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탈 라그너

1차 연성

라그너는 약 48시간동안 기숙사에 대신 살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왜?”

“그냥.”

평소 라그너였다면 납득하지 않았을 정도로 하찮은 이유였지만, 지난 48시간 일상이 무료했던 그의 흥미를 이끄는 데는 성공했다.

“그래.”

“언제부터 가면 되는 거냐고 묻지는 않는 거야?”

“응.”

그는 깊게 생각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모든 건 이유가 있다고 믿었고, 깊게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일어나는 고통을 종종 이유없이 받아들일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마조히스트가 아닐지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동기들과 ‘탐구하는 시간’을 가질 때는 자신의 문제만 쏙 뺐으면서.

그렇게 스카디의 방에 살게 된 라그너는 앞으로 리셋될 ‘48시간 동안 받을 자극’ 중 이 경험이 가장 기억에 남을 거라고 생각했다.

*

“젠장.”

스카디의 락 오디션을 같이 보러간 게 화근이었다.

라그너는 절대로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카디가 너무 애걸복걸하는 바람에(그는 스카디를 싫어하지만, 애걸복걸하는 사람들에게 약했다) 어쩌다 오게 되었다.

그 어쩌다 오게 된 걸로 끝났다면 다행이었지만, 어느 새 그는 피아노 앞에 서 있었다.

“네가 아는 걸 해, 라그너.”

멀리서 스카디가 웃었다. 정말 루살카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혹스런 자신을 보려는 스카디의 계략인 걸까? 이 또한 그의 계략이라면 기꺼이 당해줄 마음이 있었다. 싫어하는 건 예고 없는 장난질이었으니까.

심사위원(그들이 소포모어라도, 라그너 보다는 한참 어렸다. 우리는 그가 28세라는 걸 잊어선 안된다.) 중 한명은 라그너를 보며 하품을 했다. 그거면 다행이었다. 옆에 있는 남자는 랩을 하고 있었으니까. ‘요즘 젊은이란 정말 집중력이 없어.’라고 손에 난 땀을 닦을 시간을 갖는 라그너 스스로가 모순적이라는 걸 잊은 채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띵-

“다시.”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뭘 다시하라는 건지. 라그너는 그나마 영혼이 남아있는 심사위원에게 말했다.

“아직 시작하지 않았는데.”

그러자 붉은머리가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하라고.”

퉁명스런 말에 인상을 찡그렸지만, 그는 심사위원의 말대로 다시 건반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멀리서 스카디가 보고 있다. 스카디가 인스턴트 필름 카메라를 들고 있다. 이 순간들도 언젠가는 없어질 시간선의 점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니 피아노를 쳐야 한다.

그리고 다시 건반을 쳤다.

포르테, 스무스. 스무디가 아닌 스무스. 스카디가 좋아하는 아보카디, 아니지. 아보카도 스무디.

다시 포르티, 아니

포르테.

포르테 스무스.

피아노 포르테……

“그만.”

라그너는 어릴 적 가문의 인장을 훔치다 들킨 아이처럼 멈췄다.

“이제 돌아가도 돼.”

스카디가 멀리서 뛰어왔다. 잘했어! 특유의 높은 목소리는 라그너가 좋아하지 않는 걸 뻔히 알고도 내는 피치일 것이었다. 그럼에도 라그너는 스카디에게 말했다.

“너도.”

그는 스카디가 보상 삼아 사준 딸기롤케이크를 먹지 않았고, ‘이게 너무 맛있는데 넌 뭘 하는 거야?’라고 옆에서 중얼거리는 스카디를 무시한 채 잠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합격했다는 소식으로 눈을 떠야했다.

“안 가.”

“왜! 가야해!”

“난 이곳 학생도 아니잖아. 오디션도 애초에 봐선 안되는 거였다고.”

그럼에도 그는 스카디 전매특허의 ‘불쌍한 오리’표정을 거부할 수 없었다. 젠장 젠장-거리면서도 이번에는 어떤 골칫거리가 그를 힘들게 할지 상상하며 스카디 옆을 걸었다.

“정말 좋은 사람들일 거야.”

‘너한테나 그러겠지. 나는 아냐.’

라그너는 48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독특한 사건들 중 상위권으로 남을 지라도, 48시간이 지나는 순간 그는 흥미를 잃었으니까.

스카디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스카디 또한 만나지 않는 이상 똑같을 것이었다.

다만 아직도 그가 라그너의 인생에 난입하는 건 라그너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어항속에서 전기채를 넣은 어른들이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 줄 거란다.”라고 말했건만, 스카디만큼은 라그너의 전기채로 남아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이건 절대 좋은 감정이 아닐 거란 느낌도 들었다.

‘얘기할 거리가 생겼군.’

라그너는 내일 참여할 ‘탐구하는 시간’모임이 기다려졌다. 어차피 내일이면 이 빌어먹을 소포모어들도 잊어버릴 것이었고, 그는 자신이 가졌던 어제의 긴장감도 심연으로 꺼질 거라는 것을 미리 슬퍼했다.

