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록 제1권

第一章. 춘풍 도령 (11)

“말 잇기 놀이?”

지성은 조금 큰 주머니에 자신의 호패를 집어넣었다. 의아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류의 시선에 지성은 빙긋 미소 지었다.

“이렇게 주머니에 호패를 집어넣고 섞은 다음 뽑힌 이가 운을 띄우는 겁니다. 이때 잇는 말은 그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시문도 좋고 노래도 좋고 그림도 좋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말이 이어지기만 한다면 통과, 이어내지 못한다면 벌주를 마시는 겁니다. 시문은 이십까지, 그림은 백까지 세기 전에 완성하는 것이지요. 다들 어떻습니까?”

그의 말에 고고하던 서생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참 재미있군. 좋습니다. 마음에 듭니다! 그들은 패를 걷어 지성의 주머니로 넣었다. 두둑해진 주머니 속에는 물론 성열의 패도 함께였다. 하면 처음은 먼저 내가 시작해도 되겠는가? 류가 일어나자 모두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얀 매화 만개하고 하늘은 청명하니 몸과 마음이 상쾌하다.”

류를 시작으로 아홉 개의 패가 뽑혔으나 말을 이은 이는 황기백과 서건율 두 사람뿐이었다. 그것은 이십까지 세는 짧은 시간 동안 글을 짓기 어려운 이유도 있었으나 형편없는 글을 지었다가 망신을 당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백까지 세기 전에 그림을 그려내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번엔 윤 도령일세.”

류가 지성의 패를 들어 보이자 지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붓을 들었다.

“저는 그림을 그릴 터이니 모두 백까지 세어주십시오.”

그림을 그리겠다고 나선 것은 윤 도령이 처음인지라. 류와 서생들이 모여들어 수를 세기 시작했다. 지성은 망설임 없이 종이 위로 붓을 내려그었다. 그의 선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움직였다. 다른 물감은 쓰지 않고 오직 검정의 먹만을 사용하는 그림. 그러나 그의 그림은 오만가지의 물감으로 그려내는 듯이 생생했다.

“향기 그윽한 날,”

그의 붓끝에서 매화가 피었고,

“연못엔 꽃 가지가 내려앉는데,”

그 꽃송이들은 연못에 가득 비치더니, 일순 연못이 탁해졌다. 붓끝에서 똑똑 떨어지며 종이 가득 번지는 먹물을 바라보던 지성이 나지막이 말했다.

“일어탁수一魚濁水라.”

그의 말에 선비들의 시선이 그림에서 성열에게로 옮겨갔다. 지성의 붓끝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잘 알고 있기에 서생들은 애써 웃음을 참았다.

“이런, 종이가 검어져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였으니 벌주를 마시겠습니다.”

지성이 능청맞게 빙긋 웃고는 잔을 가득 채워 단숨에 비워내자 몇몇 서생들이 선비로서의 체신도 잊고 손뼉을 쳐댔다.

“도령의 호방함이 천하제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홍화정의 음란 서생이란 말은 허튼소리가 분명하군. 윤 도령이야말로 사내 중의 사내가 아닌가!”

어느새 지성을 아니꼽게 보던 이들조차 그를 찬탄하고, 성열을 비웃었다. 지성은 웃으며 조용히 이를 갈았다.

‘그래, 성에 차진 않지만, 오늘은 우선 여기서 만족하도록 하지. 그 알량한 자존심에 생채기를 낸 나를 똑똑히 기억해둬. 파멸의 순간이 오는 날까지, 조금씩 짓밟아줄 테니까.’

졸지에 물고기가 된 성열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렇다고 자리에 참석한 체면이 있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도 못하니 그로서는 그저 이 치욕스러운 시간이 어서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톡톡, 빗방울이 조금 떨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봄비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거센 빗줄기였다. 갑자기 내리는 비에 저잣거리에 갔던 류가 헐레벌떡 화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갓을 벗으며 숨을 골랐다.

“무슨 비가 이리 많이 와?”

“하아—.”

옷의 물기를 털던 류는 어디선가 들려온 한숨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 마루에 무기력하게 앉은 지성이 있었다. 매화 숲에서 돌아오는 내내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울적해 보여서 류는 차마 말을 걸지 못했더랬다. 류는 조심스레 지성의 옆에 앉았다.

“윤 도령. 무슨 일 있는가?”

“아닙니다. 그저 비가 오니 매화가 다 지겠거니 생각하니 아쉬워 그럽니다.”

누가 보아도 그 말이 거짓임을 알아차릴 터이지만, 류는 부러 예의 그 능청맞은 웃음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 화방 식구들끼리 다정하게 술이나 한잔할까?”

“됐습니다. 술은 무슨. 물기나 마저 닦고 오십시오. 마루가 다 젖고 있습니다.”

지성의 핀잔 아닌 핀잔에 류가 잉? 하는 소리를 내며 제 앉은 자리 주변을 둘러보다 멋쩍게 웃으며 일어났다.

