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버린 스틱스에 맹세컨대

2. 유령

“코라?“


오르피아의 목소리였다. 그의 눈가는 약간 빨갰다. 내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자 그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뭐가 웃겨?“

”당신 머리카락. 구름이 파먹힌 모양새야.“


그가 잠깐 사라지더니 청동 손거울을 가져왔다. 나는 거울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머리가 사방으로 부풀어 있었다. 평소의 두 배였다. 곱슬이 심한 머리여서 가끔 아침에 일어나 보면 이렇게 되곤 했다. 정리하기도 여간 오래 걸리는 것이 아닌지라 혼자 있을 땐 귀찮음에 못 이겨 머리를 감을 때까지 종일 이 꼴로 지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 두 명, 아니 사람 하나와 신 하나가 있는지라 이 꼴로 다닐 순 없는 노릇이었다. 


”사랑스러워.“

”욕 듣기 전에 입 닫아.“

”머리 정리해 줄까?“

”네가? 이상한 짓만 안 하면야.”


곧 오르피아가 머리에 바르는 기름이나 향유나 빗 따위를 들고 왔다. 그는 능숙한 손길로 내 머리카락을 빗어내렸고 순식간에 내 머리는 말도 안 되게 차분해졌다. 오르피아는 머리에 향유를 살짝 바르는 걸로 마무리했다. 신기하네, 어떻게 한 거지? 난 머리 정리에 매번 한 시간씩은 썼는데.


“솜씨가 좋네.”

”방법이 있지. 많이 해 봤어.”

“직접? 성에는 시녀가 없나?”

“있는데, 난 몸단장은 스스로 하는 편을 선호해.”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그의 손을 쳐냈다.


“어제 기분 안 좋아 보이던데.”

“응? ……괜찮아. 걱정해준 거야?”

“됐어.”

“기쁘게 받아들일게. 근데 있잖아, 머리 길이가 완전히 제멋대로던데. 관리 어떻게 해? 혼자서 자르기 힘들 텐데.”


나는 잠시 생각했다. ……안 하는데?


“안 하는데?”

“머리는 자를 거 아냐. 꽤 짧은데.”

“아, 그냥 한 번 묶고 칼로, 이렇게.”

“그래서 이 꼴로…….”

“날 사랑한다면서 내게 그런 말을 해?”

“난 객관적인 사람이야. 다듬어줄까?“

오르피아의 솜씨는 나쁘지 않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날 의자에 앉히고 상체에 천을 둘렀다. 그가 가위로 잔머리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넌 그냥 도망쳐서 이발사 같은 걸 해도 됐을 것 같은데. 아니면 귀족 나으리들의 시녀 노릇이라던가.“

“말했잖아. 꼭 당신을 만나야 했다고.”


슬슬 짜증나려는 찰나, 딱 맞게 소년 신이 등장했다. 그는 어제와 똑같은 차림이었다. 


“뭐하니?”

“코라 머리 정돈해주고 있는데. 너도?”

“가면 벗기 싫어.”


소년 신을 대하는 오르피아의 말투는 왜인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모로스 때문일까? 그가 모로스와 관계가 있고 소년 신이 모로스의 심복이라는 사실을 알아서……. 나도 타나토스와 관계가 있으니……아주 헛된 발상은 아니었다. 오르피아가 내 머리를 다 자르자 소년 신이 오, 하는 소리를 냈다.


“이제 좀 낫네. 역시 손재주가 있구나. 그럴 거라 예측했거든.”

“이게 이제 나은 거면, 이전에는?

”가끔 지켜보면서 차라리 미는 게 낫지 않나 생각했단다.“


나는 욕을 내뱉으려다 그의 이름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도 옛날의 나처럼 이름이 없다는 것을.


”잠깐, 내가 널 뭐라 불러야 하지?“

”난 이름이 없어. 그냥 네가 어젯밤에 내게 그랬던 것처럼 염소대가리라고 부르지 그러니?“

”그건……아냐. 사람에게는-넌 사람 아니지. 아무튼, 난 네게 이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내가 지어 줄까? 내가 또 작명에는 일가견이 있거든.“


갑자기 오르피아가 끼어들었다. 소년 신은 오르피아를 잠시 바라보더니 승낙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렴.“

”네가 모로스의 하위 신이었으니, 비슷한 이름이 적당하겠지. 모리, 모르, 모리안, 마우린, 마우리스……마우리스는 어때?“

”마우리스……어감 나쁘지 않아.“


소년 신이 약간은 들뜬 어투로 말했다. 제 입으로 작명에 일가견이 있다고 말한 것 치곤 즉석에서 만들어낸 티가 역력한 이름이긴 했다. 너무 빨리 결정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본인이 좋다고 하니 굳이 개입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 그럼 마우리스로.“


