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章. 춘풍 도령 (12)
그러니까 좀 전의 화방의 상황은 이러했다. 려운이 아무도 없는 류의 방에서 낮부터 밤이 되도록 자고 있었는데, 지성의 짐을 가져다 놓으려 쇠돌이가 화방에 들어왔다. 마침 지성의 어머니가 류에게 주전부리를 싸서 들려 보냈기에 류의 방문을 열고 방 안에 찬합을 놓으려 했는데,
“도둑인 줄 오해하셨고, 사람 말도 안 듣고 이렇게 패놓으신 겁니까?”
지성의 말에 려운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저하고 류 선배님이 도착했을 땐,”
“자네가 오해한 것을 깨닫고 때리는 것을 멈춘 직후로군.”
려운은 딱히 뭐라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지성은 쇠돌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원래 그가 곰 같은 체구에 둔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맞고 부어서 그런지 더 곰 같은 모습에 지성은 간신히 웃음을 참고 말했다.
“아이고, 우리 쇠돌이 잘생긴 얼굴 다 망가져서 어떡하나?”
“전 아파 죽겠는데 재밌으세요?”
“그래, 미안하다. 그나마 네가 맷집이 좋으니 다행이야. 네가 약골이었으면 진작에 저세상 갔을지도 모르지.”
“도련님!”
쇠돌이가 울먹거리자 지성은 키득거리더니 그를 일으켜주고 의자에 앉혔다. 그리곤 제 화구 통을 밑에 연결된 통을 떼어 그 속에서 둥근 자기를 꺼냈다. 류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는 지성을 바라보았다.
“자네 화구 통이 조금 변한 것 같더라니, 밑에 약통을 달아두었는가?”
“나름 괜찮지 않습니까? 제가 자꾸 자잘하게 다치는 일이 생기니, 이 녀석이 약통을 달아줬습니다. 이 약통의 고약을 처음 쓰는 것이 쇠돌이 본인이 될 줄은 미처 몰랐겠죠.”
지성이 쇠돌이의 앞에 앉았다. 그는 천을 물에 적셔 상처에 난 핏자국을 닦아주었다. 평소 그렇게 둔하던 쇠돌이가 눈을 꾹 감으며 아픈 티를 내자 마음 약한 윤 도령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려운을 한번 흘겨보고는 자기 뚜껑을 열어 작은 막대로 고약을 조금 덜어 다친 곳에 발라주었다. 그새 류는 탁자에 놓인 약통을 구경했다.
“함부로 만지지 마십시오. 그중에 하나는 향만 맡아도 골로 가는 독초니까요.”
류의 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고 지성이 말하자 류가 흠칫 놀라 손을 뗐다.
“그런 것은 왜 가지고 다니냐?”
“려운 선배님도 참 진지해서 탈입니다. 농입니다, 농. 화방에 다니는 서생이 무에 쓸 일이 있다고 독초를 들고 다니겠습니까?”
담담히 말하는 후배의 태도에도 류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함부로 만지지 말라는 말은 진심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 터였다. 려운이 탁자로 성큼 다가와 이것저것 들춰보다 다른 것과는 달리 나무 상자로 되어있는 것을 발견하곤 뚜껑을 열었다.
“그건 향이에요. 도련님이 요즘 통 잠을 못 이루신다 해서 첫째 도련님이……,”
“그런 것은 뭐하러 말해?”
“아얏! 도련님!”
지성이 약을 발라주다 말고 머리를 콩 쥐어박자 쇠돌이가 우는 소리를 냈다.
“잠깐 자네, 형님이 있었나?”
“어라? 제가 얘기 안 했습니까?”
“안 했네! 한 번도!”
류가 어쩐지 억울한 표정을 짓자 지성은 대수롭지 않게 다시 쇠돌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려운은 아예 의자를 끌어와 앉아서 지성의 향갑을 이리저리 살폈다.
“지금 아셨으니 됐네요.”
“그러고 보니 나는 정말 그대에 대해 아는 것이 얼마 없소.”
