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바쟈라는 이름의 여자를 아시나요?
이소브 이제베는 선언하듯 말했다.
마을 집회에 그녀도 데려가야겠습니다.
그러고는 어떠한 반대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곧장 뒤돌아 걸어갔다. 노인의 낡은 관절로는 도무지 따라잡지 못할 빠른 걸음이었다. 실라일란의 반발을 예상한 듯했다.
그리고 이제베의 행동은 몹시 현명했다. 별지기가 집회의 참석자 보조를 선정할 권한을 온전히 갖는 것과는 별개로, 실라일란은 이 결정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젊은 별지기가 뒤돌기 전 잠시라도 망설였다면, 하다못해 그녀가 따라잡아 볼 만한 속도로 움직였다면 실라일란은 즉시 그를 붙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베가 결정을 폐기할 때까지 놓아 주지 않았을 것이다.
마을 집회란 그렇게 단순한 개념이지 않다. 눈과 얼음의 땅에 거하는 모든 마을이 모여 땅의 주인을 뵙는 자리다. 마법사에게 새로이 성인이 된 이들을 소개하고 그의 축복을 받아 남녀의 결합을 성사하는 성스러운 행위다. 그러니 한낱 신의 딸 따위가 섞일 만한 곳이 아닌데.
소녀의 목적을 도와야 한다는 마법사의 뜻을 거역하려느냐고 묻는다면 틀렸다. 다만 그의 말씀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 이제베가 무언가 실수를 하지 않았는지 의심할 뿐이다. 집회에 데려가는 것이 좋은 방법이 아닐 수도 있잖은가. 그보다 나은 선택지가 신의 딸을 위해 존재할 수도 있는데, 아니 분명 존재할 터인데!
실라일란은 동시에 지혜로운 장로였다. 오래 살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제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는 짓은 어리석다. 반대로 아들이 맞고 제가 틀릴 가능성도 항상 열어 두어야 했다. 실라일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간단한 행위만으로도 벌써 무릎이 시렸다. 이소브의 노장로는 뼈마디의 욱신거림을 견디며 걸음을 옮겼다.
아이를 직접 만나 봐야 답이 나올 것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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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라일란? 여기 이름은 하나같이 독특하네요."
이소브의 장로는 무례하게 구는 방문자에게 그의 이름도 만만치 않음을 일깨워 주었다. 비코는 멋쩍게 웃었다.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어요?"
"내 손녀에게 들었다."
"손녀요? …아."
"곤 말이다."
실라일란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
비코가 밤색 눈동자를 빛내며 물었다. 실라일란은 대답 대신 소녀의 앉은 모양을 죽 훑어보았다. 세상에, 그 귀한 곰 가죽을 저애 덮으라고 줬군. 이런, 저 가장 좋은 열석도. 비코는 다리를 덮은 하얀 털가죽 위로 주먹만한 돌을 만지작거렸다. 동시에 슬쩍, 눈을 굴려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제가 일어서서 맞이했어야 했나요?"
죄송해요, 예법에는 늘 서툴러서요. 덧붙이는 말투에는 하나도 진심이 보이지 않았다. 버릇없는 아이로군, 생각하며 실라일란은 고개를 저었다.
"됐다. 환자에게 그런 걸 바랄 생각은 없어."
"하지만 전 아프지 않은데요."
"……."
건방지다. 실라일란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실라일란은 한 마을의 우두머리 장로로서, 눈과 얼음의 땅에 거하는 모든 이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따박따박 하는 말대답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노인은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겨우 유지한 채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연한 주황의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 집회에 모이는 어떤 마을에서도 본 적 없는 색의 조합이었다. 파랑을 상징으로 갖는 이소브 공동체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 신선함에 실라일란은 마음을 겨우 누그러뜨렸다. 아이는 이방인이다. 그래, 신의 땅에서는 문제되지 않는 정도일 수 있어….
비코는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았다.
"그런데 여기는 왜 오셨어요?"
어미가 아들을 방문하는 데에 이유가 필요하더냐, 하고 되물으려는 마음을 꾹 참았다. 제가 누운 곳은 이소브 이제베의 집이고, 그 젊은 별지기는 실라일란의 아들임을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실라일란은 대신 다른 질문으로 말을 돌렸다.
"너는 마법을 찾으러 왔다고 했느냐."
"네."
"왜 마법을 찾지?"