*


그 후 아침을 먹고 마우리스는 빗자루를 만들어내 신전을 청소하게 했다. 나는 저절로 움직이는 빗자루의 떼를 바라보다 서재로 향해 몇 번 읽은 적이 있는 신들의 계보가 담긴 책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계보에서 모로스라는 이름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밤의 자식들이 적혀 있는 페이지를 찾아보던 중에 오르피아가 내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뭐해? ……그 농부가 쓴 책이네. 이런 게 다 있고, 별나.“

”그러게. 생각해 보니, 이 많은 책들을 다 모은 게 신기해. 마우리스가 했겠지?“

”아마도. 당신은 다 읽었어?“

”워낙 많아서. 그래도 열에 일곱은?“

”그 정도도 훌륭한걸. 책들은 주로 무엇을 다루고 있어? 다 오래되어 보이는데.“

“다 똑같던걸. 작가나 판본이 다르거나, 서사시나 비극, 희극이나……아무튼 종류는 달라도 다 헬라스 신화와 역사 얘기야. 덕분에 신화에는 도가 텄지.”

“……당신 모로스에 대해선 몰랐잖아. 다 읽은 것이 맞아?“

”그 얘기 하려고 했는데. 없어서. 모로스가 그 신화에만 나오는 신이야?“

”아니, 비중이 적긴 한데……. 웬만한 계보에는 닉스의 아들로 나와. 거기 없어? 아니면 다른 이름으로 찾아본 적 있어? 이를테면 올레트로스라던가.“

”없던데.“


오르피아가 잽싸게 내 책을 뺏어 페이지를 뒤졌다. 그는 나와 정확히 똑같은 페이지에서 멈췄다.


”코라, 이것 봐. ……여기 지워진 흔적이 있는데.“


그 말을 듣고 나는 양피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신경쓰지 않아서 몰랐는데 덧대어 고친 흔적이 있었다.


“……당신, 정말로 그 어떤 책에서도 모로스의 이름을 발견하지 못했어?”

“응.”

“마우리스, 이리 와 보겠어?”


그가 낮게 깔린 권위적인 목소리로 마우리스의 이름을 불렀다. 귀족적인……아니, 그보다 더 오만한 어투였다. 그런 목소리는 처음 들었다.


“여기 있는데, 왜?”


마우리스가 공중에 뜬 채로 새까만 깃털 날개를 펼치고 나타났다. 오르피아는 여전히 오만한 어투를 버리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


“이 책들, 네가 모은 거지. 일종의 도서관인 거야. ……보존용이겠지. 신들이 잊혀지는 것을 막기 위한. 맞아?“

“눈치가 좋구나. 그런데?”

“그런데 왜 네 주인에 대한 내용이 없지? 신들의 계보에서도 고친 흔적이 있던데. ……의도적으로 모로스의 이름만을 가린 책을 구했다는 것이거나, 네가 지웠거나. 코라는 모르겠지만 나는 원래 내용을 알아. 네 주인인데 그에 대한 자료만을 모으지 않고 있는 자료도 지웠다고? 주인에게 반감이라도 있었나? 그가 없어지길 바랐고?“


마우리스가 잠시 말이 없더니 입을 열었다.


“다른 걸 모으다 보니.”

“나라면 제 주인을 우선시했을 텐데-그것도 행방불명인 신을. 그에게 반감이 있었나 봐?”

“…….”


분위기가 싸했다. 나는 둘을 가만히 지켜보다 아무 생각 없이 말을 꺼냈다.


“그게 뭐 별일이라고. 그럼 지금이라도 뭐 하나 만들지 그래?”


오르피아와 마우리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둘 다 그 신의 이야기를 안다면서?”

”……그래, 나쁘지 않겠네.“


오르피아가 그렇게 말하자 마우리스가 잠시 오르피아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사라져, 양피지 뭉치를 들고 왔다. 오르피아는 서재의 테이블에 종이를 쭉 펼쳐놓고는 내게 깃펜을 내밀었다.


“내가? 네가 하지 그래.”

“당신이 나을 것 같아서.”


마우리스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나는 애매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깃펜을 잡았고, 마우리스와 오르피아가 하는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다시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신이 어떻게 태어났고, 어떤 삶을 살았으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일부는 내 주관을 써 넣기도 했다. 