“아무튼, 너무 울적해 하지 마시오. 꽃이 지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대신 그 자리에 푸른 잎이 나는 법이니.”

지성이 제 얼굴을 올려다보자 류는 자신의 말에 부끄러워진 것인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제 방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지성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뿌리가 죄 죽은 나무에도 잎이 날까요, 선배님.”

 

*

 

해가 중천에 걸린 시각. 임금의 침방 하나가 유난히 소란했다.

“전하, 이쪽이요, 이쪽!”

아직 품계조차 제대로 하사받지 못하고 보름 사이에 승은을 입은 궁녀 몇몇이 손뼉을 치며 이리저리 도망쳤다. 이한은 어정쩡한 자세로 팔을 앞으로 뻗어 휘저었다. 그는 눈을 가린 안대를 살짝 들쳤다가 내리고는 승은 궁녀 하나를 품에 안았다.

“전하, 이건 반칙이옵니다.”

“그래서, 싫으냐?”

그가 궁녀의 볼에 입을 맞추자 궁녀는 볼을 붉혔다.

“전하, 신첩은…….”

“하하하! 명이야. 어찌 이리 수줍음이 많아? 하긴, 이런 모습이 마음에 들어 널 품었지. 좋다! 내 너에게 곧 첩지를 내릴 것이니, 기다리고 있거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왕과 궁녀들의 웃음소리가 침소 밖을 넘었다. 산통을 깬 것은 상선의 헛기침 소리였다. 늙은 신하의 목소리에 한의 표정이 한껏 구겨졌다.

“무슨 일이기에 나의 유흥을 방해하는가?”

“전하, 백사등白司燈이 뵙기를 청하나이다.”

“무슨 일로……, 아니, 됐다. 백사등이 할 말이야 뻔하지. 내 오늘은 몸이 불편하니 물러가라 해라.”

“하오나…….”

문 너머에서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상선은 알겠노라 대답하고는 물러났다. 뒤통수로 다시 왕과 궁녀의 웃음소리가 날아들었다.

“전하께선?”

침전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백사등이 상선을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러나 가로젓는 고개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도대체 무슨 명분으로 날 돌려보내라 하시던가?”

“전하께서 몸이 불편하니 물러가라…….”

“벌써 닷새째일세.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상소의 양이 점점 늘고 있네. 전하께선 어찌 이리도 충심을 외면하려 드시는가!”

말을 삼가십시오. 듣는 귀가 많습니다. 상선의 말에 백사등이 씁쓸히 웃고는 돌아섰다.

*

 

“들었는가?”

“무얼?”

한 선비의 물음에 반대편에 앉은 이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주모가 가져온 주안상에 시선을 고정한 그는 주모가 가자 접시에 놓인 육전을 허겁지겁 입에 집어넣었다. 게걸스럽게 손에 묻은 기름을 쪽쪽 대는 제 벗의 얼굴을 보던 선비는 질색하더니 제 술잔을 채우곤 말했다.

“전하께서 여색을 탐하여 밤마다 기생 여럿과 잠자리를 같이 하신다는 소문 말일세.”

“에이, 그럴 리가 있나. 아무리 그래도 나라님 체통이 있지.”

“그런가? 한데 말일세. 홍화정의 애심이가 며칠 전부터 보이질 않더군.”

“애심이가?”

도통 관심이 없어 보이던 서생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그 이유는 그가 애심을 짝사랑해왔기 때문일 터였다.

“그렇다니까! 내가 홍화정의 아는 기생에게 은근히 물었더니, 글쎄 궁에 갔다지 뭔가!”

“애심이 그 년이 욕심이 좀 많기야 했지. 그 손이 얼마나 귀한 손인지 높으신 분들 아니면 술을 따르지도 않았잖는가.”

“그렇지. 그래서 과거에도 못 붙은 자네한텐 술을 안 따랐었지.”

“염장 지르지 말게. 지금 속에서 천불이 나고 있으니.”

벌컥벌컥 술을 들이켜는 서생의 표정이 볼만하였다.

“합석 좀 합시다.”

“뭐, 뭐, 뭐, 뭐야?”

갑자기 술잔을 들이밀며 제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이의 목소리에 서생은 놀란 까치처럼 푸드덕거렸다.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어 주막에 있는 줄도 몰랐던 이가 말을 걸어오니 놀라는 것은 당연지사. 능청스레 겸상을 청해 오는 이는 다름 아닌…….

“자네는 혹시 화방의 윤 도령?”

“선배님들이 제 이름을 알고 계시니, 영광입니다.”

“농담하지 말게. 한성 땅에서 자네 이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하하! 서생의 말에 지성이 호탕하게 웃고는 두 사람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제가 한 잔 올릴 터이니 받으시죠, 선배님들.”

“한데 어찌 선배님인가?”

“저보다 연장자시고 배울 점도 많아 보이니 선배님들이 아니겠습니까?”

“자네 성격 참 시원시원하군! 건배!”

