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찬가

7

젊은 과부, 살인자, 부정한 여자

이우는 밤 by 떨레
10
0
0

눈과 얼음의 마녀가 말했다.

저 애는 불행해질 거야!

싸늘한 예언은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졌다. 킨델라가 참여할 수 있는 첫 번째 마을 집회가 열리기도 전, 그러니까 채 해가 바뀌기도 전에 레제릿타는 이소브로 돌아왔다.

턱선에 겨우 닿게 짧았던 머리카락은 어깨를 넘는 길이까지 자라 있었다. 예쁘게 흐르던 윤기를 잃고 푸석푸석 상한 파란색이었다. 그것만으로 설명은 충분했기에 아무도 돌아온 까닭을 묻지 않았다. 짝의 마을로 가, 그 마을 별터에서 별의 의식을 치르면 외부인의 머리색은 마을의 상징으로 변한다. 연을 맺은 짝이 생명을 다하기 전까지는 원래의 빛깔을 되찾지 않는다. 

어머니의 집으로 들어가는 누이는 지쳐 보였다. 금이야 옥이야 곱게 길러진 이소브의 공주가 상처투성이로 되돌아왔다. 이제베는 킨델라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킨델라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언니를 시중들기 위해 뒤따라갔다.

덴델의 청년 - 레제릿타의 남편은 어느날 눈밭에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차라리 잘된 일이지요, 하고 레제릿타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소매를 걷어올려 팔에 난 흔적을 보였다. 거의 아물어 가는 멍 자국이었다. 이제베는 누이의 하얀 피부를, 그 위에 피어난 시퍼런 꽃잎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레제릿타가 옷자락을 내린 뒤에도 그 모양은 뇌리에 선명하게 남았다.

"그런…!"

어머니가 분노를 온전히 터뜨리기도 전에 레제릿타는 피곤하다는 듯 축객령을 내렸다.

"혼자 있을래요."

이소브 레제릿타는 어머니의 집에서 조용히 지냈다. 낮은 물론 별의 시간인 밤에도 좀처럼 모습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실라일란은 침묵했다. 킨델라의 첫 마을 집회에서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덴델 마을에 공식적으로 항의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제베는 영 못마땅했지만, 아무래도 누이가 바란 모양이라 말을 얹지는 못했다.

한 번의 마을 집회가 더 지나고, 킨델라가 남편을 데려오고, 그렇게 꽤 많은 것이 바뀌는 동안에도 그대로였다. 이소브 레제릿타. 마을 우두머리 장로의 딸, 별지기의 누이. 밤하늘로 짜낸 머리칼과 황금으로 빚은 눈동자를 가진, 눈과 얼음의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 온갖 화려한 수식어를 휘감았던 이소브의 공주는 그렇게 저무는 듯했다. 이소브의 주민들마저도 젊은 과부의 존재를 잊다시피 했다.

레제릿타가 다시 존재감을 드러낸 건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새벽부터 이상하게 떠들썩해서 이제베는 조금 이르게 별터에서 나왔다. 소란의 원인을 발견하기는 쉬웠다. 실라일란의 집앞 공터를 마을 사람이 가득 메웠기 때문이다. 이제베는 인파를 비집고 들어가 한가운데 선 길쭉한 인영을 보았다. 사내는 회색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주인 모를 속삭임이 이제베의 귓가에도 날아왔다.

"이방인이야."

이방인. 이제베는 남자의 모습을 빠르게 훑었다. 눈에 젖어 얼룩덜룩한 다 해져가는 신발. 무릎 바로 아래까지 길게 내려오는 겉옷은 곳곳에 꿰맨 흔적이 가득하다. 남자는 등에 짊어진 것을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무엇이 들었는지 뚱뚱한 가방에서는 꽤나 둔탁한 소리가 났다.

별님, 어제 경고하신 변수가 이 사람이었나요. 이제베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남자를 뜯어보기를 계속했다. 계속 올라가던 시선이 그의 뒤통수에 닿았다. 이방인- 다르게 말하면 어딘가의 추방자였다. 이제베는 사내의 머리를 가린 회색 후드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마을의 법칙을 어겨 머물 곳을 빼앗긴 사람들이다. 접촉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실라일란이 조금 늦게 문을 열고 등장했다.

"이방인이 함부로 발을 들일 곳이 아니오. 썩 나가시오."

사내가 부탁했다.

"눈폭풍이 오고 있소. 며칠간만 머물게 해 주시오."

"그것마저도 그대가 견뎌야 할 대가가 아니겠소?"

"이번 눈폭풍은 예사롭지가 않소."

