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몽

7. 유주 밖으로

간옹은 그날 오후 늦게 돌아왔다.

“역시 주 정부도 물품이 남아도는 건 아니어서 팔 수 있다고 내놓은 목록은 종류도 수량도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서 최대한 실속있게 골라야 해요.”

설탕과 의약품, 세제류로 살 것을 정하고, 다음날이 되자 청사로 찾아가는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은 다시 싸우러 나가는 것처럼 엄숙했다.

다행히 담당자는 유비 일행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주었다. 탁현까지 실어 나를 수레까지도 빌려주겠다고 했다.

포상금 대신 받는 물품이란 점을 생각해도 후한 태도라 유비도 경계심이 들기 시작했다. 장비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유비도 자기 보호 본능과 경제관념을 갖추고 있었다.

과연 절차가 끝나고 나서, 며칠 뒤 세 사람은 다시 유언의 사무실로 불려갔다.

“청주에서 연락이 왔네.”

역시 인편으로 배달된 공문서를 유언이 유비에게 내밀었다.

“청주 지사 공경은 황건교 때문에 큰 곤경에 빠져 있는 모양이야. 유주가 방어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원군을 요청했네.”

“저희는 유주 수비를 위해 자원한 민병대인데요.”

유비가 슬쩍 사양해 보았다.

“알고 있네. 하지만 지난번 전투에서 보여준 활약을 생각하면 자네들은 군사 쪽으로도 썩히기 아까운 인재야. 총포를 거의 쓸 수 없고 적이 외계 무기로 무장하기까지 했는데 정규군과 기존의 전술에만 의지할 수 없다는 말은 이미 유주군 내에서도 나오는 중이고.”

유비는 관우와 장비를 돌아보았다.

청주가 정말 위급하다면 그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놔두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탁현을 돌보기에도 바빠 다른 곳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지만, 실은 탁현을 되살리려는 유비의 노력이 부딪치는 벽은 언제나 다른 도시, 다른 주와 교류하기 어려워졌다는 점에 있었다.

혼자 안정을 되찾고 풍요로워지기에 탁현은 너무 작은 도시였다. 다른 곳들도 모두 안정을 찾고 사람과 재화가 오갈 수 있어야 탁현도 살 수 있었다.

그러니 유비는 청주를 구하러 가는 일에 기꺼이 참여할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관우와 장비는 어떨지 알 수 없었다.

‘전쟁터 나가는 건데 싫다는 사람 억지로 조를 수도 없고.’

관우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가고 싶어.”

장비도 씩 웃으며 가세했다. 유비는 동생들을 보고 배시시 웃었다.

“그럼 결정됐네.”

유비가 유언을 바라보았다.

“저희 세 사람은 보다시피 따르기로 했습니다. 다만 저희가 인솔한 오백 명의 의견은 또 다를지 모르니,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희망자를 새로 받을까 합니다.”

“그렇게 하게.”

유언이 얼굴을 펴고 승낙했다.

“어차피 지사님이 원하는 건 세 분뿐입니다. 나머지 오백은 따라와도 그만, 안 따라와도 그만일 거예요.”

사무실을 나오고 나서 간옹이 한 마디 했다.

“그야 관우랑 장비는 거의 만화 주인공 같았으니 탐이 나겠지만 나는 왜? 의원이라 간판 삼기 좋아서?”

“무슨 소리야, 언니도 굉장했잖아.”

관우가 찔렀다.

“평소엔 그렇게 둔하고 순하더니, 언제 그렇게 단련한 거야?”

“엄, 그냥 보통 헬스하고, 그동안 환경운동하고 선거운동 하면서 뛰어다닌 거? 그리고 자전거 탄 거?”

유비가 머리를 긁적였다.

“너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잖아. 난 그때 솔직히 분위기도 좀 탔고, 어떻게 나서서 뭘 했는지 기억도 제대로 안 나.”

“나도 실전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어.”

관우가 유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게 혼자만 아무 것도 못한 것처럼 여길 필요 없어. 나도 정신 하나도 없었고, 이렇게 혼자만 뛰어나가도 되나 했고.”

“그랬구나.”

자기 눈에는 영화에서 그대로 뛰어나온 듯 무적의 영웅으로 보였던 관우도 속으로는 자신이나 거의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비는 신기해서 두 눈을 깜박거렸다.

“사실 그러면 안 되는 게 맞지.”

관우가 기색을 고쳤다.

“중화기 위주의 현대 전술이 실효성을 잃었는지는 몰라도, 지휘관 혼자 뛰어나가서 싸우는 게 전술적으로 현명한 일이었던 시절은 없어.”

“사극에선 장수들끼리 일 대 일 전투 많이 하잖아?”

“그건 사극.”