“모로스의 외모가 어땠었어?”

“제 어미를 쏙 빼닮았지. 그을린 피부에 검은 머리, 금색 눈. 머리를 하나로 땋고 다녔고 깃털 날개를 가지고 있었어-대부분의 밤의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잘 아네? 만나보기라도 했나 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래?“


누가 봐도 대화를 돌리려는 시도가 훤히 보였지만 거진 몇 시간 내내 종이를 들여다보고-나는 안 그래도 눈이 그리 좋지 않은 편이었다-있었으므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우리스는 양피지를 정리하면서 우리 둘 보고 바람이나 쐬러 가라고 했다. 명백한 축객령이었기에 나는 오르피아를 데리고 신전 바깥의 숲으로 나왔다.


”모로스에 대해 어떻게 그리 자세히 알아? 생각해 보니, 너도 그에게 번제를 바쳐 들어왔다고 했었지.“

”……당신의 스승만 교단의 일원이었던 건 아냐. 교단의 도망자들이 퍼트리는 것일까, 오래된 신들에 대한 소문은 가끔씩 인세를 떠돌곤 하지. 나는 그런 미신들에……꽤 관심이 많거든.“


문득 오르피아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지만 따져 물어도 변하지 않으리라 싶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저 소녀는 얼마나 많은 비밀을 숨기며 날 기만하고 있는 걸까? 살짝 짜증이 났다. 그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당연하지-만난 지 며칠도 되지 않은 남이었으니까. 단지 내 마음대로 그가 움직여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 모르겠다. 


”너는 그 이상을 내게 말해주지 않을 생각이지.“

“……그래. 하지만,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거야. 내가 누구고, 뭘 숨기고 있고, 그런 것들.”

“네가 누군데?”

“……나중에. 들어갈래, 코라? 바람이 차다.”

“……그래.”


그는 진실을 알려주지 않을 것 같았기에 나는 그냥 포기하고 그를 따라 들어가기로 했다. 나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이상하게도 그곳에는 희끄무레한 하얀 형체가 공중에 떠 있었다. 눈에 뭐가 들어갔나 싶어 눈을 비볐는데도 그 형체는 계속 그곳에 있었다.


-그에게 좀 더 친절하게 대해줘. 얼마 없을 추억이니까.

“……뭐?”


그것으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묘하게 왜곡된 목소리여서 그게 노인의 것인지 청년의 것인지, 남자의 것인지 여자의 것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그 말을 끝으로 형체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


왜곡된 목소리였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친절하게 대하라고? 누굴? 되묻기도 전에 그 형체는 사라졌다. 잠시 이걸 다른 누구에게 말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럴 필요도 없다 싶어 넘어가기로 했다. 

손을 만지작거리다 문득 반지를 빼놓았다는 게 생각났다. 주머니를 뒤져 타나토스의 반지와 오르피아가 준 것을 나란히 손가락에 꼈다. 문득 타나토스가 생각났다. 그도 밤의 아들이란 사실도. 

마우리스는 그를 알까? 자기 주인의 형제……같은 관계니까, 어쩌면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신전으로 들어가 그에게 타나토스를 아냐고 물었다.


“아, 그 머저리……아.”


마우리스가 턱을 괴고 아무 생각 없이 말하다가, 문득 놀란 듯 제 입을 손으로 가렸다. 오르피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머저리라고……너보다 한참 윗 세대의 오래된 신을 두고 보통 그런 표현을 쓰나?”

“……그렇지만 반은 맞잖아! 인간에게 두 번이나 패배한. 심지어 한 번은 납치였고. 인간에게 납치당하는 신이 또 어디 있어?”

“왜, 아레스도 납치당했었지?”

“적어도 알로아다이 쌍둥이는 반신이었잖아.“


마우리스가 항변했다. 타나토스의 납치라 함은 시시포스의 일을 말하는 거겠지. 이곳 서재에서 타나토스에 관한 문헌을 찾아보기 전까지는 몰랐다. 당연히 그가 내게 말해주었을 리 없으니.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면 물어볼까 싶었다. ……화를 낼까?


“그래서, 그를 만나 봤어?”

“만났다라……몇 번 보긴 했지. 최근에도 가끔 돌아다니는 걸 봤는데, 바쁜 신이니까-사신이고, 밤의 대행자이고, 가끔은 제우스의 명령에 따라 인간들을 벌주러 다니지. 그는 유능해. 애초에 인간들에게 패했다는 신화도, 그가 인간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니 만들어진 게 아니겠니?

