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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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브 레제릿타가 누구인가?

이우는 밤 by 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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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에 가도 된다고 하셨다면서요."

난데없이 들어온 목소리에 실라일란은 화들짝 놀랐다. 젊은 별지기가 여느 때처럼 발소리 없이 다가와 뒤에 서 있었다.

"놀랐잖니. 기척 좀 내고 다녀라."

이제베는 미소만 지었다.

"마음에 안 들어하시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왜 생각을 바꾸셨는지요?"

"내가 끝까지 반대한다고 네가 꺾일 고집이더냐?"

"그것도 그렇지만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게 다인가요?"

이제베는 늘 그렇듯, 진실을 알고 있다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이마에 커튼처럼 드리워진 밝은 색 앞머리 사이로 황금빛의 홍채가 어른어른 엿보였다. 실라일란을 직시하는 눈동자는 별을 보듯 기묘했다. 속엣것이 투명하게 비치는 기분. 실라일란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바쟈를 알고 있었다."

"바쟈요?"

"그래. 레제릿타의 딸."

"레제릿타…."

이제베가 말꼬리를 흐렸다.

너 기억하니? 마녀가 울던 날에 태어난 저주받은 쌍둥이를. 실라일란은 훤칠하게 큰 아들의 얼굴을 겨우 마주보았다. 살짝 발뒤꿈치를 들어 길게 늘어진 푸른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저를 마주보는 황금색 홍채에 대고 시선으로 물었다.

별지기의 눈동자는 기이하게도, 햇빛 아래 온전히 드러나면 그 신묘함을 잃고 만다. 그리하여 실라일란은 비로소 편안히 아들을 쳐다볼 수 있었다.

마녀가 울던 날에 태어나 별의 예언을 받지 못한, 그래서 네가 네 손으로 눈밭에 내다 버린 그 가여운 아이들을.

이제베가 보기 드물게 놀란 기색을 띠었다.

"그 아이들이 살아 있다구요?"

"동생 쪽만. 누나는 죽었더구나."

"그런데 그게 비코와 무슨 상관인가요?"

"신의 딸은 살리고 싶은 사람이 있어 마법을 찾는다 했어."

바쟈라는 이름의 여자를 아시나요? 소녀가 물었다. 실라일란은 당황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비코가 횡설수설 설명을 덧붙였다.

다름이 아니고, 곤도 할머니도 똑같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어서요…. 혹시 관련이 있을까 하고.

"그 사람이 레제릿타의 딸이란 말인가요?"

이제베와 똑같은 질문을 그에 실라일란도 물었다.

네가 살리고 싶다고 한 이가 그 여자냐?

아이가 고개를 끄덕거림은 동의의 의미다. 그러면 노인은 말할 수밖에 없었다.

"힘이 닿는 데까지는 도와 주어야겠다."

"그렇군요."

이제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왜 비코를 돕겠다 결정했는지 아시나요?"

"별의 말씀 때문이 아니었니?"

"그것도 있지만,"

이제베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실라일란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앞머리가 도로 얼굴로 흘러내리고, 황금빛 눈동자가 신기를 되찾았다. 실라일란은 습관적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제베가 말을 이었다.

"…전 그 아이가 레제릿타를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순간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것은 여자의 뒷모습이다. 꼭 밤하늘과 같은 색으로, 곱슬거리는 단발머리가 풍성하게 흩날린다. 실라일란은 홀린 듯 소녀에게 눈을 고정한다. 레제릿타가 몸을 돌린다. 아버지의 황금색, 실라일란이 사랑한 그 눈동자를 가지고 환하게 웃는다.

레제릿타의 시선은 분명 제 뒤편 어딘가를 향해 있건만, 실라일란은 꼭 딸이 제게 대고 웃은 것 같다는 착각을 느낀다.

이소브 레제릿타, 고집 세고 제멋대로지만 그럼에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실라일란의 어여쁜 막내딸.

"비코 그 아이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군요."

나는 이것을 해야겠어요, 주장하는 목소리에 실린 알 수 없는 확신. 하늘색 머리카락 사이로 별지기의 신묘한 눈이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위아래로 길쭉한 홍채를 마주 올려다보다가, 실라일란은 아들도 저와 같은 장면을 떠올렸음을 깨달았다. 이제베가 웃었다.