실라일란은 흘긋 이제베를 쳐다보았다. 이제베는 탐탁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과 얼음의 땅에서 눈폭풍은 평범한 기상 현상이었으나, 별의 경고에 따르면 이번만큼은 조금 위험했다. 마법사가 가호하는 마을 안에서라면 괜찮겠지만, 피할 공간이 없는 이방인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었다.

장로의 눈에서 망설임을 읽었을까, 사내가 간청했다.

"폭풍이 사그라들면 바로 떠나겠소. 그동안만 부탁하오."

"…정체도 모르는 이를 마을에 들일 순 없지. 모자를 벗어 보시오."

사내가 천천히 손을 올렸다. 이제베는 회색 후드가 벗겨지는 순간 공터를 사로잡은 적막을 기억했다. 감히 떠올리건대 이제베는 그보다 아름다운 존재를 살면서 본 적이 없었다. 레제릿타가 인간의 차원이라면 사내는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였다. 돋아나는 태양이 이방인 특유의 하얀 머리카락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이고, 보라색 눈동자가 멋쩍게 실라일란을 향했다. 구름이 떠가는 소리마저 들릴 법한 정적에서, 그를 쳐다보기가 머쓱하여 이제베는 시선을 떨구었다.

"클레테에서 난 가란이오."

사내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나를 지키는 별의 가호에 대고 맹세하겠소. 이 눈폭풍만 지나면 바로 마을을 벗어날 것을 약속하오. 부디 자비를 베푸시오."

실라일란은 몸을 돌렸다.

"…그대의 별을 신뢰하지. 들어오시오."

모였던 사람이 이내 빠져나가고, 천천히 비어 가는 공터에 별지기는 홀로 남아 있었다. 새벽은 지나고 어느새 아침이다. 하늘에 떠오르는 저것은 분명 해인데 귓가에는 달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과 얼음의 마녀가 날카롭게 웃었다. 귀를 아무리 문지르고 막아 봐도 소름끼치는 깔깔거림은 떨어지지 않았다.

며칠 뒤 거대한 눈보라가 마을을 덮쳤다. 집 두 채가 무너졌지만 이외에 피해는 없었다. 

가란은 약속대로 폭풍이 잦아들 때에 맞추어 이소브를 떠났다.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이방인이 남기고 간 것이 하나 있었다.

레제릿타가 아이를 가졌다.

.

.

.

누구도 집을 나와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며칠간 마을을 휘감은 눈폭풍.

아름다운 이방인과 스물두 살의 젊은 과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로,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실라일란은 불같이 화를 냈지만 차마 아끼는 딸에게 손을 대지는 못했다. 상황이 못마땅한 것은 이제베도 마찬가지였으나, 어머니의 기세가 너무 센 탓에 곁에서 침묵만 지켰다.

비슷한 시기에 킨델라에게도 소식이 있어 얼마간은 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 일이 늘 그렇듯, 완벽한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 해서 귀마저 먼 것은 아니다. 레제릿타는 제게 쏟아지는 비난과 온갖 악의적인 소문을 묵묵히 견뎌냈다. 그러나 그녀가 입을 다물수록 질타는 커져만 갔다. 마을의 불만은 레제릿타의 출산일에 극에 달했다. 달에 그림자가 끼는, 그래서 마녀가 운다고도 하는 날이었다. 거기다 태어난 아기는 하필 쌍둥이이기까지. 불길함의 연속이었다.

혹자는 마을에 불운이 닥칠 징조라 속삭였다. 부정한 여자가 별의, 혹은 달의 분노를 불러왔으니 아이들과 함께 당장이라도 내다 버려야 한다고. 이제베는 동의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으로만이었다. 마을 별지기란 누구도 도전하지 못하도록 확고한 지위였으므로, 그가 나섰다면 그런 의혹은 쉽게 잠재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베는 이미 레제릿타를 향한 마녀의 저주를 들었다. 달이 정말 분노하지 않았는지, 그렇다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제베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용히, 자기의 책무를 다하는 것뿐이었다.

젊은 별지기는 별터로 돌아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과 얼음의 땅에 거하는 모든 주민은 태어나자마자 마법사의 축복을 받는다. 별지기는 별님을 대신하여 아기의 눈과 이마에 입맞추고 그를 향한 별의 가호를 새긴다. 이제베는 눈을 감았다. 아이들에게 내려올 별의 예언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눈과 얼음의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살 자격이 있다. 레제릿타의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바람이 달콤하게 별을 감싸고 돌았다. 부드러운 어루만짐에 맞추어 별이 반짝이는 노래를 불렀다. 밤하늘은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눈과 얼음의 땅 어디에 있든, 이제베가 하늘을 보고 눈을 감기만 하면 들을 수 있는 풍경이었다. 별지기는 번쩍 눈을 떴다. 하늘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

별님, 어째서, 어째서…. 질문에 답은 돌아오지 않고, 손은 추위에 곱아들기만 했다. 황급히 열석을 꺼내어 쥐며 이제베는 덜덜 몸을 떨었다. 왜 아무 말씀도 없으신 건가요.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그렇게 나를 보시나요. 이소브에 아이들이 태어났잖아요. 레제릿타- 내 누이가 분명 쌍둥이 남매를 낳았잖아요!