“뭘 모르십니까? 제가 좋아하는 음식도 아시고, 즐기는 차도 아시고, 자주 입는 옷이 무언지도 아시고, 그림을 그릴 때 어떤 색을 고르는지도 아시는데요?”
지성이 고개를 갸웃하자 류가 벙긋거리다 더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입을 다물었다. 지성은 쇠돌이를 치료한 약을 통 안에 집어넣고 려운의 손에 들린 향갑을 자연스럽게 빼앗아 뚜껑을 닫았다. 싱그럽게 웃는 눈이 려운에게 무언가를 종용하는 것 같았으나 려운은 ‘쥐방울 같은 놈이 감히?’ 하는 얼굴로 되려 지성을 노려보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사과하셔야죠, 쇠돌이한테.”
“도련님, 저는 됐습니다.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고 게다가…….”
“넌 가만히 있어. 그때 그 실력이면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을 텐데 불필요하게 폭력을 써서 사람이 다쳤잖아.”
“도련님, 그러니까요…….”
“가만히 있으래도! 려운. 뭐라고 말 좀 해보십시오.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패 놓습니까?”
그가 따져 묻는데도 려운은 시큰둥해 보였다. 딱히 사과할 마음도 없어 보이는 태도에 선한 윤 도령의 입가에 미소가 가셨다. 그 모습을 본 쇠돌이가 안절부절못하며 제 주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아, 좀 놔 봐. 넌 분하지도 않아? 내가 뭐 큰 거 바랐어? 그냥 사과 한마디면 되는 일을, 저보다 신분이 좀 낮다고 못 해주겠다는 것이잖아!”
“뭐야?”
잠자코 듣고 있던 려운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의 눈에서 불꽃이 튀자 쇠돌이가 다급하게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도련님, 오해세요! 제가 맞긴 했는데 저분이 먼저 때린 건 아니에요.”
“뭐? 그게 뭔 소리야?”
“실은요……. “
쇠돌이는 지성과 류가 화방에 도착하기 전의 상황을 빠짐없이 설명했다. 지성이 한숨을 쉬며 제 이마를 짚었다. 고개를 푹 숙인 쇠돌이는 제 주인과 려운의 눈치를 살폈다. 짧은 적막을 깬 것은 류의 웃음소리였다.
“도령, 왠지 쇠돌이가 자네를 닮은 것 같네.”
“너 진짜! 그렇게 무턱대고 덤비면 어떡해? 싸움도 제대로 못 하면서!”
“그치만 도련님한테 못되게 군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니 화가 치밀어서…….”
정리하자면 려운은 쇠돌이가 지성의 집에서 지낸다는 것을 알고 놓아주었는데, 자신을 놓아준 이가 려운임을 알아챈 쇠돌이가 눈이 돌아 그에게 달려들었고, 이리저리 피하는 려운 덕분에 넘어지고 구르고 부딪히며 혼자 다친 것이었다. 지성은 민망하여 시선을 멀리 던지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려운. 왜 변명도 안 한 겁니까?”
“나만 떳떳하면 될 일이지, 소인배에게 구차한 변명까지 늘어놓아야 하나?”
“소인배? 지금 저더러 소인배라 하신 겁니까?”
그의 말에 지성이 고개를 들고 려운을 노려보았다. 금방 주먹다짐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팽팽한 긴장감이 돌자 류가 크게 웃음소리를 내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하하하, 이 사람들 또 왜 그러나? 그러지 마시게. 아, 도령. 말 나온 김에, 자네 형님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는 것은 어떻겠나?”
“뭐, 좋습니다. 쇠돌아. 네가 형님께 내일 유시에 집으로 가지 마시고 화방으로 오시라 전해줘.”
“난 됐으니 류 너나 실컷 봐라.”
려운! 류의 부름에도 그는 그대로 화방을 나가버렸다. 매정한 뒤통수를 바라보던 류는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쇠돌이를 바라보았다.
“곧 이경이니 오늘은 예서 자고 날이 밝으면 돌아가게.”
“감사합니다, 류 공자님.”
