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나리아가 지저귀는 곳에서

1화

따스한 햇살이 열린 창문 틈을 통해 땅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를 보고 하늘 중천에 떠오른 해를 알법도 한데, 방의 주인은 도통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햇살이 침대맡에 묻기 시작하면 오히려 피하기 위해 이불을 둘둘 말고 달팽이처럼 웅크렸다. 저 멀리 들리는 새소리도 그를 깨우지 못하자 여인 하나가 문을 거칠게 열어 제끼며 외쳤다.

"왕자님! 이제 일어나셔야죠!"

이마 위로 금실이 수놓인 흰 천을 꽉 둘러맨 여인은 성큼성큼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체격이 있다보니 그가 걸을 때마다 마루바닥이 삐걱거렸다. 

"왕자님!"

"니냐… 그냥 날 내버려 두면 안돼? 난 틀렸어……." 

"틀리긴 뭐가 틀려요! 정말 안 일어나시면 큰일나요! 오늘은 국제 교육 장소에 가는 하루잖아요."

여인의 성화에 못 이긴 소년은 양손으로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배시시 웃은 소년은 매끄럽게 말했다.

[이럴 때는 교육 장소가 아니라 학교라고 하지. 그리고 하루가 아니라 날이라고 하고 싶었던 거지?]

[어휴, 정말!]

소년의 지적에 니냐라 불린 여인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는 한탄했다.

[이 놈의 빌어먹을 영어는 너무 어려워요. 에크스탄어에 러시아어를 하는 것도 모자라 영어라니! 이러다 불어까지 하라고 지도자께서 이르실까 두렵다고요.]

[앓는 소리 하기는. 내 주변을 다 둘러봐도 니냐처럼 영어를 빠르게 익힌 사람은 없어.]

[얼마 전에 작은 울새에게도 그리 얘기하시는 걸 이미 들었답니다?]

소년은 키득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훌렁, 잠옷을 벗어 던지자 니냐는 익숙하게 그를 받아들며 수발을 들었다. 소년이 욕실에 들어가 이를 닦고 머리를 빗을 때, 니냐는 옷가지와 침대 시트를 한 팔에 모아들고 말했다.

"아침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당연히 버터 올린 만두지."

"그러실줄 알고 이미 준비해놨으니 어서 내려오세요."

니냐는 씨익 웃으며 그 말을 하곤 방에서 나갔다. 소년은 욕실 안에서 마저 머리를 빗었다. 그와 마주보고 있는 거울이 그를 비췄다. 

어머니가 러시아인의 피를 강하게 이어받은 탓에 코카소이드의 외형이 두드러지는 소년은 타국에 간다면 확실히 두드러질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 에크스탄은 그 역사로 인해 튀르기예인과 유사하면서도 러시아인의 피가 반절쯤 섞여있었고 원주민이라 하는 인도유럽 계통의 피도 가끔 섞여 그의 인종적 외형이라 불릴만한 특성은 비교적 흔한 축에 속했다. 

그러니 소년의 얼굴에서 특이하다 불릴만한 것은 눈이었다. 노란색과 주황색 어드매를 오가는 홍채색은 빛을 받을 때마다 반짝였다. 선명한 그 색은 금빛이라 불릴 만했으며 어딜 가든 시선을 이끄는 특징이었다. 소년은 거울을 보며 눈꼽을 떼고는 대강 세수를 했다. 그는 손의 물기를 털고는 빠르게 걸어 나갔다. 그의 하나뿐인 유모이자 가족과 같은 니냐는 아침식사에 지각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니냐가 정성껏 꾸민 거실에 정성껏 차린 아침이 보였다. 따끈한 만두 위에 올라간 버터는 차르르 녹아들어 가고 있었고, 그 옆에는 뎁혀진 우유가 머그잔에 담겨 있었다. 소년이 의자에 앉자 그릇을 정리하던 니냐가 다가와 명찰을 건넸다.

[아자드 아르체 에크비치]

긴 이름이 적혀진 명찰을 가슴팍에 메단 아자드는 크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오늘은 수업이 없으려나?"

"글쎄요. 제가 알겠어요? 일반학교도 아니고, 최초의 국제 학, 학, 학……."

"학교지. 내 말은, 첫날부터 수업을 할 정도로 정이 없는 곳이냐는 거야."

니냐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 올리고는 모른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제 말은 낸들 알겠냐는 거죠. 저는 태어나서 학교라고는……."

"알겠어, 알겠어. 미안, 니냐."

다시 시동이 걸리는 니냐에게 급히 사과한 아자드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유리 너머로 비추는 푸릇한 나무들을 칭찬했다.

"역시 에사드야. 내가 잘 모르지만, 아마 전 세계를 통틀어도 에사드만큼 훌륭한 정원사는 없을걸?"