요즘은 잘 지내나 모르겠네. 유명한 신이니 살아는 있겠지. 그를 알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릴 때부터……돌봐줬었어.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마우리스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금빛 안광이 흔들리는 듯 했다.


”……그가? 아니, 설마……. 그 애 때문에…….“

”그 애라니?“

”그게…….“


마우리스는 망설이다 내 재촉에 겨우 입을 열었다.


”타나토스에게는 인간 딸이 있었어.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그가 워낙 여성에게 무관심한지라 알음알음 그가 사실은 남색가라거나 혹은 아예 불능이라는 소문이 돌았거든. 그런데 어느 날 타나토스와 같이 다니는 여자가 생긴 거야. 처음에는 연인이려나 생각했는데, 그가 친딸이라고 했었어.“


오르피아는 턱을 괴고 계속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딸?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분명 그는 아내도 자식도 없다고 했는데. 거짓이었나?


“그리고 그 딸이……. 너처럼 백발이었어. 타나토스는 흑발이잖아. 그래서 정말로 딸이 맞냐고 다들 의심했는데. 백발을 가진 동생인 휘프노스의 사생아가 아니냐고. 나도 그의 딸을 직접 본 적은 없는데, 엄청 작고 말랐댔어. 그래서, 문득 네가…….“

”닮았다고 생각한 거지. 내가 그와 연이 있었다면, 그가 나를…….“

”……그래. 그가 널 그의 딸과 겹쳐본 거라고.“

”그 딸은 지금 어떻게 됐어? 인간이랬으니 죽었나?”

“아무도 몰라. 어느 날 행방불명됐어. 세상에서 지워진 것처럼. 타나토스는 딸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불태웠어. 그는 자신의 딸이 자신의 손을 떠나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갔다고 이야기했지. 신들은 다들 수군거렸어. 타나토스의 딸은 영혼까지 소멸해 버린 거라고-그래서 타나토스가 딸의 영혼을 인도할 수 없었던 거라고. 그가 딸을 잃은 후 한동안 일을 놓기까지 했거든. 혹시 그가 널 돌본 게…….“


마우리스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아니, 내가 듣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뛰쳐나갔으니까. 

나는 그에게 매달렸지만 그는 항상 선을 그었다. 그래, 딸이 있었다라. 진짜 피가 섞인 딸. 나와 닮았고. 어느 날 사라진. 내가 대체품이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완전히 그의 딸이 될 수 없어서, 그 사실을 알았던 걸까? 내가 착하고 얌전한 딸이 아니라서. 나약한 인간이어서. 이름조차 지어줄 가치도 없었던 걸까? 지금까지 그는-나를 ‘나’로 보지조차 않았던 걸까? 형편없는 애새끼. 마녀. 그리고 이름 모를 신의 딸. 나를 둘러싼 세계에서 나는 정녕 누구였던가.


“타나토스.”


나는 그의 이름을 짓씹듯이 내뱉었다.


“나와요,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잖아요.”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옷자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입술을 짓씹었다. 적어도 나타날 줄 알았다. 그를 보면 어렸을 때처럼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릴 작정이었다. 그럼 질려하려나. 하지만 반대로 그가 어릴 적처럼 날 안아주며 달래거나, 혹은 나타나지도 않으면 그게 더 짜증이 날 것 같았다. 그럼 나는 정말로 그가 나를 통해 누구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될 테니까.


”코라.“


오르피아의 목소리였다.


“당신 울어?”

“내가 울 리가. 들어갈게.”


나는 들어가려다 결국 반지를 챙겼다. 풀숲에 던져버릴 작정이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오르피아가 조용히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를 싫어하게 되었어? 그에게 딸이 있었고-당신과 닮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가 당신의 딸의 대용품으로 봤을 거란 가능성 때문에 말야?”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내 도피처였다. 나는 그를 보며 줄곧 안도했고 그를 생각하며 현실을 버텼다. 부모가 날 버리고, 오스만 놈들에게 끌려가 노예로 팔릴 때에도, 그가 날 구해주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희망에. 적어도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내가 살길 바랐다. 어쩌면 유일하게. 부모는 날 사랑하지 않았고 옐레나는 날 돈벌이 수단 혹은 장신구 정도로 생각했으니. 적어도 타나토스는 날 좋아하는 듯 보였고 조건 없는 호의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리 보였다. 하지만 그가 날 그렇게 대한 게 딸 때문이었다면-그랬다면-나는 그 누구에게조차 나로 존재하지 않는 셈이었다. 그게 날 화나게 했다. 그에게 따져 물어 그게 아니라는 답이 듣고 싶었다. 그럼에도 그는 나타나지 않아서 그것이 원망스러웠다.


