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231년 6월 23일. 한(漢)연방 민주공화국 유주 탁현시 누상구.
(*탁현(涿縣)의 현(縣)이 당시 행정구역의 명칭이지만 ‘탁 시’가 되면 어감이 나빠지므로 편의상 탁현시로 만들었습니다.)
“장비, 나 괜찮아 보여?”
전신거울 앞에 뻣뻣하게 선 유비가 긴장한 기색으로 심호흡을 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20대 초반처럼 보이는 젊은 여성이었다.
실제 나이는 25세지만 동글동글한 얼굴 골격과 유순한 표정 탓에 서너 살은 더 어려보였다. 칼같이 다린 새 정장도 사회 초년생 같은 인상을 더할 뿐이었다. 거기에 바짝 긴장한 태도가 화룡점정이었다.
“어깨 좀 펴고.”
괄괄한 목소리의 세 살 아래 여동생이 거울에 비친 순간 유비는 익숙한 동작으로 비켜섰다. 장비의 손바닥은 허공을 갈랐다.
“내가 한두 번 당해봤어?”
유비가 혀를 날름 내밀었다. 장비는 연속공격을 할까도 했지만 특별히 오늘만 봐주기로 하고 손을 내렸다. 평소나 같은 오늘이 아니니까.
“그래. 그 정도만 표정 펴도 되겠네.”
“알았어.”
유비가 에헤헤 웃고 다시 거울을 향해 돌아섰다. 새 정장의 옷깃엔 자그마한 의원 배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잘 다녀오라고, 초선 의원님.”
유비가 탁현시의 최연소 시의원으로 당선된 첫 출근날이었다.
한(漢) 연방 민주공화국은 넓은 국토로 인해 연방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유주 탁현은 그 넓은 땅의 수많은 특색 없는 소도시 중 하나였다.
그런 곳이라 그런지 과수원 집 딸로 태어나서는 일찍부터 시민단체에 들어가 환경운동에 나섰을 뿐인 유비의 배경으로도 지방 선거 출마가 가능했다.
유비와 그가 속한 단체가 오래 노력한 끝에 유주에 대단위 태양광 발전 시설이 설치된 것이 당선에 가장 호재였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장비 보기엔 가장 큰 요인은 따로 있었다.
저 동안의 순해 보이는 젊은이와 만나 대화해본 사람들 가운데 그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이번 선거의 라이벌까지도 유비를 진심으로 싫어하는 기색은 보이지 못했다.
‘오늘 저녁은 당선자들끼리 회식이랬지.’
유비는 같이 가달라고 졸랐지만 장비는 사양했다. 그런 자리는 실무 보좌관인 간옹과 가는 것으로 충분했다. 물주이자 후원자인 자신은 적당히 물러날 때도 알아야 했다.
대신 오늘 그는 휴일이었다. 이따 상인 조합에 나가보는 것 말고 모든 일정을 비워두었다. 유비가 출마한 후로 거의 처음 맞다시피 하는 혼자만의 느긋한 휴식이었다.
‘TV나 볼까.’
오늘만은 일 생각 잊고 쉬겠다고 결심한 것도 무색하게, 장비의 손은 뉴스로 채널을 돌렸다. 선거 후 첫 지방의회이니 금방 뉴스에 유비의 얼굴이 나올 터였다.
왜인지 화면에 자꾸 노이즈가 끼는 걸 보고 장비는 근처에 있던 아령에 손을 뻗었다가 마음을 바꿔 휴지곽을 집었다. 장비의 속을 일찍 깨달아서인지 TV도 정신을 차리고 맑은 화면으로 의회를 생중계하기 시작했다.
유비의 얼굴도 곧 비쳤다. 주목받는 젊은 신인이라 그런지 카메라도 그를 길게 비춰주었다.
흐뭇하게 지켜보며 소파에 몸을 눕히는데 또 지직거리며 화면이 흐려졌다.
“대체 왜 이래? 작년에 산 게.”
