고 관우가 웃는 얼굴 그대로 장비를 보았다.
장비도 관우를 마주보며 웃었다. 둘째 언니 삼기로 한 결정을 후회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루 넘게 도로를 걸어간 끝에 세 자매는 청주 외곽의 소도시에 도착했다.
주 외곽 지역이라고는 해도 청주는 원래 번화한 주였다. 여기도 시내는 고층건물도 많고 공원이나 광장, 극장도 있었다.
그 위에 쓰레기가 뒤덮여 있고 사람들은 다 도망가 숨어있으리라는 게 세 사람의 예상이었다. 공공기물도 어젯밤 그 빈집처럼 남아나지 않았을 게 뻔했다.
예상은 반만 맞았다. 신호등, 동상, 공중전화 등은 깨끗이 사라지고 전깃줄 한 토막 남지 않았다. 공공건물의 유리창도 뻥뻥 뚫려있었다.
그러나 거리는 도리어 깨끗한 편에 속했다. 낙서나 파손의 흔적도 거의 남지 않았다.
그저 곳곳에 누런 깃발과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을 뿐이었다.
광장에선 누런 두건을 쓴 남자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연설하는 중이었다. 곁에는 봉이나 칼로 무장한 사람들이 따르고, 모여있는 시민들 중에도 노란 손수건이나 옷감 같은 걸 잘라 만든 띠를 두르고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외계인들은 지구를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역시 마이크가 아닌 깔때기 확성기를 쥐고 연설가가 외쳤다.
“지구인들에게 진실을 가르쳐주러 온 것이었습니다!”
세 자매는 누런 두건들의 눈치를 살펴가며 청중들 틈에 끼어들었다.
그냥 지나가다가 끼어드는 사람은 이들 말고도 더 있었고, 황건군 쪽 사람들도 일일이 검문하려 들지는 않았다. 점령군의 눈치를 불안하게 살피는 것 정도는 수상한 행동 축에 들지도 않았다.
“우리는 그동안 온 우주에 인간만이 제일이라 믿고, 마음껏 환경을 파괴하고 다른 동식물을 착취하고, 그 오만을 미덕이라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외계인들은 그 죄악을 단죄하고 교훈을 주기 위해 친히 나타나 우리의 기계 문명을 파괴한 것입니다!”
청중들 틈에서 호응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주로 두건 쓴 사람들이 나서서 선동하는 형식이었으나 노란 띠 없는 사람들 중에도 꽤 적극적으로 박수치거나 함성을 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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