“글쎄, 그럴지도 모르겠어. 그가 날 대용품으로 생각했다면 날 그 누구도-나는-”


오르피아가 날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코라, 당신은 당신 자체로 가치있어.”


타인 없이 어떻게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없는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물론 누군가가 나처럼 말한다면 나는 분명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겠지. 하지만 난 한평생 나로서 존재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살아왔는데. 그렇지 않단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그런 생각이 든다. 결국에는 내게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아, 그래. 그렇겠지. 너도 어차피 나를, 누군지 언제인지도 모르겠지만-네 안에 기억으로서 존재하는 나로 보는 게 아냐?”

“......그래,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내 앞에 존재하는 건 당신인걸. 내가 마주하고 있는 건 당신 그 자체고, 그리고......난 그런 당신도 사랑해. 이미 당신에 대해 알고 있지만, 내가 아는 당신이 당신의 전부가 아니라는 건 알아. 그래서......난 당신의 곁에 있고자 하는 거야-지금의 당신도 사랑하고자 하는 거야.”

“허울 좋은 말이구나.”

“어쩌면 그럴지도. 그래도 믿어줬으면 해.”


오르피아가 그렇게 말하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오르피아, 넌 나에 대해 대충은 알지. 언젠가의 나를 안다고 했으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타나토스에 대해서도 알아?”


어떻게 아냐고 물어볼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게 알고 싶은 게 아니었다.


“응.”

“그럼 그가 날 대용품으로 봤을 거라고 생각해?”

“아니, 글쎄……어쩌면. 하지만 코라, 그는 당신을 사랑했을 거야.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더라도 신들은 그리 멍청하지 않아. 분명히 어느 시점에서는 당신이 ……딸을 대체할 수 없단 사실을 깨달았을 테지. 난 그가 딸은 딸대로, 당신은 당신대로 사랑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 반지, 타나토스가 닉스에게서 받은 반지……그건 그가 그의 딸에게도 주지 않은 물건이야. 그걸 받은 건 당신이 처음이야.”

“정말로?”

“응. 타나토스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얼마나 충성스러운지는 모두가 알지. 그건 닉스가 성년인 타나토스에게 준 선물이었어. 소중한 이와 나눠 끼라고 주었던. 그 정도로 그에게 의미가 있는 물건이었던 거야.“

“…….”


그 말을 하는 오르피아는 마치 추억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문득,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다.


“……오르피아. 넌 신이야?”


오르피아가 날 바라보더니 옅게 웃었다.


“아니, 난……. 인간이야, 일단은. 당신도 어렸을 때 내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알잖아. 나는 소렌탈 남작의 막내딸 오르피아 소렌탈이야. 2월의 일곱 번째 날 한밤중에 영주의 네 번째 자식으로 태어났어. 안타까운 사실일까, 내 어머니는 신성한 태몽을 꾸지도 않았고 나는 알에서 태어나거나 날개를 달고 태어나지도 않았어. 내 피는 황금이 아니라 붉은색이야.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난 아무런 기적도 일으킬 수 없어. 내 결혼조차 어떻게 하지 못해서 도망나온 신세인걸.

어쩌면 당신은 내 말을 믿지 않겠지. 나에 대해 무언가가 더 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적어도 지금은, 이게 다야. 전부 사실이야.“

“지금은 말이지.”

“……지금은. 응.”

“나에 대해선 어떻게 알아? 미래에서 온, 그런 거야?”


오르피아가 그 말을 듣고 동그랗게 눈을 뜨더니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귀여운 추측인데, 내가 미래에서 오지는 않았어.”

“난 왜, 그런 건가 했지. 네가 내 미래의 연인이라던가, 음, 내가 더 늙어서 사랑을 할 것 같지는 않지만.”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야…….”


난 사랑을 모르니까. 제대로 사랑받지 못했으니까.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 스스로 뭔가를 고르고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왔어. 난 내가 누군지조차 몰라.


“난 텅 빈 인간이니까. 내가 사랑 같은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걸.”


그 말을 듣더니 오르피아가 살짝 몸을 낮춰, 날 가볍게 껴안고는 속삭였다. 


”그럴 리가, 코라. 당신은 스스로가 비어있다고 생각하겠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의미 없는 인간이라고……. 한때 당신이 내게 그렇게 말했으니까.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당신은 아름다워, 그 누구보다도. 당신의 내면은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어. 난 알아-그리고 언젠간 당신도 알게 될 거야.