네 누이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처절한 절규를 별은 끝까지 무시했다. 아직 태 속에 있는, 그래서 이제베가 물어보지도 않은 킨델라의 아이나 축복했다. 다른 누이는요? 이제베는 비릿하게 입술에서 배어나오는 피 맛을 느꼈다. 어여쁜 레제릿타와 그의 사랑스러운 쌍둥이는요. 

레제릿타의 부정함이 정말 별님의 분노를 산 건가요?

그렇,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제베는 레제릿타를, 소중한 누이와 그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했다. 마을 밖으로 내쫓아야 할까. 어느 날 마을에 찾아온 그 아름다운 이방인처럼, 눈과 얼음의 땅을 평생토록 떠들도록…. 이제베는 마법사가 제 주민에게 분노했다는 이야기를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눈과 얼음의 마법사는 일종의 관조(觀照)자였고, 사람을 개개의 인격체로 보기보다는 '영지민'이라는 큰 분류로 뭉뚱그려 사랑했다. 추방이라는 처벌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그 기준은 어디까지나 마을의 자유였다.

혼란스러움에 비참하게 눈물 흘리는 어린 별지기를 향해, 별을 대신하여 대답한 건 달이었다.

별은 축복하지 않을 거야.

눈과 얼음의 마녀가 저주를 내린다.

저 아이들은 내 거야.

이제 눈밭에 가져다 버려.

어린 별지기는 침묵했다.

.

.

.

별의 축복은 오지 않았다.

별지기는 그렇게 말했다.

아이들은 저주받았고, 구십구 일째 되는 날 추방될 것이다.

구십구 일. 가장 신성한 수인 아홉이 두 번 겹쳐진 날. 마녀가 허락한 최대한의 유예였다. 그 수를 곱씹으며 별지기는 선언했다. 

그리하여 마을은 재앙에서 안전할 것이다.

이제베는 가죽끈을 엮어 만든 팔찌에 아이들의 이름을 적었다. 누이는 바쟈, 동생은 바루. 마을의 이름은 붙지 않았다. 추방자에게는 원래 돌아갈 자리 따위는 없다.

뽀얗고 통통한 손목에 채워지는 팔찌는 꼭 족쇄 같았다. 두터운 강보에 싸이는 동안 아기들은 조금도 울지 않았다. 레제릿타를, 이제베를, 그리고 이제베는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꼭 닮은 황금빛 눈동자로 별지기를 빤히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게 너무 비현실적이라 이제베는 오히려 제가 울고 싶었다. 아기들을 강보에 싸서 안고 홀로 마을을 벗어나면서, 정말 하나도 울지 않았다고는 자부할 수 없다.

종아리까지 쌓인 눈에 발을 디딜 때마다 가죽 신발 사이로 눈이 스며들었다. 발에 닿는 시리고 축축한 기분이 이상했다. 진짜 원인은 사실 그것이 아님을 이제베는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치졸한 핑계일 뿐이다. 레제릿타의 비명이, 차라리 자기를 내버리되 아이들만큼은 마을에 두라 울부짖던 처절한 울음소리가 귓가를 하염없이 맴돌았다. 자식을 둔 여인들은 덩달아 눈물을 훔치고, 가장 강인한 사내마저 고개를 돌리게 하는 그런 소리였다. 

사람이 그리도 섧게 울 수 있구나. 찢어지도록 제 옷자락을 부여잡은 누이의 손을 조심스레 떼어내면서, 이제베는 제 심장도 같이 뜯겨져 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별지기는, 하늘의 운명에 매인 자로서 감히 이를 거역할 수 없다.

이제베는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눈밭을 파헤쳤다. 드러난 흙바닥에 강보를 내려놓고, 바람이 조금이나마 덜 스미도록 꼼꼼하게 천자락을 가다듬었다. 그때 쥐 죽은 듯 잠을 자던 아기가 번쩍 눈을 떠 이제베를 올려다보았다. 목수건의 자수 모양을 보아 누이 쪽이다. 황금빛 눈동자가 굴러가는 동안, 이제베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영혼까지 꿰뚫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다. 이제베는 눈을 감고 가볍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무래도 너무 긴장한 모양이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아기는 도로 잠들어 있었다. 젊은 별지기는 하던 일을 급하게 마무리하고 쫓기듯 자리를 떴다.

한동안 악몽을 꾸겠구나.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