똑똑-

스카디가 문을 두드리자 어제 봤던 붉은 머리가 덜 제정신인 상태로 문을 열었다.

“왔네?”

“응.”

그 붉은 머리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기에 스카디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그에게 귓속말을 할 때 자신이 너무 느끼했기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오해할 일은 하면 안되니까.’

라그너는 핑크색 소파 위에 앉았다.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을 잘못먹었다 토한 색임에도, 인조털에서 윤기가 흘렀기에 나름 만족했다.

빨간머리(그를 B라고 부르기로 했다)는 시도때도 없이 음악얘기를 할 것같은 얼굴로

“사양말고 이거 받아.”라며 루트 비어 하나를 건넸고, 라그너는 그 마음이 고맙지도 않다는 말을 삼킨 채 뚜껑이 열린 루트비어를 들었다. 마시지는 않았지만.

그는 언제쯤 남은 23시간이 끝날까 하고 시계를 보며 ‘23시간이나 남았다니.’라고 자해적인 실망을 했고, 남은 23시간 중 8시간을 그의 얘기를 듣는 데 쓰며 스테인드 글래스가 오렌지색으로 물들어질 무렵 ‘스카디의 말대로 넌 잘 들어주네.’라는 빈말을 얻는 데 성공했다.

“내일 7시에 첫 공연을 할 거야. 시간 맞춰서 와.”

쾅-

제말만 하고 문을 닫은 블루베리가(라그너가 좋아하는 과일이다) 서운하지 않았던 라그너는 스카디에게 “네 말대로 좋은 사람이네.”하고 블루베리에게 할법할 얘기를 했다.

그때 스카디가 말했다.

“저 사람이 내 친구를 죽였어.”

저 사람이 내 친구를 죽였어.

저사람이 내친 구를 죽였어.

저사 람 이내 친구 를…젠장.

뭐가 됐던 뒤에 세음절은 제대로 들어버린 라그너는 스카디의 얼굴을 살폈다.

‘똑같아.’

누군가 ‘저 사람이 내 바지를 훔쳤어!’라고 소리쳐도 ‘제가요?’라고 말할 얼굴이었다.

스카디는 라그너의 반응을 시험하는 걸까?

지난 48시간동안 그가 덜 재밌었다고 판단하여, 그를 놀래키려는 걸까?

‘폭탄같은 말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네. 미어캣같은 표정으로 하이에나를 따라하려는 거지.

너무 식상하네, 스카디.’

그렇다고 농담이라고 말하면 스카디가 뛰어내릴 것 같았다.

‘어쩌지?’

그를 몇 번이나 방금 전 상황을 시뮬레이션하게 만든 스카디에게 침착하게 말했다.

“발할라로 간 친구는 어떻대?”

갑자기 푸핫!하는 소리와 함께 스카디가 웃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를 보며 나름 안심한 라그너는 잘 대처한 것 같다는 자부심이 들었기에, “발키리가 된 거야?”와 같은 말을 덭붙였다.

그러자 스카디가 한 술 더떠서 “응, 아니. 신발 사이즈가 안맞아서 신발가게를 차려버렸어.”라는 말을 했고, 라그너는 내일 참가할 ‘탐구하기 모임’에 스카디를 소개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즐겁게 펍에 갔다.

몇 백번 갔어도 새롭게 느껴지는 보라색 펍에, 체리를 띄운 이상한 메론 소다를 마시는 스카디. 그리고 그 옆에 찜찜한 기분이 드는 라그너가 고민하고 있다.

자신의 불안이 48시간이 다 끝나간다는 아쉬움에서 온 건지, 스카디가 자신에게 일부러 져줬다는 느낌 때문인지 알 수 없던 그는 빨간 머리가 준 루트 비어를 끝까지 안마셨던 절제력으로 레몬 진저 비어를 마셨다.

그리고 다음 날.

블루베리 밭에서 뒹군 흔적과 새벽을 맞이한 라그너가 생각했다.

‘블루베리도 밟으면 붉은 색이군.’

그의 손에는 베이지 않도록 휴지에 감긴 루트 비어 병 조각에 ‘네가 아는 걸 해, 라그너.’라고 쓰여 있었고, 자신의 손바닥에 미어캣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똑똑-

똑똑-

똑똑-.

같은 리듬으로 몇번이고 두드리는 불청객에 대충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문을 열고 건들거리는 말투로

“7시 공연이야.”라고 말한 라그너는

불청객이 의심할 수 없이 아쉬운 목소리로 “이상하네. 분명 이시간에 한다고 했는데.”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스카디의 의도를 잊었을 것이었다.

그는 “잠깐만요.”하고 점잖은 말투로 불청객 앞에서 수건을 풀었고, 곧이어 둔탁한 소리가 시원스럽지 않게 들렸다.

입술이 터진 라그너가 ‘이미 모임이 시작했겠군.’하고 생각했을 때, 불청객이 떨군 물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전기채였다. 어항이 그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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