관우가 ‘요 머리에 과연 전술이라는 어려운 개념이 들어갈 자리가 있을까?’라고 말하려는 듯한 눈으로 유비의 머리를 훑어보았다.

“이대로 탁현으로 돌아갈 게 아니라면 진지하게 연구해봐야 할 일이야. 언제까지고 이렇게 싸울 순 없어.”

유비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우릴 따라올 사람들 목숨도.”

이번에도 의논하면서 걷다 보니 금방 숙소에 도착했다. 유비가 분위기를 바꾸고 싶은 듯 하하 웃으며 유리문을 밀었다.

“하기야, 우리 주도 아니고 청주까지 가서 싸우자는데 따라오는 사람 있기나 할까 모르겠네. 나도 가자고 설득하기 미안한걸. 저녁때 공지 한 번 하고, 혹시라도 따라오고 싶은 사람 있으면 상자 놓을 테니 이름 적어서 내라고 하자.”

숙소 비품실에서 찾아낸, 아마 가벼운 이벤트 용이었을 플라스틱 모금함이 신청서 제출함이 되었다.

굳이 남의 이름을 적어내거나 할 이유가 없으므로 함은 다소 허술하게 관리되었다. 식당 앞 사람들 많이 오가는 복도에 다음날 점심때까지 놔뒀다가 점심 먹고 나서 열어보았다.

“이상하게 무겁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쏟아져나온 이면지 조각들 앞에 유비가 할 말을 잊었다.

“일단 세어봅시다.”

간옹이 소형 화이트보드에 옮겨적을 준비를 했다. 전 같으면 태블릿의 메모장이나 장부 정리 기능을 이용했겠지만 이제 그런 소형 단말기는 시장도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전쟁 나가는 거고 위험하다고 내가 공지할 때 말 안 했던가?”

유비가 종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간옹은 처음 작성했던 오백 명의 명부와 대조해가며 새 명부를 작성했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전처럼 작업 도중에 쉽게 내용을 수정할 수 없으니 잡담에 정신 팔려 실수해선 안 되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작업 끝난 뒤에 하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 되었다.

“......2백 37명.”

마침내 인원 파악을 마치고 유비가 쌓였던 물음을 토해내었다.

“거의 절반이네? 왜 이리 많아?”

“지난번 전투 보고 들뜬 나머지 덥석 신청한 사람도 있는 거 아냐?”

장비도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서야 머릿수 늘리는 게 작전이었으니까 많이 신청하는 게 좋았지. 청주에 가면 진짜 전쟁을 하게 될 거라고. 죽을 수도 있는데......”

“신청했다고 다 데려갈 필요는 없어.”

관우는 느긋하게 기지개를 켰다.

“청주에서 원하는 건 정규군이야. 정규군이 움직이려면 준비 기간이 필요하고, 지원자들 중에 정말 쓸 만한 사람 솎아내기엔 충분한 시간이지. 싸우러 간다는 걸 알면서 지원했다면 당연히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겠지?”

곧 지원자 237명은 혹독한 훈련에 동원되었다.

탁현에서는 시간이 없어 제식 훈련도 간신히 했었다. 이제 청주로 보낼 군인들의 보급품과 행군 수단을 마련하는 동안 관우는 장비와 함께 제식 훈련뿐 아니라 격투기와 근력 훈련도 시작했다. 물론 관우 자신이 군인일 때 받은 훈련을 바탕으로 내용을 채웠다.

유비도 다른 지원병들과 나란히 훈련을 받았다. 유주군의 출전 준비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지원하지 않고 탁현으로 돌아가기로 한 사람들의 귀환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는지도 그의 소관이다보니 매우 바빴지만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솔선해서 참가했다.

그러면서 함께 훈련받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과연 버티지 못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그만두고 귀환할 수 있다고 말해두었기 때문에 그들은 바로 귀환조로 옮겨가 간옹의 안내대로 여기까지의 포상을 받고 짐을 쌌다.

그러나 힘써서 버티는 사람들도 많았다. 관우가 일부러 통과 기준을 높게 잡고 미달인 사람은 가차없이 떨어뜨리고 있는데 이를 악물고 통과하려고 발버둥쳤다.

이제 유비는 그러다가 부상자가 생겨날까봐 겁이 났다. 그만 포기해줬으면 싶은 사람 몇을 눈여겨 봐 뒀다가 점심때 식판을 들고 곁에 가 앉았다.

“많이 피곤해 보여요.”

날씨 이야기로 시작해서 무난한 한담 조금 한 끝에 본론으로 넘어갔다.

“청주에 가면 더 힘든 일도 많을 텐데 버틸 수 있겠어요?”

“버틸 수 있습니다.”

피곤해 보인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들의 태도는 고집스러웠다.