셋은 마치 원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처럼 술잔을 기울였다. 한 잔, 두 잔 술이 들어가고 서생 둘이 고주망태가 되어 얼굴이 붉어졌다. 지성은 씩 웃고는 빈 잔들을 채웠다.

“그보다, 그 얘기 좀 자세히 해주십시오.”

“무슨 얘기?”

“거, 애심이 얘기 말입니다.”

“에잉, 자네도 애심이를 좋아했나? 마음 접게. 그런 못된 년은 잊어야지. 그러엄.”

“애심이가 어찌 되었답니까?”

“이건 비밀이니 자네만 알고 있게. 애심이가 글쎄 궁에 들어갔다고 하네.”

“확실한 겁니까?”

“그게, 아주 확실한 것은 아니지. 내가 홍화정에 아는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그러더군. 며칠 전인가 뒷문으로 가마 하나가 와선 애심이를 데려갔다고.”

“그래서요?”

“어디서 온 누군지는 모르지만 딱 보아하니 가마 크기도 예사롭지 않고 안에 깔린 비단이며 창이며 하는 것들이 값비싼 것들이고 해서 평범한 사람은 아닌 듯했다더군.”

속삭이는 그 목소리에 지성은 피식 웃고는 술을 따랐다.

“하여 애심이를 데려간 것이 나라님이시라, 이겁니까?”

“그렇지. 아주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쉬쉬하지만 다들 알고 있지 않나. 또 달리 누가 있겠어? 그 정도 재력이 있으면서 기생을 몰래 데려가야 하는 사람…….”

그렇군요. 지성은 코가 벌게져 상 위로 엎어지는 그들을 지켜보다 혀를 쯧쯧 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에서는 좋아한다 말 한마디 못하면서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못되고 욕심이 많아? 한심하기는.”

술값을 상 위에 두고 주막을 나온 그는 천천히 화방 쪽으로 걸었다. 얼핏 듣기로는 주막의 두 서생의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성은 어쩐지 개운치 않은 표정이었다.

“아무리 전하께서 안하무인에 유아독존이라 하여도 궁녀도 아닌 기생을 사사로이 궁으로 불러들이면 상소가 빗발칠 텐데. 게다가,”

“도령, 뭘 그렇게 중얼거리는가?”

갑자기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에 지성이 펄쩍 뛰어 옆으로 물러났다. 류였다. 주막에서 두 사람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지성은 벌렁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류를 바라보았다.

“화방에 계신 것 아니었습니까?”

“도령이야말로 화방에 있는 줄 알았더니, 술 마셨는가?”

“예, 뭐…….”

“누구랑?”

“글쎄요. 처음 보는 분들이었습니다.”

태연스레 말하는 지성의 말에 류가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다.

“나랑은 매번 바쁘다고 마셔주지도 않으면서, 생판 모르는 치들하고는!”

“그게 그렇게 불만이십니까? 하면 화방에서 좀 더 마시죠. 선배님, 꽃놀이하고 남은 술 화방에 있지요? 어차피 주막에선 얼마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그의 주량에 한하여서라는 전제를 빠뜨린 말이었다. 그는 지금껏 취해본 일이 없을 만큼 주량이 많은 편이라 항상 마지막까지 깨어있곤 했었다. 그런 그가 일부러 술을 마시는 척 등 뒤로 뿌려버린 것이 꽤 되니 아주 거짓은 아닌 셈이었다.

“거짓말하지 말게. 술 냄새가 이리 많이 나는데?”

“그 사람들 장단이나 맞춰주느라 마시는 척 옆에 있어 그렇겠죠.”

“자네가 초면인 사람들 장단은 왜 맞춰줘?”

“그건 그럴만한 사정이……, 잠시만요.”

웃으며 이야기하던 지성은 화방에 다다르자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얼굴이 굳어졌다. 분명 불은 꺼져있는데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고통스러운 신음 같기도 했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우리 화방에 불청객이 든 모양입니다.”

“설마 도둑인가?”

“그럴지도 모르죠. 얼마 전에 값비싼 안료들을 들여오기도 했고, 이번에 받은 의뢰의 금액이 상당하니까요.”

셋까지 세고 문을 여는 겁니다. 지성의 손에는 어느새 두툼한 나뭇가지 같은 것이 들려있었다. 그의 말에 류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표정이 전쟁에 나가는 장수처럼 비장했다. 지성이 손가락을 펼쳤다. 하나, 둘, 셋! 그의 신호에 따라 류가 문을 벌컥 열고 지성이 손에 든 나뭇가지로 불청객을 내리치려 했다.

“으아악! 살려주세요, 도련님!”

“쇠돌이?”

지성은 익숙한 목소리에 나뭇가지를 내려놓았다. 류가 서둘러 불을 붙이자 화방이 낮처럼 환해졌다.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지성의 집 식구인 쇠돌이가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얼굴 이곳저곳이 붓고 멍이 가득하고, 옷은 여러 번 밟힌 듯 흙투성이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려운이었다.

“자네가 왜…….”

“도련님, 살려주세요!”

“쇠돌아, 이게 다 무슨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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