이번에야말로 아령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아까처럼 TV가 정신을 차려주지 않았다.
노이즈 낀 화면 속 의회에서는 또 하필 뭔가 중요한 문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의원이 아닌 보좌관이나 직원들, 심지어 경찰로 보이는 인물들까지 들어와 서로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 위에 자꾸 노이즈가 껴서 화면도 소리도 덮어버리고 있었다.
-침략이라니......무슨......
-우린 아무 이야기도......
-......각하께서......
-무슨 말이 안 되는......
“야, 너 꼭 이런 때 파업할래?”
차마 아령으로 후려갈기지는 못하고 대신 모니터를 잡고 흔들었다.
그러고보니 요 며칠 좀 상태가 수상했던 것도 같은데, 선거 끝나고 한가해지면 수리를 하든지 말든지 하기로 해놓고 잊어버렸었다.
이미 화면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의원들의 어수선한 목소리, 기자들의 항의하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소리도 끊겨 버렸다.
이제는 장비도 TV 붙들고 늘어질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폰을 집어들고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비슷한 소식이 SNS를 중심으로 쏟아져나왔다. TV, 컴퓨터 등이 갑자기 고장나거나 인터넷 접속이 끊겼다는 이야기들 사이로 대규모 정전 사태나 지진 소식도 보였다. 그것도 한두 지역이 아니었다.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 그런지 음모론도 벌써부터 눈에 띄었다. 정전지역에 UFO 군단이 나타났다, 군대가 움직였다 하는 식이었다.
‘생각보다 규모가 크네. 유주만 이런 것도 아니고. 혹시 외국도 이런가?’
해외 사이트 접속에 이상하게 시간이 걸렸다. 몇 번 재시도해 보았으나 인터넷이 아예 끊겨버렸다.
장비는 사업자여서 요즘 시대에도 집에 유선 전화기가 있었다. 곧장 그리로 달려가 정육점에 전화를 걸었다.
정육 창고엔 정전에 대비한 비상 발전기가 있었다. 그게 하필 이런 때 고장나버리지 않도록 단속시키고 그 외에도 재난 상황에 대비한 갖가지 조치를 점검하라고 직원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뭔가 거대한 재난이 다가오고 있었다. 설마 정말 UFO 습격일 리는 없지만, 최대한 모든 재난에 대비해야 한다는 감이 왔다.
장비는 평소 충동적이고 즉흥적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장비의 감은 잘 맞는 편이었다.
이번에도 장비의 감은 한 가지만 빼고 전부 맞았다.
국가적, 아니 전 세계적인 재난이 닥쳤다. 유비와 장비 역시 그 재난을 피해가지 못했다.
장비가 틀린 한 가지는, 그 재난은 외계인 습격이 맞았다는 사실이었다.
외계인은 지구 식민지화를 꾀하지 않았다. 지구인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삼지도 않았다.
그들이 노린 것은 단 두 가지였다. 화석 연료와 방사성 물질.
공업 단지와 광산 등지가 전쟁터가 되었으나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선전포고도 없었고 협상 시도도 통하지 않았다. 애초 우주 너머로 연료 사냥을 올 수 있는 존재들 상대로 뭘 해본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모든 유전과 탄광과 우라늄, 플루토늄 광산, 희토류 광산과 제련소에서의 전쟁이 패배로 끝났다.
수지를 맞출 만큼 채굴에 성공했다고 판단했는지, 외계인들은 곧장 왔을 때처럼 갑작스럽게 지구를 떠났다. 전 세계에 정전과 희생과 폐허를 남겨두고.
단 2년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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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연의를 주로 오마주했으며, 정사 삼국지를 비롯한 다른 자료들을 참고했습니다.
삼국지 소재의 가상 미래 국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을 포함해 실재하는 어느 나라도 한 연방 민주공화국의 전단계로 상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명, 행정구역명은 연의를 참고해 당시 기준으로 붙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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