비코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살리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살리고 싶은 사람! 실라일란은 날카로운 바늘에 스친 듯한 통증을 느꼈다. 겨우 중심을 잡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비코의 밤색 동공에 안광이 일렁거렸다. 오두막을 밝히는 광석 빛임을 알았지만, 실라일란은 순간 그것이 그리움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비슷한 바람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소망이었다.
"…마법은 죽었다. 신의 땅에는 알려지지 않았느냐?"
실라일란이 말했다. 살짝 누그러진 어조였다.
비코는 얼굴을 붉혔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게 뭔 뜻인지 모르겠어서요."
"말 그대로다. 세상에 마법은 없어."
"그럼 그 흔적이라도 찾게 도와주세요."
"……."
이제베와 짜기라도 한 듯 똑같은 말. 아들의 목소리가 비코의 것 위로 겹쳐 들렸다. 그러자 제가 왜 여기에 있는지가 기억났다. 그랬지. 별지기의 결정을 반대할 근거를 찾으러 왔다.
"제발요. 마녀나 마법사를 만나고 싶어요."
소녀가 애원했다. 실라일란의 목소리가 도로 굳었다.
"마법사님은 네가 원한다고 뵐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마녀님은 더더욱이고."
"곧 마을 집회가 열린다고 들었어요. 거기서 마법사를 만날 수 있다면서요. 저도 데려가 주세요."
실라일란은 말문이 막혔다.
"…내 아들이 그런 것까지 얘기하더냐?"
"네?"
"이제베 말이다."
"그 사람이 누군진 모르겠고…. 전 곤한테 들었는데요."
저절로 뒷목에 손이 올라갔다. 그 방정인 입이 언젠가 뭔가를 해낼 줄 알았다. 실라일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곤은 늘 경계가 너무 없는 것이, 진작에 알았지만 역시 이소브의 장로감은 아니다. 남편의 마을에서 살고 싶다는 손녀딸의 소망을 그녀가 알면서도 말리지 않은 이유였다.
그 애 오라비를 붙잡아 뒀어야 하는데.
"저도 데려가 주세요."
실라일란의 한탄 때문에 생긴 짧은 침묵을 뚫고 비코가 다시 요구했다.
"제발요…."
"안 된다."
"왜요!"
"너 집회가 뭐 하는 곳인지 아니?"
실라일란이 날카롭게 질문했다. 소녀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 대답은 노인의 기세에 가로막혀 나오지 못했다. 실라일란은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답을 듣기 위한 물음이 아니었기에 생각할 여유 따위는 주지 않았다.
"집회는 눈과 얼음의 땅에 거하는 모든 마을이 모여 땅의 주인을 뵙는 자리야. 그럼 거기서 이뤄지는 의식에 대해서는 아니? 마법사에게 새로이 성인이 된 이들을 소개하고 그의 축복을 받아 남녀의 결합을 성사하는 성스러운 행위다."
비코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실라일란은 소녀와 눈을 맞추며 단단히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 한낱 너 따위가, 감히 섞여도 좋은 곳이 아니다."
"…알았어요."
끝까지 물고늘어질 줄 알았던 비코는 웬일인지 순순히 꼬리를 내렸다. 햇빛에 그을려 가무잡잡한 손가락이 멋쩍게 열석만 감싸잡았다. 실망했는지 잔뜩 기가 죽은 모습이 안쓰러웠다. 실라일란은 혀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손녀뻘의 아이를 너무 강하게 몰아붙인 것은 아닐까. 엷은 죄책감이 느껴졌다.
"대신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실라일란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라."
"혹시 바쟈라는 이름의 여자를 아시나요?"
실라일란은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커다란 얼음덩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돌멩이가 들어간 눈덩이를 잘못 맞았을 때 느낀 충격과 꼭 같았다. 실라일란은 혼란스러워졌다. 눈덩이에 돌을 넣은 아이들은 단단히 혼냈는데, 이번에는 그럼 누구를 야단해야 할까.
"실라일란? 괜찮으세요?"
실라일란은 순진하게 저를 올려다보는 비코의 눈동자를 보았다.
순수한 궁금증으로 질문한 저 애는 눈덩이에 돌을 넣지 않았는데.
바쟈.
이소브 실라일란은 바쟈라는 이름의 여자를 알았다.
정확하게는 제가 바쟈라고 이름붙인 아기를 알았다.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을까.
그 아이가 누구의 딸인데.
.
.
.
"바쟈."