쇠돌이는 어느새 아픈 것도 잊었는지 류를 보며 해맑게 웃었다.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니 지성은 어쩐지 허탈한 마음이 들어 그도 따라 웃어버리고 말았다.
*
실낱같이 옅은 달이 걸린 그믐. 삼경이 넘어 세상이 모두 잠든 시각, 홍화정 쪽문이 열렸다. 소박하게 단장을 한 기생은 쓰개치마를 폭 뒤집어쓰곤 발을 뗐다. 불안한 걸음은 누군가 지켜보기라도 하는 듯 주춤거렸다. 어느 문 앞에 도착한 그는 주변을 살폈다. 희미한 달빛 아래 글자는 분간하기 어려웠으나 그는 몇 번이고 확인하듯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무릉 전당포…….”
주문을 외듯 중얼거리더니 결심한 듯 주먹을 쥔 그가 손을 뻗어 단단한 나무문을 두드리려 할 때였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인지 몸을 흠칫 떨었다. 온몸의 신경이 날이 섰다. 머리로는 어서 달아나라 말했으나 몸이 말이 듣지 않았다. 뒤에 선 이가 나지막이 말을 걸어왔다.
“운이 나쁘군.”
“제발……!”
그는 살려달라고 빌어보려 했으나 입을 떼기도 전에 목에 묵직한 힘이 가해졌다. 그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평화로운 화방. 간만에 집에 다녀온 류가 손에 들고 온 것은 술이었다. 지성이 흘끗 보고는 고개를 젓자 그는 변명하듯 늘어놓았다.
“내가 마시려고 가져온 게 아니라 자네 형님께 드리려고 가져온 걸세!”
“류 선배님.”
“음?”
“술 못 마셔 죽은 귀신이 붙었습니까? 요즘 어찌 이리 술에 환장하십니까?”
“원래도 환장했네. 자네야 나하고는 화방 일만 하니 몰랐겠지.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닫다니. 아니지, 이건 혹시 도령이 내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신호인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능청스러운 웃음을 짓는 제 선배의 모습에 지성은 한숨을 쉬곤 말했다.
“참, 선배님이 나가 계신 동안 화방에 마감이 닷새 뒤인 일이 들어왔습니다.”
서탁 위에 책 하나를 펼쳐 놓고 빠르게 베껴 쓰는 지성의 곁으로 류가 다가와 앉았다. 그는 서탁 아래 내려놓은 몇 권의 책을 들춰보았다.
“책방에 가면 찍어 나와 널린 것이 소학인데, 이걸 굳이 큰돈 들여 필사를 맡겼다고?”
“그냥 필사가 아닙니다. 벌이에요.”
“벌?”
“수업에 빠진 벌로 소학 전 권을 두 번씩 써 오랬답니다. 이것들은 의뢰인이 쓴 소학이고요.”
그의 말에 류가 혀를 쯧쯧 찼다.
“벌이면 요령 피울 생각 하지 말고 본인이 직접 해야 의미가 있지. 한데 도령이 이런 의뢰를 받다니 의욀세. 남의 글씨를 따라 할 수 있는 것도 신기하고.”
“제가 한성에 오기 전엔 말입니다, 연서 대필도 했었거든요. 어지간한 글씨는 다 흉내 낼 줄 압니다. 덤으로 절절한 사랑 이야기보따리까지 얻었지요. 그냥 책도 비싸게 팔리는데 다른 책값의 다섯 배를 쳐 주겠답니다.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눈을 빛내는 지성의 모습에 류는 어쩐지 낯설어서 웃었다. 방금까지도 바르고 정도만 걸을 것 같던 선비 윤 도령이 아니라 이십 년간 장사를 해 온 노련한 상인 윤 씨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리 보지 마십시오, 선배님. 저도 처음엔 마다했습니다. 솔직히 저희 화방에 돈이 궁한 것도 아니고, 남의 벌이나 대신에 해주려고 화방을 연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한데 보십시오. 의뢰인의 글씨를요. 수업에 빠져서 소학 전 권을 베끼라는 벌을 해야 하는 불량 학생치고는 깔끔하고 정갈하지 않습니까?”