그래서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찾아온 거야. 당신이 아름답다는 걸 알려주려고.”


그렇게 말하면서 오르피아는 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더니 입맞췄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한때 타나토스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언젠가는 그런 널 누군가 알아줄 거라고-그런 되도 않는 오글거리는 말을 했었지. 


“……이상한 소리 하지 마.”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가 이상하게 떨리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문득 나는 오르피아에게서 타나토스를 보았다. 둘은 하나부터 끝까지 닮은 점이 없었지만 비슷한 향이 났다. 왜 이걸 몰랐지? 새까맣고 조용한, 섬세하게 직조된 레이스로 된 베일이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듯한. 그래, 마치, 한밤중의 고요한, 하지만 두렵지 않고 편안한…….


”난 아직도 모르겠어. 날 왜 사랑해?“

“언젠가의 당신이 내게 아름다움을 보여줬거든. 그리고 말해줬거든-나도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그건……내가 절대 하지 않을 종류의 말 같은데.”

“아냐, 코라. 때가 되면 모든 게 바뀔 거야. 그때 당신은 알게 될 거야. ……그러니, 있잖아, 당신을 소중히 여겨줘. 당신의 삶을 살아줘. 언젠가 피어날 때까지. 언젠가 꽃이 될 때까지…….”

“오글거리는 소리 하지 말고 일단 이거 놔.” 


오르피아는 뜻밖에도 나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던 도중 얼마 전에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을 목소리. 하얀 형체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 서운해하지 마. 죽음이 그토록 아꼈던 인간은 너 하나뿐이었어, 코라. ……정말로.


죽음이라면 타나토스? ……뭐 어쩌라는 거야. 나는 형체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그냥 오르피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 둘이 들어오자 마우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화 끝났어?”

“응.”

“잘되었구나. 갑자기 나가길래 오르피아더러 가 보라고 했는데, 네 성질을 더 돋구지는 않을까 봐 걱정했지.”

“날 뭘로 보고……. 그나저나 타나토스와 그의 딸에 대해 더 이야기해 봐.“

“딸? ……그게 단데. 난 이름도 몰라. 그냥, 단지 그 여자가 신들 사이에서 죽음의 살아있는 딸이라는 우스운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 정도?”

“아까 타나토스가 밤의 대행자라고 했지. 그건 뭔 뜻이야?”


마우리스가 잠깐 멈칫하더니 대답했다.


“그거? 밤의 신 얘기야. 닉스, 그의 어머니. 타르타로스의 가장 깊은 곳에 사는 아주 오래된 신이라 인간세상에는 잘 모습을 보이지 않아. 주로 타나토스나 그의 쌍둥이 동생 휘프노스가 닉스의 의사를 전하는 전령 역할을 하곤 하지.”

“닉스라……. 제우스가 그를 두려워했단 게 사실이야?”


나는 일리아스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물었다. 제우스를 잠재우다 벌을 받게 생긴 휘프노스가 닉스에게 도망가서 목숨을 부지했다는 이야기.


“그렇긴 한데, 그의 핏줄들이 당한 일들을 생각하면……잿더미가 된 모로스나 추방당한 모모스와 아테,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에리스, 겁간당한 네메시스……. 어쩌면 밤의 핏줄들에 대한 견제의 일환이었을까. 그들은 대지의 혈통인 올림포스의 신들과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이방인이었거든. 뭐, 신들의 관계는 복잡하니.”

“제우스와 닉스가 꽤 친밀한 사이로 나오기도 해. 제우스가 닉스의 예언에 따라 세계를 재창조했단 오르페우스 교의 신화나…….“

”어쨌거나, 닉스에게 제우스를 무너뜨릴 만한 힘이 있는 건 아니었어. 그랬다면 올림포스는 모로스가 죽은 날 폐허로 전락했겠지. 하지만 닉스의 핏줄들은-타나토스도-그들의 시조인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닉스든 그의 핏줄들이든 충분히 제우스를 고단하게 만들기는 충분했어. 닉스와 동 세대인 가이아도 제 자손들을 이용해 올림포스를 두 번이나 무너뜨릴 뻔한 전적이 있으니, 경계한 것이었겠지.“

”흐음.“


나는 제우스와 닉스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다 문득 제우스의 왕좌가 굳건한지 궁금해졌다. 신화 시대는 끝난 지 오래 아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신들이 있으니……. 무언가 많이 바뀌었을 것 같은데.