"말 돌리시기는!"

그렇게 말한 니냐도 창가로 걸어가 정원의 나무들을 바라봤다. 

적통 혈계의 정원인 것 치고 과하게 작고 아담한 정원은 궁이란 위용을 잃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 모습이었다. 높고, 좁은 나무로 빽빽히 채워진 정원은 마치 고개를 뻣뻣히 든 짐승 같았다. 그러다보니 짙은 녹색과 올리브그린이 섞인 나무들은 너무 높아 벽처럼 되어 미로같아 보이기도 했다. 소련의 지배가 끝나자마자 남아있던 러시아 건축가를 데리고 지은 궁은 어딘가 저 먼 영구동토 땅의 모습을 얼핏 닮았으면서도 낫과 망치가 얽힌 정신을 아주 탈피하지는 못했다. 그러다보니 몸체는 투박한데, 세부적인 부분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화려해 어딘가 기묘하게 얽맞지 않았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듯한 모습에 사람들은 그 궁을 '멍청한 궁'이라 불렀다. 아자드는 그 이름이 자신에게 어울린다 믿었다. 이 세상 제일 가는 멍청이가 자신이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그렇기에 유일 혈통의 왕자면서 가장 홀대받는 왕자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엄맘마, 내 정신 좀 봐.”

“왜 그래?” 

“콜야가 왕자님께 먼저 간다고 전해달라 그랬어요. 어휴, 에사드는 언제쯤 자기 딸에게 예절 교육을 시킬 생각인지!”

“에이, 그게 뭐가 어때서. 그 아이의 매력이지.”

“왕자님이 계속 그리 받아주시니 그러는 거 아니겠어요!” 

입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니냐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둘 사이에서 오르내리는 콜야는, 어디서 내려온 건지 모를 붉은 머리색을 가진 여자아이로 올해 아자드와 같이 국제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정원사이자 홀애비인 에사드가 애지중지, 금이야 옥이야 키운 탓에 말괄량이인 면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동갑내기인 아자드에게도 평민답지 않게 예의범절을 지키며 대하지 않은 편이었는데, 아자드는 오히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콜야가 어지간히 신났나 보지. 매번 나하고 같이 있는 탓에 또래 애들하고 어울리기 어려웠잖아.”

어딜가든 모든 이들은 아자드를 피했다. 외모도, 성격도 아닌 이유로 누군가가 자신을 피한다는 사실은 꽤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자드는 이미 익숙해진지 오래라 괜찮았으나, 그와 어울리면서 친구가 사라지게 된 콜야는 종종 새 친구를 사귀고 싶어하는 외로움을 겪는 듯 보였다. 그러다보니 아자드가 하나뿐인 또래 친구에게 미안함을 가지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무리 지은 아자드는 다시 한번 교복 재킷을 정돈하고, 가방을 집어들었다. 그가 현관 앞에 서자 니냐는 물 흐르듯 현관 문을 열었다. 노란색 황금 햇살이 현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오늘도 무사히 다녀오세요, 왕자님!”

“응, 잘 다녀올게.”

-

케일런 닉슨은 굉장히 불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에는 그 흔한 Wi-Fi도 없고, 영화도 없고, 게임도 없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십대 청소년들이 겪을 수 있는 악몽을 전부 응축시켜놓은 것 같은 나라 한복판에 떨어졌다. 21세기에 독재 국가가 웬 말이람. 그러거나 말거나 케일런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돌아갈 미국 학교도 없었고, 그의 편을 들어줄 미국인도 없었다. 

그는 한껏 성이 난 황소처럼 이리저리 세차게 양 옆으로 머리를 흔들고는, 거칠게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럴 때마다 유난히 시리고 파란 눈동자가 번뜩였다. 케일런을 처음 보는 그 누구라도 그런 눈빛을 본다면 단번에 ‘건드리면 안되는 사람’ 이라는 경고문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기에 학교 복도 한가운데에서 자그마치 세 명은 지나갈 수 있을 통로를 여유롭고 쾌적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하, 씨발. 여기 교복은 왜 또 이 모양이야?”

나름 미국 명문학교에 다니던 케일런에게는 국제학교 교복이 성에 찰 리가 없었다. 목 끝까지 조여오는 넥타이는 정신없는 기하학 모자이크 패턴에 뒤덮여 있었고, 소매에는 큼지막한 노란 버튼이 세 개나 이어 달려 있었다. 블레이저는 쓸데없이 많은 색이 쓰여 화려함을 넘어 경박하게 보였다. 그 무엇도 마음에 들지 않는 교복이었다. 

단추 하나를 어떻게든 떼어낼 수 없을까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안녕?”

그의 시선 앞에 어느 한 여자아이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빨간 머리에 콧잔등 주근깨가 눈에 띄는 소녀였다. 케일런의 가슴팍보다 더 아래에 겨우 키가 닿을락 말락한 작은 체구를 가진 아이였다. 

