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3년 뒤
2234년. 유주 탁현시 누상구.
“나 왔어.”
유비가 헤실헤실 웃으며 현관으로 들어왔다. 손엔 커다란 보온병을 들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장비가 물었다.
“설마 복숭아 주스야? 지난번에 준 거 아직 나 다 못 마셨는데. 냉장고에 들어있다고.”
“알아. 이건 오늘 시청에 가져갔다가 그냥 도로 가져온 거야. 시청 냉장고도 만원이라서.”
만원인 것도 만원인 거지만, 이제는 가정에서 만든 복숭아 주스도 주인 허락 없이 멋대로 마시면 얌체짓 정도로 끝날 재화가 아니었다. 유비는 귀중품을 공용 냉장고에 둘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장비는 인상이 풀리지 않았다.
“시청에 손님이라도 왔던 거야? 웬 복숭아 주스를 이렇게 많이.”
“왔으면 손님이랑 다 마셨지. 온다고 했던 손님이 늦어져서 못 왔거든. 내일은 올 테니까 오늘 하루만 여기다 보관할게.”
“안 돼. 이미 절반 찼고, 지금은 벌써 여름이야. 전기가 훨씬 많이 든다고. 그냥 복숭아를 가져가지 그랬어? 그건 상온 보관이라도 하지.”
장비의 잔소리에 유비가 머릴 긁적였다.
“손님 대접할 때 정도는 주스 마셔도 되잖아. 내가 과수원 집 딸이라 우린 가끔 마시지만 시청 직원들 중엔 주스 다시 마셔보는 게 소원인 사람도 있다고.”
장비는 대답 대신 거실 구석에 놓인 헬스용 자전거를 가리켰다. 유비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자전거 위에 올라갔다.
그 자전거에는 최근 개발된 가정용 발전기와 전기 인덕션이 연결되어 있었다. 유비가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자 충전 불빛이 들어왔다.
“그런데 손님이라니 무슨 일 있어?”
인덕션의 충전상태를 보고 냄비에 물을 담아 올리며 장비가 물었다.
“주지사의 파견 인원.”
열심히 페달을 밟으며 유비가 답했다.
“계산대로라면 오늘 왔어야 하는데, 복숭아 주스도 그래서 만들었는데 안 왔어.”
“그저께 비가 엄청났으니까 늦을 수도 있지.”
장비가 이해심 많은 것처럼 대꾸하고는 한숨지었다.
“이제 온다고 한 사람이 하루이틀 늦는 건 일도 아니네.”
“2년 전이면 올 필요도 없었어. 전화랑 e-mail로 연락하면 되니까.”
유비가 애고고 하면서 핸들에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이런 대사는 늙어서나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장비는 어느새 느려진 자전거 바퀴만 가리켰다. 유비가 황급히 페달을 밟았다.
“그 비 덕분에 중수도 사정이 나아질 테니 좋은 면도 있어.”
유비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중수도 운용으로 수자원 절약하자고 전단지 돌리고 다닐 때만 해도 그게 이렇게까지 도움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외계인들은 지구에 돌이킬 수 없는 큰 흉터를 남겼다.
인명피해도 컸지만 죽은 사람들은 대개 군인과 관료들이었다.
민간인 학살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앞장서서 싸우고 학살을 막아낸 끝에 희생된 때문만이 아니었다. 외계인들이 학살에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외계인들의 관심사는 오직 석탄과 석유, 방사성 물질, 몇 종류의 금속이었다.
과거 화석 연료 절약을 추구한다는 명분하에 각국 정부에선 전기 없는 암울한 미래를 가정해 선전하곤 했었다.
유비가 환경단체에 처음 가입했을 때만 해도 그런 비참한 미래는 정부의 과장이고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환경단체 내부에서조차 대부분이 그랬다.
그런데 그런 미래가 실제로 와 버렸다.
어느 날 갑자기 전기를 쓸 수 없게 되어버린 미래가.
그나마 유주는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수력발전소와 침공 직전에 설치된 대단위 태양광 발전소 덕택에 최소한의 전기와 생활용수가 공급되었다. 유주 주지사 유언이 청렴하고 부지런한 인물인 것도 큰 몫을 했다.
지금 유비가 돌리고 있는 것 같은 소형 인력발전기도 ‘없는 것보다 나은 수준’이란 평을 듣고 있지만 이게 없는 곳들의 소문을 들으면 불평을 말할 수 없었다.
“왜 오는 걸까. 또 가정 공급 줄이겠다는 으름장만 아니면 좋겠어.”
유비가 내일 찾아올지도 모르는 어려운 손님들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유주가, 탁현이 평화로운 진짜 이유를 모르니까 그래. 사람들이 여전히 살 만 하니까, 여전히 수돗물이 나오고 겨울철 난방도 할 수 있으니까 차분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건데. 다른 곳처럼 세상 망했으니 다 같이 죽자고 뛰쳐나오지 않는 건데.”
유비의 목소리에 열기가 깃들었다. 자전거 바퀴도 빨라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정 상수도 공급만은 양보 못해. 정말이지, 이런 논의가 있다는 것만 알려져도 여기 사람들도 다 노란 띠 두르고 뛰쳐나올 거라고.”