"정말 레제릿타를 닮지 않았나요."

.

.

.

이제는 거의 서른 해 가까이 지난 옛일이다. 

이소브의 우두머리 장로에게는 세 자녀가 있었다. 막내가 발목이 예쁜 킨델라, 둘째가 별지기의 운명을 이고 태어난 이제베. 둘도 물론 훌륭하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는 맏이이다.

이소브 레제릿타가 누구인가.

이소브의 우두머리 장로의 딸, 마을 별지기의 누이. 밤하늘로 짜낸 머리칼과 황금으로 빚은 눈동자를 가진, 눈과 얼음의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 마법사와 마녀의 땅에는 왕이라는 지위가 없지만, 만약 존재한다면 가히 이소브의 공주라 불릴 만한 위치의 여인이었다.

실라일란은 큰딸을 사랑했다. 세 자녀 모두 남편의 금색 눈동자를 물려받았지만, 머리색마저 그와 똑같은 아이는 레제릿타뿐이었다. 남편 - 이소브 셀리타가 절벽에서 미끄러져 돌아오지 못한 뒤로 그녀는 레제릿타를 더욱 아꼈다. 딸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들어주려 했고, 철저하게 규범지향적인 성격마저도 그녀 앞에서는 한참 유해졌다. 그렇게 17년을 길렀다.

워낙 귀하게 자라난 탓일까, 아니면 거울돌에 비치는 제 얼굴을 너무 사랑해서일까. 결혼할 나이가 된 레제릿타는 마을 집회에서 좀처럼 짝을 구하지 못했다. 한두 해까지는 괜찮았으나, 스물을 넘기면서부터 실라일란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집회에서 첫 짝을 구하는 것은 보통 열아홉이 마지노선이다. 갓 성인이 된 열일곱 살짜리들에게 스물은 너무 많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레제릿타가 성격이 모난 것은 아니었다. 고집이 조금 있긴 했지만 실라일란의 딸은 참한 처녀였다. 오냐오냐 예쁨만 받아 버릇없지도 않았고, 사랑을 받은 만큼 남을 사랑할 줄 알았다. 그러면 뭐가 문제일까. 내년이면 킨델라도 마을 집회에 갈 나이가 된다. 네 살 터울의 미혼 자매가 나란히 집회에 참석하는 모양은 썩 보기 좋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실라일란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레제릿타는 스무 살이 되던 해의 마을 집회에서 사랑에 빠졌다. 눈까마귀의 검정을 가진 열여덟 살짜리 덴델 청년이었다. 딸을 덴델 마을로 보내던 밤 실라일란은 참지 못하고 몇 방울 눈물을 흘렸다. 우두머리 장로의 든든하던 등이 유달리 가냘파 보이는 날이었다. 이소브 킨델라는 어머니의 옷자락을 잡고 서서 저만큼은 결혼해도 마을에 남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이소브 이제베는 별을 대신하여 부부를 축복하다가 하늘의 목소리를 들었다.

불행해지겠구나.

별님의 부드럽게 울리는 저음이 아니었다. 남성보다는 여성의 것에 가까운, 찢어질 듯 날카로운 고음의 목소리. 이제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은 구름 뒤로 자러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니다. 별지기는 눈을 비볐다. 별님은 분명 저기 계신다. 여느 때처럼 묵묵히 이소브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평소보다 존재감이 흐릿해 보이는 것은- 이제베는 눈을 돌렸다. 역시 옆의 저 달이 유달리 밝기 때문에.

그럼 이것은 달님의 뜻인가. 이제베가 결론을 내리기 무섭게 하늘이 다시 말했다. 

저 애는 불행해질 거야!

그것은 예언이었으나, 이제베가 흔히 듣던 별의 어조는 아니었다. 별님은 미래의 관찰자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담담히 전달하듯 말씀하신다. 

그러나 달의 목소리는, 그보다는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다는 다짐.

눈과 얼음의 마녀가 저주를 내린다.

어린 별지기는 침묵했다.

.

.

.

"레제릿타가 마녀님의 분노를 살 만한 짓을 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열석에 끈을 꿰어 외투를 장식하던 손도 계속 움직였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못 들었나, 하고 다시 한번 말을 걸어 볼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소브 이제베는 19년간 어머니의 아들이었다. 실라일란은 듣지 못한 게 아니라 대답을 고르는 중임을 알았다.