“뭐야?”

[어, 안녕이 아닌가? 그럼, 안녕하세요?]

노골적으로 케일런이 적대를 드러내는데도 소녀는 아랑곳 않고 다시 인사를 시도했다.

“뭐냐니까?”

[이상하다아. 그러면 이게 아니라 좀 더 공손하게 해야하나?]  평안하십니까? 강녕하십니까? 문안 인사드리옵니다?

케일런이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다 생각한 건지, 소녀는 상대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길게 중얼거리다 다시 인사를 건넸다. 점점 일상생활에서 멀어지고 있는 인삿말에 케일런은 한숨을 쉬고는 대답했다.                  

“안녕.”

“와! 안녕! 처음 만날 때는 안녕이 맞는 거야?”

“내가 알기로는.”

“안녕, 안녕!”

외계인과 첫 교신에 성공한 것처럼 소녀는 케일런의 대답을 듣자마자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그럴 때마다 빨간 머리가 퐁실거리며 위로 부풀어올랐다가, 아래로 가라앉았다. 대화가 통한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얻은 여자아이는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콜야라고 해! 콜야 에크반! 네 이름은? 어어,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겨냥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어, 음, 타일러? 에드워드? 존?”

“전부 다 틀렸어. 하나도 비슷한 이름이 없거든. 그리고 정신 사나우니까 저 멀리 좀 꺼져줄래?”

[헉, 꺼져달라고 한 거야? 역시 무섭게 생겼더라니, 성격도 나쁘구나!]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가뜩이나 원하지 않는 장소에 떨어져 저조한 기분인데, 자신을 무슨 외계 생명체처럼 대하는 정체불명 학생의 등장에 케일런의 기분은 더욱 불쾌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녀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쉴새없이 움직이는 입을 멈추기 위해 케일런은 자기 이름을 내뱉었다.

“케일런.”

“그게 이름이야? 성은?”

“성은 알아서 뭐하게.”

“성이 없는 나라에서 왔어? 어디서 방문하셨습니까?”

“미국.”

“미국! 저는 미국을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음식은 뭐야?”

“치즈버거.”

“그렇군요! 나는 치즈버거를 먹어보고 싶어! 맛있겠다, 나는 양고기가 좋아.”

한 명은 단답으로만 말하고 다른 한 명은 상황에 맞지 않는 문장을 얼기설기 끼워넣어 얘기하는 괴상한 대화가 5분쯤 더 이어졌다. 자신을 콜야라 소개한 소녀는 케일런과 더 대화하고 싶어하는지 대화주제를 자기소개에서 학교 소개로 바꿨다. 

“내 미국어가 어색해서 미리 미안해! 배운지 얼마 안됐어요. 한… 세 달? 원하면 우리 학교를 소개해줄게!”

“그래. 세 달이면 나쁘지 않게 하네.”

“칭찬 고마워요! 하지만 나보다 왕자님이 훨씬 더 훌륭해!”

“왕자님? 뭔 헛소리야?”

뜬끔없이 튀어나온 단어에 케일런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라, 왕자님이 아닌가? 고귀한 분을 칭하는 단어가…] “도련님?”

“도련님?”

“응, 도련님!”

*

21세기에서 태어나 왕정제를 몸소 체험해본 적이 없는 케일런은 콜야가 ‘도련님’을 잘못 말해 ‘왕자님’이라고 말한 줄 이해했고, 콜야는 ‘왕자님’ 단어가 아니라 ‘도련님’ 이란 단어가 실제 사용되는 단어로 이해했다. 둘이 오해를 하거나 말거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학교 건물 깨끗하죠, 이제 막 지었어! 건설완성한지 한달 됐거든.”

“한 달밖에 안됐다고? 그럼 넌 이 학교 다닌지 얼마나 된건데?”

“오늘이 내 학교 첫 날!”

“너도 오늘 첫 날이면 어떻게 학교를 설명해주겠다는 거야?”

“감으로?”

“…….”

