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부모의 마음
물결치는 붉은 머리카락을 한데 말아 올렸다. 끝으로 갈수록 물이 쉽게 빠지는 편인지 아래로 갈수록 금색에 가까운 색상임이 쉬이 짐작 가능했다. 순해 빠진 생김새부터 시작해서 머리카락이나 눈 색 따위의 외형적 요소는 제 아비를 닮았더니, 굽이치는 머리카락이나 끝이 쉽사리 손상되어 색이 달라지는 것은 어미 쪽을 닮았나 보군. 샤뮤에드가 앤서니를 마주하며 한 생각이었다. 샤뮤에드. 그가 본디 짐승인 탓에 인간에 가까운 형태의 이목구비를 구분하는 쪽에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나 하버트가 별 볼 일 없이 털만 곤두세우며 경계하는 소동물이 가깝다면, 앤서니 쪽이 좀 더 날카로운 인상으로 분위기를 휘어잡는 카리스마를 가진 편이리라.
마누라에게 잡혀 살겠군. 심심한 감상이 이어졌다. 홀트의 둘째 아들의 반려이자, 도핀의 어머니. 이 저택의 실질적 주인은 아무래도 앤서니일 것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제게 이런 식으로 당돌하게 나오는 이는 몇 없으니. 그런 면에서 보면 도핀이 제게 겁 없이 구는 건, 성격적으로는 하버트 보다 앤서니 쪽을 닮았을 성싶었다. 처음 이 저택에 입성했을 때는 하버트와의 독대더니 이번에는 앤서니와의 오붓한 티타임이다. 아들을 키울 적에도 이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 거 같은데, 학교에서 자꾸 오라 가라 하며 귀찮게 굴었었지. 그걸 보호자 면담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이것도 그 보호자 면담이라는 것이겠군. 샤뮤에드는 본인이 도핀의 보호자가 아님에도 이 상황을 적당히 자기 좋을 대로 해석했다. 정당한 보호자가 맞은편에 앉아서 찻잔을 들어 차 향을 음미하는 중임에도. 찻물로 가볍게 입술을 축인 앤서니가 입을 열었다.
“도핀은 남들보다 기억력이 좋아요. ‘좋다’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죠.”
“부부는 닮는다고 하더니 쓸데없이 서론부터 쓰고 시작하는 것도 닮았네.”
이어질 대화가 가족이 어떻고, 가문이 그랬고, 아들이 저쩌고, 대가가 어쩌고일 뻔한 이야기라 짐작한 샤뮤에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늘어졌다. 이쪽도 하버트처럼 자신을 살살 달래서 거래의 대가를 다른 것으로 돌리려는 수작이겠지. 뻔한 흐름 아니겠는가. 그래, 뭐 시도는 가상하다. 기특하니 들어는 주자. 그는 느릿하게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카펫에다 찻물을 쏟아버린다. 엄지와 검지의 손가락으로 만들어진 고리 사이에 걸린 찻잔은 찻물 몇 방울을 떨구며 흔들렸다. 명백하게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위에도 앤서니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며 말을 이을 뿐이다.
“당시 마녀사냥이 한창일 때, 마녀로 몰려 화형에 처한 것은 인간뿐 아니라 우리의 동족도 존재했죠. 마녀사냥에서 동족을 보호하기 위해 진리를 찾고 계셨던 아버님은 당신을 만나 지평선 너머를 관측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불완전하다 폄하지만 아버님은 기뻐하셨어요. 불로도 불사도 얻지 못했지만, 아버님이 본 진리를 바탕으로 가문 원들의 수명은 크게 변화했으니까요.”
“그래, 실질적으로 홀트의 목적은 달성되었으니까. 그러니 내가 대가를 요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끽해야 물어서 동족을 늘리던 것들이 이제는 자기네들끼리 교잡하여 새끼를 까는 형국이 될 정도로 홀트의 가문에 속한 ‘뱀파이어’들은 정의가 변화하였다. 피와 햇빛에 대한 제약은 줄어들고 보다 생명에 가까워져 있었다. 물건에 손을 대지 않고 멋대로 움직일 수 있는 초능력이나 오래전 사라진 마법 같은 것을 사용할 수 있는 자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렇게 홀트는 제 가족을 데리고 마녀사냥 속에서 살아남았다. 아니, 살아남다 못해 오히려 더 번성한 수준이었지. 물론 그렇다고 마냥 모든 일이 해결되지는 않아 결국 노화한 홀트는 일선에서 물러나 영면을 준비하고 있겠지만.