”그 시대로부터 몇천 년은 더 지났잖아-제우스가 아직도 왕이야?“


마우리스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설마 그럴 리가. 끌어내려졌단다. 신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난 그 즈음에 지상에 있었던지라 자세한 내막은 모르는데……아무튼,  언젠가 무너져야 했던 게 무너진 거지.“

“……진짜?”


내가 놀라 묻자 오르피아가 끼어들었다.


“자세히 알려 들지 마. 지저분한 얘기거든.”

”넌 아나 봐?“

”아는데, 굳이 당신에게 들려줄 얘긴 아냐. 그나저나, 슬슬 식사 시간 되지 않았어? 아까 점심도 안 먹었잖아.“

”……그러고 보니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네.”

“응, 저녁 먹고 씻고 자는 게 좋겠어, 코라.”


그 말투가 마치 날 어린아이 취급하는 것 같아 짜증나면서도, 묘하게 안정되는 구석이 있어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한 주에서 두 주 사이? 대충 그 정도였으리라고 짐작한다-그 정도의 시간 동안, 갑자기 나타난 두 불청객은 이내 내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오르피아는 그 호들갑스러운 언행과 어울리지 않게 의외로 사생활을 존중할 줄 아는 성격이었고 아슬아슬할지언정 선을 넘는 법이 없었다. 마우리스는 나타나고 사라짐을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둘과 함께하는 삶은 혼자보다는 나았다. 혼자 있을 때 나는 이무것도 아니었다. 글쎄, 적어도 그렇게 느껴졌다.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세계에서 나의 존재는 그곳에 있든 없든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오르피아가, 마우리스가 나를 코라라고 부를 때 나는 비로소 존재함을 느꼈다.

오르피아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나라는 그 사실만으로 내가 좋다고 했었다. 그런 말들이......모르겠다. 내가 그토록 가치있는 존재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말에 안도하는 나 자신을 본다. 그의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단장에 신경쓰고, 할 말을 고르는 나의 모습을. 이 감정이 사랑은 아니다. 그럴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아니라면, 이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동안의 신전에서의 생활은 비슷했다. 둘과 한담을 나누고, 책을 읽거나 식사를 하고 잠을 자거나. 아, 나의 제안으로 시작된 모로스의 책을 만드는 일도 하고 있었다. 펜을 잡는 건 항상 나였다. 오르피아는 내 문장이 좋다고 했다.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쓰는 것뿐인데 거기에 어떠한 호오가 존재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재미있는 일이긴 했다. 양피지의 감촉은 내게 안정을 가져다준다. 글을 써내려갈 때 느끼는 펜의 소리나 잉크의 냄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로스의 책은 완성되었고 신전의 서재에 꽂혔다. 마우리스는 언젠가 나와 오르피아가, 혹은 그 후로도 신전에 방문하는 누군가가 보관된 이야기들을 세상에 전해주길 기다린다고 말했다. 신들이 모두 멸하기 전에 그들이 이야기를 통해 살아남도록. 그는 오르피아의 추측-자신이 신들을 위해 이야기를 모으고 있음-을 인정했다. 정확히는 제 소중한 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그는 내게 물었다. 언젠가 신전을 나가게 되면 내가 읽은 이야기들을 남에게 전해줄 수 있겠느냐고. 신들은 그들을 알아주는 사람이 생길 때마다 수명이 연장되는 셈이라 했다. 언젠가 나가게 될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 부탁하는 마우리스의 목소리가 어쩐지 간절하게 들렸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오르피아에게 이것저것들을 배우고 있다. 계기가 된 것은 오르피아가 내 기초 상식의 부재-나는 그것들이 기초 상식이라고 생각지 않지만-를 확인하면서였다. 그러니까, 그가 무엇을 지적했냐면, 나는 셈을 못한다. 숫자에 약하다-셀 수 있는 숫자도 구천구백구십구까지뿐이다. 그 다음에 무엇이 오는지 오르피아가 알려 주기 전까지 몰랐다.. 요리도 바느질도 빨래도 할 줄 모른다. 할 줄 알았던 것 같은데 잊어버렸다. 게을렀던 것은 아니다. 그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을 뿐이다. 문제가 되냐고 오르피아에게 묻자 그는 언젠가 신전을 떠나 홀로서야 할 때가 올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시간도 많으니 자신이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나쁜 제안은 아니었기에 나는 동의했다.