지성의 말대로 의뢰인의 글씨는 꽤 잘 쓴 글씨였다. 글씨의 크기가 균일하고 획의 굵기도 일정하여 조금만 다듬으면 화방에서 판매하기에도 손색이 없었다.
“내가 도울 일은 없겠나? 나더러 베끼라 하지는 마시게. 남의 글씨 베껴 쓰기는 무리일세.”
“익숙하지 않으면 필체를 능숙히 따라 하는 데만 며칠이 걸리니……. 그럼 옆에서 읽어주십시오. 오자가 있으면 있는 대로 읽어주시면 됩니다.”
지성이 붓을 집어 들자 류가 빙긋 미소 지으며 천천히 글을 읽었다.
*
“성님, 난 참말 모르겄소. 우욱! 그냥 큰 배 타자니께 성님 말에 부득불 작은 배 탔다가, 우—웩!”
이게 뭔 고생이냔 말요! 송 첨지의 외침에 멀리 바다를 보던 이가 그를 향해 뒤돌았다.
“큰 배는 보름 뒤에나 뜬다고 하지 않았나. 너무 그러지 말게. 어떻게든 한성에만 도착하면 되는 일 아니겠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의 안색도 파리한 것이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음이라. 송 첨지는 연신 헛구역질을 해대다 결국 갑판 위에 뻗어버리고는 그를 원망스레 흘겨보았다.
“모르겄소. 나 죽으면 성님이 알아서 장례나 치러주소. 상에 생선은 올리지 마시고. 지금 생선 지느러미 찰지게 내 뺨따귀 치면서 나랑 친구 하자 하는 판이니께. 이게 바다에서 나는 짠 내인지 내 몸에서 나는 짠 내인지도 모르겄소. 맡아보실라우?”
“농 한 번 재밌게 하는군. 그러지 말고 멀리 보게. 저 멀리 강이 보이잖나.”
“여긴 바다인데 무슨 강 타령이요? 성님, 뱃멀미 때문에 홀랑 가버린 모양인디 그 강 건너면 죽는……, 성님, 성님!”
“그 성님 자네 옆에 있네. 그리 애타게 부르지 말게.”
“그게 아니라, 보소! 드디어 태송이오!”
송 첨지가 멀미도 잊고 벌떡 일어나 손을 뻗었다. 그 투박한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에 육지가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난간에 기대어 선 이의 눈동자에 생기가 가득 들어찼다. 그는 최명선. 지성이 오매불망 기다리는 스승님이었다.
인적이 드문 대나무 숲. 아직 여름이 오려면 멀었건만 웃통을 훌렁 벗고 검을 잡고 홀로 우뚝 선 이는 려운이었다. 얼마나 수련을 한 것인지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이 번들거리고 숨은 거칠었다. 류가 보았더라면 호들갑을 떨며 아주 완벽히 그리기 좋은 몸이라고 말할 것일 터였다.
사아아―
바람이 불며 댓잎들이 그림처럼 떨어져 내렸다. 잠시 숨을 고르던 그는 검을 휘둘렀다. 묵직하고 진중하게, 칼끝으로 바람을 베어 가르는 듯이 움직이는 그의 눈빛은 순간순간이 진지했다.
삐잇- 삐잇- 어디선가 매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검을 집어넣자 하늘에서 손가락만 한 두루마리가 툭 내려온다. 그가 땅에 떨어진 문서를 손에 쥐자 작은 매는 다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너는 무슨 불만이 있어 매번 이러냐?”
그는 보이지도 않는 매를 향해 투덜거리고는 두루마리를 펼쳤다.
‘들어왔다.’
투박하게 글자를 적은 종이에선 어쩐지 짭조름한 냄새가 났다. 고작 태송에 돌아왔음을 알리려고 저 녀석을 보냈단 말인가? 려운은 고개를 저었다. 대충 땀을 닦고 옷을 입는 그의 손길은 그러나 평소보다 조급해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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