케일런은 어쩌다 자신이 이런 정신머리 없는 여자와 같이 대화를 하고 있게 되었는지 떠올렸다. 일단 그의 인생은 8학년 이후로 미칠듯이 꼬이기 시작하긴 했다. 하늘에 존재하기는 하는데 딱히 얼굴 한 번 비춘 적 없는 신을 욕하는 것이 그의 아침 일과였다. 케일런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서있자 콜야는 그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국제 학교라 불리는 건물은 케일런이 다니던 학교와 크게 구조가 다르지 않았다. 복도에는 캐비넷들이 쭉 늘어서 있고, 그 맞은 편에는 각 교실들의 문이 보였다. 교실들은 알파벳과 숫자로 구분되었다. 그러나 평범한 학교 건물이라고는 하기에는 어려웠다. 건물의 내장재들이 전부 하얀색, 검은색, 아니면 황금색을 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복도 바닥은 하얀색 대리석 위에 검은색 마블무늬가 섞여 그 위에 황금색 가루들이 반짝거리고 있었고 천장은 판들이 틈 없이 꽉 맞물려 완벽한 새햐얀 벽을 이루고 있었다. 캐비넷들도 전부 하얀색이었으며 교실 창 너머로 보이는 의자와 책상들도 검은색 철제와 하얀색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강박증이라고 느껴질만큼 세가지 색상만 쓰인 건물이었다. 하얗지 않은 건 학교 안을 돌아다니는 사람들 뿐이었다. 케일런은 자신도 모르게 걸어온 길을 뒤돌아봤다. 그가 신은 신발에서 묻어나온 흙이 떨어져 바닥 위에 굴러다녔다. 마치 그게 건물의 티가 되는 것 같아 치워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케일런은 애써 참고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언제 우리 나라에 도착했어?”

“삼일 전.”

“그럼 여기에 대해서 잘 모르겠네요? 아는 게 별로 없겠네요?”

“아니, 잘 아니까 조용히 좀 해.”

“잘 알아? 문제! 이 나라의 지도자 이름은?”

“……..”

“땡!”

“이봐,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이 나라 이름도 삼일 전에 알았는데 지도자 이름이라고 알 턱이 없었다. 다니던 학교에서 정학을 당하고 집에서 빈둥거리며 게임이나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버지라 부르는 남자가 여권을 책상 위에 툭하고 던진 것이 나흘 전이었다. 미국 국무부 장관 명의로 발급되어 전세계 대부분의 나라를 무비자로 돌아다닐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의 종이가 케일런의 눈 앞에 들여진다는 건 별로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헤드셋을 벗은 케일런이 이게 뭐냐는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자, 차가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짐 챙겨라. 내일 출국이다.’

‘네?’

‘널 먹여주고 재워준 값은 해야지 않겠느냐. 지 애비 이름에 먹칠도 정도껏 하고.’

남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휭, 하고는 케일런을 방에 남겨두고 자리를 떠났다. 평소와 같았으면 가지 않겠다고 뻐팅겼겠지만 케일런도 제 목숨을 부지하고 싶기는 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캐리어를 꺼내들었다. 일단 공항에서 걸리면 그 때가서 버리자는 생각에 아껴둔 담배, 모아둔 음반과 잡동사니를 집어넣었다. 그렇게 캐리어를 싸기 시작한 지 3시간도 되지 않아 남자는 케일런을 차 뒷편에, 캐리어를 차 트렁크에 집어 던졌다. 척 봐도 높으신 분들이 타는 자동차는 빠르게 공항으로 달렸다. 일언반구의 설명 없이 떠나게 된 케일런은 자신이 가게 될 나라의 이름이 에크스탄이라는 걸 도착 10분 전 기내 안내 방송으로 알았다. 

아무리 자기 아들이 사고를 쳤겠거니 싶어도 독재국가에 보내는 건 아니지 않나? 그것도 21세기에? 물론 독재정치를 펼치고 있는 나라가 아예 없는 건 아니겠지만 그나마 미국과 항상 으르렁 대고 있는 나라들도 자신들이 대놓고 국제사회에 ‘나는 인권을 말살하고 독재합니다’라고 선언하지 않는 시대에 이런 나라로 오다니. 청소년학대로 신고하면 분명 접수될만한 사항이었건만 아동복지국은 무얼 하는지 남자를 잡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리 위대하신 지도자의 이름은 아슬란 빅체 에크비치. 이 땅을 훌륭하고 올바르게 세우신 빅토르 이바노비치 에크비치님의 아들이시죠.”

“하…….”

그냥 독재정치도 아니고 부계승권이라니. 그게 뭐가 좋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건지 케일런은 이해할 수 없어 착잡해지기만 했다. 여기서 더 착잡해지면 바로 집으로 달려가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단식 투쟁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아마 케일은 안 외워도 되겠지만, 그래도 외우면 좋을 거예요!”

“뭘?”

그러자 콜야는 자신의 양 뒷발을 모으고는 똑바로 섰다. 그러고는 자신의 턱끝을 치켜들고는 뒷짐을 졌다. 한쪽 손을 이마에 가져다 경례를 한 작은 빨간머리 소녀는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위대하시고 자애로우신 황금의 아들, 이 땅의 수호자이시자 적합한 태양의 아들, ‘아슬란 빅체 에크비치’님! 무궁한 영광을 그대에게!”

“씨발.”

케일런은 바로 등을 돌려 달음박질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미치기 전에 이 지옥에서 도망가야 했다.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카테고리
#오리지널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