정육점을 계속 하려면 역시 전기가 필요하므로 장비에게는 상업용 전기 쪽이 더 절실했다. 그래도 유비 말이 옳다고 생각하기에 장비도 잠자코 끓기 시작한 물에 찌개를 끓였다.
전 세계를 휩쓴 이변의 정체가 외계인 침략임이 감출 길 없이 드러나고 사회가 혼란에 빠졌을 때 장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창고에 있던 고기를 전부 내다가 누상구 사람 모두에게 나눠준 일이었다.
냉동, 냉장 창고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서만이 아니었다. 배가 부르고 몸이 따뜻해야 사람들이 여유를 갖고 이성을 유지할 수 있고, 그래야 유비도 그들을 믿고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유비 역시 어머니의 동의를 얻어 과수원의 복숭아를 풀었다. 그리고 자신의 작은 선거구에 질서가 유지될 수 있도록 밤낮없이 뛰었다.
화력, 원자력 발전소나 광산이 주변에 없어 외계인의 직접 공격을 받지 않은 덕만은 아니었다. 유주 탁현시가 일찍 정상화된 것은 유비의 공이었다.
외계인들이 완전히 철수한 지도 이제 일 년이었다. 그러나 화석 연료와 함께 전기도 사라진 지금 열심히 노력만 하면 다 잘 될 거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결국엔 다 잘 될 거야.”
유비가 결연히 중얼거렸다.
“누상구로 흘러든 피난민들도 이만하면 잘 감당하는 중이고, 이대로 다들 새 삶의 방식에 적응하기만 하면 돼. 예전만큼 편리하진 못해도 각자 먹고 사는 일은 순조롭게 해결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러다보면 기술도 다시 발전할 거고, 어쩌면 정말 친환경 발전소만으로 안정적인 대단위 전기 공급이 가능해질지도 모르지.”
“녹색지구 협회 시절엔 거기까진 힘들 거라고 했잖아? 화석 연료를 ‘덜 쓰는’ 정도가 최선이라고.”
“그때야 지금처럼 갑자기 화석 연료를 아예 못 쓰는 시대가 올 줄 몰랐으니까. 내가 공학자도 아니고.”
유비는 당당하게 바뀐 의견을 피력했다.
“절박한 상황이 되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서 살아남아온 게 인류야. 화석 연료 없이도 살 수 있을 거라고.”
그때 전화가 울렸다. 장비는 찌개가 끓게 놔두고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예. 여기 있는데요.”
장비의 시선을 받고 유비가 자전거에서 내려왔다. 장비는 인덕션의 충전 상태를 보고 자기가 자전거에 올라가 페달을 밟았다.
“예, 유비입니다.”
유선 전화는 외계인 침략 이전처럼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가전제품 중 하나였다. ‘용건만 간단히’가 다시 중요한 전화 예절이 되기는 했지만.
-주 정부에서 파견한 경위 추정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시청으로 지금 와주세요.
“옛!”
한참 자전거를 타느라 거칠어진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전화를 끊고 벗어놓았던 옷을 도로 입었다.
“중요한 일인가봐. 이 시간에 도착했는데 내일 보자고 하는 대신 지금 당장 오라고 하는 거 보면.”
냉장고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던 복숭아 주스도 도로 꺼냈다. 장비는 2인분 끓이고 있던 찌개를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냥 혼자 다 먹어. 설마 내가 굶고 다닐까봐?”
대식가이던 장비가 침략 후 얼마나 양을 줄여야 했는지 아는 유비가 작별 인사 대신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고 있는 건 또다시 자전거였다. 앞바퀴에 발전기를 달아 전조등을 켤 수 있는 방식이었다.
차를 굴릴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자전거 앞 바구니에 주스를 싣고 왔을 때와 똑같이 장비의 집 앞을 떠났다.
‘추정 경위라, 경찰인가?’
경찰이 각종 행정 업무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건 요즘은 익숙한 풍경이었다.
유주가 아무리 침략의 피해를 적게 받았다지만 그렇다고 아예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의료설비와 전문의약품, 방범시설 등 당연하게 여겨지던 많은 사회안전망이 갑자기 불안해지면서 노약자, 환자부터 많은 사람들의 희생되었다. 패닉에 빠진 사람들이 범죄에 손대는 경우도 대폭 늘었다. 심각한 곳에선 군부대가 나서서 대처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니 공무로 인한 출장까지도 무장한 경찰의 일이 된 것이다.
‘요즘은 심지어 외계인 침략이 하늘의 심판이라고 주장하는 사이비 종교까지 생겨났고.’
그런 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심상치 않다는 소식이 전해진 게 일주일 전이었다. 머리에 누런 띠를 두르고 새 시대가 어쩌고 하며 관청을 습격한다고 했다.
유주에도 가끔 누런 색의 팸플릿이 돌아다닌 적이 있었기에 더럭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주 의회의 사람이 동행하지 않고 달랑 경찰 한 명이라면 그렇게까지 큰일은 아니겠지?’
낙관주의는 유비의 천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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