“우린 외계인 침략 후 직장을 잃었습니다.”

유비가 왜 와서 말을 걸었는지 다 안다는 태도로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탁현으로 돌아가봐야 고물 수집밖에 할 일이 없습니다. 차라리 다른 기회가 왔을 때 잡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청주에서 할 일은 진짜 전쟁입니다. 이번처럼 항상 운이 따라주지는 않을 거라고요. 여러분이 자칫 죽거나 다치면 저는요? 여러분을 무사히 데리고 돌아가겠다고 남은 사람들에게 약속했는데요?”

그들 중 몇은 낯빛이 어두워져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처음 나서서 고집을 부린 사람과 그 옆 사람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저희는 어차피 탁현에 부양할 가족이 남지도 않았고, 앞으로 다시 안정된 생계수단을 얻는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외계인들이 물러갔다고 해서 이전 삶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플라스틱 줍다 굶어 죽거나, 사이비 놈들과 싸우다 죽거나 둘 중 하나라면 싸우다 죽고 싶습니다.”

청주로 가는 유주의 지원군은 5천 명, 1개 여단이었다. 탁현 대대는 인원이 이백 명으로 줄어 유비 중대가 되었다.

여단장은 유비 일행에게 친절하고 정중했다. 유비 중대에도 군용 보급품을 나눠주고 전술 회의에도 유비와 관우가 참석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청주의 사정이 어떤지도 설명해주었다.

청주는 유주보다 사정이 훨씬 나빴다. 황건교가 침범하기 전부터도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경찰과 군이 떼지어 순찰을 돌며 겨우 질서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민간인 여럿이 이번에 쳐들어온 황건교에 넘어가면서 청주 지사의 영향력이 제대로 미치는 곳은 바리케이드 안의 관공서들밖에 안 남다시피 했다.

원래도 수가 많던 황건군이 민간인의 동조까지 받으면서 그 규모는 이제 파악조차 안 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를 꼭 무찔러야 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틈을 봐서 유비가 주장했다.

“지난번에 대장이 쓰러지자 그 많던 황건군이 일시에 무너지는 것을 다들 보셨지요?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사기를 꺾으면 훨씬 쉬워질 겁니다.”

“우리도 그 편이 좋소만.”

여단장이 청주 지도에 눈을 돌리며 설명했다.

“황건군의 지휘관이 어디 위치해 있는지는 가봐야 알 수 있소. 청주에서도 유주에서 그랬듯 톨게이트와 몇몇 건물을 거점으로 농성하고 있는데, 다 본래는 민간시설이었기 때문에 지금 어디가 더 중요한 거점인지 여기서 짐작하기엔 한계가 있소.”

외계인 침략 전엔 전쟁도 먼 과거의 이야기였다. 군사적 요충지도 아니고 주와 주 경계 정도에 눈에 띄는 군사시설물이 넉넉히 있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 테이블 위에도 군사지도뿐 아니라 민간용 청주 관광 안내지도가 함께 펼쳐져 있었다. 장구핀을 꽂거나 메모하는 등의 일을 다 그쪽에만 하고 있는 걸 보면, 새로 인쇄하기 힘들어진 군사지도가 상할까봐 아끼고 있는 것 같았다.

유비는 지도에 표시된 톨게이트와 휴게소, 쇼핑센터 등을 훑어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황건군 대장이면 어디를 노릴까?’

물론 여기 모인 사람들은 자신만 빼고 다 군인이고, 군사적인 판단이라면 알아서 잘 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황건군의 지휘자도 유비와 같은 민간인이었다.

“이런 상태라면 정찰 보내기가 쉽지 않을까요?”

유비가 용기를 내어 제안했다.

“적도 민간인 출신 아마추어고, 이런 식이라면 암호나 간단한 식별표로밖에 피아를 구분하지 못할 거예요. 대오가 정돈되어 있을 리도 없고요. 그러니 민간인으로 위장한 정찰단을 내보내서 적이 어디에 집중하고 있는지 직접 요소를 파악해보죠.”

그러자 여단장이 유비를 빤히 바라보았다. 다른 군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내가 그렇게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소릴 했나?’

“먼저 그렇게 제안해주니 이야기가 빠르겠군.”

여단장이 입을 열었다.

“그 말대로요. 다만 민간인들 틈에 숨어들어서 작전을 수행하려면 그만큼 민간인 행세에 능한 사람들이 필요할 거요.”

“짧고 간소한 두발에 말투도 딱딱한 사람들이 가면 단번에 들킨다는 말씀이시군요.”

관우가 어깨를 으쓱 했다.

유비는 관우를 돌아보고 여단장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방긋 웃었다.

“그러니까 저희 셋이 가면 딱이네요.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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