입에서 습관처럼 여자의 이름이 나왔다.
비코는 옆으로 누워 몸을 둥글게 말았다. 누군가의 예측처럼 몸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날씨가 너무 쌀쌀해 잠자리를 벗어나기가 싫을 뿐이었다. 품에는 주먹만한 돌멩이를 꼭 쥐었다. 뜨끈뜨끈 기분 좋은 열이 나는, 그래서 사람들이 열석이라고 부르는 돌이었다.
"들었죠? 마법사를 만날 수 있대요."
거의 다 온 것 같아요, 들리지 않게 속삭이며 털가죽을 끌어당겨 덮었다. 당신의 방법을 써 보려고 했는데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허락해 주네요…. 비코가 노인의 앞에서 포기한 척 꼬리를 내린 건 물론 연기였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멍청이가 어디 있겠는가. 일단은 대충 넘기고, 바쟈에게 배운 은신술이라도 써서 어떻게든 몰래 참여할 심산이었다.
"어찌 됐든 좋은 일이니까요, 뭐."
비코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 보니 기죽은 척 얌전하게 구는 짓도 당신이 가르친 것이었죠."
차라리 부러질지언정 굽히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던 아이가 있었다. 그 고집 때문에 처한 위험에서 파란 여자를 만나 구원받았다. 그날 비코는 굽히는 것이 때로는 승리의 방법임을 배웠고, 바쟈 스노는 그녀의 신이 되었다.
…알았어요. 대신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비코는 제가 꼬리를 내렸을 때 따라서 녹아내리던 노인의 표정을 기억했다. 엄격함과 규범이 빠져나가고 빈자리를 동정이 채웠다. 그래라, 하고 부드러워진 목소리에 비코는 발끝부터 타고 올라오는 전율을 맛봤다. 사람을 주무르는 일을 간단하게 해낼 때. 처음에는 어려웠으나 갈수록 쉬워짐을 발견할 때. 나는 이럴 때 내가 당신과 닮아감을 느껴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바쟈.
"그때 나도 꽤나 당신처럼 보였을까요?"
비코는 털가죽을 끌어당겨 코까지 덮었다. 체온으로 덥혀진 공기가 얼굴로 훅 끼쳐왔다.
"나도 당신처럼 불릴 수 있을까요?"
바쟈 스노.
여자를 가리키던 별칭은 수도 없이 많다.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울 레이디, 제국의 현 황제가 아직 카미로사 대공이었을 때 비밀리에 그를 보좌하던 심복. 기묘한 은신술로 기척을 감추는 그림자, 사람에게 알려진 대부분의 독에 통달한 사람….
그 중 비코가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것은 '카미로사의 여우'. 바쟈 스노가 카미로사 대공의 최측근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기 전, 대공성에 빌붙어 사는 - 것처럼 보이던 - 여자를 일컫던 이름이었다. 의도에는 약간의 멸시가 담겼지만 그래도 그 별명이 가장 좋았다. 그것이 바쟈의 본질을 가장 근접하게 꿰뚫은 단어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영리함의 상징 중에 하필 여우인 까닭은, 올빼미보다 교활하고 뱀보다 무해해 보이기 때문이라고 비코는 혼자 해석하곤 했다. 스노의 쌍둥이 남매는 눈치가 빠르고 영악하다. 뚜렷한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동생과 다르게 누이 쪽은 선악의 구분이 모호하여 더 두렵다. 바쟈 스노의 계집조차 홀릴 얼굴과 화려한 언변에 넘어가지 않을 이가 얼마나 될까. 여자가 천사 같은 표정 뒤로 얼마나 시커먼 속내를 감추고 있는지는 또 몇이나 알까.
비코는 그 이중성 하나하나마저 사랑했다. 낱낱이 살피고 삼켜서 제 피와 살을 이루도록 흡수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저에 관한 세간의 평가가 바쟈 스노와 같아지도록. 세상이 그녀를 보듯이 비코를 바라보도록.
피아트의 여우. 비코는 사람들이 바쟈를 칭하듯이 저를 불러 보았다. 그녀에게는 멋들어진 집안이 없었기에 구휼원이 위치한 지역으로 남몰래 성(姓)을 삼았다.
비코, 피아트의 여우. 어감이 좋았다. 마음에 들었다. 발음이 잇새와 혀 위를 부드럽게 타고 흐른다.
비코는 그 호칭을 몇 번이고 입 안에서 굴리다가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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