"글쎄,"

이소브의 장로가 대꾸했다.

"가능하겠니? 뵐 수도 없는 분인데."

눈과 얼음의 땅은 두 주인이 다스린다. 마법사는 제 백성을 사랑하여 여러 축복을 내렸으며, 정기적인 마을 집회에도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마녀는 달랐다. 눈과 얼음의 땅에,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마을에 그녀의 손길이 닿은 곳은 없었다. 거주민을 만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하다못해 어디에 거하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우두머리 장로에게는 마을 집회 날, 마법사와 독대할 자격이 있다. 언제인가 실라일란은 마법사에게 마녀의 행방을 물어보았다. 마법사는 알아듣기 힘든 말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이에 젊은 우두머리 장로는 마녀가 실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무언가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그저 하나의 관념 덩어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불경한 가설을 아무에게도 말한 적은 없었다. 그랬기에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확고해졌다. 이제 그녀는 종종 설원의 지배자가 둘이라는 사실도 잊었다.

"…그렇겠지요."

이제베가 우물거렸다. 실라일란이 무심하게 물었다.

"별님이 무슨 말씀이라도 하시더냐?"

"아니… 아니에요. 그냥 해 본 소리에요. 어머니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그리고 실라일란은 그렇게 했다. 

이제베는 한참을 근처에서 머뭇거리다가 별터로 돌아왔다. 슬슬 해가 지고 있었다. 이제베는 습관처럼 광석의 덮개를 벗기다가 손을 뗐다. 일렁이는 광석의 빛을 뚫고 별을 찾아내는 것에는 아직 익숙지 않았다. 단순히 듣기라면 할 수 있지만, 혼란스러운 사이에서 말을 건네기는 조금 어려웠다. 

작은 열석 하나의 온기에만 의지해 추위를 견디면서, 어린 별지기는 해가 온전히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세상에 어둠이 깔리고, 침묵이 담요처럼 별터를 뒤덮었다. 이제베는 열석을 가볍게 쥐었다 내려놓았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더듬어 별의 자취를 쫓았다.

별님.

엄밀히 말하면 달에게 물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레제릿타를 향한 저주는 마녀의 것이니까. 가슴 한켠에 자리한 거슬림을 이제베는 애써 밀어냈다. 실은 조금 두려웠다. 마을 처녀들의 명랑한 소리보다 한층 높고 찢어지는 울림이, 그 목소리를 가지고 진심으로 누군가의 불행을 기원하는 마음이.

제 누이가 마녀님께 무슨 죄를 저질렀나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제베는 눈을 감았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는 별을 보았으나 별은 어린 별지기를 마주보지 않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이제베는 더듬더듬 바닥을 짚어 열석을 주웠다. 다시 눈을 열어 하늘을 향하기가 겁이 났다.

이대로 눈을 감고 집까지 걸어갈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참 하다 이제베가 겨우 눈꺼풀을 밀어올렸을 때였다. 

왜 그 남자를 찾지?

이소브의 어린 별지기를 내려다보던 것은 그날 밤처럼 유달리 밝은 달.

눈과 얼음의 마녀가 물었다.

내가 못미더운가?

아닙니다…. 저는 그냥.

더듬더듬 대답하면서 살짝 안도했다. 오늘밤 달의 목소리에는 레제릿타를 향한 날카로운 기쁨이 묻어나지 않았다. 이에 용기를 얻어 이제베는 조심스레 질문했다.

제 누이… 이소브의 레제릿타가 혹시 달님께 무슨 무례라도 저질렀나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달님…?

그런데 너도 그 남자가 어울리는 짝이 아니란 걸 알고 있지 않니?

동문서답이었다.

그러나 차마 부정할 수 없어 이제베는 입을 다물었다.

뭐라도 이어질까 잠시 기다렸지만, 달은 할 말이 끝났다는 듯 몸을 돌렸다. 여느 별보다도 희미해지는 존재감을 이제베는 가만히 응시했다.

능력이 뛰어난 별지기는 가끔 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들리지 않는 마음을 듣는다.

마침내 구했어.

달이 날카롭게 기뻐했다.

그 여자를 통해 내 소원이 이루어질 거야!

어린 별지기는 이번에도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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