“이후부터 간혹 특별한 능력을 지닌 아이들이 태어나곤 했습니다.”
“Oh, dear. 너네 손도 안대고 물건을 휙휙 날려대는 건 옛날부터도 있었잖아? 새삼스러울 것도…. 아하, 그거 말고 말하는 거구나?”
“네, 세간에서는 염동력이라 지칭하는 능력이나 손에서 불을 피워 내는 것 같은 단순한 마법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타인의 생각을 읽거나, 자신이 본 것은 절대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는 것들 말이죠.”
“…. 그래, 네가 하고 싶은 말은. 도핀은 후자다?”
“그렇습니다.”
한쪽 눈을 찡그리며 눈썹을 치켜들고 되물었던 샤뮤에드는 이제 자세를 바로잡았다. 저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아는 것은 홀트가 없는 이상 샤뮤에드, 자신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전지의 전제조건을 충족했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뜻이 가진 무게를 한낱 존재들은 가늠조차 하지 못한다. 전지전능, 그것을 별명으로써 이해하는 이들이니까. 앤서니가 아들의 능력을 온전히 이해한다면 지금 이렇게 평온하게 자신과 대화하지는 못할 것임을 존재로 추락한 짐승은 확신한다.
“문을 어설프게 연 여파가 저런 식으로 간다니.”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제 아들에게 상처 주실 행동을 하지 말아 달라는 뜻입니다.”
“뭐? 기껏 한다는 소리가 고작해야….”
“고작이 아니에요, 샤뮤에드. 망각이 없는 저희의 아들은 당신이 준 상처 또한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 아들에게 상처 주지 마세요.”
“잊지 않고 복수라도 하겠다는 협박이야? 꼴에 아주 우습군.”
조소를 머금고 비아냥대는 샤뮤에드의 말에 앤서니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부모의 마음입니다.”
“부모?”
“당신도 자식을 키워봤다면 알 거예요. 샤뮤에드, 당신이 우리 아들을 데려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저는 당신이 제 아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행위만큼은 막을 생각입니다.”
자식을 키워봤다면 알 거라니, 그거참 우스운 소리가 아닌가. 이건 또 새로운 방식의 선전포고로군. 심약한 느낌의 하버트에 반하여 진중한 감이 있는 앤서니가 어떻게 교잡했나 싶었더니, 이 꼴을 보고 있노라면 부부가 죽이 참 잘 맞았다. 샤뮤에드는 못내 불쾌한 기분을 느꼈던 이유가 '부모의 마음'이라는 말 때문임을 대화가 끝날 때까지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했다.
+ + +
홀트의 저택에서 지낸 지 석 달이 지나가고 있다. 그동안 홀트 가에서 은폐한 미제 사건은 10 건이 넘어갔고, 망가진 가구만 벌써 스무 번은 교체했으며, 심적 고통을 호소하는 사용인들에게 전달되는 위로금만 상당량이었다. 이 모든 원흉인 샤뮤에드에게 항의라도 하려 들면 그는 털이 길어 복슬복슬한 덩치 큰 까만색의 검은 고양이 모습으로 알짱거려 불만을 가진 사람의 속을 더 뒤집어 놓았다. 고양이를 붙잡고 흔들어봐야 분명 전부 알아들음이 분명한데도 돌아오는 대답은 ‘애옹’뿐이니.
메인쿤이 똑똑하고 온화한 성품을 가졌다는 건 누가 한 소리였나. 저 속에 든 게 정말 고양이가 아닌 탓일까. 긴 털이 북실북실한 검은 고양이는 꼬리를 치켜들고 당당히 창가에 올라가 보란 듯이 화분을 밀어 떨어트린다. 오랜만에 본가로 복귀한 도핀은 9월부터 시작된 사교시즌 탓인지 이곳저곳 파티에 초청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애써 그런 열렬한 러브콜을 무시하고 있었다. 일일이 그럴듯한 핑계를 대는 것도 쉽지 않으리라. 지금도 나름대로 격식을 따져 거절 의사를 밝히고 있지 않은가. 창가에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고양이는 늘어지는 하품을 했다. 창 아래에서 떨어진 화분 잔해를 치우는 사용인들의 머리에 솜방망이 앞발을 휘두르며 능청을 피운다. 휘적휘적, 거리가 있어 닿지는 않지만 영락없는 고양이 행세에 어린 사용인들은 무서운 것도 잊고 까르륵 웃었다. 역시 요즘 같은 시대에는 고양이 모습이 생활하기가 더 편한가? 이런 귀찮은 파티 같은 건 관두고 이제 같이 나가 놀자고 해야겠다. 지금쯤이면 사냥꾼들도 다른 목표를 좇고 있겠지.