아무튼, 오르피아에게 수업을 받으면서 느낀 것이었는데 그는 상당히 박식하고, 가르침에도 능했다. 그는 내게 간단한 숫자 세기부터 사칙연산, 나아가 역사학, 라틴어, 천체학, 기초 과학까지 가르쳤는데 단순히 귀족이라서 배웠다고 가정하기에는 지식의 깊이가 남달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왕족조차 문맹이 수두룩했던 이 시대에 고작 시골 동네의 열몇살 소녀가, 아무리 귀족이라도, 그런 것을 알 수 있나? 한 번 따져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는 저절로 알게 된 것이라고만 답했다.


그리고. 유령. 정말 유령일까? 내 주위를 따라다니는 하얀 형상. 그것은 점차 사람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희끄무레한 구름 같던 그것은 이제는 매우 선명해져 그게 하얀 옷을 입은 키가 작은 소년-혹은 소녀?-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게 무엇인지 추측은 있지만 확신이 없다. 요즘 생각하는 것은 그게 타나토스의 죽은 딸이라는 가설이다. 죽은 그가 날 따라다닐 이유는 없는 것 같지만 나와 키가 비슷하고, 희끄무레하니까. 유령이 타나토스에 대해 말하기도 했고. 언니를 생각하기도 했지만 언니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르고 애초에 언니는 그 유령보다는 키가 컸으므로 그 가설은 기각되었다. 애초에 나는 인연이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도 않다, 신까지 합쳐도. 유령이 되어서까지 나를 쫓아올 누군가는 더더욱 없다. 

유령은 영문 모를 말들을 하곤 했다. 간단하게는 오르피아나 타나토스에 관한 얘기. 혹은 이상한 질문들. 이를테면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냐거나, 정신은 똑같지만 겉모습이 완전히 바뀐 누군가를 여전히 그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냐거나, 개인을 타인과 구분짓는 기준을 묻는다거나, 안온하고 지겨운 삶과 고통스럽지만 영광스러운 삶 중 무엇이 좋냐거나. 내게 그런 질문들을 해 오는 이유가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마우리스와 오르피아는 둘 다 유령을 알아채지 못하는 듯했다. 유령도 딱히 그들을 의식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굳이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게 있단 걸 증명하기에도 까다롭고 종알대는 것을 제외하면 그건 내게 어떠한 피해도 끼치지 않았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내가 유령에 대해 말을 꺼낸 건 순전히 충동이었다.


“신이 있다면 유령 같은 것도 있나?”

“응?”


오르피아는 내가 과제로 쓴 시를 봐주다가 고개를 들었다. 소파에 누워 있던 마우리스도. 유령은 신전 한구석에 쭈그려 앉아 있었는데 내가 그 말을 꺼내자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리는 것도 같았다-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서도.


“유령이라면 어떤 걸 말하는데?”

“말 그대로, 둥둥 떠다니고, 사람들한테 안 보이고, 죽었고, 그런.”


-나 죽은 거 아냐.


“......죽은 거 아니래.”

“뭔가 보이는 것이 있니?”


마우리스가 소파에서 일어나 내게 물었다. 나는 둘에게 유령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이 언제부터 보였고 어떻게 생겼는지, 내게 무슨 말을 하는지. 뜻밖에도 마우리스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기색이었는데 오르피아는 그렇지 않았다.


“당신에게만 보인다고, 그게.”

“응.”

“이상하구나, 신전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면 내가 알아차렸을 텐데.”

“내가 미쳤단 거야?”

“꼭 그런 것은 아니고.”

“코라, 당신은 미친 게 아니야. 환각이 아닐 거야. 그건-”


오르피아는 말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튼, 마우리스, 걱정할 필요 없어. 코라 당신도. -그는 유해하지 않을 거야.”


*


그날 밤, 잠에 들기 위해 침구를 펴고 있었는데 갑자기 오르피아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코라.”

“왜?”


내가 묻자 오르피아는 잠시 말이 없더니 입을 열었다.


“아까 유령이 당신에게 물었다고 했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냐는 질문. 혹은 고통스럽고 영광스러운 삶보다 차라리 안온하고 지겨운 삶을 살길 원하냐고. 그때 당신은 무어라고 답했어?”


그땐 딱히 대답하지 않았는데?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오르피아에게 대답했다.


“그땐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굳이 고르라면 자기보전 쪽이지. 난 남을 위해 쓸데없이 목숨을 내던지지 않아. 명예도 바라지 않아-죽으면 끝이잖아. 무엇이든 내 목숨엔 비하지 못해.”

“......그래, 그 마음이라면 되었어. 당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겨줘, 어떤 상황에서든.”


......문득, 그렇게 말하는 오르피아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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