창틀에서 폴짝 뛰어내린 샤뮤에드는 한 손에는 청첩장 카드를 들고서 전화를 받으며 방 안을 서성이고 있는 도핀에게로 향했다. 얼른 전화를 끊으라고 도피의 다리 아래에서 왔다 갔다 거리며 몸을 비벼댔다. 도핀은 제 바지에 털을 묻혀대고 있는 샤뮤에드를 잠시 바라보다가 꼬리가 밟히지 않도록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이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네…. 그러면…, 이번에는 참석할게요.”
뭘 참석해? 으쌰, 소리와 함께 도핀은 제 상체만 한 고양이를 한 아름 가득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털에 얼굴을 묻고 이야기했다. 조용히 제 품 안에 있는 고양이에게 당부처럼 속삭인다.
“샤뮤, 나 나갔다 올게. 집 잘 보고 있어야해? 애들 괴롭히면 안 되는 거 알지?”
조금 전 연락은 삼십여 년 전부터 알고 지냈던 인간 친구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이번에 자기 딸이 결혼하는데, 와달라는 부탁이다. 대체로 자신이 뱀파이어임 숨기고 인간들과 교류하는 도핀이지만 종종 자신의 정체를 눈치챘음에도 여전히 친분을 유지하는 관계가 있었는데 이번이 그러한 경우였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외모인 탓에 거북함이 들 수 있음에도 그는 자신의 결혼식에 오지 않은 일을 이제는 이해하고 있으니, 딸아이의 결혼식에만은 와줄 수 없느냐는 물음이었다. 오랜 친구에게 축하받으며 딸아이의 삶이 행복할 거라는 응원을 받고 싶은 것인지, 그도 아니면 자신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은 친구를 용서하기 위해 대신 딸의 결혼식에는 와달라는 것인지 도핀으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결혼식 당일까지 이렇게 연락이 와 참석을 부탁하는데 한사코 거절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꼬옥, 고양이를 끌어안았다가 다시 바닥에 내려놓고는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씻고 격식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까지 손보는 것에 사용인이 몇 명이나 달라붙어 시중을 드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만큼 시간이 촉박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샤뮤에드는 바닥에 앉아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도련님이 잘생겼네, 결혼 당사자들보다 눈에 띄면 안 되네, 사이가 좋은 친구셨나 보네 등등 도핀의 긴장을 풀어줄 요량으로 사용인들이 한참 조잘거린다.
“세상에 우리 도련님, 얼굴에서 아주 빛이 나는데요? 하객으로 참석한 사람들이 다 반하는 거 아닌지 몰라.”
“앞머리는 넘기는 편이 나으신가요, 아니면 살짝 흘러내리는 느낌으로 할까요?”
“옷은 어떤 편이 좋으려나…. 넥타이는 파란색 쪽이 잘 어울리시는데.”
오랜 친구를 마주하는 것에는 항상 즐거움과 불안이 공존했기에, 도핀은 자꾸만 제게 서슴없이 모른 척 말을 붙이는 사용인들이 기꺼웠다. 걱정하지 말라고, 아무 일 없을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그런 주문처럼 느껴져 전화를 끊을 때의 그 곤혹스러운 표정은 이제 얼굴에서 사라진다. 단지 사용인들의 호들갑에 살짝 뺨을 붉히며 수줍게 웃음 짓는 도련님의 얼굴만을 거울이 비춘다. 이윽고 도핀을 태운 자동차는 운전수의 부드러운 솜씨로 결혼식 장소로 향한다. 샤뮤에드는 이 모습을 한 편의 코미디를 보는 기분으로 관람했다. 도핀이 결혼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죄 무슨 난리들인지.
그렇게 저택의 사람들이 도핀을 배웅할 때, 고양이에서 남성의 모습으로 변한 샤뮤에드가 수많은 초대장 더미에서 청첩장 한 장을 주워들었다. 그래. 날 두고 갔다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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